[ 조회수 : 466 등록일 : 2022-01-15 ]
고려는 [1] 고종 19년(1232년)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최우의 권유로 도읍을 송도에서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로 옮겼다. 이때 옮겨진 도읍터가 고려궁지로 [2] 원종 11년(1270년)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8년간 사용되었다.
[3] 최우는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각 관청을 개경과 비슷하게 건립하였으며 뒤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여 왕도의 제도를 잊지 않으려 하였다고 한다. 궁의 정문 이름은 승평문(昇平門)이었고,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이후 대몽항쟁기 39년간 고려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몽골군과 화친이후 원종 11년(1270년)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에 여러 관청건물을 세웠다. [4] 광해군 14년(1622년)에 봉선전(태조 영정을 보안)을 건립하였으나 1636년 병자호란 시 강화성이 청나라 군에게 함락되는 등 여러차례 전랸을 겪으면서 궁궐과 성은 무너지고 소실되었다.
[5] 인조 9년(1631년)에는 행궁을 건립하였으며 인조 16년(1638년)에 유수부 동헌을 개수하여 [6] 효종 5년(1654년)에 유수부 이방청을 건립하였다.
[7] 숙종 21년(1695년) 장녕전, 숙종 39년(1713년) 만녕전이 차례로 세워져 조선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다.
[8] 정조 6년(1782년)황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을 건립하였으나 병인양요(1866)대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 안에 보관중이던 서적을 약탈해가고 건물은 불태워져 소실되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행궁, 유수부 건물과 함께 민가까지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다. 현재의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궁궐의 영역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래는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이었다.
1964년 고려 궁궐터는 사적 제133호 "고려궁지"로 지정되었고 1977년 복원정비되어 현재는 [9] 유수부 동헌, [10] 유수부 이방청, [11] 강화동종과 2003년 복원한 [12] 외규강각이 있다
[참고문헌 : 강화군시설관리공단 안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고종(1192년~1259년) : 고려의 제23대 국왕(재위: 1213년~1259년)
[2] 원종(1219년~1274년) : 고려의 제24대 국왕(재위: 1259년~1274년)
[3] 최우(1166년~1249년) : 고려 무신정권 시기의 2개 최씨정권(최충헌-최우-최항-최의)
[4] 광해군(1575년~1641년) : 조선의 제15대 국왕(재위: 1608년~1623년)
[5] 인조(1595년~1649년) : 조선의 제16대 국왕(재위: 1623년~1649년)
[6] 효종(1619년~1659년) : 조선의 제17대 국왕(재위: 1649년~1659년)
[7] 숙종(1661년~1720년) : 조선의 제19대 국왕(재위: 1674년~1720년)
[8] 정조(1752년~1800년) : 조선의 제22대 국왕(재위: 1776년~1800년)
[9] 유수부 동헌 :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
[10] 유수부 이방청 : 조선시대 6방(이,호,예,병,형,공)의 건물중 이방의 집무실
[11] 강화동종 : 강화산성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던 종. 강화산성 남문에 걸려있던 종
[12] 외규장각 : 조선 정조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
[3] 최우는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각 관청을 개경과 비슷하게 건립하였으며 뒤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여 왕도의 제도를 잊지 않으려 하였다고 한다. 궁의 정문 이름은 승평문(昇平門)이었고,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이후 대몽항쟁기 39년간 고려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몽골군과 화친이후 원종 11년(1270년)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에 여러 관청건물을 세웠다. [4] 광해군 14년(1622년)에 봉선전(태조 영정을 보안)을 건립하였으나 1636년 병자호란 시 강화성이 청나라 군에게 함락되는 등 여러차례 전랸을 겪으면서 궁궐과 성은 무너지고 소실되었다.
[5] 인조 9년(1631년)에는 행궁을 건립하였으며 인조 16년(1638년)에 유수부 동헌을 개수하여 [6] 효종 5년(1654년)에 유수부 이방청을 건립하였다.
[7] 숙종 21년(1695년) 장녕전, 숙종 39년(1713년) 만녕전이 차례로 세워져 조선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다.
[8] 정조 6년(1782년)황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을 건립하였으나 병인양요(1866)대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 안에 보관중이던 서적을 약탈해가고 건물은 불태워져 소실되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행궁, 유수부 건물과 함께 민가까지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다. 현재의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궁궐의 영역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래는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이었다.
1964년 고려 궁궐터는 사적 제133호 "고려궁지"로 지정되었고 1977년 복원정비되어 현재는 [9] 유수부 동헌, [10] 유수부 이방청, [11] 강화동종과 2003년 복원한 [12] 외규강각이 있다
[참고문헌 : 강화군시설관리공단 안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고종(1192년~1259년) : 고려의 제23대 국왕(재위: 1213년~1259년)
[2] 원종(1219년~1274년) : 고려의 제24대 국왕(재위: 1259년~1274년)
[3] 최우(1166년~1249년) : 고려 무신정권 시기의 2개 최씨정권(최충헌-최우-최항-최의)
[4] 광해군(1575년~1641년) : 조선의 제15대 국왕(재위: 1608년~1623년)
[5] 인조(1595년~1649년) : 조선의 제16대 국왕(재위: 1623년~1649년)
[6] 효종(1619년~1659년) : 조선의 제17대 국왕(재위: 1649년~1659년)
[7] 숙종(1661년~1720년) : 조선의 제19대 국왕(재위: 1674년~1720년)
[8] 정조(1752년~1800년) : 조선의 제22대 국왕(재위: 1776년~1800년)
[9] 유수부 동헌 :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
[10] 유수부 이방청 : 조선시대 6방(이,호,예,병,형,공)의 건물중 이방의 집무실
[11] 강화동종 : 강화산성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던 종. 강화산성 남문에 걸려있던 종
[12] 외규장각 : 조선 정조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
[촬영일 : 2022-01-14]
승평문(昇平門) : 궁궐의 정문이며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허물어졌던 것을 1970년대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강화의 궁궐은 개경의 궁궐과 유사하게 지었으며 명칭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촬영일 : 2022-01-14]
고려궁지 내부에서 바라본 승평문(昇平門) : 궁궐의 정문이며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허물어졌던 것을 1970년대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강화의 궁궐은 개경의 궁궐과 유사하게 지었으며 명칭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촬영일 : 2022-01-14]
승평문(昇平門) : 궁궐의 정문이며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허물어졌던 것을 1970년대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강화의 궁궐은 개경의 궁궐과 유사하게 지었으며 명칭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촬영일 : 2022-01-14]
강화유수부 동헌(江華留守府 東軒) : 조선시대 지뱅행정을 담당했던 수령(강화유수)이 집무를 보던 관아 건물. 조선 후기 강화에 특별행정구역인 유수부를 설치하여 종2품 당상관인 유수를 파견하였다. 이 건물은 1638년에 개수되었으며 1976년 강화 전적지 보수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정비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명위헌(明威軒)' 현판은 당시의 명필이자 학자인 백하 윤순(1680∼1714)의 필적이다
[촬영일 : 2022-01-14]
강화유수부 동헌(江華留守府 東軒) : 조선시대 지뱅행정을 담당했던 수령(강화유수)이 집무를 보던 관아 건물. 조선 후기 강화에 특별행정구역인 유수부를 설치하여 종2품 당상관인 유수를 파견하였다. 이 건물은 1638년에 개수되었으며 1976년 강화 전적지 보수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정비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명위헌(明威軒)' 현판은 당시의 명필이자 학자인 백하 윤순(1680∼1714)의 필적이다
[촬영일 : 2022-01-14]
강화유수부 동헌(江華留守府 東軒) : 조선시대 지뱅행정을 담당했던 수령(강화유수)이 집무를 보던 관아 건물. 조선 후기 강화에 특별행정구역인 유수부를 설치하여 종2품 당상관인 유수를 파견하였다. 이 건물은 1638년에 개수되었으며 1976년 강화 전적지 보수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정비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명위헌(明威軒)' 현판은 당시의 명필이자 학자인 백하 윤순(1680∼1714)의 필적이다
[촬영일 : 2022-01-14]
고려궁지 외규장각 : 1782년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이다. 한성에 있는 규장각을 내규장각, 강화에 있는 규장각을 외규장각이라고 하였다. 주로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ㅇ리한 의궤를 비롯해 왕실 서적을 보관하였으나,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게 의궤와 도서등을 약탈당하였다. 당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2003년에 일부 복원하였다(출처 : 강화군시설관리공단 고려궁지)
[촬영일 : 2022-01-14]
조선 인조 9년(1631)에 여러 전각과 행궁을 세울 때 심었던 나무로 추측된다. 이 나무는 느티나무로 수령은 약 400년, 높이 20m, 둘레 4.3m로 동헌앞을 지키고 있다
[촬영일 : 2022-01-14]
고려궁지 외규장각 : 1782년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이다. 한성에 있는 규장각을 내규장각, 강화에 있는 규장각을 외규장각이라고 하였다. 주로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ㅇ리한 의궤를 비롯해 왕실 서적을 보관하였으나,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게 의궤와 도서등을 약탈당하였다. 당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2003년에 일부 복원하였다(출처 : 강화군시설관리공단 고려궁지)
[촬영일 : 2022-01-14]
고려궁지 외규장각(왼쪽)과 강화유수부 동헌(오른쪽)
[촬영일 : 2022-01-14]
강화유수부 이방청 : 강화유수부 안에 6방(이.호.예.병.형.공)의 건물 중 이방의 집무실로 조선중기의 관청건물이다. 효종 5년(1654)에 유수 정세규가 세웠으며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건물 내부를 고쳐 괘홀당이라고 불렀다. 나무로 된 1층의 기와집으로 ㄷ자형이며, 지붕 옆면은 여덟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된 집이다. 여러 차례 고쳐서 옛날 관청의 모습을 잘 알 수는 없으나 조선 시대 지방관아의 이방청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출처 : 강화군시설관리공단 고려궁지내 강화유수부 이방청)
[촬영일 : 2022-01-14]
강화유수부 이방청 : 강화유수부 안에 6방(이.호.예.병.형.공)의 건물 중 이방의 집무실로 조선중기의 관청건물이다. 효종 5년(1654)에 유수 정세규가 세웠으며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건물 내부를 고쳐 괘홀당이라고 불렀다. 나무로 된 1층의 기와집으로 ㄷ자형이며, 지붕 옆면은 여덟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된 집이다. 여러 차례 고쳐서 옛날 관청의 모습을 잘 알 수는 없으나 조선 시대 지방관아의 이방청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출처 : 강화군시설관리공단 고려궁지내 강화유수부 이방청)
[촬영일 : 2022-01-14]
강화유수부 이방청 입구인 정문 : 강화유수부 안에 6방(이.호.예.병.형.공)의 건물 중 이방의 집무실로 조선중기의 관청건물이다. 효종 5년(1654)에 유수 정세규가 세웠으며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건물 내부를 고쳐 괘홀당이라고 불렀다. 나무로 된 1층의 기와집으로 ㄷ자형이며, 지붕 옆면은 여덟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된 집이다. 여러 차례 고쳐서 옛날 관청의 모습을 잘 알 수는 없으나 조선 시대 지방관아의 이방청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출처 : 강화군시설관리공단 고려궁지내 강화유수부 이방청)
[촬영일 : 2022-01-14]
강화동종 : 강화동종은 강화산성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던 종으로 강화산성 남문에 걸려있던 종이다. 숙종14년(1688)에 강화 유수 윤지완이 처음 만들었는데 금이가서 소리가 고르지 못해 강화유수 민진원이 숙종37년(1711)에 다시 만들었다. 동종 명문(銘文)에 옛 종은 사인(思印)이 만들고 다시 만들 때는 조신(祖信)이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사인비구는 8개의 동종을 제작했는데 모두 보물 11호로 지정되었으며 강화동종은 8개중 하나이다. 1977년 고려궁지로 이전되었으나 1999년 10월 중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타종하지 못하게 되자 강화동종을 복제하여 설치하고 원래의 종은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전시하고 있다(출처 : 강화군시설관리공단 고려궁지내 강화동종)
[촬영일 : 2022-01-14]
외규장각 오른쪽 모퉁이를 돌면 나무계단이 있다. 이 계단을 오르면 축구장 3배정도 크기의 평지가 나타난다. 이평지에서 내려다 보면 고려궁지내 전경(좌측부터 강화유수부 동헌, 이방청, 외규장각)과 산으로 둘러싸인 강화읍내를 감상할 수 있다
[촬영일 : 2022-01-14]
외규장각 오른쪽 모퉁이를 돌면 나무계단이 있다. 이 계단을 오르면 축구장 3배정도 크기의 평지가 나타난다. 이평지에서 내려다 보면 고려궁지내 전경(좌측부터 강화유수부 동헌, 이방청, 외규장각)과 산으로 둘러싸인 강화읍내를 감상할 수 있다
[촬영일 : 2022-01-14]
고려궁지내 보호수 회화나무 : 수령 416년, 나무높이 20m, 나무둘레 6m
[촬영일 : 2025-05-04]
외규장각 : 외규장각은 왕실관련 도서를 보관할 목적으로 1782년 정조의 명에 의해 강화에 설치되었다
[촬영일 : 2025-05-04]
외규장각 : 외규장각은 왕실관련 도서를 보관할 목적으로 1782년 정조의 명에 의해 강화에 설치되었다
[촬영일 : 2025-05-04]
외규장각 : 외규장각은 왕실관련 도서를 보관할 목적으로 1782년 정조의 명에 의해 강화에 설치되었다
[촬영일 : 2025-05-04]
외규장각 : 외규장각은 왕실관련 도서를 보관할 목적으로 1782년 정조의 명에 의해 강화에 설치되었다
[촬영일 : 2025-05-04]
외규장각 : 외규장각은 왕실관련 도서를 보관할 목적으로 1782년 정조의 명에 의해 강화에 설치되었다
[촬영일 : 2025-05-04]
외규장각 : 외규장각은 왕실관련 도서를 보관할 목적으로 1782년 정조의 명에 의해 강화에 설치되었다
[촬영일 : 2025-05-04]
외규장각 : 외규장각은 왕실관련 도서를 보관할 목적으로 1782년 정조의 명에 의해 강화에 설치되었다
[촬영일 : 2025-05-04]
외규장각 : 외규장각은 왕실관련 도서를 보관할 목적으로 1782년 정조의 명에 의해 강화에 설치되었다
[촬영일 : 2025-05-04]
외규장각 : 외규장각은 왕실관련 도서를 보관할 목적으로 1782년 정조의 명에 의해 강화에 설치되었다
[촬영일 : 2025-05-04]
고려궁지 내부에서 바라본 승평문(昇平門) : 궁궐의 정문이며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허물어졌던 것을 1970년대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강화의 궁궐은 개경의 궁궐과 유사하게 지었으며 명칭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촬영일 : 2025-05-04]
강화유수부 이방청 입구인 정문 : 강화유수부 안에 6방(이.호.예.병.형.공)의 건물 중 이방의 집무실로 조선중기의 관청건물이다
[촬영일 : 2025-05-04]
강화유수부 동헌(江華留守府 東軒) : 조선시대 지뱅행정을 담당했던 수령(강화유수)이 집무를 보던 관아 건물. 조선 후기 강화에 특별행정구역인 유수부를 설치하여 종2품 당상관인 유수를 파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