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프랑스사건기간 : 1866년 10월 26일 ~ 1866년 12월 17일, 조회수 : 430, 등록일 : 2020-02-06
1866년([1]고종 3년)에 [2]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인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가 사망하자, 이를 구실로 프랑스의 [3] 로즈 제독은 함대 7척을 이끌고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수교를 요구했다.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무력으로 대항하며 강화도 곳곳에서 교전이 일어났다. 교전이 계속되자 프랑스군은 더 이상의 교전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철수를 결정했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점령했던 [4] 강화성을 파괴하고 관아에 불을 지르고 [5] 외규장각 의궤, 서적등 각종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후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거세졌고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병인양요는 병인년에 양이(洋夷 : 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요(騷擾)라는 뜻이다.
[1]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2] 흥선대원군(1821년~1898년) :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본명은 이하응
[3] 피에르귀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년~1882년) : 프랑스의 해군 제독
[4] 강화성 :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고려궁지이며 고려시대 몽골 침입 당시에 사용하던 고려 궁궐터
[5] 외규장각 : 조선 정조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
미국-인디언 전쟁은 17세기 초 유럽 식민자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이래 19세기 말까지 이어진 일련의 무력 충돌과 갈등을 통칭하는 역사적 명칭이다. 이 전쟁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던 원주민(인디언) 부족들과 유럽계 정착민들 그리고 후에 미국 연방정부 간의 영토 분쟁, 문화 충돌, 자원 경쟁, 조약 위반 등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초기 식민지 시기에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 부족들이 식민 전쟁에 참여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대표적인 초기 충돌로는 킹 필립 전쟁(King Philip’s War, 1675~1678), 포하탄 전쟁(Powhatan Wars), 그리고 프랑스-인디언 전쟁(1754~1763)이 있다. 이 시기 인디언들은 대체로 식민지 세력의 군사적 동맹이자 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영토 보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1776년에 독립한 신생 미국 정부는 서부 확장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면서 원주민과의 충돌이 더욱 잦아졌다. 미국-인디언 전쟁의 핵심은 "서부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들의 땅을 몰수하고 강제로 이주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전쟁으로는 북서부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년~1795), 테쿰세 전쟁(Tecumseh's War), 제1차~제3차 세미놀 전쟁(Seminole Wars), 블랙 호크 전쟁(Black Hawk War), 수족 전쟁(Sioux Wars), 치페와 전쟁(Chippewa War), 아파치 전쟁(Apache Wars), 그리고 제로니모 항쟁(Geronimo's resistance) 등이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 미국 정부는 원주민 부족들을 "보호구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이를 거부한 부족들과의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1876년 리틀 빅혼 전투(Battle of the Little Bighorn)에서는 라코타 수우족과 샤이엔족이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군을 전멸시키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미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식량 차단, 협상 파기 등으로 대부분의 부족이 항복하거나 멸족하였다.
1890년, 사우스다코타주 운디드니(Wounded Knee)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은 미국-인디언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에서 미군은 대규모 무장 해제 중이던 라코타 수우족을 공격하여 남녀노소 수백 명을 살해하였다. 운디드니 학살사건 이후 사실상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소규모의 전투가 가끔 벌어졌다.
이 전쟁의 결과 수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빼앗겼으며 미국 전역의 원주민 사회는 급격한 해체와 문화적 침탈을 경험하게 되었다. 미국-인디언 전쟁은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 식민주의·제국주의·인종주의에 기초한 국가 건설과 정복의 역사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미국 사회 내에서 원주민 문제와 정체성 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청나라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무기력하게 패하고 태평천국운동을 겪은 뒤 국제사회의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군수 공장과 조선소(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 제철소, 방직 공장등을 만들었다. 근대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한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고,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근대적인 학교도 세웠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는 데 힘썼다고 하여 [1]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운동, 신유정변을 거치면서 한족인 [2]증국번, [3]이홍장 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 세력들이 주도하였다.
이시기의 권력 중심은 [4]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5]공친왕이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무운동은 반대세력에 의해 비판과 견제를 받아왔다. 관리의 기업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점등으로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곧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1] 양무(洋務) :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
[2]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3]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제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5]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병인박해는 1866년(고종 3년) 흥선대원군의 대규모 천주교 탄압을 말하며 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한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며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 신도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살아남은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청나라로 탈출해 천진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고 이는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천주교 탄압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1873년에 종료되었으며 1886년 프랑스와 조선이 국교를 맺고 병인박해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인정하며 추숭 조치로 박해는 마무리된다.
해방 이후인 1968년에는 순교자들을 복자로 추숭하였고 1984년에는 성인으로 추앙하였다.
*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 흥선대원군(1821년~1898년) :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본명은 이하응
* 펠릭스 클레르 리델(1830년~1884) : 프랑스 낭트 출생의 가톨릭 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한국이름은 이복명
* 피에르귀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년~1882년) : 프랑스의 해군 제독. 병인양요 때 조선 공격을 지휘하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66년(조선 고종 3년) 평양 군민들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에 태워 격침시킨 사건이다. 이 배는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마을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였다. 이에 평양 감사 박규수의 지휘 아래 평양 관민이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고 선원들은 처형하였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