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회수 : 94 등록일 : 2020-07-09 ]
수원화성은 조선의 제22대 임금인 [1]정조가 아버지인 [4]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축성의 근본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1794년(정조 18)에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했으며 [2]정약용이 성을 설계하였다.
수원화성은 거중기, 활차, 녹로 등 신기재의 발명과 활용,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한 축성방법 등 18세기 과학과 건축, 예술을 살필 수 있는 대한민국 성곽 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화성의 성곽이 바깥으로 튀어나간 부분이 있는데 이렇게 성벽에서 돌출된 곳을 '치성(稚城)'이라 부른다. 치성은 거의 100미터 간격으로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수원화성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수원화성의 성곽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수원 화성 대부분의 시설물이 한국 전쟁 때 훼손되었다가 1998년부터 행해진 수원화성복원정화적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수원화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 위해서 복원 과정이 얼마나 진실되었는가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이때 복원의 진정성을 확인시켜준 것이 [3]'화성성역의궤'였다.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유네스코 평가단은 화성이 의궤의 내용과 다름없이 복원되었음을 확인하였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이는 기록의 가치와 중요성을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 수원관광(https://www.suwon.go.kr)
[1] 정조(1752년~1800년) : 조선의 제22대 임금, 재위 : 1776년~1800년
[2] 정약용(1762~1836년) : 조선후기의 실학자·유학자. 대표저서 : 목민심서, 경세유표, 자산어보등
[3]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화성공역의 전 과정을 기록한 보고서로 모두 10원 9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작은 1796년(정조 20) 9월에 시작하여 11월에 끝났으나 활자로 간행할 것을 추진하여 1801년(순조 1) 9월에 완성되었다. 화성성역의궤는 2016년 보물 제1901-7호로 지정되어 있다
[4] 사도세자(1735년~1762년) : 조선의 왕세자로 아버지인 21대 임금인 영조와 갈등으로 임오화변으로 뒤주에 갇혀 8일만에 굶어 사망했다. 사후 사도세자(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되었으며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에 장조로 추존되었다
1794년(정조 18)에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했으며 [2]정약용이 성을 설계하였다.
수원화성은 거중기, 활차, 녹로 등 신기재의 발명과 활용,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한 축성방법 등 18세기 과학과 건축, 예술을 살필 수 있는 대한민국 성곽 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화성의 성곽이 바깥으로 튀어나간 부분이 있는데 이렇게 성벽에서 돌출된 곳을 '치성(稚城)'이라 부른다. 치성은 거의 100미터 간격으로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수원화성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수원화성의 성곽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수원 화성 대부분의 시설물이 한국 전쟁 때 훼손되었다가 1998년부터 행해진 수원화성복원정화적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수원화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 위해서 복원 과정이 얼마나 진실되었는가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이때 복원의 진정성을 확인시켜준 것이 [3]'화성성역의궤'였다.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유네스코 평가단은 화성이 의궤의 내용과 다름없이 복원되었음을 확인하였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이는 기록의 가치와 중요성을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 수원관광(https://www.suwon.go.kr)
[1] 정조(1752년~1800년) : 조선의 제22대 임금, 재위 : 1776년~1800년
[2] 정약용(1762~1836년) : 조선후기의 실학자·유학자. 대표저서 : 목민심서, 경세유표, 자산어보등
[3]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화성공역의 전 과정을 기록한 보고서로 모두 10원 9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작은 1796년(정조 20) 9월에 시작하여 11월에 끝났으나 활자로 간행할 것을 추진하여 1801년(순조 1) 9월에 완성되었다. 화성성역의궤는 2016년 보물 제1901-7호로 지정되어 있다
[4] 사도세자(1735년~1762년) : 조선의 왕세자로 아버지인 21대 임금인 영조와 갈등으로 임오화변으로 뒤주에 갇혀 8일만에 굶어 사망했다. 사후 사도세자(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되었으며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에 장조로 추존되었다
[촬영일 : 2019-05-19]
수원화성 북수문(北水門), 화홍문(華虹門) :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 [출처 : 수원문화재단]
[촬영일 : 2020-07-08]
수원화성 팔달문(八達門) :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다.(수원관광 : https://www.suwon.go.kr)
[촬영일 : 2020-07-08]
수원화성 팔달문(八達門) :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다.(수원관광 : https://www.suwon.go.kr)
[촬영일 : 2020-07-08]
팔달산으로 이어지는 수원화성 성곽 1
[촬영일 : 2020-07-08]
팔달산으로 이어지는 수원화성 성곽 2
[촬영일 : 2020-07-08]
화서문(華西門) 1 :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며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촬영일 : 2020-07-08]
화서문(華西門) 2 :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며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촬영일 : 2020-07-08]
화서문(華西門) 3 :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며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촬영일 : 2020-07-08]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 화서문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촬영일 : 2020-07-08]
화서문(華西門) : 화서문 2층 누각 내부
[촬영일 : 2020-07-08]
봉돈(烽墩) 1 : 1796년 6월 17일 완성된 수원 화성 봉돈(烽墩)은 일반적인 봉수대(烽燧臺)가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에 별도의 시설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화성 성벽에 맞물려 벽돌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우리나라 성곽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으로 마치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든 수원화성의 대표시설이다.평상시 남쪽 첫 번째 화두(횃불구멍)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올려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 봉화로 신호를 보낸다(참조 : 수원관광(https://www.suwon.go.kr)
[촬영일 : 2020-07-08]
봉돈(烽墩) 2 : 1796년 6월 17일 완성된 수원 화성 봉돈(烽墩)은 일반적인 봉수대(烽燧臺)가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에 별도의 시설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화성 성벽에 맞물려 벽돌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우리나라 성곽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으로 마치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든 수원화성의 대표시설이다.평상시 남쪽 첫 번째 화두(횃불구멍)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올려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 봉화로 신호를 보낸다(참조 : 수원관광(https://www.suwon.go.kr)
[촬영일 : 2020-07-08]
동암문(東暗門) : 화성 동쪽에 낸 비상 출입문.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동암문 상부에는 윗부분을 둥글게 만든 원여장을 설치했고, 좌우에는 네모난 비예를 세웠다. 비예는 암문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여장이다. 성 안쪽에 도로가 생기면서 지형이 높아져 1976년 동암문 복원 시 계단을 추가했다.
[촬영일 : 2020-07-08]
장안문(長安門) 1 : 화성의 4대문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형태이다. 서울의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 시대 성문을 대표하던 장안문은 한국 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1975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촬영일 : 2020-07-08]
장안문(長安門) 2 : 화성의 4대문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화성 내부에서 바라본 장안문
[촬영일 : 2020-07-08]
장안문(長安門) 3 : 화성의 4대문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촬영일 : 2020-07-08]
장안문(長安門) 4 : 화성의 4대문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성문에서 바라본 반달모양으로 쌓아진 옹성의 문이 보인다.
[촬영일 : 2020-07-08]
장안문(長安門) 5 : 화성의 4대문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장안문 2층 누각 내부 모습
[촬영일 : 2020-07-08]
서노대(西弩臺) 1 : 서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서노대는 화성의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팔산산 꼭대기에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적합하다.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로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벽돌을 붙였으며 여덟방향의 모서리는 돌로 깎아 마감하였다 - 참고 : Cultural Heritage Wiki(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Cultural_Heritage_Wiki)
[촬영일 : 2020-07-08]
서노대(西弩臺) 2 : 서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서노대는 화성의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팔산산 꼭대기에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적합하다.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로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벽돌을 붙였으며 여덟방향의 모서리는 돌로 깎아 마감하였다 - 참고 : Cultural Heritage Wiki(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Cultural_Heritage_Wiki)
[촬영일 : 2020-07-08]
서장대(西將臺) :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으며 '화성장대(華城將臺)'란 편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 참조 : 수원관광(https://www.suwon.go.kr/web/visitsuwon/hs01/hs01-01/pages.do)
[촬영일 : 2020-07-08]
동북노대(東北弩臺) :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는 시설이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인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동북노대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 사이에 설치했다. 별도의 높다란 대를 만들지 않고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들었지만 주변이 평탄해서 시야가 확보되었다. 노대와 좌우 성벽이 만나는 지점을 살짝 좁혀 쌓았는데 '화성성역의궤'에서는 그 모양을 '벌의 허리'와 같다고 표현했다 - 참고 : Cultural Heritage Wiki(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Cultural_Heritage_Wiki)
[촬영일 : 2020-07-08]
북동포루(北東砲樓) 1 : 장안문의 동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5곳의 포루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포루가 등장했는데 정약용은 중국의 제도를 두루 살펴 발전된 형태의 포루를 설계했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은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 참고 : Cultural Heritage Wiki(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Cultural_Heritage_Wiki)
[촬영일 : 2020-07-08]
북동포루(北東砲樓) 2 : 장안문의 동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5곳의 포루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포루가 등장했는데 정약용은 중국의 제도를 두루 살펴 발전된 형태의 포루를 설계했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은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 참고 : Cultural Heritage Wiki(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Cultural_Heritage_Wiki)
[촬영일 : 2020-07-08]
동장대(東將臺) 1 : 장수가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곳이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훈련 지휘소로 썼다. 무예를 수련하는 공간이었기에 연무대(鍊武臺)라고 하였다. 동장대는 화성 동편 시야가 트이고 평탄한 곳에 있다. - 참고 : Cultural Heritage Wiki(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Cultural_Heritage_Wiki)
[촬영일 : 2020-07-08]
동장대(東將臺) 2 : 장수가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곳이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훈련 지휘소로 썼다. 무예를 수련하는 공간이었기에 연무대(鍊武臺)라고 하였다. 동장대는 화성 동편 시야가 트이고 평탄한 곳에 있다. - 참고 : Cultural Heritage Wiki(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Cultural_Heritage_Wiki)
[촬영일 : 2020-07-08]
창룡문(蒼龍門) 1 : 창룡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동쪽 문이다. 창룡은 곧 청룡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이며 동쪽을 의미한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모양으로 쌓았는데 장안문, 팔달문과 달리 한쪽을 열어놓았다.
[촬영일 : 2020-07-08]
창룡문(蒼龍門) 2 : 창룡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동쪽 문이다. 창룡은 곧 청룡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이며 동쪽을 의미한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모양으로 쌓았는데 장안문, 팔달문과 달리 한쪽을 열어놓았다.
[촬영일 : 2020-07-08]
북암문(北暗門) 1 : 화성 북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는 문이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북암문은 좌우 성벽도 지형에 맞춰 벽돌로 둥글게 만들었다. 문 위에는 여장을 세웠는데 반원형은 원여장, 장방형은 비예라고 부른다. 화공에 대비하여 원여장에 오성지를 설치했다. 북암문은 축성 당시 모습이 잘 남아 있다 - 참고 : Cultural Heritage Wiki(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Cultural_Heritage_Wiki)
[촬영일 : 2020-07-08]
북암문(北暗門)에서 이어지는 외부 성곽
[촬영일 : 2020-07-08]
수원화성 북수문(北水門) 1 :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수문 양 끝에는 팔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이무기 조각을 앉혀 놓았다. 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힌다 - 참고 : Cultural Heritage Wiki(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Cultural_Heritage_Wiki)
[촬영일 : 2020-07-08]
수원화성 북수문(北水門) 2 :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수문 양 끝에는 팔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이무기 조각을 앉혀 놓았다. 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힌다 - 참고 : Cultural Heritage Wiki(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Cultural_Heritage_Wiki)
[촬영일 : 2020-07-08]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1 : 화성 동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성곽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墩臺)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동북공심돈은 성벽 안쪽에 세웠다. 원통형의 벽돌건물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다. 이 모습을 빗대서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외벽에는 밖을 감시하고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곳곳에 뚫었다 - 참고 : Cultural Heritage Wiki(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Cultural_Heritage_Wiki)
[촬영일 : 2020-07-08]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2 : 화성 동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성곽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墩臺)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동북공심돈은 성벽 안쪽에 세웠다. 원통형의 벽돌건물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다. 이 모습을 빗대서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외벽에는 밖을 감시하고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곳곳에 뚫었다 - 참고 : Cultural Heritage Wiki(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Cultural_Heritage_Wiki)
[촬영일 : 2021-05-19]
화성전도(출처 : 수원화성박물관)
[촬영일 : 2021-05-19]
수원화성 팔달문(八達門) : 팔달문은 수원 화성의 남문이다. 정조는 팔달八達의 의미를 ‘산 이름이 팔달이어서 문도 팔달이며, 사방팔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인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팔달문 주변은 삼남 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화성 축성 전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 장안문과 마찬가지로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 [출처 : 수원문화재단]
[촬영일 : 2021-05-19]
수원화성 팔달문(八達門) : 팔달문은 수원 화성의 남문이다. 정조는 팔달八達의 의미를 ‘산 이름이 팔달이어서 문도 팔달이며, 사방팔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인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팔달문 주변은 삼남 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화성 축성 전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 장안문과 마찬가지로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 [출처 : 수원문화재단]
[촬영일 : 2021-05-19]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핌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이다. 서북공심돈은 성벽밖으로 돌출되어 있는 시설물로서 화서문을 보호하고 적을 공격하는데 용이한 시설물로써 1796년(정조 20) 3월 10일 완공되었다. 내부는 3층으로 만들어져 있고 2층과 3층 사이에 마루를 깔았으며 사다리를 놓아 위아래로 통하도록 하였다. 군사들이 공심돈 내부의 작은 구멍으로 백자총, 큰 구멍으로 불랑기포를 쏘았으며 장수는 맨 위 누각에서 지휘하였다(출처 : 수원화성박물관)
[촬영일 : 2021-05-19]
수원화성 북수문(北水門), 화홍문(華虹門) :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 [출처 : 수원문화재단]
[촬영일 : 2021-05-19]
수원화성 북수문(北水門), 화홍문(華虹門) :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 [출처 : 수원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