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회수 : 158 등록일 : 2020-11-07 ]
덕수궁은 본래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의 개인저택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서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임시로 거처해왔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궁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경운궁 터는 1880년대에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여러나라와 수교하면서 이미 공사관 부지로 떼어 주었기 때문에 궁 자체가 서양 공산관으로 빙 둘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명성황후를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으로 인하여 고종은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아관파천). 1년뒤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으며 빼았겼던 군주권을 회복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즉위조서를 반포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으로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황제는 순종에게 양위하면서 선황제가 된 고종은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덕수궁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었으나 대한제국기의 역사적 격변을 겪은 궁궐로 국난 극복의 상징적 공간이자 그 중심지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서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임시로 거처해왔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궁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경운궁 터는 1880년대에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여러나라와 수교하면서 이미 공사관 부지로 떼어 주었기 때문에 궁 자체가 서양 공산관으로 빙 둘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명성황후를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으로 인하여 고종은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아관파천). 1년뒤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으며 빼았겼던 군주권을 회복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즉위조서를 반포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으로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황제는 순종에게 양위하면서 선황제가 된 고종은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덕수궁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었으나 대한제국기의 역사적 격변을 겪은 궁궐로 국난 극복의 상징적 공간이자 그 중심지였다.
[촬영일 : 2020-11-07]
대한문(大漢門) :덕수궁의 정문. 원래 정문은 남쪽으로 난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환구단 건립 등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 대한문(大漢門)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촬영일 : 2020-11-07]
증화전(中和殿) - 정전.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특히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촬영일 : 2020-11-07]
증화전(中和殿) - 내부
[촬영일 : 2020-11-07]
증화전(中和殿) - 정전.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특히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촬영일 : 2020-11-07]
증화전(中和殿) : 후면.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특히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촬영일 : 2020-11-07]
증화전(中和殿) : 측면.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특히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촬영일 : 2020-11-07]
석조전(石造殿) 1 : 조선시대 궁중건물 중 대표적인 유럽풍의 석조 건출물. 1910년에 준공.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촬영일 : 2020-11-07]
석조전(石造殿) 2 : 조선시대 궁중건물 중 대표적인 유럽풍의 석조 건출물. 1910년에 준공.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촬영일 : 2020-11-07]
석조전(石造殿) 3 : 조선시대 궁중건물 중 대표적인 유럽풍의 석조 건출물. 1910년에 준공.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촬영일 : 2020-11-07]
석조전(石造殿) 4 : 조선시대 궁중건물 중 대표적인 유럽풍의 석조 건출물. 1910년에 준공.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촬영일 : 2020-11-07]
석조전(石造殿) 서관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촬영일 : 2020-11-07]
정관헌(靜觀軒) :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로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각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동양식이며 건물은 차양칸과 난간을 서양식처럼 꾸몄다. 또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덕수궁관리소 -http://www.deoksugung.go.kr/c/introduction/2)
[촬영일 : 2020-11-07]
정관헌(靜觀軒) :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로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각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동양식이며 건물은 차양칸과 난간을 서양식처럼 꾸몄다. 또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덕수궁관리소 -http://www.deoksugung.go.kr/c/introduction/2)
[촬영일 : 2020-11-07]
정관헌(靜觀軒) :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로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각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동양식이며 건물은 차양칸과 난간을 서양식처럼 꾸몄다. 또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덕수궁관리소 -http://www.deoksugung.go.kr/c/introduction/2)
[촬영일 : 2020-11-07]
정관헌(靜觀軒) :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로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각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동양식이며 건물은 차양칸과 난간을 서양식처럼 꾸몄다. 또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덕수궁관리소 -http://www.deoksugung.go.kr/c/introduction/2)
[촬영일 : 2020-11-07]
함녕전(咸寧殿) : 고종의 침전. 이곳은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한 곳이다
[촬영일 : 2020-11-07]
덕홍전(德弘殿) : 고종은 덕홍전에서 외빈과 신료들을 접견실로 사용하였다
[촬영일 : 2020-11-07]
석어당(昔御堂) : 석어당이란 뜻은 '옛날(昔)에 임금(御)이 머물던 곳'이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1593년(선조 26)에 의주에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궁궐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행궁에서 머물던 곳이다
[촬영일 : 2020-11-07]
광명문(光明門) : 고종의 침전이었던 함녕전의 정문이자 남쪽 대문이다
[촬영일 : 2020-11-07]
덕수궁의 가을 야경 1
[촬영일 : 2020-11-07]
덕수궁의 가을 야경 2
[촬영일 : 2021-03-17]
덕수궁 돌담길 : 보행자를 위해 보도와 차도 공존도로 및 푸르름이 가득한 가로공간인 녹도의 개념을 복합적으로 도입한 보행자 중심의 도로이며 길이는 900m이다
[촬영일 : 2021-10-23]
덕수궁 돌담길 : 보행자를 위해 보도와 차도 공존도로 및 푸르름이 가득한 가로공간인 녹도의 개념을 복합적으로 도입한 보행자 중심의 도로이며 길이는 900m이다
[촬영일 : 2021-10-23]
덕수궁 돌담길 : 보행자를 위해 보도와 차도 공존도로 및 푸르름이 가득한 가로공간인 녹도의 개념을 복합적으로 도입한 보행자 중심의 도로이며 길이는 900m이다
[촬영일 : 2021-11-23]
경운궁 양이재(慶運宮 養怡齋) : 양이재는 경운궁을 고쳐 지을 때인 1905년에 세운 것이다. 경운궁 공사보고서인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는 중화전을 비롯한 주요 건물 11채만 따로 도면을 그렸는데 양이재도 그 중 하나다. 당시 양이재는 함희당이란 건물관 견결되어 있었으며 행각과 꽃담으로 에워 싼 일곽은 홍원이라 불렀다. 원래 건물의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4칸이었으며 내부에는 온돌방과 마루, 누마루가 있었다. 건물의 지붕에는 양서바름에 용두를 써서 격조를 높였다. 현재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무실로 쓰인다. 홍원 일대는 1906년~1910년까지 황족과 귀족의 자제교육을 전담한 수학원으로 쓰였다. 대한성공회는 1912년부터 이곳을 임대해 쓰다가 1920년에 이곳을 사들인 후 건물을 옮겼다. 함희당은 1960년대에 헐렸으나 양이재 뒤편에 복도각 일부가 남아있다
[촬영일 : 2021-12-18]
덕수궁 금천교와 하마비
[촬영일 : 2021-12-18]
증화전(中和殿) :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특히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촬영일 : 2021-12-18]
중화문(中和門) : 1902년에 건립된 중화전의 정문으로 1904년 덕수궁 대화재로 소실된 후 새로 만들어 세웠으며, 본래 중화문 좌우에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동측에 일부만 남아 있다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촬영일 : 2021-12-18]
준명당(浚眀堂) :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04년 화재 때에 소실되었으며,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8월 현판을 걸어 중건하였다. 목조 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고종께서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고,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좌우 툇간에는 쪽마루가 있다. 이후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한 유치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촬영일 : 2021-12-18]
즉조당(卽阼堂) :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 건물은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897년 고종의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직후 정전으로 이용하였으며, 이때 즉조전의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렀다. 이후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에 소실되었던 즉조당은 그 해에 석어당, 준명당과 함께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하였다. 이 곳은 고종의 후비인 순헌황귀비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생활하던 공간이기도 하며,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촬영일 : 2021-12-18]
좌측부터 석조전(石造殿), 준명당(浚眀堂), 즉조당(卽阼堂)
[촬영일 : 2021-12-18]
정관헌(靜觀軒) 뒷편 :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로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각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동양식이며 건물은 차양칸과 난간을 서양식처럼 꾸몄다. 또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덕수궁관리소 -http://www.deoksugung.go.kr/c/introduction/2)
[촬영일 : 2021-12-18]
덕홍전 내부
[촬영일 : 2021-12-18]
석어당(昔御堂) 뒷편 : 석어당이란 뜻은 '옛날(昔)에 임금(御)이 머물던 곳'이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1593년(선조 26)에 의주에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궁궐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행궁에서 머물던 곳이다
[촬영일 : 2022-02-25]
서울 도심속에서 덕수궁 정관헌과 돌담길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다
[촬영일 : 2022-02-25]
중화전(정전), 덕홍전(접견실), 함녕전(고종의 침전)의 덕수궁 전경
[촬영일 : 2023-09-28]
석조전 : 1910년에 준공.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촬영일 : 2024-06-15]
덕수궁(德壽宮)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
[촬영일 : 2024-06-15]
덕수궁 선원전 영역 : 선원전은 궁궐에서 선대 왕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
[촬영일 : 2025-10-07]
증화전(中和殿) - 정전.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특히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촬영일 : 2025-10-07]
덕수궁 석조전(德壽宮 石造殿)
[촬영일 : 2025-10-07]
덕수궁 석조전(德壽宮 石造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