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회수 : 217   등록일 : 2022-07-27 ]
1895년(고종 32년) 10월에 일어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광무 4년) 11월에 고종황제가 [1]남소영 자리에 제단 '장충단(奬忠壇)'과 사당을 지었다. 그리고 1908년(융희 2년)까지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장충단은 일제에 의해 폐사되었고 제단을 비롯한 여러 시설들이 훼손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이름하여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였다. 일본은 공원에 상하이 사변 때 사망한 일본군 [2]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웠고,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가 1932년 인근에 세워졌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일본 군인의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사당의 부속건물이 파괴되었다.

1959년 청계천이 복개되자 수표교를 철거하여 이곳으로 옮겼으며, 1969년에 신라호텔 영빈관에 있던 단충단비를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 서쪽으로 옮겼다.
장충단비의 장충단(奬忠壇) 글씨는 순종황제가 쓴 것이며 비의 뒷면은 민영환이 썼다.

장충단 경내에는 [3]이준열사 동상과 한국 유림독립운동 [4]파리장서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충단비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남소영(南小營) : 조선시대 어영청의 분소로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는 군영
[2] 육탄3용사 : 상하이 사변때 폭탄을 두른 3명의 일본병사가 용감하게 달려들어 철조망을 폭파한 후 산화했다.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75년만에 거짓으로 드렀다고 한다
[3] 이준(1859년~1907년) :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 비밀특사. 조선과 대한제국의 검사, 법률가, 외교관. 전 평리원 검사 
[4] 파리 장서 사건 : 1919년 김창숙을 중심으로 한 유림들이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독립을 위한 독립청원서를 보낸 사건
장충단비는 1895년(고종 32년) 10월에 일어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광무 4년) 11월에 고종황제가 남소영 자리에 제단 '장충단(奬忠壇)'에 세워졌던 비석이다
[촬영일 : 2022-07-27]
장충단비는 1895년(고종 32년) 10월에 일어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광무 4년) 11월에 고종황제가 남소영 자리에 제단 '장충단(奬忠壇)'에 세워졌던 비석이다
장충단비는 1895년(고종 32년) 10월에 일어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광무 4년) 11월에 고종황제가 남소영 자리에 제단 '장충단(奬忠壇)'에 세워졌던 비석이다
[촬영일 : 2022-07-27]
장충단비는 1895년(고종 32년) 10월에 일어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광무 4년) 11월에 고종황제가 남소영 자리에 제단 '장충단(奬忠壇)'에 세워졌던 비석이다
장충단비는 1895년(고종 32년) 10월에 일어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광무 4년) 11월에 고종황제가 남소영 자리에 제단 '장충단(奬忠壇)'에 세워졌던 비석이다.높이 183㎝, 너비 68㎝, 두께 35㎝ 규모의 비석이다
[촬영일 : 2022-07-27]
장충단비는 1895년(고종 32년) 10월에 일어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광무 4년) 11월에 고종황제가 남소영 자리에 제단 '장충단(奬忠壇)'에 세워졌던 비석이다.높이 183㎝, 너비 68㎝, 두께 35㎝ 규모의 비석이다
장충단비는 1895년(고종 32년) 10월에 일어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광무 4년) 11월에 고종황제가 남소영 자리에 제단 '장충단(奬忠壇)'에 세워졌던 비석이다.높이 183㎝, 너비 68㎝, 두께 35㎝ 규모의 비석이다
[촬영일 : 2022-07-27]
장충단비는 1895년(고종 32년) 10월에 일어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광무 4년) 11월에 고종황제가 남소영 자리에 제단 '장충단(奬忠壇)'에 세워졌던 비석이다.높이 183㎝, 너비 68㎝, 두께 35㎝ 규모의 비석이다
수포교(水標橋) : 1441년(세종 23)에 세워졌으며 청계천의 수량을 측정하여 홍수에 대비하던 다리였다.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인해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 놓았다. 길이 27m, 너비 7m 이다
[촬영일 : 2022-07-27]
수포교(水標橋) : 1441년(세종 23)에 세워졌으며 청계천의 수량을 측정하여 홍수에 대비하던 다리였다.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인해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 놓았다. 길이 27m, 너비 7m 이다
수포교(水標橋) : 1441년(세종 23)에 세워졌으며 청계천의 수량을 측정하여 홍수에 대비하던 다리였다.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인해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 놓았다. 길이 27m, 너비 7m 이다
[촬영일 : 2022-07-27]
수포교(水標橋) : 1441년(세종 23)에 세워졌으며 청계천의 수량을 측정하여 홍수에 대비하던 다리였다.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인해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 놓았다. 길이 27m, 너비 7m 이다
수포교(水標橋) : 1441년(세종 23)에 세워졌으며 청계천의 수량을 측정하여 홍수에 대비하던 다리였다.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인해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 놓았다. 길이 27m, 너비 7m 이다
[촬영일 : 2022-07-27]
수포교(水標橋) : 1441년(세종 23)에 세워졌으며 청계천의 수량을 측정하여 홍수에 대비하던 다리였다.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인해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 놓았다. 길이 27m, 너비 7m 이다
장충단 - 기억의 공간 전시실 : 대한제국 이후 장충단과 남산에 얽힌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상설 전시장으로 일제 강점기 장충단과 남산의 역사적 비극을 전시하고 있다
[촬영일 : 2022-07-27]
장충단 - 기억의 공간 전시실 : 대한제국 이후 장충단과 남산에 얽힌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상설 전시장으로 일제 강점기 장충단과 남산의 역사적 비극을 전시하고 있다
한귝 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은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곽종석.김복한을 비록한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한 이 장문의 글을 '파리장서'라고 부른다. 파리장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사실을 폭로하고 식민 통치의 폭력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해 한국 국민 모두가 독립을 간절히 열망하고 있을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되었다. 파리장서를 가지고 해외로 파견되었던 인물은 김창숙이다. 그는 파리장서운동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자를 모으고 파리장서의 문안을 확정하는 등의 일을 주도하였다. 이 독립청원서는 파리에 머물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리인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되었고 외국 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일본은 파리장서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을 체포.투옥하며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나 오히려 이 운동으로 인해 유림이 독립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장서운동은 1925년 김창숙의 주도로 전개된 유림 중심의 군자금 모금운동과 구볋하여 '제1차 유림단 의거'라고도 불린다 - 출처 : 장충단공원내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안내문
[촬영일 : 2022-07-27]
한귝 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은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곽종석.김복한을 비록한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한 이 장문의 글을 '파리장서'라고 부른다. 파리장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사실을 폭로하고 식민 통치의 폭력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해 한국 국민 모두가 독립을 간절히 열망하고 있을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되었다. 파리장서를 가지고 해외로 파견되었던 인물은 김창숙이다. 그는 파리장서운동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자를 모으고 파리장서의 문안을 확정하는 등의 일을 주도하였다. 이 독립청원서는 파리에 머물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리인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되었고 외국 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일본은 파리장서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을 체포.투옥하며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나 오히려 이 운동으로 인해 유림이 독립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장서운동은 1925년 김창숙의 주도로 전개된 유림 중심의 군자금 모금운동과 구볋하여 '제1차 유림단 의거'라고도 불린다 - 출처 : 장충단공원내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안내문
한귝 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은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곽종석.김복한을 비록한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한 이 장문의 글을 '파리장서'라고 부른다. 파리장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사실을 폭로하고 식민 통치의 폭력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해 한국 국민 모두가 독립을 간절히 열망하고 있을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되었다. 파리장서를 가지고 해외로 파견되었던 인물은 김창숙이다. 그는 파리장서운동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자를 모으고 파리장서의 문안을 확정하는 등의 일을 주도하였다. 이 독립청원서는 파리에 머물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리인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되었고 외국 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일본은 파리장서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을 체포.투옥하며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나 오히려 이 운동으로 인해 유림이 독립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장서운동은 1925년 김창숙의 주도로 전개된 유림 중심의 군자금 모금운동과 구볋하여 '제1차 유림단 의거'라고도 불린다 - 출처 : 장충단공원내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안내문
[촬영일 : 2022-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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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일 : 2022-07-27]
한귝 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은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곽종석.김복한을 비록한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한 이 장문의 글을 '파리장서'라고 부른다. 파리장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사실을 폭로하고 식민 통치의 폭력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해 한국 국민 모두가 독립을 간절히 열망하고 있을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되었다. 파리장서를 가지고 해외로 파견되었던 인물은 김창숙이다. 그는 파리장서운동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자를 모으고 파리장서의 문안을 확정하는 등의 일을 주도하였다. 이 독립청원서는 파리에 머물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리인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되었고 외국 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일본은 파리장서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을 체포.투옥하며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나 오히려 이 운동으로 인해 유림이 독립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장서운동은 1925년 김창숙의 주도로 전개된 유림 중심의 군자금 모금운동과 구볋하여 '제1차 유림단 의거'라고도 불린다 - 출처 : 장충단공원내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안내문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이상설.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도착하여 일본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불평등 조약임을 알리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을사늑약의 무효임을 세계 언론에 환기시켰다. 그러나 열강들의 냉담한 반응에 분개한 이준열사는 통탄하다가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준열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으며 1963년 열사의 유해를 서울로 봉환하여 수유리 애국선열 묘역에 안장하였다
[촬영일 : 2022-07-27]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이상설.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도착하여 일본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불평등 조약임을 알리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을사늑약의 무효임을 세계 언론에 환기시켰다. 그러나 열강들의 냉담한 반응에 분개한 이준열사는 통탄하다가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준열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으며 1963년 열사의 유해를 서울로 봉환하여 수유리 애국선열 묘역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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