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회수 : 432 등록일 : 2022-01-09 ]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은 유관순 역사가 태어나 자란 집과 아우내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린 봉화터이다. 현재 이곳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에 태어났으며, 이화학당에 다니덩 중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고향 천안 병천으로 내려와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3천여 명이 참여한 충청지방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인 [1] 아우내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일제의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지만, 그 안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친 폭행과 고문을 받았고 결국 192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아우내 3.1운동 독립사적지에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추모각과 구미산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있다. 이곳에서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아우내만세운동을 함께 이끌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수중한 뜻과 역사적 의의를 기리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관순 열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102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유관순열사사적지 현판
[1] 아우내만세운동 : 1919년 음력 3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 있던 3,000여 명의 민중이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에 반대하여 독립만세를 위쳤던 운동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에 태어났으며, 이화학당에 다니덩 중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고향 천안 병천으로 내려와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3천여 명이 참여한 충청지방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인 [1] 아우내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일제의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지만, 그 안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친 폭행과 고문을 받았고 결국 192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아우내 3.1운동 독립사적지에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추모각과 구미산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있다. 이곳에서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아우내만세운동을 함께 이끌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수중한 뜻과 역사적 의의를 기리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관순 열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102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유관순열사사적지 현판
[1] 아우내만세운동 : 1919년 음력 3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 있던 3,000여 명의 민중이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에 반대하여 독립만세를 위쳤던 운동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 열사 사적지내의 유관순 열사상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 열사 사적지내의 유관순 열사상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 열사 추모각 입구인 삼문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서 내려본 삼문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 열사 추모각 : 유관순열사의 애국정신을 추모하고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의 빛난 얼을 기리기 위해 1972년에 건립하였다. 화강석의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 목조건물로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정면에 삼문을 두었으며 현판은 갈물 이철경 선생이 썼다 [출처 : 유관순역사사적지 추모각 안내판]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 영정 : 3.1운동 당시 만세운동 직전에 나라를 걱정하는 표정과 의기에 찬 모습으로 이화학당 교실에서 태극기를 췬 손을 무릎에 올려 놓은 모습으로 흰색 치마저고리와 갖신등 복식과 마루바닥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했으며 선천 유여환 화백이 제작하여 2007년 2월 28일 봉안되었다[출처 : 유관순역사사적지 추모각 안내판]
![유관순 영정 : 3.1운동 당시 만세운동 직전에 나라를 걱정하는 표정과 의기에 찬 모습으로 이화학당 교실에서 태극기를 췬 손을 무릎에 올려 놓은 모습으로 흰색 치마저고리와 갖신등 복식과 마루바닥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했으며 선천 유여환 화백이 제작하여 2007년 2월 28일 봉안되었다[출처 : 유관순역사사적지 추모각 안내판]](https://static.tmstory.com/repository/resizing/sm/city_story/202201/6611859A7A3546DB8BE3AB10B1957F541641739914.jpg)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 영정 : 3.1운동 당시 만세운동 직전에 나라를 걱정하는 표정과 의기에 찬 모습으로 이화학당 교실에서 태극기를 췬 손을 무릎에 올려 놓은 모습으로 흰색 치마저고리와 갖신등 복식과 마루바닥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했으며 선천 유여환 화백이 제작하여 2007년 2월 28일 봉안되었다[출처 : 유관순역사사적지 추모각 안내판]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 열사 사적지내의 추모각(좌측)과 유관순 열사상(오른쪽)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 열사 추모각과 삼문
[촬영일 : 2022-01-09]
순국자 추모각 : 순국자 추모각은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인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신 48위 애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이다. 유관순열사 추모각 옆에 세워져 협문, 생태 연못, 휴게 쉼터, 야외조형가벽과 광장을 갖추고 있다. 특히 야외조형가벽에는 순국지사의 신상기록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전개과정을 새겨 놓아 관람객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였다
[촬영일 : 2022-01-09]
순국자 추모각 : 순국자 추모각은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인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신 48위 애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이다. 유관순열사 추모각 옆에 세워져 협문, 생태 연못, 휴게 쉼터, 야외조형가벽과 광장을 갖추고 있다. 특히 야외조형가벽에는 순국지사의 신상기록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전개과정을 새겨 놓아 관람객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였다
[촬영일 : 2022-01-09]
순국자 추모각 : 순국자 추모각은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인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신 48위 애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이다. 유관순열사 추모각 옆에 세워져 협문, 생태 연못, 휴게 쉼터, 야외조형가벽과 광장을 갖추고 있다. 특히 야외조형가벽에는 순국지사의 신상기록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전개과정을 새겨 놓아 관람객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였다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 열사 기념관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열사 초혼묘(柳寬順烈士 招魂墓) : 초혼묘는 유관순(1902~1920)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유관순열사는 3천여 군중이 참여한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운동인 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갖은 폭행과 고문으로 192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유관순 연사는 이화학당 주선으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열사의 유택은 흔적 없이 망실되었다. 이에 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1989년 10월 12일 초혼묘를 봉안하였다 [출처 : 천안 유관순 열사 사적지 안내판]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열사 초혼묘(柳寬順烈士 招魂墓) : 초혼묘는 유관순(1902~1920)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유관순열사는 3천여 군중이 참여한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운동인 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갖은 폭행과 고문으로 192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유관순 연사는 이화학당 주선으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열사의 유택은 흔적 없이 망실되었다. 이에 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1989년 10월 12일 초혼묘를 봉안하였다 [출처 : 천안 유관순 열사 사적지 안내판]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열사 초혼묘(柳寬順烈士 招魂墓) : 초혼묘는 유관순(1902~1920)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유관순열사는 3천여 군중이 참여한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운동인 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갖은 폭행과 고문으로 192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유관순 연사는 이화학당 주선으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열사의 유택은 흔적 없이 망실되었다. 이에 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1989년 10월 12일 초혼묘를 봉안하였다 [출처 : 천안 유관순 열사 사적지 안내판]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열사 봉화지(柳寬順烈士 烽火址) :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의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해 3월 31일 밤에 봉화를 올렸던 곳이다. 당시 이 봉화를 신호로 목천, 천안, 안성, 진천, 연기, 청주등 각지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봉화가 올려졌다. 거사 당일은 이른 아침부터 그의 동지들이 아우내장터로 모여 감춰두었던 대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오에는 유관순열사가 장터 높은 곳에 올라가 독립을 호소하는 비장한 연설을 하자 수많은 군중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 본 유적지를 길이 보존하고 숭고한 뜻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1977년 봉화대와 봉화탑을 건립하였다. 매년 2월 말일 봉화제를 개최하여 유관순 열사와 만세운동을 기념한다 [출처 : 천안 유관순 열사 사적지 안내판]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열사 봉화지(柳寬順烈士 烽火址) :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의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해 3월 31일 밤에 봉화를 올렸던 곳이다. 당시 이 봉화를 신호로 목천, 천안, 안성, 진천, 연기, 청주등 각지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봉화가 올려졌다. 거사 당일은 이른 아침부터 그의 동지들이 아우내장터로 모여 감춰두었던 대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오에는 유관순열사가 장터 높은 곳에 올라가 독립을 호소하는 비장한 연설을 하자 수많은 군중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 본 유적지를 길이 보존하고 숭고한 뜻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1977년 봉화대와 봉화탑을 건립하였다. 매년 2월 말일 봉화제를 개최하여 유관순 열사와 만세운동을 기념한다 [출처 : 천안 유관순 열사 사적지 안내판]
[촬영일 : 2022-01-09]
유관순열사 봉화지(柳寬順烈士 烽火址) :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의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해 3월 31일 밤에 봉화를 올렸던 곳이다. 당시 이 봉화를 신호로 목천, 천안, 안성, 진천, 연기, 청주등 각지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봉화가 올려졌다. 거사 당일은 이른 아침부터 그의 동지들이 아우내장터로 모여 감춰두었던 대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오에는 유관순열사가 장터 높은 곳에 올라가 독립을 호소하는 비장한 연설을 하자 수많은 군중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 본 유적지를 길이 보존하고 숭고한 뜻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1977년 봉화대와 봉화탑을 건립하였다. 매년 2월 말일 봉화제를 개최하여 유관순 열사와 만세운동을 기념한다 [출처 : 천안 유관순 열사 사적지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