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회수 : 15 등록일 : 2022-02-06 ]
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을 때 도성으로 쌓은 것으로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1259년 몽골에 의해 헐린 후 조선시대에 돌로 다시 쌓았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다시 파괴하여 조선 숙종 3년(1677년)에 크게 넓혀 고쳐 쌓았다. 강화산성 내성은 동서남북으로 난 대문 4개, 비밀통로인 암문 4개, 물이 흐르는 수문 2개, 관측소이자 지휘소인 남장대와 북장대가 있었다.
서문은 숙종 37년(1711년) 당시 강화유수 민진원이 세우고 첨화루(瞻華樓)라 하였다. 그 뒤 낡아서 무너진 것을 정조 20년(1796년)에 유수 김이익이 다시 고쳐 세웠으며 지금의 모습은 1977년에 수리한 것이다.
- 출처 : 강화산성 서문 안내글
내성은 1259년 몽골에 의해 헐린 후 조선시대에 돌로 다시 쌓았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다시 파괴하여 조선 숙종 3년(1677년)에 크게 넓혀 고쳐 쌓았다. 강화산성 내성은 동서남북으로 난 대문 4개, 비밀통로인 암문 4개, 물이 흐르는 수문 2개, 관측소이자 지휘소인 남장대와 북장대가 있었다.
서문은 숙종 37년(1711년) 당시 강화유수 민진원이 세우고 첨화루(瞻華樓)라 하였다. 그 뒤 낡아서 무너진 것을 정조 20년(1796년)에 유수 김이익이 다시 고쳐 세웠으며 지금의 모습은 1977년에 수리한 것이다.
- 출처 : 강화산성 서문 안내글
[촬영일 : 2022-01-14]
강화산성 서문 : 서문은 숙종 37년(1711년) 당시 강화유수 민진원이 세우고 첨화루(瞻華樓)라 하였다. 그 뒤 낡아서 무너진 것을 정조 20년(1796년)에 유수 김이익이 다시 고쳐 세웠으며 지금의 모습은 1977년에 수리한 것이다
[촬영일 : 2022-01-14]
강화산성 서문 : 서문은 숙종 37년(1711년) 당시 강화유수 민진원이 세우고 첨화루(瞻華樓)라 하였다. 그 뒤 낡아서 무너진 것을 정조 20년(1796년)에 유수 김이익이 다시 고쳐 세웠으며 지금의 모습은 1977년에 수리한 것이다
[촬영일 : 2022-01-14]
강화산성 서문 : 서문은 숙종 37년(1711년) 당시 강화유수 민진원이 세우고 첨화루(瞻華樓)라 하였다. 그 뒤 낡아서 무너진 것을 정조 20년(1796년)에 유수 김이익이 다시 고쳐 세웠으며 지금의 모습은 1977년에 수리한 것이다
[촬영일 : 2022-01-14]
강화산성 서문 : 서문은 숙종 37년(1711년) 당시 강화유수 민진원이 세우고 첨화루(瞻華樓)라 하였다. 그 뒤 낡아서 무너진 것을 정조 20년(1796년)에 유수 김이익이 다시 고쳐 세웠으며 지금의 모습은 1977년에 수리한 것이다
[촬영일 : 2022-01-14]
강화산성 서문 : 서문은 숙종 37년(1711년) 당시 강화유수 민진원이 세우고 첨화루(瞻華樓)라 하였다. 그 뒤 낡아서 무너진 것을 정조 20년(1796년)에 유수 김이익이 다시 고쳐 세웠으며 지금의 모습은 1977년에 수리한 것이다
[촬영일 : 2022-01-14]
연무당 지 : 고종 13년(1876) 강화도조약이 최초로 조인된 장소이다. 이 곳에서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의해 인천,부산,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게 되었다. 조선 고종 7년(1870)에 창건된 연무당은 지금의 상시장 군 농협 자리 서쪽에 있었는데 동소문 밖으로 옮겼다가 내성 서문에 당을 세우고 그 전면에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촬영일 : 2022-01-14]
강화산성 전경 : 연무당 옛터를 둘러싸고 있으며 서문과는 큰 길을 사이에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