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회수 : 36   등록일 : 2021-04-21 ]
독립문은 1896년 11월에 착공되어 1897년에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석조물이다. 양식은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조선시대에 중국 명나라의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1]영은문을 건립하고 근처에는 사신을 맞이하는 [2]모화관을 건립하였다. 명에 대한 조선의 관계는 청나라로 교체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조선말기 청나라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유럽열강에 식민지화 되자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에 벗어나 독립국임을 확인해야 한다는 염원으로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는 독립문을 만들기 위한 홍보용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독립문을 만들기 위해 독립협회가 창설되었다. 창립총회의 고문은 서재필,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등 이었다. 이후 이완용은 제명당했다. 

이를 토대로 하여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서재필은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았고 [3]아파나시 세레딘사바친이 설계를 했으며 비용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모금운동으로 모은 성금과 황실의 기증으로 충당했다. 그후 조선은 국권을 침탈한 일본으로 부터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독립문의 의미가 확장되었다.

독립문은 화강암으로 쌓았고, 높이는 14.28m 너비는 11.8m이다. 가운데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무지개모양의 반원형으로 만든 문)이 있고, 문 안쪽의 왼쪽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계단이 있으며,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문의 정면과 뒷면에 있는 현판석에는 각각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을 새기고 그 좌우에는 태극기를 새겼다. 현판아래 이맛돌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무늬를 새겼다.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 때문에 북서쪽으로 70m 이전하여 현재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해 코미디언 전유성은 '차라리 고가를 돌아가게 만들자는 마음이 관광 상품을 만드는 것'이라는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2009년 10월 28일에 서대문 독립공원의 재조성 공사가 완료되면서 동시에 독립문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서울독립문은 사적 제32호, 독립문 앞쪽의 기둥 두 개는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초석으로 영은문 주초로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1] 영은((迎恩) :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을 담고있다
[2] 모화((慕華) : 중국의 문물과 사상을 흠모한다는 뜻. 모화사상은 중국의 문물을 흠모하여 따르려는 사상
[3]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Afanasy Seredin-Sabatin, 1860년~1921년) : 러시아(현 우크라이나) 출신의 건축 기사로서 1883년 9월 조선에 와서 인천해관에서 근무했으며 1888년에는 궁궐 건축에 참여했다. 구 러시아 공사관도 그의 작품이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직접 목격한 2명의 외국인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서대문 독립공원내 독립문 정면 1
[촬영일 : 2020-12-01]
서대문 독립공원내 독립문 정면 1
서대문 독립공원내 독립문 정면 2 :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무지개모양의 반원형으로 만든 문)
[촬영일 : 2020-12-01]
서대문 독립공원내 독립문 정면 2 :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무지개모양의 반원형으로 만든 문)
서대문 독립공원내 독립문 뒷면 1
[촬영일 : 2020-12-01]
서대문 독립공원내 독립문 뒷면 1
서대문 독립공원내 독립문 뒷면 2
[촬영일 : 2020-12-01]
서대문 독립공원내 독립문 뒷면 2
독립문 정면앞에 있는 영은문 주초 1 :  명나라 사신을 영접을 위한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초석이다.  독립협회를 설립한 서재필은 사대 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지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의견에 따라 1896년에 모화관을 수리하여 독립관으로 하고, 영은문을 없앤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 앞쪽에 있던 초석은 1934년에 약간 남쪽을 옮겼다가 1979년 성산대로를 만들면서 독립문과 함께 지금 위치로 옮겼다.
[촬영일 : 2020-12-01]
독립문 정면앞에 있는 영은문 주초 1 : 명나라 사신을 영접을 위한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초석이다. 독립협회를 설립한 서재필은 사대 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지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의견에 따라 1896년에 모화관을 수리하여 독립관으로 하고, 영은문을 없앤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 앞쪽에 있던 초석은 1934년에 약간 남쪽을 옮겼다가 1979년 성산대로를 만들면서 독립문과 함께 지금 위치로 옮겼다.
독립문 정면앞에 있는 영은문 주초 2 :  명나라 사신을 영접을 위한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초석이다.  독립협회를 설립한 서재필은 사대 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지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의견에 따라 1896년에 모화관을 수리하여 독립관으로 하고, 영은문을 없앤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 앞쪽에 있던 초석은 1934년에 약간 남쪽을 옮겼다가 1979년 성산대로를 만들면서 독립문과 함께 지금 위치로 옮겼다.
[촬영일 : 2020-12-01]
독립문 정면앞에 있는 영은문 주초 2 : 명나라 사신을 영접을 위한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초석이다. 독립협회를 설립한 서재필은 사대 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지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의견에 따라 1896년에 모화관을 수리하여 독립관으로 하고, 영은문을 없앤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 앞쪽에 있던 초석은 1934년에 약간 남쪽을 옮겼다가 1979년 성산대로를 만들면서 독립문과 함께 지금 위치로 옮겼다.
서재필(1864년~1951년) : 조선의 문신, 대한제국의 정치인·언론인이자, 미국국적의 독립운동가·의사이다. 1884년 갑신정변 주역의 1인으로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1894년 갑신정변 징계가 풀리자 박영효의 제안으로 미국시민으로 조선에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민중을 바탕으로 한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미국에서 병리학자·의사·시인·소설가로 활동하였다. 1977년 11월 30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촬영일 : 2020-12-01]
서재필(1864년~1951년) : 조선의 문신, 대한제국의 정치인·언론인이자, 미국국적의 독립운동가·의사이다. 1884년 갑신정변 주역의 1인으로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1894년 갑신정변 징계가 풀리자 박영효의 제안으로 미국시민으로 조선에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민중을 바탕으로 한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미국에서 병리학자·의사·시인·소설가로 활동하였다. 1977년 11월 30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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