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회수 : 81   등록일 : 2020-12-17 ]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다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1]고종의 [2]잠저이며 [6]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흥선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6]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기도 하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2]잠저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흥선대원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3]철종 때 옛 [4]관상감 터였던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내용의 민요가 항간에 유행하였으며, 고종이 등극한 후 대원군이 운현궁 터를 다시 확장하였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었으며, 서운관은 세조때
[4]관상감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다. 서운관의 명칭인 운관(雲觀)과 운관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 운현(雲峴)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고종의 [1]잠저는 당시 대왕대비 교지를 받들어 영의정 김좌근, 도승지 민치상, 기사관 박해철·김병익 등 일행이 명복(明福-고종의 이름)에게 [7]익종의 대통을 계승토록 하기 위하여 고종을 맞이하러 흥선군 사저에 갔을 때 흥선군의 위엄 있는 자세와 그의 둘째 아들인 명복의 천진스러웠던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서 운현궁이 고종의 잠저였음을 알 수 있다.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5]이왕직이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운현궁의 안채)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했다.

1864년(고종1년)에 노안당과 노락당을 짓고 1869년(고종6년)에는 이로당과 영로당을 세웠다. 창덕궁을 쉽게 드나들도록 고종 전용 경근문과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문을 두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후 큰 아들인 이재면을 거쳐 손자 이준용에게 상속되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상당 부분이 팔리면서 운현궁의 규모가 크게 줄었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의 공문에 의해서였다. 이후 그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었으나 그 해 9월 21일 결국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 1936- )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양도 의사를 이청씨가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이다.

[출처]
 -
운현궁 소개(http://www.unhyeongung.or.kr/0101.php)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나무위키

[1]고종(1852년~1919년) : 조선의 제26대 국왕(재위:1864년~1895년)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1897년~1907년)
[2] 잠저(潛邸) : 국왕이 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사저. 국왕에게 잠저가 있다는 것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하지 못했음을 뜻한다(혁명,반정,추대)
[3] 철종(1831년~1864년) : 조선의 제25대 국왕(재위: 1849년~1864년)
[4] 관상감(觀象監) : 조선시대에 존재하였던 기구로 천문.지리.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등의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현재의 기상청)
[5] 이왕직(李王職) :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대한제국 황족의 의전 및 대한제국 황족(이왕가,李王家)과 관련된 사무를 담당하던 기구. 기존의 황실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를 이왕가로 격하하여 1910년에 설치되었다. 해방 이후 1945년에 미군정 휘하 '구황실재산사무청'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6] 흥선대원군(1821년~1898년) :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본명은 이하응이며 고종의 친부
[7] 익종(1812년~1830년) : 조선의 제23대 국왕 순조의 장자. 추존왕. 효명세자. 대리청정 수행시 사망하여 그의 아들인 헌종이 제24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내부모습  3
[촬영일 : 2015-07-15]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내부모습 3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부엌 4
[촬영일 : 2015-07-15]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부엌 4
운현궁 현판
[촬영일 : 2020-07-25]
운현궁 현판
운현궁 입구
[촬영일 : 2020-07-25]
운현궁 입구
운현궁 전경
[촬영일 : 2020-07-25]
운현궁 전경
흥선대원군 : 조선시대 왕족·정치가. 본명은 이하응. 영조의 현손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넷째 아들이며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운현궁 유물전시관 전시 )
[촬영일 : 2020-07-25]
흥선대원군 : 조선시대 왕족·정치가. 본명은 이하응. 영조의 현손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넷째 아들이며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운현궁 유물전시관 전시 )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 노락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로서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라는 뜻이 담겨있다.노락당은 운현궁의 안채로서 노안당과 같은 해인 1864년(고종1년)에 지었다. 정면 10칸, 측면 3칸으로 평면은 일(一)자형인데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온돌방을 앞뒤로는 툇간을 둔 궁궐 내전 평면구성을 보여준다. 복도각을 통해 이로당까지 이어지게 한 방식은 운현궁의 특생이다. 노락당은 운형궁안에서 유일하게 기둥머리에 익공(새 날개 모양으로 뾰족하게 생긴 공포의 일종)을 장식하여 가장 높은 위계를 드러낸다. 여러 세부기법은 조선말기 궁궐건축에 버금가는 수법으로 손꼽힌다. 1866년(고종3년) 고종과 명성황후는 노락당에서 가례를 올렸다 (촐처 : 운현궁 노락당 안내판)
[촬영일 : 2020-07-25]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 노락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로서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라는 뜻이 담겨있다.노락당은 운현궁의 안채로서 노안당과 같은 해인 1864년(고종1년)에 지었다. 정면 10칸, 측면 3칸으로 평면은 일(一)자형인데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온돌방을 앞뒤로는 툇간을 둔 궁궐 내전 평면구성을 보여준다. 복도각을 통해 이로당까지 이어지게 한 방식은 운현궁의 특생이다. 노락당은 운형궁안에서 유일하게 기둥머리에 익공(새 날개 모양으로 뾰족하게 생긴 공포의 일종)을 장식하여 가장 높은 위계를 드러낸다. 여러 세부기법은 조선말기 궁궐건축에 버금가는 수법으로 손꼽힌다. 1866년(고종3년) 고종과 명성황후는 노락당에서 가례를 올렸다 (촐처 : 운현궁 노락당 안내판)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부엌 1
[촬영일 : 2020-07-25]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부엌 1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부엌 2
[촬영일 : 2020-07-25]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부엌 2
운현궁 후원에서 바라본 노락당 북행각(정면)과 이로당 동행각(우측)
[촬영일 : 2020-07-25]
운현궁 후원에서 바라본 노락당 북행각(정면)과 이로당 동행각(우측)
운현궁 유물전시관 조선시대 상궁의 청녹색 당의와 명성황후의 홍색 노의(노의: 왕실 여성과 대군부인등 정4품 이상의 정실부인이 길을 갈때 착용한 의복, 당의 : 치마저고리 위에 겹쳐입는 저고리 형태의 겉옷)
[촬영일 : 2020-07-25]
운현궁 유물전시관 조선시대 상궁의 청녹색 당의와 명성황후의 홍색 노의(노의: 왕실 여성과 대군부인등 정4품 이상의 정실부인이 길을 갈때 착용한 의복, 당의 : 치마저고리 위에 겹쳐입는 저고리 형태의 겉옷)
운현궁 뒷켠전경
[촬영일 : 2021-01-29]
운현궁 뒷켠전경
운현궁 현판과 입구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현판과 입구
운현궁 수직사(守直舍) : 운현궁 정문 오른쪽에 있으며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여 궁에서 파견된 경관들과 관리인들이 많았다. 사적 제 257호 (출처 : 운현궁 수직사 안내판)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수직사(守直舍) : 운현궁 정문 오른쪽에 있으며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여 궁에서 파견된 경관들과 관리인들이 많았다. 사적 제 257호 (출처 : 운현궁 수직사 안내판)
운현궁 입구에 들어서면 수려한 수목과 너른 마당이 펼쳐져 있다.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입구에 들어서면 수려한 수목과 너른 마당이 펼쳐져 있다.
운형궁의 사랑채인 노안당 입구
[촬영일 : 2022-01-29]
운형궁의 사랑채인 노안당 입구
운현궁의 안채인 노락당과 이로당으로 들어가는 입구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의 안채인 노락당과 이로당으로 들어가는 입구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1 :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엿다. 노안은 논어 가운데 '노자(老子)를 안지(安之)하며'라는 구절에서 따왔는데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노안당은 노락당과 함께 1864년(고종1년)에 건립하였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명 3칸이고 공간 구성과 깔끔한 목조구조, 세부기법은 궁권에 버금가는 품격을 보여준다 (출처 : 운현궁 노안당 안내판)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1 :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엿다. 노안은 논어 가운데 '노자(老子)를 안지(安之)하며'라는 구절에서 따왔는데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노안당은 노락당과 함께 1864년(고종1년)에 건립하였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명 3칸이고 공간 구성과 깔끔한 목조구조, 세부기법은 궁권에 버금가는 품격을 보여준다 (출처 : 운현궁 노안당 안내판)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3 :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엿다. 노안은 논어 가운데 '노자(老子)를 안지(安之)하며'라는 구절에서 따왔는데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노안당은 노락당과 함께 1864년(고종1년)에 건립하였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명 3칸이고 공간 구성과 깔끔한 목조구조, 세부기법은 궁권에 버금가는 품격을 보여준다 (출처 : 운현궁 노안당 안내판)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3 :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엿다. 노안은 논어 가운데 '노자(老子)를 안지(安之)하며'라는 구절에서 따왔는데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노안당은 노락당과 함께 1864년(고종1년)에 건립하였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명 3칸이고 공간 구성과 깔끔한 목조구조, 세부기법은 궁권에 버금가는 품격을 보여준다 (출처 : 운현궁 노안당 안내판)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2 :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엿다. 노안은 논어 가운데 '노자(老子)를 안지(安之)하며'라는 구절에서 따왔는데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노안당은 노락당과 함께 1864년(고종1년)에 건립하였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명 3칸이고 공간 구성과 깔끔한 목조구조, 세부기법은 궁권에 버금가는 품격을 보여준다 (출처 : 운현궁 노안당 안내판)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2 :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엿다. 노안은 논어 가운데 '노자(老子)를 안지(安之)하며'라는 구절에서 따왔는데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노안당은 노락당과 함께 1864년(고종1년)에 건립하였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명 3칸이고 공간 구성과 깔끔한 목조구조, 세부기법은 궁권에 버금가는 품격을 보여준다 (출처 : 운현궁 노안당 안내판)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뒷마당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뒷마당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내부 모습 1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내부 모습 1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내부 모습 2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내부 모습 2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내부에서 바라본 입구와 노안당 서행각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내부에서 바라본 입구와 노안당 서행각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서행각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서행각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뒷마당과 서행각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안당(老安當) 뒷마당과 서행각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 노락당은 운현궁의 안채로서 노안당과 같은 해인 1864년(고종1년)에 지었다. 정면 10칸, 측면 3칸으로 평면은 일(一)자형인데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온돌방을 앞뒤로는 툇간을 둔 궁궐 내전 평면구성을 보여준다. 복도각을 통해 이로당까지 이어지게 한 방식은 운형궁의 특생이다. 노락당은 운현궁안에서 유일하게 기둥머리에 익공(새 날개 모양으로 뾰족하게 생긴 공포의 일종)을 장식하여 가장 높은 위계를 드러낸다. 여러 세부기법은 조선말기 궁궐건축에 버금가는 수법으로 손꼽힌다. 1866년(고종3년) 고종과 명성황후는 노락당에서 가례를 올렸다 (촐처 : 운현궁 노락당 안내판)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 노락당은 운현궁의 안채로서 노안당과 같은 해인 1864년(고종1년)에 지었다. 정면 10칸, 측면 3칸으로 평면은 일(一)자형인데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온돌방을 앞뒤로는 툇간을 둔 궁궐 내전 평면구성을 보여준다. 복도각을 통해 이로당까지 이어지게 한 방식은 운형궁의 특생이다. 노락당은 운현궁안에서 유일하게 기둥머리에 익공(새 날개 모양으로 뾰족하게 생긴 공포의 일종)을 장식하여 가장 높은 위계를 드러낸다. 여러 세부기법은 조선말기 궁궐건축에 버금가는 수법으로 손꼽힌다. 1866년(고종3년) 고종과 명성황후는 노락당에서 가례를 올렸다 (촐처 : 운현궁 노락당 안내판)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남행각: 뒷편에 있는 석조건물은 운현궁 양관 건물로 운현궁의 건물이었으나 현재 덕성여대 소유로 평생교육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남행각: 뒷편에 있는 석조건물은 운현궁 양관 건물로 운현궁의 건물이었으나 현재 덕성여대 소유로 평생교육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내부 모습 1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내부 모습 1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내부 모습 2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내부 모습 2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광(창고)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광(창고)
운형궁 노락당(老樂堂) 부엌 3
[촬영일 : 2022-01-29]
운형궁 노락당(老樂堂) 부엌 3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외부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외부
좌측은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뒷마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우측의 문은 운현궁 앞마당에서 노락당과 이로당으로 들어오는  입구이다
[촬영일 : 2022-01-29]
좌측은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뒷마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우측의 문은 운현궁 앞마당에서 노락당과 이로당으로 들어오는 입구이다
운현궁 이로당(二老當) :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로 쓰였다. 이로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민씨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한다. 1866년(고종3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이후, 그들이 운현궁을 방문할 때 노락당을 거처로 사용하였다. 노락당이 안채에서 별궁으로 역할이 바뀌자 새로운 안채가 필요해졌고 노안당보다 뒤늦은 1869년(고종6년)에 이로당을 지었다. 이로다 뒤편의 '운니동 김승현 가옥(민속문화재 제19호)'은 원래 운현궁에 속한 건물 중 하나로 영로당(永老當)이라 불렀다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이로당(二老當) :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로 쓰였다. 이로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민씨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한다. 1866년(고종3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이후, 그들이 운현궁을 방문할 때 노락당을 거처로 사용하였다. 노락당이 안채에서 별궁으로 역할이 바뀌자 새로운 안채가 필요해졌고 노안당보다 뒤늦은 1869년(고종6년)에 이로당을 지었다. 이로다 뒤편의 '운니동 김승현 가옥(민속문화재 제19호)'은 원래 운현궁에 속한 건물 중 하나로 영로당(永老當)이라 불렀다
운현궁 이로당(二老當) 내부 모습 1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이로당(二老當) 내부 모습 1
운현궁 이로당(二老當) 내부 모습 2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이로당(二老當) 내부 모습 2
운현궁 이로당(二老當) 뒤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이로당(二老當) 뒤
운현궁 이로당(二老當) :  좌측은 이로당, 정면은 이로당 동행각, 우측은 노락당 북행각이다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이로당(二老當) : 좌측은 이로당, 정면은 이로당 동행각, 우측은 노락당 북행각이다
운현궁 후원에서 바라본 노락당 북행각, 우측은 이로당 동행각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후원에서 바라본 노락당 북행각, 우측은 이로당 동행각
운현궁 후원에서 이로당 동행각 통로에서 바라본 이로당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후원에서 이로당 동행각 통로에서 바라본 이로당
경송비(慶松碑) : 고종이 어린 시절 오르던 소나무로 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간 후에 소나무가 그리워 정이품송 관직을 주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때 고사되고 정이품송 대부송이 있었던 정확한 위치는 불문명해졌다. 경송비는 서울시가 운현궁을 인수할 때 정이품송의 위치를 확인하여 현재의 위치인 이로당 후원에 세웠다고 한다
[촬영일 : 2022-01-29]
경송비(慶松碑) : 고종이 어린 시절 오르던 소나무로 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간 후에 소나무가 그리워 정이품송 관직을 주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때 고사되고 정이품송 대부송이 있었던 정확한 위치는 불문명해졌다. 경송비는 서울시가 운현궁을 인수할 때 정이품송의 위치를 확인하여 현재의 위치인 이로당 후원에 세웠다고 한다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뒷마당 : 우측은 노락당 북행각이다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뒷마당 : 우측은 노락당 북행각이다
운현궁 앞마당 1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앞마당 1
운현궁 앞마당 2 : 이로당과 노락당이 있는 담장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앞마당 2 : 이로당과 노락당이 있는 담장
운현궁 유물전시관
[촬영일 : 2022-01-29]
운현궁 유물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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