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Vietnam War)
베트남
사건기간 : 1955년 11월 1일~1975년 4월 30일, 조회수 : 413, 등록일 : 2020-04-09
베트남 전쟁은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선으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Second Indochina war)이라고도 한다.
베트남은 항미전쟁이라고 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남전으로 부른다.
이 전쟁은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의 내전으로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 전쟁 양상을 띠었다.
1964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하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전선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치러졌다.
미국은 [2]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1964년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남베트남을 수호하려던 미국은 결국 북베트남의 20여년동안 끈질긴 공세와 저항에 지치게 되고 미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1973년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미군이 철수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공세에 패배하였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호찌민까지 함락되면서 기나긴 전쟁은 종결된다. 그리하여 1976년 베트남은 통일을 선언하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 1946년 12월 19일 ~ 1954년 8월 1일) : 프랑스-베트남 전쟁. 베트남 독립전쟁
[2]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 : 1964년 8월 2일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의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함을 공격한 사건
베트남은 항미전쟁이라고 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남전으로 부른다.
이 전쟁은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의 내전으로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 전쟁 양상을 띠었다.
1964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하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전선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치러졌다.
미국은 [2]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1964년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남베트남을 수호하려던 미국은 결국 북베트남의 20여년동안 끈질긴 공세와 저항에 지치게 되고 미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1973년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미군이 철수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공세에 패배하였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호찌민까지 함락되면서 기나긴 전쟁은 종결된다. 그리하여 1976년 베트남은 통일을 선언하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 1946년 12월 19일 ~ 1954년 8월 1일) : 프랑스-베트남 전쟁. 베트남 독립전쟁
[2]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 : 1964년 8월 2일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의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함을 공격한 사건
- 해당되는 데이터가 없습니다.
해당되는 데이터가 없습니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이집트를 공격해 일어난 전쟁으로 제2차 중동 전쟁 또는 수에즈 위기로 불린다. 아랍권에서는 삼국 동맹 공격(침략)이라고 부르고 이스라엘은 시나이(Sinai) 전쟁이라 불린다.
1922년 이집트는 영국에서 독립하였지만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주주가 운영하는 기업을 소유하고 있어 영국등이 통제하고 있었다.
195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집트 대통령 [2]나세르는 소련의 지지를 얻어 1956년 [1]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크게 반발하였고 이스라엘 역시 자신들의 선박이 수에즈 운하의 통과를 금지당하는 데 크게 반발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 침공을 개시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뒤이어 이집트에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의 목표는 수에즈 운하의 통치권을 영국과 프랑스가 회복하고 [2]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를 권력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이스라엘군은 국경인 시나이 반도 방향에서 시작된 공세로 11월 5일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3]시나이반도의 최남단까지 점령하였다. 여기에 영국 공수부대와 프랑스 부대가 도착하여 이집트는 3면에서 공격을 받기 직전까지 갔다.
이로 인하여 미국은 소련과 전면적으로 번져 세계대전으로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여 유엔을 통하여 영국과 프랑스에 정치적 압박을 가했고 결국은 1956년 11월 6일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철수하고 , 이어서 1957년 3월 이스라엘군이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은종결되었다.
이 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패권이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반면 이집트는 전쟁에서는 졌지만 수에즈 운하를 지켜내었고, 이로 인하여 나세르는 서구의 침략을 물리친 영웅으로 급부상하게 되어 이집트가 중동의 맹주가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전쟁이 끝난 뒤 영국과 프랑슨,ㄴ 미국이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독자적인 핵개발에 나선다.
[1] 수에즈 운하(Suez Canal) :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이집트의 운하. 1869년에 완공되었다
[2]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 : 이집트 제2대 대통령(임기:1956~1970)
[3] 시나이반도(Sinai Peninsula) : 이집트의 영토로 지중해와 홍해 사이에 있는 삼각형 모양의 반도. 서쪽은 수에즈 운하와 수에즈만으로 동쪽은 이집트-이스라엘 국경과 아카바만이 위치해 있다
1922년 이집트는 영국에서 독립하였지만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주주가 운영하는 기업을 소유하고 있어 영국등이 통제하고 있었다.
195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집트 대통령 [2]나세르는 소련의 지지를 얻어 1956년 [1]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크게 반발하였고 이스라엘 역시 자신들의 선박이 수에즈 운하의 통과를 금지당하는 데 크게 반발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 침공을 개시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뒤이어 이집트에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의 목표는 수에즈 운하의 통치권을 영국과 프랑스가 회복하고 [2]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를 권력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이스라엘군은 국경인 시나이 반도 방향에서 시작된 공세로 11월 5일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3]시나이반도의 최남단까지 점령하였다. 여기에 영국 공수부대와 프랑스 부대가 도착하여 이집트는 3면에서 공격을 받기 직전까지 갔다.
이로 인하여 미국은 소련과 전면적으로 번져 세계대전으로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여 유엔을 통하여 영국과 프랑스에 정치적 압박을 가했고 결국은 1956년 11월 6일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철수하고 , 이어서 1957년 3월 이스라엘군이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은종결되었다.
이 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패권이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반면 이집트는 전쟁에서는 졌지만 수에즈 운하를 지켜내었고, 이로 인하여 나세르는 서구의 침략을 물리친 영웅으로 급부상하게 되어 이집트가 중동의 맹주가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전쟁이 끝난 뒤 영국과 프랑슨,ㄴ 미국이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독자적인 핵개발에 나선다.
[1] 수에즈 운하(Suez Canal) :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이집트의 운하. 1869년에 완공되었다
[2]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 : 이집트 제2대 대통령(임기:1956~1970)
[3] 시나이반도(Sinai Peninsula) : 이집트의 영토로 지중해와 홍해 사이에 있는 삼각형 모양의 반도. 서쪽은 수에즈 운하와 수에즈만으로 동쪽은 이집트-이스라엘 국경과 아카바만이 위치해 있다
대약진운동은 [1]마오쩌둥의 주도하에 1958년부터 1962년경까지 실시되었던 경제, 사회 개발 운동이다.
대규모 경제·사회적 운동으로, 공산주의 이상을 실현하고 농업과 공업 생산을 급속히 증대시키려는 목표로 시작되었다. 내수 시장과 자국 생산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을 이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농업 집단화를 통해 생산성 극대화, 철강 생산 증대를 위해 농촌에서도 소규모 제철소 설치, 공산주의 사회로 빠르게 전환하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되었으나, 잘못된 계획과 과장된 생산목표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비현실적 정책과 자원의 낭비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였다. 약 1500만~45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아사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과는 중국 경제와 사회에 막대한 혼란을 야기하며, 실패로 평가되었으며, [1]마오쩌둥의 정치적 권위가 약화되었다.
대약진운동은 1966년에 일어난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1]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Mao Zedong, 1893년~1976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대규모 경제·사회적 운동으로, 공산주의 이상을 실현하고 농업과 공업 생산을 급속히 증대시키려는 목표로 시작되었다. 내수 시장과 자국 생산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을 이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농업 집단화를 통해 생산성 극대화, 철강 생산 증대를 위해 농촌에서도 소규모 제철소 설치, 공산주의 사회로 빠르게 전환하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되었으나, 잘못된 계획과 과장된 생산목표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비현실적 정책과 자원의 낭비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였다. 약 1500만~45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아사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과는 중국 경제와 사회에 막대한 혼란을 야기하며, 실패로 평가되었으며, [1]마오쩌둥의 정치적 권위가 약화되었다.
대약진운동은 1966년에 일어난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1]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Mao Zedong, 1893년~1976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상북도 대구시의 8개 고교 학생들이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과 [1]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여 2월 28일에 일어난 학생의거이다. 2.28 학생민주의거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최초의 민주화운동이었으며, 2018년 2월 6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일요일이었던 1960년 2월 28일은 대구 수성천변에서 야당 부통령 후보인 [2]장면 후보의 선거 연설이 계획되어 있었다. 장면 후보의 유세장에 많은 인원이 모이는 것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는 이를 방지하고자 학생들이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학교 등교를 지시를 내린것이다.
경북고등학교는 3월 3일부터 예정되었던 중간고사가 앞당겨 변경되었다는 사유를 들어 학교 등교를 강요하였다. 이외에 대구 시내에 있던 다른 국공립 고등학교 7개 역시 토끼사냥, 영화관람, 졸업생 송별회등과 같이 다채롭고 궁색하고 황당한 사유로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각 학교는 부당함을 지적하고 등교 철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2월 28일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대구시청등 대구 시내를 돌며 시위를 하였다.
각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커졌으며, 8개 학교 총 1,2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그 중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였다.
이 시위는 하루 만에 끝났지만, 이후 전국으로 번지면서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8개 고교와 등교사유는 다음과 같다
- 경북고등학고 : 중간고사
- 대구고등학교 : 토끼사냥
-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 임시수업
-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 졸업생 송별회
- 대구농림고등학교(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
- 대구공업고등학교
- 경북여자고등학고 : 무조건 등교
- 대구여자고등학교 : 무용발표회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일요일이었던 1960년 2월 28일은 대구 수성천변에서 야당 부통령 후보인 [2]장면 후보의 선거 연설이 계획되어 있었다. 장면 후보의 유세장에 많은 인원이 모이는 것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는 이를 방지하고자 학생들이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학교 등교를 지시를 내린것이다.
경북고등학교는 3월 3일부터 예정되었던 중간고사가 앞당겨 변경되었다는 사유를 들어 학교 등교를 강요하였다. 이외에 대구 시내에 있던 다른 국공립 고등학교 7개 역시 토끼사냥, 영화관람, 졸업생 송별회등과 같이 다채롭고 궁색하고 황당한 사유로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각 학교는 부당함을 지적하고 등교 철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2월 28일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대구시청등 대구 시내를 돌며 시위를 하였다.
각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커졌으며, 8개 학교 총 1,2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그 중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였다.
이 시위는 하루 만에 끝났지만, 이후 전국으로 번지면서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8개 고교와 등교사유는 다음과 같다
- 경북고등학고 : 중간고사
- 대구고등학교 : 토끼사냥
-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 임시수업
-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 졸업생 송별회
- 대구농림고등학교(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
- 대구공업고등학교
- 경북여자고등학고 : 무조건 등교
- 대구여자고등학교 : 무용발표회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1]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어 일어난 시민 혁명이다.
2월 28일 대구학생의거를 시작으로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15부정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민주화를 외치던 3.15마산의거에 참여한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2]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이 왼쪽 눈에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보도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 후 괴한에 의해 습격을 당한 것이 알려져 반정부 정서가 점차 심화되었다.
4월 19일 수많은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와 자유당의 독재규탄을 외치며 국회의사당과 [6]경무대를 향해 나아갔다.
경무대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치열한 대치 끝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시위대 100여 명이 사망했으며,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2018년 4.19혁명 58주년을 맞아 종로구 청와대앞 분수광장 바닥에는 4.19 최초 발포현장 표지석을 설치했다.
전 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다.
이승만의 하야로 당시 외무부장관인 [3]허정은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과도정부는 제1공화국헌법을 개정하여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7월 29일 총선거를 거쳐서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4]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그 해 8월 18일 [5]장면이 총리로 지명되었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김주열(1944년~1960년) : 3·15 민주화의거중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 허정(1896년~1988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 서울특별시장, 외무부장관, 이승만 하야후 대통령 권한대행등을 역임
[4]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5]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6]경무대(景武臺) : 현재의 청와대로 2022년 5월 9일까지 사용한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
2월 28일 대구학생의거를 시작으로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15부정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민주화를 외치던 3.15마산의거에 참여한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2]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이 왼쪽 눈에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보도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 후 괴한에 의해 습격을 당한 것이 알려져 반정부 정서가 점차 심화되었다.
4월 19일 수많은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와 자유당의 독재규탄을 외치며 국회의사당과 [6]경무대를 향해 나아갔다.
경무대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치열한 대치 끝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시위대 100여 명이 사망했으며,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2018년 4.19혁명 58주년을 맞아 종로구 청와대앞 분수광장 바닥에는 4.19 최초 발포현장 표지석을 설치했다.
전 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다.
이승만의 하야로 당시 외무부장관인 [3]허정은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과도정부는 제1공화국헌법을 개정하여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7월 29일 총선거를 거쳐서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4]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그 해 8월 18일 [5]장면이 총리로 지명되었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김주열(1944년~1960년) : 3·15 민주화의거중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 허정(1896년~1988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 서울특별시장, 외무부장관, 이승만 하야후 대통령 권한대행등을 역임
[4]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5]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6]경무대(景武臺) : 현재의 청와대로 2022년 5월 9일까지 사용한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
3.15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의 개표조작이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여당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는 [1]이승만, 부통령 후보는 [2]이기붕이었으며, 야당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3]조병옥, 부통령 후보는 [4]장면이었다.
1960년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신병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으로 떠났으나 선거일 한달전인 2월 15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은 당선이 확정적었다.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조병옥 2명이었으므로 조병옥이 사망했으니 이승만은 유일한 후보가 된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전체 유권자의 30%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당선되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3·15 부정선거는 이전의 선거 부정과 달리 사전 계획에 의해 자행되었다. 재판기록에 의하면, [6]최인규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던 1959년 3월부터 부정선거에 대한 기획과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준비된 부정선거의 기획은 광범위하고 구체적이었다.
부정선거에서 사용된 가장 핵심적인 수단은 4할 사전선거였다. 이는 선거인 명부를 허위기재하거나 유령유권자를 만들고 나아가 유권자를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투표용지를 미리 빼돌리는 것이었다. 그 밖에 3인조 9인조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이 사전에 준비, 계획되었다.
3월 15일 마침내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종료되었다.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95%∼99%까지 나온 지역이 속출하였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은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에게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역에서 감표로 조정하여 최종집계는 이승만 88% 득표, 이기붕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나 당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표와 개표상의 부정행위에 대한 전국민의 저항은 3월 15일 저녁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찰의 무자비한 강경대응으로 마산시민이 사망 및 부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는 더 격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마산에서 시작된 3.15마산의거는 전국적인 규모의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내각책임제 헌법이 공포되어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공포된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5]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 18일 장면은 총리로 지명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기록원 - 나라기록포털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이기붕(1896년~1960년) : 대한민국 제3대 국방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
[3] 조병옥(1894년~1960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
[4]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5]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6] 최인규(1919년~1961년) : 대한민국 제18대 내무부 장관(1959년 3월 20일~1960년 3월 23일), 제7대 교통부 장관(1958년 9월 9일~1959년 3월 20일).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으로 1961년 12월 21일 교수형당한다
당시 여당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는 [1]이승만, 부통령 후보는 [2]이기붕이었으며, 야당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3]조병옥, 부통령 후보는 [4]장면이었다.
1960년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신병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으로 떠났으나 선거일 한달전인 2월 15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은 당선이 확정적었다.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조병옥 2명이었으므로 조병옥이 사망했으니 이승만은 유일한 후보가 된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전체 유권자의 30%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당선되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3·15 부정선거는 이전의 선거 부정과 달리 사전 계획에 의해 자행되었다. 재판기록에 의하면, [6]최인규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던 1959년 3월부터 부정선거에 대한 기획과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준비된 부정선거의 기획은 광범위하고 구체적이었다.
부정선거에서 사용된 가장 핵심적인 수단은 4할 사전선거였다. 이는 선거인 명부를 허위기재하거나 유령유권자를 만들고 나아가 유권자를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투표용지를 미리 빼돌리는 것이었다. 그 밖에 3인조 9인조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이 사전에 준비, 계획되었다.
3월 15일 마침내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종료되었다.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95%∼99%까지 나온 지역이 속출하였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은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에게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역에서 감표로 조정하여 최종집계는 이승만 88% 득표, 이기붕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나 당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표와 개표상의 부정행위에 대한 전국민의 저항은 3월 15일 저녁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찰의 무자비한 강경대응으로 마산시민이 사망 및 부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는 더 격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마산에서 시작된 3.15마산의거는 전국적인 규모의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내각책임제 헌법이 공포되어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공포된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5]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 18일 장면은 총리로 지명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기록원 - 나라기록포털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이기붕(1896년~1960년) : 대한민국 제3대 국방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
[3] 조병옥(1894년~1960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
[4]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5]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6] 최인규(1919년~1961년) : 대한민국 제18대 내무부 장관(1959년 3월 20일~1960년 3월 23일), 제7대 교통부 장관(1958년 9월 9일~1959년 3월 20일).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으로 1961년 12월 21일 교수형당한다
과테말라 내전, 흔히 "30년 전쟁"이라 불리는 이 분쟁은 냉전 구조 속에서 정치·사회·민족 갈등이 결합된 복합적 충돌이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토지 불평등, 군부 독재, 원주민 차별, 그리고 외세 개입이 중첩되며 점차 격화된 구조적 갈등의 산물이었다.
내전의 직접적 계기는 1960년 11월 13일 일부 군 장교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반정부 세력은 게릴라 조직으로 재편되어 장기적인 무장 투쟁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익 게릴라 조직들이 형성되었고 특히 후기에 이르러서는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이 주요 반군 연합체로 등장하였다.
이 내전의 배경에는 1954년 미국의 후원을 받은 과테말라 쿠데타로 [1]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전복되고 군부 중심의 권위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억압이 심화되었고 토지 개혁이 중단되며 농민과 원주민의 불만이 극대화되었다. 특히 마야계 원주민들은 경제적 소외와 함께 정치적 배제 속에서 가장 큰 피해 집단으로 남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다. 군사 정권은 좌익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강제 실종, 고문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2]에프라인 리오스 몬트가 집권한 1982년부터 1983년 사이에는 "초토화 작전"이라 불리는 강경 정책이 시행되었고 수백 개의 마을이 파괴되며 수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도 집단학살(genocide) 논쟁이 제기될 만큼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된 시기였다.
내전 기간 동안 미국은 냉전 구도 속에서 반공 정책을 이유로 과테말라 정부를 군사·경제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는 군부의 강경 진압을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게릴라 세력은 농민과 일부 도시 지식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정부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열과 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제 사회의 인권 압력과 냉전 종식 분위기 속에서 평화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1990년대에는 유엔의 중재 아래 정부와 반군 간 협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1996년 12월 29일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36년에 걸친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해 약 20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그 중 대다수는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UN이 지원한 역사규명위원회(CEH)의 보고에 따르면 피해자의 83%가 마야계 원주민으로 단순한 이념 갈등을 넘어 민족적 탄압의 성격이 강했다. 가해 행위의 93%가 정부군 및 준군사조직에 의해 저질러졌음이 밝혀졌다.
이 전쟁은 과테말라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과거사 청산과 사회적 화합은 과테말라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남아 있다.
[1]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1914년 11월 4일 ~ 1957년 7월 26일) : 제28대 대통령(재임기간, 1954년 7월 8일 ~ 1957년 7월 26일). 1957년 7월 26일 대통령 근위대 소속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58년부터 보수 세력 출신인 이디고라스(Miguel Ydígoras Fuentes, 1958-1963)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6년 동안의 과테말라 내전이 시작되었다.
[2]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Efraín Ríos Montt, 1926년 6월 16일~2018년 4월 1일) : 과테말라의 제38대 대통령(임기, 1982년 3월 23일~1983년 8월 8일)
내전의 직접적 계기는 1960년 11월 13일 일부 군 장교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반정부 세력은 게릴라 조직으로 재편되어 장기적인 무장 투쟁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익 게릴라 조직들이 형성되었고 특히 후기에 이르러서는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이 주요 반군 연합체로 등장하였다.
이 내전의 배경에는 1954년 미국의 후원을 받은 과테말라 쿠데타로 [1]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전복되고 군부 중심의 권위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억압이 심화되었고 토지 개혁이 중단되며 농민과 원주민의 불만이 극대화되었다. 특히 마야계 원주민들은 경제적 소외와 함께 정치적 배제 속에서 가장 큰 피해 집단으로 남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다. 군사 정권은 좌익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강제 실종, 고문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2]에프라인 리오스 몬트가 집권한 1982년부터 1983년 사이에는 "초토화 작전"이라 불리는 강경 정책이 시행되었고 수백 개의 마을이 파괴되며 수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도 집단학살(genocide) 논쟁이 제기될 만큼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된 시기였다.
내전 기간 동안 미국은 냉전 구도 속에서 반공 정책을 이유로 과테말라 정부를 군사·경제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는 군부의 강경 진압을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게릴라 세력은 농민과 일부 도시 지식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정부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열과 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제 사회의 인권 압력과 냉전 종식 분위기 속에서 평화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1990년대에는 유엔의 중재 아래 정부와 반군 간 협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1996년 12월 29일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36년에 걸친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해 약 20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그 중 대다수는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UN이 지원한 역사규명위원회(CEH)의 보고에 따르면 피해자의 83%가 마야계 원주민으로 단순한 이념 갈등을 넘어 민족적 탄압의 성격이 강했다. 가해 행위의 93%가 정부군 및 준군사조직에 의해 저질러졌음이 밝혀졌다.
이 전쟁은 과테말라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과거사 청산과 사회적 화합은 과테말라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남아 있다.
[1]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1914년 11월 4일 ~ 1957년 7월 26일) : 제28대 대통령(재임기간, 1954년 7월 8일 ~ 1957년 7월 26일). 1957년 7월 26일 대통령 근위대 소속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58년부터 보수 세력 출신인 이디고라스(Miguel Ydígoras Fuentes, 1958-1963)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6년 동안의 과테말라 내전이 시작되었다.
[2]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Efraín Ríos Montt, 1926년 6월 16일~2018년 4월 1일) : 과테말라의 제38대 대통령(임기, 1982년 3월 23일~1983년 8월 8일)
4.19혁명 이후 정치.사회의 혼란을 틈타 군내의 [1]정군운동으로 정치지향적 군인이 조직화되어 세력을 넓혀나갔다.
1961년 5월 16일에 [2]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군사정변(쿠데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후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회를 해산하였다.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라 개명하고 5월 20일 혁명내각을 발표함으로써 군인들이 통치하는 군사정권을 수립하였다.
[4]장면총리는 혜화동의 갈멜수녀원으로 몸을 피신하였다. 이후 내각 총사퇴를 결의함으로써 군사혁명위원회에 정부를 이양하였다.
[5]윤보선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자이며 국가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을 지닌 합법 정부를 수호하지 않았다. 접견실에서 박정희, [3]장도영등 쿠데타 세력들을 만난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그해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1] 정군운동 : 1960년 4.19혁명 직후 군내부에서 부정부패 및 과거사 청을 빌미로 상급 장교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운동
[2] 박정희(1917년~1979년) :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3] 장도영(1923년~2012년) : 장면내각의 두 번째 육군 참모총장. 5.16군사정변 직후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4]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5]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1961년 5월 16일에 [2]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군사정변(쿠데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후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회를 해산하였다.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라 개명하고 5월 20일 혁명내각을 발표함으로써 군인들이 통치하는 군사정권을 수립하였다.
[4]장면총리는 혜화동의 갈멜수녀원으로 몸을 피신하였다. 이후 내각 총사퇴를 결의함으로써 군사혁명위원회에 정부를 이양하였다.
[5]윤보선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자이며 국가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을 지닌 합법 정부를 수호하지 않았다. 접견실에서 박정희, [3]장도영등 쿠데타 세력들을 만난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그해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1] 정군운동 : 1960년 4.19혁명 직후 군내부에서 부정부패 및 과거사 청을 빌미로 상급 장교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운동
[2] 박정희(1917년~1979년) :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3] 장도영(1923년~2012년) : 장면내각의 두 번째 육군 참모총장. 5.16군사정변 직후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4]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5]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영국은 1914년에 [1]맥마흔 라인이 선포하여 티베트와 영국령 인도제국 사이의 국경선을 선언하였다. 이 [1]맥마흔 라인으로 인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에도 중국과 인도는 국경분쟁으로 블편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1959년에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인의 대규모 봉기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대규모로 진압을 하였다. 티베트의 지도자 [2]달라이 라마(14대)는 중국의 종교탄압과 티베트 문화말살 정책에 반발하여 인도로 피신해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중국과 인도간 무력 충돌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중국의 신장성(신장 위구르 자치구)과 티베트에서 분리주의자들에 의한 반중 무장 투쟁이 격화되었다. [3]마오쩌둥은 만약 소련, 인도가 개입할 경우 가장 먼저 티베트와 신장성이 무너질 것이고 결국에는 중공 정권 전체가 붕괴될수도 있다고 여겼다. 히말라야는 티베트는 물론, 중국의 서부를 지키기 위한 천연의 만리장성이었다. 중국으로서는 결코 물러날 수 없었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자 인도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1]맥마흔 라인에 군을 전진배치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철저히 전쟁준비를 위한 전투 태세도 만만치 않았다. 인도는 정말 중국이 전쟁을 감행할 지 예측하지 못하였다.
10월 6일 중국의 [3]마오쩌둥은 인도와 동부 국경과 서부 국경에서 동시에 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10월 18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전쟁 개전을 최종 결정했다.
10월 20일에 1,000km에 이르는 국경의 전 방면으로 중국의 주력군이 침공을 개시하면서 바야흐로 1개월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중국이 8만~9만명의 병력을 동원, 규모면에서도 국경수비대의 소규모 교전을 벗어난 정규군간의 정면 충돌로 비화된 것이다. 미처 전쟁을 예측하지 못한 인도군은 연전 연패하여 결국 후퇴한다.
미국과 소련은 중국의 영향력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압박을 가했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도 양국의 충돌 격화에 우려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중국은 전쟁에서 완승했음에도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군대를 모두 철수한다. 또한 승자로서 패자에게 거액의 배상금과 같은 굴욕적인 조건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그냥 아무 일도 없는 양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이것으로 중국-인도 양국간의 전쟁은 일단락을 짓는다. 그러나 아직도 인도와 중국의 국경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쌍방 모두 서로의 국경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지도, 더 이상 무력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양국 정부는 서로의 군대가 주둔한 지역을 소위 '실제 통제선'이라 하여 묵인키로 하였고 중간 지역은 비무장지대가 되었다.
중국과 인도가 국경 문제를 놓고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은 크게 세개로 나뉜다. 첫번째는 서부의 악사이친(Aksai Chin, 중국점유)지방이며 인도 카슈미르 지방과 신장성, 티베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두번째는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는 시킴(Sikkim, 인도점유)지방이다. 세번째는 동부 국경의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인도점유)지방이다. 양국의 분쟁지역을 모두 합하면 남한면적보다도 크다.
[1] 맥마흔 라인(McMahon Line) : 청나라가 1912년 신해혁명으로 망하고 티베트가 사실상 독립국이 되고 난 이후인 1914년 인도 제국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과 중화민국, 티베트가 삼자 협정으로 맺은 국경선이다. 당시 티베트와 영국은 이 조약을 승인했으나 중화민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맥마흔은 이 조약을 주도한 영국의 외교관 헨리 맥마흔의 이름이다.
[2] 달라이 라마 : 1391년부터 티베트 불교 겔룩파(티베트 불교종파 중 하나)의 최고 수장을 가리키는 세습명이면서 정치적인 의미에서 티베트의 국가원수이자 실징 통치자. 달마이란 몽골어로 큰바다라는 의미이며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의미한다.
[3] 마오저뚱(1893년~1976년) : 한자음으로 모택동. 중국 공산주의 정치가. 제1대 국가주석(1949년~1959년). 1945년에서 1976년까지 초대 중국 공산당 제1대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1959년에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인의 대규모 봉기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대규모로 진압을 하였다. 티베트의 지도자 [2]달라이 라마(14대)는 중국의 종교탄압과 티베트 문화말살 정책에 반발하여 인도로 피신해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중국과 인도간 무력 충돌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중국의 신장성(신장 위구르 자치구)과 티베트에서 분리주의자들에 의한 반중 무장 투쟁이 격화되었다. [3]마오쩌둥은 만약 소련, 인도가 개입할 경우 가장 먼저 티베트와 신장성이 무너질 것이고 결국에는 중공 정권 전체가 붕괴될수도 있다고 여겼다. 히말라야는 티베트는 물론, 중국의 서부를 지키기 위한 천연의 만리장성이었다. 중국으로서는 결코 물러날 수 없었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자 인도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1]맥마흔 라인에 군을 전진배치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철저히 전쟁준비를 위한 전투 태세도 만만치 않았다. 인도는 정말 중국이 전쟁을 감행할 지 예측하지 못하였다.
10월 6일 중국의 [3]마오쩌둥은 인도와 동부 국경과 서부 국경에서 동시에 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10월 18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전쟁 개전을 최종 결정했다.
10월 20일에 1,000km에 이르는 국경의 전 방면으로 중국의 주력군이 침공을 개시하면서 바야흐로 1개월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중국이 8만~9만명의 병력을 동원, 규모면에서도 국경수비대의 소규모 교전을 벗어난 정규군간의 정면 충돌로 비화된 것이다. 미처 전쟁을 예측하지 못한 인도군은 연전 연패하여 결국 후퇴한다.
미국과 소련은 중국의 영향력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압박을 가했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도 양국의 충돌 격화에 우려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중국은 전쟁에서 완승했음에도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군대를 모두 철수한다. 또한 승자로서 패자에게 거액의 배상금과 같은 굴욕적인 조건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그냥 아무 일도 없는 양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이것으로 중국-인도 양국간의 전쟁은 일단락을 짓는다. 그러나 아직도 인도와 중국의 국경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쌍방 모두 서로의 국경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지도, 더 이상 무력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양국 정부는 서로의 군대가 주둔한 지역을 소위 '실제 통제선'이라 하여 묵인키로 하였고 중간 지역은 비무장지대가 되었다.
중국과 인도가 국경 문제를 놓고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은 크게 세개로 나뉜다. 첫번째는 서부의 악사이친(Aksai Chin, 중국점유)지방이며 인도 카슈미르 지방과 신장성, 티베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두번째는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는 시킴(Sikkim, 인도점유)지방이다. 세번째는 동부 국경의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인도점유)지방이다. 양국의 분쟁지역을 모두 합하면 남한면적보다도 크다.
[1] 맥마흔 라인(McMahon Line) : 청나라가 1912년 신해혁명으로 망하고 티베트가 사실상 독립국이 되고 난 이후인 1914년 인도 제국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과 중화민국, 티베트가 삼자 협정으로 맺은 국경선이다. 당시 티베트와 영국은 이 조약을 승인했으나 중화민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맥마흔은 이 조약을 주도한 영국의 외교관 헨리 맥마흔의 이름이다.
[2] 달라이 라마 : 1391년부터 티베트 불교 겔룩파(티베트 불교종파 중 하나)의 최고 수장을 가리키는 세습명이면서 정치적인 의미에서 티베트의 국가원수이자 실징 통치자. 달마이란 몽골어로 큰바다라는 의미이며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의미한다.
[3] 마오저뚱(1893년~1976년) : 한자음으로 모택동. 중국 공산주의 정치가. 제1대 국가주석(1949년~1959년). 1945년에서 1976년까지 초대 중국 공산당 제1대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1]존 F. 케네디는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공개 차량 퍼레이드를 진행하던 도중 총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차기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지지 기반이 약했던 남부 지역에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텍사스를 방문중이었으며 부통령 [2]린든 B. 존슨, 텍사스 주지사 [3]존 코널리등과 함께 댈러스 시내를 오픈카로 행진하고 있었다.
행진 퍼레이드가 [4]딜리 플라자에 진입하였을 무렵 텍사스 교과서 창고 건물 6층에서 발사된 세 발의 총탄이 차량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 중 두 발이 케네디 대통령의 목과 머리에 적중되어 쓰러지자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사망하였다.
암살 직후 경찰은 총격이 발생한 건물 근처에서 [5]리 하비 오스왈드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하였다. 오스왈드는 미 해병대 출신으로 과거 소련에 망명한 전력이 있었고 공산주의적 성향을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댈러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신은 누명을 쓴 것이라고 주장하며 혐의를 부인하였다. 그러나 이틀 뒤 [5]오스왈드는 많은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찰에 의해 다른 교도소로 이송되던 도중 현장에 있던 댈러스 나이트클럽 업주인 [6]잭 루비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사건의 핵심 용의자가 사망하자 진상 규명은 더욱 어려워졌고 미국 사회 전반에 거대한 혼란과 음모론이 번지기 시작하였다.
케네디 암살 사건의 충격은 국제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었으며, 냉전 시대 미국 정치의 위태로움과 대통령 신변 보호 체계의 허점을 드러냈다.
미국 정부는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1963년 11월 29일 연방 대법원장 얼 워런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통령 암살 사건 조사 위원회, 이른바 [7]"워런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회는 [5]오스왈드가 단독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리며 외부 조직이나 공모자는 없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후 수십 년간 이 결론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으며 CIA, FBI, 쿠바의 보복설, 소련, 마피아 등 다양한 세력의 개입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매직 불릿" 이라 불리는 오스왈드의 두 번째 총탄이 케네디 대통령과 [3]존 코널리 주지사를 동시에 여러 부위에 적중했다는 설명은 많은 이들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미국 국민 다수는 공식 보고서의 내용을 불신하게 되었고 수많은 다큐멘터리, 연구서, 영화 등이 제작되면서 케네디 암살 사건은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하고 논쟁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1]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년 5월 29일 ~ 1963년 11월 22일) :제35대 미국 대통령(재임, 1961년 1월 20일~1963년 11월 22일)
[2] 린든 B.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년 8월 27일~1973년 1월 22일) : 케네디가 피살되고 제36대 대통령(재임, 1963년 11월 22일 승계~1969년 1월 20일)을 승계했다. 미국의 제36대 대통령(재임, 1961년 1월 20일~1963년 11월 22일)
[3] 존 보든 코널리(John Bowden Connally, 1917년 2월 27일 ~ 1993년 6월 15일) : 미국 텍사스주의 제39대 지사(임기, 1963년 1월 15일 ~ 1969년 1월 21일). 제61대 재무장관 역임
[4] 딜리 플라자(Dealey Plaza) :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위치한 도시 공원이다. 그곳은 때때로 "댈러스의 탄생지"라고 불린다
[5] 리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 1939년 10월 18일 ~ 1963년 11월 24일) :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암살범으로 지목된 인물. 체포된 후 다른 교도소로 호송되던 중 나이트클럽 주인인 잭 루비에게 암살되었다
[6] 잭 루비(Jack Leon Ruby, 1911년 3월 25일 ~ 1967년 1월 3일) :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으로 체포된 리 하비 오스월드를 경찰 호송 도중 총으로 살해한 인물. 댈러스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였으며 언론과 대중 사이에서 다양한 음모론의 중심에 섰다. 이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 중 암으로 사망하였다
[7] 워런 위원회(The Warren Commission) : 1963년 11월 29일 미국의 제36, 37대 대통령 린든 B. 존슨이 행정명령 11130호로 발족한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조사위원회로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 관한 대통령 직속위원회(President's Commission on the Assassination of President Kennedy)이다. 조사위원장인 연방 대법원장 얼 워런의 이름을 따서 워런 위원회라고 불린다. 1964년 9월 27일 888쪽의 최종보고서를 존슨에게 제출하였다. 케네디의 암살을 리 하비 오스월드의 단독 범행으로 오스월드 살해는 잭 루비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내렸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이후 수많은 비판과 음모론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차기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지지 기반이 약했던 남부 지역에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텍사스를 방문중이었으며 부통령 [2]린든 B. 존슨, 텍사스 주지사 [3]존 코널리등과 함께 댈러스 시내를 오픈카로 행진하고 있었다.
행진 퍼레이드가 [4]딜리 플라자에 진입하였을 무렵 텍사스 교과서 창고 건물 6층에서 발사된 세 발의 총탄이 차량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 중 두 발이 케네디 대통령의 목과 머리에 적중되어 쓰러지자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사망하였다.
암살 직후 경찰은 총격이 발생한 건물 근처에서 [5]리 하비 오스왈드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하였다. 오스왈드는 미 해병대 출신으로 과거 소련에 망명한 전력이 있었고 공산주의적 성향을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댈러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신은 누명을 쓴 것이라고 주장하며 혐의를 부인하였다. 그러나 이틀 뒤 [5]오스왈드는 많은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찰에 의해 다른 교도소로 이송되던 도중 현장에 있던 댈러스 나이트클럽 업주인 [6]잭 루비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사건의 핵심 용의자가 사망하자 진상 규명은 더욱 어려워졌고 미국 사회 전반에 거대한 혼란과 음모론이 번지기 시작하였다.
케네디 암살 사건의 충격은 국제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었으며, 냉전 시대 미국 정치의 위태로움과 대통령 신변 보호 체계의 허점을 드러냈다.
미국 정부는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1963년 11월 29일 연방 대법원장 얼 워런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통령 암살 사건 조사 위원회, 이른바 [7]"워런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회는 [5]오스왈드가 단독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리며 외부 조직이나 공모자는 없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후 수십 년간 이 결론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으며 CIA, FBI, 쿠바의 보복설, 소련, 마피아 등 다양한 세력의 개입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매직 불릿" 이라 불리는 오스왈드의 두 번째 총탄이 케네디 대통령과 [3]존 코널리 주지사를 동시에 여러 부위에 적중했다는 설명은 많은 이들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미국 국민 다수는 공식 보고서의 내용을 불신하게 되었고 수많은 다큐멘터리, 연구서, 영화 등이 제작되면서 케네디 암살 사건은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하고 논쟁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1]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년 5월 29일 ~ 1963년 11월 22일) :제35대 미국 대통령(재임, 1961년 1월 20일~1963년 11월 22일)
[2] 린든 B.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년 8월 27일~1973년 1월 22일) : 케네디가 피살되고 제36대 대통령(재임, 1963년 11월 22일 승계~1969년 1월 20일)을 승계했다. 미국의 제36대 대통령(재임, 1961년 1월 20일~1963년 11월 22일)
[3] 존 보든 코널리(John Bowden Connally, 1917년 2월 27일 ~ 1993년 6월 15일) : 미국 텍사스주의 제39대 지사(임기, 1963년 1월 15일 ~ 1969년 1월 21일). 제61대 재무장관 역임
[4] 딜리 플라자(Dealey Plaza) :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위치한 도시 공원이다. 그곳은 때때로 "댈러스의 탄생지"라고 불린다
[5] 리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 1939년 10월 18일 ~ 1963년 11월 24일) :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암살범으로 지목된 인물. 체포된 후 다른 교도소로 호송되던 중 나이트클럽 주인인 잭 루비에게 암살되었다
[6] 잭 루비(Jack Leon Ruby, 1911년 3월 25일 ~ 1967년 1월 3일) :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으로 체포된 리 하비 오스월드를 경찰 호송 도중 총으로 살해한 인물. 댈러스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였으며 언론과 대중 사이에서 다양한 음모론의 중심에 섰다. 이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 중 암으로 사망하였다
[7] 워런 위원회(The Warren Commission) : 1963년 11월 29일 미국의 제36, 37대 대통령 린든 B. 존슨이 행정명령 11130호로 발족한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조사위원회로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 관한 대통령 직속위원회(President's Commission on the Assassination of President Kennedy)이다. 조사위원장인 연방 대법원장 얼 워런의 이름을 따서 워런 위원회라고 불린다. 1964년 9월 27일 888쪽의 최종보고서를 존슨에게 제출하였다. 케네디의 암살을 리 하비 오스월드의 단독 범행으로 오스월드 살해는 잭 루비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내렸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이후 수많은 비판과 음모론의 대상이 되었다
6·3항쟁은 한일회담 반대운동, 한일협상 반대운동, 6·3시위라고도 한다. 이 항쟁은 서울에서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최초로 벌어진 1964년 3월 24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6월 3일에 절정을 이루었다.
박정희 정부는 6월 3일 오후 8시에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고 경찰과 계엄군이 투입되어 7월 28일 시위는 진압되었고 다음날인 29일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이러한 반발 속에서도 한일간 협의는 계속되었고 1965년 2월 15일 한⋅일 양국은 한⋅일 기본 조약에 합의하였고 1965년 6월 22일 정식 조인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6월 3일 오후 8시에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고 경찰과 계엄군이 투입되어 7월 28일 시위는 진압되었고 다음날인 29일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이러한 반발 속에서도 한일간 협의는 계속되었고 1965년 2월 15일 한⋅일 양국은 한⋅일 기본 조약에 합의하였고 1965년 6월 22일 정식 조인되었다.
1964년 8월2일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군 어뢰정 3척이 미국 구축함 매독스를 공격하여 양국간 교전이 벌어졌다.
미 해군은 이틀 뒤인 4일 공해에서 북베트남의 2차 공격이 이어졌다고 주장하고 미국 의회는 '통킹만 결의'를 의결하여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과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다.
이 사건은 무려 2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베트남 전쟁 미국 개입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8월 4일 두 번째 교전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했지만,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북베트남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폭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 통킹만((Gulf of Tonkin) : 베트남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있는 만. 통킹이라는 이름은 하노이의 옛 이름인 '동낀'에서 유래
미 해군은 이틀 뒤인 4일 공해에서 북베트남의 2차 공격이 이어졌다고 주장하고 미국 의회는 '통킹만 결의'를 의결하여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과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다.
이 사건은 무려 2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베트남 전쟁 미국 개입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8월 4일 두 번째 교전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했지만,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북베트남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폭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 통킹만((Gulf of Tonkin) : 베트남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있는 만. 통킹이라는 이름은 하노이의 옛 이름인 '동낀'에서 유래
1954년 제네바 협정이후,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경계로 일단 양분되었고, 17도 이북에는 [4]호치민이 이끄는 공산국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이 수립되고, 17도 이남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5]응오 딘 지엠 정권의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수립되었다.
미국은 세계적 냉전이 심화되던 시대에 '공산주의 봉쇄'라는 전략과 기치를 내걸고 인도차이나 분쟁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1964년 8월 2일에 발생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본격화했다. 미국 [1]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1964년 8월 5일 북베트남 폭격을 지시했으며, 이것이 일명 피어스 애로우(Pierce Arrow)작전의 시작으로 미국의 베트남전 전면전의 포문을 열었다.
미국은 풍부한 군대와 첨단 무기를 가지고도 [3]베트콩의 예측이 불가능한 게릴라 전술, 불규칙한 전투행동, 베트남의 자연환경등으로 고전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미국내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해지면서 1968년부터 미국과 북베트남사이의 휴전협상을 시작하였다
1969년 6월, [2]리차드 닉슨은 베트남으로부터의 단계적인 미군 철수를 발표했고, 1973년 1월 27일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미국이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하였다. 북베트남과 미군 사이의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으며 그해 3월 마지막 남은 미국의 전투부대가 남베트남에서 철수하였다.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패권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베트남에 개입하는 길을 선택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패퇴하였고 초강대국 미국의 위신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미국으로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년간 5만 명의 인명피해와 1,200억 달러가 소요된 대규모 전쟁이었으나 패배한 전쟁으로써 역사에 남게 되었다.
[1] 린든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년~1973년) : 미국 제36대 대통령(임기,1963년 11월 22일~1969년 1월 20일)
[2]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1913년~1994년) :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임기, 1969년 1월 20일~1974년 8월 9일)
[3] 베트콩(Viet Cong) : 남베트남 내의 반정부 게릴라 조직으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칭하는 용어
[4] 호찌민(Ho Chi Minh, 1890년~1969년) : 초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주석(임기, 1951년 2월 19일 - 1969년 9월 2일).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불린다.
[5] 응오 딘 지엠(NNgo Dinh Diem, 1901년~1963년) : 남베트남의 제1대 총통(임기, 1955년 10월 26일~1963년 11월 2일)
미국은 세계적 냉전이 심화되던 시대에 '공산주의 봉쇄'라는 전략과 기치를 내걸고 인도차이나 분쟁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1964년 8월 2일에 발생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본격화했다. 미국 [1]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1964년 8월 5일 북베트남 폭격을 지시했으며, 이것이 일명 피어스 애로우(Pierce Arrow)작전의 시작으로 미국의 베트남전 전면전의 포문을 열었다.
미국은 풍부한 군대와 첨단 무기를 가지고도 [3]베트콩의 예측이 불가능한 게릴라 전술, 불규칙한 전투행동, 베트남의 자연환경등으로 고전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미국내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해지면서 1968년부터 미국과 북베트남사이의 휴전협상을 시작하였다
1969년 6월, [2]리차드 닉슨은 베트남으로부터의 단계적인 미군 철수를 발표했고, 1973년 1월 27일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미국이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하였다. 북베트남과 미군 사이의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으며 그해 3월 마지막 남은 미국의 전투부대가 남베트남에서 철수하였다.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패권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베트남에 개입하는 길을 선택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패퇴하였고 초강대국 미국의 위신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미국으로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년간 5만 명의 인명피해와 1,200억 달러가 소요된 대규모 전쟁이었으나 패배한 전쟁으로써 역사에 남게 되었다.
[1] 린든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년~1973년) : 미국 제36대 대통령(임기,1963년 11월 22일~1969년 1월 20일)
[2]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1913년~1994년) :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임기, 1969년 1월 20일~1974년 8월 9일)
[3] 베트콩(Viet Cong) : 남베트남 내의 반정부 게릴라 조직으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칭하는 용어
[4] 호찌민(Ho Chi Minh, 1890년~1969년) : 초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주석(임기, 1951년 2월 19일 - 1969년 9월 2일).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불린다.
[5] 응오 딘 지엠(NNgo Dinh Diem, 1901년~1963년) : 남베트남의 제1대 총통(임기, 1955년 10월 26일~1963년 11월 2일)
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또는 월남전 참전은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쳐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전투부대를 파병하였다.
한국의 파병 제안과 월남(당시 남베트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1차 파병
- 1964년 9월 11일 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 22일 베트남의 수도 [1] 사이공에 상륙하였다.
- 13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 요원과 10명을 편성된 태권도교관단 요원 등 140명을 파병하였다.
2차 파병
-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3월 16일 당시 베트남의 수도 [1] 이공에 도착하였으며, 사이공 동북방 22㎞ 지점의 디안에 주둔하여 건설 지원 및 자체 방어를 위한 경비대대, 수송, 공병임무 수행하였다.
- 강원도 현리에 있는 국군 제6사단 사령부에서 '한국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고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부대'로 명명하여 파병하였다.
3차 파병
- 1965년 10월 9일 제2해병여단(청룡부대)은 남베트남 [2] 캄란에 상륙하였고 11월 1일 수도사단(맹호부대)가 [3] 퀴논에 상륙을 하였다
4차 파병
- 1966년 4월 19일 수도기계화사단(맹호부대) 제26연대가 꾸이년에 상륙을 하고, 이어서 10월 8일 제9사단(백마부대)가 [4] 닌호아에 상륙하였다
196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미국 내에서는 언론매체의 영향으로 반전 여론이 고조되어 1969년 1월 닉슥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철군을 발표하고 1969년 7월부터 일부 병력을 철수시켰다.
대한민국 정부도 제1단계로 1971년 12월 4일 제2해병 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1972년 4월 1일까지 9천명의 병력을 철수 시켰다.
제2단계 철수는 1973년 1월 8일, 파리에서 체결된 휴전 협정의 규정 사항인 "모든 외국 군대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한다."는 조항에 따라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1973년 1월 30일 125명의 선발대가 항공편으로 철수하였으며, 3월 14일까지 본대가 철수하고, 3월 23일 후발대 118명이 항공편으로 철수함으로써, 남베트남에 주둔하였던 모든 부대가 철수를 완료하였다.
한국군은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여 경제 발전에 필요한 외화수입이라는 많은 경제적 이익과 한국전쟁 이후의 값진 실전 경험을 얻었으나 파병자 중 5,000명의 사망자와 2만여 명의 참전용사가 고엽제 등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1] 사이공(Saigon) : 베트남 최대도시로 경제 중심지. 남베트남(1954년~1976년) 수도였으며 1975년에 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2] 캄란(Cam Ranh) : 베트남의 남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3] 퀴논(Quy Nhon) :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반도모양) 베트남 중부의 해안도시. 다낭과 나트랑의 중간지점에 위치. 베트남전쟁 당시 맹호부대의 주둔지
[4] 닌호아(Ninh Hòa) : 베트남의 해안마을. 베트남 전쟁당시 백마부대 사령부
한국의 파병 제안과 월남(당시 남베트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1차 파병
- 1964년 9월 11일 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 22일 베트남의 수도 [1] 사이공에 상륙하였다.
- 13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 요원과 10명을 편성된 태권도교관단 요원 등 140명을 파병하였다.
2차 파병
-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3월 16일 당시 베트남의 수도 [1] 이공에 도착하였으며, 사이공 동북방 22㎞ 지점의 디안에 주둔하여 건설 지원 및 자체 방어를 위한 경비대대, 수송, 공병임무 수행하였다.
- 강원도 현리에 있는 국군 제6사단 사령부에서 '한국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고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부대'로 명명하여 파병하였다.
3차 파병
- 1965년 10월 9일 제2해병여단(청룡부대)은 남베트남 [2] 캄란에 상륙하였고 11월 1일 수도사단(맹호부대)가 [3] 퀴논에 상륙을 하였다
4차 파병
- 1966년 4월 19일 수도기계화사단(맹호부대) 제26연대가 꾸이년에 상륙을 하고, 이어서 10월 8일 제9사단(백마부대)가 [4] 닌호아에 상륙하였다
196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미국 내에서는 언론매체의 영향으로 반전 여론이 고조되어 1969년 1월 닉슥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철군을 발표하고 1969년 7월부터 일부 병력을 철수시켰다.
대한민국 정부도 제1단계로 1971년 12월 4일 제2해병 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1972년 4월 1일까지 9천명의 병력을 철수 시켰다.
제2단계 철수는 1973년 1월 8일, 파리에서 체결된 휴전 협정의 규정 사항인 "모든 외국 군대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한다."는 조항에 따라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1973년 1월 30일 125명의 선발대가 항공편으로 철수하였으며, 3월 14일까지 본대가 철수하고, 3월 23일 후발대 118명이 항공편으로 철수함으로써, 남베트남에 주둔하였던 모든 부대가 철수를 완료하였다.
한국군은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여 경제 발전에 필요한 외화수입이라는 많은 경제적 이익과 한국전쟁 이후의 값진 실전 경험을 얻었으나 파병자 중 5,000명의 사망자와 2만여 명의 참전용사가 고엽제 등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1] 사이공(Saigon) : 베트남 최대도시로 경제 중심지. 남베트남(1954년~1976년) 수도였으며 1975년에 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2] 캄란(Cam Ranh) : 베트남의 남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3] 퀴논(Quy Nhon) :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반도모양) 베트남 중부의 해안도시. 다낭과 나트랑의 중간지점에 위치. 베트남전쟁 당시 맹호부대의 주둔지
[4] 닌호아(Ninh Hòa) : 베트남의 해안마을. 베트남 전쟁당시 백마부대 사령부
1965년 9월 30일 [3]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인도네시아의 최고 군 장군 6명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그리고 [2]수카르노의 수호자라고 선언했다. 처형 이후 자카르타의 메르데카 광장과 대통령궁을 점거했다.
하지만 이 쿠데타는 그당시 육군전략사령관이었던 [1]수하르토에 의해 진압돼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후 [1]수하르토는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친 [2]수카르노 인사등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이 학살 사건으로 사망자 추정치는 50만 명이라 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2백만 명에서 3백만 명까지 늘어나고 있다.
1967년 3월 [2]수카르노는 의회에서 실각되고 [1]수하르토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다.1968년 3월 수하르토가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30년간 독재가 시작되었다
쿠데타는 수하르토를 비롯한 군부 세력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혹이 매우 많다. 사건이라는 게 고작 7명 정도의 몇몇 고위 장성들을 암살한 것에 불과하며,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가 고작 하루 만에 순식간에 진압당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동남아시아에 퍼져가던 공산세력을 막기 위한 미국과 영국의 정치적 공작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 수하르토(Suharto, 1921년~2008년) : 인도네시아의 제2대 대통령(재임, 1967년 3월 12일~1998년 5월 21일)
[2] 수카르노(Sukarno, 1901년~1970년) : 인도네시아의 제1대 대통령(재임, 1945년 8월 18일~1967년 3월 12일), 네덜란드 점령기 독립운동가
[3] 인도네시아 공산당(Partai Komunis Indonesia, PKI, 1914–1966) :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부터 인도네시아 공화국 수카르노 집권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정당
하지만 이 쿠데타는 그당시 육군전략사령관이었던 [1]수하르토에 의해 진압돼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후 [1]수하르토는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친 [2]수카르노 인사등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이 학살 사건으로 사망자 추정치는 50만 명이라 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2백만 명에서 3백만 명까지 늘어나고 있다.
1967년 3월 [2]수카르노는 의회에서 실각되고 [1]수하르토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다.1968년 3월 수하르토가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30년간 독재가 시작되었다
쿠데타는 수하르토를 비롯한 군부 세력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혹이 매우 많다. 사건이라는 게 고작 7명 정도의 몇몇 고위 장성들을 암살한 것에 불과하며,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가 고작 하루 만에 순식간에 진압당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동남아시아에 퍼져가던 공산세력을 막기 위한 미국과 영국의 정치적 공작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 수하르토(Suharto, 1921년~2008년) : 인도네시아의 제2대 대통령(재임, 1967년 3월 12일~1998년 5월 21일)
[2] 수카르노(Sukarno, 1901년~1970년) : 인도네시아의 제1대 대통령(재임, 1945년 8월 18일~1967년 3월 12일), 네덜란드 점령기 독립운동가
[3] 인도네시아 공산당(Partai Komunis Indonesia, PKI, 1914–1966) :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부터 인도네시아 공화국 수카르노 집권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정당
인도네시아 대학살은 1965년 9월 30일 [3]인도네시아 공산당 쿠데타 미수로 인한 반등으로 반공주의의 기치아래 공산당 구성원을 대상으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망자 추정치는 50만 명이라 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2백만 명에서 3백만 명까지 늘어나고 있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초대 대통령 [2]수카르노가 실각되고 그 뒤를 이어 [1]수하르토가 대통령이 되면서 30년 독재가 시작되었다.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하고 있던 미국과 영국은 인도네시아 군부에 무기 및 재정지원 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혹을 부정하고 있다.
학살은 1965년 10월 수도 자카르타에서 시작되어 중부 및 동부 자바섬 전체로 퍼져나갔고, 이 후 발리섬에서도 지역 자경단과 육군부대가 실제 공산당회원과 공산당 회원으로 추정되면 학살을 자행했다.
이러한 잔학 행위는 당시 육군 [1]수하르토 휘하의 인도네시아 군대에 의해 주도되었다.
쿠데타 미수 사건은 인도네시아 전체에 누적된 공동체적 긴장과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육군지도부는 이를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악당으로 규정했으며, 반공주의에 고취된 민간인들도 학살에 가담했다.
1967년 3월 [2]수카르노는 의회에서 실각되고 [1]수하르토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다.1968년 3월 [1]수하르토가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30여년간 지속된 수하르토 정권하에서 1965년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언급자체가 금기시되었다.
2008년 1월 27일 숨을 거둔 수하르토는 끝내 학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인도네시아 어느 정부도 사과하지 않았다.
[1] 수하르토(Suharto, 1921년~2008년) : 인도네시아의 제2대 대통령(재임, 1967년 3월 12일~1998년 5월 21일)
[2] 수카르노(Sukarno, 1901년~1970년) : 인도네시아의 제1대 대통령(재임, 1945년 8월 18일~1967년 3월 12일), 네덜란드 점령기 독립운동가
[3] 인도네시아 공산당(Partai Komunis Indonesia, PKI, 1914–1966) :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부터 인도네시아 공화국 수카르노 집권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정당
이 사건으로 사망자 추정치는 50만 명이라 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2백만 명에서 3백만 명까지 늘어나고 있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초대 대통령 [2]수카르노가 실각되고 그 뒤를 이어 [1]수하르토가 대통령이 되면서 30년 독재가 시작되었다.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하고 있던 미국과 영국은 인도네시아 군부에 무기 및 재정지원 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혹을 부정하고 있다.
학살은 1965년 10월 수도 자카르타에서 시작되어 중부 및 동부 자바섬 전체로 퍼져나갔고, 이 후 발리섬에서도 지역 자경단과 육군부대가 실제 공산당회원과 공산당 회원으로 추정되면 학살을 자행했다.
이러한 잔학 행위는 당시 육군 [1]수하르토 휘하의 인도네시아 군대에 의해 주도되었다.
쿠데타 미수 사건은 인도네시아 전체에 누적된 공동체적 긴장과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육군지도부는 이를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악당으로 규정했으며, 반공주의에 고취된 민간인들도 학살에 가담했다.
1967년 3월 [2]수카르노는 의회에서 실각되고 [1]수하르토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다.1968년 3월 [1]수하르토가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30여년간 지속된 수하르토 정권하에서 1965년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언급자체가 금기시되었다.
2008년 1월 27일 숨을 거둔 수하르토는 끝내 학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인도네시아 어느 정부도 사과하지 않았다.
[1] 수하르토(Suharto, 1921년~2008년) : 인도네시아의 제2대 대통령(재임, 1967년 3월 12일~1998년 5월 21일)
[2] 수카르노(Sukarno, 1901년~1970년) : 인도네시아의 제1대 대통령(재임, 1945년 8월 18일~1967년 3월 12일), 네덜란드 점령기 독립운동가
[3] 인도네시아 공산당(Partai Komunis Indonesia, PKI, 1914–1966) :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부터 인도네시아 공화국 수카르노 집권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정당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중부 고원 지방 이아 드랑 계곡에서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벌인 첫 정규 전투이다.
미국은 캄보디아 국경지대 근처에 있는 이아드랑 계곡에 대규모 헬기를 동원하여 제1기병사단 공중 강습([3]헬리본) 부대를 착륙시켰다. 미군 강습 부대가 거의 다 착륙하자 전투가 시작되었다.
북베트남군은 미군의 대포 폭격으로 큰 희생을 내면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공격과 저항으로 미군은 [4]브로큰 애로우 상황에 빠지고 만다. 결국 미군은 [2]UH-1 [2]건쉽의 무차별 공격으로 방어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전투 결과 북베트남군의 전사자는 1,500명 이상이며 미군은 약 300여명이 전사했다. 전사자 비율이 6대1수준으로 이 전투 자체는 미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지만 결국은 이곳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이 전투 이후 미군의 베트남전 작전은 지리적 특성으로 헬리본이 기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002년에 개봉한 멜 깁슨 주연의 '위 워 솔저(We Were Soldiers)'영화는 이 전투를 소재로 하였다.
[1] UH-1 : 미국의 '벨 헬리콥터'사가 제작한 다목적 헬리콥터(utility helicopter)
[2] 건쉽(gunship) : 포를 지닌 배를 가리키지만 육군에서는 공격헬기를 지칭
[3] 헬리본(heliborne) : 헬리콥터 공중 강습
[4]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 진지나 거점이 적에게 완전히 포위당해 온전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 부대가 괴멸위협에 처해 있는 상황을 이르는 말
미국은 캄보디아 국경지대 근처에 있는 이아드랑 계곡에 대규모 헬기를 동원하여 제1기병사단 공중 강습([3]헬리본) 부대를 착륙시켰다. 미군 강습 부대가 거의 다 착륙하자 전투가 시작되었다.
북베트남군은 미군의 대포 폭격으로 큰 희생을 내면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공격과 저항으로 미군은 [4]브로큰 애로우 상황에 빠지고 만다. 결국 미군은 [2]UH-1 [2]건쉽의 무차별 공격으로 방어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전투 결과 북베트남군의 전사자는 1,500명 이상이며 미군은 약 300여명이 전사했다. 전사자 비율이 6대1수준으로 이 전투 자체는 미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지만 결국은 이곳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이 전투 이후 미군의 베트남전 작전은 지리적 특성으로 헬리본이 기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002년에 개봉한 멜 깁슨 주연의 '위 워 솔저(We Were Soldiers)'영화는 이 전투를 소재로 하였다.
[1] UH-1 : 미국의 '벨 헬리콥터'사가 제작한 다목적 헬리콥터(utility helicopter)
[2] 건쉽(gunship) : 포를 지닌 배를 가리키지만 육군에서는 공격헬기를 지칭
[3] 헬리본(heliborne) : 헬리콥터 공중 강습
[4]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 진지나 거점이 적에게 완전히 포위당해 온전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 부대가 괴멸위협에 처해 있는 상황을 이르는 말
중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사회·정치적 운동으로, [1]마오쩌둥이 주도하여 공산주의 이념을 강화하고 반혁명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1]마오쩌둥은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고 혁명 정신을 강화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시작했다.
전통적인 가치와 권력 구조를 타파하고, 공산주의 사상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주로 청년들로 구성된 [2]홍위병은 전통 문화와 지식인을 공격하며 운동의 중심에 섰다. 전통 문화의 파괴, 고위 관료 숙청, 지식인의 박해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혼란이 발생했으며 정치적 숙청과 내부 권력 투쟁이 격화되며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기도 했다.
경제와 교육 시스템의 붕괴, 수백만 명의 인명 피해, 문화유산의 대규모 파괴 등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문화대혁명은 [1]마오쩌둥의 사망과 [3]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인해 종결되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정치적·사회적 구조에 심각한 혼란과 상처를 남겼으며, 현대 중국 역사에서 실패한 정치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건은 중국 내 전통 문화와 지식층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렸고, 이후 중국 정부는 실용주의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이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1]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Mao Zedong, 1893년~1976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2] 홍위병(紅衛兵, Red Guards) : 중국 문화대혁명 초기, 마오쩌둥의 지지를 받아 결성된 젊은 학생(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 중심의 혁명 집단. 이들은 마오쩌둥 사상을 충실히 따르며, 사회주의 체제에 반대하거나 "반혁명적"으로 간주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홍위병의 폭력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자, 1968년 마오쩌둥은 군대를 동원해 이들의 활동을 억제하고 해산을 명령했다
[3]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 Deng Xiaoping,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3대 최고지도자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1]마오쩌둥은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고 혁명 정신을 강화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시작했다.
전통적인 가치와 권력 구조를 타파하고, 공산주의 사상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주로 청년들로 구성된 [2]홍위병은 전통 문화와 지식인을 공격하며 운동의 중심에 섰다. 전통 문화의 파괴, 고위 관료 숙청, 지식인의 박해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혼란이 발생했으며 정치적 숙청과 내부 권력 투쟁이 격화되며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기도 했다.
경제와 교육 시스템의 붕괴, 수백만 명의 인명 피해, 문화유산의 대규모 파괴 등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문화대혁명은 [1]마오쩌둥의 사망과 [3]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인해 종결되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정치적·사회적 구조에 심각한 혼란과 상처를 남겼으며, 현대 중국 역사에서 실패한 정치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건은 중국 내 전통 문화와 지식층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렸고, 이후 중국 정부는 실용주의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이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1]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Mao Zedong, 1893년~1976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2] 홍위병(紅衛兵, Red Guards) : 중국 문화대혁명 초기, 마오쩌둥의 지지를 받아 결성된 젊은 학생(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 중심의 혁명 집단. 이들은 마오쩌둥 사상을 충실히 따르며, 사회주의 체제에 반대하거나 "반혁명적"으로 간주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홍위병의 폭력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자, 1968년 마오쩌둥은 군대를 동원해 이들의 활동을 억제하고 해산을 명령했다
[3]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 Deng Xiaoping,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3대 최고지도자
1949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독립한 캄보디아는 국왕 [1]노로돔 시아누크에 의해 독재체제로 통치되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경제가 침체되면서 이를 반대하는 파벌간 분쟁으로 불안정 요소를 안고 있었다.
1965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1]시아누크 정부는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의 지원을 거부하고 중국을 지지했다.
베트남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영내의 [7]호치민 루트를 활용했고, 이에 미국은 캄보디아의 친미정권이 필요했다.
[1]시아누크 국왕이 소련과 중국의 방문을 틈타 1970년 3월 18일에 캄보디아 의회는 시아누크의 하야를 만장일치로 가결하면서 축출했다. 시아누크가 실각되자 [5]론 놀은 쿠데타를 일으켜 [2]크메르공화국을 수립하고 초대 수상이 되었다.
시아누크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으며 [5]론 놀의 친미정권에 저항을 국민들에게 호소하였다. 이 상황에서 [3]크메르 루주의 [6]폴 포트는 시아누크의 귀국을 옹립하면서 캄보디아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은 사실상 미국이 지원하는 캄보디아 정부군과 [3]크메르 루주·북베트남군간의 대리전 형태로 확대되었다.
1972년 1월, 미국은 [5]론 놀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캄보디아에 파견하였다. 미군은 [7]호치민 루트를 차단하기 위하여 캄보디아 국경 곳곳에 공습을 감행하여 수 십만명의 농민이 희생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크게 분노하여 [3]크메르 루주에 가담하면서 세력은 점점 확장되었다. 게다가 [3]크메르 루즈는 반미적 투쟁으로 민중들의 지지까지 크게 얻었다.
지속된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의 상황은 더욱 나빠져 갔으며 대부분의 캄보디아 영토는 [3]크메르 루주, [8]베트콩에게 점령당했다.
미국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쳐갔고 자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973년에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를 했다. 베트남 전쟁은 1975년 [11]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북베트남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1975년 4월 1일 크메르 루주는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자 [5]론 놀은 미국의 하와이로 망명했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주의 [6]폴 포트는 론 놀정부를 무너뜨리고 1976년 새로운 정권인 [4]민주캄푸치아를 수립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는 [10]킬링피드라는 대규모 학살과 강제노동 체제로 이어져 캄보디아의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캄보디아 내전은 단순한 국내 정치 갈등이 아니라 냉전 시기 미·소 및 중·소 분열, 베트남전의 확산, 그리고 아시아 내 공산주의 세력 간의 관계가 얽힌 복합적 분쟁이었다.
[1]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 10월 31일~2012년 10월 15일)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2] 크메르공화국(Khmer Republic) : 캄보디아 의회에서 캄보디아 왕국의 국왕인 노로돔 시아누크를 폐위시키고 1970년 10월 1일 캄보디아에 세워진 공화국으로 1975년 4월 17일까지 존재하였다. 론 놀이 초대 총리를 맡았다
[3]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51년에 조직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조직
[4]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크메르 루주가 주축이 되어 캄보디아 내전에서 승리하여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에 민주 캄푸치아라명명하고 지배하였다. 킬링필드로 알려진 대학살 정책을 저질렀다.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으로 붕괴되었다
[5] 론 놀(Lon Nol, 1913년 11월 13일~1985년 11월 17일) : 크메르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6] 폴 포트(Pol Pot, 1925년 5월 19일~1998년 4월 15일)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 :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이 간첩과 군수 물자를 남베트남으로 보내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연결한 통로
[8] 베트콩(Viet Cong) : 일명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베트남 공화국과 미국을 상대로 싸운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을 펼쳐 북베트남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9] 사이공(Sài Gòn) : 현재의 호찌민시.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
[10] 킬링필드(Killing Fields) : 1975년에서 1979년 사이에 폴 포트가 이끄는 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크메르 루주가 자행한 대학살 사건
[11] 사이공(Sài Gòn) :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오늘날의 호찌민시. 베트남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나뉘게 되었을 때 남베트남의 수도였으며 1975년에 사이공은 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1965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1]시아누크 정부는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의 지원을 거부하고 중국을 지지했다.
베트남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영내의 [7]호치민 루트를 활용했고, 이에 미국은 캄보디아의 친미정권이 필요했다.
[1]시아누크 국왕이 소련과 중국의 방문을 틈타 1970년 3월 18일에 캄보디아 의회는 시아누크의 하야를 만장일치로 가결하면서 축출했다. 시아누크가 실각되자 [5]론 놀은 쿠데타를 일으켜 [2]크메르공화국을 수립하고 초대 수상이 되었다.
시아누크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으며 [5]론 놀의 친미정권에 저항을 국민들에게 호소하였다. 이 상황에서 [3]크메르 루주의 [6]폴 포트는 시아누크의 귀국을 옹립하면서 캄보디아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은 사실상 미국이 지원하는 캄보디아 정부군과 [3]크메르 루주·북베트남군간의 대리전 형태로 확대되었다.
1972년 1월, 미국은 [5]론 놀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캄보디아에 파견하였다. 미군은 [7]호치민 루트를 차단하기 위하여 캄보디아 국경 곳곳에 공습을 감행하여 수 십만명의 농민이 희생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크게 분노하여 [3]크메르 루주에 가담하면서 세력은 점점 확장되었다. 게다가 [3]크메르 루즈는 반미적 투쟁으로 민중들의 지지까지 크게 얻었다.
지속된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의 상황은 더욱 나빠져 갔으며 대부분의 캄보디아 영토는 [3]크메르 루주, [8]베트콩에게 점령당했다.
미국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쳐갔고 자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973년에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를 했다. 베트남 전쟁은 1975년 [11]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북베트남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1975년 4월 1일 크메르 루주는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자 [5]론 놀은 미국의 하와이로 망명했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주의 [6]폴 포트는 론 놀정부를 무너뜨리고 1976년 새로운 정권인 [4]민주캄푸치아를 수립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는 [10]킬링피드라는 대규모 학살과 강제노동 체제로 이어져 캄보디아의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캄보디아 내전은 단순한 국내 정치 갈등이 아니라 냉전 시기 미·소 및 중·소 분열, 베트남전의 확산, 그리고 아시아 내 공산주의 세력 간의 관계가 얽힌 복합적 분쟁이었다.
[1]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 10월 31일~2012년 10월 15일)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2] 크메르공화국(Khmer Republic) : 캄보디아 의회에서 캄보디아 왕국의 국왕인 노로돔 시아누크를 폐위시키고 1970년 10월 1일 캄보디아에 세워진 공화국으로 1975년 4월 17일까지 존재하였다. 론 놀이 초대 총리를 맡았다
[3]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51년에 조직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조직
[4]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크메르 루주가 주축이 되어 캄보디아 내전에서 승리하여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에 민주 캄푸치아라명명하고 지배하였다. 킬링필드로 알려진 대학살 정책을 저질렀다.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으로 붕괴되었다
[5] 론 놀(Lon Nol, 1913년 11월 13일~1985년 11월 17일) : 크메르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6] 폴 포트(Pol Pot, 1925년 5월 19일~1998년 4월 15일)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 :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이 간첩과 군수 물자를 남베트남으로 보내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연결한 통로
[8] 베트콩(Viet Cong) : 일명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베트남 공화국과 미국을 상대로 싸운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을 펼쳐 북베트남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9] 사이공(Sài Gòn) : 현재의 호찌민시.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
[10] 킬링필드(Killing Fields) : 1975년에서 1979년 사이에 폴 포트가 이끄는 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크메르 루주가 자행한 대학살 사건
[11] 사이공(Sài Gòn) :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오늘날의 호찌민시. 베트남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나뉘게 되었을 때 남베트남의 수도였으며 1975년에 사이공은 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두어 그 결과로 요르단의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지구, 이집트의 가자지구(Gaza Strip)와 시나이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획득하였다.
* 골란고원(Golan Heights) :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 지대이며 국제법상 시리아의 영토이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후 이 지역 3분의 2를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국제사회 대부분 국가는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골란고원은 군사적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물 공급의 15%를 차지한다.
*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1967년의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1994년까지 이스라엘군의 통치 아래 있었으나 1994년부터 통치권이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에 이양되었다.
*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 : 1979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을 조인한 이후에 이집트에 반환하였다. 반환은 1982년 4월에 타바를 제외한 다른 지역이 반환되었고 1989년에는 타바도 반환되었다.
*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예루살렘(Jerusalem),베들레헴(Bethlehem),예리코(Jericho)등이 있다.
* 골란고원(Golan Heights) :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 지대이며 국제법상 시리아의 영토이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후 이 지역 3분의 2를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국제사회 대부분 국가는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골란고원은 군사적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물 공급의 15%를 차지한다.
*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1967년의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1994년까지 이스라엘군의 통치 아래 있었으나 1994년부터 통치권이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에 이양되었다.
*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 : 1979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을 조인한 이후에 이집트에 반환하였다. 반환은 1982년 4월에 타바를 제외한 다른 지역이 반환되었고 1989년에는 타바도 반환되었다.
*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예루살렘(Jerusalem),베들레헴(Bethlehem),예리코(Jericho)등이 있다.
1·21 사태는 1968년 1월 21일에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군부대 무장 군인 31명이 대한민국 서울에 침투,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 이후에 대한민국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은 북파공작원 특수부대 684 부대(실미도부대등..)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보복성 공격을 계획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에 대한민국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은 북파공작원 특수부대 684 부대(실미도부대등..)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보복성 공격을 계획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제3공화국 시기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정부 기관이 대통령 3선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한 야당과 학생 등이 1969년 6월부터 12월까지 지속한 개헌 저지·규탄 활동을 말한다.
정권 연장을 위하여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게 하는 6번째 대한민국 헌법개정안은 9월 14일 국회에서 변칙통과하여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확정되었고, 박정희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유신체제와 장기집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제3공화국 : 1963년 12월 17일부터 1972년 12월 26일까지 존속하였던 대통령 중심제 정부로 대통령은 제5대, 제6대, 제7대 대통령 박정희였다.
정권 연장을 위하여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게 하는 6번째 대한민국 헌법개정안은 9월 14일 국회에서 변칙통과하여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확정되었고, 박정희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유신체제와 장기집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제3공화국 : 1963년 12월 17일부터 1972년 12월 26일까지 존속하였던 대통령 중심제 정부로 대통령은 제5대, 제6대, 제7대 대통령 박정희였다.
와우아파트 준공 4개월 만인 1970년 4월 8일 오전 8시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 산 1번지에 위치한 와우지구 시민아파트의 한 개동(제15동,5층)이 부실공사로 무너진 사건이다. 그 결과로 사망 33명, 중상19명, 경상 21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하루 8시간 노동과 초과근무수당을 국가가 법으로 규정한 근로기준법이 최초로 제정된 해는 1953년이었다. 그로부터 17년이나 지났지만 1970년대 한국 사회는 경제 개발이란 미명 하에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정당한 대가마저 포기하도록 강요했고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부인했다.
전태일은 서울시 종로구 평화시장 피복 공장의 재단사등으로 일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를 체험하였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에 관하여 노동청에 진정도하고 호소를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22살의 전태일은 이에 항거하여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쓰러진 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평화시장에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 결성될 수 있었으며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태일은 서울시 종로구 평화시장 피복 공장의 재단사등으로 일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를 체험하였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에 관하여 노동청에 진정도하고 호소를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22살의 전태일은 이에 항거하여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쓰러진 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평화시장에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 결성될 수 있었으며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7·4 남북 공동 성명은 1972년 7월 4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이 국토 분단 이후 최초로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원칙을 발표하였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그러나 1973년에 들어와 남북대화는 동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접촉이 지연되고 더 이상 대화진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그러나 1973년에 들어와 남북대화는 동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접촉이 지연되고 더 이상 대화진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73년 9월 11일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민주 선거로 집권한 사회주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정권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당시 육군 참모총장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쿠데타로 무너졌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3년 만이었다.
아옌데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 세력에 대항하여 긑까지 투쟁하다 결국은 자결을 하였다.
아옌데가 사회주의적 개혁 정책을 펼치자 이를 반대하는 외부세력들은 칠레에 경제 제재를 가했으며 칠레내의 아옌데 반대파를 적극 지원하였다.
미국 정보기관이 비밀해제된 문서에서 미국정보가 칠레쿠데타 공작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발표되어 많은 충격을 주었다.
*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1915년~2006년) : 칠레의 제33,34,35대 대통령. 임기 1974년~1990년
*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년~1973년) : 칠레의 제29대 대통령. 임기 1970년~1973
아옌데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 세력에 대항하여 긑까지 투쟁하다 결국은 자결을 하였다.
아옌데가 사회주의적 개혁 정책을 펼치자 이를 반대하는 외부세력들은 칠레에 경제 제재를 가했으며 칠레내의 아옌데 반대파를 적극 지원하였다.
미국 정보기관이 비밀해제된 문서에서 미국정보가 칠레쿠데타 공작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발표되어 많은 충격을 주었다.
*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1915년~2006년) : 칠레의 제33,34,35대 대통령. 임기 1974년~1990년
*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년~1973년) : 칠레의 제29대 대통령. 임기 1970년~1973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에서 6일만에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이집의 시나이 반도와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획득하였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이스라엘의 인정과 영구적인 평화 협정 체결과 이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를 조건으로 두 지역을 반환하는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자국 영토로 합병하는 절차에 착수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반환과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수에즈 운하 일대에서 지속적인 소모전을 벌였다.
1970년 이집트는 나세르의 뒤어 이어 대통령이 된 [2]사다트는 [4]골란고원 문제로 이스라엘에 원한관계에 있던 시리아와 손을 잡고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에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전쟁이 일어난 당일이 [1]'욤 키푸르'날이었기 때문에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도 한다. 이집트는 [5]시나이 반도로 시리아는 [4]골란고원을 향해 기습 공격했다.
이스라엘은 기습적인 대규모 공격으로 초반에 매우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전투가 시작된지 3일후 이집트군의 공세를 저지시키면서 교착 상태에 이르고, 골란고원으로 진격한 시시라군도 경계선까지 몰아내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전쟁기간동안 상호 동맹국에 대량으로 물자를 보급했고, 이로 인해 미국과 소련의 대결 수준이 되면서 긴장이 높아지게 되었다.
확전을 우려한 유엔은 10월 22일 중재를 제안했고, 결국 10월 25일 휴전되어 전쟁은 종결되었다.
사실 이스라엘군은 반격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전쟁 초반 이집트군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도 상당했다. 이집트 역시 지난 전쟁에 비하여 선전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또 패배했다. 이를 확인한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정책으로 외교정책을 선회했다. 결국 1974년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면서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되었다.
그 후 몇 년에 걸친 협상끝에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한 후 [5]시나이 반도는 1982년 완전히 이집트에 반환되었다.
반면 시리아는 아직도 [4]골란고원을 찾지 못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골란고원은 지형적인 형태에 따른 전략적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1] 욤 키푸르(Yom Kippur) : 유대교의 속죄일이자 명절. 유대인들은 이날 금식을 하며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 히브리어로 '날(day)'을 뜻하는 '욤(yom)'과 '속죄(atonement)'를 뜻하는 '키푸르(kippur)'가 합쳐진 말
[2]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년~1981년) : 이집트의 3대 대통령, 임기 : 1970년 10월 15일~1981년 10월 6일
[3] 골다 메이어(Golda Meir, 1898년~1978년) : 이스라엘을 건국한 정치인 중 한명. 4대 이스라엘 총리이자 첫 여성 초리(임기 : 1969~1974). 원조 '철의여인'
[4] 골란고원(Golan Heights) :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 지대이며 국제법상 시리아의 영토이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후 이 지역 3분의 2를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국제사회 대부분 국가는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골란고원은 군사적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물 공급의 15%를 차지한다.
[5]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 : 1979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을 조인한 이후에 이집트에 반환하였다. 반환은 1982년 4월에 타바(Taba)를 제외한 다른 지역이 반환되었고 1989년에는 타바(Taba)도 반환되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이스라엘의 인정과 영구적인 평화 협정 체결과 이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를 조건으로 두 지역을 반환하는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자국 영토로 합병하는 절차에 착수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반환과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수에즈 운하 일대에서 지속적인 소모전을 벌였다.
1970년 이집트는 나세르의 뒤어 이어 대통령이 된 [2]사다트는 [4]골란고원 문제로 이스라엘에 원한관계에 있던 시리아와 손을 잡고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에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전쟁이 일어난 당일이 [1]'욤 키푸르'날이었기 때문에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도 한다. 이집트는 [5]시나이 반도로 시리아는 [4]골란고원을 향해 기습 공격했다.
이스라엘은 기습적인 대규모 공격으로 초반에 매우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전투가 시작된지 3일후 이집트군의 공세를 저지시키면서 교착 상태에 이르고, 골란고원으로 진격한 시시라군도 경계선까지 몰아내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전쟁기간동안 상호 동맹국에 대량으로 물자를 보급했고, 이로 인해 미국과 소련의 대결 수준이 되면서 긴장이 높아지게 되었다.
확전을 우려한 유엔은 10월 22일 중재를 제안했고, 결국 10월 25일 휴전되어 전쟁은 종결되었다.
사실 이스라엘군은 반격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전쟁 초반 이집트군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도 상당했다. 이집트 역시 지난 전쟁에 비하여 선전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또 패배했다. 이를 확인한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정책으로 외교정책을 선회했다. 결국 1974년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면서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되었다.
그 후 몇 년에 걸친 협상끝에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한 후 [5]시나이 반도는 1982년 완전히 이집트에 반환되었다.
반면 시리아는 아직도 [4]골란고원을 찾지 못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골란고원은 지형적인 형태에 따른 전략적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1] 욤 키푸르(Yom Kippur) : 유대교의 속죄일이자 명절. 유대인들은 이날 금식을 하며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 히브리어로 '날(day)'을 뜻하는 '욤(yom)'과 '속죄(atonement)'를 뜻하는 '키푸르(kippur)'가 합쳐진 말
[2]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년~1981년) : 이집트의 3대 대통령, 임기 : 1970년 10월 15일~1981년 10월 6일
[3] 골다 메이어(Golda Meir, 1898년~1978년) : 이스라엘을 건국한 정치인 중 한명. 4대 이스라엘 총리이자 첫 여성 초리(임기 : 1969~1974). 원조 '철의여인'
[4] 골란고원(Golan Heights) :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 지대이며 국제법상 시리아의 영토이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후 이 지역 3분의 2를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국제사회 대부분 국가는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골란고원은 군사적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물 공급의 15%를 차지한다.
[5]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 : 1979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을 조인한 이후에 이집트에 반환하였다. 반환은 1982년 4월에 타바(Taba)를 제외한 다른 지역이 반환되었고 1989년에는 타바(Taba)도 반환되었다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에서는 40여 년간 지속된 독재 정권을 종식시키는 무혈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카네이션 혁명이라고 불리며, 혁명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거리의 혁명군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지지 의사를 표시한데서 비롯되었다. 4·25 혁명으로도 불린다
1932년부터 집권한 총리 [1]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경찰국가적인 요소를 강화한 권위주의 정권이었다. 특히 1960년대에는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 식민지들이 대부분 독립한 것과 달리 식민지 정책을 계속 유지하였다.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 아프리카 식민지들과의 독립 전쟁은 국가 재정을 압박했고 징병으로 인한 사회적 반감도 심해졌다. 이로인해 경제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낙후되기 시작했다.
1968년 8월, [1]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휴식중에 머리를 다쳐 의식불능 상태가 되었다. 후임초리로 [2]마르셀루 카에타누로가 선출되었지만 독재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군 장교들이 모여 군 내부 개혁과 전쟁 종식을 요구하며 [3]군사운동(MFA)을 결성하게 되었다. 1974년 4월 25일 새벽에 당시 금지곡인 "그란돌라여, 거무스름한 마을이여(Grândola, Vila Morena)"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며 혁명의 시작을 알렸고, MFA는 리스본의 주요 시설인 정부청사, 방송국등을 점령하며 정권을 무혈로 전복시켰다.
[2]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는 저항없이 항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군의 행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총구에 꽂은 붉은 카네이션이 혁명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혁명 이후 독재 정권은 해체되었고, 언론의 자유와 정당 활동이 허용되었으며, 정치범이 석방되고 새로운 민주 헌법이 제정되는 등 포르투갈은 본격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이행하였다. 식민지 전쟁도 중단되며 대부분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1975년까지 독립을 이루었다.
1976년 헌법 제정과 총선 실시를 통해 포르투갈은 완전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고 MFA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카네이션 혁명은 유럽 역사상 가장 평화롭게 독재를 종식시킨 사례로 평가받으며 시민과 군이 협력한 성공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남아있다.
[1]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포르투갈어: António de Oliveira Salazar, 1889년 4월 28일 ~ 1970년 7월 27일): 포르투갈 공화국 제100대 총리(재임, 1932년 7월 5일 ~ 1968년 9월 25일)
[2] 마르셀루 카에타누로(Marcelo José das Neves Alves Caetano, 1906년 8월 17일 ~ 1980년 10월 26일) : 포르투갈의 제101대 총리(재위, 1968년 9월 25일~1974년 4월 25일)
[3] 군사운동(MFA, Movimento das Forças Armadas) : 포르투갈의 젊은 중·소령급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것으로 독재 정권이 강제했던 식민지 전쟁에 대한 반대와 군 내부의 불평등한 승진 제도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1932년부터 집권한 총리 [1]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경찰국가적인 요소를 강화한 권위주의 정권이었다. 특히 1960년대에는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 식민지들이 대부분 독립한 것과 달리 식민지 정책을 계속 유지하였다.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 아프리카 식민지들과의 독립 전쟁은 국가 재정을 압박했고 징병으로 인한 사회적 반감도 심해졌다. 이로인해 경제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낙후되기 시작했다.
1968년 8월, [1]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휴식중에 머리를 다쳐 의식불능 상태가 되었다. 후임초리로 [2]마르셀루 카에타누로가 선출되었지만 독재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군 장교들이 모여 군 내부 개혁과 전쟁 종식을 요구하며 [3]군사운동(MFA)을 결성하게 되었다. 1974년 4월 25일 새벽에 당시 금지곡인 "그란돌라여, 거무스름한 마을이여(Grândola, Vila Morena)"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며 혁명의 시작을 알렸고, MFA는 리스본의 주요 시설인 정부청사, 방송국등을 점령하며 정권을 무혈로 전복시켰다.
[2]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는 저항없이 항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군의 행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총구에 꽂은 붉은 카네이션이 혁명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혁명 이후 독재 정권은 해체되었고, 언론의 자유와 정당 활동이 허용되었으며, 정치범이 석방되고 새로운 민주 헌법이 제정되는 등 포르투갈은 본격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이행하였다. 식민지 전쟁도 중단되며 대부분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1975년까지 독립을 이루었다.
1976년 헌법 제정과 총선 실시를 통해 포르투갈은 완전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고 MFA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카네이션 혁명은 유럽 역사상 가장 평화롭게 독재를 종식시킨 사례로 평가받으며 시민과 군이 협력한 성공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남아있다.
[1]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포르투갈어: António de Oliveira Salazar, 1889년 4월 28일 ~ 1970년 7월 27일): 포르투갈 공화국 제100대 총리(재임, 1932년 7월 5일 ~ 1968년 9월 25일)
[2] 마르셀루 카에타누로(Marcelo José das Neves Alves Caetano, 1906년 8월 17일 ~ 1980년 10월 26일) : 포르투갈의 제101대 총리(재위, 1968년 9월 25일~1974년 4월 25일)
[3] 군사운동(MFA, Movimento das Forças Armadas) : 포르투갈의 젊은 중·소령급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것으로 독재 정권이 강제했던 식민지 전쟁에 대한 반대와 군 내부의 불평등한 승진 제도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 도중에 발생하였다. 이날 [2]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던 중에 재일 한국인 [3]문세광이 권총을 발사하면서 사건이 발생했다. 문세광은 박정희 대통령을 겨냥하여 발사했지만 총탄이 빗나가 자신의 허벅지를 쏘았으나, 곧 연단으로 향해 달려나가며 연이어 발사하였다. 그러나 발사된 총탄은 박정희가 아닌 단상 옆에 앉아 있던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를 향했다. 총을 맞은 육영수 여사는 즉시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후 7시경 사망했다.
당시 광복절 행사에 경축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합창 단원으로 참석하였던 [4]장봉화 학생이 대통령 경호원의 오발탄에 맞아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도 발생하였다.
문세광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과거 친북 성향의 단체와 접촉한 이력이 있었다. 그는 체포된 후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으며 북한의 연계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이에 대해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한의 개입 가능성을 강하게 주장하며 이를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에 이용하였다. 군사재판을 통해 문세광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사건 발생 두 달 후에 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유신 정권은 더욱 강경한 정치 체제를 구축하는 계기로 삼았다. 박정희 정권은 반정부 활동을 더욱 엄격하게 탄압했고 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정부는 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에게 반공 교육을 강화하며 사회적 분위기를 더욱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육영수 여사의 죽음은 많은 국민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고 그녀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생전 서민들과의 친밀한 소통으로 인기가 높았던 그녀의 사망은 국민적 애도로 이어졌으며, 이후 그녀를 기리는 기념사업도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둘러싸고 몇 가지 의문점도 제기되었다. 가장 큰 논란은 문세광이 단독 범행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한국 정부는 북한이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일본은 북한과 연관성이 명확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 행사에서 문세광이 어떻게 총기를 반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경호 문제도 논란이 되었다.
육영수 저격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박정희 정권이 더욱 강경한 유신 체제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사건의 배경과 북한과의 연관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해석이 분분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1] 육영수(1925년 11월 29일~1974년 8월 15일) : 대통령 박정희의 두 번째 배우자, 영부인
[2] 박정희(1917년 11월 14일~1979년 10월 26일) :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 재위기간, 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3] 문세광(1951년 12월 26일~1974년 12월 20일) : 대톨령 박정희를 저격하려다 영부인 육영수를 사살한 재일 한국인.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
[4] 장봉화(당시 16세) :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당시 광복절 행사에 경축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합창 단원으로 참석하였던 [4]장봉화 학생이 대통령 경호원의 오발탄에 맞아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도 발생하였다.
문세광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과거 친북 성향의 단체와 접촉한 이력이 있었다. 그는 체포된 후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으며 북한의 연계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이에 대해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한의 개입 가능성을 강하게 주장하며 이를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에 이용하였다. 군사재판을 통해 문세광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사건 발생 두 달 후에 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유신 정권은 더욱 강경한 정치 체제를 구축하는 계기로 삼았다. 박정희 정권은 반정부 활동을 더욱 엄격하게 탄압했고 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정부는 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에게 반공 교육을 강화하며 사회적 분위기를 더욱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육영수 여사의 죽음은 많은 국민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고 그녀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생전 서민들과의 친밀한 소통으로 인기가 높았던 그녀의 사망은 국민적 애도로 이어졌으며, 이후 그녀를 기리는 기념사업도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둘러싸고 몇 가지 의문점도 제기되었다. 가장 큰 논란은 문세광이 단독 범행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한국 정부는 북한이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일본은 북한과 연관성이 명확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 행사에서 문세광이 어떻게 총기를 반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경호 문제도 논란이 되었다.
육영수 저격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박정희 정권이 더욱 강경한 유신 체제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사건의 배경과 북한과의 연관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해석이 분분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1] 육영수(1925년 11월 29일~1974년 8월 15일) : 대통령 박정희의 두 번째 배우자, 영부인
[2] 박정희(1917년 11월 14일~1979년 10월 26일) :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 재위기간, 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3] 문세광(1951년 12월 26일~1974년 12월 20일) : 대톨령 박정희를 저격하려다 영부인 육영수를 사살한 재일 한국인.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
[4] 장봉화(당시 16세) :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