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건기간 : 1897년 10월 12일, 조회수 : 483, 등록일 : 2020-03-26
아관파천이후 1897년 2월에 덕수궁(경운궁)으로 환궁한 조선의 제26대 국왕 고종은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光武)'로 고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현재의 조선호텔 자리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인 환구단을 건설하였다. 환구단에서 1897년 10월 12일(음력 9월 17일)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내외에 선포하였다. 11월에 그때까지 미뤄졌던 명성왕후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렀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자주독립국가임을 내외에 거듭 재천명한 것이며, 자주독립의 강화를 국내와 세계에 알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강대국들은 대한제국 선포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1899년 근대 헌법의 성격의 전문 9조로 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 반포하여 대내외적으로 전제군주국가의 체제를 확고하게 법률적으로 규정하였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대한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제국이다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정치이다 제3조 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누린다 제5조 대한국 대황제는 육해군을 통솔한다 제6조 대한국 대황제는 법률을 제정하여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고, 대사, 특사, 감형, 복권등을 명한다 제9조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 체결 국가에 사신을 파견하고 선전, 강화 및 제반조규를 체결한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일본과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으며,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으로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고종(高宗, 1852년 9월 8일 ~ 1919년 1월 21일)은 조선의 제26대 왕(재위 : 1864년 1월 21일 ~ 1897년 10월 12일)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19일)이다.
[촬영일 :2020-11-30]
대한제국 고종황제 어진 - 국립중앙박물관 소재
[촬영일 :2020-05-28]
대한제국관을 소개하는 프랑스 잡지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대한제국 시기 주로 쓰였던 상징 문양은 태극, 오얏꽃, 무궁화, 매 등 네가지였다.
국가 상징은 개항 이후 국제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외국과의 교류가 빈번한 상황에서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물이 필요해지면서 제정되었다.
국가 상징은 황실을 중심으로 민간까지 널리 사용되었고, 의복/공예품/국기 등을 통해 사회 전반에 보급됨으로써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인식 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여러 근대적인 제도들과 함께 활용됨으로써 대한제국이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했던 노력을 보여준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촬영일 :2021-03-31]
대한제국 상징 문양 : 무궁화, 매(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촬영일 :2021-03-31]
대한제국 상징 문양 : 오얏꽃, 태극(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고종은 1895년 [1]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종은 이후 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약 1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했다.
1896년 6월 고종의 명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 자격으로 파견된 [2]민영환은 러시아 외무장관 로바노프를 만나 러시아 군대파견, 군사교관단 파견, 차관제공, 재정고문초빙, 전신선 가설 등의 요청을 하였다. [2]민영환의 절박함과 진정성으로 1896년 10월 러시아는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을 파견한다. 교관단들은 조선군 1600여 명을 선발해 군사훈련을 시키게 된다.
안전신변이 확보된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덕수궁(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빼았겼던 군주권을 회복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1] 을미사변 : 1895년 일본에 의하여 조선왕후인 명성왕후가 살해된 사건
[2] 민영환(1861년~1905년) :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크게 개탄하며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국민들에게 남기고 11월 30일 자결하였다.
* 아관 : 러시아제국을 한문으로 '아라사'라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였다. 따라서 아라사 공관을 줄여서 아관이라고 불렀으며 러시아 공관을 의미한다
* 파천 :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가는 것
*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 1841년~1910년) :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주(駐)조선 러시아 공사로 활동하면서 고종과 친분을 쌓았으며 아관파천을 주도하였다
광무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직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시행한 대한제국의 근대화 개혁이다.
광무개혁은 '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 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래 부분적으로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여 나라의 발전을 이룩하려 하였다.
대한제국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자주성을 뒷받침하기 이해 국방력 강화와 재정 개혁,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다. 먼저 황제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고, 서울의 중앙군과 지방의 지방군을 대폭 증강하며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다.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함인 양무호를 구입하였다. 양무호는 매우 빈약했으며 이마저도 러일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겨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1896년 1월 11일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폐지되고 대한제국이 건국 후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9년에 [1]양지아문을 설치하고 1899년부터 1903년까지 일부 지역에서 토지조사사업과 [2]지계발급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토지를 법률의 보호 아래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는 토지거래 질서가 확립 되었으며, 국가 재정을 개선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갑오개혁 때 23부로 개편한 행정을 아관파천 이후 13도로 재개편하였다,
적극적으로 추진된 분야는 상공업 진흥책이다. 정부 스스로 제조공장을 설립했으며, 민간의 제조회사 설립을 지원하여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근대적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했으며, 공업전습소 등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황실에서는 방직공장, 유리공장, 제지공장의 설립을 시도했고, 일반 민간인의 공장 설립은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지만 황실이 직영하는 업종 이외의 것은 쉽게 허가하였다.
정부는 근대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근대적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의학교를 설립하여 국민들의 위생과 보건에 노력했으며 중학교를 설립하여 중등교육의 근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한성도시개조상업을 통해 도로와 하수도를 정비하고 교통, 통신, 전기, 전차 등의 근대 시설을 도입하여 산업발전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시기인 1899년에 전차개통과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그 밖에 도량형 제도와 호적제 실시, 순회 재판소 설치, 종합병원인 제중원(濟衆院), 구휼기관인 혜민원(惠民院)등이 설립되었다.
광무개혁은 이처럼 전제군주제의 확립을 통해 근대 주권국가를 지향했고, 짧은 기간에 국방, 산업, 교육, 기술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러일전쟁과 함께 대한제국 정부의 개혁 사업은 중단되었다.
광무개혁은 황제권 강화라는 보수적인 색채와 지계발급, 상공업 진흥, 기술학교 설립, 교통.통신의 인프라 개선등 개혁적이고 새로운 특징을 볼 수 있다. 또한 갑신벙변, 갑오개혁, 을미개혁 같은 개혁들에 비해 자주적으로 추진했던 개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보수적인 인물들이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점을 들어 광무개혁의 개혁성을 부인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