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내전(Guatemalan Civil War)
과테말라
사건기간 : 1960년 11월 13일~1996년 12월 29일, 조회수 : 34, 등록일 : 2026-04-19
과테말라 내전, 흔히 "30년 전쟁"이라 불리는 이 분쟁은 냉전 구조 속에서 정치·사회·민족 갈등이 결합된 복합적 충돌이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토지 불평등, 군부 독재, 원주민 차별, 그리고 외세 개입이 중첩되며 점차 격화된 구조적 갈등의 산물이었다.
내전의 직접적 계기는 1960년 11월 13일 일부 군 장교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반정부 세력은 게릴라 조직으로 재편되어 장기적인 무장 투쟁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익 게릴라 조직들이 형성되었고 특히 후기에 이르러서는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이 주요 반군 연합체로 등장하였다.
이 내전의 배경에는 1954년 미국의 후원을 받은 과테말라 쿠데타로 [1]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전복되고 군부 중심의 권위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억압이 심화되었고 토지 개혁이 중단되며 농민과 원주민의 불만이 극대화되었다. 특히 마야계 원주민들은 경제적 소외와 함께 정치적 배제 속에서 가장 큰 피해 집단으로 남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다. 군사 정권은 좌익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강제 실종, 고문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2]에프라인 리오스 몬트가 집권한 1982년부터 1983년 사이에는 "초토화 작전"이라 불리는 강경 정책이 시행되었고 수백 개의 마을이 파괴되며 수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도 집단학살(genocide) 논쟁이 제기될 만큼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된 시기였다.
내전 기간 동안 미국은 냉전 구도 속에서 반공 정책을 이유로 과테말라 정부를 군사·경제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는 군부의 강경 진압을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게릴라 세력은 농민과 일부 도시 지식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정부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열과 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제 사회의 인권 압력과 냉전 종식 분위기 속에서 평화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1990년대에는 유엔의 중재 아래 정부와 반군 간 협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1996년 12월 29일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36년에 걸친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해 약 20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그 중 대다수는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UN이 지원한 역사규명위원회(CEH)의 보고에 따르면 피해자의 83%가 마야계 원주민으로 단순한 이념 갈등을 넘어 민족적 탄압의 성격이 강했다. 가해 행위의 93%가 정부군 및 준군사조직에 의해 저질러졌음이 밝혀졌다.
이 전쟁은 과테말라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과거사 청산과 사회적 화합은 과테말라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남아 있다.
[1]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1914년 11월 4일 ~ 1957년 7월 26일) : 제28대 대통령(재임기간, 1954년 7월 8일 ~ 1957년 7월 26일). 1957년 7월 26일 대통령 근위대 소속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58년부터 보수 세력 출신인 이디고라스(Miguel Ydígoras Fuentes, 1958-1963)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6년 동안의 과테말라 내전이 시작되었다.
[2]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Efraín Ríos Montt, 1926년 6월 16일~2018년 4월 1일) : 과테말라의 제38대 대통령(임기, 1982년 3월 23일~1983년 8월 8일)
내전의 직접적 계기는 1960년 11월 13일 일부 군 장교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반정부 세력은 게릴라 조직으로 재편되어 장기적인 무장 투쟁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익 게릴라 조직들이 형성되었고 특히 후기에 이르러서는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이 주요 반군 연합체로 등장하였다.
이 내전의 배경에는 1954년 미국의 후원을 받은 과테말라 쿠데타로 [1]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전복되고 군부 중심의 권위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억압이 심화되었고 토지 개혁이 중단되며 농민과 원주민의 불만이 극대화되었다. 특히 마야계 원주민들은 경제적 소외와 함께 정치적 배제 속에서 가장 큰 피해 집단으로 남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다. 군사 정권은 좌익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강제 실종, 고문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2]에프라인 리오스 몬트가 집권한 1982년부터 1983년 사이에는 "초토화 작전"이라 불리는 강경 정책이 시행되었고 수백 개의 마을이 파괴되며 수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도 집단학살(genocide) 논쟁이 제기될 만큼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된 시기였다.
내전 기간 동안 미국은 냉전 구도 속에서 반공 정책을 이유로 과테말라 정부를 군사·경제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는 군부의 강경 진압을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게릴라 세력은 농민과 일부 도시 지식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정부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열과 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제 사회의 인권 압력과 냉전 종식 분위기 속에서 평화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1990년대에는 유엔의 중재 아래 정부와 반군 간 협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1996년 12월 29일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36년에 걸친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해 약 20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그 중 대다수는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UN이 지원한 역사규명위원회(CEH)의 보고에 따르면 피해자의 83%가 마야계 원주민으로 단순한 이념 갈등을 넘어 민족적 탄압의 성격이 강했다. 가해 행위의 93%가 정부군 및 준군사조직에 의해 저질러졌음이 밝혀졌다.
이 전쟁은 과테말라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과거사 청산과 사회적 화합은 과테말라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남아 있다.
[1]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1914년 11월 4일 ~ 1957년 7월 26일) : 제28대 대통령(재임기간, 1954년 7월 8일 ~ 1957년 7월 26일). 1957년 7월 26일 대통령 근위대 소속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58년부터 보수 세력 출신인 이디고라스(Miguel Ydígoras Fuentes, 1958-1963)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6년 동안의 과테말라 내전이 시작되었다.
[2]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Efraín Ríos Montt, 1926년 6월 16일~2018년 4월 1일) : 과테말라의 제38대 대통령(임기, 1982년 3월 23일~1983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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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은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선으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Second Indochina war)이라고도 한다.
베트남은 항미전쟁이라고 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남전으로 부른다.
이 전쟁은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의 내전으로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 전쟁 양상을 띠었다.
1964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하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전선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치러졌다.
미국은 [2]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1964년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남베트남을 수호하려던 미국은 결국 북베트남의 20여년동안 끈질긴 공세와 저항에 지치게 되고 미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1973년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미군이 철수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공세에 패배하였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호찌민까지 함락되면서 기나긴 전쟁은 종결된다. 그리하여 1976년 베트남은 통일을 선언하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 1946년 12월 19일 ~ 1954년 8월 1일) : 프랑스-베트남 전쟁. 베트남 독립전쟁
[2]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 : 1964년 8월 2일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의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함을 공격한 사건
베트남은 항미전쟁이라고 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남전으로 부른다.
이 전쟁은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의 내전으로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 전쟁 양상을 띠었다.
1964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하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전선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치러졌다.
미국은 [2]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1964년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남베트남을 수호하려던 미국은 결국 북베트남의 20여년동안 끈질긴 공세와 저항에 지치게 되고 미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1973년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미군이 철수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공세에 패배하였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호찌민까지 함락되면서 기나긴 전쟁은 종결된다. 그리하여 1976년 베트남은 통일을 선언하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 1946년 12월 19일 ~ 1954년 8월 1일) : 프랑스-베트남 전쟁. 베트남 독립전쟁
[2]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 : 1964년 8월 2일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의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함을 공격한 사건
대약진운동은 [1]마오쩌둥의 주도하에 1958년부터 1962년경까지 실시되었던 경제, 사회 개발 운동이다.
대규모 경제·사회적 운동으로, 공산주의 이상을 실현하고 농업과 공업 생산을 급속히 증대시키려는 목표로 시작되었다. 내수 시장과 자국 생산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을 이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농업 집단화를 통해 생산성 극대화, 철강 생산 증대를 위해 농촌에서도 소규모 제철소 설치, 공산주의 사회로 빠르게 전환하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되었으나, 잘못된 계획과 과장된 생산목표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비현실적 정책과 자원의 낭비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였다. 약 1500만~45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아사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과는 중국 경제와 사회에 막대한 혼란을 야기하며, 실패로 평가되었으며, [1]마오쩌둥의 정치적 권위가 약화되었다.
대약진운동은 1966년에 일어난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1]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Mao Zedong, 1893년~1976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대규모 경제·사회적 운동으로, 공산주의 이상을 실현하고 농업과 공업 생산을 급속히 증대시키려는 목표로 시작되었다. 내수 시장과 자국 생산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을 이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농업 집단화를 통해 생산성 극대화, 철강 생산 증대를 위해 농촌에서도 소규모 제철소 설치, 공산주의 사회로 빠르게 전환하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되었으나, 잘못된 계획과 과장된 생산목표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비현실적 정책과 자원의 낭비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였다. 약 1500만~45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아사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과는 중국 경제와 사회에 막대한 혼란을 야기하며, 실패로 평가되었으며, [1]마오쩌둥의 정치적 권위가 약화되었다.
대약진운동은 1966년에 일어난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1]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Mao Zedong, 1893년~1976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상북도 대구시의 8개 고교 학생들이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과 [1]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여 2월 28일에 일어난 학생의거이다. 2.28 학생민주의거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최초의 민주화운동이었으며, 2018년 2월 6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일요일이었던 1960년 2월 28일은 대구 수성천변에서 야당 부통령 후보인 [2]장면 후보의 선거 연설이 계획되어 있었다. 장면 후보의 유세장에 많은 인원이 모이는 것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는 이를 방지하고자 학생들이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학교 등교를 지시를 내린것이다.
경북고등학교는 3월 3일부터 예정되었던 중간고사가 앞당겨 변경되었다는 사유를 들어 학교 등교를 강요하였다. 이외에 대구 시내에 있던 다른 국공립 고등학교 7개 역시 토끼사냥, 영화관람, 졸업생 송별회등과 같이 다채롭고 궁색하고 황당한 사유로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각 학교는 부당함을 지적하고 등교 철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2월 28일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대구시청등 대구 시내를 돌며 시위를 하였다.
각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커졌으며, 8개 학교 총 1,2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그 중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였다.
이 시위는 하루 만에 끝났지만, 이후 전국으로 번지면서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8개 고교와 등교사유는 다음과 같다
- 경북고등학고 : 중간고사
- 대구고등학교 : 토끼사냥
-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 임시수업
-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 졸업생 송별회
- 대구농림고등학교(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
- 대구공업고등학교
- 경북여자고등학고 : 무조건 등교
- 대구여자고등학교 : 무용발표회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일요일이었던 1960년 2월 28일은 대구 수성천변에서 야당 부통령 후보인 [2]장면 후보의 선거 연설이 계획되어 있었다. 장면 후보의 유세장에 많은 인원이 모이는 것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는 이를 방지하고자 학생들이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학교 등교를 지시를 내린것이다.
경북고등학교는 3월 3일부터 예정되었던 중간고사가 앞당겨 변경되었다는 사유를 들어 학교 등교를 강요하였다. 이외에 대구 시내에 있던 다른 국공립 고등학교 7개 역시 토끼사냥, 영화관람, 졸업생 송별회등과 같이 다채롭고 궁색하고 황당한 사유로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각 학교는 부당함을 지적하고 등교 철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2월 28일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대구시청등 대구 시내를 돌며 시위를 하였다.
각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커졌으며, 8개 학교 총 1,2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그 중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였다.
이 시위는 하루 만에 끝났지만, 이후 전국으로 번지면서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8개 고교와 등교사유는 다음과 같다
- 경북고등학고 : 중간고사
- 대구고등학교 : 토끼사냥
-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 임시수업
-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 졸업생 송별회
- 대구농림고등학교(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
- 대구공업고등학교
- 경북여자고등학고 : 무조건 등교
- 대구여자고등학교 : 무용발표회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1]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어 일어난 시민 혁명이다.
2월 28일 대구학생의거를 시작으로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15부정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민주화를 외치던 3.15마산의거에 참여한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2]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이 왼쪽 눈에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보도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 후 괴한에 의해 습격을 당한 것이 알려져 반정부 정서가 점차 심화되었다.
4월 19일 수많은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와 자유당의 독재규탄을 외치며 국회의사당과 [6]경무대를 향해 나아갔다.
경무대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치열한 대치 끝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시위대 100여 명이 사망했으며,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2018년 4.19혁명 58주년을 맞아 종로구 청와대앞 분수광장 바닥에는 4.19 최초 발포현장 표지석을 설치했다.
전 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다.
이승만의 하야로 당시 외무부장관인 [3]허정은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과도정부는 제1공화국헌법을 개정하여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7월 29일 총선거를 거쳐서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4]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그 해 8월 18일 [5]장면이 총리로 지명되었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김주열(1944년~1960년) : 3·15 민주화의거중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 허정(1896년~1988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 서울특별시장, 외무부장관, 이승만 하야후 대통령 권한대행등을 역임
[4]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5]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6]경무대(景武臺) : 현재의 청와대로 2022년 5월 9일까지 사용한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
2월 28일 대구학생의거를 시작으로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15부정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민주화를 외치던 3.15마산의거에 참여한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2]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이 왼쪽 눈에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보도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 후 괴한에 의해 습격을 당한 것이 알려져 반정부 정서가 점차 심화되었다.
4월 19일 수많은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와 자유당의 독재규탄을 외치며 국회의사당과 [6]경무대를 향해 나아갔다.
경무대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치열한 대치 끝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시위대 100여 명이 사망했으며,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2018년 4.19혁명 58주년을 맞아 종로구 청와대앞 분수광장 바닥에는 4.19 최초 발포현장 표지석을 설치했다.
전 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다.
이승만의 하야로 당시 외무부장관인 [3]허정은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과도정부는 제1공화국헌법을 개정하여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7월 29일 총선거를 거쳐서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4]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그 해 8월 18일 [5]장면이 총리로 지명되었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김주열(1944년~1960년) : 3·15 민주화의거중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 허정(1896년~1988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 서울특별시장, 외무부장관, 이승만 하야후 대통령 권한대행등을 역임
[4]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5]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6]경무대(景武臺) : 현재의 청와대로 2022년 5월 9일까지 사용한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
3.15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의 개표조작이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여당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는 [1]이승만, 부통령 후보는 [2]이기붕이었으며, 야당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3]조병옥, 부통령 후보는 [4]장면이었다.
1960년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신병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으로 떠났으나 선거일 한달전인 2월 15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은 당선이 확정적었다.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조병옥 2명이었으므로 조병옥이 사망했으니 이승만은 유일한 후보가 된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전체 유권자의 30%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당선되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3·15 부정선거는 이전의 선거 부정과 달리 사전 계획에 의해 자행되었다. 재판기록에 의하면, [6]최인규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던 1959년 3월부터 부정선거에 대한 기획과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준비된 부정선거의 기획은 광범위하고 구체적이었다.
부정선거에서 사용된 가장 핵심적인 수단은 4할 사전선거였다. 이는 선거인 명부를 허위기재하거나 유령유권자를 만들고 나아가 유권자를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투표용지를 미리 빼돌리는 것이었다. 그 밖에 3인조 9인조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이 사전에 준비, 계획되었다.
3월 15일 마침내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종료되었다.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95%∼99%까지 나온 지역이 속출하였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은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에게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역에서 감표로 조정하여 최종집계는 이승만 88% 득표, 이기붕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나 당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표와 개표상의 부정행위에 대한 전국민의 저항은 3월 15일 저녁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찰의 무자비한 강경대응으로 마산시민이 사망 및 부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는 더 격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마산에서 시작된 3.15마산의거는 전국적인 규모의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내각책임제 헌법이 공포되어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공포된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5]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 18일 장면은 총리로 지명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기록원 - 나라기록포털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이기붕(1896년~1960년) : 대한민국 제3대 국방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
[3] 조병옥(1894년~1960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
[4]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5]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6] 최인규(1919년~1961년) : 대한민국 제18대 내무부 장관(1959년 3월 20일~1960년 3월 23일), 제7대 교통부 장관(1958년 9월 9일~1959년 3월 20일).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으로 1961년 12월 21일 교수형당한다
당시 여당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는 [1]이승만, 부통령 후보는 [2]이기붕이었으며, 야당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3]조병옥, 부통령 후보는 [4]장면이었다.
1960년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신병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으로 떠났으나 선거일 한달전인 2월 15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은 당선이 확정적었다.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조병옥 2명이었으므로 조병옥이 사망했으니 이승만은 유일한 후보가 된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전체 유권자의 30%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당선되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3·15 부정선거는 이전의 선거 부정과 달리 사전 계획에 의해 자행되었다. 재판기록에 의하면, [6]최인규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던 1959년 3월부터 부정선거에 대한 기획과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준비된 부정선거의 기획은 광범위하고 구체적이었다.
부정선거에서 사용된 가장 핵심적인 수단은 4할 사전선거였다. 이는 선거인 명부를 허위기재하거나 유령유권자를 만들고 나아가 유권자를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투표용지를 미리 빼돌리는 것이었다. 그 밖에 3인조 9인조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이 사전에 준비, 계획되었다.
3월 15일 마침내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종료되었다.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95%∼99%까지 나온 지역이 속출하였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은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에게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역에서 감표로 조정하여 최종집계는 이승만 88% 득표, 이기붕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나 당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표와 개표상의 부정행위에 대한 전국민의 저항은 3월 15일 저녁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찰의 무자비한 강경대응으로 마산시민이 사망 및 부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는 더 격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마산에서 시작된 3.15마산의거는 전국적인 규모의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내각책임제 헌법이 공포되어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공포된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5]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 18일 장면은 총리로 지명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기록원 - 나라기록포털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이기붕(1896년~1960년) : 대한민국 제3대 국방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
[3] 조병옥(1894년~1960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
[4]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5]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6] 최인규(1919년~1961년) : 대한민국 제18대 내무부 장관(1959년 3월 20일~1960년 3월 23일), 제7대 교통부 장관(1958년 9월 9일~1959년 3월 20일).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으로 1961년 12월 21일 교수형당한다
4.19혁명 이후 정치.사회의 혼란을 틈타 군내의 [1]정군운동으로 정치지향적 군인이 조직화되어 세력을 넓혀나갔다.
1961년 5월 16일에 [2]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군사정변(쿠데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후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회를 해산하였다.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라 개명하고 5월 20일 혁명내각을 발표함으로써 군인들이 통치하는 군사정권을 수립하였다.
[4]장면총리는 혜화동의 갈멜수녀원으로 몸을 피신하였다. 이후 내각 총사퇴를 결의함으로써 군사혁명위원회에 정부를 이양하였다.
[5]윤보선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자이며 국가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을 지닌 합법 정부를 수호하지 않았다. 접견실에서 박정희, [3]장도영등 쿠데타 세력들을 만난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그해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1] 정군운동 : 1960년 4.19혁명 직후 군내부에서 부정부패 및 과거사 청을 빌미로 상급 장교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운동
[2] 박정희(1917년~1979년) :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3] 장도영(1923년~2012년) : 장면내각의 두 번째 육군 참모총장. 5.16군사정변 직후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4]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5]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1961년 5월 16일에 [2]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군사정변(쿠데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후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회를 해산하였다.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라 개명하고 5월 20일 혁명내각을 발표함으로써 군인들이 통치하는 군사정권을 수립하였다.
[4]장면총리는 혜화동의 갈멜수녀원으로 몸을 피신하였다. 이후 내각 총사퇴를 결의함으로써 군사혁명위원회에 정부를 이양하였다.
[5]윤보선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자이며 국가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을 지닌 합법 정부를 수호하지 않았다. 접견실에서 박정희, [3]장도영등 쿠데타 세력들을 만난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그해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1] 정군운동 : 1960년 4.19혁명 직후 군내부에서 부정부패 및 과거사 청을 빌미로 상급 장교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운동
[2] 박정희(1917년~1979년) :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3] 장도영(1923년~2012년) : 장면내각의 두 번째 육군 참모총장. 5.16군사정변 직후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4]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5]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영국은 1914년에 [1]맥마흔 라인이 선포하여 티베트와 영국령 인도제국 사이의 국경선을 선언하였다. 이 [1]맥마흔 라인으로 인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에도 중국과 인도는 국경분쟁으로 블편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1959년에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인의 대규모 봉기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대규모로 진압을 하였다. 티베트의 지도자 [2]달라이 라마(14대)는 중국의 종교탄압과 티베트 문화말살 정책에 반발하여 인도로 피신해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중국과 인도간 무력 충돌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중국의 신장성(신장 위구르 자치구)과 티베트에서 분리주의자들에 의한 반중 무장 투쟁이 격화되었다. [3]마오쩌둥은 만약 소련, 인도가 개입할 경우 가장 먼저 티베트와 신장성이 무너질 것이고 결국에는 중공 정권 전체가 붕괴될수도 있다고 여겼다. 히말라야는 티베트는 물론, 중국의 서부를 지키기 위한 천연의 만리장성이었다. 중국으로서는 결코 물러날 수 없었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자 인도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1]맥마흔 라인에 군을 전진배치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철저히 전쟁준비를 위한 전투 태세도 만만치 않았다. 인도는 정말 중국이 전쟁을 감행할 지 예측하지 못하였다.
10월 6일 중국의 [3]마오쩌둥은 인도와 동부 국경과 서부 국경에서 동시에 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10월 18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전쟁 개전을 최종 결정했다.
10월 20일에 1,000km에 이르는 국경의 전 방면으로 중국의 주력군이 침공을 개시하면서 바야흐로 1개월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중국이 8만~9만명의 병력을 동원, 규모면에서도 국경수비대의 소규모 교전을 벗어난 정규군간의 정면 충돌로 비화된 것이다. 미처 전쟁을 예측하지 못한 인도군은 연전 연패하여 결국 후퇴한다.
미국과 소련은 중국의 영향력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압박을 가했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도 양국의 충돌 격화에 우려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중국은 전쟁에서 완승했음에도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군대를 모두 철수한다. 또한 승자로서 패자에게 거액의 배상금과 같은 굴욕적인 조건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그냥 아무 일도 없는 양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이것으로 중국-인도 양국간의 전쟁은 일단락을 짓는다. 그러나 아직도 인도와 중국의 국경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쌍방 모두 서로의 국경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지도, 더 이상 무력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양국 정부는 서로의 군대가 주둔한 지역을 소위 '실제 통제선'이라 하여 묵인키로 하였고 중간 지역은 비무장지대가 되었다.
중국과 인도가 국경 문제를 놓고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은 크게 세개로 나뉜다. 첫번째는 서부의 악사이친(Aksai Chin, 중국점유)지방이며 인도 카슈미르 지방과 신장성, 티베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두번째는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는 시킴(Sikkim, 인도점유)지방이다. 세번째는 동부 국경의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인도점유)지방이다. 양국의 분쟁지역을 모두 합하면 남한면적보다도 크다.
[1] 맥마흔 라인(McMahon Line) : 청나라가 1912년 신해혁명으로 망하고 티베트가 사실상 독립국이 되고 난 이후인 1914년 인도 제국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과 중화민국, 티베트가 삼자 협정으로 맺은 국경선이다. 당시 티베트와 영국은 이 조약을 승인했으나 중화민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맥마흔은 이 조약을 주도한 영국의 외교관 헨리 맥마흔의 이름이다.
[2] 달라이 라마 : 1391년부터 티베트 불교 겔룩파(티베트 불교종파 중 하나)의 최고 수장을 가리키는 세습명이면서 정치적인 의미에서 티베트의 국가원수이자 실징 통치자. 달마이란 몽골어로 큰바다라는 의미이며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의미한다.
[3] 마오저뚱(1893년~1976년) : 한자음으로 모택동. 중국 공산주의 정치가. 제1대 국가주석(1949년~1959년). 1945년에서 1976년까지 초대 중국 공산당 제1대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1959년에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인의 대규모 봉기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대규모로 진압을 하였다. 티베트의 지도자 [2]달라이 라마(14대)는 중국의 종교탄압과 티베트 문화말살 정책에 반발하여 인도로 피신해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중국과 인도간 무력 충돌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중국의 신장성(신장 위구르 자치구)과 티베트에서 분리주의자들에 의한 반중 무장 투쟁이 격화되었다. [3]마오쩌둥은 만약 소련, 인도가 개입할 경우 가장 먼저 티베트와 신장성이 무너질 것이고 결국에는 중공 정권 전체가 붕괴될수도 있다고 여겼다. 히말라야는 티베트는 물론, 중국의 서부를 지키기 위한 천연의 만리장성이었다. 중국으로서는 결코 물러날 수 없었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자 인도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1]맥마흔 라인에 군을 전진배치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철저히 전쟁준비를 위한 전투 태세도 만만치 않았다. 인도는 정말 중국이 전쟁을 감행할 지 예측하지 못하였다.
10월 6일 중국의 [3]마오쩌둥은 인도와 동부 국경과 서부 국경에서 동시에 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10월 18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전쟁 개전을 최종 결정했다.
10월 20일에 1,000km에 이르는 국경의 전 방면으로 중국의 주력군이 침공을 개시하면서 바야흐로 1개월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중국이 8만~9만명의 병력을 동원, 규모면에서도 국경수비대의 소규모 교전을 벗어난 정규군간의 정면 충돌로 비화된 것이다. 미처 전쟁을 예측하지 못한 인도군은 연전 연패하여 결국 후퇴한다.
미국과 소련은 중국의 영향력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압박을 가했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도 양국의 충돌 격화에 우려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중국은 전쟁에서 완승했음에도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군대를 모두 철수한다. 또한 승자로서 패자에게 거액의 배상금과 같은 굴욕적인 조건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그냥 아무 일도 없는 양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이것으로 중국-인도 양국간의 전쟁은 일단락을 짓는다. 그러나 아직도 인도와 중국의 국경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쌍방 모두 서로의 국경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지도, 더 이상 무력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양국 정부는 서로의 군대가 주둔한 지역을 소위 '실제 통제선'이라 하여 묵인키로 하였고 중간 지역은 비무장지대가 되었다.
중국과 인도가 국경 문제를 놓고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은 크게 세개로 나뉜다. 첫번째는 서부의 악사이친(Aksai Chin, 중국점유)지방이며 인도 카슈미르 지방과 신장성, 티베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두번째는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는 시킴(Sikkim, 인도점유)지방이다. 세번째는 동부 국경의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인도점유)지방이다. 양국의 분쟁지역을 모두 합하면 남한면적보다도 크다.
[1] 맥마흔 라인(McMahon Line) : 청나라가 1912년 신해혁명으로 망하고 티베트가 사실상 독립국이 되고 난 이후인 1914년 인도 제국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과 중화민국, 티베트가 삼자 협정으로 맺은 국경선이다. 당시 티베트와 영국은 이 조약을 승인했으나 중화민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맥마흔은 이 조약을 주도한 영국의 외교관 헨리 맥마흔의 이름이다.
[2] 달라이 라마 : 1391년부터 티베트 불교 겔룩파(티베트 불교종파 중 하나)의 최고 수장을 가리키는 세습명이면서 정치적인 의미에서 티베트의 국가원수이자 실징 통치자. 달마이란 몽골어로 큰바다라는 의미이며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의미한다.
[3] 마오저뚱(1893년~1976년) : 한자음으로 모택동. 중국 공산주의 정치가. 제1대 국가주석(1949년~1959년). 1945년에서 1976년까지 초대 중국 공산당 제1대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1]존 F. 케네디는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공개 차량 퍼레이드를 진행하던 도중 총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차기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지지 기반이 약했던 남부 지역에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텍사스를 방문중이었으며 부통령 [2]린든 B. 존슨, 텍사스 주지사 [3]존 코널리등과 함께 댈러스 시내를 오픈카로 행진하고 있었다.
행진 퍼레이드가 [4]딜리 플라자에 진입하였을 무렵 텍사스 교과서 창고 건물 6층에서 발사된 세 발의 총탄이 차량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 중 두 발이 케네디 대통령의 목과 머리에 적중되어 쓰러지자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사망하였다.
암살 직후 경찰은 총격이 발생한 건물 근처에서 [5]리 하비 오스왈드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하였다. 오스왈드는 미 해병대 출신으로 과거 소련에 망명한 전력이 있었고 공산주의적 성향을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댈러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신은 누명을 쓴 것이라고 주장하며 혐의를 부인하였다. 그러나 이틀 뒤 [5]오스왈드는 많은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찰에 의해 다른 교도소로 이송되던 도중 현장에 있던 댈러스 나이트클럽 업주인 [6]잭 루비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사건의 핵심 용의자가 사망하자 진상 규명은 더욱 어려워졌고 미국 사회 전반에 거대한 혼란과 음모론이 번지기 시작하였다.
케네디 암살 사건의 충격은 국제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었으며, 냉전 시대 미국 정치의 위태로움과 대통령 신변 보호 체계의 허점을 드러냈다.
미국 정부는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1963년 11월 29일 연방 대법원장 얼 워런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통령 암살 사건 조사 위원회, 이른바 [7]"워런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회는 [5]오스왈드가 단독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리며 외부 조직이나 공모자는 없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후 수십 년간 이 결론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으며 CIA, FBI, 쿠바의 보복설, 소련, 마피아 등 다양한 세력의 개입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매직 불릿" 이라 불리는 오스왈드의 두 번째 총탄이 케네디 대통령과 [3]존 코널리 주지사를 동시에 여러 부위에 적중했다는 설명은 많은 이들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미국 국민 다수는 공식 보고서의 내용을 불신하게 되었고 수많은 다큐멘터리, 연구서, 영화 등이 제작되면서 케네디 암살 사건은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하고 논쟁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1]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년 5월 29일 ~ 1963년 11월 22일) :제35대 미국 대통령(재임, 1961년 1월 20일~1963년 11월 22일)
[2] 린든 B.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년 8월 27일~1973년 1월 22일) : 케네디가 피살되고 제36대 대통령(재임, 1963년 11월 22일 승계~1969년 1월 20일)을 승계했다. 미국의 제36대 대통령(재임, 1961년 1월 20일~1963년 11월 22일)
[3] 존 보든 코널리(John Bowden Connally, 1917년 2월 27일 ~ 1993년 6월 15일) : 미국 텍사스주의 제39대 지사(임기, 1963년 1월 15일 ~ 1969년 1월 21일). 제61대 재무장관 역임
[4] 딜리 플라자(Dealey Plaza) :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위치한 도시 공원이다. 그곳은 때때로 "댈러스의 탄생지"라고 불린다
[5] 리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 1939년 10월 18일 ~ 1963년 11월 24일) :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암살범으로 지목된 인물. 체포된 후 다른 교도소로 호송되던 중 나이트클럽 주인인 잭 루비에게 암살되었다
[6] 잭 루비(Jack Leon Ruby, 1911년 3월 25일 ~ 1967년 1월 3일) :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으로 체포된 리 하비 오스월드를 경찰 호송 도중 총으로 살해한 인물. 댈러스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였으며 언론과 대중 사이에서 다양한 음모론의 중심에 섰다. 이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 중 암으로 사망하였다
[7] 워런 위원회(The Warren Commission) : 1963년 11월 29일 미국의 제36, 37대 대통령 린든 B. 존슨이 행정명령 11130호로 발족한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조사위원회로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 관한 대통령 직속위원회(President's Commission on the Assassination of President Kennedy)이다. 조사위원장인 연방 대법원장 얼 워런의 이름을 따서 워런 위원회라고 불린다. 1964년 9월 27일 888쪽의 최종보고서를 존슨에게 제출하였다. 케네디의 암살을 리 하비 오스월드의 단독 범행으로 오스월드 살해는 잭 루비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내렸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이후 수많은 비판과 음모론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차기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지지 기반이 약했던 남부 지역에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텍사스를 방문중이었으며 부통령 [2]린든 B. 존슨, 텍사스 주지사 [3]존 코널리등과 함께 댈러스 시내를 오픈카로 행진하고 있었다.
행진 퍼레이드가 [4]딜리 플라자에 진입하였을 무렵 텍사스 교과서 창고 건물 6층에서 발사된 세 발의 총탄이 차량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 중 두 발이 케네디 대통령의 목과 머리에 적중되어 쓰러지자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사망하였다.
암살 직후 경찰은 총격이 발생한 건물 근처에서 [5]리 하비 오스왈드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하였다. 오스왈드는 미 해병대 출신으로 과거 소련에 망명한 전력이 있었고 공산주의적 성향을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댈러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신은 누명을 쓴 것이라고 주장하며 혐의를 부인하였다. 그러나 이틀 뒤 [5]오스왈드는 많은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찰에 의해 다른 교도소로 이송되던 도중 현장에 있던 댈러스 나이트클럽 업주인 [6]잭 루비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사건의 핵심 용의자가 사망하자 진상 규명은 더욱 어려워졌고 미국 사회 전반에 거대한 혼란과 음모론이 번지기 시작하였다.
케네디 암살 사건의 충격은 국제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었으며, 냉전 시대 미국 정치의 위태로움과 대통령 신변 보호 체계의 허점을 드러냈다.
미국 정부는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1963년 11월 29일 연방 대법원장 얼 워런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통령 암살 사건 조사 위원회, 이른바 [7]"워런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회는 [5]오스왈드가 단독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리며 외부 조직이나 공모자는 없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후 수십 년간 이 결론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으며 CIA, FBI, 쿠바의 보복설, 소련, 마피아 등 다양한 세력의 개입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매직 불릿" 이라 불리는 오스왈드의 두 번째 총탄이 케네디 대통령과 [3]존 코널리 주지사를 동시에 여러 부위에 적중했다는 설명은 많은 이들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미국 국민 다수는 공식 보고서의 내용을 불신하게 되었고 수많은 다큐멘터리, 연구서, 영화 등이 제작되면서 케네디 암살 사건은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하고 논쟁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1]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년 5월 29일 ~ 1963년 11월 22일) :제35대 미국 대통령(재임, 1961년 1월 20일~1963년 11월 22일)
[2] 린든 B.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년 8월 27일~1973년 1월 22일) : 케네디가 피살되고 제36대 대통령(재임, 1963년 11월 22일 승계~1969년 1월 20일)을 승계했다. 미국의 제36대 대통령(재임, 1961년 1월 20일~1963년 11월 22일)
[3] 존 보든 코널리(John Bowden Connally, 1917년 2월 27일 ~ 1993년 6월 15일) : 미국 텍사스주의 제39대 지사(임기, 1963년 1월 15일 ~ 1969년 1월 21일). 제61대 재무장관 역임
[4] 딜리 플라자(Dealey Plaza) :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위치한 도시 공원이다. 그곳은 때때로 "댈러스의 탄생지"라고 불린다
[5] 리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 1939년 10월 18일 ~ 1963년 11월 24일) :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암살범으로 지목된 인물. 체포된 후 다른 교도소로 호송되던 중 나이트클럽 주인인 잭 루비에게 암살되었다
[6] 잭 루비(Jack Leon Ruby, 1911년 3월 25일 ~ 1967년 1월 3일) :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으로 체포된 리 하비 오스월드를 경찰 호송 도중 총으로 살해한 인물. 댈러스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였으며 언론과 대중 사이에서 다양한 음모론의 중심에 섰다. 이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 중 암으로 사망하였다
[7] 워런 위원회(The Warren Commission) : 1963년 11월 29일 미국의 제36, 37대 대통령 린든 B. 존슨이 행정명령 11130호로 발족한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조사위원회로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 관한 대통령 직속위원회(President's Commission on the Assassination of President Kennedy)이다. 조사위원장인 연방 대법원장 얼 워런의 이름을 따서 워런 위원회라고 불린다. 1964년 9월 27일 888쪽의 최종보고서를 존슨에게 제출하였다. 케네디의 암살을 리 하비 오스월드의 단독 범행으로 오스월드 살해는 잭 루비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내렸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이후 수많은 비판과 음모론의 대상이 되었다
6·3항쟁은 한일회담 반대운동, 한일협상 반대운동, 6·3시위라고도 한다. 이 항쟁은 서울에서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최초로 벌어진 1964년 3월 24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6월 3일에 절정을 이루었다.
박정희 정부는 6월 3일 오후 8시에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고 경찰과 계엄군이 투입되어 7월 28일 시위는 진압되었고 다음날인 29일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이러한 반발 속에서도 한일간 협의는 계속되었고 1965년 2월 15일 한⋅일 양국은 한⋅일 기본 조약에 합의하였고 1965년 6월 22일 정식 조인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6월 3일 오후 8시에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고 경찰과 계엄군이 투입되어 7월 28일 시위는 진압되었고 다음날인 29일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이러한 반발 속에서도 한일간 협의는 계속되었고 1965년 2월 15일 한⋅일 양국은 한⋅일 기본 조약에 합의하였고 1965년 6월 22일 정식 조인되었다.
1964년 8월2일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군 어뢰정 3척이 미국 구축함 매독스를 공격하여 양국간 교전이 벌어졌다.
미 해군은 이틀 뒤인 4일 공해에서 북베트남의 2차 공격이 이어졌다고 주장하고 미국 의회는 '통킹만 결의'를 의결하여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과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다.
이 사건은 무려 2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베트남 전쟁 미국 개입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8월 4일 두 번째 교전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했지만,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북베트남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폭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 통킹만((Gulf of Tonkin) : 베트남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있는 만. 통킹이라는 이름은 하노이의 옛 이름인 '동낀'에서 유래
미 해군은 이틀 뒤인 4일 공해에서 북베트남의 2차 공격이 이어졌다고 주장하고 미국 의회는 '통킹만 결의'를 의결하여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과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다.
이 사건은 무려 2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베트남 전쟁 미국 개입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8월 4일 두 번째 교전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했지만,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북베트남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폭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 통킹만((Gulf of Tonkin) : 베트남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있는 만. 통킹이라는 이름은 하노이의 옛 이름인 '동낀'에서 유래
1954년 제네바 협정이후,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경계로 일단 양분되었고, 17도 이북에는 [4]호치민이 이끄는 공산국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이 수립되고, 17도 이남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5]응오 딘 지엠 정권의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수립되었다.
미국은 세계적 냉전이 심화되던 시대에 '공산주의 봉쇄'라는 전략과 기치를 내걸고 인도차이나 분쟁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1964년 8월 2일에 발생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본격화했다. 미국 [1]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1964년 8월 5일 북베트남 폭격을 지시했으며, 이것이 일명 피어스 애로우(Pierce Arrow)작전의 시작으로 미국의 베트남전 전면전의 포문을 열었다.
미국은 풍부한 군대와 첨단 무기를 가지고도 [3]베트콩의 예측이 불가능한 게릴라 전술, 불규칙한 전투행동, 베트남의 자연환경등으로 고전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미국내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해지면서 1968년부터 미국과 북베트남사이의 휴전협상을 시작하였다
1969년 6월, [2]리차드 닉슨은 베트남으로부터의 단계적인 미군 철수를 발표했고, 1973년 1월 27일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미국이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하였다. 북베트남과 미군 사이의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으며 그해 3월 마지막 남은 미국의 전투부대가 남베트남에서 철수하였다.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패권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베트남에 개입하는 길을 선택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패퇴하였고 초강대국 미국의 위신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미국으로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년간 5만 명의 인명피해와 1,200억 달러가 소요된 대규모 전쟁이었으나 패배한 전쟁으로써 역사에 남게 되었다.
[1] 린든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년~1973년) : 미국 제36대 대통령(임기,1963년 11월 22일~1969년 1월 20일)
[2]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1913년~1994년) :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임기, 1969년 1월 20일~1974년 8월 9일)
[3] 베트콩(Viet Cong) : 남베트남 내의 반정부 게릴라 조직으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칭하는 용어
[4] 호찌민(Ho Chi Minh, 1890년~1969년) : 초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주석(임기, 1951년 2월 19일 - 1969년 9월 2일).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불린다.
[5] 응오 딘 지엠(NNgo Dinh Diem, 1901년~1963년) : 남베트남의 제1대 총통(임기, 1955년 10월 26일~1963년 11월 2일)
미국은 세계적 냉전이 심화되던 시대에 '공산주의 봉쇄'라는 전략과 기치를 내걸고 인도차이나 분쟁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1964년 8월 2일에 발생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본격화했다. 미국 [1]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1964년 8월 5일 북베트남 폭격을 지시했으며, 이것이 일명 피어스 애로우(Pierce Arrow)작전의 시작으로 미국의 베트남전 전면전의 포문을 열었다.
미국은 풍부한 군대와 첨단 무기를 가지고도 [3]베트콩의 예측이 불가능한 게릴라 전술, 불규칙한 전투행동, 베트남의 자연환경등으로 고전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미국내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해지면서 1968년부터 미국과 북베트남사이의 휴전협상을 시작하였다
1969년 6월, [2]리차드 닉슨은 베트남으로부터의 단계적인 미군 철수를 발표했고, 1973년 1월 27일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미국이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하였다. 북베트남과 미군 사이의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으며 그해 3월 마지막 남은 미국의 전투부대가 남베트남에서 철수하였다.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패권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베트남에 개입하는 길을 선택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패퇴하였고 초강대국 미국의 위신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미국으로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년간 5만 명의 인명피해와 1,200억 달러가 소요된 대규모 전쟁이었으나 패배한 전쟁으로써 역사에 남게 되었다.
[1] 린든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년~1973년) : 미국 제36대 대통령(임기,1963년 11월 22일~1969년 1월 20일)
[2]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1913년~1994년) :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임기, 1969년 1월 20일~1974년 8월 9일)
[3] 베트콩(Viet Cong) : 남베트남 내의 반정부 게릴라 조직으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칭하는 용어
[4] 호찌민(Ho Chi Minh, 1890년~1969년) : 초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주석(임기, 1951년 2월 19일 - 1969년 9월 2일).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불린다.
[5] 응오 딘 지엠(NNgo Dinh Diem, 1901년~1963년) : 남베트남의 제1대 총통(임기, 1955년 10월 26일~1963년 11월 2일)
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또는 월남전 참전은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쳐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전투부대를 파병하였다.
한국의 파병 제안과 월남(당시 남베트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1차 파병
- 1964년 9월 11일 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 22일 베트남의 수도 [1] 사이공에 상륙하였다.
- 13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 요원과 10명을 편성된 태권도교관단 요원 등 140명을 파병하였다.
2차 파병
-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3월 16일 당시 베트남의 수도 [1] 이공에 도착하였으며, 사이공 동북방 22㎞ 지점의 디안에 주둔하여 건설 지원 및 자체 방어를 위한 경비대대, 수송, 공병임무 수행하였다.
- 강원도 현리에 있는 국군 제6사단 사령부에서 '한국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고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부대'로 명명하여 파병하였다.
3차 파병
- 1965년 10월 9일 제2해병여단(청룡부대)은 남베트남 [2] 캄란에 상륙하였고 11월 1일 수도사단(맹호부대)가 [3] 퀴논에 상륙을 하였다
4차 파병
- 1966년 4월 19일 수도기계화사단(맹호부대) 제26연대가 꾸이년에 상륙을 하고, 이어서 10월 8일 제9사단(백마부대)가 [4] 닌호아에 상륙하였다
196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미국 내에서는 언론매체의 영향으로 반전 여론이 고조되어 1969년 1월 닉슥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철군을 발표하고 1969년 7월부터 일부 병력을 철수시켰다.
대한민국 정부도 제1단계로 1971년 12월 4일 제2해병 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1972년 4월 1일까지 9천명의 병력을 철수 시켰다.
제2단계 철수는 1973년 1월 8일, 파리에서 체결된 휴전 협정의 규정 사항인 "모든 외국 군대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한다."는 조항에 따라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1973년 1월 30일 125명의 선발대가 항공편으로 철수하였으며, 3월 14일까지 본대가 철수하고, 3월 23일 후발대 118명이 항공편으로 철수함으로써, 남베트남에 주둔하였던 모든 부대가 철수를 완료하였다.
한국군은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여 경제 발전에 필요한 외화수입이라는 많은 경제적 이익과 한국전쟁 이후의 값진 실전 경험을 얻었으나 파병자 중 5,000명의 사망자와 2만여 명의 참전용사가 고엽제 등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1] 사이공(Saigon) : 베트남 최대도시로 경제 중심지. 남베트남(1954년~1976년) 수도였으며 1975년에 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2] 캄란(Cam Ranh) : 베트남의 남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3] 퀴논(Quy Nhon) :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반도모양) 베트남 중부의 해안도시. 다낭과 나트랑의 중간지점에 위치. 베트남전쟁 당시 맹호부대의 주둔지
[4] 닌호아(Ninh Hòa) : 베트남의 해안마을. 베트남 전쟁당시 백마부대 사령부
한국의 파병 제안과 월남(당시 남베트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1차 파병
- 1964년 9월 11일 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 22일 베트남의 수도 [1] 사이공에 상륙하였다.
- 13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 요원과 10명을 편성된 태권도교관단 요원 등 140명을 파병하였다.
2차 파병
-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3월 16일 당시 베트남의 수도 [1] 이공에 도착하였으며, 사이공 동북방 22㎞ 지점의 디안에 주둔하여 건설 지원 및 자체 방어를 위한 경비대대, 수송, 공병임무 수행하였다.
- 강원도 현리에 있는 국군 제6사단 사령부에서 '한국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고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부대'로 명명하여 파병하였다.
3차 파병
- 1965년 10월 9일 제2해병여단(청룡부대)은 남베트남 [2] 캄란에 상륙하였고 11월 1일 수도사단(맹호부대)가 [3] 퀴논에 상륙을 하였다
4차 파병
- 1966년 4월 19일 수도기계화사단(맹호부대) 제26연대가 꾸이년에 상륙을 하고, 이어서 10월 8일 제9사단(백마부대)가 [4] 닌호아에 상륙하였다
196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미국 내에서는 언론매체의 영향으로 반전 여론이 고조되어 1969년 1월 닉슥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철군을 발표하고 1969년 7월부터 일부 병력을 철수시켰다.
대한민국 정부도 제1단계로 1971년 12월 4일 제2해병 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1972년 4월 1일까지 9천명의 병력을 철수 시켰다.
제2단계 철수는 1973년 1월 8일, 파리에서 체결된 휴전 협정의 규정 사항인 "모든 외국 군대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한다."는 조항에 따라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1973년 1월 30일 125명의 선발대가 항공편으로 철수하였으며, 3월 14일까지 본대가 철수하고, 3월 23일 후발대 118명이 항공편으로 철수함으로써, 남베트남에 주둔하였던 모든 부대가 철수를 완료하였다.
한국군은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여 경제 발전에 필요한 외화수입이라는 많은 경제적 이익과 한국전쟁 이후의 값진 실전 경험을 얻었으나 파병자 중 5,000명의 사망자와 2만여 명의 참전용사가 고엽제 등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1] 사이공(Saigon) : 베트남 최대도시로 경제 중심지. 남베트남(1954년~1976년) 수도였으며 1975년에 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2] 캄란(Cam Ranh) : 베트남의 남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3] 퀴논(Quy Nhon) :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반도모양) 베트남 중부의 해안도시. 다낭과 나트랑의 중간지점에 위치. 베트남전쟁 당시 맹호부대의 주둔지
[4] 닌호아(Ninh Hòa) : 베트남의 해안마을. 베트남 전쟁당시 백마부대 사령부
1965년 9월 30일 [3]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인도네시아의 최고 군 장군 6명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그리고 [2]수카르노의 수호자라고 선언했다. 처형 이후 자카르타의 메르데카 광장과 대통령궁을 점거했다.
하지만 이 쿠데타는 그당시 육군전략사령관이었던 [1]수하르토에 의해 진압돼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후 [1]수하르토는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친 [2]수카르노 인사등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이 학살 사건으로 사망자 추정치는 50만 명이라 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2백만 명에서 3백만 명까지 늘어나고 있다.
1967년 3월 [2]수카르노는 의회에서 실각되고 [1]수하르토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다.1968년 3월 수하르토가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30년간 독재가 시작되었다
쿠데타는 수하르토를 비롯한 군부 세력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혹이 매우 많다. 사건이라는 게 고작 7명 정도의 몇몇 고위 장성들을 암살한 것에 불과하며,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가 고작 하루 만에 순식간에 진압당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동남아시아에 퍼져가던 공산세력을 막기 위한 미국과 영국의 정치적 공작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 수하르토(Suharto, 1921년~2008년) : 인도네시아의 제2대 대통령(재임, 1967년 3월 12일~1998년 5월 21일)
[2] 수카르노(Sukarno, 1901년~1970년) : 인도네시아의 제1대 대통령(재임, 1945년 8월 18일~1967년 3월 12일), 네덜란드 점령기 독립운동가
[3] 인도네시아 공산당(Partai Komunis Indonesia, PKI, 1914–1966) :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부터 인도네시아 공화국 수카르노 집권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정당
하지만 이 쿠데타는 그당시 육군전략사령관이었던 [1]수하르토에 의해 진압돼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후 [1]수하르토는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친 [2]수카르노 인사등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이 학살 사건으로 사망자 추정치는 50만 명이라 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2백만 명에서 3백만 명까지 늘어나고 있다.
1967년 3월 [2]수카르노는 의회에서 실각되고 [1]수하르토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다.1968년 3월 수하르토가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30년간 독재가 시작되었다
쿠데타는 수하르토를 비롯한 군부 세력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혹이 매우 많다. 사건이라는 게 고작 7명 정도의 몇몇 고위 장성들을 암살한 것에 불과하며,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가 고작 하루 만에 순식간에 진압당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동남아시아에 퍼져가던 공산세력을 막기 위한 미국과 영국의 정치적 공작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 수하르토(Suharto, 1921년~2008년) : 인도네시아의 제2대 대통령(재임, 1967년 3월 12일~1998년 5월 21일)
[2] 수카르노(Sukarno, 1901년~1970년) : 인도네시아의 제1대 대통령(재임, 1945년 8월 18일~1967년 3월 12일), 네덜란드 점령기 독립운동가
[3] 인도네시아 공산당(Partai Komunis Indonesia, PKI, 1914–1966) :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부터 인도네시아 공화국 수카르노 집권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정당
인도네시아 대학살은 1965년 9월 30일 [3]인도네시아 공산당 쿠데타 미수로 인한 반등으로 반공주의의 기치아래 공산당 구성원을 대상으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망자 추정치는 50만 명이라 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2백만 명에서 3백만 명까지 늘어나고 있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초대 대통령 [2]수카르노가 실각되고 그 뒤를 이어 [1]수하르토가 대통령이 되면서 30년 독재가 시작되었다.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하고 있던 미국과 영국은 인도네시아 군부에 무기 및 재정지원 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혹을 부정하고 있다.
학살은 1965년 10월 수도 자카르타에서 시작되어 중부 및 동부 자바섬 전체로 퍼져나갔고, 이 후 발리섬에서도 지역 자경단과 육군부대가 실제 공산당회원과 공산당 회원으로 추정되면 학살을 자행했다.
이러한 잔학 행위는 당시 육군 [1]수하르토 휘하의 인도네시아 군대에 의해 주도되었다.
쿠데타 미수 사건은 인도네시아 전체에 누적된 공동체적 긴장과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육군지도부는 이를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악당으로 규정했으며, 반공주의에 고취된 민간인들도 학살에 가담했다.
1967년 3월 [2]수카르노는 의회에서 실각되고 [1]수하르토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다.1968년 3월 [1]수하르토가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30여년간 지속된 수하르토 정권하에서 1965년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언급자체가 금기시되었다.
2008년 1월 27일 숨을 거둔 수하르토는 끝내 학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인도네시아 어느 정부도 사과하지 않았다.
[1] 수하르토(Suharto, 1921년~2008년) : 인도네시아의 제2대 대통령(재임, 1967년 3월 12일~1998년 5월 21일)
[2] 수카르노(Sukarno, 1901년~1970년) : 인도네시아의 제1대 대통령(재임, 1945년 8월 18일~1967년 3월 12일), 네덜란드 점령기 독립운동가
[3] 인도네시아 공산당(Partai Komunis Indonesia, PKI, 1914–1966) :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부터 인도네시아 공화국 수카르노 집권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정당
이 사건으로 사망자 추정치는 50만 명이라 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2백만 명에서 3백만 명까지 늘어나고 있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초대 대통령 [2]수카르노가 실각되고 그 뒤를 이어 [1]수하르토가 대통령이 되면서 30년 독재가 시작되었다.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하고 있던 미국과 영국은 인도네시아 군부에 무기 및 재정지원 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혹을 부정하고 있다.
학살은 1965년 10월 수도 자카르타에서 시작되어 중부 및 동부 자바섬 전체로 퍼져나갔고, 이 후 발리섬에서도 지역 자경단과 육군부대가 실제 공산당회원과 공산당 회원으로 추정되면 학살을 자행했다.
이러한 잔학 행위는 당시 육군 [1]수하르토 휘하의 인도네시아 군대에 의해 주도되었다.
쿠데타 미수 사건은 인도네시아 전체에 누적된 공동체적 긴장과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육군지도부는 이를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악당으로 규정했으며, 반공주의에 고취된 민간인들도 학살에 가담했다.
1967년 3월 [2]수카르노는 의회에서 실각되고 [1]수하르토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다.1968년 3월 [1]수하르토가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30여년간 지속된 수하르토 정권하에서 1965년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언급자체가 금기시되었다.
2008년 1월 27일 숨을 거둔 수하르토는 끝내 학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인도네시아 어느 정부도 사과하지 않았다.
[1] 수하르토(Suharto, 1921년~2008년) : 인도네시아의 제2대 대통령(재임, 1967년 3월 12일~1998년 5월 21일)
[2] 수카르노(Sukarno, 1901년~1970년) : 인도네시아의 제1대 대통령(재임, 1945년 8월 18일~1967년 3월 12일), 네덜란드 점령기 독립운동가
[3] 인도네시아 공산당(Partai Komunis Indonesia, PKI, 1914–1966) :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부터 인도네시아 공화국 수카르노 집권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정당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중부 고원 지방 이아 드랑 계곡에서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벌인 첫 정규 전투이다.
미국은 캄보디아 국경지대 근처에 있는 이아드랑 계곡에 대규모 헬기를 동원하여 제1기병사단 공중 강습([3]헬리본) 부대를 착륙시켰다. 미군 강습 부대가 거의 다 착륙하자 전투가 시작되었다.
북베트남군은 미군의 대포 폭격으로 큰 희생을 내면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공격과 저항으로 미군은 [4]브로큰 애로우 상황에 빠지고 만다. 결국 미군은 [2]UH-1 [2]건쉽의 무차별 공격으로 방어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전투 결과 북베트남군의 전사자는 1,500명 이상이며 미군은 약 300여명이 전사했다. 전사자 비율이 6대1수준으로 이 전투 자체는 미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지만 결국은 이곳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이 전투 이후 미군의 베트남전 작전은 지리적 특성으로 헬리본이 기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002년에 개봉한 멜 깁슨 주연의 '위 워 솔저(We Were Soldiers)'영화는 이 전투를 소재로 하였다.
[1] UH-1 : 미국의 '벨 헬리콥터'사가 제작한 다목적 헬리콥터(utility helicopter)
[2] 건쉽(gunship) : 포를 지닌 배를 가리키지만 육군에서는 공격헬기를 지칭
[3] 헬리본(heliborne) : 헬리콥터 공중 강습
[4]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 진지나 거점이 적에게 완전히 포위당해 온전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 부대가 괴멸위협에 처해 있는 상황을 이르는 말
미국은 캄보디아 국경지대 근처에 있는 이아드랑 계곡에 대규모 헬기를 동원하여 제1기병사단 공중 강습([3]헬리본) 부대를 착륙시켰다. 미군 강습 부대가 거의 다 착륙하자 전투가 시작되었다.
북베트남군은 미군의 대포 폭격으로 큰 희생을 내면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공격과 저항으로 미군은 [4]브로큰 애로우 상황에 빠지고 만다. 결국 미군은 [2]UH-1 [2]건쉽의 무차별 공격으로 방어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전투 결과 북베트남군의 전사자는 1,500명 이상이며 미군은 약 300여명이 전사했다. 전사자 비율이 6대1수준으로 이 전투 자체는 미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지만 결국은 이곳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이 전투 이후 미군의 베트남전 작전은 지리적 특성으로 헬리본이 기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002년에 개봉한 멜 깁슨 주연의 '위 워 솔저(We Were Soldiers)'영화는 이 전투를 소재로 하였다.
[1] UH-1 : 미국의 '벨 헬리콥터'사가 제작한 다목적 헬리콥터(utility helicopter)
[2] 건쉽(gunship) : 포를 지닌 배를 가리키지만 육군에서는 공격헬기를 지칭
[3] 헬리본(heliborne) : 헬리콥터 공중 강습
[4]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 진지나 거점이 적에게 완전히 포위당해 온전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 부대가 괴멸위협에 처해 있는 상황을 이르는 말
중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사회·정치적 운동으로, [1]마오쩌둥이 주도하여 공산주의 이념을 강화하고 반혁명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1]마오쩌둥은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고 혁명 정신을 강화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시작했다.
전통적인 가치와 권력 구조를 타파하고, 공산주의 사상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주로 청년들로 구성된 [2]홍위병은 전통 문화와 지식인을 공격하며 운동의 중심에 섰다. 전통 문화의 파괴, 고위 관료 숙청, 지식인의 박해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혼란이 발생했으며 정치적 숙청과 내부 권력 투쟁이 격화되며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기도 했다.
경제와 교육 시스템의 붕괴, 수백만 명의 인명 피해, 문화유산의 대규모 파괴 등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문화대혁명은 [1]마오쩌둥의 사망과 [3]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인해 종결되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정치적·사회적 구조에 심각한 혼란과 상처를 남겼으며, 현대 중국 역사에서 실패한 정치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건은 중국 내 전통 문화와 지식층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렸고, 이후 중국 정부는 실용주의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이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1]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Mao Zedong, 1893년~1976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2] 홍위병(紅衛兵, Red Guards) : 중국 문화대혁명 초기, 마오쩌둥의 지지를 받아 결성된 젊은 학생(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 중심의 혁명 집단. 이들은 마오쩌둥 사상을 충실히 따르며, 사회주의 체제에 반대하거나 "반혁명적"으로 간주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홍위병의 폭력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자, 1968년 마오쩌둥은 군대를 동원해 이들의 활동을 억제하고 해산을 명령했다
[3]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 Deng Xiaoping,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3대 최고지도자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1]마오쩌둥은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고 혁명 정신을 강화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시작했다.
전통적인 가치와 권력 구조를 타파하고, 공산주의 사상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주로 청년들로 구성된 [2]홍위병은 전통 문화와 지식인을 공격하며 운동의 중심에 섰다. 전통 문화의 파괴, 고위 관료 숙청, 지식인의 박해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혼란이 발생했으며 정치적 숙청과 내부 권력 투쟁이 격화되며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기도 했다.
경제와 교육 시스템의 붕괴, 수백만 명의 인명 피해, 문화유산의 대규모 파괴 등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문화대혁명은 [1]마오쩌둥의 사망과 [3]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인해 종결되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정치적·사회적 구조에 심각한 혼란과 상처를 남겼으며, 현대 중국 역사에서 실패한 정치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건은 중국 내 전통 문화와 지식층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렸고, 이후 중국 정부는 실용주의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이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1]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Mao Zedong, 1893년~1976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2] 홍위병(紅衛兵, Red Guards) : 중국 문화대혁명 초기, 마오쩌둥의 지지를 받아 결성된 젊은 학생(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 중심의 혁명 집단. 이들은 마오쩌둥 사상을 충실히 따르며, 사회주의 체제에 반대하거나 "반혁명적"으로 간주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홍위병의 폭력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자, 1968년 마오쩌둥은 군대를 동원해 이들의 활동을 억제하고 해산을 명령했다
[3]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 Deng Xiaoping,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3대 최고지도자
1949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독립한 캄보디아는 국왕 [1]노로돔 시아누크에 의해 독재체제로 통치되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경제가 침체되면서 이를 반대하는 파벌간 분쟁으로 불안정 요소를 안고 있었다.
1965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1]시아누크 정부는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의 지원을 거부하고 중국을 지지했다.
베트남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영내의 [7]호치민 루트를 활용했고, 이에 미국은 캄보디아의 친미정권이 필요했다.
[1]시아누크 국왕이 소련과 중국의 방문을 틈타 1970년 3월 18일에 캄보디아 의회는 시아누크의 하야를 만장일치로 가결하면서 축출했다. 시아누크가 실각되자 [5]론 놀은 쿠데타를 일으켜 [2]크메르공화국을 수립하고 초대 수상이 되었다.
시아누크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으며 [5]론 놀의 친미정권에 저항을 국민들에게 호소하였다. 이 상황에서 [3]크메르 루주의 [6]폴 포트는 시아누크의 귀국을 옹립하면서 캄보디아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은 사실상 미국이 지원하는 캄보디아 정부군과 [3]크메르 루주·북베트남군간의 대리전 형태로 확대되었다.
1972년 1월, 미국은 [5]론 놀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캄보디아에 파견하였다. 미군은 [7]호치민 루트를 차단하기 위하여 캄보디아 국경 곳곳에 공습을 감행하여 수 십만명의 농민이 희생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크게 분노하여 [3]크메르 루주에 가담하면서 세력은 점점 확장되었다. 게다가 [3]크메르 루즈는 반미적 투쟁으로 민중들의 지지까지 크게 얻었다.
지속된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의 상황은 더욱 나빠져 갔으며 대부분의 캄보디아 영토는 [3]크메르 루주, [8]베트콩에게 점령당했다.
미국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쳐갔고 자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973년에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를 했다. 베트남 전쟁은 1975년 [11]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북베트남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1975년 4월 1일 크메르 루주는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자 [5]론 놀은 미국의 하와이로 망명했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주의 [6]폴 포트는 론 놀정부를 무너뜨리고 1976년 새로운 정권인 [4]민주캄푸치아를 수립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는 [10]킬링피드라는 대규모 학살과 강제노동 체제로 이어져 캄보디아의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캄보디아 내전은 단순한 국내 정치 갈등이 아니라 냉전 시기 미·소 및 중·소 분열, 베트남전의 확산, 그리고 아시아 내 공산주의 세력 간의 관계가 얽힌 복합적 분쟁이었다.
[1]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 10월 31일~2012년 10월 15일)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2] 크메르공화국(Khmer Republic) : 캄보디아 의회에서 캄보디아 왕국의 국왕인 노로돔 시아누크를 폐위시키고 1970년 10월 1일 캄보디아에 세워진 공화국으로 1975년 4월 17일까지 존재하였다. 론 놀이 초대 총리를 맡았다
[3]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51년에 조직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조직
[4]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크메르 루주가 주축이 되어 캄보디아 내전에서 승리하여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에 민주 캄푸치아라명명하고 지배하였다. 킬링필드로 알려진 대학살 정책을 저질렀다.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으로 붕괴되었다
[5] 론 놀(Lon Nol, 1913년 11월 13일~1985년 11월 17일) : 크메르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6] 폴 포트(Pol Pot, 1925년 5월 19일~1998년 4월 15일)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 :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이 간첩과 군수 물자를 남베트남으로 보내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연결한 통로
[8] 베트콩(Viet Cong) : 일명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베트남 공화국과 미국을 상대로 싸운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을 펼쳐 북베트남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9] 사이공(Sài Gòn) : 현재의 호찌민시.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
[10] 킬링필드(Killing Fields) : 1975년에서 1979년 사이에 폴 포트가 이끄는 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크메르 루주가 자행한 대학살 사건
[11] 사이공(Sài Gòn) :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오늘날의 호찌민시. 베트남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나뉘게 되었을 때 남베트남의 수도였으며 1975년에 사이공은 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1965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1]시아누크 정부는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의 지원을 거부하고 중국을 지지했다.
베트남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영내의 [7]호치민 루트를 활용했고, 이에 미국은 캄보디아의 친미정권이 필요했다.
[1]시아누크 국왕이 소련과 중국의 방문을 틈타 1970년 3월 18일에 캄보디아 의회는 시아누크의 하야를 만장일치로 가결하면서 축출했다. 시아누크가 실각되자 [5]론 놀은 쿠데타를 일으켜 [2]크메르공화국을 수립하고 초대 수상이 되었다.
시아누크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으며 [5]론 놀의 친미정권에 저항을 국민들에게 호소하였다. 이 상황에서 [3]크메르 루주의 [6]폴 포트는 시아누크의 귀국을 옹립하면서 캄보디아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은 사실상 미국이 지원하는 캄보디아 정부군과 [3]크메르 루주·북베트남군간의 대리전 형태로 확대되었다.
1972년 1월, 미국은 [5]론 놀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캄보디아에 파견하였다. 미군은 [7]호치민 루트를 차단하기 위하여 캄보디아 국경 곳곳에 공습을 감행하여 수 십만명의 농민이 희생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크게 분노하여 [3]크메르 루주에 가담하면서 세력은 점점 확장되었다. 게다가 [3]크메르 루즈는 반미적 투쟁으로 민중들의 지지까지 크게 얻었다.
지속된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의 상황은 더욱 나빠져 갔으며 대부분의 캄보디아 영토는 [3]크메르 루주, [8]베트콩에게 점령당했다.
미국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쳐갔고 자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973년에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를 했다. 베트남 전쟁은 1975년 [11]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북베트남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1975년 4월 1일 크메르 루주는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자 [5]론 놀은 미국의 하와이로 망명했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주의 [6]폴 포트는 론 놀정부를 무너뜨리고 1976년 새로운 정권인 [4]민주캄푸치아를 수립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는 [10]킬링피드라는 대규모 학살과 강제노동 체제로 이어져 캄보디아의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캄보디아 내전은 단순한 국내 정치 갈등이 아니라 냉전 시기 미·소 및 중·소 분열, 베트남전의 확산, 그리고 아시아 내 공산주의 세력 간의 관계가 얽힌 복합적 분쟁이었다.
[1]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 10월 31일~2012년 10월 15일)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2] 크메르공화국(Khmer Republic) : 캄보디아 의회에서 캄보디아 왕국의 국왕인 노로돔 시아누크를 폐위시키고 1970년 10월 1일 캄보디아에 세워진 공화국으로 1975년 4월 17일까지 존재하였다. 론 놀이 초대 총리를 맡았다
[3]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51년에 조직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조직
[4]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크메르 루주가 주축이 되어 캄보디아 내전에서 승리하여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에 민주 캄푸치아라명명하고 지배하였다. 킬링필드로 알려진 대학살 정책을 저질렀다.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으로 붕괴되었다
[5] 론 놀(Lon Nol, 1913년 11월 13일~1985년 11월 17일) : 크메르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6] 폴 포트(Pol Pot, 1925년 5월 19일~1998년 4월 15일)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 :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이 간첩과 군수 물자를 남베트남으로 보내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연결한 통로
[8] 베트콩(Viet Cong) : 일명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베트남 공화국과 미국을 상대로 싸운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을 펼쳐 북베트남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9] 사이공(Sài Gòn) : 현재의 호찌민시.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
[10] 킬링필드(Killing Fields) : 1975년에서 1979년 사이에 폴 포트가 이끄는 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크메르 루주가 자행한 대학살 사건
[11] 사이공(Sài Gòn) :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오늘날의 호찌민시. 베트남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나뉘게 되었을 때 남베트남의 수도였으며 1975년에 사이공은 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두어 그 결과로 요르단의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지구, 이집트의 가자지구(Gaza Strip)와 시나이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획득하였다.
* 골란고원(Golan Heights) :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 지대이며 국제법상 시리아의 영토이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후 이 지역 3분의 2를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국제사회 대부분 국가는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골란고원은 군사적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물 공급의 15%를 차지한다.
*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1967년의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1994년까지 이스라엘군의 통치 아래 있었으나 1994년부터 통치권이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에 이양되었다.
*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 : 1979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을 조인한 이후에 이집트에 반환하였다. 반환은 1982년 4월에 타바를 제외한 다른 지역이 반환되었고 1989년에는 타바도 반환되었다.
*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예루살렘(Jerusalem),베들레헴(Bethlehem),예리코(Jericho)등이 있다.
* 골란고원(Golan Heights) :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 지대이며 국제법상 시리아의 영토이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후 이 지역 3분의 2를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국제사회 대부분 국가는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골란고원은 군사적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물 공급의 15%를 차지한다.
*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1967년의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1994년까지 이스라엘군의 통치 아래 있었으나 1994년부터 통치권이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에 이양되었다.
*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 : 1979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을 조인한 이후에 이집트에 반환하였다. 반환은 1982년 4월에 타바를 제외한 다른 지역이 반환되었고 1989년에는 타바도 반환되었다.
*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예루살렘(Jerusalem),베들레헴(Bethlehem),예리코(Jericho)등이 있다.
1·21 사태는 1968년 1월 21일에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군부대 무장 군인 31명이 대한민국 서울에 침투,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 이후에 대한민국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은 북파공작원 특수부대 684 부대(실미도부대등..)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보복성 공격을 계획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에 대한민국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은 북파공작원 특수부대 684 부대(실미도부대등..)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보복성 공격을 계획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제3공화국 시기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정부 기관이 대통령 3선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한 야당과 학생 등이 1969년 6월부터 12월까지 지속한 개헌 저지·규탄 활동을 말한다.
정권 연장을 위하여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게 하는 6번째 대한민국 헌법개정안은 9월 14일 국회에서 변칙통과하여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확정되었고, 박정희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유신체제와 장기집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제3공화국 : 1963년 12월 17일부터 1972년 12월 26일까지 존속하였던 대통령 중심제 정부로 대통령은 제5대, 제6대, 제7대 대통령 박정희였다.
정권 연장을 위하여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게 하는 6번째 대한민국 헌법개정안은 9월 14일 국회에서 변칙통과하여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확정되었고, 박정희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유신체제와 장기집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제3공화국 : 1963년 12월 17일부터 1972년 12월 26일까지 존속하였던 대통령 중심제 정부로 대통령은 제5대, 제6대, 제7대 대통령 박정희였다.
와우아파트 준공 4개월 만인 1970년 4월 8일 오전 8시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 산 1번지에 위치한 와우지구 시민아파트의 한 개동(제15동,5층)이 부실공사로 무너진 사건이다. 그 결과로 사망 33명, 중상19명, 경상 21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하루 8시간 노동과 초과근무수당을 국가가 법으로 규정한 근로기준법이 최초로 제정된 해는 1953년이었다. 그로부터 17년이나 지났지만 1970년대 한국 사회는 경제 개발이란 미명 하에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정당한 대가마저 포기하도록 강요했고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부인했다.
전태일은 서울시 종로구 평화시장 피복 공장의 재단사등으로 일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를 체험하였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에 관하여 노동청에 진정도하고 호소를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22살의 전태일은 이에 항거하여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쓰러진 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평화시장에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 결성될 수 있었으며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태일은 서울시 종로구 평화시장 피복 공장의 재단사등으로 일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를 체험하였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에 관하여 노동청에 진정도하고 호소를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22살의 전태일은 이에 항거하여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쓰러진 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평화시장에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 결성될 수 있었으며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7·4 남북 공동 성명은 1972년 7월 4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이 국토 분단 이후 최초로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원칙을 발표하였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그러나 1973년에 들어와 남북대화는 동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접촉이 지연되고 더 이상 대화진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그러나 1973년에 들어와 남북대화는 동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접촉이 지연되고 더 이상 대화진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73년 9월 11일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민주 선거로 집권한 사회주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정권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당시 육군 참모총장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쿠데타로 무너졌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3년 만이었다.
아옌데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 세력에 대항하여 긑까지 투쟁하다 결국은 자결을 하였다.
아옌데가 사회주의적 개혁 정책을 펼치자 이를 반대하는 외부세력들은 칠레에 경제 제재를 가했으며 칠레내의 아옌데 반대파를 적극 지원하였다.
미국 정보기관이 비밀해제된 문서에서 미국정보가 칠레쿠데타 공작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발표되어 많은 충격을 주었다.
*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1915년~2006년) : 칠레의 제33,34,35대 대통령. 임기 1974년~1990년
*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년~1973년) : 칠레의 제29대 대통령. 임기 1970년~1973
아옌데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 세력에 대항하여 긑까지 투쟁하다 결국은 자결을 하였다.
아옌데가 사회주의적 개혁 정책을 펼치자 이를 반대하는 외부세력들은 칠레에 경제 제재를 가했으며 칠레내의 아옌데 반대파를 적극 지원하였다.
미국 정보기관이 비밀해제된 문서에서 미국정보가 칠레쿠데타 공작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발표되어 많은 충격을 주었다.
*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1915년~2006년) : 칠레의 제33,34,35대 대통령. 임기 1974년~1990년
*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년~1973년) : 칠레의 제29대 대통령. 임기 1970년~1973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에서 6일만에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이집의 시나이 반도와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획득하였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이스라엘의 인정과 영구적인 평화 협정 체결과 이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를 조건으로 두 지역을 반환하는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자국 영토로 합병하는 절차에 착수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반환과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수에즈 운하 일대에서 지속적인 소모전을 벌였다.
1970년 이집트는 나세르의 뒤어 이어 대통령이 된 [2]사다트는 [4]골란고원 문제로 이스라엘에 원한관계에 있던 시리아와 손을 잡고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에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전쟁이 일어난 당일이 [1]'욤 키푸르'날이었기 때문에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도 한다. 이집트는 [5]시나이 반도로 시리아는 [4]골란고원을 향해 기습 공격했다.
이스라엘은 기습적인 대규모 공격으로 초반에 매우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전투가 시작된지 3일후 이집트군의 공세를 저지시키면서 교착 상태에 이르고, 골란고원으로 진격한 시시라군도 경계선까지 몰아내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전쟁기간동안 상호 동맹국에 대량으로 물자를 보급했고, 이로 인해 미국과 소련의 대결 수준이 되면서 긴장이 높아지게 되었다.
확전을 우려한 유엔은 10월 22일 중재를 제안했고, 결국 10월 25일 휴전되어 전쟁은 종결되었다.
사실 이스라엘군은 반격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전쟁 초반 이집트군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도 상당했다. 이집트 역시 지난 전쟁에 비하여 선전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또 패배했다. 이를 확인한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정책으로 외교정책을 선회했다. 결국 1974년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면서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되었다.
그 후 몇 년에 걸친 협상끝에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한 후 [5]시나이 반도는 1982년 완전히 이집트에 반환되었다.
반면 시리아는 아직도 [4]골란고원을 찾지 못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골란고원은 지형적인 형태에 따른 전략적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1] 욤 키푸르(Yom Kippur) : 유대교의 속죄일이자 명절. 유대인들은 이날 금식을 하며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 히브리어로 '날(day)'을 뜻하는 '욤(yom)'과 '속죄(atonement)'를 뜻하는 '키푸르(kippur)'가 합쳐진 말
[2]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년~1981년) : 이집트의 3대 대통령, 임기 : 1970년 10월 15일~1981년 10월 6일
[3] 골다 메이어(Golda Meir, 1898년~1978년) : 이스라엘을 건국한 정치인 중 한명. 4대 이스라엘 총리이자 첫 여성 초리(임기 : 1969~1974). 원조 '철의여인'
[4] 골란고원(Golan Heights) :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 지대이며 국제법상 시리아의 영토이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후 이 지역 3분의 2를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국제사회 대부분 국가는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골란고원은 군사적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물 공급의 15%를 차지한다.
[5]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 : 1979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을 조인한 이후에 이집트에 반환하였다. 반환은 1982년 4월에 타바(Taba)를 제외한 다른 지역이 반환되었고 1989년에는 타바(Taba)도 반환되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이스라엘의 인정과 영구적인 평화 협정 체결과 이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를 조건으로 두 지역을 반환하는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자국 영토로 합병하는 절차에 착수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반환과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수에즈 운하 일대에서 지속적인 소모전을 벌였다.
1970년 이집트는 나세르의 뒤어 이어 대통령이 된 [2]사다트는 [4]골란고원 문제로 이스라엘에 원한관계에 있던 시리아와 손을 잡고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에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전쟁이 일어난 당일이 [1]'욤 키푸르'날이었기 때문에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도 한다. 이집트는 [5]시나이 반도로 시리아는 [4]골란고원을 향해 기습 공격했다.
이스라엘은 기습적인 대규모 공격으로 초반에 매우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전투가 시작된지 3일후 이집트군의 공세를 저지시키면서 교착 상태에 이르고, 골란고원으로 진격한 시시라군도 경계선까지 몰아내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전쟁기간동안 상호 동맹국에 대량으로 물자를 보급했고, 이로 인해 미국과 소련의 대결 수준이 되면서 긴장이 높아지게 되었다.
확전을 우려한 유엔은 10월 22일 중재를 제안했고, 결국 10월 25일 휴전되어 전쟁은 종결되었다.
사실 이스라엘군은 반격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전쟁 초반 이집트군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도 상당했다. 이집트 역시 지난 전쟁에 비하여 선전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또 패배했다. 이를 확인한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정책으로 외교정책을 선회했다. 결국 1974년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면서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되었다.
그 후 몇 년에 걸친 협상끝에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한 후 [5]시나이 반도는 1982년 완전히 이집트에 반환되었다.
반면 시리아는 아직도 [4]골란고원을 찾지 못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골란고원은 지형적인 형태에 따른 전략적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1] 욤 키푸르(Yom Kippur) : 유대교의 속죄일이자 명절. 유대인들은 이날 금식을 하며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 히브리어로 '날(day)'을 뜻하는 '욤(yom)'과 '속죄(atonement)'를 뜻하는 '키푸르(kippur)'가 합쳐진 말
[2]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년~1981년) : 이집트의 3대 대통령, 임기 : 1970년 10월 15일~1981년 10월 6일
[3] 골다 메이어(Golda Meir, 1898년~1978년) : 이스라엘을 건국한 정치인 중 한명. 4대 이스라엘 총리이자 첫 여성 초리(임기 : 1969~1974). 원조 '철의여인'
[4] 골란고원(Golan Heights) :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 지대이며 국제법상 시리아의 영토이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후 이 지역 3분의 2를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국제사회 대부분 국가는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골란고원은 군사적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물 공급의 15%를 차지한다.
[5]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 : 1979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을 조인한 이후에 이집트에 반환하였다. 반환은 1982년 4월에 타바(Taba)를 제외한 다른 지역이 반환되었고 1989년에는 타바(Taba)도 반환되었다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에서는 40여 년간 지속된 독재 정권을 종식시키는 무혈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카네이션 혁명이라고 불리며, 혁명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거리의 혁명군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지지 의사를 표시한데서 비롯되었다. 4·25 혁명으로도 불린다
1932년부터 집권한 총리 [1]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경찰국가적인 요소를 강화한 권위주의 정권이었다. 특히 1960년대에는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 식민지들이 대부분 독립한 것과 달리 식민지 정책을 계속 유지하였다.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 아프리카 식민지들과의 독립 전쟁은 국가 재정을 압박했고 징병으로 인한 사회적 반감도 심해졌다. 이로인해 경제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낙후되기 시작했다.
1968년 8월, [1]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휴식중에 머리를 다쳐 의식불능 상태가 되었다. 후임초리로 [2]마르셀루 카에타누로가 선출되었지만 독재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군 장교들이 모여 군 내부 개혁과 전쟁 종식을 요구하며 [3]군사운동(MFA)을 결성하게 되었다. 1974년 4월 25일 새벽에 당시 금지곡인 "그란돌라여, 거무스름한 마을이여(Grândola, Vila Morena)"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며 혁명의 시작을 알렸고, MFA는 리스본의 주요 시설인 정부청사, 방송국등을 점령하며 정권을 무혈로 전복시켰다.
[2]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는 저항없이 항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군의 행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총구에 꽂은 붉은 카네이션이 혁명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혁명 이후 독재 정권은 해체되었고, 언론의 자유와 정당 활동이 허용되었으며, 정치범이 석방되고 새로운 민주 헌법이 제정되는 등 포르투갈은 본격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이행하였다. 식민지 전쟁도 중단되며 대부분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1975년까지 독립을 이루었다.
1976년 헌법 제정과 총선 실시를 통해 포르투갈은 완전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고 MFA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카네이션 혁명은 유럽 역사상 가장 평화롭게 독재를 종식시킨 사례로 평가받으며 시민과 군이 협력한 성공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남아있다.
[1]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포르투갈어: António de Oliveira Salazar, 1889년 4월 28일 ~ 1970년 7월 27일): 포르투갈 공화국 제100대 총리(재임, 1932년 7월 5일 ~ 1968년 9월 25일)
[2] 마르셀루 카에타누로(Marcelo José das Neves Alves Caetano, 1906년 8월 17일 ~ 1980년 10월 26일) : 포르투갈의 제101대 총리(재위, 1968년 9월 25일~1974년 4월 25일)
[3] 군사운동(MFA, Movimento das Forças Armadas) : 포르투갈의 젊은 중·소령급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것으로 독재 정권이 강제했던 식민지 전쟁에 대한 반대와 군 내부의 불평등한 승진 제도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1932년부터 집권한 총리 [1]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경찰국가적인 요소를 강화한 권위주의 정권이었다. 특히 1960년대에는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 식민지들이 대부분 독립한 것과 달리 식민지 정책을 계속 유지하였다.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 아프리카 식민지들과의 독립 전쟁은 국가 재정을 압박했고 징병으로 인한 사회적 반감도 심해졌다. 이로인해 경제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낙후되기 시작했다.
1968년 8월, [1]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휴식중에 머리를 다쳐 의식불능 상태가 되었다. 후임초리로 [2]마르셀루 카에타누로가 선출되었지만 독재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군 장교들이 모여 군 내부 개혁과 전쟁 종식을 요구하며 [3]군사운동(MFA)을 결성하게 되었다. 1974년 4월 25일 새벽에 당시 금지곡인 "그란돌라여, 거무스름한 마을이여(Grândola, Vila Morena)"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며 혁명의 시작을 알렸고, MFA는 리스본의 주요 시설인 정부청사, 방송국등을 점령하며 정권을 무혈로 전복시켰다.
[2]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는 저항없이 항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군의 행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총구에 꽂은 붉은 카네이션이 혁명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혁명 이후 독재 정권은 해체되었고, 언론의 자유와 정당 활동이 허용되었으며, 정치범이 석방되고 새로운 민주 헌법이 제정되는 등 포르투갈은 본격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이행하였다. 식민지 전쟁도 중단되며 대부분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1975년까지 독립을 이루었다.
1976년 헌법 제정과 총선 실시를 통해 포르투갈은 완전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고 MFA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카네이션 혁명은 유럽 역사상 가장 평화롭게 독재를 종식시킨 사례로 평가받으며 시민과 군이 협력한 성공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남아있다.
[1]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포르투갈어: António de Oliveira Salazar, 1889년 4월 28일 ~ 1970년 7월 27일): 포르투갈 공화국 제100대 총리(재임, 1932년 7월 5일 ~ 1968년 9월 25일)
[2] 마르셀루 카에타누로(Marcelo José das Neves Alves Caetano, 1906년 8월 17일 ~ 1980년 10월 26일) : 포르투갈의 제101대 총리(재위, 1968년 9월 25일~1974년 4월 25일)
[3] 군사운동(MFA, Movimento das Forças Armadas) : 포르투갈의 젊은 중·소령급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것으로 독재 정권이 강제했던 식민지 전쟁에 대한 반대와 군 내부의 불평등한 승진 제도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 도중에 발생하였다. 이날 [2]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던 중에 재일 한국인 [3]문세광이 권총을 발사하면서 사건이 발생했다. 문세광은 박정희 대통령을 겨냥하여 발사했지만 총탄이 빗나가 자신의 허벅지를 쏘았으나, 곧 연단으로 향해 달려나가며 연이어 발사하였다. 그러나 발사된 총탄은 박정희가 아닌 단상 옆에 앉아 있던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를 향했다. 총을 맞은 육영수 여사는 즉시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후 7시경 사망했다.
당시 광복절 행사에 경축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합창 단원으로 참석하였던 [4]장봉화 학생이 대통령 경호원의 오발탄에 맞아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도 발생하였다.
문세광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과거 친북 성향의 단체와 접촉한 이력이 있었다. 그는 체포된 후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으며 북한의 연계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이에 대해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한의 개입 가능성을 강하게 주장하며 이를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에 이용하였다. 군사재판을 통해 문세광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사건 발생 두 달 후에 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유신 정권은 더욱 강경한 정치 체제를 구축하는 계기로 삼았다. 박정희 정권은 반정부 활동을 더욱 엄격하게 탄압했고 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정부는 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에게 반공 교육을 강화하며 사회적 분위기를 더욱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육영수 여사의 죽음은 많은 국민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고 그녀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생전 서민들과의 친밀한 소통으로 인기가 높았던 그녀의 사망은 국민적 애도로 이어졌으며, 이후 그녀를 기리는 기념사업도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둘러싸고 몇 가지 의문점도 제기되었다. 가장 큰 논란은 문세광이 단독 범행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한국 정부는 북한이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일본은 북한과 연관성이 명확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 행사에서 문세광이 어떻게 총기를 반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경호 문제도 논란이 되었다.
육영수 저격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박정희 정권이 더욱 강경한 유신 체제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사건의 배경과 북한과의 연관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해석이 분분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1] 육영수(1925년 11월 29일~1974년 8월 15일) : 대통령 박정희의 두 번째 배우자, 영부인
[2] 박정희(1917년 11월 14일~1979년 10월 26일) :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 재위기간, 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3] 문세광(1951년 12월 26일~1974년 12월 20일) : 대톨령 박정희를 저격하려다 영부인 육영수를 사살한 재일 한국인.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
[4] 장봉화(당시 16세) :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당시 광복절 행사에 경축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합창 단원으로 참석하였던 [4]장봉화 학생이 대통령 경호원의 오발탄에 맞아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도 발생하였다.
문세광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과거 친북 성향의 단체와 접촉한 이력이 있었다. 그는 체포된 후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으며 북한의 연계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이에 대해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한의 개입 가능성을 강하게 주장하며 이를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에 이용하였다. 군사재판을 통해 문세광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사건 발생 두 달 후에 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유신 정권은 더욱 강경한 정치 체제를 구축하는 계기로 삼았다. 박정희 정권은 반정부 활동을 더욱 엄격하게 탄압했고 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정부는 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에게 반공 교육을 강화하며 사회적 분위기를 더욱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육영수 여사의 죽음은 많은 국민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고 그녀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생전 서민들과의 친밀한 소통으로 인기가 높았던 그녀의 사망은 국민적 애도로 이어졌으며, 이후 그녀를 기리는 기념사업도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둘러싸고 몇 가지 의문점도 제기되었다. 가장 큰 논란은 문세광이 단독 범행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한국 정부는 북한이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일본은 북한과 연관성이 명확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 행사에서 문세광이 어떻게 총기를 반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경호 문제도 논란이 되었다.
육영수 저격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박정희 정권이 더욱 강경한 유신 체제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사건의 배경과 북한과의 연관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해석이 분분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1] 육영수(1925년 11월 29일~1974년 8월 15일) : 대통령 박정희의 두 번째 배우자, 영부인
[2] 박정희(1917년 11월 14일~1979년 10월 26일) :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 재위기간, 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3] 문세광(1951년 12월 26일~1974년 12월 20일) : 대톨령 박정희를 저격하려다 영부인 육영수를 사살한 재일 한국인.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
[4] 장봉화(당시 16세) :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1976년 3월 1일 700여명의 신자들이 모인 명동성당에서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김승훈, 함석헌, 함세웅, 안병무 등 각계 인사들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이 발표된 사건을 3ㆍ1 민주구국선언사건 또는 3ㆍ1 명동사건이라고 한다.
선언문의 내용은 긴급조치 철폐, 민주인사들과 학생 석방, 언론·출판·집회 등의 자유, 의회정치 회복, 사법권의 독립, 민족통일 등을 요구하는 선언으로 유신체제하의 반정부 선언문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 선언사건을 수사하여 관련인사 20명의 명단을 발표하고 그 중 김대중 등 11명을 대통령긴급조치9호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윤보선·함석헌 등 9명을 불구속입건하였다.
선언문의 내용은 긴급조치 철폐, 민주인사들과 학생 석방, 언론·출판·집회 등의 자유, 의회정치 회복, 사법권의 독립, 민족통일 등을 요구하는 선언으로 유신체제하의 반정부 선언문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 선언사건을 수사하여 관련인사 20명의 명단을 발표하고 그 중 김대중 등 11명을 대통령긴급조치9호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윤보선·함석헌 등 9명을 불구속입건하였다.
소웨토 항쟁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2]소웨토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학생 시위를 기점으로 전개된 저항 운동을 가리킨다. 이는 [3]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흑인 민중의 저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76년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는 영어와 아프리카 부족어로 교육하던 학교에 [1]아프리칸스어를 흑인 학생들의 주요 교과 언어로 강제하려는 교육 정책을 시행하였다. [1]아프리칸스어는 백인 소수 지배계층의 언어로 억압의 상징으로 여겨졌기에 흑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교육의 기회 자체가 차별받고 있던 상황에서 낯선 언어를 의무적으로 배우라는 정책은 사실상 흑인 청소년들의 미래를 박탈하는 조치로 받아들여졌다.
요하네스버그 [2]소웨토지역에 있는 올랜도웨스트 학교의 흑인 학생들은 아프리칸스어 수업을 보이콧하기로 하고 등교 거부 운동을 펼쳤다. 이는 인근 학교로도 퍼져 나갔고 6월 16일에 올랜도웨스트를 선두로 한 만여 명의 학생들은 아프리칸스어 강제교육 반대를 외치며 춤과 노래로 이어지는 평화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은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였고 최루탄과 실탄 사격을 가했다. 방금 전까지 평화로웠던 거리는 비명과 신음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특히 13살 소년 헥터 피터슨은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숨진 장면이 사진으로 보도되면서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분노와 항쟁으로 확산되었고, 소웨토뿐 아니라 다른 도시들에서도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항쟁은 수개월간 이어지며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고 요하네스버그의 백인 대학생들까지 항의하는 행진을 벌였다. 당시 [4]존 포르스테르 수상은 소요를 용납하지 않겠다며 소웨토에 경찰력을 수천 명이나 추가로 투입하였다. 경찰은 이 사태로 176명이 죽고 1,139명이 부상했다고 집계했지만 실제로는 600~7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4,000명 이상 부상당했다고 한다.
소웨토 항쟁을 경험한 학생들은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담하여 1980년대에 요하네스버그의 정유 공장이 폭파하는 테러와 대중들의 파업, 시위등으로 격화되자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하여 더 잔혹하게 탄압했지만 계속되는 흑인 운동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6]클레르크 대통령은 최악의 상태를 막기 위해 28년이나 반역죄로 구금했던 흑인 지도자 [5]넬슨 만델라를 1990년에 석방하였다. 넬슨 만델라는 협상 끝에 1994년 4월 민주적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치러졌다. 그리고 선거 결과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로써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수백 년에 걸친 백인들의 지배와 최악의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막을 내렸다.
[1] 아프리칸스어(Afrikaans) :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나미비아에서 주로 쓰이는 서게르만어군 언어
[2] 소웨토(Soweto) : 남아프리카 공화국 가우텡(Gauteng)주의 요하네스버그내에 있는 지역. 아파르트헤이트의 결과로 생긴 흑인 거주지역
[3]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정권에 의하여 1948년에 법률로 공식화된 인종분리 즉,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정권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정책. 아프리칸스어로 '분리'라는 뜻으로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수 백인과 다수 유색인종의 관계를 지배했던 정책
[4] 존 포르테르(John Vorster, 1915년~1983년) : 남아프리카 공화의 정치가. 1966년~1978년 남아프리카 총리
[5]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N, 1918년~2013년) :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선거 실시 후 당선된 최초의 흑인 대통령. 임기 1994년~1999년. 1993년 노벨평화상 수상
[6]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 1936년~)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인.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 넬슨 만델라와 대타협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끝낸 인물
[7]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ANC)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당. 원래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저항하기 위한 흑인 저항운동 단체였으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폐지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민주화되자 합법정당이 되었다
1976년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는 영어와 아프리카 부족어로 교육하던 학교에 [1]아프리칸스어를 흑인 학생들의 주요 교과 언어로 강제하려는 교육 정책을 시행하였다. [1]아프리칸스어는 백인 소수 지배계층의 언어로 억압의 상징으로 여겨졌기에 흑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교육의 기회 자체가 차별받고 있던 상황에서 낯선 언어를 의무적으로 배우라는 정책은 사실상 흑인 청소년들의 미래를 박탈하는 조치로 받아들여졌다.
요하네스버그 [2]소웨토지역에 있는 올랜도웨스트 학교의 흑인 학생들은 아프리칸스어 수업을 보이콧하기로 하고 등교 거부 운동을 펼쳤다. 이는 인근 학교로도 퍼져 나갔고 6월 16일에 올랜도웨스트를 선두로 한 만여 명의 학생들은 아프리칸스어 강제교육 반대를 외치며 춤과 노래로 이어지는 평화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은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였고 최루탄과 실탄 사격을 가했다. 방금 전까지 평화로웠던 거리는 비명과 신음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특히 13살 소년 헥터 피터슨은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숨진 장면이 사진으로 보도되면서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분노와 항쟁으로 확산되었고, 소웨토뿐 아니라 다른 도시들에서도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항쟁은 수개월간 이어지며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고 요하네스버그의 백인 대학생들까지 항의하는 행진을 벌였다. 당시 [4]존 포르스테르 수상은 소요를 용납하지 않겠다며 소웨토에 경찰력을 수천 명이나 추가로 투입하였다. 경찰은 이 사태로 176명이 죽고 1,139명이 부상했다고 집계했지만 실제로는 600~7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4,000명 이상 부상당했다고 한다.
소웨토 항쟁을 경험한 학생들은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담하여 1980년대에 요하네스버그의 정유 공장이 폭파하는 테러와 대중들의 파업, 시위등으로 격화되자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하여 더 잔혹하게 탄압했지만 계속되는 흑인 운동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6]클레르크 대통령은 최악의 상태를 막기 위해 28년이나 반역죄로 구금했던 흑인 지도자 [5]넬슨 만델라를 1990년에 석방하였다. 넬슨 만델라는 협상 끝에 1994년 4월 민주적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치러졌다. 그리고 선거 결과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로써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수백 년에 걸친 백인들의 지배와 최악의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막을 내렸다.
[1] 아프리칸스어(Afrikaans) :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나미비아에서 주로 쓰이는 서게르만어군 언어
[2] 소웨토(Soweto) : 남아프리카 공화국 가우텡(Gauteng)주의 요하네스버그내에 있는 지역. 아파르트헤이트의 결과로 생긴 흑인 거주지역
[3]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정권에 의하여 1948년에 법률로 공식화된 인종분리 즉,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정권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정책. 아프리칸스어로 '분리'라는 뜻으로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수 백인과 다수 유색인종의 관계를 지배했던 정책
[4] 존 포르테르(John Vorster, 1915년~1983년) : 남아프리카 공화의 정치가. 1966년~1978년 남아프리카 총리
[5]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N, 1918년~2013년) :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선거 실시 후 당선된 최초의 흑인 대통령. 임기 1994년~1999년. 1993년 노벨평화상 수상
[6]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 1936년~)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인.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 넬슨 만델라와 대타협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끝낸 인물
[7]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ANC)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당. 원래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저항하기 위한 흑인 저항운동 단체였으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폐지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민주화되자 합법정당이 되었다
엔테베 작전은 1976년 7월 4일, 이스라엘이 우간다의 엔테베 국제공항에서 인질을 구출한 군사 작전이다. 이 작전은 "썬더볼트 작전(Operation Thunderbolt)"으로도 불리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인질 구출 작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76년 6월 27일, [1]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과 독일 테러 조직인 [3]혁명세포 소속 테러리스트 4명이 에어 프랑스 139편(텔아비브 → 아테네 → 파리)항공기를 납치했다. 비행기는 아테네를 출발 직후에 납치되었으며, 우간다의 엔테베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우간다 군대의 지원을 받아 엔테베공항에서 [2]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인원 3명이 추가 합류했다. 엔테베에서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이 아닌 258명의 승객은 풀어주었고, 나머지 인질들은 공항 터미널에 감금했다.
테러리스트들은 이스라엘, 프랑스, 독일, 케냐 등 여러 나라에 수감된 팔레스타인 및 기타 테러 조직원 52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만약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7월 1일 인질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협상을 진행하는 척하며 비밀리에 군사 작전을 준비했다. 이스라엘군은 엔테베 공항의 구조와 테러리스트의 위치를 정밀 분석하고, 약 4,000km 떨어진 우간다까지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스라엘은 7월 3일 23시에 특수부대 정예군 100여명을 C-130 허큘리스 수송기 4대를 이용해 엔테베 공항에 착륙했다. 협상과정에서 7월 4일로 미뤄져 있어 전격적으로 작전이 시작됐다. 테러리스트 7명 전원 사살하고 우간다 군 45여명 사망, 소련제 전투기 11대가 파괴되었다.
작전은 불과 90분 만에 종료되었으며, 에어프랑스 승무원을 포함한 총 106명 중 4명을 제외하고 구출했다. 인질중 3명은 이스라엘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했고, 건강 상태가 좋지않은 74세의 인질인 도라블록(Dora Bloch)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당시 우간다 대통령 [2]이디 아민은 우간다의 피해를 트집잡아 살해되었다.
이스라엘군 사망자는 작전 지휘관 [4]요나탄 네타냐후 1명이었다.
엔테베 작전은 이스라엘 군사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성공적인 인질 구출 작전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 작전은 영화와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으며, 특히 "Raid on Entebbe"(1977), "7 Days in Entebbe"(2018) 등이 유명하다.
[1]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 PFLP) : 팔레스타인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정치조직이자 무장단체로, 1967년 에 설립되었다. 현재,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무장 활동과 정치적 활동을 지속하며, 하마스 및 기타 저항 조직과 협력
[2]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Idi Amin Dada Oumee, 1925년 ~ 2003년 8월 16일) : 우간다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1971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여 3대 대통령에 취임(재임, 1971년 1월 25일 ~ 1979년 4월 11일). 악명이 높은 독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3] 혁명세포(Revolutionäre Zellen, RZ) : 1973년에서 1995년까지 서독에서 활동한 테러 조직
[4] 요나탄 네타냐후(Yonatan Netanyahu, 1946년 3월 13일 ~ 1976년 7월 4일) : 이스라엘 군인.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의 형
[5]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1949년 10월 21일 ~ ) : 이스라엘의 제13대 총리(임기 : 1996년 6월 18일~1999년 7월 6일), 제17대 총리(2022년 12월 29일~)
1976년 6월 27일, [1]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과 독일 테러 조직인 [3]혁명세포 소속 테러리스트 4명이 에어 프랑스 139편(텔아비브 → 아테네 → 파리)항공기를 납치했다. 비행기는 아테네를 출발 직후에 납치되었으며, 우간다의 엔테베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우간다 군대의 지원을 받아 엔테베공항에서 [2]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인원 3명이 추가 합류했다. 엔테베에서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이 아닌 258명의 승객은 풀어주었고, 나머지 인질들은 공항 터미널에 감금했다.
테러리스트들은 이스라엘, 프랑스, 독일, 케냐 등 여러 나라에 수감된 팔레스타인 및 기타 테러 조직원 52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만약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7월 1일 인질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협상을 진행하는 척하며 비밀리에 군사 작전을 준비했다. 이스라엘군은 엔테베 공항의 구조와 테러리스트의 위치를 정밀 분석하고, 약 4,000km 떨어진 우간다까지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스라엘은 7월 3일 23시에 특수부대 정예군 100여명을 C-130 허큘리스 수송기 4대를 이용해 엔테베 공항에 착륙했다. 협상과정에서 7월 4일로 미뤄져 있어 전격적으로 작전이 시작됐다. 테러리스트 7명 전원 사살하고 우간다 군 45여명 사망, 소련제 전투기 11대가 파괴되었다.
작전은 불과 90분 만에 종료되었으며, 에어프랑스 승무원을 포함한 총 106명 중 4명을 제외하고 구출했다. 인질중 3명은 이스라엘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했고, 건강 상태가 좋지않은 74세의 인질인 도라블록(Dora Bloch)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당시 우간다 대통령 [2]이디 아민은 우간다의 피해를 트집잡아 살해되었다.
이스라엘군 사망자는 작전 지휘관 [4]요나탄 네타냐후 1명이었다.
엔테베 작전은 이스라엘 군사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성공적인 인질 구출 작전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 작전은 영화와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으며, 특히 "Raid on Entebbe"(1977), "7 Days in Entebbe"(2018) 등이 유명하다.
[1]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 PFLP) : 팔레스타인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정치조직이자 무장단체로, 1967년 에 설립되었다. 현재,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무장 활동과 정치적 활동을 지속하며, 하마스 및 기타 저항 조직과 협력
[2]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Idi Amin Dada Oumee, 1925년 ~ 2003년 8월 16일) : 우간다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1971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여 3대 대통령에 취임(재임, 1971년 1월 25일 ~ 1979년 4월 11일). 악명이 높은 독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3] 혁명세포(Revolutionäre Zellen, RZ) : 1973년에서 1995년까지 서독에서 활동한 테러 조직
[4] 요나탄 네타냐후(Yonatan Netanyahu, 1946년 3월 13일 ~ 1976년 7월 4일) : 이스라엘 군인.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의 형
[5]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1949년 10월 21일 ~ ) : 이스라엘의 제13대 총리(임기 : 1996년 6월 18일~1999년 7월 6일), 제17대 총리(2022년 12월 29일~)
판문점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맺었던 유엔·북한이 공동 경비지역(JSA)이라 명칭을 정하고 함께 관리한 장소이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 있는 25년이나 된 미루나무는 높이가 15m였기 때문에 서로의 감시에 있어 문제가 되었다. 유엔군은 북한측 초소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유엔사 경비병 4명이 미루나무를 베려고 했다. 북한측 경비병은 "나무를 자르지 말고 그대로 두고 가시오 아니면 응징하겠소" 이렇게 위협적으로 말했지만 유엔군은 말을 듣지 않고 가지치기를 계속 강행했고 북한군 책임자 박철은 "죽여"라고 소리치며 북한군들이 달려들어 도끼로 유엔 군인들을 내리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미군 2명 사망을 포함하여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미군 사병 4명 등 총 9명이 부상당했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판문점은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그동안 군사분계선 남쪽에 있었던 북한군 4개초소가 철거되었고, 북한군이 통로로 사용하던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지금까지 통행이 차단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유일하게 남북한이 공존하던 판문점에는 그 후 회의장 건물 구역에 너비 50cm, 높이 5cm의 시멘트포장 경계선이 만들어졌고, 그밖의 부분은 가로 세로 10cm, 높이 1m의 시멘트 기둥이 10m 간격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휴전선이 다시 그어지게 된 것이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 있는 25년이나 된 미루나무는 높이가 15m였기 때문에 서로의 감시에 있어 문제가 되었다. 유엔군은 북한측 초소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유엔사 경비병 4명이 미루나무를 베려고 했다. 북한측 경비병은 "나무를 자르지 말고 그대로 두고 가시오 아니면 응징하겠소" 이렇게 위협적으로 말했지만 유엔군은 말을 듣지 않고 가지치기를 계속 강행했고 북한군 책임자 박철은 "죽여"라고 소리치며 북한군들이 달려들어 도끼로 유엔 군인들을 내리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미군 2명 사망을 포함하여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미군 사병 4명 등 총 9명이 부상당했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판문점은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그동안 군사분계선 남쪽에 있었던 북한군 4개초소가 철거되었고, 북한군이 통로로 사용하던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지금까지 통행이 차단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유일하게 남북한이 공존하던 판문점에는 그 후 회의장 건물 구역에 너비 50cm, 높이 5cm의 시멘트포장 경계선이 만들어졌고, 그밖의 부분은 가로 세로 10cm, 높이 1m의 시멘트 기둥이 10m 간격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휴전선이 다시 그어지게 된 것이다.
1979년 입헌 군주제인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최고 권력을 가지는 이슬람 공화국으로 정부가 교체되었다. '이란 이슬람 혁명'이라고 불린다.
19세기부터 영국과 러시아의 영향하에 있었던 이란은 반서방 감정이 커졌고, 이러한 서방세력(미국과 영국 등)의 지원을 받는 팔라비 왕조에 반대하는 다양한 좌파와 이슬람단체등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팔라비 왕조에 대한 시위는 1977년 10월에 시작되어 1978년 1월에 더욱 격화되었다. 1978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파업과 시위가 전국이 마비되었으며 결국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2세는 퇴위한 후 망명길에 오른다.
이후 팔라비 왕조 정책에 반대하여 1963년 망명했던 이슬람 성직자 호메이니는 1979년 2월 1일에 귀국했고 2월 11일에 팔라비 왕조는 무너졌다. 호메이니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죽을 때까지 이란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년 92월 24일~1989년 6월 3일) : 팔라비 왕조 정책에 반대하여 망명했다가팔라비 왕조에 반대하여 망명했다가 이란혁명으로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임기 : 1979년 12월 3일~1989년 6월 3일
* 팔라비 왕조(Pahlavi dynasty) : 1925년부터 1979년까지 거의 54년 동안 통치한 이란의 마지막 왕조. 1979년 2월 11일 이란 혁명으로 막을 내렸다
19세기부터 영국과 러시아의 영향하에 있었던 이란은 반서방 감정이 커졌고, 이러한 서방세력(미국과 영국 등)의 지원을 받는 팔라비 왕조에 반대하는 다양한 좌파와 이슬람단체등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팔라비 왕조에 대한 시위는 1977년 10월에 시작되어 1978년 1월에 더욱 격화되었다. 1978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파업과 시위가 전국이 마비되었으며 결국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2세는 퇴위한 후 망명길에 오른다.
이후 팔라비 왕조 정책에 반대하여 1963년 망명했던 이슬람 성직자 호메이니는 1979년 2월 1일에 귀국했고 2월 11일에 팔라비 왕조는 무너졌다. 호메이니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죽을 때까지 이란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년 92월 24일~1989년 6월 3일) : 팔라비 왕조 정책에 반대하여 망명했다가팔라비 왕조에 반대하여 망명했다가 이란혁명으로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임기 : 1979년 12월 3일~1989년 6월 3일
* 팔라비 왕조(Pahlavi dynasty) : 1925년부터 1979년까지 거의 54년 동안 통치한 이란의 마지막 왕조. 1979년 2월 11일 이란 혁명으로 막을 내렸다
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점령하여 흡수 통일했고, 캄보디아의 [2]크메르 루주는 [4]론 놀의 [5]크메르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수도 [8]프놈펜에 입성하였고, 1976년 1월에 국명을 [1]민주 캄푸차로 개칭했다.
당시 중-소 갈등이 심화되어, 베트남은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중국과 우호적인 캄보디아의 [6]폴 포트 정권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폴 포트 정권은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정치로 베트남과 대립하였다. [1]민주 캄푸차로 명명한 [6]폴 포트는 1978년 베트남에 대한 다른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개시했다.
베트남은 [6]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맞서 베트남에서 조직된 [7]캄프차 민족해방전선과 연합하여 캄보디아에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 베트남이 프놈펜을 공략하자 [2]크메르 루주 체제는 붕괴되었다.
베트남군은 폴 포트 일파를 태국 국경 근처의 산악 지역까지 쫓아냈다.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1979년 1월 8일 캄보디아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렇지만 베트남군은 밀림 깊숙히 숨은 폴포트파의 게릴라 활동에 시달리며, 내전의 수렁에 빠졌다. 캄보디아는 [2]크메르 루주와 [3]시아누크 국왕파, [4]론 놀파의 세 계파는 연합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캄보디아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베트남군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1985년 1월에 대공세를 펼치며 반베트남 3파의 민주 캄보디아의 거점을 공략하였고, 3월에는 [3]시아누크 국왕파의 거점을 제압하자 민주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베트남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군의 장기간 주둔은 베트남을 적대하던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한 베트남은 캄보디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1986년 7월, 공산주의 베트남을 이끌던 [10]레주언 서기장이 사망했다. 뒤를 이어 [11]쯔엉찐이 서기장을 맡으면서 베타남 경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2월에 [12]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면서, 경제개방과 국제협력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한편, 1989년에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자치 능력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남은 주둔군마저 철수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26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베트남은 1989년 완전히 철군했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붕괴했다. 캄보디아는 [3]노로돔 시아누크와 [9]훈센을 주축으로 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었고 1993년 군주제로 복귀했다.
[1]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민주 캄보디아. 1975~1980년까지 크메르 루주가 배후에서 지배한 공산국가, 집권당은 캄푸치아 공산당(KCP)이었다. 킬링필드가 발생한 국가
[2]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68년에 결성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 군사조직.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3]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2012년)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4]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5]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캄보디아에 존재하던 공화국
[6]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캄프차 민족해방전선(Kampuchean United Front for National Salvation:KUFNS) : 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창립한 조직
[8] 프놈펜(Phnom Penh) : 캄보디아 수도
[9] 훈 센(Hun Sen, 1952년~) : 캄보디아의 제2대 총리(임기,1998년 11월 30일~2023년 8월 22일 ). 캄보디아인민당(CPP, Cambodian People's Party)
[10]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11] 쯔엉찐(Truong Chinh, 1907년 ~ 1988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6년 7월 14일~1986년 12월 18일)
[12] 도이모이 정책 : '도이'는 베트남어로 '변한다'는 뜻이고 '모이'는 베트남어로 '새롭다'는 뜻으로 쯔엉찐의 주도로 시작되 베트남의 개방개혁정책
당시 중-소 갈등이 심화되어, 베트남은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중국과 우호적인 캄보디아의 [6]폴 포트 정권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폴 포트 정권은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정치로 베트남과 대립하였다. [1]민주 캄푸차로 명명한 [6]폴 포트는 1978년 베트남에 대한 다른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개시했다.
베트남은 [6]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맞서 베트남에서 조직된 [7]캄프차 민족해방전선과 연합하여 캄보디아에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 베트남이 프놈펜을 공략하자 [2]크메르 루주 체제는 붕괴되었다.
베트남군은 폴 포트 일파를 태국 국경 근처의 산악 지역까지 쫓아냈다.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1979년 1월 8일 캄보디아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렇지만 베트남군은 밀림 깊숙히 숨은 폴포트파의 게릴라 활동에 시달리며, 내전의 수렁에 빠졌다. 캄보디아는 [2]크메르 루주와 [3]시아누크 국왕파, [4]론 놀파의 세 계파는 연합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캄보디아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베트남군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1985년 1월에 대공세를 펼치며 반베트남 3파의 민주 캄보디아의 거점을 공략하였고, 3월에는 [3]시아누크 국왕파의 거점을 제압하자 민주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베트남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군의 장기간 주둔은 베트남을 적대하던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한 베트남은 캄보디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1986년 7월, 공산주의 베트남을 이끌던 [10]레주언 서기장이 사망했다. 뒤를 이어 [11]쯔엉찐이 서기장을 맡으면서 베타남 경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2월에 [12]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면서, 경제개방과 국제협력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한편, 1989년에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자치 능력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남은 주둔군마저 철수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26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베트남은 1989년 완전히 철군했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붕괴했다. 캄보디아는 [3]노로돔 시아누크와 [9]훈센을 주축으로 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었고 1993년 군주제로 복귀했다.
[1]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민주 캄보디아. 1975~1980년까지 크메르 루주가 배후에서 지배한 공산국가, 집권당은 캄푸치아 공산당(KCP)이었다. 킬링필드가 발생한 국가
[2]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68년에 결성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 군사조직.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3]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2012년)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4]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5]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캄보디아에 존재하던 공화국
[6]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캄프차 민족해방전선(Kampuchean United Front for National Salvation:KUFNS) : 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창립한 조직
[8] 프놈펜(Phnom Penh) : 캄보디아 수도
[9] 훈 센(Hun Sen, 1952년~) : 캄보디아의 제2대 총리(임기,1998년 11월 30일~2023년 8월 22일 ). 캄보디아인민당(CPP, Cambodian People's Party)
[10]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11] 쯔엉찐(Truong Chinh, 1907년 ~ 1988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6년 7월 14일~1986년 12월 18일)
[12] 도이모이 정책 : '도이'는 베트남어로 '변한다'는 뜻이고 '모이'는 베트남어로 '새롭다'는 뜻으로 쯔엉찐의 주도로 시작되 베트남의 개방개혁정책
1977년 집권한 중국의 [5] 덩샤오핑은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개혁·개방정책을 준비한다. 이에 따라 안보를 위하여 소련을 견제해야 하는데 베트남이 소련과 가까워지자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캄보디아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1978년 베트남이 소련과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자 중국은 베트남을 향해 군사행동을 준비를 한다. 베트남에 우호적인 소련을 묶어두기 위해 덩샤오핑은 1978년 10월부터 미국, 일본, 아시아등을 순방하기 시작하여 우방을 만든다. 베트남에 우호적이지 않은 미국에게는 베트남 침공을 위한 명분을 만들고 베트남 국경지역에 대군을 전진 배치한다.
베트남은 1976년 7월 통일을 이루며 베트남 시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한다. 초대 서기장으로 [7]레주언이 취임하면서 급속한 계획주의(사회주의) 경제체제로 바꾸면서 내부 반발이 일어났다.
베트남에는 화교가 120만 거주하고 있었으며 화교들은 장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전환되면서 개인 재산을 몰수하고 국가에서 관리하게 되면서 대립하게 된다. 또한 베트남으로 전향하지 않은 화교들을 베트남에서 추방했다.
화교들에 큰 관심이 없었던 중국은 [5]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맞물려 화교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이로 인해 베트남과의 관계는 더욱 더 안 좋아졌다.
중국과 베트남 국경에서의 분쟁이 1974년 100여건 발생되었고 1년뒤에는 400권, 그 이듬해에는 900여건으로 잦은 분쟁도 전쟁의 원인중 하나였다.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의 [4]폴 포트 정권은 친중 노선을 취했고, 라오스도 중국의 편에 섰다.
1978년 12월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1978년 10월 베트남 침공을 결정한 [5]덩샤오핑은 12월까지 베트남 국경으로 부대이동을 한다.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으로 나누어 전체 31개사단 33만 명이 동원되었고, 베트남은 8개사단 15만명이 투입되었다.
동원인력으로 베트남이 열세였으나 베트남은 미군이 남긴 무기와 소련의 지원으로 무기체계는 베트남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중국은 [1]랑선, [2]라오까이, [3]까오방의 점령을 목표로 서부, 북부, 동북부 세 방면을 통해 베트남을 침공했다.
2월 25일에 [3]까오방, 2월 26일에는 [2]라오까이를, 3월 5일에는 베트남 동북부의 요충지인 [1]랑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베트남은 퇴각하지 않고 적 후방에 잔류하여 기습작전과 지연전, 회피전을 펼치면서 대항하고 있었다. 중국군은 사방에서 습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은 부사령관이 침공 8일반에 중병으로 베이징으로 후송되는등 지휘체계도 불안정하고 통신도 원할하지 않았다. 신형장비도 전무한 상태이며 베트남 북부지역의 엄청난 산악지대로 기동력도 부족했다.
중국은 랑선을 점령한 다음 날 3월 6일에 목표를 달성했다라는 선언과 함께 중국군 철수를 명령했다. 3월 16일에 베트남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중국은 국내외에 전쟁 승리를 선전했고, 베트남도 중국 인민해방군의 침략을 내쫓았다고 승리 선언을 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중국군의 사망자는 2만 6천명, 베트남군의 사망자는 3만여명이 발생했으며 부상자도 중국군은 3만 7천명, 베트남군은 3만 2천명이었다.
[1] 랑선(Lang Son, 諒山) : 베트남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130km 정도 떨어져 있다. 중국의 광시성과 국경을 접한다
[2] 라오까이(Lao Cai, 城舖老街) : 베트남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296km 정도 떨어져 있다. 윈난성과 국경을 접한다
[3] 까오방(Cao Bang, 城舖高平)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중국의 광시성과 국경을 접한다
[4]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5] 덩샤오핑(Deng Xiaoping, 鄧小平,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제5대 국가주석(임기,1978년 3월 8일~1983년 6월 22일)
[6]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친미정권
[7]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더군다나 1978년 베트남이 소련과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자 중국은 베트남을 향해 군사행동을 준비를 한다. 베트남에 우호적인 소련을 묶어두기 위해 덩샤오핑은 1978년 10월부터 미국, 일본, 아시아등을 순방하기 시작하여 우방을 만든다. 베트남에 우호적이지 않은 미국에게는 베트남 침공을 위한 명분을 만들고 베트남 국경지역에 대군을 전진 배치한다.
베트남은 1976년 7월 통일을 이루며 베트남 시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한다. 초대 서기장으로 [7]레주언이 취임하면서 급속한 계획주의(사회주의) 경제체제로 바꾸면서 내부 반발이 일어났다.
베트남에는 화교가 120만 거주하고 있었으며 화교들은 장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전환되면서 개인 재산을 몰수하고 국가에서 관리하게 되면서 대립하게 된다. 또한 베트남으로 전향하지 않은 화교들을 베트남에서 추방했다.
화교들에 큰 관심이 없었던 중국은 [5]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맞물려 화교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이로 인해 베트남과의 관계는 더욱 더 안 좋아졌다.
중국과 베트남 국경에서의 분쟁이 1974년 100여건 발생되었고 1년뒤에는 400권, 그 이듬해에는 900여건으로 잦은 분쟁도 전쟁의 원인중 하나였다.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의 [4]폴 포트 정권은 친중 노선을 취했고, 라오스도 중국의 편에 섰다.
1978년 12월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1978년 10월 베트남 침공을 결정한 [5]덩샤오핑은 12월까지 베트남 국경으로 부대이동을 한다.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으로 나누어 전체 31개사단 33만 명이 동원되었고, 베트남은 8개사단 15만명이 투입되었다.
동원인력으로 베트남이 열세였으나 베트남은 미군이 남긴 무기와 소련의 지원으로 무기체계는 베트남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중국은 [1]랑선, [2]라오까이, [3]까오방의 점령을 목표로 서부, 북부, 동북부 세 방면을 통해 베트남을 침공했다.
2월 25일에 [3]까오방, 2월 26일에는 [2]라오까이를, 3월 5일에는 베트남 동북부의 요충지인 [1]랑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베트남은 퇴각하지 않고 적 후방에 잔류하여 기습작전과 지연전, 회피전을 펼치면서 대항하고 있었다. 중국군은 사방에서 습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은 부사령관이 침공 8일반에 중병으로 베이징으로 후송되는등 지휘체계도 불안정하고 통신도 원할하지 않았다. 신형장비도 전무한 상태이며 베트남 북부지역의 엄청난 산악지대로 기동력도 부족했다.
중국은 랑선을 점령한 다음 날 3월 6일에 목표를 달성했다라는 선언과 함께 중국군 철수를 명령했다. 3월 16일에 베트남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중국은 국내외에 전쟁 승리를 선전했고, 베트남도 중국 인민해방군의 침략을 내쫓았다고 승리 선언을 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중국군의 사망자는 2만 6천명, 베트남군의 사망자는 3만여명이 발생했으며 부상자도 중국군은 3만 7천명, 베트남군은 3만 2천명이었다.
[1] 랑선(Lang Son, 諒山) : 베트남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130km 정도 떨어져 있다. 중국의 광시성과 국경을 접한다
[2] 라오까이(Lao Cai, 城舖老街) : 베트남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296km 정도 떨어져 있다. 윈난성과 국경을 접한다
[3] 까오방(Cao Bang, 城舖高平)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중국의 광시성과 국경을 접한다
[4]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5] 덩샤오핑(Deng Xiaoping, 鄧小平,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제5대 국가주석(임기,1978년 3월 8일~1983년 6월 22일)
[6]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친미정권
[7]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YH 사건은 가발수출업체인 YH 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의 일방적 폐업조치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8월 11일 새벽 2시 1,000여 명의 경찰이 '101작전'을 개시하고 신민당사에 난입하여 여성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추락사하였다. 경찰은 투신 자살로 조작했으나 조사 결과 경찰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추락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했으며 이는 부마민주항쟁, 10.26 사건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 YH무역 : 1966년 10여명의 사원으로 출발한 가발회사로 가발 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에 힘입어 창립 4년 만인 1970년대 초 종업원 이 4,000여명에 이르는 수출 순위 15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8월 11일 새벽 2시 1,000여 명의 경찰이 '101작전'을 개시하고 신민당사에 난입하여 여성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추락사하였다. 경찰은 투신 자살로 조작했으나 조사 결과 경찰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추락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했으며 이는 부마민주항쟁, 10.26 사건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 YH무역 : 1966년 10여명의 사원으로 출발한 가발회사로 가발 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에 힘입어 창립 4년 만인 1970년대 초 종업원 이 4,000여명에 이르는 수출 순위 15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광역시, 마산시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 항쟁. 박정희의 제4공화국 유신 독재 체제에 대항한 사건이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 날인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 사건은 유신 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부마민주항쟁(Bu-Ma Democratic Protests)으로도 불린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 날인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 사건은 유신 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부마민주항쟁(Bu-Ma Democratic Protests)으로도 불린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대사건으로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한 사건이다.
박정희 암살 사건, 박정희 시해 사건, 박정희 피격 사건, 궁정동 사건으로도 불린다.
* 박정희(1917년~1979년) : 대한민국 5,6,7,8,9대 대통령
* 김재규(1926년~1980년) : 제11대 건설부 장관,제8대 중앙정보부장
* 박선호(1934년~1980년) :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 박흥주(1939년~1980년) :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육군 포병대령. 당시 정앙정보부장 수행비서
* 차지철(1934년~1979년) :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
박정희 암살 사건, 박정희 시해 사건, 박정희 피격 사건, 궁정동 사건으로도 불린다.
* 박정희(1917년~1979년) : 대한민국 5,6,7,8,9대 대통령
* 김재규(1926년~1980년) : 제11대 건설부 장관,제8대 중앙정보부장
* 박선호(1934년~1980년) :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 박흥주(1939년~1980년) :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육군 포병대령. 당시 정앙정보부장 수행비서
* 차지철(1934년~1979년) :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뒤 최규하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전두환과 노태우등이 중심인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으로 전형적인 군사반란이다.
당시 대통령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할 수밖에 없었으며 13일 오전 9시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은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취임함으로써 당시의 군부가 반란의 주도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결국 신군부세력은 1980년 5·17쿠데타까지 주도해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 최규하(1919년~2006년) :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등이 중심인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으로 전형적인 군사반란이다.
당시 대통령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할 수밖에 없었으며 13일 오전 9시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은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취임함으로써 당시의 군부가 반란의 주도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결국 신군부세력은 1980년 5·17쿠데타까지 주도해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 최규하(1919년~2006년) :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
랭커스터 협정 영국 런던의 [1]랭커스터 하우스에서 열린 회담에서 체결된 협정으로, 당시 [2]로디지아로 알려진 현재의 짐바브웨가 독립 국가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협정은 로디지아 백인 소수 정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주적 독립 국가로 전환되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한 협정이었다.
[2]로디지아는 1890년대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영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1965년, 백인 소수 정권이 이끄는 [3]이언 스미스는 영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며 로디지아 공화국을 수립했으나 아프리카 다수 인구를 정치적으로 억압했으며, 인종차별적 법률을 통해 부와 권력을 독점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비반을 받았다.
[2]로디지아 내에서는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이끄는 저항 운동이 성장했다. [7]조슈아 은코모가 이끄는 [4]ZAPU와 [6]로버트 무가베가 이끄는 [5]ZANU가 무장 투쟁을 전개하며 백인 정권에 저항하며 광범위한 내전을 초래했다. 이 내전은 1970년대 동안 격화되었으며,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국제적으로는 영국과 주변국, 특히 잠비아와 모잠비크가 로디지아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이러한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제적 중재의 결과로 이루어졌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헌법 채택: 짐바브웨가 독립 국가로 전환하기 위한 새로운 헌법이 마련되었다. 이 헌법은 다수결에 기반한 민주적 정부를 보장하면서도 백인 소수의 권익을 일정 기간 동안 보호하는 조항을 포함했다.
- 선거 실시: 독립 전환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약속했으며, 영국이 이를 관리하도록 했다. 선거는 1980년 2월에 시행되었고, 로버트 무가베가 이끄는 ZANU-PF가 대승을 거두어 정부를 구성했다.
- 무장 해제: [4]ZAPU와 [5]ZANU 등 아프리카 민족주의 무장단체는 해체되고, 전쟁 당사자들이 평화적 해결책에 동의하도록 했다. 백인 정권의 군대도 해체되거나 통합되었다.
- 독립 승인: 영국은 로디지아를 다시 직접 통치하게 되었으며, 독립 과정이 완료된 뒤 로디지아는 짐바브웨라는 이름으로 독립 국가로 승인되었다.
1980년 4월 18일, 짐바브웨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이후 새로운 국가는 아프리카 다수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반영하기 위해 과거의 식민지적 이름을 버리고 짐바브웨로 이름을 변경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짐바브웨 독립은 남아프리카 지역의 탈식민화 과정을 촉진했다. 이후 선거에서 [6]로버트 무가베가 짐바브웨의 첫 총리로 선출되었으며, 이는 짐바브웨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협정이 백인 소수의 경제적 특권을 단기적으로 보장했기 때문에, 독립 후에도 토지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은 지속적인 갈등 요소로 남았다. 이는 이후 짐바브웨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의 종식을 위한 평화적 해결의 사례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며, 짐바브웨뿐만 아니라 전 세계 탈식민화 과정에서 의미 있는 협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1] 랭커스터 하우스 : 영국 런던에 위치한 역사적인 건물로, 회담을 통해 로디지아 내전의 종식과 새로운 헌법, 독립 절차를 확정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2]로디지아(Rhodesia) : 1965년 영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여 1979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이며 현재의 짐바브웨이다. 1979년에서 1980년까지 짐바브웨 로디지아로 변경되었다. 1980년 4월에 짐바브웨라는 이름의 독립국가가 되었다
[3] 이언 스미스(Ian Douglas Smith, 1919년~2007년) : 짐바브웨의 백인 정치인. 로디지아 백인 정권을 대표하여 총리(임기, 1964년 4월 13일 – 1979년 6월 1일)로 있다가 내외의 압력으로 흑인세력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4] ZAPU(Zimbabwe African People's Union) :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맹
[5] ZANU(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6] 로버트 무가베(Robert Gabriel Mugabe, 1924년~2019년) : 짐바브웨의 제1대 총리(임기, 1980년 4월 18일~1987년 12월 31일), 짐바브웨의 제2대 대통령(임기, 1987년 12월 31일~2017년 11월 21일). 초기 백인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무장 독립운동을 주도해 짐바브웨를 백인들로부터 해방시킨 독립운동가였지만,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에는 잔혹한 학살과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 파탄과 최빈국으로 전락했으며, 부정부패와 사치 등으로 국가를 파탄내어 국제적인 지탄을 받는 독재자로 전락했다
[7] 조슈아 음카부코 은욘골로 은코모(Joshua Mqabuko Nyongolo Nkomo, 1917년~1999년) : 짐바브웨의 혁명가이자정치인으로, 1990년부터 1999년 사망 직전까지 짐바브웨의 부통령이었다. ZAPU를 1961년 창당하여 이끌어왔으나 1987년 로버트 무가베의 ZANU와 합당하여 현재의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애국 전선 (ZANU-PF, 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Patriotic Front)을 구성하였다
[2]로디지아는 1890년대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영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1965년, 백인 소수 정권이 이끄는 [3]이언 스미스는 영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며 로디지아 공화국을 수립했으나 아프리카 다수 인구를 정치적으로 억압했으며, 인종차별적 법률을 통해 부와 권력을 독점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비반을 받았다.
[2]로디지아 내에서는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이끄는 저항 운동이 성장했다. [7]조슈아 은코모가 이끄는 [4]ZAPU와 [6]로버트 무가베가 이끄는 [5]ZANU가 무장 투쟁을 전개하며 백인 정권에 저항하며 광범위한 내전을 초래했다. 이 내전은 1970년대 동안 격화되었으며,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국제적으로는 영국과 주변국, 특히 잠비아와 모잠비크가 로디지아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이러한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제적 중재의 결과로 이루어졌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헌법 채택: 짐바브웨가 독립 국가로 전환하기 위한 새로운 헌법이 마련되었다. 이 헌법은 다수결에 기반한 민주적 정부를 보장하면서도 백인 소수의 권익을 일정 기간 동안 보호하는 조항을 포함했다.
- 선거 실시: 독립 전환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약속했으며, 영국이 이를 관리하도록 했다. 선거는 1980년 2월에 시행되었고, 로버트 무가베가 이끄는 ZANU-PF가 대승을 거두어 정부를 구성했다.
- 무장 해제: [4]ZAPU와 [5]ZANU 등 아프리카 민족주의 무장단체는 해체되고, 전쟁 당사자들이 평화적 해결책에 동의하도록 했다. 백인 정권의 군대도 해체되거나 통합되었다.
- 독립 승인: 영국은 로디지아를 다시 직접 통치하게 되었으며, 독립 과정이 완료된 뒤 로디지아는 짐바브웨라는 이름으로 독립 국가로 승인되었다.
1980년 4월 18일, 짐바브웨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이후 새로운 국가는 아프리카 다수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반영하기 위해 과거의 식민지적 이름을 버리고 짐바브웨로 이름을 변경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짐바브웨 독립은 남아프리카 지역의 탈식민화 과정을 촉진했다. 이후 선거에서 [6]로버트 무가베가 짐바브웨의 첫 총리로 선출되었으며, 이는 짐바브웨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협정이 백인 소수의 경제적 특권을 단기적으로 보장했기 때문에, 독립 후에도 토지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은 지속적인 갈등 요소로 남았다. 이는 이후 짐바브웨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의 종식을 위한 평화적 해결의 사례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며, 짐바브웨뿐만 아니라 전 세계 탈식민화 과정에서 의미 있는 협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1] 랭커스터 하우스 : 영국 런던에 위치한 역사적인 건물로, 회담을 통해 로디지아 내전의 종식과 새로운 헌법, 독립 절차를 확정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2]로디지아(Rhodesia) : 1965년 영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여 1979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이며 현재의 짐바브웨이다. 1979년에서 1980년까지 짐바브웨 로디지아로 변경되었다. 1980년 4월에 짐바브웨라는 이름의 독립국가가 되었다
[3] 이언 스미스(Ian Douglas Smith, 1919년~2007년) : 짐바브웨의 백인 정치인. 로디지아 백인 정권을 대표하여 총리(임기, 1964년 4월 13일 – 1979년 6월 1일)로 있다가 내외의 압력으로 흑인세력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4] ZAPU(Zimbabwe African People's Union) :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맹
[5] ZANU(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6] 로버트 무가베(Robert Gabriel Mugabe, 1924년~2019년) : 짐바브웨의 제1대 총리(임기, 1980년 4월 18일~1987년 12월 31일), 짐바브웨의 제2대 대통령(임기, 1987년 12월 31일~2017년 11월 21일). 초기 백인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무장 독립운동을 주도해 짐바브웨를 백인들로부터 해방시킨 독립운동가였지만,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에는 잔혹한 학살과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 파탄과 최빈국으로 전락했으며, 부정부패와 사치 등으로 국가를 파탄내어 국제적인 지탄을 받는 독재자로 전락했다
[7] 조슈아 음카부코 은욘골로 은코모(Joshua Mqabuko Nyongolo Nkomo, 1917년~1999년) : 짐바브웨의 혁명가이자정치인으로, 1990년부터 1999년 사망 직전까지 짐바브웨의 부통령이었다. ZAPU를 1961년 창당하여 이끌어왔으나 1987년 로버트 무가베의 ZANU와 합당하여 현재의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애국 전선 (ZANU-PF, 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Patriotic Front)을 구성하였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79년 12월부터 1989년 2월까지 10년간 지속된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1]무자헤딘(Mujahideen)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1978년 [2]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세우고 여러 급진적인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다. 이에 저항하는 무슬림들이 반발하면서 [1]무자헤딘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3]하피줄라 아민은 1979년 4월에 [2]모하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집권하게 된다.
1979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넘어 수도인 카불에 도착한 소련은 [3]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고 [4]바브락 카르말을 후임으로 세우고 새로운 공산정권을 수립했다(폭풍333호 작전).
이 사건의 여파로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의 반란이 더욱 거세지자 [4]바브락 카르말 정권은 소련에게 진압을 요청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과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쉽게 진압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면서 소련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영토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소련이 부담해야 할 군사적 외교적 비용은 너무나 컸다.
1987년 소련의 서기장으로 집권한 [5]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발표하였다. 소련군은 1988년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전원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가면서 종료되었다.
[1] 무자헤딘(Mujahideen) :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 및 이슬람 세력. 성전(Jihad, 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를 의미한다
[2]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 1917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1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3]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1929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2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4]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 1929년~1996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3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5]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78년 [2]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세우고 여러 급진적인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다. 이에 저항하는 무슬림들이 반발하면서 [1]무자헤딘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3]하피줄라 아민은 1979년 4월에 [2]모하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집권하게 된다.
1979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넘어 수도인 카불에 도착한 소련은 [3]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고 [4]바브락 카르말을 후임으로 세우고 새로운 공산정권을 수립했다(폭풍333호 작전).
이 사건의 여파로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의 반란이 더욱 거세지자 [4]바브락 카르말 정권은 소련에게 진압을 요청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과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쉽게 진압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면서 소련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영토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소련이 부담해야 할 군사적 외교적 비용은 너무나 컸다.
1987년 소련의 서기장으로 집권한 [5]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발표하였다. 소련군은 1988년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전원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가면서 종료되었다.
[1] 무자헤딘(Mujahideen) :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 및 이슬람 세력. 성전(Jihad, 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를 의미한다
[2]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 1917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1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3]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1929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2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4]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 1929년~1996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3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5]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5·17 쿠데타는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육군 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이후 신군부)가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권유린, 헌정파괴 행위를 자행하여 정권을 잡은 사건으로 '5.17내란'이라고도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피살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는 10월 27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임기는 박정희의 잔여임기인 1984년 12월 6일까지였다.
그러나 6일 뒤인 12월 12일 신군부에 의해 12.12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국정의 실권이 대통령과 정부가 아닌 신군부에게 넘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정치권에서는 계엄을 해제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유신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로 나아가는 길을 열고자 했고 학생과 시민들은 군부퇴진과 민주화를 거세게 요구했다.
5월 17일 신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발표했다. 이는 곧 신군부에게 모든 전권이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18일 부터 정치활동이 전면 중단되고 영장없이 학생,정치인,재야인사등을 구금하기 시작했다.
5월 18일부터 시작된 광주의 저항까지 유혈진압으로 마무리한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8월 16일 최규하대통령이 사임하자 9월에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국보위는 10월 27일 정치규제법을 통과시켜 국회와 모든 제도권 정당을 강제해산하고 새로 만들어진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전두환이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쿠데타는 반란세력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 통일주체국민회의 :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헌법에 따라 구성된 간접민주주의 기관이다
* 국보위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5.17 쿠데타세력이 내각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행정 기구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피살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는 10월 27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임기는 박정희의 잔여임기인 1984년 12월 6일까지였다.
그러나 6일 뒤인 12월 12일 신군부에 의해 12.12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국정의 실권이 대통령과 정부가 아닌 신군부에게 넘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정치권에서는 계엄을 해제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유신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로 나아가는 길을 열고자 했고 학생과 시민들은 군부퇴진과 민주화를 거세게 요구했다.
5월 17일 신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발표했다. 이는 곧 신군부에게 모든 전권이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18일 부터 정치활동이 전면 중단되고 영장없이 학생,정치인,재야인사등을 구금하기 시작했다.
5월 18일부터 시작된 광주의 저항까지 유혈진압으로 마무리한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8월 16일 최규하대통령이 사임하자 9월에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국보위는 10월 27일 정치규제법을 통과시켜 국회와 모든 제도권 정당을 강제해산하고 새로 만들어진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전두환이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쿠데타는 반란세력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 통일주체국민회의 :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헌법에 따라 구성된 간접민주주의 기관이다
* 국보위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5.17 쿠데타세력이 내각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행정 기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혹은 광주민중항쟁은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며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
이란은 1979년 팔레비왕조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슬람 공화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반미감정이 강한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1989, 시아파)가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소위 '호메이니 혁명', '이란 이슬람 혁명'이라 불리며 자국내는 물론 주변국가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다.
친미성향의 팔레비왕조와 대조적인 루홀라 호메이니는 반미 정책으로 미국과 관계는 끊어졌고, 이러한 이란의 영향은 주변 중동국가내의 종파의 갈등으로 시아파의 폭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라크는 1979년 새 대통령으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 수니파)이 당선되었다. 후세인은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들에게 파급되는 것을 염려하여 이란 혁명의 혼란기를 틈타 이란과 이라크의 접경 지역인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수로를 둘러싼 영유권문제(양국 간 분쟁의 근원)를 계기로 이란을 선제공격하여 8년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국 및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양국은 1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비공식)가 발생했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측 모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긴채 종식되었다.
이라크는 이 전쟁을 '카디시야 전쟁(Qadisiya War)', 이란은 '강요된 전쟁(Imposed War)'이라고도 부른다.
친미성향의 팔레비왕조와 대조적인 루홀라 호메이니는 반미 정책으로 미국과 관계는 끊어졌고, 이러한 이란의 영향은 주변 중동국가내의 종파의 갈등으로 시아파의 폭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라크는 1979년 새 대통령으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 수니파)이 당선되었다. 후세인은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들에게 파급되는 것을 염려하여 이란 혁명의 혼란기를 틈타 이란과 이라크의 접경 지역인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수로를 둘러싼 영유권문제(양국 간 분쟁의 근원)를 계기로 이란을 선제공격하여 8년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국 및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양국은 1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비공식)가 발생했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측 모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긴채 종식되었다.
이라크는 이 전쟁을 '카디시야 전쟁(Qadisiya War)', 이란은 '강요된 전쟁(Imposed War)'이라고도 부른다.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부가 민족문화의 주체성을 고취하고 대학생들의 국학에 대한 관심 고취라는 명분 아래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주최한 문화축제이다
당시 청와대 정무제1비서관이었던 허문도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를 앞두고 군사정권에 대한 학원가의 저항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대학생들의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는 대규모 축제를 기획했다.
전국 194개 대학의 6,000여명의 학생들과 전통 민속인 및 연예인 등이 참여해 총 659회의 공연을 벌였고 주최측 통산 1,0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원이 행사에 참여했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한국방송공사(KBS)가 주관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허문도(1940년~2016년) : 조선일보 출신의 정치인. 12·12 군사 반란의 주역들과 함께 하며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언론인 강제해직, 보도지침, 언론통폐합 등을 주도하였다
당시 청와대 정무제1비서관이었던 허문도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를 앞두고 군사정권에 대한 학원가의 저항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대학생들의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는 대규모 축제를 기획했다.
전국 194개 대학의 6,000여명의 학생들과 전통 민속인 및 연예인 등이 참여해 총 659회의 공연을 벌였고 주최측 통산 1,0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원이 행사에 참여했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한국방송공사(KBS)가 주관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허문도(1940년~2016년) : 조선일보 출신의 정치인. 12·12 군사 반란의 주역들과 함께 하며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언론인 강제해직, 보도지침, 언론통폐합 등을 주도하였다
포클랜드 전쟁(Falklands War)은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자국과 가까운 영국령 포클랜드(말비나스)제도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하며 침공한 전쟁이다.
포클랜드(말비나스)제도는 영국 본토에서 약 13,000km, 남미대륙 남단 혹은 아르헨티나 남대서양 마젤란 해협에서 480km떨어져 있고 200여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면적은 12,000평방미터 이다.
이 전쟁은 2개월 만에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료되었으며,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군사독재정권은 실각하게 된다.
이에 반해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도발에 대하여 즉각 무력 대응을 결정하고 군대를 파견하는 결단을 내린 '철의여인' 마거릿 대처수상은 1983년에 다시 집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 전쟁을 두고 말비나스(Malvinas) 전쟁이라고 부른다.
* 레오폴도 갈티에리(Leopoldo Fortunato Galtieri Castelli, 1926년~ 2003년) : 아르헨티나의 군인 출신 정치인
* 마거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1925년~2013년) : 1979~1990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지낸 정치가
포클랜드(말비나스)제도는 영국 본토에서 약 13,000km, 남미대륙 남단 혹은 아르헨티나 남대서양 마젤란 해협에서 480km떨어져 있고 200여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면적은 12,000평방미터 이다.
이 전쟁은 2개월 만에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료되었으며,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군사독재정권은 실각하게 된다.
이에 반해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도발에 대하여 즉각 무력 대응을 결정하고 군대를 파견하는 결단을 내린 '철의여인' 마거릿 대처수상은 1983년에 다시 집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 전쟁을 두고 말비나스(Malvinas) 전쟁이라고 부른다.
* 레오폴도 갈티에리(Leopoldo Fortunato Galtieri Castelli, 1926년~ 2003년) : 아르헨티나의 군인 출신 정치인
* 마거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1925년~2013년) : 1979~1990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지낸 정치가
1983년 9월 1일 오전 12시 05분(미국 뉴욕시간) 뉴욕 JFK국제공항을 출발하여 급유를 위하여 앵커리지를 경유해서 김포국제공항으로 오던 대한항공(KAL) 007 여객기가 당시 소련의 영공인 [1]사할린에서 소련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인근바다에 추락하여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
KAL 007 여객기는 오전 2시 5분(사할린 시간)경 규정된 항로보다 위쪽의 [3]캄차카반도 북동쪽으로 진입하여 3시 30분에 소련 영공으로 진입하였다가 4시 28분 공해상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다시 [1]사할린 상공으로 진입하자 5시 25분경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 두발을 발사하였다. 공격을 받은 KAL 007기는 일정시간 나선형을 그리며 급강하하면서 [2]모네론섬 인근바다에 추락하였다.
여객기의 연료절감 및 경제적인 비행때문에 고도를 올리는데, 이 당시 조종사는 주변이 너무 어두워 소련 영공상으로 침범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소련은 사건발생 일주일이 지나서야 격추사실을 밝혔으며 수거한 유해와 잔해들을 은폐하였다. 특히 블랙박스를 수거한 사실조차 숨겼다가 소련붕괴이후 10년이 지난 1992년에 관련자료를 공개하였다. 이 자료를 토대로 [5]국제민간항공기구의 정식 보고서에서 KAL 007기는 조종사의 항법 실수로 소련 영공에 진입했고, 이를 미국 정찰기로 혼동한 소련 전투기의 실수가 겹쳐 발생한 사건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군용기라도 위협적이지 않다면 무기개입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하고있다고 한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민간항공기의 격추는 정찰기로 의심한 소련이 매우 민감하게 대응한 매우 이례적인 상황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또한 당시는 미국 정찰기인 [4]RC-135기가 수도 없이 출몰하던 때였고, 냉전시대 소련의 분위기도 날카로웠던 시기였다. 또한 RC-135는 보잉747와 비슷하여 식별이 불가능한 캄캄한 영공상에서 충분히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KAL 007기 격추사건은 당시 미소냉전의 시대적, 국제적인 배경으로 강대국의 냉전이 제3세계인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영향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사건으로 남은 사람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GPS정보가 민간에 개방되었으며 사건 전까지만 해도 항공기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6]관성항법시스템을 사용해 위치를 가늠했다고 한다. 이후 GPS를 사용하면서 위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1] 사할린(Sakhalin) : 북태평양에 있는 러시아의 섬으로 타타르 해협과 오호츠크 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섬
[2] 모네론섬(Moneron Island) : 러시아의 사할린 섬에서 떨어진 작은 섬
[3] 캄차카 반도(Kamchatka Peninsula) : 동쪽의 태평양과 서쪽의 오호츠크해 사이에 있는 러시아 극동지역의 반도
[4] 보잉 RC-135(Boeing RC-135) : 미국 공군의 대형 정찰기. 1961년부터 32대가 생산되어 현재도 사용중이다
[5] 국제민간항공기구(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ICAO) : 유엔 산하 전문기구로, 국제 항공 운송에 필요한 원칙과 기술 및 안전에 대해 모든 회원국이 준수해야 할 표준과 권고를 제정한다
[6] 관성항법시스템(INS : Inertial Navigation System) : 운반체의 운동을 감지하는 관성센서(자이로 및 가속도계)출력으로부터 운반체의 속도, 위치 및 자세 등의 항법정보를 계산해 내는 장치
KAL 007 여객기는 오전 2시 5분(사할린 시간)경 규정된 항로보다 위쪽의 [3]캄차카반도 북동쪽으로 진입하여 3시 30분에 소련 영공으로 진입하였다가 4시 28분 공해상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다시 [1]사할린 상공으로 진입하자 5시 25분경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 두발을 발사하였다. 공격을 받은 KAL 007기는 일정시간 나선형을 그리며 급강하하면서 [2]모네론섬 인근바다에 추락하였다.
여객기의 연료절감 및 경제적인 비행때문에 고도를 올리는데, 이 당시 조종사는 주변이 너무 어두워 소련 영공상으로 침범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소련은 사건발생 일주일이 지나서야 격추사실을 밝혔으며 수거한 유해와 잔해들을 은폐하였다. 특히 블랙박스를 수거한 사실조차 숨겼다가 소련붕괴이후 10년이 지난 1992년에 관련자료를 공개하였다. 이 자료를 토대로 [5]국제민간항공기구의 정식 보고서에서 KAL 007기는 조종사의 항법 실수로 소련 영공에 진입했고, 이를 미국 정찰기로 혼동한 소련 전투기의 실수가 겹쳐 발생한 사건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군용기라도 위협적이지 않다면 무기개입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하고있다고 한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민간항공기의 격추는 정찰기로 의심한 소련이 매우 민감하게 대응한 매우 이례적인 상황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또한 당시는 미국 정찰기인 [4]RC-135기가 수도 없이 출몰하던 때였고, 냉전시대 소련의 분위기도 날카로웠던 시기였다. 또한 RC-135는 보잉747와 비슷하여 식별이 불가능한 캄캄한 영공상에서 충분히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KAL 007기 격추사건은 당시 미소냉전의 시대적, 국제적인 배경으로 강대국의 냉전이 제3세계인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영향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사건으로 남은 사람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GPS정보가 민간에 개방되었으며 사건 전까지만 해도 항공기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6]관성항법시스템을 사용해 위치를 가늠했다고 한다. 이후 GPS를 사용하면서 위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1] 사할린(Sakhalin) : 북태평양에 있는 러시아의 섬으로 타타르 해협과 오호츠크 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섬
[2] 모네론섬(Moneron Island) : 러시아의 사할린 섬에서 떨어진 작은 섬
[3] 캄차카 반도(Kamchatka Peninsula) : 동쪽의 태평양과 서쪽의 오호츠크해 사이에 있는 러시아 극동지역의 반도
[4] 보잉 RC-135(Boeing RC-135) : 미국 공군의 대형 정찰기. 1961년부터 32대가 생산되어 현재도 사용중이다
[5] 국제민간항공기구(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ICAO) : 유엔 산하 전문기구로, 국제 항공 운송에 필요한 원칙과 기술 및 안전에 대해 모든 회원국이 준수해야 할 표준과 권고를 제정한다
[6] 관성항법시스템(INS : Inertial Navigation System) : 운반체의 운동을 감지하는 관성센서(자이로 및 가속도계)출력으로부터 운반체의 속도, 위치 및 자세 등의 항법정보를 계산해 내는 장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은 1983년 10월 9일에 버마(현 미얀마)의 수도 랭군(현 양곤)에 위치한 아웅 산 묘소에서 대한민국의 외교사절 다수가 폭탄테러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당시 버마를 친선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은 아웅산 묘역을 참배하기로 하였고, 이 행사를 위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정부요인, 취재기자 등 17명이 폭탄테러로 사망하고, 합참의장 이기백 등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사건직후 공식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 순방일정이었으며 첫 방문국가가 버마였다고 한다.
* 아웅산(Aung San, 1915년~1947년) : 미얀마(버마)의 독립운동 혁명가, 정치인, 군인이며 국부로 칭송받고 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1991년 수상)한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의 아버지이다.
* 양곤(Yangon) : 미얀마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옛 수도. 원래의 이름은 랭군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랭군의 명칭도 양곤으로 바꾸었다.
* 미얀마(Myanmar)는 1989년 이전에는 버마(Burma)라는 국명이 사용되었다. 미얀마의 군부 정권은 '버마'라는 호칭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잔재인데다가 버마족 외에 다른 소수 민족(135개)을 아우르는 명칭인 미얀마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당시 버마를 친선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은 아웅산 묘역을 참배하기로 하였고, 이 행사를 위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정부요인, 취재기자 등 17명이 폭탄테러로 사망하고, 합참의장 이기백 등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사건직후 공식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 순방일정이었으며 첫 방문국가가 버마였다고 한다.
* 아웅산(Aung San, 1915년~1947년) : 미얀마(버마)의 독립운동 혁명가, 정치인, 군인이며 국부로 칭송받고 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1991년 수상)한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의 아버지이다.
* 양곤(Yangon) : 미얀마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옛 수도. 원래의 이름은 랭군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랭군의 명칭도 양곤으로 바꾸었다.
* 미얀마(Myanmar)는 1989년 이전에는 버마(Burma)라는 국명이 사용되었다. 미얀마의 군부 정권은 '버마'라는 호칭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잔재인데다가 버마족 외에 다른 소수 민족(135개)을 아우르는 명칭인 미얀마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힌두교와 무슬림교는 각각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어 1947년에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였다. 이 와중에 [1]시크교는 힌두교 중심의 인도에 편입되었다.
이렇게 편입된 시크교도들은 힌두교도 중심의 인도 공화국에 편입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1980년에 들어서면서 집권당인 인도 국민회의당은 경제계획 실패, 언론탄압등으로 독점적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디. 이 시점에 일부 시크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가인 [3]칼리스탄 건설을 요구하면서 [2]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당 정부를 테러 등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압박했다.
이에 국민회의당 정부는 시크교도의 성지이자 테러의 본거지인 [4]펀자브주의 [5]암리차르의 황금사원에서 시위를 하는 시크교도들을 무력으로 유혈 진압했다. 이후 [2]인디라 간디는 1984년 10월 31일 자신의 경호원인 두 명의 시크교도들에게 암살당했다. 시크교에서는 이 날을 순교자의 날로 기리며 이 2명을 성자로 찬양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여파로 인도 수도 델리 전역에서 사흘간 국민회의당 소속 정치인이 조직적으로 사주한 군중에 의해 시크교도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4,000여 명이 피살되었고, 6만여 명이 집과 재산을 잃었으며 델리의 13개 시크 사원이 불에 타 버렸다.
시크교도들은 대부분이 인도-파키스탄 분단이후 델리로 이주해 온 후 자수성가한 사업가들로서 델리가 도시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집단이었다. 이후 많은 시크들이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독립국 칼리스탄 건국을 지원하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참조]
- 세계의 도시와 건축 - 델리, 역사성과 신민성이 만나는 곳, 류연택, 이광수외 12,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 시크교(Sikhism) : 15세기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영향으로 창시된 종교. 시크교도들은 역사적으로 힌두교도들에게는 차별을, 무슬림들에게는 박해를 받아왔다
[2] 인디라 간디(Indira Priyadarśinī Gāndhī, 1917년~1984년) : 인도의 제3대총리로 두 차례에 걸쳐 역임(1966년 1월 19일~1977년 3월 24일, 1980년 1월 14일~1984년 10월 31일). 인도의 첫 여성 총리. 인도 독립후 초대 종리를 지낸 자와할란 네루의 딸
[3] 칼리스탄(Khalistan) : 시크교도들이 자신들이 건설할 독립국가를 부르는 명칭. 현재에도 급진파들 사이에서 분리 독립 주장이 나오고 있다
[4] 펀자브(Punjab) : 인도 북서부에 위치한 주로 파키스탄 국경과 접해있다
[5] 암리차르(Amritsar) : 인도 펀자브주의 도시로 시크교의 성지 황금사원이 유명하다
이렇게 편입된 시크교도들은 힌두교도 중심의 인도 공화국에 편입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1980년에 들어서면서 집권당인 인도 국민회의당은 경제계획 실패, 언론탄압등으로 독점적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디. 이 시점에 일부 시크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가인 [3]칼리스탄 건설을 요구하면서 [2]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당 정부를 테러 등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압박했다.
이에 국민회의당 정부는 시크교도의 성지이자 테러의 본거지인 [4]펀자브주의 [5]암리차르의 황금사원에서 시위를 하는 시크교도들을 무력으로 유혈 진압했다. 이후 [2]인디라 간디는 1984년 10월 31일 자신의 경호원인 두 명의 시크교도들에게 암살당했다. 시크교에서는 이 날을 순교자의 날로 기리며 이 2명을 성자로 찬양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여파로 인도 수도 델리 전역에서 사흘간 국민회의당 소속 정치인이 조직적으로 사주한 군중에 의해 시크교도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4,000여 명이 피살되었고, 6만여 명이 집과 재산을 잃었으며 델리의 13개 시크 사원이 불에 타 버렸다.
시크교도들은 대부분이 인도-파키스탄 분단이후 델리로 이주해 온 후 자수성가한 사업가들로서 델리가 도시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집단이었다. 이후 많은 시크들이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독립국 칼리스탄 건국을 지원하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참조]
- 세계의 도시와 건축 - 델리, 역사성과 신민성이 만나는 곳, 류연택, 이광수외 12,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 시크교(Sikhism) : 15세기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영향으로 창시된 종교. 시크교도들은 역사적으로 힌두교도들에게는 차별을, 무슬림들에게는 박해를 받아왔다
[2] 인디라 간디(Indira Priyadarśinī Gāndhī, 1917년~1984년) : 인도의 제3대총리로 두 차례에 걸쳐 역임(1966년 1월 19일~1977년 3월 24일, 1980년 1월 14일~1984년 10월 31일). 인도의 첫 여성 총리. 인도 독립후 초대 종리를 지낸 자와할란 네루의 딸
[3] 칼리스탄(Khalistan) : 시크교도들이 자신들이 건설할 독립국가를 부르는 명칭. 현재에도 급진파들 사이에서 분리 독립 주장이 나오고 있다
[4] 펀자브(Punjab) : 인도 북서부에 위치한 주로 파키스탄 국경과 접해있다
[5] 암리차르(Amritsar) : 인도 펀자브주의 도시로 시크교의 성지 황금사원이 유명하다
솅겐 협정은 유럽 국가들 간의 국경 통과 절차를 간소화하고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기 위하여 체결된 협정이다. 1985년 6월 14일 룩셈부르크의 솅겐 마을에서 독일,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5개국이 처음으로 체결하였다. 이후 1990년의 추가 협정인 "솅겐 시행 협정"을 통해 구체적인 실행 규범이 마련되었다.
이 협정의 핵심 내용은 참여국 간의 국경 검문소를 철폐하여 출입국시 사람과 차량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솅겐 협정에 참여한 국가는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신 외부 국경에 대한 공동의 기준과 절차를 강화함으로써 보안과 자유로운 이동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또한 [1]솅겐 정보 시스템을 도입하여 각국이 치안 및 이민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함으로써 협정의 실효성을 확보하였다.
[2]솅겐 지역에 속한 국가는 현재 대부분의 유럽연합 회원국을 포함하고 있으나 비회원국 중에서도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등이 참여하고 있으며 반면 아일랜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일부 국가는 전면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거나 제한적으로만 참여하고 있다.
솅겐 협정은 유럽 시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유럽의 경제·사회적 통합을 촉진한 제도적 기반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1995년 3월 26일: 벨기에, 프랑스, 독일,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1997년 10월 26일: 이탈리아
1997년 12월 1일: 오스트리아
2000년 3월 26일: 그리스
2001년 3월 25일: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2007년 12월 21일: 체코, 에스토니아, 헝가리,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몰타, 폴란드,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2008년 12월 12일: 스위스
2011년 12월 19일: 리히텐슈타인
2023년 1월 1일: 크로아티아
2024년 3월 31일: 불가리아, 루마니아
[1] 솅겐 정보 시스템(영어: Schengen Information System, SIS) : 셰겐 지역 국가 간에 범죄자, 실종자, 도난 차량, 여권 등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공동 데이터베이스이다. 이를 통해 국경 통제, 경찰 협력, 이민 심사 등에서 신속하고 효율적인 대응이 가능하다. SIS는 셰겐 협정의 핵심 도구로서 자유로운 이동과 공공 안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2] 솅겐 지역(Schengen Area) : 솅겐조약이 적용되는 유럽의 29개 국가의 영역을 의미한다.
이 협정의 핵심 내용은 참여국 간의 국경 검문소를 철폐하여 출입국시 사람과 차량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솅겐 협정에 참여한 국가는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신 외부 국경에 대한 공동의 기준과 절차를 강화함으로써 보안과 자유로운 이동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또한 [1]솅겐 정보 시스템을 도입하여 각국이 치안 및 이민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함으로써 협정의 실효성을 확보하였다.
[2]솅겐 지역에 속한 국가는 현재 대부분의 유럽연합 회원국을 포함하고 있으나 비회원국 중에서도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등이 참여하고 있으며 반면 아일랜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일부 국가는 전면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거나 제한적으로만 참여하고 있다.
솅겐 협정은 유럽 시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유럽의 경제·사회적 통합을 촉진한 제도적 기반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1995년 3월 26일: 벨기에, 프랑스, 독일,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1997년 10월 26일: 이탈리아
1997년 12월 1일: 오스트리아
2000년 3월 26일: 그리스
2001년 3월 25일: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2007년 12월 21일: 체코, 에스토니아, 헝가리,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몰타, 폴란드,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2008년 12월 12일: 스위스
2011년 12월 19일: 리히텐슈타인
2023년 1월 1일: 크로아티아
2024년 3월 31일: 불가리아, 루마니아
[1] 솅겐 정보 시스템(영어: Schengen Information System, SIS) : 셰겐 지역 국가 간에 범죄자, 실종자, 도난 차량, 여권 등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공동 데이터베이스이다. 이를 통해 국경 통제, 경찰 협력, 이민 심사 등에서 신속하고 효율적인 대응이 가능하다. SIS는 셰겐 협정의 핵심 도구로서 자유로운 이동과 공공 안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2] 솅겐 지역(Schengen Area) : 솅겐조약이 적용되는 유럽의 29개 국가의 영역을 의미한다.
러시아 모스크바 기준 시간으로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4분에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SSR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여 엄청난 방사능이 유출된 사고이다.
이 폭발은 2차대전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400배에 달하는 방사능이 유출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진행중이다.
이 사고로 발전소에서 유출된 방사성 물질이 우크라니아 SSR은 물론 체르노빌 주변국인 벨라루스 SSR, 러시아 SFSR에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초래했다.
사고 직후 당시 실무책임자의 거짓보고와 후에 폭발사고에 대한 소련 정부의 거짓말과 은폐로 피해는 더욱 광범위하여 최악의 사태가 되었다.
체르노빌 사고는 소련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져왔고, 이것은 소련의 붕괴 및 해체에 상당 부분 영향을 끼치게 된다.
* SSR(Soviet Socialist Republic)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SFSR(Soviet Federative Socialist Republic) :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 체르노빌(Chernobyl) : 우크라이나 북부의 도시로서 키예프주에 속하며 벨라루스 국경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체르노는 '검은' 빌은 '잎사귀'로 '검은 잎사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폭발은 2차대전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400배에 달하는 방사능이 유출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진행중이다.
이 사고로 발전소에서 유출된 방사성 물질이 우크라니아 SSR은 물론 체르노빌 주변국인 벨라루스 SSR, 러시아 SFSR에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초래했다.
사고 직후 당시 실무책임자의 거짓보고와 후에 폭발사고에 대한 소련 정부의 거짓말과 은폐로 피해는 더욱 광범위하여 최악의 사태가 되었다.
체르노빌 사고는 소련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져왔고, 이것은 소련의 붕괴 및 해체에 상당 부분 영향을 끼치게 된다.
* SSR(Soviet Socialist Republic)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SFSR(Soviet Federative Socialist Republic) :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 체르노빌(Chernobyl) : 우크라이나 북부의 도시로서 키예프주에 속하며 벨라루스 국경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체르노는 '검은' 빌은 '잎사귀'로 '검은 잎사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박종철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던 중 1987년 1월 13일 자신의 관악구 신림동 하숙집에서 서울 [2]남영동 대공분실로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당시 경찰은 그가 도피 중이던 민주화운동가 [1]박종운의 소재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하여 조사를 벌였으며 조사 과정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결국 그는 고문 도중 1월 14일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질식사하였다. 이는 명백한 국가권력에 의한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경찰은 14일 밤에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으나 사건 다음 날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검 공안부 지휘아래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이 실시되었다. 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 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다.
사건 직후 경찰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 치니 박 군이 '억' 하고 쓰러졌다"라는 거짓 발표를 하여 단순 사고사로 은폐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검 결과가 외부로 유출되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경찰과 정권의 태도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사건은 [4]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 종교계와 재야단체를 중심으로 진상 규명 운동을 촉발하였으며 대학생과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같은 해 6월 민주항쟁으로 확산되는 도화선 역할을 하였으며 그 결과 당시 [3]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고문과 그 은폐 시도가 국민의 저항과 정의를 향한 열망 앞에서 무력화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1] 박종운(1961년 12월 22일~) : 박종철의 선배.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었던 박종운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것
[2] 남영동 대공분실 : 치안본부 대공수다단 분실로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에 위치.2021년부터 리모델링 및 신규 건축 공사를 거쳐 2025년 6월 10일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3] 전두환(全斗煥, 1931년 1월 18일~2021년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임기, 1980년 9월 1일~1988년 2월 24일). 12.12사태 주범
[4]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 1974년에 결성된 한국 천주교의 사회참여 단체로, 인권과 정의, 민주주의 실현을 목표로 활동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최초로 폭로하며 민주화 운동의 전환점을 만든 주체 중 하나였다. 이후에도 노동자, 농민, 사회적 약자의 권리 보호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경찰은 14일 밤에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으나 사건 다음 날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검 공안부 지휘아래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이 실시되었다. 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 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다.
사건 직후 경찰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 치니 박 군이 '억' 하고 쓰러졌다"라는 거짓 발표를 하여 단순 사고사로 은폐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검 결과가 외부로 유출되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경찰과 정권의 태도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사건은 [4]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 종교계와 재야단체를 중심으로 진상 규명 운동을 촉발하였으며 대학생과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같은 해 6월 민주항쟁으로 확산되는 도화선 역할을 하였으며 그 결과 당시 [3]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고문과 그 은폐 시도가 국민의 저항과 정의를 향한 열망 앞에서 무력화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1] 박종운(1961년 12월 22일~) : 박종철의 선배.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었던 박종운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것
[2] 남영동 대공분실 : 치안본부 대공수다단 분실로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에 위치.2021년부터 리모델링 및 신규 건축 공사를 거쳐 2025년 6월 10일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3] 전두환(全斗煥, 1931년 1월 18일~2021년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임기, 1980년 9월 1일~1988년 2월 24일). 12.12사태 주범
[4]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 1974년에 결성된 한국 천주교의 사회참여 단체로, 인권과 정의, 민주주의 실현을 목표로 활동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최초로 폭로하며 민주화 운동의 전환점을 만든 주체 중 하나였다. 이후에도 노동자, 농민, 사회적 약자의 권리 보호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6월 항쟁은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6월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린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 그리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에 6월 29일 당시 노태우대통령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이 이루어졌고, 1987년 12월 16일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사회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참고 : 6.10민주항쟁(https://www.610.or.kr)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 그리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에 6월 29일 당시 노태우대통령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이 이루어졌고, 1987년 12월 16일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사회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참고 : 6.10민주항쟁(https://www.610.or.kr)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한반도와 국제 사회를 뒤흔든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항공기 테러 사건이다.
사건 당시 대한항공 858편은 이라크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와 태국 방콕을 경유하여 대한민국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 비행기는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폭탄이 설치되어, 태국을 떠난 후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했고, 탑승자 115명(승객 104명, 승무원 11명)전원이 사망하는 참사를 낳았다.
폭탄은 북한 공작원 [3]김현희와 김승일에 의해 설치되었다. 이들은 일본인으로 위장한 여권을 사용하여 탑승한 뒤, 기내에 폭탄이 숨겨진 라디오와 술병을 남겨놓고 태국 방콕에서 하차했다. 이후 폭탄은 예정된 시간에 폭발하였으며, 기체는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하여 인근 해역에 추락했다.
1987년 12월 1일 바레인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청산가리 성분이 들어간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자살 시도에 실패한 김현희는 재갈이 물린 채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대한민국으로 송환된 뒤 북한 정권의 지시에 따라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하며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1987년 12월 직선제 도입으로 [4]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북한은 이를 방해하며 정치적 혼란을 조성하고 대한민국의 국제적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테러를 기획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2]국가안전기획부는 선거 하루 전인 12월 15일 오후 공작범 김현희를 김포공항으로 압송하고 이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중계하는 등의 안보 선전을 했는데, 이는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무산과 함께 야권의 대선 패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북한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부인했지만, 김현희의 진술과 사건의 여러 증거들은 북한 정권의 개입을 명백히 드러냈다.
[3]김현희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그녀가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이자 북한 정권의 체제 하에서 세뇌당한 점을 감안했으며, 무엇보다도 북한관련 정보를 더 캐내야 하는 차원에서 사면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반공주의 정서가 한층 강화되었으며, 민간 항공 보안 체계의 필요성과 테러 방지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동시에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판과 경계가 강화되었고, 북한의 고립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단순한 테러 사건을 넘어 한반도 분단의 현실, 남북 간의 갈등, 그리고 국제 정치적 긴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비극적으로 희생된 115명의 생명은 오늘날에도 항공 보안과 평화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1] 안다만해(Andaman Sea) : 미얀마의 남쪽,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서쪽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수중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2] 국가안전기획부 : 대한민국 정보기관. 1981년 4월 8일 설립되어 1999년 1월 21일 해산. 중앙정보부의 후신이자 국가정보원의 전신으로, 약칭은 안기부다.
[3] 김현희(1962년 ~ ) : 북한의 전 공작원.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범인이며 사건 이후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였다. 1997년 12월 28일 사면 이후 자신을 경호했던 전직 안기부 직원과 결혼하였고, 현재 국가정보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
[4] 제13대 대통령 선거 :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야당의 이른바 3김으로 불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대선 후보였다. 이른바 1노 3김의 대선.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같이 이끌어 온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지지자들은 단일화를 기대했지만, 결국은 무산되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사건 당시 대한항공 858편은 이라크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와 태국 방콕을 경유하여 대한민국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 비행기는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폭탄이 설치되어, 태국을 떠난 후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했고, 탑승자 115명(승객 104명, 승무원 11명)전원이 사망하는 참사를 낳았다.
폭탄은 북한 공작원 [3]김현희와 김승일에 의해 설치되었다. 이들은 일본인으로 위장한 여권을 사용하여 탑승한 뒤, 기내에 폭탄이 숨겨진 라디오와 술병을 남겨놓고 태국 방콕에서 하차했다. 이후 폭탄은 예정된 시간에 폭발하였으며, 기체는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하여 인근 해역에 추락했다.
1987년 12월 1일 바레인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청산가리 성분이 들어간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자살 시도에 실패한 김현희는 재갈이 물린 채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대한민국으로 송환된 뒤 북한 정권의 지시에 따라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하며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1987년 12월 직선제 도입으로 [4]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북한은 이를 방해하며 정치적 혼란을 조성하고 대한민국의 국제적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테러를 기획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2]국가안전기획부는 선거 하루 전인 12월 15일 오후 공작범 김현희를 김포공항으로 압송하고 이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중계하는 등의 안보 선전을 했는데, 이는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무산과 함께 야권의 대선 패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북한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부인했지만, 김현희의 진술과 사건의 여러 증거들은 북한 정권의 개입을 명백히 드러냈다.
[3]김현희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그녀가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이자 북한 정권의 체제 하에서 세뇌당한 점을 감안했으며, 무엇보다도 북한관련 정보를 더 캐내야 하는 차원에서 사면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반공주의 정서가 한층 강화되었으며, 민간 항공 보안 체계의 필요성과 테러 방지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동시에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판과 경계가 강화되었고, 북한의 고립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단순한 테러 사건을 넘어 한반도 분단의 현실, 남북 간의 갈등, 그리고 국제 정치적 긴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비극적으로 희생된 115명의 생명은 오늘날에도 항공 보안과 평화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1] 안다만해(Andaman Sea) : 미얀마의 남쪽,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서쪽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수중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2] 국가안전기획부 : 대한민국 정보기관. 1981년 4월 8일 설립되어 1999년 1월 21일 해산. 중앙정보부의 후신이자 국가정보원의 전신으로, 약칭은 안기부다.
[3] 김현희(1962년 ~ ) : 북한의 전 공작원.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범인이며 사건 이후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였다. 1997년 12월 28일 사면 이후 자신을 경호했던 전직 안기부 직원과 결혼하였고, 현재 국가정보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
[4] 제13대 대통령 선거 :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야당의 이른바 3김으로 불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대선 후보였다. 이른바 1노 3김의 대선.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같이 이끌어 온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지지자들은 단일화를 기대했지만, 결국은 무산되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87년 12월 9일 이스라엘군의 전차 운반 크레인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태우고 가던 자동차를 덮쳐서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장례식에 팔레스타인인들이 군집하면서 반 이스라엘 투쟁으로 확산되어 [1]인티파다로 발전했다. 지역적으로도 [2]가자지구에서 [3]서안지구로 확대되어 내전상태가 되었다.
특히 이 투쟁을 더 확대시킨 것은 같은 달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소녀 살해 사건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 인티사르 알아타르가 학교에서 근처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 시몬 이프라가 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인티사르 알아타르는 시몬 이프라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저 놀고만 있었는데도 시몬 이프라는 재미로 쏘아 죽였다. 이 후 시몬 이프라는 체포되었지만 이스라엘 법원이 그를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법의 불공정성을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티파다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그리고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소년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이스라엘 군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인티파다가 쉽게 불이 붙고, 확대되었던 것에는 이 운동의 주축 연령대에 이유가 있다. 이 시기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15세 전후의 청소년층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차지하던 가자 지구와 요르단이 차지하던 서안 지구를 점령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 줄곧 이스라엘의 탄압에 시달려 왔던 세대였다.
이들의 투쟁은 점령지 전체를 자극하여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전체를 투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3년 [4]오슬로협정으로 인티파다는 끝을 맺었다.
이 기간동안 팔레스타인은 수만명의 부상과 1,500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스라엘 역시 시민과 군인 270여명이 사망했다.
[1] 인티파다(Intifada) : 봉기, 반란, 각성 등을 뜻하는 아랍어.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이 이스라엘만 국가로 인정함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통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 인티파다는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의미한다
[2]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3]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에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상호인준을 합의하였다
특히 이 투쟁을 더 확대시킨 것은 같은 달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소녀 살해 사건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 인티사르 알아타르가 학교에서 근처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 시몬 이프라가 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인티사르 알아타르는 시몬 이프라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저 놀고만 있었는데도 시몬 이프라는 재미로 쏘아 죽였다. 이 후 시몬 이프라는 체포되었지만 이스라엘 법원이 그를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법의 불공정성을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티파다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그리고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소년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이스라엘 군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인티파다가 쉽게 불이 붙고, 확대되었던 것에는 이 운동의 주축 연령대에 이유가 있다. 이 시기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15세 전후의 청소년층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차지하던 가자 지구와 요르단이 차지하던 서안 지구를 점령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 줄곧 이스라엘의 탄압에 시달려 왔던 세대였다.
이들의 투쟁은 점령지 전체를 자극하여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전체를 투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3년 [4]오슬로협정으로 인티파다는 끝을 맺었다.
이 기간동안 팔레스타인은 수만명의 부상과 1,500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스라엘 역시 시민과 군인 270여명이 사망했다.
[1] 인티파다(Intifada) : 봉기, 반란, 각성 등을 뜻하는 아랍어.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이 이스라엘만 국가로 인정함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통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 인티파다는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의미한다
[2]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3]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에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상호인준을 합의하였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전쟁은 두나라간의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독립을 둘러싸고 발생한 분쟁으로서 초기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내전 형태로 발발하였으나 이후 양국의 전면전으로 발전한 분쟁이다.
1988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을 둘러싸고 러시아혁명 이후 잠잠했던 지역간 민족간 갈등이 표출되었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내에 위치하고 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1923년 이래 자치주로 지정되어 왔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이 한창 불어 닥치던 80년대 후반에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살아온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아르메니아에 귀속시키거나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인정해줄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부로서 당연히 아제르바이잔의 영역이라고 반박하며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1988년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자유화 물결에 편승해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합병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있었고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와 통합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는 반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 운동을 부추기는 형태가 되어 대대적인 반아르메니아 운동과 나고르노ㆍ카라바흐의 합병 반대 시위를 초래하였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둘러싼 양 민족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양국 간의 전투는 더욱 심화되어 나갔다. 이런 가운데 양국 간에는 1993년 7월초 전투로 분쟁의 양상은 다시 국제전화(이란, 터키, 러시아등 개입시사)하려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아르메니아는 평화회담을 수용할 의사를 밝혔고 동년 9월 25일 양국정상은 회담을 갖고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1994년 5월 끝이 보이지 않던 양국의 전쟁은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 :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1918년 4월부터 5월까지 현재 캅카스(Caucasus)산맥 일대에 존재했던 연맹국가. 1918년 5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할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아르차흐 공화국(Republic of Artsakh),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 :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Caucasus)지역의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수도이자 최대도시는 스테파나케르트(Stepanakert, 아르메니아)/한켄디(Khankendi, 아제르바이잔)이다.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대내외적인 공식 명칭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공화국(Nagorno-Karabakh)'이였으나 2017년 2월 20일에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거쳐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다수의 지도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혹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영토 분쟁지로 표시된다.
*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 '재건', '개혁'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후 실시한 개혁정책. 고르바초프는 국내측면에서 정치개혁을 실시하였고, 대외측면에서는 긴장 완화와 군축정책을 실시하여 동구권의 체제 변혁과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냈다.
1988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을 둘러싸고 러시아혁명 이후 잠잠했던 지역간 민족간 갈등이 표출되었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내에 위치하고 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1923년 이래 자치주로 지정되어 왔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이 한창 불어 닥치던 80년대 후반에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살아온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아르메니아에 귀속시키거나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인정해줄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부로서 당연히 아제르바이잔의 영역이라고 반박하며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1988년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자유화 물결에 편승해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합병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있었고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와 통합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는 반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 운동을 부추기는 형태가 되어 대대적인 반아르메니아 운동과 나고르노ㆍ카라바흐의 합병 반대 시위를 초래하였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둘러싼 양 민족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양국 간의 전투는 더욱 심화되어 나갔다. 이런 가운데 양국 간에는 1993년 7월초 전투로 분쟁의 양상은 다시 국제전화(이란, 터키, 러시아등 개입시사)하려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아르메니아는 평화회담을 수용할 의사를 밝혔고 동년 9월 25일 양국정상은 회담을 갖고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1994년 5월 끝이 보이지 않던 양국의 전쟁은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 :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1918년 4월부터 5월까지 현재 캅카스(Caucasus)산맥 일대에 존재했던 연맹국가. 1918년 5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할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아르차흐 공화국(Republic of Artsakh),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 :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Caucasus)지역의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수도이자 최대도시는 스테파나케르트(Stepanakert, 아르메니아)/한켄디(Khankendi, 아제르바이잔)이다.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대내외적인 공식 명칭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공화국(Nagorno-Karabakh)'이였으나 2017년 2월 20일에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거쳐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다수의 지도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혹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영토 분쟁지로 표시된다.
*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 '재건', '개혁'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후 실시한 개혁정책. 고르바초프는 국내측면에서 정치개혁을 실시하였고, 대외측면에서는 긴장 완화와 군축정책을 실시하여 동구권의 체제 변혁과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냈다.
1988년 하계 올림픽(1988 Summer Olympics, Games of the XXIV Olympiad Seoul 1988)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의 16일 동안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이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2번째 하계 올림픽이며 12년 만에 IOC 회원국 대부분인 160개국이 참가한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2번째 하계 올림픽이며 12년 만에 IOC 회원국 대부분인 160개국이 참가한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다.
힐스버러 참사는 잉글랜드 셰필드의 힐스버러 스타디움(Hillsborough Stadium)에서 발생한 대형 군중 압사 사고로 총 97명이 사망하고 766명이 부상을 입은 최악의 축구 경기 참사다. 이 참사는 [1]FA컵 준결승 경기인 리버풀 FC와 노팅엄 포레스트 FC의 경기 도중 발생했다.
당시 힐스버러 스타디움은 리그가 아닌 중립 구장에서 열린 경기였으며, 양 팀의 팬들이 각각 다른 스탠드에 배정되었다. 리버풀 팬들이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곳의 출입문은 회전식이라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었다. 경찰은 빠르게 입장시키기 위해 출구로 사용하던 출입문(게이트 C)을 개방하였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인파가 한꺼번에 좁은 입구와 터널을 통해 밀려 들어갔고, 중앙 앞쪽에 위치한 스탠드에서 극심한 압박이 발생했다. 앞쪽 구역의 관중들은 난간과 철제 울타리에 갇혀 움직일 수 없었고 구조나 퇴장도 불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관중이 압사하거나 압박으로 인한 질식사로 숨졌다.
경기 시작 6분 만에 상황이 심각했지, 경기장 내부에서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경찰과 경기 관계자들은 경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경기 중단과 구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참사가 이미 발생한 이후였다.
사고 직후 영국 언론은 리버풀 팬들의 난동과 술에 취한 행동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보도했으며, 특히 더 선(The Sun)의 보도는 "팬들이 죽은 사람의 지갑을 훔쳤다"는 등의 허위 주장으로 리버풀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이는 리버풀 지역에서 수십 년간 더 선 신문이 불매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와 독립적 진상조사 보고서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참사의 주된 원인은 경찰과 경기 운영 측의 잘못된 군중 관리, 비효율적인 경기장 구조, 늦은 응급 대응이었다. 팬들은 오히려 참사의 피해자였으며, 초동 대처의 실패와 경찰의 은폐 시도가 추가 피해를 키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2016년 4월 26일 법원 배심원단이 "사망자 97명은 경찰의 과실과 조직적 실패에 의해 불법적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판결하였다. 이후 경찰과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이어졌지만 많은 이들이 실질적인 처벌을 피하면서 피해자 가족과 시민사회는 여전히 정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 힐스버러 추모비를 세워 구단 차원에서 매년 4월 15일 추모제를 열고있다.
힐스버러 참사는 영국 내 스포츠 경기장 안전 기준과 군중 통제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기장 좌석화 정책(standing 구역 폐지)과 안전 설계 기준의 개정을 이끌어냈고, 이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전체 구조와 팬 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 FA컵(Football Association Challenge Cup) : 잉글랜드 축구 협회 챌리지 컵. 잉글랜드 축구 협회에 속한 모든 구단들이 우승팀을 가리는 대회
당시 힐스버러 스타디움은 리그가 아닌 중립 구장에서 열린 경기였으며, 양 팀의 팬들이 각각 다른 스탠드에 배정되었다. 리버풀 팬들이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곳의 출입문은 회전식이라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었다. 경찰은 빠르게 입장시키기 위해 출구로 사용하던 출입문(게이트 C)을 개방하였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인파가 한꺼번에 좁은 입구와 터널을 통해 밀려 들어갔고, 중앙 앞쪽에 위치한 스탠드에서 극심한 압박이 발생했다. 앞쪽 구역의 관중들은 난간과 철제 울타리에 갇혀 움직일 수 없었고 구조나 퇴장도 불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관중이 압사하거나 압박으로 인한 질식사로 숨졌다.
경기 시작 6분 만에 상황이 심각했지, 경기장 내부에서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경찰과 경기 관계자들은 경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경기 중단과 구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참사가 이미 발생한 이후였다.
사고 직후 영국 언론은 리버풀 팬들의 난동과 술에 취한 행동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보도했으며, 특히 더 선(The Sun)의 보도는 "팬들이 죽은 사람의 지갑을 훔쳤다"는 등의 허위 주장으로 리버풀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이는 리버풀 지역에서 수십 년간 더 선 신문이 불매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와 독립적 진상조사 보고서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참사의 주된 원인은 경찰과 경기 운영 측의 잘못된 군중 관리, 비효율적인 경기장 구조, 늦은 응급 대응이었다. 팬들은 오히려 참사의 피해자였으며, 초동 대처의 실패와 경찰의 은폐 시도가 추가 피해를 키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2016년 4월 26일 법원 배심원단이 "사망자 97명은 경찰의 과실과 조직적 실패에 의해 불법적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판결하였다. 이후 경찰과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이어졌지만 많은 이들이 실질적인 처벌을 피하면서 피해자 가족과 시민사회는 여전히 정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 힐스버러 추모비를 세워 구단 차원에서 매년 4월 15일 추모제를 열고있다.
힐스버러 참사는 영국 내 스포츠 경기장 안전 기준과 군중 통제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기장 좌석화 정책(standing 구역 폐지)과 안전 설계 기준의 개정을 이끌어냈고, 이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전체 구조와 팬 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 FA컵(Football Association Challenge Cup) : 잉글랜드 축구 협회 챌리지 컵. 잉글랜드 축구 협회에 속한 모든 구단들이 우승팀을 가리는 대회
천안문 민주화운동은 1989년 6월 3일부터 6월 4일까지 중국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베이징 천안문에 운집한 학생과 지식인은 물로 이들을 돕던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유혈 사건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래 가장 대규모로 민주화를 향한 시민사회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운동에 참여한 인민들은 개혁개방 이후 심각한 관료 부패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비판하며 정치 민주화를 요구했다. 5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6월 3일 밤, 덩샤오핑의 중국공산당은 군대를 동원하여 천안문 내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인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때 발생한 사망자는 약 2,500으로 발표되었다.
강제 진압후 6월4일에 중국공산당은 시위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협상하여 참여한 학생과 지식인들은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이 약속을 저버렸고, 이후에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배되어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래 가장 대규모로 민주화를 향한 시민사회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운동에 참여한 인민들은 개혁개방 이후 심각한 관료 부패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비판하며 정치 민주화를 요구했다. 5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6월 3일 밤, 덩샤오핑의 중국공산당은 군대를 동원하여 천안문 내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인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때 발생한 사망자는 약 2,500으로 발표되었다.
강제 진압후 6월4일에 중국공산당은 시위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협상하여 참여한 학생과 지식인들은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이 약속을 저버렸고, 이후에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배되어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1]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비폭력 혁명으로 공산당 정권이 무너졌다. 벨벳 혁명은 중앙유럽 민주화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벨벳혁명은 체코를 비롯, 공산통치 종식과 자유화를 요구하는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 시위로 정권 교체를 이뤄낸 무혈혁명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68년 소련군에 점령당하며 공산화되었다. 프라하의 봄은 좌절되었으며 이때 권력을 장악한 [3] 구스타프 후삭의 감시와 통제가 지속됐다.
소련군의 프라하침공을 항의하는 시위를 계기로 반체제운동이 전개되었고 [4] 바츨라프광장으로 평화롭게 행진하던 학생들을 전경이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당시 시민운동을 이끌던 [2] 바츨라프 하벨은 긴급하게 '차터 77'이라는 회의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탄생한 시민사회연대체 '시민포럼(OF)'은 슬로바키아의 '대중폭력반대(VPN)'와 함께 비폭력을 표방하며 대규모 집회, 총파업, 가두행진 등 반체제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이른바 벨벳혁명을 통해 1989년 12월 29일 공산주의 연방 의회는 바츨라프 하벨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체코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수십만의 시민들이 열쇠를 흔들며 사회주의의 종말을 고했던 드라마틱한 퍼포먼스는 세계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1]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다
[2]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 1936년~2011년) : 체코의 극작가. 19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를 이끌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3] 구스타프 후삭(Gustav Husak, 1913년~1991년)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1975~1989), 공산당 서기장(1969~1987)을 지닌 인물
[4] 바츨라프광장(Wenceslas Square) : 현 체코의 프라하 신시가지에 있는 광장
벨벳혁명은 체코를 비롯, 공산통치 종식과 자유화를 요구하는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 시위로 정권 교체를 이뤄낸 무혈혁명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68년 소련군에 점령당하며 공산화되었다. 프라하의 봄은 좌절되었으며 이때 권력을 장악한 [3] 구스타프 후삭의 감시와 통제가 지속됐다.
소련군의 프라하침공을 항의하는 시위를 계기로 반체제운동이 전개되었고 [4] 바츨라프광장으로 평화롭게 행진하던 학생들을 전경이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당시 시민운동을 이끌던 [2] 바츨라프 하벨은 긴급하게 '차터 77'이라는 회의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탄생한 시민사회연대체 '시민포럼(OF)'은 슬로바키아의 '대중폭력반대(VPN)'와 함께 비폭력을 표방하며 대규모 집회, 총파업, 가두행진 등 반체제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이른바 벨벳혁명을 통해 1989년 12월 29일 공산주의 연방 의회는 바츨라프 하벨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체코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수십만의 시민들이 열쇠를 흔들며 사회주의의 종말을 고했던 드라마틱한 퍼포먼스는 세계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1]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다
[2]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 1936년~2011년) : 체코의 극작가. 19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를 이끌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3] 구스타프 후삭(Gustav Husak, 1913년~1991년)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1975~1989), 공산당 서기장(1969~1987)을 지닌 인물
[4] 바츨라프광장(Wenceslas Square) : 현 체코의 프라하 신시가지에 있는 광장
이라크는 1990년 8월 2일 오전 2시 총공세를 기습적으로 감행하여 쿠웨이트를 점령하여 강제 합병하였다. 이는 국제적 비난을 불러 일으켰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군을 편성하여 이라크를 제재를 시작하였다.
미국과 국제연합은 이라크에 쿠웨이트 합병 철회와 이라크군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철군시한은 1991년 1월 15일까지였다. 이 결의안의 채택과 함께 이라크에 경제 제재가 가해졌다.
이라크의 후세인의 저항이 계속되자 미국은 사막의 방패작전(Operation Desert Shield)작전명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방어와 미군 군사 기지 설치하였다.
이라크가 합병 철회와 철군을 거부하자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에 선전포고를 했고 1월 17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토마호크 미사일로 이라크에 폭격을 가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작전명이 '사막의 방패'에서 '사막의 폭풍(Operation Desert Storm)'으로 변경되었다.
스텔스 공격기, MLRS, 패트리어트 미사일, 크루즈 미사일, AH-64 아파치 등 미군의 하이테크 무기들의 위력을 가감없이 보여주었으며 전 과정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면서 전 세계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은 전쟁이기도 하다. 연합군의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전쟁이었다.
걸프 전쟁은 최첨단 병기와 공군의 힘을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승전군 사상자 수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전쟁이었다. 냉전이 종식될 무렵에 발생한 걸프전은 현대전의 한획을 그었고 또한 미래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로 군사적 힘을 의심받던 미국이 여전히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 사례이기도 하다.
걸프(gulf)는 바다의 만(bay)을 의미한다. 전쟁이 벌어진 지역의 이름이 걸프가 아니라 페르시아만 주변 지역. 그래서 1차 이라크 전쟁 혹은 페르시아 만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년~2006년) : 이라크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이라크의 정치인. 제5대 대통령(재임,1979년~2003년)
* 조지 워커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년~현존) :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재위 : 2001년~2009년)
미국과 국제연합은 이라크에 쿠웨이트 합병 철회와 이라크군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철군시한은 1991년 1월 15일까지였다. 이 결의안의 채택과 함께 이라크에 경제 제재가 가해졌다.
이라크의 후세인의 저항이 계속되자 미국은 사막의 방패작전(Operation Desert Shield)작전명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방어와 미군 군사 기지 설치하였다.
이라크가 합병 철회와 철군을 거부하자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에 선전포고를 했고 1월 17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토마호크 미사일로 이라크에 폭격을 가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작전명이 '사막의 방패'에서 '사막의 폭풍(Operation Desert Storm)'으로 변경되었다.
스텔스 공격기, MLRS, 패트리어트 미사일, 크루즈 미사일, AH-64 아파치 등 미군의 하이테크 무기들의 위력을 가감없이 보여주었으며 전 과정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면서 전 세계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은 전쟁이기도 하다. 연합군의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전쟁이었다.
걸프 전쟁은 최첨단 병기와 공군의 힘을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승전군 사상자 수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전쟁이었다. 냉전이 종식될 무렵에 발생한 걸프전은 현대전의 한획을 그었고 또한 미래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로 군사적 힘을 의심받던 미국이 여전히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 사례이기도 하다.
걸프(gulf)는 바다의 만(bay)을 의미한다. 전쟁이 벌어진 지역의 이름이 걸프가 아니라 페르시아만 주변 지역. 그래서 1차 이라크 전쟁 혹은 페르시아 만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년~2006년) : 이라크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이라크의 정치인. 제5대 대통령(재임,1979년~2003년)
* 조지 워커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년~현존) :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재위 : 2001년~2009년)
독일의 재통일(독일어:Deutsche Wiedervereinigung)은 1990년 10월 3일에 과거 독일 민주 공화국(German Democratic Republic, 동독)에 속하던 5개주가 독일 연방 공화국(Federal Republic of Germany, 서독)에 가입하는 방안으로 통일이 이루어졌다.
시에라리온 내전(1991~2002)은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발생한 참혹한 무력 충돌로, 약 11년간 지속되며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과 인권 유린을 초래한 내전이다. 1991년 3월 23일 [2]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은 시에라리온 반군 조직인 [1]혁명연합전선이 시에라리온 동부 국경 지역을 점령하며 시작되었다.
[1]혁명연합전선의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는 시에라리온 정부의 부패와 불평등을 비판하며 무장 투쟁을 벌였지만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강제 징집, 성폭행, 어린 병사의 활용, 그리고 도끼로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특히 시에라리온의 풍부한 다이아몬드 자원을 이용해 무기와 자금을 확보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이는 [4]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개념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시에라리온 정부군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양한 민병대 및 외국 용병들과 연합했으며,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한 [5]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의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전은 잦은 휴전과 협정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재개되었고 갈등은 점점 복잡해졌다.
1999년 7월 7일에 토고의 수도인 로메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지만 [1]혁명연합전선은 이 협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2000년 5월 [7]프리타운을 공격 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이후 [6]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투입되었고, 영국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 개입을 단행하여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를 체포함으로써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2년 1월 18일, 당시 대통령 [8]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가 공식적으로 전쟁 종식을 선언하며 종전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약 5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국가의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전후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가 설치되어 전범 처벌이 이뤄졌고 국가 재건과 화해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어졌다.
[1] 혁명연합전선(RUF, Revolutionary United Front) : 시에라리온 내전을 일으킨 반군 조직으로 부패한 정부 타도를 명분으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민간인 학살, 강제 노동, 아동 병사 징집 등 극단적인 폭력을 자행했다. 다이아몬드 자원을 통해 무기를 조달하며 내전을 장기화시켰다. 현재는 해체되었다
[2] 라이베리아 애국전선(NPFL,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 1989년 찰스 테일러가 주도해 결성한 무장 반군 조직으로 라이베리아 내전(1989~1997)의 주요 세력이었다. NPFL은 독재자 사무엘 도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대규모 민간인 학살, 강간, 강제 징집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전쟁 후 찰스 테일러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과 전쟁범죄로 국제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3] 포다이 사이바나 산코(Foday Saybana Sankoh, 1937년 10월 17일~2003년 7월 29일) :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아 시에라리온 반군 단체 혁명연합전선의 설립자. 시에라리온 내전 후 전쟁범죄로 기소되었으며, 2003년 재판을 기다리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4] 블러드 다이아몬드(conflict diamonds, hot diamonds, war diamonds 또는 red diamonds) : 무력분쟁 지역(주로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의 수익금이 전쟁 수행을 위한 무기구매등 자금 조달에 사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5]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ECOMOG, 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Monitoring Group) :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가 설립한 군산 평화유지 기구로,주로 회원국 내 분쟁과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파병된다. 회원국은 가나, 감비아, 기니, 기니비사우, 나이지리아, 베냉, 라이베리아, 세네갈, 시에라리온, 카보베르데, 코트디부아르, 토고 등 12개 국가이다. 아프리카 연합 및 유엔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6] 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UNAMSIL, United Nations Mission in Sierra Leone) :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시에라리온에서 진행된 유엔 평화유지군. 1999년 10월 22일, 안전보장이사회는 로메 평화협정을 이행하는 데 있어 정부와 다른 당사자들과 협력하고 군축, 동원 해제 및 재통합 계획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UNAMSIL을 설립했다. 2005년 12월 유엔 시에라리온 통합 사무소(UNIOSIL)가 뒤를 이었다. UNIOSIL의 임기는 두 번 연장되었고 2008년 9월에 끝났다
[7] 프리타운(Freetown) : 시에라리온의 수도
[8] 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Alhaji Ahmad Tejan Kabbah, 1932년 2월 16일 ~ 2014년 3월 13일) : 시에라리온의 정치인이다. 시에라리온의 제3대 대통령. 두차례 역임(1996년 3월 29일 ~1997년 5월 25일, 1998년 3월 10일~2007년 9월 17일)
[1]혁명연합전선의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는 시에라리온 정부의 부패와 불평등을 비판하며 무장 투쟁을 벌였지만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강제 징집, 성폭행, 어린 병사의 활용, 그리고 도끼로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특히 시에라리온의 풍부한 다이아몬드 자원을 이용해 무기와 자금을 확보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이는 [4]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개념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시에라리온 정부군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양한 민병대 및 외국 용병들과 연합했으며,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한 [5]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의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전은 잦은 휴전과 협정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재개되었고 갈등은 점점 복잡해졌다.
1999년 7월 7일에 토고의 수도인 로메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지만 [1]혁명연합전선은 이 협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2000년 5월 [7]프리타운을 공격 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이후 [6]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투입되었고, 영국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 개입을 단행하여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를 체포함으로써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2년 1월 18일, 당시 대통령 [8]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가 공식적으로 전쟁 종식을 선언하며 종전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약 5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국가의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전후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가 설치되어 전범 처벌이 이뤄졌고 국가 재건과 화해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어졌다.
[1] 혁명연합전선(RUF, Revolutionary United Front) : 시에라리온 내전을 일으킨 반군 조직으로 부패한 정부 타도를 명분으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민간인 학살, 강제 노동, 아동 병사 징집 등 극단적인 폭력을 자행했다. 다이아몬드 자원을 통해 무기를 조달하며 내전을 장기화시켰다. 현재는 해체되었다
[2] 라이베리아 애국전선(NPFL,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 1989년 찰스 테일러가 주도해 결성한 무장 반군 조직으로 라이베리아 내전(1989~1997)의 주요 세력이었다. NPFL은 독재자 사무엘 도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대규모 민간인 학살, 강간, 강제 징집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전쟁 후 찰스 테일러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과 전쟁범죄로 국제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3] 포다이 사이바나 산코(Foday Saybana Sankoh, 1937년 10월 17일~2003년 7월 29일) :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아 시에라리온 반군 단체 혁명연합전선의 설립자. 시에라리온 내전 후 전쟁범죄로 기소되었으며, 2003년 재판을 기다리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4] 블러드 다이아몬드(conflict diamonds, hot diamonds, war diamonds 또는 red diamonds) : 무력분쟁 지역(주로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의 수익금이 전쟁 수행을 위한 무기구매등 자금 조달에 사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5]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ECOMOG, 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Monitoring Group) :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가 설립한 군산 평화유지 기구로,주로 회원국 내 분쟁과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파병된다. 회원국은 가나, 감비아, 기니, 기니비사우, 나이지리아, 베냉, 라이베리아, 세네갈, 시에라리온, 카보베르데, 코트디부아르, 토고 등 12개 국가이다. 아프리카 연합 및 유엔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6] 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UNAMSIL, United Nations Mission in Sierra Leone) :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시에라리온에서 진행된 유엔 평화유지군. 1999년 10월 22일, 안전보장이사회는 로메 평화협정을 이행하는 데 있어 정부와 다른 당사자들과 협력하고 군축, 동원 해제 및 재통합 계획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UNAMSIL을 설립했다. 2005년 12월 유엔 시에라리온 통합 사무소(UNIOSIL)가 뒤를 이었다. UNIOSIL의 임기는 두 번 연장되었고 2008년 9월에 끝났다
[7] 프리타운(Freetown) : 시에라리온의 수도
[8] 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Alhaji Ahmad Tejan Kabbah, 1932년 2월 16일 ~ 2014년 3월 13일) : 시에라리온의 정치인이다. 시에라리온의 제3대 대통령. 두차례 역임(1996년 3월 29일 ~1997년 5월 25일, 1998년 3월 10일~2007년 9월 17일)
1991년 민족과 지역 간 갈등으로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1990년대 내내 일련의 전쟁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어 7개 나라로 분리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불렀지만 내전은 같은 나라 안에서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무력투쟁을 말하는데 1992년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해체되어 내전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연방 분리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연방 유지를 주장한 세르비아간의 전투로 시작되었다.
* 유고연방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코소보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불렀지만 내전은 같은 나라 안에서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무력투쟁을 말하는데 1992년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해체되어 내전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연방 분리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연방 유지를 주장한 세르비아간의 전투로 시작되었다.
* 유고연방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코소보
1980대 후반에 소련의 [1]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개혁)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 정책은 경제의 침체를 극복하고 정치적 체제의 존속을 도모하였지만, 동시에 공산당 통제의 약화와 민족주의의 분출을 초래했다. 경제는 침체되었고, 각 공화국들은 점차 소련 중앙정부로부터 독립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91년 8월, 보수파 공산당 세력이 [1]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 반발하여 [2]8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는 2일만에 실패로 끝났으나,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변화를 초래했다. 각 공화국들은 독립을 선언하기 시작했고 소련의 중앙 권력은 사실상 기능을 잃었다.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권위는 크게 추락했고 대신에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3]보리스 옐친이 실질적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이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주요 공화국들은 더 이상 연방 유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해 12월, 러시아의 대통령 [3]보리스 옐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4]레오니드 크라프추크, 벨라루스의 최고회의 의장 [5]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는 비밀리에 회동했다. 세 사람은 벨라루스의 [6]벨라베자 숲에 위치한 산장에 모였다. 12월 8일, 세 지도자는 비밀 협상 끝에 벨라베자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소련의 해체와 국제법적 계승의 포기를 명시했다. 즉, 소련은 더 이상 주권국가로 존재하지 않으며, 기존의 15개 공화국은 독립된 국가로서 상호 협력하는 관계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7]독립국가연합(CIS)을 설립하여 각 공화국이 경제·군사·외교적 협의와 협력을 유지하기로 하였다.
셋째, 핵무기 관리 체제를 규정하여 구소련의 핵무기가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카자흐스탄에 분산되어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핵무기 사용의 최종 통제권을 가지는 체계를 구축했다.
이 협정은 사실상 소련의 해체를 선언한 것이었으며 고르바초프는 이에 대해 즉시 반발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소련의 대통령임을 주장하며 협정이 헌법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러시아 의회와 군부는 이미 옐친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공화국들도 독립 의사를 공식화했다.
12월 21일, 카자흐스탄의 도시 [9]알마티에서 11개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10]알마아타 의정서에 서명함으로써 [7]독립국가연합(CIS)가 공식 출범하였다. 이로써 소련은 법적·정치적으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리고 1991년 12월 2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대통령직 사임을 선언하고, 다음 날인 12월 26일 소련 최고회의 상원(연방평의회)은 소련의 해체를 공식 승인하였다. 붉은 깃발이 [8]크렘린에서 내려지고, 러시아 연방의 삼색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벨라베자 협정은 단순한 정치적 문서가 아니라 냉전 구도의 종식과 새로운 세계 질서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소련의 해체로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였고 구소련 지역은 독립국가들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경제 붕괴, 국경 분쟁, 민족 갈등, 핵무기 통제 문제 등이 남았다. 러시아는 소련의 국제적 지위를 계승했지만 제국의 해체라는 역사적 상실감은 이후 몇십 년 동안 정치적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
벨라베자 협정의 서명 장소였던 [6]벨라베자 숲은 현재 벨라루스와 폴란드 국경에 걸친 자연 보호구역으로 남아 있으며 냉전 시대의 종식을 상징하는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되고 있다.
[1]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3월 2일~2022년 8월 30일) : 소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5년 3월 11일~1991년 8월 24일), 소련의 초대 대통령(임기, 1990년 3월 15일~1991년 12월 25일)
[2] 8월 쿠데타(1991년 8월 19일~1991년 8월 21일) : 소련 공산당 보수파들이 당시 소련 대통령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반대해 일으킨 쿠데타. 이틀 만에 실패하였으나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었다
[3]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1931년 2월 1일~2007년 4월 23일) : 러시아 초대 대통령(임기, 1991년 7월 10일~1999년 12월 31일)
[4] 레오니드 크라우추크(Leonid Makarovych Kravchuk,1934년 1월 10일~2022년 5월 10일) :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임기, 1991년 12월 5일~1994년 7월 19일)
[5]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1934년 12월 15일 ~ 2022년 5월 3일) : 벨라루스의 정치인으로 초대 벨라루스의 국가 원수. 소련의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마지막 서기장 역임
[6] 벨라베자 숲(러시아어, Belovezhskaya pushcha) : 폴란드와 벨라루스의 국경에 걸쳐있는 원시림. 유럽에 남은 마지막 원시림이며 유럽들소가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다. 1979년 폴란드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1992년에는 벨라루스 지역이 추가로 등재되었다
[7]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CIS) : 소련의 붕괴로 인해 독립국가가 된 구 소련 공화국들의 연합체로서 결성된 국제기구이자 국가연합
[8] 크렘린 : 러시아어로 "요새", "성채", "성"을 의미하는 단어로 역사적인 러시아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주요 성 단지들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크렘린으로는 모스크바 크렘린이 있다. 흔히 말하는 크렘린 궁전은 크렘린 내부에 위치한 궁전을 말한다
[9] 알마티(Almaty) : 1925년부터 1994년까지 카자흐스탄 수도. 1991년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후 알마아타에서 알마티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0] 알마아타 의정서(Alma-Ata Protocol) : 1991년 12월 21일에 서명되었으며 소련 해체 후 독립국가연합(CIS)을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11개 구소련 공화국이 서명한 이 의정서는 상호 인정, 평등, 그리고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포함한 신생 독립국 간의 협력 원칙을 제시했다
1991년 8월, 보수파 공산당 세력이 [1]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 반발하여 [2]8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는 2일만에 실패로 끝났으나,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변화를 초래했다. 각 공화국들은 독립을 선언하기 시작했고 소련의 중앙 권력은 사실상 기능을 잃었다.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권위는 크게 추락했고 대신에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3]보리스 옐친이 실질적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이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주요 공화국들은 더 이상 연방 유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해 12월, 러시아의 대통령 [3]보리스 옐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4]레오니드 크라프추크, 벨라루스의 최고회의 의장 [5]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는 비밀리에 회동했다. 세 사람은 벨라루스의 [6]벨라베자 숲에 위치한 산장에 모였다. 12월 8일, 세 지도자는 비밀 협상 끝에 벨라베자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소련의 해체와 국제법적 계승의 포기를 명시했다. 즉, 소련은 더 이상 주권국가로 존재하지 않으며, 기존의 15개 공화국은 독립된 국가로서 상호 협력하는 관계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7]독립국가연합(CIS)을 설립하여 각 공화국이 경제·군사·외교적 협의와 협력을 유지하기로 하였다.
셋째, 핵무기 관리 체제를 규정하여 구소련의 핵무기가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카자흐스탄에 분산되어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핵무기 사용의 최종 통제권을 가지는 체계를 구축했다.
이 협정은 사실상 소련의 해체를 선언한 것이었으며 고르바초프는 이에 대해 즉시 반발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소련의 대통령임을 주장하며 협정이 헌법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러시아 의회와 군부는 이미 옐친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공화국들도 독립 의사를 공식화했다.
12월 21일, 카자흐스탄의 도시 [9]알마티에서 11개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10]알마아타 의정서에 서명함으로써 [7]독립국가연합(CIS)가 공식 출범하였다. 이로써 소련은 법적·정치적으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리고 1991년 12월 2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대통령직 사임을 선언하고, 다음 날인 12월 26일 소련 최고회의 상원(연방평의회)은 소련의 해체를 공식 승인하였다. 붉은 깃발이 [8]크렘린에서 내려지고, 러시아 연방의 삼색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벨라베자 협정은 단순한 정치적 문서가 아니라 냉전 구도의 종식과 새로운 세계 질서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소련의 해체로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였고 구소련 지역은 독립국가들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경제 붕괴, 국경 분쟁, 민족 갈등, 핵무기 통제 문제 등이 남았다. 러시아는 소련의 국제적 지위를 계승했지만 제국의 해체라는 역사적 상실감은 이후 몇십 년 동안 정치적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
벨라베자 협정의 서명 장소였던 [6]벨라베자 숲은 현재 벨라루스와 폴란드 국경에 걸친 자연 보호구역으로 남아 있으며 냉전 시대의 종식을 상징하는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되고 있다.
[1]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3월 2일~2022년 8월 30일) : 소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5년 3월 11일~1991년 8월 24일), 소련의 초대 대통령(임기, 1990년 3월 15일~1991년 12월 25일)
[2] 8월 쿠데타(1991년 8월 19일~1991년 8월 21일) : 소련 공산당 보수파들이 당시 소련 대통령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반대해 일으킨 쿠데타. 이틀 만에 실패하였으나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었다
[3]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1931년 2월 1일~2007년 4월 23일) : 러시아 초대 대통령(임기, 1991년 7월 10일~1999년 12월 31일)
[4] 레오니드 크라우추크(Leonid Makarovych Kravchuk,1934년 1월 10일~2022년 5월 10일) :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임기, 1991년 12월 5일~1994년 7월 19일)
[5]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1934년 12월 15일 ~ 2022년 5월 3일) : 벨라루스의 정치인으로 초대 벨라루스의 국가 원수. 소련의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마지막 서기장 역임
[6] 벨라베자 숲(러시아어, Belovezhskaya pushcha) : 폴란드와 벨라루스의 국경에 걸쳐있는 원시림. 유럽에 남은 마지막 원시림이며 유럽들소가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다. 1979년 폴란드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1992년에는 벨라루스 지역이 추가로 등재되었다
[7]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CIS) : 소련의 붕괴로 인해 독립국가가 된 구 소련 공화국들의 연합체로서 결성된 국제기구이자 국가연합
[8] 크렘린 : 러시아어로 "요새", "성채", "성"을 의미하는 단어로 역사적인 러시아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주요 성 단지들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크렘린으로는 모스크바 크렘린이 있다. 흔히 말하는 크렘린 궁전은 크렘린 내부에 위치한 궁전을 말한다
[9] 알마티(Almaty) : 1925년부터 1994년까지 카자흐스탄 수도. 1991년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후 알마아타에서 알마티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0] 알마아타 의정서(Alma-Ata Protocol) : 1991년 12월 21일에 서명되었으며 소련 해체 후 독립국가연합(CIS)을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11개 구소련 공화국이 서명한 이 의정서는 상호 인정, 평등, 그리고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포함한 신생 독립국 간의 협력 원칙을 제시했다
1991년 12월 11일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열린 유럽공동체(EC) 12개국이 새로운 유럽연합(EU) 설립에 합의하고 1993년 11월 1일부터 효력이 발휘되었다.
정식명칭은 유럽연합조약(Treaty on European)이며, 유럽공동체(EC)는 유럽연합(EU:European Union)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 조약으로 유로화가 도입되었으며, EU의 3가지 중심 구조인 경제 및 사회 정책, 공동의 외교 및 안보, 사법과 국내 문제에 관한 회원국들의 협조가 제안되었다.
회원국 각국 국경을 허물고 자유로운 왕래를 보장했으며 단일화폐가 통용되는 거대 자유무역시장이 탄생되었다.
조약 참여국 12개국은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덴마크,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이다
정식명칭은 유럽연합조약(Treaty on European)이며, 유럽공동체(EC)는 유럽연합(EU:European Union)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 조약으로 유로화가 도입되었으며, EU의 3가지 중심 구조인 경제 및 사회 정책, 공동의 외교 및 안보, 사법과 국내 문제에 관한 회원국들의 협조가 제안되었다.
회원국 각국 국경을 허물고 자유로운 왕래를 보장했으며 단일화폐가 통용되는 거대 자유무역시장이 탄생되었다.
조약 참여국 12개국은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덴마크,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이다
2차 세계대전 종식이후 세계는 미국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소련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으로 갈려 냉전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소련의 붕괴는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독립국가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협정에 조인하고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선언하였다.
소련의 대통령이자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러시아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게 이양하면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약 70년 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반세기 가까이 지속되어 온 냉전 시대가 무너졌다.
소련붕괴 최후의 순간은 크리스마스인 1991년 12월 25일에 일어났다. 이날 러시아 최고인민회의는 국명을 1918년에 레닌이 정한 '러시아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서 '러시아연방'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시38분 모스크바의 크렘린에서 소련국기는 영원히 내려갔다.
소련의 붕괴로 미국의 상대적 위치는 최정상으로 올라섰고 이후 탈냉전 시기의 국제 질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패권적 일국 체제로 바뀌었다.
*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1931년~2007년) : 러시아 초대 대통령, 임기: 1991년 7월 10일 ~ 1999년 12월 31일
*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신생 공화국 15개 : 리투아니아, 조지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
* 크렘린(Kremlin) :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대통령궁
소련의 붕괴는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독립국가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협정에 조인하고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선언하였다.
소련의 대통령이자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러시아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게 이양하면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약 70년 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반세기 가까이 지속되어 온 냉전 시대가 무너졌다.
소련붕괴 최후의 순간은 크리스마스인 1991년 12월 25일에 일어났다. 이날 러시아 최고인민회의는 국명을 1918년에 레닌이 정한 '러시아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서 '러시아연방'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시38분 모스크바의 크렘린에서 소련국기는 영원히 내려갔다.
소련의 붕괴로 미국의 상대적 위치는 최정상으로 올라섰고 이후 탈냉전 시기의 국제 질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패권적 일국 체제로 바뀌었다.
*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1931년~2007년) : 러시아 초대 대통령, 임기: 1991년 7월 10일 ~ 1999년 12월 31일
*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신생 공화국 15개 : 리투아니아, 조지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
* 크렘린(Kremlin) :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대통령궁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보슈냐크계(이슬람교), 크로아티아계(카톨릭), 세르비아계(정교회)등으로 구성된 3개의 언어와 민족, 종교가 공존하는 국가이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분열로 1990년에 연방 구성국인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을 하였다. 이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도 독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보스니아의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독립에 찬성하였으나 세르비아계는 연방 잔류를 원하면서 분란이 시작되었다.
1992년 2월 29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독립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분리 독립을 반대한 세르비아계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투표결과 독립찬성으로 나오자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선포하고 유고 연방으로 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세르비아계는 반발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세르비아계의 [1]라도반 카라지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내 [2]스릅스카 공화국을 세우고 유고연방의 [3]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지원으로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세르비아계군에 의해 1992년 4월 6일부터 43~44개월간 봉쇄된 사라예보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으며 도시내에서 포격과 저격으로 무고한 시민 1만 6천여명이 사망했다. 사라예보로 들어가는 식량과 의약품 보급을 차단한 뒤 언덕마다 저격수를 배치해 민간인을 사살하고 박격포를 쏘는 등 테러행위를 자행했다. 또한 1896년에 개관하여 보스니아에 남은 오스만 제국 문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양한 문서가 보존된 국립도서관이 소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보스니아 전역에서 25~30만명이 숨지고 '나치의 대학살'에 비유될 만큼 참혹했다. 민족과 종교의 갈등으로 전쟁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전투가 아닌 인종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대량학살로 사망했다. 또한 보스니야계 주민들을 가둬두었던 사라예보 인근마을인 그르바비차에서는 계획적으로 2만명의 여성이 집단강간을 당했다.
내전이 격화하자 나토(NATO)가 인종 청소를 벌이는 등 만행을 자행하던 세르비아계 군대를 공습하는 등 국제사회가 개입했다.
결국 1995년 12월 14일 미국의 중재로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서 협정이 체결되어 세르비아계(스릅스카 공화국)과 크로아티아계-보슈냐크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하나의 연방내에서 공존하는 1국가 2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관련영화] 그르바비차(Grbavica) : 2006년 공개. 2006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 내용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살고 있는 12세난 소녀 사라가 자신이 전쟁영웅의 딸이 아니라 세르비아군의 강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 장르 : 드라마, 90분
- 감독 : 야스밀라 즈바닉(Jasmila Zbanic)
- 주연 : 미르야나 카라노비치(Mirjana Karanovic 에스마 역), 루나 미조빅(Luna Mijovic, 사라 역), 레온 루체프(Leon Lucev, 펠다 역)
[1] 라도반 카라지치(Radovan Karadžić, 1945년~) : 스릅스카 공화국의 제1대 대통령(1992년~1996년).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대학살을 주도한 전쟁범죄자로 1995년 보스니아 전쟁이 종전되자 종적을 감추었다. 이후 전쟁 범죄자로 지명 수배중에 2008년 7월 체포되어 2016년 1심재판 징역 40년, 1019년 2심 재판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 세르비아계 자치공화국
[3]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 1941년~2006년)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1997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3대 대통령(1997년~2000년). 세르비아인이 아닌 타 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갖은 만행을 주도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 행위로 유고연방 대통령에서 사임하고 2001년에 부정부패, 권력남용, 횡령혐의 및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중에 2006년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분열로 1990년에 연방 구성국인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을 하였다. 이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도 독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보스니아의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독립에 찬성하였으나 세르비아계는 연방 잔류를 원하면서 분란이 시작되었다.
1992년 2월 29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독립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분리 독립을 반대한 세르비아계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투표결과 독립찬성으로 나오자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선포하고 유고 연방으로 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세르비아계는 반발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세르비아계의 [1]라도반 카라지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내 [2]스릅스카 공화국을 세우고 유고연방의 [3]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지원으로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세르비아계군에 의해 1992년 4월 6일부터 43~44개월간 봉쇄된 사라예보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으며 도시내에서 포격과 저격으로 무고한 시민 1만 6천여명이 사망했다. 사라예보로 들어가는 식량과 의약품 보급을 차단한 뒤 언덕마다 저격수를 배치해 민간인을 사살하고 박격포를 쏘는 등 테러행위를 자행했다. 또한 1896년에 개관하여 보스니아에 남은 오스만 제국 문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양한 문서가 보존된 국립도서관이 소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보스니아 전역에서 25~30만명이 숨지고 '나치의 대학살'에 비유될 만큼 참혹했다. 민족과 종교의 갈등으로 전쟁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전투가 아닌 인종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대량학살로 사망했다. 또한 보스니야계 주민들을 가둬두었던 사라예보 인근마을인 그르바비차에서는 계획적으로 2만명의 여성이 집단강간을 당했다.
내전이 격화하자 나토(NATO)가 인종 청소를 벌이는 등 만행을 자행하던 세르비아계 군대를 공습하는 등 국제사회가 개입했다.
결국 1995년 12월 14일 미국의 중재로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서 협정이 체결되어 세르비아계(스릅스카 공화국)과 크로아티아계-보슈냐크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하나의 연방내에서 공존하는 1국가 2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관련영화] 그르바비차(Grbavica) : 2006년 공개. 2006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 내용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살고 있는 12세난 소녀 사라가 자신이 전쟁영웅의 딸이 아니라 세르비아군의 강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 장르 : 드라마, 90분
- 감독 : 야스밀라 즈바닉(Jasmila Zbanic)
- 주연 : 미르야나 카라노비치(Mirjana Karanovic 에스마 역), 루나 미조빅(Luna Mijovic, 사라 역), 레온 루체프(Leon Lucev, 펠다 역)
[1] 라도반 카라지치(Radovan Karadžić, 1945년~) : 스릅스카 공화국의 제1대 대통령(1992년~1996년).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대학살을 주도한 전쟁범죄자로 1995년 보스니아 전쟁이 종전되자 종적을 감추었다. 이후 전쟁 범죄자로 지명 수배중에 2008년 7월 체포되어 2016년 1심재판 징역 40년, 1019년 2심 재판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 세르비아계 자치공화국
[3]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 1941년~2006년)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1997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3대 대통령(1997년~2000년). 세르비아인이 아닌 타 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갖은 만행을 주도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 행위로 유고연방 대통령에서 사임하고 2001년에 부정부패, 권력남용, 횡령혐의 및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중에 2006년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사태(1992 Los Angeles Riots, Rodney King Riots, South Central Riots, 1992 Los Angeles Civil Disturbance, 1992 Los Angeles Civil Unrest)는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인종차별에 격분한 흑인들에 의해 발생한 유혈사태였다.
사건의 발단은 미국 LA 경찰청 4명의 경찰관들이 과속으로 운전한 흑인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집단으로 폭행을 가하였다.
이러한 경찰관들의 집단폭행으로 로드니 킹은 평생 청각장애인이 되었을 정도로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관들의 무죄가 판결나면서 흑인사회에서 잠재되었던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가 폭발되었다.
분노는 시위로 번졌고 급기야 6일동안 폭동으로 변해갔고 곳곳에 방화 및 약탈, 총격전이 벌어지며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폭동이 일어난 지점과 그 인근에는 코리아타운이 있었으며 사건의 발생 과정에서 흑인들의 한인 반감이 더해지면서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90%가 파괴되어 한인들은 정신적 충격과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LA한인 사회에서는 지금도 이 사건을 '사이구(4.29)'라고 불리고 있으며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이 폭동으로 재산 피해액이 약 10억 달러 이상, 총 50여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미국 인종차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사건의 발단은 미국 LA 경찰청 4명의 경찰관들이 과속으로 운전한 흑인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집단으로 폭행을 가하였다.
이러한 경찰관들의 집단폭행으로 로드니 킹은 평생 청각장애인이 되었을 정도로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관들의 무죄가 판결나면서 흑인사회에서 잠재되었던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가 폭발되었다.
분노는 시위로 번졌고 급기야 6일동안 폭동으로 변해갔고 곳곳에 방화 및 약탈, 총격전이 벌어지며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폭동이 일어난 지점과 그 인근에는 코리아타운이 있었으며 사건의 발생 과정에서 흑인들의 한인 반감이 더해지면서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90%가 파괴되어 한인들은 정신적 충격과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LA한인 사회에서는 지금도 이 사건을 '사이구(4.29)'라고 불리고 있으며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이 폭동으로 재산 피해액이 약 10억 달러 이상, 총 50여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미국 인종차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역사와 전통, 민족이 다른 두 개의 국가였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항복으로 헝가리의 지배를 받아왔던 슬로바키아는 체코와 연합하여 체코슬로바키아라는 하나의 나라로 독립되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약 1천여년간 서로 다른 역사속에서도 [2] 슬라브민족이라는 동질감과 언어적 유사성으로 교류와 연대를 유지해왔으며 두 민족이 가진 이해관계를 통해 하나의 나라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 경제, 문화적 차이가 크다는 것을 느낀 두 민족은 갈라서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면서 다시 하나의 국가로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서서히 파고 들어온 공산주의와 친소련 정책으로 공산화되어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당의 독재가 지속된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1969년 정치개혁을 통하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연방화를 시행하게 된다.
1989년 11월 40여년 동안 지속되어 온 공산정권과 소련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동유럽 국가들의 혁명이 일어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3] 벨벳혁명으로 민주주의 체제의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이 탄생한다. 그러나 벨벳혁명이후 급속한 개혁의 추진은 또 다시 민족 문제를 야기시킨다. 개혁의 부작용이 슬로바키아인들의 불만을 고조시킨다.
또한 노선과 방향이 판이하게 다른 두 정당이 연방의회를 이끌게 되면서 상호 알력과 반목은 점점 커지게 되었다. 결국 두 정당은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 해체를 합의하게 되면서 1993년 1월1일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으로 나뉜다.
비폭력 혁명으로 공산정권을 무너뜨린 벨벳혁명처럼 두 국가의 분리가 평화롭게 진행되어 '벨벳이혼'이라고도 불린다.
수십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두 국가는 매우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4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유로에 가입했다.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중앙유럽에 존재했던 입헌군주제 국가이며 합스부르크 왕조가 다스렸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해체되었다
[2] 슬라브(Slavs)족 : 동슬라브족(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서슬라브족(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남슬라브족(불가리아,보스니아,슬로베니아,세르비아,크로아티아)
[3] 벨벳혁명(1989년 11월 17일~1989년 12월 29일) : 1989년 평화적인 시위로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고 정권 교체를 이뤄낸 무혈혁명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약 1천여년간 서로 다른 역사속에서도 [2] 슬라브민족이라는 동질감과 언어적 유사성으로 교류와 연대를 유지해왔으며 두 민족이 가진 이해관계를 통해 하나의 나라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 경제, 문화적 차이가 크다는 것을 느낀 두 민족은 갈라서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면서 다시 하나의 국가로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서서히 파고 들어온 공산주의와 친소련 정책으로 공산화되어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당의 독재가 지속된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1969년 정치개혁을 통하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연방화를 시행하게 된다.
1989년 11월 40여년 동안 지속되어 온 공산정권과 소련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동유럽 국가들의 혁명이 일어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3] 벨벳혁명으로 민주주의 체제의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이 탄생한다. 그러나 벨벳혁명이후 급속한 개혁의 추진은 또 다시 민족 문제를 야기시킨다. 개혁의 부작용이 슬로바키아인들의 불만을 고조시킨다.
또한 노선과 방향이 판이하게 다른 두 정당이 연방의회를 이끌게 되면서 상호 알력과 반목은 점점 커지게 되었다. 결국 두 정당은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 해체를 합의하게 되면서 1993년 1월1일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으로 나뉜다.
비폭력 혁명으로 공산정권을 무너뜨린 벨벳혁명처럼 두 국가의 분리가 평화롭게 진행되어 '벨벳이혼'이라고도 불린다.
수십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두 국가는 매우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4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유로에 가입했다.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중앙유럽에 존재했던 입헌군주제 국가이며 합스부르크 왕조가 다스렸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해체되었다
[2] 슬라브(Slavs)족 : 동슬라브족(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서슬라브족(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남슬라브족(불가리아,보스니아,슬로베니아,세르비아,크로아티아)
[3] 벨벳혁명(1989년 11월 17일~1989년 12월 29일) : 1989년 평화적인 시위로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고 정권 교체를 이뤄낸 무혈혁명
오슬로 협정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갈등과 분쟁을 계속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분쟁을 종식키로 한 평화협정이다.
1993년 8월 20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비밀리에 만나 팔레스타인 자치안에 합의한 후, 곧이어 9월 13일 워싱턴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주재하에 이스라엘 [1]라빈 총리와 [3]아라파트 [4]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합의안에 서명함으로써 두 민족간 평화와 공존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3]아라파트 의장과 [1]라빈 총리, 그리고 협상에 참여한 이스라엘 외무장관 [2]시몬 페레스는 이 협정 체결로 19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등 점령지를 반환해 팔레스타인 자치국가를 설립을 허용하는 대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투쟁을 포기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6]예리코에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어 1996년 1월 아라파트 PLO 의장이 [5]자치정부(PA) 초대수반으로 선출되었다. 서명 당사자인 이스라엘 [1]라빈 총리가 1995년 11월 4일에 협정을 반대하는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하고, 팔레스타인도 1996년 강경파인 [7]하마스의 자살폭탄 테러가 계속되는 등 위기가 이어졌지만, 2000년 중반까지 서안의 40%, 가자지구의 65%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직접 또는 부분적인 관할로 이양되었다.
이처럼 오슬로 협정은 역사적 합의였음은 분명하지만 불행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는 이후 획기적으로 전환되지는 못했다.
자치정부의 최종성격인 동예루살렘의 지위, 유대인정착촌,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 이스라엘군의 재배치와 철수등을 다루는 최종지위협상이 2000년 7월 결렬되고 9월에는 팔레스타인 제2차 인티파다가 발생하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요르단 강 서안지지구와 가자 지구의 자치를 하고 있을 뿐, 점령지로부터의 이스라엘군 철수, 점령지 반환, 자치권 확대 등 구체적인 이행은 아무런 진전이 없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이스라엘은 물론 예루살렘, 서안, 가자지구에서는 양측의 유혈 충돌과 자살 폭탄·흉기 공격 사건이 지속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령인 서안 지역에서 유대인 정착촌은 계속 확장됐다.
현재 서안지구의 구분을 보면 팔레스타인이 온전히 행정과 보안을 관할하는 지역은 18%이며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공동지역)는 22%, 이스라엘이 완전히 통제하는 지역은 60%이다.
[1]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년~1995년): 이스라엘의 17대(재임 1974년 6월 3일~1977년 6월 20일), 25대 총리(1992년 7월 13일~1995년 11월 4일)
[2]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1923년~2016년) : 이스라엘의 제9대 대통령(재임 2007년 7월 15일~2014년 7월 24일),
[3]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년~2004년)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임기 1994년 7월 5일~2004년 11월 11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3대 의장(임기 1969년 2월 4일~2004년 10월 29일)
[4]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 1964년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 설립된 단체
[5]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PNA, Palestine National Authority) : PLO가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여 국제연합 옵서버 국가로 인정받으면서 2013년에 팔레스타인의 정부로 바꾸고 독립했다.
[6] 예리코(Jericho) :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BC 9000년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 행정 구역상으로는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속하며 예리코주의 주도이다
[7]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1993년 8월 20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비밀리에 만나 팔레스타인 자치안에 합의한 후, 곧이어 9월 13일 워싱턴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주재하에 이스라엘 [1]라빈 총리와 [3]아라파트 [4]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합의안에 서명함으로써 두 민족간 평화와 공존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3]아라파트 의장과 [1]라빈 총리, 그리고 협상에 참여한 이스라엘 외무장관 [2]시몬 페레스는 이 협정 체결로 19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등 점령지를 반환해 팔레스타인 자치국가를 설립을 허용하는 대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투쟁을 포기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6]예리코에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어 1996년 1월 아라파트 PLO 의장이 [5]자치정부(PA) 초대수반으로 선출되었다. 서명 당사자인 이스라엘 [1]라빈 총리가 1995년 11월 4일에 협정을 반대하는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하고, 팔레스타인도 1996년 강경파인 [7]하마스의 자살폭탄 테러가 계속되는 등 위기가 이어졌지만, 2000년 중반까지 서안의 40%, 가자지구의 65%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직접 또는 부분적인 관할로 이양되었다.
이처럼 오슬로 협정은 역사적 합의였음은 분명하지만 불행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는 이후 획기적으로 전환되지는 못했다.
자치정부의 최종성격인 동예루살렘의 지위, 유대인정착촌,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 이스라엘군의 재배치와 철수등을 다루는 최종지위협상이 2000년 7월 결렬되고 9월에는 팔레스타인 제2차 인티파다가 발생하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요르단 강 서안지지구와 가자 지구의 자치를 하고 있을 뿐, 점령지로부터의 이스라엘군 철수, 점령지 반환, 자치권 확대 등 구체적인 이행은 아무런 진전이 없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이스라엘은 물론 예루살렘, 서안, 가자지구에서는 양측의 유혈 충돌과 자살 폭탄·흉기 공격 사건이 지속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령인 서안 지역에서 유대인 정착촌은 계속 확장됐다.
현재 서안지구의 구분을 보면 팔레스타인이 온전히 행정과 보안을 관할하는 지역은 18%이며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공동지역)는 22%, 이스라엘이 완전히 통제하는 지역은 60%이다.
[1]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년~1995년): 이스라엘의 17대(재임 1974년 6월 3일~1977년 6월 20일), 25대 총리(1992년 7월 13일~1995년 11월 4일)
[2]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1923년~2016년) : 이스라엘의 제9대 대통령(재임 2007년 7월 15일~2014년 7월 24일),
[3]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년~2004년)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임기 1994년 7월 5일~2004년 11월 11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3대 의장(임기 1969년 2월 4일~2004년 10월 29일)
[4]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 1964년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 설립된 단체
[5]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PNA, Palestine National Authority) : PLO가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여 국제연합 옵서버 국가로 인정받으면서 2013년에 팔레스타인의 정부로 바꾸고 독립했다.
[6] 예리코(Jericho) :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BC 9000년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 행정 구역상으로는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속하며 예리코주의 주도이다
[7]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경에 서울특별시의 한강을 가로지르는 11번째 교량인 성수대교의 제10·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가 붕괴해 일어난 사고이며 17명이 다치고 32명이 사망하여 총 49명의 사상자를 냈다.
1995년 4월 26일에 현대건설이 재건설을 시작하였고 1997년 6월에 완공하여 1997년 7월 3일에 재개통되었다.
* 1977년 4월 착공하여 1979년 10월 16일 최초로 준공
1995년 4월 26일에 현대건설이 재건설을 시작하였고 1997년 6월에 완공하여 1997년 7월 3일에 재개통되었다.
* 1977년 4월 착공하여 1979년 10월 16일 최초로 준공
1995년 4월 28일 오전 7시 52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에서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상인역 공사장에서 일어난 가스폭발 사고이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에 들어설 예정으로 지반 공사 중이던 대구백화점 상인지점 신축공사 작업중 도사가스관이 파손되어 유출된 가스가 하수관을 통해 대구 지하철 1호선 상인역 공사장으로 유입되었고 한동안 괴어 있다가 원인불명으로 폭발한 사고이다.
이 폭발 사고로 사망 101명, 부상 202명의 인명피해와 건물 346개소 부분파손, 차량 150대 파손, 지하철공사장 및 현장주변시설물 파손 등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에 들어설 예정으로 지반 공사 중이던 대구백화점 상인지점 신축공사 작업중 도사가스관이 파손되어 유출된 가스가 하수관을 통해 대구 지하철 1호선 상인역 공사장으로 유입되었고 한동안 괴어 있다가 원인불명으로 폭발한 사고이다.
이 폭발 사고로 사망 101명, 부상 202명의 인명피해와 건물 346개소 부분파손, 차량 150대 파손, 지하철공사장 및 현장주변시설물 파손 등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경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사건으로 백화점 건물이 무너지면서 1,445명의 종업원과 고객들이 부상당하거나 사망하였다(사망자:502명, 부상자:937명, 실종:6명)
붕괴의 원인이 비리와 갑질로 얼룩진 부실공사로 밝혀지면서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함께 안전불감증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었고 전국적인 건축물 안전실태 조사와 건축법의 강화 계기가 되었다.
삼풍백화점은 1987년 5월 착공하여 1989년 12월 1일 개장하였으며 당시 전국 2위 규모의 단일매장이었다.
붕괴의 원인이 비리와 갑질로 얼룩진 부실공사로 밝혀지면서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함께 안전불감증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었고 전국적인 건축물 안전실태 조사와 건축법의 강화 계기가 되었다.
삼풍백화점은 1987년 5월 착공하여 1989년 12월 1일 개장하였으며 당시 전국 2위 규모의 단일매장이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은 1991년 10월 15일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한 후 세르비아계는 연방 잔류를 원하면서 [2]스릅스카 공화국을 결성해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 민족은 각 종교에 따라 크게 보스니아 무슬림,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 가톨릭의 크로아티아인 등으로 나눠지는 데, 과거 역사 속에서 이들은 혼란이 대두될 때마다 서로 간의 인종 청소 및 종교 개종을 강요해 왔었다. 즉 과거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공포는 서로 간의 불신과 집단적 자위 의식을 낳았으며, 이러한 점이 바로 이 지역 내 내전이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장기간, 잔인하게 이어진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스레브레니차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부의 스릅스카 공화국에 속하는 산악 마을로 보스니아 전쟁 종료 이전까지 이 지역의 주된 민족은 무슬림인이었다.
보스니아 내전 중인 1995년 7월 세르비아 스릅스카 민병대가 UN 안전지역으로 지정된 스레브레니차 마을에서 8,000여명의 보스니아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으로서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구 유고전범재판소에서 처형장면이 재판과정에서 공개되면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UN 평화유지군으로서 400명의 네덜란드군 중 150여명의 병력이 약 4만명의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집단 난민 지역이자 UN이 안전지역으로 설정한 스레브레니차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델란드군은 학살이 일어나기 직전 이미 30여명이 세르비아 스릅스카 민병대에 의해 포로로 잡히는 등 난민들을 보호하고 안전지대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어 1995년 7월부터 세르비아 민병대의 본격적인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자, 스레브레니차 주둔 네덜란드군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UN군 소속 네덜란드 공군을 통해 공습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7월 11일 네덜란드군 소속 F-16기 두 대의 공습 이후, 추가 공습시 30명의 네덜란드군 포로들을 사살하겠다는 세르비아 측의 경고에 따라 이 공습 또한 중단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결국 네덜란드군은 규모상 스릅스카 반군과 저항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난민들을 보호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그 결과 UN이 정한 안전지내에서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한 보스니아 무슬림의 대량 학살이 자행되는 참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세르비아 스릅스카 민병대는 인종 청소의 일환으로 곳곳에서 무슬림 난민의 남성과 소년들을 골라 처형했다. 불도저로 흙을 파낸 뒤 수천명의 시신을 암매장했다. 여성들과 소녀들은 인종 정화를 명분으로 강간 피해를 당한 뒤 사살당했다.
비공식적 통계에 따르면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 당시 희생자 수는 25,000명~30,000명에 달한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유럽의 킬링필드라고 불리며 '인종청소'라는 명목하에 세브비아인들에 의해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학살로 비난받고어 있다.
보스니아 실종자 관련 연방위원회가 발표한 학살 피해자로 집계된 공식 실종자 및 사망자는 총 8,372명이 확인되어 있으며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계속 추가될 예정이다.
참고문헌 :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 대학살, 그 배경과 교훈, 김철민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학대학 교수), 작성일: 2013년 8월 19일
[1] 스레브레니차(Srebrenic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도시
[2]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구성하고 있는 세르비아계 자치 공화국 공화국.국명인 스릅스카(Српска)는 세르비아인에 접미사 '-ска'가 붙은 형태의 단어로 '세르비아인의 땅'을 의미한다. 1992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이 반발하여 스릅스카 공화국을 결성해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3] 라트코 믈라디치(Ratko Mladić, 1943년 ~) : 유고슬라비아 및 스릅스카 공화국의 군인이으로 보스니아 내전 당시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주도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라도반 카라지치와 함께 보스니아 내전의 최고위 전범 3명 중 한 명이다. 2011년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보스니아 민족은 각 종교에 따라 크게 보스니아 무슬림,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 가톨릭의 크로아티아인 등으로 나눠지는 데, 과거 역사 속에서 이들은 혼란이 대두될 때마다 서로 간의 인종 청소 및 종교 개종을 강요해 왔었다. 즉 과거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공포는 서로 간의 불신과 집단적 자위 의식을 낳았으며, 이러한 점이 바로 이 지역 내 내전이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장기간, 잔인하게 이어진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스레브레니차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부의 스릅스카 공화국에 속하는 산악 마을로 보스니아 전쟁 종료 이전까지 이 지역의 주된 민족은 무슬림인이었다.
보스니아 내전 중인 1995년 7월 세르비아 스릅스카 민병대가 UN 안전지역으로 지정된 스레브레니차 마을에서 8,000여명의 보스니아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으로서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구 유고전범재판소에서 처형장면이 재판과정에서 공개되면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UN 평화유지군으로서 400명의 네덜란드군 중 150여명의 병력이 약 4만명의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집단 난민 지역이자 UN이 안전지역으로 설정한 스레브레니차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델란드군은 학살이 일어나기 직전 이미 30여명이 세르비아 스릅스카 민병대에 의해 포로로 잡히는 등 난민들을 보호하고 안전지대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어 1995년 7월부터 세르비아 민병대의 본격적인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자, 스레브레니차 주둔 네덜란드군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UN군 소속 네덜란드 공군을 통해 공습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7월 11일 네덜란드군 소속 F-16기 두 대의 공습 이후, 추가 공습시 30명의 네덜란드군 포로들을 사살하겠다는 세르비아 측의 경고에 따라 이 공습 또한 중단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결국 네덜란드군은 규모상 스릅스카 반군과 저항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난민들을 보호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그 결과 UN이 정한 안전지내에서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한 보스니아 무슬림의 대량 학살이 자행되는 참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세르비아 스릅스카 민병대는 인종 청소의 일환으로 곳곳에서 무슬림 난민의 남성과 소년들을 골라 처형했다. 불도저로 흙을 파낸 뒤 수천명의 시신을 암매장했다. 여성들과 소녀들은 인종 정화를 명분으로 강간 피해를 당한 뒤 사살당했다.
비공식적 통계에 따르면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 당시 희생자 수는 25,000명~30,000명에 달한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유럽의 킬링필드라고 불리며 '인종청소'라는 명목하에 세브비아인들에 의해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학살로 비난받고어 있다.
보스니아 실종자 관련 연방위원회가 발표한 학살 피해자로 집계된 공식 실종자 및 사망자는 총 8,372명이 확인되어 있으며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계속 추가될 예정이다.
참고문헌 :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 대학살, 그 배경과 교훈, 김철민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학대학 교수), 작성일: 2013년 8월 19일
[1] 스레브레니차(Srebrenic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도시
[2]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구성하고 있는 세르비아계 자치 공화국 공화국.국명인 스릅스카(Српска)는 세르비아인에 접미사 '-ска'가 붙은 형태의 단어로 '세르비아인의 땅'을 의미한다. 1992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이 반발하여 스릅스카 공화국을 결성해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3] 라트코 믈라디치(Ratko Mladić, 1943년 ~) : 유고슬라비아 및 스릅스카 공화국의 군인이으로 보스니아 내전 당시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주도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라도반 카라지치와 함께 보스니아 내전의 최고위 전범 3명 중 한 명이다. 2011년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1995년 10월 28일 아제르바이잔 바쿠(Baku)에서 운행되고 있던 바쿠 지하철의 울두즈(Ulduz)역과 나리만 나리마노프(Neriman Nerimanov)역 사이에서 발생한 화재이다. 이 화재로 289명이 사망하고 270명이 부상을 입었다.
* 바쿠(Baku) : 아제르바이잔 수도. 카스피 해의 최대 항구 도시
* 바쿠(Baku) : 아제르바이잔 수도. 카스피 해의 최대 항구 도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평화를 위한 기본협정으로 도시의 이름을 따서 [1]데이턴 협정으로 부르며 이 협정을 체결하면서 보스니아 전쟁이 종결되었다.
1995년 11월 21일, 미국이 주도한 데이턴 협정이 타결되고 12월 14일 파리에서 협정이 공식 조인됨으로써 발칸 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보스니아 전쟁이 끝났다. 협정 당사자이면서 참석자는 [2]슬로보단 밀로셰비치, [3]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4]프라뇨 투지만이었다.
이 협정으로 세르비아인을 중심으로 한 스르프스카 공화국과 보스니아 이슬람교도와 크라아티아인으로 구성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으로 구성된 1국가 2체제 형태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 협정에 의거해서 이슬람인 보스니아계와 카톨릭인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 정교인 세르비아계에서 선출된 세 명의 대통령이 8개월마다 번갈아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는 특이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1] 데이턴(Dayton) : 미국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도시
[2]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 1941년~2006년)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1997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3대 대통령(1997년~2000년)
[3]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Alija Izetbegovic, 1925년~2003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초대 대통령
[4]프라뇨 투지만(Franjo Tudjman, 1922년~1999년) :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독립한 크로아티아 초대 대통령
1995년 11월 21일, 미국이 주도한 데이턴 협정이 타결되고 12월 14일 파리에서 협정이 공식 조인됨으로써 발칸 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보스니아 전쟁이 끝났다. 협정 당사자이면서 참석자는 [2]슬로보단 밀로셰비치, [3]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4]프라뇨 투지만이었다.
이 협정으로 세르비아인을 중심으로 한 스르프스카 공화국과 보스니아 이슬람교도와 크라아티아인으로 구성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으로 구성된 1국가 2체제 형태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 협정에 의거해서 이슬람인 보스니아계와 카톨릭인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 정교인 세르비아계에서 선출된 세 명의 대통령이 8개월마다 번갈아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는 특이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1] 데이턴(Dayton) : 미국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도시
[2]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 1941년~2006년)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1997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3대 대통령(1997년~2000년)
[3]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Alija Izetbegovic, 1925년~2003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초대 대통령
[4]프라뇨 투지만(Franjo Tudjman, 1922년~1999년) :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독립한 크로아티아 초대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