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호 침몰사건(浮島丸號沈沒事件)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사건기간 : 1945년 8월 24일, 조회수 : 103,   등록일 : 2025-11-02
1945년 일본 패망 직후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던 조선인들은 일본 당국의 수송에 의존해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우키시마호는 1937년에 건조되어 평시 여객선으로 운항하다가 전시에는 일본 해군의 수송선으로 쓰인 배였으며 1945년 8월 22일 훗카이도 부근에 있는 [1]오미나토 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일본 측에서 발표한 탑승자 수는 약 3,700여 명의 조선인과 수백 명의 일본 선원·승무원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생존자 증언과 한국 측 민간 조사에서는 훨씬 많은 인원인 5,000명에서 8,000명사이 탑승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8월 24일 우키시마호는 원래 항로에서 벗어나 일본 중부 연안의 교토부 [2]마이즈루 만으로 들어갔다. 17시 20분경 마이즈루 만에 진입한 직후 선체 내부에서 강력한 폭발이 발생했고 배는 두 동강 나듯이 찢기며 중앙부터 서서히 침몰하였다. 침몰 지점은 연안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지만 해저의 수심과 해역의 지형 때문에 많은 사람이 빠져나오지 못해 사망했다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전해진다.
 
사망자 수와 사건의 원인에 관해서는 심각한 이견이 존재한다. 일본 정부의 초기 공식 집계는 한국인 약 524명과 일본인 약 25명의 사망을 보고했으나 생존자 증언과 한국 언론·연구자들은 탑승자가 훨씬 많았고 사망자 수가 4,000명에서 7,000명 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사건 원인 규명은 오랜 기간 논쟁거리로 남았다. 일본 측은 이후 해당 사고를 "미국이 설치한 기뢰에 의한 우연한 폭발"로 설명해 왔지만 생존자들과 일부 연구자들은 선박 내부에 폭발물을 설치하여 고의로 폭침시켰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의혹을 뒷받침하는 주장으로는 출항 전·중 선박의 행적과 군 관계자들의 행동, 일부 승무원의 구명정을 타고 조기 탈출했다는 증언등이 제시되어 왔다. 
 
미 점령군과 초기 조사에서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추가 조사 진행을 제한한 기록이 있어 완전한 진상 규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연구 보고서들이 있다.
 
기뢰에 의해 폭발되었다면 폭발된 선체의 철판이 바깥에서 안쪽으로 휘어 있어야 하는데, 9년후인 1954년에 우키시마호를 인양해서 확인해 보니 폭발된 배의 철판이 선체안에서 바깥으로 휘어 있었다고 한다. 2차대전 패전후 재건이 필요한 일본이 고철을 팔기 위해서 인양했다고 하며, 인양당시에 수백구의 백골이 나왔다고 한다.
 
우키시마호에 탑승했던 승객들 중에는 조선인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시설, 문건등 기밀들을 외부에 유출을 막고자 고의로 침몰시켰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패전당시의 [1]오미나토 지역은  러시아의 사할린섬과 가까웠으며 전투기지를 구축하기 위하여 수 많은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최근에 일본·한국 양국의 자료 일부가 재검토되거나 새로운 증언이 밝혀지기도 했고 한국 정부와 시민사회의 요구로 부분적 탑승자 명단이 제공되는 등 추가적 사실 확인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우키시마호 사건은 조선인들의 귀환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이었으며 강제동원과 전시 인력 이동의 비인간적 실태와 전후 처리 과정에서 책임 소재와 역사적 기억이 어떻게 쟁점화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 오미나토 : 일본 혼슈 아오모리현 시모키타 반도 북단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역사적으로 해군의 전략적 요충지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해상자위대의 기지가 위치해 있으며, 민간항과 군항이 공존하는 지역으로 남아 있다
[2] 마이즈루 : 일본 교토부 북부에 위치한 항만도시. 현재는 해상자위대의 기지이자 상업 항만으로 기능하며, 과거 군사도시의 유산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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