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辛未洋擾, United States expedition to Korea)

미국 대한민국 사건기간 : 1871년 6월 1일 ~ 1871년 6월 11일, 조회수 : 221,   등록일 : 2020-03-04
신미양요는 미국이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해 벌인 무력 침략 사건이다. '신미'는 간지 연도인 1871년을 의미하고, '양요'는 서양 오랑캐들이 일으킨 난리를 뜻한다.
 
사건의 발단은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었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 정부의 허가 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침입했으며, 통상을 강요하고 무력으로 대응하다 조선 관민의 저항으로 불에 타 침몰되었다. 이후 미국은 이를 빌미로 조선의 사과와 개항을 요구하며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이에 미국은 무력 시위를 통해 조선을 굴복시키려 했다.
 
1871년 5월 14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항한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1]존 로저스 제독은 대규모 병력과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인근 조선 해역에 나타났다. 그는 통상 요구 및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 규명을 위해 조선 정부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조선은 강경한 쇄국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고 외국 선박의 접근을 금지한 상황이었다. 결국 미군은 6월 1일에 강화도에 접근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미군은 6월 10일 [6]초지진, [7]덕진진 등을 차례로 점령한 후 가장 강력한 방어선이던 [2]광성보에 도달했다. 광성보 전투는 신미양요의 최대 격전지로 [3]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결사항전을 펼쳤다. 그러나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화력 앞에 무너졌고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 다수의 조선군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조선군 어재연 [5]장군기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는데 미국 [4]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다가 2007년부터 국내로 반환되어 강화전쟁박물관에 보관되었었다. 그러다 2024년 3월에 다시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반납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본격적인 개항 요구를 준비했지만 조선 정부는 끝까지 교섭을 거부하고 완강한 쇄국 정책으로 아무런 협상을 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강화하였다.
 
신미양요는 조선이 서구 열강의 무력 개항 압력에 정면으로 저항했던 사건으로 당시 조선의 군사력 한계와 근대화의 필요성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국권 수호를 위한 민족적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한말 의병운동 등 근대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 되었다.
 
[1] 존 로저스(John Rodgers,1812년 8월 8일 ~ 1882년 5월 5일) : 남북 전쟁 당시 북군 해군으로 활약한 미국의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해군 소장이었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군 지휘관이었다
[2] 광성보(廣城堡)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효종 9년(1658)에 강화도 방비를 위해 해안가에 설치된 12진보중 하나
[3] 어재연(魚在淵, 1823년~1871년)은 조선 말기의 무신.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미군과 치열한 전투중에 전사하였다. 그해 5월 3일에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4] 아나폴리스(Annapolis) : 미국 메릴랜드주의 주도이다. 미국 해군사관학교의 소재지
[5] 장군기 :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수비하던 진무영 중군 어재연이 사용한 군기로 일명 수자기(帥字旗)로도 알려져 있다. '수(帥)'는 '장수, '장군', '우두머리' 등을 상징하는 뜻을 갖고 있다
[6] 초지진(草芝鎭)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하고 1679년 조선 숙종때 성으로 지은 요새이다. 1971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7] 덕진진(德津鎭)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조선시대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1971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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