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칭 대공습(Bombing of Chongqing)

일본 중국 사건기간 : 1938년 2월 18일~1943년 8월 13일, 조회수 : 349,   등록일 : 2025-07-27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하면서 일본군은 빠르게 북중국과 동부 해안 지역을 점령하였다.
 
중국 국민당은 수도인 난징이 점령 당하자 1937년 11월 20일에 내륙 깊숙한 충칭으로 옮겨 저항을 지속하였다. 일본은 국민당 정권의 중심이 된 충칭을 군사적, 정치적, 심리적 타격의 대상으로 판단하고 공군력을 집중하여 공습을 감행하였다. 이 폭격으로 충칭은 역사상 최장 기간 동안 전략 폭격을 당한 도시가 되었다. 또 충칭에 있었던 1,200년 된 종루와 고건축물들이 모조리 파괴되거나 불타 사라져 버렸다.
 
공습은 1938년 2월 18일 소규모 폭격으로 시작되었으며 본격화된 것은 1939년 이후였다. 특히 1940년부터 1941년 사이에는 "백일 공습"이라 불릴 정도로 지속적이고 집요한 폭격이 이어졌고 1943년까지 총 268회 이상의 대규모 공습이 이루어졌다. 이 공습으로 사상자수는 출처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11,800명 이상, 부상자 14,100명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군은 주로 해군 항공대를 동원하였으며 한 번의 공습에 수십 대에서 백여 대에 이르는 폭격기를 투입하였다.
 
충칭 시내의 산업시설, 정부기관, 군사시설뿐 아니라 병원, 학교, 시장, 주거지역 등 비군사적 목표까지 폭격 대상으로 삼아 막대한 인명 피해와 물적 피해를 초래하였다.
 
피난이 가능한 모든 장소에는 이미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피난민이 밀집한 곳마다 일본군의 폭격이 쏟아졌다. 충칭 도처에는 시신과 폐허만이 남아 있었고 일시적인 지위나 재산 따위로는 결코 생명을 보전할 수 없었다.
 
당시 충칭은 협소한 지형과 밀집된 건축 구조로 인해 폭격의 피해가 더욱 심각했다. 특히 일본은 고도 3,000m 이상의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고공폭격을 주로 사용하였고 대피소 부족과 화재 진압의 어려움으로 인해 공습 한 차례마다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1941년 6월 5일 대공습이었다. 이날 공습으로 [1]소이탄과 [2]고폭탄이 근처에 떨어지면서 주민 수천명이 터널안으로 피신하였는데 유독가스가 유입되었다. 입구 대부분이 폐쇄되거나 붕괴되면서 내부의 인원들은 탈출할 수 없었고 무려 4,000명 이상이 터널안에서 질식사했다. 이는 공습 자체보다 터널 내에서 사망자가 더 많았다.
 
이와 같은 공습은 단순한 군사적 작전이 아니라 중국 국민의 사기를 꺾고 국민당 정부의 항전을 무력화시키려는 심리전적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충칭 시민들과 국민당 정부는 더욱 강한 저항 의지를 다졌고 중국 전역의 항일 분위기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충칭대공습은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도시폭격이자 전시중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격으로 국제사회에서도 비판을 받고있다.
 
[1] 소이탄(incendiary bomb) : 불을 내는 데 특화된 무기로 내부에 인화성이 강한 물질을 넣어 투하 시 광범위하게 화재를 유발한다. 주로 목조건물이나 밀집된 도시 지역을 불태워 지속적인 화재를 일으킨다
[2] 고폭탄(high-explosive bomb) : 폭발력을 이용해 파괴를 목적으로 한다. 폭발 시 강력한 충격파와 파편을 발생시켜 건물, 교량, 활주로, 군사 시설 등을 무너뜨리는 데 사용된다. 위력적인 폭발로 인해 인명 피해도 크며, 군사뿐 아니라 민간 시설에도 막대한 피해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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