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시국튀르키예이탈리아스페인사건기간 : 1571년 10월 7일, 조회수 : 198, 등록일 : 2025-01-30
레판토 해전은 16세기 후반, 지중해 패권을 둘러싸고 기독교 국가 연합군([2]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해군이 벌인 역사적인 해전이다.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의 해상 확장을 저지하고 유럽 기독교 세력이 단결하여 거둔 중요한 승리로 평가된다. 전투는 오늘날 그리스 서부의 [3]나프팍토스(Nafpaktos, 당시 레판토) 근해에서 벌어졌으며, 16세기 유럽과 이슬람 세계 간의 해양 전투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다.
16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유럽 기독교 국가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맞서기 위해 [5]교황 비오 5세는 [6]펠리페 2세가 통치하는 스페인, 베네치아 공화국, [1]교황령을 중심으로 한 신성 동맹을 조직하였다. 동맹군의 총사령관은 스페인의 [7]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맡았고, 오스만 해군은 [8]뮈에진자데 알리 파샤가 이끌었다.
전투는 기독교 연합군이 전열을 갖추고 오스만 해군과 직접 충돌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전투 초반 오스만군은 중앙에서 강하게 밀어붙였으나, 신성 동맹군은 전열을 유지하며 반격을 감행했다. 특히 기독교 연합군의 [9]갤리어스함선이 제공한 강력한 포격과, 베네치아 및 스페인 [10]갤리선들의 근접 전투가 승부를 가르는 요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2]신성 동맹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오스만 제국 해군의 200여 척이 파괴되거나 나포되었고, 수많은 병사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특히 오스만 해군의 총사령관 [8]뮈에진자데 알리 파샤가 전사하면서 전세는 더욱 기독교 연합군으로 기울었다. 이 전투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해군력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이후 몇 년 만에 빠르게 회복하여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레판토 해전은 16세기 후반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중요한 전투로, 기독교 연합군이 단결하여 오스만 제국의 해상 확장을 저지한 역사적 사건이다. 비록 이 승리가 오스만 제국의 해양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했지만, 유럽 국가들에게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울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지중해의 해양 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전투는 이후 유럽 해군 전략과 전술 발전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서구와 이슬람 세계 간의 힘의 균형을 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 교황령(Papal States) : 중세 초기부터 근대까지 가톨릭 교황의 지배권이 미치는 영지로 교황국, 교회국, 교회령, 베드로 세습령이라고도 부른다. 동로마 제국에서 독립하여 성립되었고 이탈리아 통일로 멸망하였다. 1929년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로마시 안에 바티칸 시국을 건국함으로써 제한적으로나마 교황의 영토 주권이 회복되었다 [2] 신성동맹 : 지중해를 지배하는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교황 비오 5세가 주동하여 지중해의 거의 모든 주요 카톨릭 국가들이 1571년 5월 25일에 결성한 군사동맹 [3] 나프팍토스(Nafpaktos) : 오늘날 그리스 서부의 도시. 코린토스 만의 접근을 통제하는 전략적으로 중용한 도시 [4] 코린토스 만 : 펠로폰네소스반도와 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고 긴 만 [5] 교황 비오 5세(Pope Pius V, 1504년 1월 17일~1572년 5월 1일) : 제225대 교황, 재위: 1566년 1월 7일 ~ 1572년 5월 1일) [6]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 5월 21일 ~ 1598년 9월 13일) :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 1월 16일~1598년 9월 13일 [7]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Don Juan de Austria, 1547년 2월 24일 ~ 1578년 10월 1일) :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으로 스페인의 장군. 레판토 해전의 신성 동맹 함대 총사령관 [8]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Müezzinzade Ali Pasha, ? ~1571년 10월 7일) :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으로,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을 지휘했으나 전투 중 전사한 총사령관 [9] 갤리어스(Galleass) : 갤리온(Galleon, 16~18세기에 주로 사용된 대형 범선으로 긴 선체, 높은 선수·선미, 여러 개의 돛대, 그리고 강력한 대포를 갖춘 것이 특징)의 돛과 무장과 노를 젓는 갤리의 기동성을 결합한 전함 [10] 갤리(Galley) : 노를 젓는 방식으로 추진되는 긴 선체의 군함 또는 선박을 의미하며, 고대부터 18세기까지 주로 지중해와 유럽 해역에서 군사 및 무역 용도로 사용되었다. 갤리는 한 개 이상의 돛과 다수의 노(rowers)를 갖춘 것이 특징으로, 특히 오스만 제국, 베네치아, 로마, 그리스 해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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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재탄생' 또는 '부흥'을 뜻하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전개된 문화·예술·학문·사상 전반의 변화와 발전을 가리킨다. 역사학에서는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화적·지적 혁신의 시기로 평가한다.
역사적으로는 봉건적이고 기독교 세계관과 교회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에 강하게 작용하던 중세 유럽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와 학문을 다시 연구하고 발전시키려는 문화 운동을 말한다. 단순한 미술 운동이 아니라 문학, 철학, 과학, 건축, 정치,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사고방식이 등장한 시대적 변화였다.
르네상스는 약 14세기 초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에서 시작되어 15세기와 16세기를 거치며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는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가장 큰 배경은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은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경제력이 성장한 상인과 금융업자들은 예술과 학문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환경은 새로운 문화가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1453년 [3]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이후, 일부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유럽으로 이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전 그리스어 문헌의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르네상스 [1]인문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이와 함께 중세의 신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의 능력과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1]인문주의가 확산되면서 르네상스는 더욱 빠르게 발전하였다.
르네상스는 먼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피렌체는 당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2]메디치 가문은 금융업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예술가와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이러한 후원 문화는 미술과 건축, 학문의 발전을 이끌었다.
초기 르네상스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와 사실적인 예술 표현이 발전하였다. 르네상스 전성기에는 회화와 조각, 건축 분야에서 사실성과 조화, 비례를 중시하는 새로운 예술 양식이 확립되었다. 예술가들은 인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원근법과 해부학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16세기에는 르네상스 문화가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프랑스에서는 궁정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종교개혁과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영국에서는 문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연극과 시가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활동하였다.
[7]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 해부학, 공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 대표적인 르네상스의 인물이다. 그의 작품인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인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8]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 다비드상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9]라파엘로는 균형과 조화를 강조한 작품으로 유명하며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작이다.
문학에서는 [4]단테 알리기에리, [5]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6]조반니 보카치오가 활동하며 르네상스 문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과학 분야에서는 [10]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운동한다는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11]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 관측을 통해 태양중심설을 뒷받침하는 관측 결과를 제시하였으며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방법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인문주의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일 뿐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발전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예술에서는 원근법과 명암법, 해부학적 표현이 발전하여 현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건축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둥과 돔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학문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연구 방법이 점차 자리 잡았다. 이러한 변화는 근대 과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확산시키며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계몽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지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장기적으로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는 상공업과 금융업이 발전하였고 대항해시대를 촉진하는 지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예술과 건축은 이후 수세기 동안 유럽 문화의 기준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세계 문화유산과 미술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인문주의(Humanism) :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 창의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상으로 르네상스의 핵심 정신으로 평가된다. [2]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 :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와 금융을 주도했던 가문으로 르네상스 예술과 학문 발전의 대표적인 후원자였다. [3]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 :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 존속한 동로마 제국으로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다. [4]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년 5월 ~ 1321년 9월 14일) :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철학자로 『신곡』을 통해 중세 문학을 집대성하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이탈리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5]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년 7월 20일 ~ 1374년 7월 19일) :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학자이자 시인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연구하며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6]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년 6월 16일 ~ 1375년 12월 21일) : 이탈리아의 『데카메론』의 저자로 인간의 삶과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르네상스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7]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 이탈리아의 화가, 과학자, 발명가, 건축가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르네상스 최고의 천재이다. 대표작으로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이 있다. [8]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 :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로 활동했으며 『다비드상』과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로 유명하다. 르네상스 미술의 절정을 이끈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9]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년 4월 6일 ~ 1520년 4월 6일) : 이탈리아의 화가로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였다. 대표작 『아테네 학당』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 정신을 예술로 표현하였다. [10]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 : 폴란드의 천문학자로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천문학자이다. 근대 천문학과 과학혁명의 출발점이 된 인물로 평가된다. [11]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 : 이탈리아 출신으로 망원경을 이용한 천체 관측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한 과학자이다.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연구 방법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교회는 교황과 함께 계속되었는데 교황은 마치 황제와 같은 인물이었고, 대주교와 주교들은 옛 로마마제국의 행정관들과 똑같으며, 그들 밑으로는 지역마다 사제들이 있었다. 이 신성한 단체는 그 자체의 법률, 형벌, 교도소 그리고 조세제도를 지니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가 당시 위와 같은 사상을 비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출발한다.
죄 많고 타락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믿는 것이며, 믿음을 지닌다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다는것을 주장(스스로 믿는 종교)하며 오직 성경의 권위와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함으로써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와 제도를 새롭게 개혁시키고자 했던 개혁 운동이다.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 : 독일의 신학자, 종교개혁가
위그노 전쟁은 16세기 프랑스에서 가톨릭교도와 신교도인 [1]위그노간의 치열한 종교적·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벌어진 종교전쟁이며 1562년부터 1598년까지 약 36년에 걸쳐 총 여덟 차례의 전쟁이 이어졌다. 프랑스 종교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이 전쟁은 단순한 종교 분쟁을 넘어 귀족 세력 간의 권력 투쟁과 왕권 강화 시도, 외세의 개입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프랑스는 하층민은 물론 상업과 금융 계통의 부르주아에게 [2]장 칼뱅의 교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갈등의 직접적인 발단은 1562년 3월 1일 바시에서 [4]프랑수아 기즈 공이 신교도 예배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수많은 [1]위그노를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위그노를 중심으로 한 [15]프로테스탄트 귀족들과 가톨릭의 핵심세력인 기즈 가문 사이의 무력 충돌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5]앙리 2세의 사망 이후 혼란스러운 왕위 계승 문제와 [6]카트린 드 메디시스 섭정하에 쇠약해진 왕권을 되살리기 위해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특히 1572년 8월 24일 [8]성 바르톨로메오 축일부터 벌어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은 위그노 전쟁의 가장 참혹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위그노 지도자 [7]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의 암살을 시작으로 파리 전역에 걸친 신교도 대학살로 이어졌으며 단순한 유혈 사태를 넘어 종교 갈등이 극단적인 폭력으로 표출된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이 대학살의 충격은 프랑스 사회 전반을 뒤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걸쳐 깊은 공포와 정치적 반향을 일으켰다. 그 이후로도 위그노와 가톨릭 세력 간의 충돌은 간헐적인 무력 충돌과 불안정한 평화 협상이 반복되면서 지속되었고 프랑스의 정치적 중심은 갈수록 혼란에 빠져들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1]앙리 4세가 즉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가톨릭 귀족과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1598년에는 낭트 칙령을 통해 위그노에게 일정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종교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이 칙령은 일정 지역 내에서 위그노 신앙 실천을 허용하며 왕권과 사회 안정 사이의 절충점을 모색한 조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 개신교도의 예배는 불가하였고 카톨릭교와 신교의 재판도 공정하지 못하는 등 탄압과 충돌이 계속되었고 급기야 1686년에 [12]루이 14세는 낭트칙령을 폐지하였다. 결국 1787년 [13]루이 16세에 의하여 관용칙령이 발표됨으로써 프랑스 개신교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위그노 전쟁으로 백년전쟁이후 프랑스를 이끈 [9]발루아 왕조가 무너지고 [10]부르봉 왕조가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위그노 전쟁은 단지 프랑스 내부의 종교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유럽 전반에 걸친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운동의 일환이었으며 프랑스 절대왕정의 형성과 종교 관용 개념의 제도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 위그노(Les Huguenot) :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칼뱅의 개혁을 지지하던 개신교 신자 [2] 장 칼뱅(Jean Calvin, 1509년~1564년) : 종교개혁가. 프랑스 출신의 개혁주의 신학자 [3] 바시학살(Massacre of Vassy) : 1562년 3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시(Vassy)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측의 군대가 창고에 모여서 예배중인 개신교인들을 습격하여 학살한 사건 [4] 프랑수아 드 기즈 공작(François de Guise, 1519년 2월 17일 ~ 1563년 2월 24일) : 가톨릭 중심 세력을 이끄는 프랑스 귀족이자 군사 지휘관으로, 위그노 탄압과 종교 전쟁의 중심 인물이었다. 1562년 바시 학살을 일으켜 위그노 전쟁의 도화선을 제공하였다. 왕실 내 권력을 장악했으나 위그노 측에 의해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5] 앙리 2세(Henry II of France, 1519년 3월 31일 ~ 1559년 7월 10일) : 프랑스 발루아 왕조 제2대 국왕(재위, 1547년 3월 31일 ~ 1559년 7월 10일).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당시 유럽을 휩쓸던 종교개혁을 반대했다 [6]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 1519년 4월 13일 ~ 1589년 1월 5일) : 앙리 2세의 왕비이자 세 아들의 섭정으로 16세기 프랑스의 종교 갈등 속에서 국정을 주도하였다 [7] 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Gaspard II de Coligny, 1519년 2월 16일 ~ 1572년 8월 24일) : 프랑스의 제독이자 위그노 전쟁 초기의 개신교 지도자.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에서 살해당했다 [8] 성 바르톨로메오(Saint Bartholomew) :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 [9] 발루아 왕조(House of Valois) : 1328년에서 1589년까지의 프랑스 왕국의 왕조. 필리프 6세부터 앙리 3세까지의 왕조 [10] 부르봉 왕조(House of Bourbon) : 1589년부터 1791년까지 그리고 1814년부터 1830년까지 프랑스왕국의 왕조. 앙리 4세부터 앙리 5세까지의 왕조 [11] 앙리 4세(Henri IV de France,1553년~1610년) : 프랑스 카페 왕조의 분가인 부르봉 왕가 최초의 왕(재위 : 1589년 8월 2일-1610년 5월 14일) [12]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3대 국왕(재위, 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 태양왕으로 알려져 있다 [13]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5대 국왕(재위, 1774년 5월 10일-1792년 9월 21일) [14] 관용칙령 : 1787년 11월 7일에 반포된 법령으로 프랑스 내 비가톨릭교도들에게 일정한 시민적 권리를 부여한 조치이다. 이 칙령은 개신교도(주로 위그노)와 유대인 등에게 결혼, 출생, 사망의 법적 등록, 재산 상속, 시민권 등록 등을 허용하였다 [15] 프로테스탄트 귀족(Protestant nobles, nobles huguenots) : 16세기 프랑스 종교개혁 시기에 프랑스 내 개신교, 특히 칼뱅주의를 수용한 고위 귀족층을 지칭하며, 이들은 종교뿐 아니라 정치적 야망과 지역적 이해관계에 따라 종종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네덜란드(혹은 저지대)는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즉 베네룩스 지역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릴까지 포함하여 총 17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네덜란드는 무적함대를 이끌며 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합스부르크 왕국의 스페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네덜란드 17개주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벌인 독립전쟁을 말한다. 80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는 북유럽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으로 보았으며 개신교의 교세가 확산되자 이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에 대해 더욱 무거운 세금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 권력의 중앙집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럼 1세는 반기를 들면서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1568년 4월 23일 빌렘은 헤일리게레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이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스페인은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오스만이라는 두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여야 하였고 이는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전쟁 진압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1581년 7월 네덜란드 독립 선언을 통해 네덜란드가 더이상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스페인은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과 대립하여 1588년 무적함대를 구성하여 영국으로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대패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의 승리로 해상권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하는 계기가 된다.
네덜란드는 1600년 스페인과 해전에서 승리를 하며 이후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2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전쟁의 후반부에 유럽의 여타 국가들이 종교개혁 이후 야기된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30년간의 종교전쟁(1618~1648)에 휘말렸으나 1648년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고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 합스부르크 왕국(Habsburg Empire)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부르는 말이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전체와 루마니아의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북부, 이탈리아, 폴란드의 남부 등이 포함된다.
*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1598년
* 오라녜 공(Prins van Oranje) : 네덜란드의 왕위 계승자의 칭호
* 빌럼 1세(William I, 1533년~1584년) : 네덜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독이자 스페인과 가톨릭에 저항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빌헬름 폰 나사우딜렌부르크(Wilhelm von Nassau-Dillenburg). 네덜란드의 국부로 빌럼 1세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또한 침묵공(De Zwijger)이라고도 불린다
*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