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태
대한민국
사건기간 : 1979년 10월 26일, 조회수 : 296, 등록일 : 2020-03-02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대사건으로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한 사건이다.
박정희 암살 사건, 박정희 시해 사건, 박정희 피격 사건, 궁정동 사건으로도 불린다.
* 박정희(1917년~1979년) : 대한민국 5,6,7,8,9대 대통령
* 김재규(1926년~1980년) : 제11대 건설부 장관,제8대 중앙정보부장
* 박선호(1934년~1980년) :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 박흥주(1939년~1980년) :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육군 포병대령. 당시 정앙정보부장 수행비서
* 차지철(1934년~1979년) :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
박정희 암살 사건, 박정희 시해 사건, 박정희 피격 사건, 궁정동 사건으로도 불린다.
* 박정희(1917년~1979년) : 대한민국 5,6,7,8,9대 대통령
* 김재규(1926년~1980년) : 제11대 건설부 장관,제8대 중앙정보부장
* 박선호(1934년~1980년) :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 박흥주(1939년~1980년) :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육군 포병대령. 당시 정앙정보부장 수행비서
* 차지철(1934년~1979년) :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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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입헌 군주제인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최고 권력을 가지는 이슬람 공화국으로 정부가 교체되었다. '이란 이슬람 혁명'이라고 불린다.
19세기부터 영국과 러시아의 영향하에 있었던 이란은 반서방 감정이 커졌고, 이러한 서방세력(미국과 영국 등)의 지원을 받는 팔라비 왕조에 반대하는 다양한 좌파와 이슬람단체등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팔라비 왕조에 대한 시위는 1977년 10월에 시작되어 1978년 1월에 더욱 격화되었다. 1978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파업과 시위가 전국이 마비되었으며 결국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2세는 퇴위한 후 망명길에 오른다.
이후 팔라비 왕조 정책에 반대하여 1963년 망명했던 이슬람 성직자 호메이니는 1979년 2월 1일에 귀국했고 2월 11일에 팔라비 왕조는 무너졌다. 호메이니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죽을 때까지 이란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1989, 시아파) : 팔라비 왕조 정책에 반대하여 망명했다가 1979년 1월 16일 국왕의 퇴위 후, 2월 1일에 귀국하여 죽을 때까지 이란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 팔라비 왕조(Pahlavi dynasty) : 1925년부터 1979년까지 이란의 마지막 페르시아 제국(이란제국)
19세기부터 영국과 러시아의 영향하에 있었던 이란은 반서방 감정이 커졌고, 이러한 서방세력(미국과 영국 등)의 지원을 받는 팔라비 왕조에 반대하는 다양한 좌파와 이슬람단체등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팔라비 왕조에 대한 시위는 1977년 10월에 시작되어 1978년 1월에 더욱 격화되었다. 1978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파업과 시위가 전국이 마비되었으며 결국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2세는 퇴위한 후 망명길에 오른다.
이후 팔라비 왕조 정책에 반대하여 1963년 망명했던 이슬람 성직자 호메이니는 1979년 2월 1일에 귀국했고 2월 11일에 팔라비 왕조는 무너졌다. 호메이니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죽을 때까지 이란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1989, 시아파) : 팔라비 왕조 정책에 반대하여 망명했다가 1979년 1월 16일 국왕의 퇴위 후, 2월 1일에 귀국하여 죽을 때까지 이란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 팔라비 왕조(Pahlavi dynasty) : 1925년부터 1979년까지 이란의 마지막 페르시아 제국(이란제국)
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점령하여 흡수 통일했고, 캄보디아의 [2]크메르 루주는 [4]론 놀의 [5]크메르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수도 [8]프놈펜에 입성하였고, 1976년 1월에 국명을 [1]민주 캄푸차로 개칭했다.
당시 중-소 갈등이 심화되어, 베트남은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중국과 우호적인 캄보디아의 [6]폴 포트 정권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폴 포트 정권은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정치로 베트남과 대립하였다. [1]민주 캄푸차로 명명한 [6]폴 포트는 1978년 베트남에 대한 다른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개시했다.
베트남은 [6]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맞서 베트남에서 조직된 [7]캄프차 민족해방전선과 연합하여 캄보디아에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 베트남이 프놈펜을 공략하자 [2]크메르 루주 체제는 붕괴되었다.
베트남군은 폴 포트 일파를 태국 국경 근처의 산악 지역까지 쫓아냈다.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1979년 1월 8일 캄보디아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렇지만 베트남군은 밀림 깊숙히 숨은 폴포트파의 게릴라 활동에 시달리며, 내전의 수렁에 빠졌다. 캄보디아는 [2]크메르 루주와 [3]시아누크 국왕파, [4]론 놀파의 세 계파는 연합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캄보디아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베트남군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1985년 1월에 대공세를 펼치며 반베트남 3파의 민주 캄보디아의 거점을 공략하였고, 3월에는 [3]시아누크 국왕파의 거점을 제압하자 민주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베트남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군의 장기간 주둔은 베트남을 적대하던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한 베트남은 캄보디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1986년 7월, 공산주의 베트남을 이끌던 [10]레주언 서기장이 사망했다. 뒤를 이어 [11]쯔엉찐이 서기장을 맡으면서 베타남 경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2월에 [12]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면서, 경제개방과 국제협력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한편, 1989년에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자치 능력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남은 주둔군마저 철수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26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베트남은 1989년 완전히 철군했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붕괴했다. 캄보디아는 [3]노로돔 시아누크와 [9]훈센을 주축으로 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었고 1993년 군주제로 복귀했다.
[1]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민주 캄보디아. 1975~1980년까지 크메르 루주가 배후에서 지배한 공산국가, 집권당은 캄푸치아 공산당(KCP)이었다. 킬링필드가 발생한 국가
[2]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68년에 결성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 군사조직.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3]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2012년)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4]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5]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캄보디아에 존재하던 공화국
[6]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캄프차 민족해방전선(Kampuchean United Front for National Salvation:KUFNS) : 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창립한 조직
[8] 프놈펜(Phnom Penh) : 캄보디아 수도
[9] 훈 센(Hun Sen, 1952년~) : 캄보디아의 제2대 총리(임기,1998년 11월 30일~2023년 8월 22일 ). 캄보디아인민당(CPP, Cambodian People's Party)
[10]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11] 쯔엉찐(Truong Chinh, 1907년 ~ 1988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6년 7월 14일~1986년 12월 18일)
[12] 도이모이 정책 : '도이'는 베트남어로 '변한다'는 뜻이고 '모이'는 베트남어로 '새롭다'는 뜻으로 쯔엉찐의 주도로 시작되 베트남의 개방개혁정책
당시 중-소 갈등이 심화되어, 베트남은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중국과 우호적인 캄보디아의 [6]폴 포트 정권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폴 포트 정권은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정치로 베트남과 대립하였다. [1]민주 캄푸차로 명명한 [6]폴 포트는 1978년 베트남에 대한 다른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개시했다.
베트남은 [6]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맞서 베트남에서 조직된 [7]캄프차 민족해방전선과 연합하여 캄보디아에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 베트남이 프놈펜을 공략하자 [2]크메르 루주 체제는 붕괴되었다.
베트남군은 폴 포트 일파를 태국 국경 근처의 산악 지역까지 쫓아냈다.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1979년 1월 8일 캄보디아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렇지만 베트남군은 밀림 깊숙히 숨은 폴포트파의 게릴라 활동에 시달리며, 내전의 수렁에 빠졌다. 캄보디아는 [2]크메르 루주와 [3]시아누크 국왕파, [4]론 놀파의 세 계파는 연합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캄보디아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베트남군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1985년 1월에 대공세를 펼치며 반베트남 3파의 민주 캄보디아의 거점을 공략하였고, 3월에는 [3]시아누크 국왕파의 거점을 제압하자 민주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베트남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군의 장기간 주둔은 베트남을 적대하던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한 베트남은 캄보디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1986년 7월, 공산주의 베트남을 이끌던 [10]레주언 서기장이 사망했다. 뒤를 이어 [11]쯔엉찐이 서기장을 맡으면서 베타남 경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2월에 [12]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면서, 경제개방과 국제협력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한편, 1989년에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자치 능력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남은 주둔군마저 철수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26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베트남은 1989년 완전히 철군했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붕괴했다. 캄보디아는 [3]노로돔 시아누크와 [9]훈센을 주축으로 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었고 1993년 군주제로 복귀했다.
[1]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민주 캄보디아. 1975~1980년까지 크메르 루주가 배후에서 지배한 공산국가, 집권당은 캄푸치아 공산당(KCP)이었다. 킬링필드가 발생한 국가
[2]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68년에 결성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 군사조직.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3]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2012년)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4]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5]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캄보디아에 존재하던 공화국
[6]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캄프차 민족해방전선(Kampuchean United Front for National Salvation:KUFNS) : 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창립한 조직
[8] 프놈펜(Phnom Penh) : 캄보디아 수도
[9] 훈 센(Hun Sen, 1952년~) : 캄보디아의 제2대 총리(임기,1998년 11월 30일~2023년 8월 22일 ). 캄보디아인민당(CPP, Cambodian People's Party)
[10]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11] 쯔엉찐(Truong Chinh, 1907년 ~ 1988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6년 7월 14일~1986년 12월 18일)
[12] 도이모이 정책 : '도이'는 베트남어로 '변한다'는 뜻이고 '모이'는 베트남어로 '새롭다'는 뜻으로 쯔엉찐의 주도로 시작되 베트남의 개방개혁정책
1977년 집권한 중국의 [5] 덩샤오핑은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개혁·개방정책을 준비한다. 이에 따라 안보를 위하여 소련을 견제해야 하는데 베트남이 소련과 가까워지자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캄보디아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1978년 베트남이 소련과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자 중국은 베트남을 향해 군사행동을 준비를 한다. 베트남에 우호적인 소련을 묶어두기 위해 덩샤오핑은 1978년 10월부터 미국, 일본, 아시아등을 순방하기 시작하여 우방을 만든다. 베트남에 우호적이지 않은 미국에게는 베트남 침공을 위한 명분을 만들고 베트남 국경지역에 대군을 전진 배치한다.
베트남은 1976년 7월 통일을 이루며 베트남 시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한다. 초대 서기장으로 [7]레주언이 취임하면서 급속한 계획주의(사회주의) 경제체제로 바꾸면서 내부 반발이 일어났다.
베트남에는 화교가 120만 거주하고 있었으며 화교들은 장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전환되면서 개인 재산을 몰수하고 국가에서 관리하게 되면서 대립하게 된다. 또한 베트남으로 전향하지 않은 화교들을 베트남에서 추방했다.
화교들에 큰 관심이 없었던 중국은 [5]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맞물려 화교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이로 인해 베트남과의 관계는 더욱 더 안 좋아졌다.
중국과 베트남 국경에서의 분쟁이 1974년 100여건 발생되었고 1년뒤에는 400권, 그 이듬해에는 900여건으로 잦은 분쟁도 전쟁의 원인중 하나였다.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의 [4]폴 포트 정권은 친중 노선을 취했고, 라오스도 중국의 편에 섰다.
1978년 12월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1978년 10월 베트남 침공을 결정한 [5]덩샤오핑은 12월까지 베트남 국경으로 부대이동을 한다.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으로 나누어 전체 31개사단 33만 명이 동원되었고, 베트남은 8개사단 15만명이 투입되었다.
동원인력으로 베트남이 열세였으나 베트남은 미군이 남긴 무기와 소련의 지원으로 무기체계는 베트남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중국은 [1]랑선, [2]라오까이, [3]까오방의 점령을 목표로 서부, 북부, 동북부 세 방면을 통해 베트남을 침공했다.
2월 25일에 [3]까오방, 2월 26일에는 [2]라오까이를, 3월 5일에는 베트남 동북부의 요충지인 [1]랑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베트남은 퇴각하지 않고 적 후방에 잔류하여 기습작전과 지연전, 회피전을 펼치면서 대항하고 있었다. 중국군은 사방에서 습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은 부사령관이 침공 8일반에 중병으로 베이징으로 후송되는등 지휘체계도 불안정하고 통신도 원할하지 않았다. 신형장비도 전무한 상태이며 베트남 북부지역의 엄청난 산악지대로 기동력도 부족했다.
중국은 랑선을 점령한 다음 날 3월 6일에 목표를 달성했다라는 선언과 함께 중국군 철수를 명령했다. 3월 16일에 베트남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중국은 국내외에 전쟁 승리를 선전했고, 베트남도 중국 인민해방군의 침략을 내쫓았다고 승리 선언을 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중국군의 사망자는 2만 6천명, 베트남군의 사망자는 3만여명이 발생했으며 부상자도 중국군은 3만 7천명, 베트남군은 3만 2천명이었다.
[1] 랑선(Lang Son, 諒山) : 베트남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130km 정도 떨어져 있다. 중국의 광시성과 국경을 접한다
[2] 라오까이(Lao Cai, 城舖老街) : 베트남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296km 정도 떨어져 있다. 윈난성과 국경을 접한다
[3] 까오방(Cao Bang, 城舖高平)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중국의 광시성과 국경을 접한다
[4]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5] 덩샤오핑(Deng Xiaoping, 鄧小平,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제5대 국가주석(임기,1978년 3월 8일~1983년 6월 22일)
[6]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친미정권
[7]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더군다나 1978년 베트남이 소련과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자 중국은 베트남을 향해 군사행동을 준비를 한다. 베트남에 우호적인 소련을 묶어두기 위해 덩샤오핑은 1978년 10월부터 미국, 일본, 아시아등을 순방하기 시작하여 우방을 만든다. 베트남에 우호적이지 않은 미국에게는 베트남 침공을 위한 명분을 만들고 베트남 국경지역에 대군을 전진 배치한다.
베트남은 1976년 7월 통일을 이루며 베트남 시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한다. 초대 서기장으로 [7]레주언이 취임하면서 급속한 계획주의(사회주의) 경제체제로 바꾸면서 내부 반발이 일어났다.
베트남에는 화교가 120만 거주하고 있었으며 화교들은 장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전환되면서 개인 재산을 몰수하고 국가에서 관리하게 되면서 대립하게 된다. 또한 베트남으로 전향하지 않은 화교들을 베트남에서 추방했다.
화교들에 큰 관심이 없었던 중국은 [5]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맞물려 화교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이로 인해 베트남과의 관계는 더욱 더 안 좋아졌다.
중국과 베트남 국경에서의 분쟁이 1974년 100여건 발생되었고 1년뒤에는 400권, 그 이듬해에는 900여건으로 잦은 분쟁도 전쟁의 원인중 하나였다.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의 [4]폴 포트 정권은 친중 노선을 취했고, 라오스도 중국의 편에 섰다.
1978년 12월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1978년 10월 베트남 침공을 결정한 [5]덩샤오핑은 12월까지 베트남 국경으로 부대이동을 한다.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으로 나누어 전체 31개사단 33만 명이 동원되었고, 베트남은 8개사단 15만명이 투입되었다.
동원인력으로 베트남이 열세였으나 베트남은 미군이 남긴 무기와 소련의 지원으로 무기체계는 베트남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중국은 [1]랑선, [2]라오까이, [3]까오방의 점령을 목표로 서부, 북부, 동북부 세 방면을 통해 베트남을 침공했다.
2월 25일에 [3]까오방, 2월 26일에는 [2]라오까이를, 3월 5일에는 베트남 동북부의 요충지인 [1]랑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베트남은 퇴각하지 않고 적 후방에 잔류하여 기습작전과 지연전, 회피전을 펼치면서 대항하고 있었다. 중국군은 사방에서 습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은 부사령관이 침공 8일반에 중병으로 베이징으로 후송되는등 지휘체계도 불안정하고 통신도 원할하지 않았다. 신형장비도 전무한 상태이며 베트남 북부지역의 엄청난 산악지대로 기동력도 부족했다.
중국은 랑선을 점령한 다음 날 3월 6일에 목표를 달성했다라는 선언과 함께 중국군 철수를 명령했다. 3월 16일에 베트남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중국은 국내외에 전쟁 승리를 선전했고, 베트남도 중국 인민해방군의 침략을 내쫓았다고 승리 선언을 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중국군의 사망자는 2만 6천명, 베트남군의 사망자는 3만여명이 발생했으며 부상자도 중국군은 3만 7천명, 베트남군은 3만 2천명이었다.
[1] 랑선(Lang Son, 諒山) : 베트남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130km 정도 떨어져 있다. 중국의 광시성과 국경을 접한다
[2] 라오까이(Lao Cai, 城舖老街) : 베트남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296km 정도 떨어져 있다. 윈난성과 국경을 접한다
[3] 까오방(Cao Bang, 城舖高平)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중국의 광시성과 국경을 접한다
[4]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5] 덩샤오핑(Deng Xiaoping, 鄧小平,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제5대 국가주석(임기,1978년 3월 8일~1983년 6월 22일)
[6]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친미정권
[7]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YH 사건은 가발수출업체인 YH 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의 일방적 폐업조치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8월 11일 새벽 2시 1,000여 명의 경찰이 '101작전'을 개시하고 신민당사에 난입하여 여성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추락사하였다. 경찰은 투신 자살로 조작했으나 조사 결과 경찰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추락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했으며 이는 부마민주항쟁, 10.26 사건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 YH무역 : 1966년 10여명의 사원으로 출발한 가발회사로 가발 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에 힘입어 창립 4년 만인 1970년대 초 종업원 이 4,000여명에 이르는 수출 순위 15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8월 11일 새벽 2시 1,000여 명의 경찰이 '101작전'을 개시하고 신민당사에 난입하여 여성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추락사하였다. 경찰은 투신 자살로 조작했으나 조사 결과 경찰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추락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했으며 이는 부마민주항쟁, 10.26 사건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 YH무역 : 1966년 10여명의 사원으로 출발한 가발회사로 가발 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에 힘입어 창립 4년 만인 1970년대 초 종업원 이 4,000여명에 이르는 수출 순위 15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광역시, 마산시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 항쟁. 박정희의 제4공화국 유신 독재 체제에 대항한 사건이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 날인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 사건은 유신 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부마민주항쟁(Bu-Ma Democratic Protests)으로도 불린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 날인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 사건은 유신 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부마민주항쟁(Bu-Ma Democratic Protests)으로도 불린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뒤 최규하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전두환과 노태우등이 중심인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으로 전형적인 군사반란이다.
당시 대통령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할 수밖에 없었으며 13일 오전 9시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은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취임함으로써 당시의 군부가 반란의 주도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결국 신군부세력은 1980년 5·17쿠데타까지 주도해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 최규하(1919년~2006년) :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등이 중심인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으로 전형적인 군사반란이다.
당시 대통령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할 수밖에 없었으며 13일 오전 9시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은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취임함으로써 당시의 군부가 반란의 주도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결국 신군부세력은 1980년 5·17쿠데타까지 주도해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 최규하(1919년~2006년) :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
랭커스터 협정 영국 런던의 [1]랭커스터 하우스에서 열린 회담에서 체결된 협정으로, 당시 [2]로디지아로 알려진 현재의 짐바브웨가 독립 국가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협정은 로디지아 백인 소수 정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주적 독립 국가로 전환되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한 협정이었다.
[2]로디지아는 1890년대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영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1965년, 백인 소수 정권이 이끄는 [3]이언 스미스는 영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며 로디지아 공화국을 수립했으나 아프리카 다수 인구를 정치적으로 억압했으며, 인종차별적 법률을 통해 부와 권력을 독점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비반을 받았다.
[2]로디지아 내에서는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이끄는 저항 운동이 성장했다. [7]조슈아 은코모가 이끄는 [4]ZAPU와 [6]로버트 무가베가 이끄는 [5]ZANU가 무장 투쟁을 전개하며 백인 정권에 저항하며 광범위한 내전을 초래했다. 이 내전은 1970년대 동안 격화되었으며,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국제적으로는 영국과 주변국, 특히 잠비아와 모잠비크가 로디지아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이러한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제적 중재의 결과로 이루어졌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헌법 채택: 짐바브웨가 독립 국가로 전환하기 위한 새로운 헌법이 마련되었다. 이 헌법은 다수결에 기반한 민주적 정부를 보장하면서도 백인 소수의 권익을 일정 기간 동안 보호하는 조항을 포함했다.
- 선거 실시: 독립 전환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약속했으며, 영국이 이를 관리하도록 했다. 선거는 1980년 2월에 시행되었고, 로버트 무가베가 이끄는 ZANU-PF가 대승을 거두어 정부를 구성했다.
- 무장 해제: [4]ZAPU와 [5]ZANU 등 아프리카 민족주의 무장단체는 해체되고, 전쟁 당사자들이 평화적 해결책에 동의하도록 했다. 백인 정권의 군대도 해체되거나 통합되었다.
- 독립 승인: 영국은 로디지아를 다시 직접 통치하게 되었으며, 독립 과정이 완료된 뒤 로디지아는 짐바브웨라는 이름으로 독립 국가로 승인되었다.
1980년 4월 18일, 짐바브웨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이후 새로운 국가는 아프리카 다수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반영하기 위해 과거의 식민지적 이름을 버리고 짐바브웨로 이름을 변경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짐바브웨 독립은 남아프리카 지역의 탈식민화 과정을 촉진했다. 이후 선거에서 [6]로버트 무가베가 짐바브웨의 첫 총리로 선출되었으며, 이는 짐바브웨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협정이 백인 소수의 경제적 특권을 단기적으로 보장했기 때문에, 독립 후에도 토지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은 지속적인 갈등 요소로 남았다. 이는 이후 짐바브웨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의 종식을 위한 평화적 해결의 사례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며, 짐바브웨뿐만 아니라 전 세계 탈식민화 과정에서 의미 있는 협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1] 랭커스터 하우스 : 영국 런던에 위치한 역사적인 건물로, 회담을 통해 로디지아 내전의 종식과 새로운 헌법, 독립 절차를 확정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2]로디지아(Rhodesia) : 1965년 영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여 1979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이며 현재의 짐바브웨이다. 1979년에서 1980년까지 짐바브웨 로디지아로 변경되었다. 1980년 4월에 짐바브웨라는 이름의 독립국가가 되었다
[3] 이언 스미스(Ian Douglas Smith, 1919년~2007년) : 짐바브웨의 백인 정치인. 로디지아 백인 정권을 대표하여 총리(임기, 1964년 4월 13일 – 1979년 6월 1일)로 있다가 내외의 압력으로 흑인세력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4] ZAPU(Zimbabwe African People's Union) :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맹
[5] ZANU(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6] 로버트 무가베(Robert Gabriel Mugabe, 1924년~2019년) : 짐바브웨의 제1대 총리(임기, 1980년 4월 18일~1987년 12월 31일), 짐바브웨의 제2대 대통령(임기, 1987년 12월 31일~2017년 11월 21일). 초기 백인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무장 독립운동을 주도해 짐바브웨를 백인들로부터 해방시킨 독립운동가였지만,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에는 잔혹한 학살과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 파탄과 최빈국으로 전락했으며, 부정부패와 사치 등으로 국가를 파탄내어 국제적인 지탄을 받는 독재자로 전락했다
[7] 조슈아 음카부코 은욘골로 은코모(Joshua Mqabuko Nyongolo Nkomo, 1917년~1999년) : 짐바브웨의 혁명가이자정치인으로, 1990년부터 1999년 사망 직전까지 짐바브웨의 부통령이었다. ZAPU를 1961년 창당하여 이끌어왔으나 1987년 로버트 무가베의 ZANU와 합당하여 현재의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애국 전선 (ZANU-PF, 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Patriotic Front)을 구성하였다
[2]로디지아는 1890년대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영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1965년, 백인 소수 정권이 이끄는 [3]이언 스미스는 영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며 로디지아 공화국을 수립했으나 아프리카 다수 인구를 정치적으로 억압했으며, 인종차별적 법률을 통해 부와 권력을 독점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비반을 받았다.
[2]로디지아 내에서는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이끄는 저항 운동이 성장했다. [7]조슈아 은코모가 이끄는 [4]ZAPU와 [6]로버트 무가베가 이끄는 [5]ZANU가 무장 투쟁을 전개하며 백인 정권에 저항하며 광범위한 내전을 초래했다. 이 내전은 1970년대 동안 격화되었으며,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국제적으로는 영국과 주변국, 특히 잠비아와 모잠비크가 로디지아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이러한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제적 중재의 결과로 이루어졌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헌법 채택: 짐바브웨가 독립 국가로 전환하기 위한 새로운 헌법이 마련되었다. 이 헌법은 다수결에 기반한 민주적 정부를 보장하면서도 백인 소수의 권익을 일정 기간 동안 보호하는 조항을 포함했다.
- 선거 실시: 독립 전환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약속했으며, 영국이 이를 관리하도록 했다. 선거는 1980년 2월에 시행되었고, 로버트 무가베가 이끄는 ZANU-PF가 대승을 거두어 정부를 구성했다.
- 무장 해제: [4]ZAPU와 [5]ZANU 등 아프리카 민족주의 무장단체는 해체되고, 전쟁 당사자들이 평화적 해결책에 동의하도록 했다. 백인 정권의 군대도 해체되거나 통합되었다.
- 독립 승인: 영국은 로디지아를 다시 직접 통치하게 되었으며, 독립 과정이 완료된 뒤 로디지아는 짐바브웨라는 이름으로 독립 국가로 승인되었다.
1980년 4월 18일, 짐바브웨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이후 새로운 국가는 아프리카 다수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반영하기 위해 과거의 식민지적 이름을 버리고 짐바브웨로 이름을 변경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짐바브웨 독립은 남아프리카 지역의 탈식민화 과정을 촉진했다. 이후 선거에서 [6]로버트 무가베가 짐바브웨의 첫 총리로 선출되었으며, 이는 짐바브웨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협정이 백인 소수의 경제적 특권을 단기적으로 보장했기 때문에, 독립 후에도 토지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은 지속적인 갈등 요소로 남았다. 이는 이후 짐바브웨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의 종식을 위한 평화적 해결의 사례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며, 짐바브웨뿐만 아니라 전 세계 탈식민화 과정에서 의미 있는 협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1] 랭커스터 하우스 : 영국 런던에 위치한 역사적인 건물로, 회담을 통해 로디지아 내전의 종식과 새로운 헌법, 독립 절차를 확정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2]로디지아(Rhodesia) : 1965년 영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여 1979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이며 현재의 짐바브웨이다. 1979년에서 1980년까지 짐바브웨 로디지아로 변경되었다. 1980년 4월에 짐바브웨라는 이름의 독립국가가 되었다
[3] 이언 스미스(Ian Douglas Smith, 1919년~2007년) : 짐바브웨의 백인 정치인. 로디지아 백인 정권을 대표하여 총리(임기, 1964년 4월 13일 – 1979년 6월 1일)로 있다가 내외의 압력으로 흑인세력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4] ZAPU(Zimbabwe African People's Union) :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맹
[5] ZANU(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6] 로버트 무가베(Robert Gabriel Mugabe, 1924년~2019년) : 짐바브웨의 제1대 총리(임기, 1980년 4월 18일~1987년 12월 31일), 짐바브웨의 제2대 대통령(임기, 1987년 12월 31일~2017년 11월 21일). 초기 백인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무장 독립운동을 주도해 짐바브웨를 백인들로부터 해방시킨 독립운동가였지만,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에는 잔혹한 학살과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 파탄과 최빈국으로 전락했으며, 부정부패와 사치 등으로 국가를 파탄내어 국제적인 지탄을 받는 독재자로 전락했다
[7] 조슈아 음카부코 은욘골로 은코모(Joshua Mqabuko Nyongolo Nkomo, 1917년~1999년) : 짐바브웨의 혁명가이자정치인으로, 1990년부터 1999년 사망 직전까지 짐바브웨의 부통령이었다. ZAPU를 1961년 창당하여 이끌어왔으나 1987년 로버트 무가베의 ZANU와 합당하여 현재의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애국 전선 (ZANU-PF, 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Patriotic Front)을 구성하였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79년 12월부터 1989년 2월까지 10년간 지속된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1]무자헤딘(Mujahideen)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1978년 [2]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세우고 여러 급진적인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다. 이에 저항하는 무슬림들이 반발하면서 [1]무자헤딘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3]하피줄라 아민은 1979년 4월에 [2]모하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집권하게 된다.
1979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넘어 수도인 카불에 도착한 소련은 [3]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고 [4]바브락 카르말을 후임으로 세우고 새로운 공산정권을 수립했다(폭풍333호 작전).
이 사건의 여파로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의 반란이 더욱 거세지자 [4]바브락 카르말 정권은 소련에게 진압을 요청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과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쉽게 진압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면서 소련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영토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소련이 부담해야 할 군사적 외교적 비용은 너무나 컸다.
1987년 소련의 서기장으로 집권한 [5]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발표하였다. 소련군은 1988년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전원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가면서 종료되었다.
[1] 무자헤딘(Mujahideen) :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 및 이슬람 세력. 성전(Jihad, 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를 의미한다
[2]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 1917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1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3]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1929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2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4]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 1929년~1996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3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5]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78년 [2]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세우고 여러 급진적인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다. 이에 저항하는 무슬림들이 반발하면서 [1]무자헤딘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3]하피줄라 아민은 1979년 4월에 [2]모하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집권하게 된다.
1979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넘어 수도인 카불에 도착한 소련은 [3]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고 [4]바브락 카르말을 후임으로 세우고 새로운 공산정권을 수립했다(폭풍333호 작전).
이 사건의 여파로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의 반란이 더욱 거세지자 [4]바브락 카르말 정권은 소련에게 진압을 요청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과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쉽게 진압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면서 소련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영토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소련이 부담해야 할 군사적 외교적 비용은 너무나 컸다.
1987년 소련의 서기장으로 집권한 [5]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발표하였다. 소련군은 1988년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전원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가면서 종료되었다.
[1] 무자헤딘(Mujahideen) :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 및 이슬람 세력. 성전(Jihad, 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를 의미한다
[2]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 1917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1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3]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1929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2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4]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 1929년~1996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3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5]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