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건기간 : 1927년 4월 12일~1937년 7월 6일, 조회수 : 195, 등록일 : 2024-12-28
중국 제1차 국공내전은 1927년 4월 12일 [1]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 내전의 발단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1924년에 군벌 타도를 목표로 제1차 국공합작을 결성했으나, 이념적 갈등과 권력 다툼으로 인해 협력이 붕괴된 데 있다. 특히 국민당은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위협으로 간주하며 제거하려 했고,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를 기반으로 독립적 세력을 키우려 하면서 충돌이 심화되었다. 상하이 쿠데타로 국민당은 공산당원들을 대규모로 숙청하며 본격적인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내전 초기, 국민당은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쳐 공산당 세력을 도시와 주요 지역에서 축소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에 공산당은 도시에서의 저항을 포기하고 농촌으로 후퇴해 [4]홍군을 조직하고 게릴라 전술을 통해 저항했다.
국민당은 공산당 근거지를 파괴하기 위한 다섯 차례의 공세를 벌였으며, 특히 1933~1934년의 제5차 토벌 작전은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로 인해 공산당은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약 9,000km에 달하는 [3]대장정을 감행하며 국민당의 포위망을 벗어나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초래했지만, 공산당 내부에서 [2]마오쩌둥의 지도력이 부각되었고 당의 조직이 재정비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제2차 국공합작을 체결하며 내전은 종결되었다.
제1차 국공내전은 공산당에게는 농촌 기반을 강화하고[4] 홍군의 전술과 조직력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시기였으며, 이는 이후 제2차 국공내전에서의 승리로 이어지는 토대가 되었다. 국민당은 일시적으로 공산당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전쟁으로 인한 장기적인 내부 분열과 공산당의 생존 전략은 국민당의 궁극적인 패배를 예고하는 요인이 되었다.
[1]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2]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 중국 공산당의 제1대 중앙위원회 주석(임기, 1945년 6월 19일~1976년 9월 9일). 일본 패망 이후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와 2차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을 장악했다 [3] 대장정(大長征) : 1934년 10월, 국민혁명군의 제5차 초공작전을 견디지 못한 중국공산당이 기존의 근거지였던 중국 동남부의 장시성을 떠나 약 1년에 걸쳐 중국 서북부 산시성으로 근거지를 이동한 사건. 10만에 육박했던 출발 인원 중 산시성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인원은 6,000명에 불과했다 [4] 홍군 :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 또는 단순히 홍군(紅軍)은 1927-1946 사이의 중국공산당의 무장조직다. 1927년 8월 1일 중국공농혁명군(中國工農革命軍)을 시작으로, 1928년 5월 25일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으로 개칭하였다. 제2차 국공합작(1937.9)무렵, 편제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1937.8)과 신사군(1939.10)으로 개편되었다. 일본패망 이후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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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라노 조약은 이탈리아 왕국과 로마 가톨릭 교황청 사이에 체결된 협정으로, 교황청과 이탈리아 간의 오랜 갈등을 종식시키고 바티칸 시국을 공식적으로 독립국으로 인정한 역사적 협정으로, 유럽 정치·종교 관계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이었다. 이 조약을 통해 바티칸은 독립국으로 존속할 수 있었으며,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간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현재까지 바티칸 시국의 법적·정치적 지위는 이 조약에 기반하고 있으며, 가톨릭 교회의 국제적 역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이탈리아 왕국은 [1]교황령을 병합하고 1870년에는 로마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2]교황 비오 9세는 로마 교황청의 영토를 상실하였고, 이후 교황들은 이탈리아 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며 바티칸에 사실상 유폐된 상태로 남았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와 교황청 간의 관계는 60년 이상 냉각되었으며, "로마 문제"로 불리는 심각한 정치·외교적 갈등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 총리 [4]무솔리니 정권은 국가적 통합을 도모하고, 교황청은 자치권을 회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협상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되면서 "로마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 조약은 당시 이탈리아 총리 [4]베니토 무솔리니와 [3]교황 비오 11세의 대표 추기경 [5]피에트로 가스파리가 서명했다.
조약의 주요 내용으로는 ① 바티칸 시국의 독립 승인, ② 교황청에 대한 재정적 보상, ③ 가톨릭교의 이탈리아 국교 지정 등이 포함되었다. 이를 통해 교황청은 국제적으로 독립적 지위를 얻었고, 무솔리니 정권은 가톨릭 신자들의 지지를 확보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이 조약은 이탈리아와 교황청 간의 관계 개선과 바티칸의 독립 보장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며, 이후 1984년 이탈리아와 바티칸은 라테라노 조약을 일부 개정하여 가톨릭교를 국교에서 제외하였고, 이탈리아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1] 교황령(Papal States) : 중세 초기부터 근대까지 가톨릭 교황의 지배권이 미치는 영지로 교황국, 교회국, 교회령, 베드로 세습령이라고도 부른다. 동로마 제국에서 독립하여 성립되었고 이탈리아 통일로 멸망하였다. 1929년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로마시 안에 바티칸 시국을 건국함으로써 제한적으로나마 교황의 영토 주권이 회복되었다 [2] 교황 비오 9세(Pope Pius IX, 1792년 5월 13일~1878년 2월 7일) : 제255대 교황. 재위: 1846년 6월 16일 ~ 1878년 2월 7일. 교황령이 이탈리아 왕국에 강제 병합당할 당시에 재위하던 교황 [3] 교황 비오 11세(Pope Pius XI, 1857년 5월 31일~1939년 2월 10일) : 제259대 교황. 재위: 1922년 2월 6일 ~ 1939년 2월 10일 [4]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년 7월 29일 ~ 1945년 4월 28일) : 이탈리아 왕국의 제27대 이탈리아 왕국의 총리. 파시즘을 주도한 이탈리아의 정치인 [5] 피에트로 가스파리(Pietro Gasparri) : 국무원장 추기경(임기 1914–1930). 바티칸 교황청의 내각 역할을 수행하는 국무원을 관리하는 직책
대공항(Depression)은 높은 실업률, 임금삭감, 물가하락, 기업 활동의 위축을 동반하는 대규모 경제 공황을 뜻하며 일반적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공황을 말한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전세계 경제 침체 현상으로 금융 시장의 대혼란과 대규모 실직 사태가 일어나 당시 서구 자본주의 사회 체계를 뒤흔들어 버렸고 미국은 1929년 10월 24일(검은 목요일)월스트리트의 주가가 급작스럽게 폭락하면서 경기침체의 시작을 알렸다.
대공황의 영향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만주사변은 일본이 중국 동북지역인 만주를 무력으로 점령하기 위해 조작한 군사적 충돌 사건으로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전초가 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 [10]관동군이 스스로 철도 폭파 사건을 일으킨 후 이를 구실로 중국군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국제 질서를 교란시킨 침략행위로 국제적 비판을 받았다. 9·18 사변으로도 불린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요동반도의 조차지와 남만주 철도에 대한 이권을 확보하였고 [10]관동군이라는 군사력을 해당 지역에 주둔시켜 만주의 정치 및 경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내에서 만주의 자원을 완전히 확보하고 중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친일 정권을 수립하려는 침략적 여론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밤에 일본 관동군은 중국군이 남만주 철도의 [1]류탸오후 구간을 폭파했다는 구실을 내세워 [6]장쉐량이 이끄는 중국 [4]동북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폭파는 일본군 스스로가 저지른 자작극이었다. 이 작전은 일본군 내부에서 독단적 행동으로 이뤄졌지만 일본 정부와 본국 군부는 이를 묵인하거나 추인함으로써 전면 침략을 사실상 승인하였다.
[6]장쉐량의 동북군은 전열이 정비되지 못하고 사기가 낮았으며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하고 있었던 [3]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철군하였다. 또한 무력 충돌 대신 국제연맹이나 외교적 해결을 통해 일본의 부당함을 알리고 만주의 주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관동군은 랴오닝성의 중심 도시인 선양을 거의 무저항 상태로 점령하였고 이어서 장춘, 하얼빈, 길림 등 만주 전역으로 군을 확대 투입하였다. 그리하여 불과 수 개월 만에 만주 전역이 일본군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1932년 3월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7]푸이를 대표로 내세워 [8]만주국을 수립하고 이를 독립국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일본의 괴뢰정권에 지나지 않았으며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제연맹은 만주사변을 조사하기 위해 [9]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였고 1933년 보고서를 통해 일본의 무력 점령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만주국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이 사건은 국제사회가 일본의 군사행동을 억제하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로 훗날 독일, 이탈리아 등의 파시스트 세력이 유사한 방식으로 국제 규범을 무력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만주사변은 단기간의 군사작전으로 끝났으나 그 결과는 심각하였다. 일본은 만주를 병합함으로써 자원의 확보와 대륙 침략의 거점을 마련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이 자작극을 일으켜 무력을 사용하고 영토를 침탈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군사 대응을 하지 않은 점은 많은 국민과 정치 세력으로부터 비겁함과 무능함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6]장쉐량의 [4]동북군이 전투 없이 철수한 사건은 국가적 치욕으로 받아들여졌고 대일 투쟁을 외면한 채 공산당 토벌에만 집중하는 정책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 사회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고 국민적 분노와 압력은 제2차 국공합작의 계기로 이어져 국민당과 공산당의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만주사변은 1930년대 국제질서를 위협한 첫 번째 본격적인 침략전쟁이자 동아시아 전체를 장기적인 전쟁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인 전환점이었다.
[1] 류타오후 :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북쪽 교외에 위치한 지역. 오늘날의 행정구역상으로 선양시 위퉁구 또는 다둥구 부근에 해당하며 철도 교통의 요충지이자 사건 기념비와 박물관이 있는 역사적 유적지로 보존되어 있다 [2] 류탸오후 사건 :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으로 펑톈 북동쪽 류타오후 부근을 지나는 만철 선로에 폭약을 가설해 폭파한 뒤 중국군의 소행으로 가장하고 이를 명분으로 중국군을 기습 공격한 사건 [3] 장제스(蔣介石, 1887년 10월 31일~1975년 4월 5일) : 장개석.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인. 중화민국 국민당 주석(1943년 8월 1일-1948년 5월 20일). 중화민국의 1·2·3·4·5대 총통(임기, 1950년 3월 1일-1975년 4월 5일) [4] 동북군 : 동북변방군. 1920년대에 만주에 주둔하던 중화민국 정부의 군대이다. 중국 동북 지역에서 성립된 북양군벌의 한 파벌 [6] 장쉐량(張學良, 1901년 6월 4일~2001년 10월 14일) : 한자음 장학량. 장쭤린(장작림)의 아들로 부친사후 동북군을 물려받은 실질적인 지휘자. 장제스를 납치한 시안사건으로 유명하다. 100세로 장수 [7] 푸이(溥儀, 1906년 2월 7일 ~ 1967년 10월 17일) : 청나라 제12대 황제인 선통제(재위, 1908년 12월 2일 ~ 1912년 2월 12일, 복위, 1917년 7월 1일 ~ 1917년 7월 12일), 만주국 초대 황제이자 유일한 황제(재위, 1934년 3월 1일 ~ 1945년 8월 18일). 1967년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사망 [8] 만주국(滿洲國) : 일본이 만주사변 직후 동삼성을 강제로 점령하여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국이자 식민지 [9] 리튼 조사단(Lytton Commission) : 국제연맹이 만주사변과 만주국을 조사하기 위하여 조직한 국제연맹 중일 분쟁 조사위원회. 영국의 제2대 리턴 백작인 빅터 불워리턴이 단장을 맡았다 [10] 관동군 : 일본이 세운 괴뢰 정권인 만주국에 주둔한 육군소속 부대. 용어 자체는 산해관(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관문으로 군사 요충지)의 동쪽에 주둔한 일본군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봉창(1901~1932) 의사는 서울 용산 출신으로 용산 문창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과 함께 히로히토 일왕 폭살계획을 세워 1932년 1월 8일 일왕의 거처로 통하는 문들 중 하나인 동경 사쿠라다 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히로히토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비록 거사는 실패했지만 이봉창 의거가 기폭제가 되어 임시정부는 더욱 활발히 의열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 이치가야 형무소 : 이봉창 의사를 비롯해 박열 의사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형되고 돌아가신 도쿄에 있는 형무소이다. 지금은 철거되어 없어지고 그 터에는 주택들과 놀이터로 바뀌었지만 한자로'형사자위령탑'이라고 적혀있는 비석이 남아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며 만주 일대를 점령하자, 그러나 일본군은 서양열강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하여 조계지를 가지고 있는 상하이 지역에 눈독을 들였다. 당시 상하이는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이 조계지를 설치하고 막대한 양의 자본을 투자한 곳이었다.
1월 18일에 일본인 승려 일행이 상하이 삼우실업사(三友實業社)근처에서 중국인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그중 1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다(일본이 고용한 중국인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월 20일 이를 구실로 일본인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일부는 삼우실업사 공장을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 중국 경찰과 일본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일본은 상하이 시 당국에 일본인 살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와 가해자 처벌,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 중국 측은 결국 이튿날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중국 측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즉각 군사적 공격을 시작했다.
1월 28일 상하이 조계(租界) 경비를 담당하던 일본의 해군육전대와 중국의 19로군(十九路軍) 사이에 전투가 발발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상하이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은 3만여 19로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고, 영국과 미국 총영사의 중재로 일시 정전 협약이 성립했다.
중국은 국제 연맹에 일본의 침략을 제소했다. 그러나 일본은 2월 5일 육해군을 포함해 총 1만 7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전투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잘 방어해오던 중국 19로군운 갑자기 철수하였다.
3월 하순부터 중일 양국 및 중국에 많은 이권을 갖고 있던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4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정전 회담이 열렸다. 결국 5월 5일 국제 연맹의 협정안 채택을 거쳐 정전 협정이 성립했다. 일본군은 7월 17일 상하이에서 철수했다.
19로군의 철수로 인해 상하이는 자국의 군대를 상주시키지 못하는 지역이 되었다
[참조]
- 국사편찬위원회-우리역사넷
- 위키백과
* 조계(租界, concessions in China): 청나라에 있었던 외국인이 행정자치권이나 치외법권을 가지고 거주한 조차지
1932년 4월 29일 일본은 중국 상하이시 훙커우 공원(현재 루신공원)에서 1차 상하이 사변의 승리 자축과 일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진다.
독립운동가 윤봉길은 폭탄을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하여 홍커우 공원에 입장한다. 11시 40분에 윤봉길은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리고 나서 묵념을 올리는 순간을 노려 기념식 단상으로 접근해 물통 폭탄을 투척하여 폭발했으나,도시락 폭탄은 불발되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물통 폭탄 폭발로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는 사망했으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어 애꾸눈이 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를 절단했다. 특히 오른발이 잘려 절음발이가 된 주 중국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1945년 9월 2일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 외무대신 자격으로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항복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윤봉길의사는 현장에서 체포 당한후 엄청난 구타를 당했으며, 연행 후 고문을 받고 5월25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육군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 훙커우공원 : 현재는 루쉰공원이며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에 위치한 공원이다. 루쉰은 중국의 소설가로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뉴 딜(New Deal)은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경제 구조와 관행을 개혁해, 대공황으로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이 1933년~1936년에 추진하기 시작한 경제 정책이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경제 불황이 미국 전역으로 퍼지고, 당시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필사적인 방지 대책에도 물가는 폭락하여 GNP를 1932년 당시 1929년의 56%로 떨어뜨리고 1,300만명의 실업자를 양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상황과 대통령 선거 시기가 도래되고, 이때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루스벨트는 대선의 최대 이슈인 대공황 극복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라 불리는 각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일종의 정책 자문단을 만드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기회와 부의 불균형, 경제적 불황으로부터 국민들을 구제하겠다는, 즉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신정책)'을 약속한다.
당선된 루스벨트는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브레인 트러스트의 자문을 중심으로 구상된 정책들을 내놓게 되는데 이것이 뉴딜 정책의 시작이다.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은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랍인들이 영국 식민 통치와 유대인 이민에 반대하며 일으킨 대규모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이는 20세기 중반 중동 지역에서 발생한 가장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아랍 민중 봉기 중 하나였으며, 현대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의 기원으로 간주된다. “팔레스타인 아랍 봉기”로도 불린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에 따라 통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1917년 [1]벨포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국가 설립을 지지한다고 밝히며 [2]시오니즘 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유럽 등지에서 유대인 이민이 급격히 증가하였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토지와 주권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 토지 상실, 정치적 배제 등이 겹쳐져 팔레스타인 아랍 사회 내에서 점차 강경한 민족주의 정서가 확산되었다.
반란은 1936년 4월 [3]자파에서 유대인 차량 공격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랍 지도자들은 총파업을 선언하며 영국 당국과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을 선포하였다. 총파업은 무려 6개월간 지속되며 아랍 사회 전체가 상점 문을 닫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며 저항에 동참했다. 이 시기의 저항은 비교적 비폭력적인 정치적 운동의 형태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아랍 무장 단체들은 유대인 정착촌과 철도, 송전선 등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반란은 무장 봉기로 확산되었다. 반란은 이후 1937년부터 1939년까지 본격적인 무장투쟁으로 전환되어 아랍 민병대와 영국군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이어졌다. 반란 세력은 팔레스타인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쳤으며 영국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고 유대인 방위조직인 [4]하가나와 협력하였다.
영국은 반란 초기에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점차 무력 진압에 집중하였다. 1937년 [5]필 위원회는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자는 제안을 내놓았으나 아랍 측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계속되는 반란군의 저항에 대항하면서 영국은 대규모 병력을 추가 투입시켰고, 결국 1938년에 아랍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대규모 저항은 실패하였고 수많은 아랍인이 체포·유배·처형되거나 지도부가 해체되었다.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 아랍 사회는 조직력과 지도력을 크게 상실하며 향후 유대인 이민과 시온주의 세력의 부상에 실질적인 대응력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은 아랍 민족주의 세력의 큰 타격과 함께 정치적 주도권의 상실로 이어졌다. 또한 아랍과 유대인 양측 모두의 불만을 불러일으키며 장기적인 갈등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1] 벨포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포어(Arthur Balfour)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내 민족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힌 공식 문서 [2] 시오니즘 운동 : 유대 민족이 고대 이스라엘 땅(특히 예루살렘과 시온 산)을 중심으로 민족 국가를 재건하자는 정치적 민족주의 운동 [3] 자파(Jaffa) : 이스라엘에 위치한 지중해 해안가의 오래된 도시 [4] 하가나(Haganah) : 1920년부터 1948년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조직한 반군 및 자위 조직으로, 유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함께 이스라엘 방위군으로 통합되며 공식적인 국가군으로 재편되었다. [5] 필 위원회(Peel Commission) : 1936년 10월 11일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유대 갈등을 조사하기 위해 설립한 공식 조사 위원회이며 정식 명칭은 팔레스타인 왕립 조사위원회이며, 위원장 윌리엄 로버트 필(W. R. Peel)경의 이름을 따서 불린다
1931년 총선에서 공화파는 대승을 거두었고 이에 알폰소 13세가 퇴위하여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스페인은 제2공화국 체제가 된다. 이후 1936년 2월 총선 결과 공화파내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두면서 토지 개혁등 개혁정책을 시행하자 자본가.카톨릭 교회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마침내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 주둔하고 있던 프란시스꼬 프랑꼬 장군이 스페인 제2공화국의 공화파에 쿠데타를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다.
공화파는 쿠데타군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이질적인 집단의 혼합체로서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전투력을 보유하지 않았다.
스페인 공화국 정부는 1939년 3월 28일을 기점으로 마드리드, 발렌시아가 점령당하고 바르셀로나까지 쿠데타군의 무저항 입성되자 4월1일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내전으로 인해 스페인은 전 지역이 황폐화되었다. 이후 스페인의 총통이 된 프란시스꼬 프랑꼬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일인독재정치를 계속하였으며 조직적인 숙청행위가 행해졌다.
1975년에 부르봉 왕조가 복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프란시스꼬 프랑꼬(Francisco Franco, 1892년~1975년) : 스페인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스페인 총통(국가원수)을 역임했으며 독재자이다.
* 부르봉(Bourbon)왕가 : 1589년부터 프랑스 등 유럽 일부 국가를 통치했고 일부는 현재도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왕조. 스페인에서는 1701년부터 통치하고 있었으며 스페인의 공화정으로 인하여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망명하였다(알폰스 13세). 1975년 알폰스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 1세로 스페인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1]동북군을 물리치고 만주지역을 [2]관동군 휘하에 두게 된다. [3]장쉐량이 이끄는 20만 동북군이 관동군에 패배한 것이다.
국민당 [4]장제스가 중국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하고 동북지방을 일본에 내어주는 동안 중국내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총을 겨누지 말고 합심하여 일본과 싸우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1936년 12월, 대일항쟁을 요구하는 동북군의 [3]장쉐량은 계속해서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하는 [4]장제스를 [5]시안에서 납치하여 연금하였다. 일련의 하극상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장쉐량은 아래와 같이 8개 항목의 조건을 장제스에게 요구했다.
1. 난징 정부를 개편하여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 공동으로 구국의 책임을 진다.
2. 일체의 내전을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한다.
3. 상하이에서 체포된 애국지도자를 즉시 석방한다.
4. 전국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한다.
5. 인민의 집사, 결사 등 모든 자유를 보장한다.
6. 인민의 애국운동을 개방한다.
7. 쑨원 총리의 유언을 준수하고 실행한다
8. 즉시 전국구국회의를 소집한다.
공산당의 중화소비에트 정부는 찬성을 표시했다. 장제스는 12월 25일 석방되었고 시안사건을 계기로 장제스는 요구사항을 거부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공산당과 합작을 약속했다. 그리고 다음 해 7월 7일 베이징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본격적인 중일전쟁의 신호탄이 된 [7]7.7사변(노구교사변)이 일어나자 9월에는 공산당과 제2차 합작을 하고 기나긴 항일전쟁에 돌입했다. 공산당의 소비에트정부는 국민정부 휘하의 정부로 격하되고 [6]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칭되었다
장쉐량은 난징에서 장제스에게 스스로 처벌을 요청하였고 12월 31일 군사법정에서 10년 금고형과 5년간의 공민권 박탈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해인 1937년 1월 4일 사면을 받았다. 이후 가택연금에 처했으며 1993년이 되어서 풀려났다고 한다.
[출처]
-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세계의 역사, 박구병외 8인, 2021, P.54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동북군 : 중국 동북 지역에서 성립된 장쭤린(장작림)의 군벌로 20만 병력의 대군벌. 국민정부 장제스의 휘하에 들어간다. 봉천군벌, 동북군벌이라고도 부른다.
[2] 관동군 : 일본이 만주에 세운 괴뢰 정권의 부대
[3] 장쉐량(중1898년~2001년) : 한자음 장학량. 장쭤린(장작림)의 아들로 부친사후 동북군을 물려받았다. 중화민국의 군벌 정치가. 103세로 장수.
[4] 장제스(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5] 시안(서안) : 중국의 산시 성의 성도. 옛 이름은 장안
[6] 홍군 : 중국 인민해방군의 과거(1927년~1937년) 명칭. 제2차 국공합작무렵 편제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1937.8)과 신사군(1939.10)의 명칭으로 불렸다. 일본항복 이후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7] 7.7사변(루거우차오사건) : 루거우차오의 한자음은 노구교. 중국 베이징의 노구교부근에서 총성이 울렸고 이는 중일전쟁의 서막이었다
루거우차오 사건은 1937년 7월 7일에 베이징 서남쪽 방향 [1]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벌어진 중일간의 교전사건으로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7.7사변으로 통칭한다.
괴뢰 만주국을 수립하고 화북 지역을 장악한 사실상의 점령군인 일본군이 베이징 서남쪽 교외의 돌다리인 [1]루거우차오(노구교)를 사이에 두고 중국 [3]국민혁명군과 긴장 속에 대치하던 때였다. 로거우차오의 동쪽은 명나라 말기의 성곽도시인 완핑성이 위치하고 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서쪽인 [2]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예고 없이 야간 실탄훈련을 실시했다.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훈련을 끝내고 부대로 복귀한 일본군은 병사 한 명이 행발불명된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여 상급부대에 그 사실을 보고한 뒤 중국군측에 직접 수색 및 진상 조사를 벌이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중국군은 루거우차오는 중국영토이며 일본군이 성내에 들어와 조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7월 8일 오전 2시에 일본은 완핑성내 조사를 실시하게 해 달라고 재차 요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군사력을 동원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중국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완핑성 인근을 수색하였고, 일본군 중대 전원도 실종된 병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실종된 병사는 20분뒤에 무사히 복귀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문제의 병사가 귀대했음을 밝히고 행방불명의 상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으므로 쌍방 합동으로 조사하는 제의를 하면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협상이 진쟁되던 중에 7월 8일 새벽 4시 50분경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완핑성 내부의 주요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 이에 중국군도 격렬한 저항에 나섰지만 결국 루거우차우는 빼았겼다. 일본군의 도발과 교전이 사흘간 계속 이어졌다. 7월 11일 전투가 중지된 상태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교섭에서 일본군은 세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베이징 내의 모든 반일단체를 일소하고 반일활동을 중지하며 국민당은 모든 사건의 책임을 지며 중국군 고위 장교들은 반드시 사과하라는 일본군의 조건으로 사태는 마무리되는 듯 했다.
중국은 일본이 군사적 침략이 계속되는 한 부국강병이 근본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다. 중국의 [4]장제스는 내전을 종식하고 국민당군에 공산당의 홍군까지 편입하여 일본군과 전면전 준비에 착수했다. 일본은 루거우차오 사건이 '중국의 계획적인 무력공격'이라고 규정하고 군대를 증파했다.
협상은 결렬되고 일본군은 7월 28일에 베이징과 텐진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8년간의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1] 루거우차오(盧溝橋) : 한자음 노구교. 중국 베이징시의 서남쪽을 흐르는 영정강(永定河)위에 놓인 돌로 만들어진 아치 모양의 다리. 전체길이 약 270m이고 11개의 아치로 구성되어있다. 금나라때인 1192년에 완성하였는데 난간에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을 한 사자 조각상 501개가 설치되어 있다.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에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석조 다리'라고 서술한 것에 기인하여 서양에서는 '마르코폴로다리'라고도 불린다
[2] 펑타이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의 6개구중 하나. 로거우차오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명나라 말기의 성곽도시인 완핑성(宛平城)이 위치하고 있다
[3] 국민혁명군 : 북벌에 의해 중국을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한 군대로서 1925년에 중국 국민당에 의해 창설되었다.
[4] 장제스(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중일 전쟁은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중국)과 일본의 전쟁이다
상하이 전투 또는 제2차 상하이 사변으로 부른다.
1937년 8월 9일 일본군이 정찰 명목으로 중화민국의 관할 구역인 홍차오 공항에 진입을 시도하다 중국군에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8월 13일 중국 관할구역인 바오산 도로로 진입한 일본군을 중화민국군이 총격을 가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 초반은 중국군이 우세해 보였다. 5만여 중국군이 일본군을 포위하는 형국으로 진행되었다.
3개월이 넘는 육지, 공중 및 해상에서의 광범위한 전투 끝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상하이에서 중국의 끈질긴 저항은 중국 정부가 중요한 산업을 내륙으로 이전하는 데 필요한 많은 시간을 제공하는 동시에 일본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동시에 동조하는 서구 열강을 중국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 3개월 간의 치열한 전투 동안 중국군과 일본군은 일본군이 상륙작전을 벌인 상하이 시내와 변두리 마을, 양쯔강과 항저우만 해변에서 교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만여명이 전사했지만, 중국군은 이 전투에서 25~30만 명이나 희생되었다. 이후 난징(南京)의 함락으로 이어지고 중일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사건이 되었다.
중일 전쟁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인 [1]난징을 점령한 일본이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화민국군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중국인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약 30만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몇몇 중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학살했으며, 어린이는 물론 늙은 노인까지 잔인하게 강간한 뒤 잔인하게 살해했다."라고 전해진다.
[1]난징 대학살의 책임자인 다니 히사오와 100인 목베기, 300인 목베기 경연대회를 자행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노다 쓰요시, 다나카 군키치는 [2]극동군사군사재판은 A급 전범만 다루기 때문에 B, C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현지 재판을 받기로 하여 1947년 9월 2일에 [1]난징의 중국 국민당 정권으로 신병이 인도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48년 1월 28일에 난징의 [3]우화대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난징 대학살 기념관을 1985년 설립하여 매년 12월 13일에 추모식을 가지며, 일본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난징대학살은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1] 난징(Nanjing) : 중화민국(대만, 지도자 쑨원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의 명목상 수도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쑤성의 성도
[2] 극동국제군사재판(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IMTFE) : 포츠담 선언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일본군의 A급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국제적으로 행한 심판한 재판
[3] 우화대(雨花台, 위화타이) : 난징시에 있고 중국 국민당 통치 시절엔 공산혁명가 수십만이 이곳에서 처형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