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은 성지순례를 존중하여 왔는데 특히 11세기에는 예루살렘 순례가 성황을 이루었다.
11세기 전반까지는 그 당시 동방을 지배하고 있던 사라센인(이슬람)은 순례자들에게 관대했으나 11세기 후반부터 세력을 잡은 셀주크 제국은 기독교 순례자를 박해하였다. 또한 셀주크 제국은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였고, 이에 비잔틴제국은 유럽의 원군을 얻기 위한 지원요청을 하게 되었다.
교황 [1]우르바노 2세는 1095년 [2]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이슬람 세력이 점유하고 있던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하여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였다. 십자군 원정을 통하여 교황 [1]우르바노 2세는 당시 동방교회(정교회)와 서방교회(가톨릭)로 분열되어 있던 기독교를 통합하여 교황권의 권위를 찾으려 했다.
[3]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제1차 이슬람 원정을 시작으로 제8차 원정까지 시도되었으나 본래의 목적이었던 예루살렘의 탈환은 달성하지 못하였다.
[1] 우르바노 2세(Pope Urban II, 1035년~1099년) : 제159대 교황(재위: 1088년 3월 12일 - 1099년 7월 29일). 프랑스인으로 오늘날 로마 교황청 조직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2] 클레르몽 공의회(Council of Clermont):1095년 11월 18일부터 11월 28일까지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합동 주재로 열렸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회의.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제1차 신ㅂ자군 원정을 호소하였다 [3] 레반트(Levant) : 서아시아에서 동지중해에 접해있는 지역으로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그리고 이집트의 시아니반도등을 포함하고 있다. 어원은 라틴어 "levante"로 "해가 떠오르다"라는 뜻으로 동쪽에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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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고려 17대 국왕, 재위:1122년~1146년) 4년 왕실의 외척이었던 이자겸(? ~ 1127년)이 척준경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왕위를 찬탈하려고 일으킨 난이다.
인종은 척준경을 이자겸과 갈라서게 해야 된다는 최사전의 계략을 수용한 결과, 이자겸은 얼마 안 있어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포박되어 유배되었으며 인주이씨의 외척세력은 이로써 몰락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개경파 문벌 귀족(김부식등)의 반대로 서경 천도 운동이 좌절되자, 묘청은 서경에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 이름을 천경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정하고 난을 일으켰다.
고려 인종(제17대 국왕, 재위:1122년~1146년)의 명을 받은 김부식이 지휘하는 관군이 서경성을 포위하며 공격하였으나 반란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고전하였다. 이처럼 반란군은 1년 넘게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관군의 총공격으로 결국 서경성이 함락되면서 진압되었다.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하여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일천년래제일대사건'이라 평가하였다. 이 난을 낭불양가(郎佛兩家)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하였다.
* 원종(1109년~1146년) : 고려 제17대 국왕, 재위: 1122년~1146년
* 서경(西京) :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이며 고려시대의 행정구역중 3경(서경,개경,동경 혹은 서경,개경,남경)중 하나이다. 현재의 평양이다.
무신정변(武臣政變)은 고려시대 의종(1127년 5월 23일~1173년 11월 7일, 고려 제18대 국왕, 재위: 1146년 ~ 1170년) 24년(1170년) 8월 30일(음력)에 상장군 정중부와 이의방, 채원, 이고, 이의민 등의 휘하 장수들이 보현원에서 문신들을 살해한 사건이자 쿠데타이다.
무신들의 주도로 일어난 정변이었기 때문에 무신의 난, 정변이 일어난 해가 경인년이었기 때문에 경인의 난, 정중부의 이름을 따서 정중부의 난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실질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난(亂)이라 하기엔 절절하지 않다.
1170년 이후 무신정권은 1270년까지 100년간 존속되었다.
* 보현원 : 경기도 장단군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곳에 있는 원(院)으로 의종(毅宗)이 여기에 못을 만들고 놀이하는 곳으로 삼아 자주 거동하였다.
공주 [1]명학소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으므로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고려시대 지방행정제도에서 주군현(州郡縣)은 도의 하위 행정 단위로서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모든 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지는 않았으며, 일부 현에만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지방관이 파견된 현을 주현(主縣), 그렇지 않은 현을 속현(屬縣)이라 불렀다. 현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향·소·부곡이 존재했다.
종래에는 노비와 향(鄕)·소(所)·부곡(部曲)의 거주민, 즉 잡척(雜尺)을 모두 천인(또는 천민)이라 간주했으나, 최근 학계에서는 향(鄕)·소(所)·부곡(部曲)의 거주민은 양인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향·소·부곡민은 타지역민과 같이 조세, 공부(貢賦), 역역(力役), 국유지 경작하는 의무가 있었다. 특히 소(所)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수공업품, 광산물 등 특수 물품 생산지 역할을 하였다. 금소(金所)는 금을 생산, 은소(銀所)는 은을 생산, 자기소(磁器所)는 고려청자 생산지였다.
[3]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명학소(鳴鶴所)는 충청도 공주목 유성현(濡城縣) 동쪽 10리에 있는 곳으로 기록되어 현재의 대전광역시 탄방동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명학소는 숯을 생산하는 탄소(炭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所)의 주민들은 천민과 다를 바 없는 대접을 받으면서 각종 부담은 일반 군현민보다 무거웠다. 이 시기는 지방관들의 수탈과 횡포가 심했던 고려 [2]명종 6년 무신집권시대로 이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명학소에 거주하던 망이와 망소이가 주동이 되어 공주를 공격해 함락시킴으로써 반란이 시작되었다. 반란 초기에 고려 조정은 반란군을 회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3천명의 토벌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패배하였다.
고려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켜 지방관을 파견해 다시 반란군을 회유했으나, 이때에도 응하지 않고 예산현을 공략해 충주까지 점령하였다. 고려 조정은 정세유와 이부를 출정시켜 대대적인 토벌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주효해 1177년 정월에는 망이·망소이가 강화를 요청하여 항복함으로써 난이 일단 진정되는 듯하였다. 고려 조정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처형하지 않고 오히려 곡식을 주어 향리로 호송하였다.
그러나 한 달 뒤인 2월에 망이·망소이 등은 재차 봉기해 [5]가야사를 약탈했고, 3월에는 [6]홍경원을 불태우고 승려 10인까지 죽였으며 개경까지 진격할 것임을 내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때 망이 등이 홍경원의 주지승을 시켜서 개경에 전달한 글에 의하면, 이들이 다시 봉기하게 된 이유는 난이 진정된 이후 조정에서 다시 군사를 보내 그들의 가족들을 가두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7]아주를 함락시키고, 청주를 제외한 청주목 관내의 모든 군현을 점령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은 강경책을 펼치면서 같은 해 5월에 충순현에서 명학소로 강등시키고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토벌하였다.
1177년 7월에 병마사 [4]정세유가 망이와 망소이를 체포해 청주의 옥에 가둠으로써 반란은 완전히 진정되었다.
이 난은 비록 실패했지만, 고려사회 신분질서를 타파하려는 신분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선구적인 의미가 인정되며, 실제로 이후 향·소·부곡 등 특수행정구역의 소멸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평가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망이 망소이의 난(亡伊亡所伊─亂))
[1] 명학소 : 현 대전광역시 탄방동으로 추정
[2] 명종(1131년~1202년) : 고려 제19대 국왕(재위: 1170년 ~ 1197년)
[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조선 성종 당시인 1530년에 편찬한 지리서. 전 55권 25책
[4] 정세유(생몰년 미상) : 고려후기 서북면병마사, 형부상서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5] 가야사(伽耶寺): 충청남도 예산군 던산면에 있던 고려전기 사찰
[6] 홍경원 : 충청남도 천안시 성환읍에 있었던 고려전기 사찰
[7] 아주 : 지금의 중청남도 아산
고려사회는 엄격한 신분질서가 강조되는 가운데, 특히 노비의 경우는 그 사회적 처지가 가장 열악하였다.
무신정변은 문무의 지위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신분 질서에 많은 변동을 가져왔다. 또한 무신집권기에 천민 출신의 인물이 관직에 오르고 출세하는 사례가 있었으므로 신분에 대한 전통적인 권위의식이 무너져갔다. 그리고 당시 농민들의 봉기 또한 빈발함으로써 천민들이 이에 합세하거나 독자적으로 향·소·부곡민이나 천민들이 신분해방을 위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1198년 5월에 고려 무신 집권기에 최충헌의 노비 만적이 중심이 되어 개경 북산(北山)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노예들을 불러모아 "무신란 이후에 고관이 천한 노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종자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동하면서 반란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흥국사에서 모여서 궁중으로 몰려가 난을 일으키고, 환관과 궁노들의 호응을 받아 먼저 최충헌을 죽인 다음 각기 자기 주인들을 죽이고 노비가 기록되어 있는 문서를 불사르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날에 수백 명 밖에 모이지 않자 이 정도 병력으로는 거사를 도모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4일 후에 다시 보제사에 모여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당시 자리에 있었던 율학박사 한충유의 종인 순정이 주인에게 밀고함으로써 반란계획이 누설되어 실패로 끝났고, 만적 등 1백여 명은 죽임을 당하였다.
이 반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무신집권기에 신분해방을 목표로 일어난 천민반란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적의 난)
- 위키백과(만적의 난)
* 신종(神宗, 1144년~1204년) : 고려의 제20대 국왕, 재위 : 1197년~1204년
* 향·소·부곡 :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있었던 하급 주민들의 지역. 향·소·부곡 사람들의 신분은 양민이지만 그 신분이 노비·천민에 유사한 특수한 열등계급
* 흥국사 : 고려시대 개경에 있던 사찰로서 고려 태조 7년(924) 창건되었다
* 보제사 : 고려시대 개경에 있던 사찰
* 율학박사 : 고려시대 율령(律令) 사무를 담당한 관직
1231년(고종 19년)부터 1259년(고종 46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9차례에 걸친 몽골 제국의 고려 침입으로 발생한 전쟁이다.
13세기 초부터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크게 요동쳤다. 몽골이 성장하여 주변 국가들을 침략하였고, 그 여파가 고려에도 미쳤다.
고려와 몽골은 1219년에 양국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형제맹약을 맺었다. 이후 몽골은 고려에 과도한 공물을 강요했고, 몽골 사신들의 무례한 행동으로 갈등이 고조되었다.
몽골사신 저고여는 고려에 두차례에 걸쳐 파견되었으며, 그중에 1225년에 현재의 평안북도 의주군을 거쳐 돌아가던 중 압록강변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 제1차 침입(1231년 음력 8월 ~ 1232년 음력 3월)
몽골은 고려의 수행이라 주장하면서 양국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져 결국 국교 단절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1231년에 몽골의 장수 살리타이가 군사 3만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다.
몽골군은 압록강을 넘어 의주,철주등을 단숨에 함락시키고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포위하자 고려의 고종은 강화를 맺고 몽골의 제1차 침입은 종료된다.
2. 제2차 침입(1232년 음력 8월 ~ 1232년 음력 12월)
불리한 상황에서 몽골과 강화를 맺었지만 무신정권의 최우는 몽골의 침략에 대비하여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항전태세에 돌입하자 분노한 몽골은 제2차 침입을 하였다. 몽골은 개경을 함락시킨 후 계속 남하하여 공격했지만 처인성 전투에서 몽골의 사령관 살리타이가 승려인 김윤후에게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바람에 퇴각하였다.
이 2차 침입 때 많은 문화재가 불타 사라졌고 부인사에 소장되어있던 "고려대장경"의 초조대장경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3. 제3차 침략(1235년 윤달 7월 ~ 1239년 4월)
금나라가 1234년에 멸망하자 몽골의 탕우타이가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였다. 이때 경주 황룔사가 불타 없어지고 문화재를 약탈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몽골군의 만행이 계속 자행되자 고려는 강화를 제의하여 철수하였다.
4. 제4차 침략(1247년 윤달 7월 ~ 1248년 3월)
고려가 강화 약조를 지키지 않자 몽골의 아무칸은 고려를 침입하였다. 이 시기에 고려의 최우가 사망하고 최항이 권력자가 된다.
5. 제5차 침략(1253년 7월 ~ 1254년 1월)
6. 제6차 침략(1254년 7월 ~ 1254년 12월)
7. 제7차 침략(1255년 9월 ~ 1259년 3월)
8. 제8차 침략(1257년 5월 ~ 1257년 10월)
9. 제9차 침략(1258년 4월 ~ 1259년 3월)
* 몽골제국 : 1206년에 징기스칸(테무진)이 건국한 국가. 현재의 몽골
* 저고여(? ~ 1225년) : 몽골 제국의 장군으로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 살리타이(? ~ 1232년) : 몽골 제국의 장수
* 처인성 :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 고종(1192년~1259년) : 고려 제23대 국왕. 재위: 1213년 ~ 1259년
* 부인사 : 대구 팔공산에 위치한 불교사찰
* 초조대장경 : 제1차 간행한 대장경. 거란의 침입을 받아 곤경에 처했을 때 불심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간행된 판
1232년(고종 20년) 몽골의 제2차 침입 당시 고려의 [1] 백현원의 승장 [2] 김윤후가 몽골군의 장수 [3] 살리타이를 [4] 처인성에서 사살한 전투이며, 몽골군을 퇴각하게 만들었다.
고려는 제1차 몽고침략 당시 강화를 했지만 몽골의 침략에 대비하여 고려의 [7] 고종은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이후 항전 태세에 돌입하자 분노한 몽골은 살리타이를 앞세워 침입했다. 몽골군은 배신자인 [5] 홍복원의 도움으로 [6] 서경을 함락시킨 후 개경에 도달하였다. 몽골군은 방화와 약탈을 일삼으며 남진을 하며 공격했다.
당시 처인성은 작은 토성이었으며 성안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은 정규병력 100여 명, 승려 100여 명, 그리고 다수의 부곡민뿐이었다.
처인성에 도착한 살리타이는 포위망을 좁혀오면서 치열하게 처인성 전투가 전개되었다. 처인성에 있던 승장 김윤휴는 활을 쏘아 사리타이가 사망하였다.
장수를 잃은 몽골군의 은 전의를 상실하여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8] 부인사 소장의 [9]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과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처인성전투의 승리로 몽골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남쪽지방은 전쟁의 피해를 줄이게 되었다.
처인성은 고려사회에서 천대받았던 부곡의 작은 토성이었으나 피난민들까지 합세하여 몽골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신분을 추월하여 나라를 지키려 했던 강인한 호국의지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 백현원 : 현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위치해 있는 사찰
[2] 김윤후(미상~미상) : 고려후기 동북면병마사, 추밀원부사, 수상공 우복야 등을 역임한 승병장
[3] 살리타이(미상~1232년) : 몽골 제국의 장수. 살리타는 '눈이 쌓인 산봉우리'라는 뜻이다
[4] 처인성 : 현 경기도 용인시
[5] 홍복원(1206년~1258년) : 고려의 무신이자 역신이며 원나라의 무신
[6] 서경(西京) : 현재의 평양. 서경은 고려삼경중 하나로서 고려시대에 불리던 지명이었다
[7] 고종(1192년~1259년) : 고려의 제23대 국왕(재위:1213년~1259년)
[8] 부인사 : 고려 시대에 부인사는 대구 팔공산에 위치한 대규모 사찰
[9] 초조대장경 : 제1차 간행한 대장경. 거란의 침입을 받아 곤경에 처했을 때 불심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간행된 판
모히전투는 헝가리 평원에 위치한 모히에서 몽골 제국과 헝가리 왕국 간에 벌어진 전투로, 몽골군의 유럽 침공 과정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사건이다. 이 전투는 유럽 중부 지역의 방어 체계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헝가리 왕국과 유럽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몽골 제국의 [2]오고타이 칸은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13세기 초반 유럽으로 진출했다. 1230년대 말에 몽골군은 동유럽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1241년에는 헝가리 왕국을 침공했다. 헝가리 왕국의 [3]벨러 4세는 몽골군의 침략을 예상하고 병력을 모아 방어 태세를 갖췄으나, 당시 헝가리 내부의 귀족 간 갈등과 군사적 준비 부족으로 인해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다.
몽골군은 [1]바투 칸과 [4]수부타이 장군의 지휘 아래 헝가리로 진격해왔으며, 이들은 기동성과 전략적 전술로 헝가리군을 압도했다. 헝가리군은 모히 평원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몽골군과 맞섰으나, 몽골군은 화살과 공성 무기 등을 동원해 압박을 가했다.
전투가 절정에 이르자 몽골군은 헝가리군을 포위하고 후퇴로를 차단한 뒤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몽골군의 뛰어난 기동력과 전술에 속수무책이었던 헝가리군은 대패했으며, 대부분의 병력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3]벨러 4세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피신했으나, 헝가리 왕국은 사실상 몽골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모히 전투는 몽골군이 유럽 중부에 막대한 충격을 가한 전투로 평가된다. 헝가리 왕국은 전투 후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인구의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몽골군은 헝가리의 수도와 주요 도시들을 약탈하며 큰 혼란을 초래했다. 헝가리 왕국은 이 전투 이후 수년간 몽골군의 점령 하에 놓였으나, 몽골 제국의 내부 문제와 [2]오고타이 칸의 사망으로 인해 몽골군이 유럽에서 철수하면서 헝가리는 재건의 기회를 얻었다.
모히 전투는 몽골 제국의 군사적 우수성을 보여준 사례로, 유럽 각국이 몽골군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방어체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이 전투는 유럽과 아시아 간의 충돌이 본격화되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되며, 몽골 제국의 유럽 침공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1] 바투(Batu Khan, 1205년 8월 18일 혹은 8월 7일 ~ 1255년) : 몽골 제국 킵차크 칸국의 칸(재위:1227년~1255년)으로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주치 칸(칭기즈 칸의 장남)의 차남 [2] 오고타이 칸(Ögedei Khan, 1185년 / 1186년 11월 7일(음력 9월 15일)~1241년 12월 11일(음력 11월 8일)) : 몽골 제국의 제2대 군주(재위: 1229년 9월 13일 ~ 1241년 12월 11일). 칭기스 칸의 셋째 아들 [3] 벨러 4세(Béla IV, 1206년 ~ 1270년 5월 3일) :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재위: 1235년 9월 21일 ~ 1270년 5월 3일) [4] 수부타이(Subutai, 1176년~1248년) : 몽골 제국의 개국공신으로 칭기스칸의 4구(전투에서 공훈을 발휘한 인물)중 한명
몽골과의 항전이 점점 어려워지자 고려는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최씨정권은 항전을 고집하면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강화파 문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몽골과 강화를 성립시켰다.
고려는 최씨정권 붕괴 이후에도 무신정권이 더 연장되었다. 이들은 강화도에서 개경환도를 거부하고 몽골과의 재대결을 주장하였다. 원종은 몽골 군대를 앞세워 무신정권을 종식시키고 왕정을 회복하였다.
그러자 무신정권의 무력기반이었던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진도와 제주도를 근거로 3년동안 항쟁을 벌였으나 결국 몽골-고려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 대몽골항전의 최후를 장식한 것으로서 그 후 고려는 14세기 중반까지 원나라의 간섭에 시달렸다.
* 원종(1219년~1274년) : 고려 제24대 국왕, 재위: 1259년~1274년
* 삼별초 : 최씨 무신정권기의 최우가 도적을 단속하기 위하여 밤에 순찰을 시키고자 야별초(夜別抄)를 편성하였다. 뒤에 도적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야별초를 각 지방에 보내 막도록 했는데, 그에 따라 야별초 군사가 많아졌으므로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나누었다. 또한 몽골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을 모아 편성한 부대를 신의군(神義軍)이라 하였다. 이렇게 3개의 별초군(別抄軍)을 삼별초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