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일본중국사건기간 : 1593년 1월 26일~1593년 1월 27일, 조회수 : 144, 등록일 : 2024-07-21
[1]벽제관 전투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에서 벌어진 일본군과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전투이다.
평안도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1593년 1월 평양에서 [4]이여송이 거느린 명나라 원군과 조선군 연합군에 대패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후퇴하여 개성과 황해도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까지 한성 부근에 집결시켰다. 집결된 총 병력은 5만에 이르렀으며, 전력을 정비한 일본군은 반격을 시도하였다.
명나라군은 평양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한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남진하였다. 일본군은 북상중에 명군의 진출 사실을 알고 선봉부대를 보내 [2]여석령 일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1월 26일 명군 선봉부대는 [2]여석령에서 일본군과 격돌하였으나 일본군의 유인으로 명군은 패배하였다. 이여송은 전공의 욕심에 자신의 기병만 이끌고 [1]벽제관으로 진군하였다. 그런데 벽제관은 비가 온 뒤라 땅이 진창이 되어 기동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다. 명군은 맹렬하게 싸웠으나 [7]고바야가가 이끄는 일본군이 나타나 기병만으로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사방에서 조총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백병전에 강한 일본군 3개 부대에 포위되었고, [4]이여송은 심복인 [5]이유승의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벽제관 전투는 명나라 부총병 [6]양원이 화기로 무장한 포병을 이끌고 도착하자 일본군은 [3]혜음령을 넘지 못하고 철수하면서 끝난다.
이 패배로 인해 명나라군의 한성 탈환 시 공조를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중인 권율장군 휘하의 3천의 조선군 병력은 고립된 신세가 되고 만다. 일본군은 벽제군 전투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요충지인 행주산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한성에서 철수하게 된다.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명나라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고, 그 뒤 명나라군의 적극성이 줄어들고 일본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또한 명나라가 일본에 휴전을 제안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 벽제관(碧蹄館) :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하루전 날 머물던 역관.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 [2] 여석령(礪石嶺) : 벽제관에서 3km가량 떨어져 있는 고개. 숯돌고개라고도 하며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에 위치해 있다 [3] 혜음령(惠蔭嶺) :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광탄면을 잇는 고개 [4] 이여송(李如松, 1549년~1598년) : 중국 명나라 말기의 장수로 임진왜란 때 파견된 명나라 장군. 요동에서 출생했으며 조선계이며 본관은 성주 이씨라고 전한다 [5] 이유승(李有昇, 생년 미상~1593년) : 명나라 말기의 장수. 이여송의 심복 부장으로 벽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을 보호하였으나 일본군이 쏜 조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6] 양원(楊元, 생년 미상~1598년) : 명나라의 무장. 1592년 임진왜란 시기에 직위는 명군 부총병이었다 [7]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1533년~1597년) : 일본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한 센고쿠 무장이며 다이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격파하는 공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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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부터 1600년에 걸쳐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으로 파급된 문화, 예술 전반의 혁신 운동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중세의 기독교와 봉건 제도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의 자유, 개성의 존중을 강조한 인간 중심의 정신을 되살리려 하였다.
영어: Renaissance
이탈리아어: Rinascimento
프랑스어: Renaissance
스페인어: Renacimiento
교회는 교황과 함께 계속되었는데 교황은 마치 황제와 같은 인물이었고, 대주교와 주교들은 옛 로마마제국의 행정관들과 똑같으며, 그들 밑으로는 지역마다 사제들이 있었다. 이 신성한 단체는 그 자체의 법률, 형벌, 교도소 그리고 조세제도를 지니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가 당시 위와 같은 사상을 비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출발한다.
죄 많고 타락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믿는 것이며, 믿음을 지닌다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다는것을 주장(스스로 믿는 종교)하며 오직 성경의 권위와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함으로써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와 제도를 새롭게 개혁시키고자 했던 개혁 운동이다.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 : 독일의 신학자, 종교개혁가
[1]위그노 전쟁은 프랑스에서 발생한 종교 전쟁이다. 1562년 3월 1일 로마 가톨릭 세력이 프랑스내 [2]칼뱅파 개신교도인 [1]위그노들에게 자행한 학살인 [3]바시학살로 인해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하층민은 물론 상업과 금융 계통의 부르주아에게 [2]칼뱅의 교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다른나라보다 잔혹하게 박해를 받았다. 1562년 4월 2일 파리의 모든 [1]위그노들에 대한 감금, 추방 및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에 각지의 개신교도들이 들고 일어나 양 종교 간의 피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백년전쟁 이후 한세기만에 프랑스 전 국토가 전장이 되었다.
이러한 위그노 전쟁은 1598년 [6]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개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함으로써 36년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 개신교도의 예배는 불가하였고 구교와 신교의 재판도 공정하지 못하는 등.. 탄압과 충돌이 계속되었고, 급기야 1686년 [7]루이 14세는 낭트칙령을 폐지하였다. 결국 1787년 [8]루이 16세에 의하여 관용칙령이 발표됨으로써 프랑스 개신교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위그노 전쟁으로 백년전쟁이후 프랑스를 이끈 [4]발루아 왕조가 무너지고, [5]부르봉 왕조가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1] 위그노(Les Huguenot) :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칼뱅의 개혁을 지지하던 개신교 신자 [2] 장 칼뱅(Jean Calvin, 1509년~1564년) : 종교개혁가. 프랑스 출신의 개혁주의 신학자 [3] 바시학살(Massacre of Vassy) : 1562년 3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시(Vassy)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측의 군대가 창고에 모여서 예배중인 개신교인들을 습격하여 학살한 사건 [4] 발루아 왕조(House of Valois) : 1328년에서 1589년까지의 프랑스 왕국의 왕조. 필리프 6세부터 앙리 3세까지의 왕조 [5] 부르봉 왕조(House of Bourbon) : 1589년부터 1791년까지 그리고 1814년부터 1830년까지 프랑스왕국의 왕조. 앙리4세(재임, 1589년~1610년)부터 앙리 5세(재임, 1830년)까지의 왕조 [6] 앙리 4세(프Henri IV de France,1553년~1610년) : 프랑스 카페 왕조의 분가인 부르봉 왕가 최초의 왕(재위 : 1589년 8월 2일-1610년 5월 14일) [7]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3대 국왕(재위, 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 태양왕으로 알려져 있다 [8]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5대 국왕(재위, 1774년 5월 10일-1792년 9월 21일)
네덜란드(혹은 저지대)는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즉 베네룩스 지역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릴까지 포함하여 총 17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네덜란드는 무적함대를 이끌며 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합스부르크 왕국의 스페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네덜란드 17개주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벌인 독립전쟁을 말한다. 80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는 북유럽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으로 보았으며 개신교의 교세가 확산되자 이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에 대해 더욱 무거운 세금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 권력의 중앙집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럼 1세는 반기를 들면서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1568년 4월 23일 빌렘은 헤일리게레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이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스페인은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오스만이라는 두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여야 하였고 이는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전쟁 진압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1581년 7월 네덜란드 독립 선언을 통해 네덜란드가 더이상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스페인은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과 대립하여 1588년 무적함대를 구성하여 영국으로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대패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의 승리로 해상권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하는 계기가 된다.
네덜란드는 1600년 스페인과 해전에서 승리를 하며 이후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2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전쟁의 후반부에 유럽의 여타 국가들이 종교개혁 이후 야기된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30년간의 종교전쟁(1618~1648)에 휘말렸으나 1648년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고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 합스부르크 왕국(Habsburg Empire)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부르는 말이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전체와 루마니아의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북부, 이탈리아, 폴란드의 남부 등이 포함된다.
*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1598년
* 오라녜 공(Prins van Oranje) : 네덜란드의 왕위 계승자의 칭호
* 빌럼 1세(William I, 1533년~1584년) : 네덜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독이자 스페인과 가톨릭에 저항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빌헬름 폰 나사우딜렌부르크(Wilhelm von Nassau-Dillenburg). 네덜란드의 국부로 빌럼 1세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또한 침묵공(De Zwijger)이라고도 불린다
*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잉글랜드-스페인 전쟁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과의 간헐적으로 벌어진 전쟁으로 공식적으로 선포된 전쟁이 아니었다.
[1]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등을 영유하고, 남미의 브라질과 아시아의 필리핀까지 식민지를 개척하고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명실공히 유럽 최강의 패자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스페인은 해외 식민지의 유지와 금과 은을 수송하는 상선을 보호하며, 동시에 지중해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세력을 막기 위해 그 유명한 무적함대를 건설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통치 아래 있던 네덜란드는 [1]펠리페 2세의 종교적인 탄압과 경제적 착취에 항거하여 1566년부터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 당시 잉글랜드의 [4]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자국의 안정과 번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네덜란드에 잉글랜드 군사 원정으로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1587년 카디스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쳤지만, 이후 [5]드레이크-[6]호킨스의 원정(1595년), [7]에식스-롤리 원정(1597)에서 큰 실패를 겪었다. 1596년, 1597년, 1601년에 스페인 함대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상대로 추가로 파견되었으나, 이 역시 주로 악천후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전쟁은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네덜란드, 프랑스, 아일랜드 전역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1604년 스페인의 [2]펠리페 3세와 잉글랜드의 [3]제임스 1세가 맺은 런던 조약으로 종식되니다. 이 조약에서 영국과 스페인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군사 개입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무적함대가 잉글랜드에 대패하면서 스페인의 국위가 실추된 것은 물론 이 전쟁 이후로 스페인의 국력은 점차 내리막길을 걸어 이후 벌어진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사실상 몰락하게 된다. 또한 30년 전쟁 이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까지 완전히 독립하게 되면서 스페인은 유럽 최강국에서 유렵의 2등 국가로 내려앉게 된다. 반면에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후 대영제국까지 발전하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1] 펠리페 2세(Philip II, Felipe II, 1527년~1598년) :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 1556년 1월 16일 ~ 1598년 9월 13일), 포르투갈 왕국의 왕(재위:1580년 9월 12일 ~ 1598년 9월 13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1554년 7월 25일 ~ 1558년 11월 17일).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을 건설한 왕
[2] 펠리페 3세(Felipe III, 1578년~1621년) :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의 제3대 국왕 겸 포르투갈의 국왕(재임 : 1598년 9월 13일~1621년 3월 31일)
[3] 제임스 1세(James I, 1566년~1625년) :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최초로 브리튼 제도 전체를 다스린 왕이자 최초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스를 총괄해서 통치하게 된 영국의 국왕. 잉글랜드 국왕(재임 : 1603년 3월 24일 ~ 1625년 3월 27일), 스코틀랜드 국왕(재임 : 1567년 7월 24일~1625년 3월 27일)으로 '제임스 6세'라고 불리는데 제임스 1세로 유명하다.
[4]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5]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년~1596년) : 영국의 해적, 군인, 탐험가로 영국에서는 넬슨제독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6] 존 호킨스(John Hawkins,1532년~1595년) : 카비르해의 해적의 선구자. 영국의 노예상인이자 해군 사령관
[7] 에식스-롤리 원정(Essex-Raleigh, Islands Voyage) : 영국 엘리자베스 1세가 파견하고 네덜란드기 연합하여 지원하여 스페인 함대를 파괴하는 야심찬 작전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네덜란드 함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성공하지 못했다. 제독 겸 총사령관으로서 에식스 백작인 로버트 데버루 경, 중장으로서 서퍽 백작 토머스 하워드 경, 후방 제독으로서 월터 롤리 경이 이끌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다. 그리고 명나라가 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동아시아는 7년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591년 일본을 통일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하려 하는 데 조선이 길을 인도하라는 문서를 조선에 보내면서 조선침략의 야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상황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으며 거절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1592년 4월 13일 약 20만의 군대를 조선으로 파병하여 침략하였다. 일본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 점령을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북상하면서 17일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성이 함락시켰다. 이후 맹렬한 속도로 진격하여 7월 9일 개성까지 함락시키고 평양으로 출발했다. 이에 7월 19일 평양으로 피신했던 조선 왕인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신하였고 평양성은 60일만에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의주로 도망친 선조는 명나라에 계속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자국의 영토까지 전쟁이 번지는 형편을 막으려면 조선에서 적을 방어해야 상책이라는 판단하여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1593년 명나라가 참전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가 대패하면서 주춤하기 시작하였다. 연속되는 전투에서 명나라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후 명나라는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일본과 협상을 하였다.
협상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고 결국은 1596년 협상이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은 정유재란으로 재침하였다. 1년후인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써 기나긴 전쟁은 1598년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임진왜란은 7년전쟁으로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고 많은 문화재가 파손되었으며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또한 명나라군, 일본군이 조선땅에 주둔하면서 일반 백성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 전쟁을 한국은 임진왜란/정유재란, 일본은 풍신수길정벌, 중국은 항왜원조라 부른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7년~1598년) :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시키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
* 선조(1552년~1608년) : 조선의 제14대 국왕. 재위 : 1567년~1608년
* 의주군 : 평안북도 북서쪽의 압록강에 접한 군. 임진왜란당시 선조의 피신처
* 명나라 :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통일 왕조이며 중국 최후의 한족 왕조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권율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며 하루동안 벌어졌다.
임진왜란으로 일본군에게 계속 밀리던 조선은 중국 명나라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가 조선을 지원하자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한 일본군은 밀리기 시작하면서 일제히 남하를 시작했다.
평안도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1593년 1월 평양에서 이여송이 거느린 명나라 원군과 조선군 연합군에 대패하였다. 이후 남진하여 일본군은 후퇴하여 개성과 황해도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까지 한성 부근에 집결시켰다. 평양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남진하던 명나라군과 전력을 가다듬은 일본군은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벽제관에서 격돌하였다. 그러나 전투결과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명나라가 패함에 따라 한양 탈환 시 합동작전을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중이었던 권율 휘하의 3천여명의 조선군은 고립에 처하게 되었다.
명군과의 전투에 승리한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의 흐름을 타고 보름 만에 10배에 이르는 3만 대군을 7개 부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화기를 이용하여 총탄과 화살, 돌 파편 등을 쏘아 날리며 방어를 펼쳤다. 일본 1군은 궤멸당했고 2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어 3군은 조선의 포 사격으로 파괴되었다. 4군도 대패한 뒤 5군은 화공 전술을 택해 공격하려 했으나 되려 조선군 반격으로 후퇴하였다. 이어 6군도 승병들의 전술로 패퇴되었고, 마지막 7군이 성 내부로 들어오면서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게 된다. 일본군은 조선군을 인해전술로 몰아붙였고 조선군도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쉽게 밀리지 않았다. 이때 조선군은 화살이 다 소모되어 투석으로 맞서 싸웠는데 여기서 민간인들, 특히 부녀자들이 돌을 날라 도왔다는 야사가 전해지기도 한다.
화살이 떨어져 패색이 짙어질 때 한강변으로 조선지원군과 화살이 도착하자 일본군은 당황하여 물러나기 시작했으며 조선군이 이를 추격하여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이렇게 길게 이어지던 전투는 저녁 5시~7시 경이 되어 어둠이 내리자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행주 대첩의 승리를 듣고서야 평양으로 회군하던 명나라의 군대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파주 공격을 계획했으나 출진 중도에 되돌아갔다. 이 전투로 인해서 벽제관 등지에서의 승리로 다시 조명연합군에 대한 반격을 꾀하고 있던 일본군을 완전히 몰락시키게 된다. 결국 4월 18일 한성에서 패퇴하며 일년만에 조명연합군이 수도인 한성을 수복했다. 후에 권율은 이 공으로 도원수가 되었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 행주산성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덕양산의 7, 8부 능선에 쌓은 테뫼식(山頂式)성으로 흙을 이용한 토축산성으로 현재 극히 일부 성벽만 보전되어 있다.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었다 * 권율(1537년~1599년) : 조선시대 의주목사, 도원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장수 * 화차(火車) : '화약(무기)을 실은 수레'로, 하나 또는 다수의 화약무기를 설치하여 적에게 발사할 수 있게끔 만든 장비 * 신기전(神機箭) : 조선 1448년(세종 30년) 제작되어 17세기 이후까지 널리 생산된 고체 로켓으로 화약 추진식 화살 무기 * 비격진천뢰 (飛擊震天雷) : 도화선 방식의 지연 신관 폭탄으로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중에 화포장 이장손이 개발하였다 * 목사 : 지방행정구역인 부-목-군-현의 순서대로 두번째 높은 등급의 직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