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제관 전투(The Battle of Byeokjegwan)

대한민국 일본 중국 사건기간 : 1593년 1월 26일~1593년 1월 27일, 조회수 : 144,   등록일 : 2024-07-21
[1]벽제관 전투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에서 벌어진 일본군과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전투이다.
 
평안도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1593년 1월 평양에서 [4]이여송이 거느린 명나라 원군과 조선군 연합군에 대패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후퇴하여 개성과 황해도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까지 한성 부근에 집결시켰다. 집결된 총 병력은 5만에 이르렀으며, 전력을 정비한  일본군은 반격을 시도하였다.
 
명나라군은 평양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한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남진하였다. 일본군은 북상중에 명군의 진출 사실을 알고 선봉부대를 보내 [2]여석령 일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1월 26일 명군 선봉부대는 [2]여석령에서 일본군과 격돌하였으나 일본군의 유인으로 명군은 패배하였다. 이여송은 전공의 욕심에 자신의 기병만 이끌고 [1]벽제관으로 진군하였다.
그런데 벽제관은 비가 온 뒤라 땅이 진창이 되어 기동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다. 명군은 맹렬하게 싸웠으나 [7]고바야가가 이끄는 일본군이 나타나 기병만으로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사방에서 조총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백병전에 강한 일본군 3개 부대에 포위되었고, [4]이여송은 심복인 [5]이유승의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벽제관 전투는 명나라 부총병 [6]양원이 화기로 무장한 포병을 이끌고 도착하자 일본군은 [3]혜음령을 넘지 못하고 철수하면서 끝난다.
 
이 패배로 인해 명나라군의 한성 탈환 시 공조를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중인 권율장군 휘하의 3천의 조선군 병력은 고립된 신세가 되고 만다. 일본군은 벽제군 전투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요충지인 행주산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한성에서 철수하게 된다.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명나라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고, 그 뒤 명나라군의 적극성이 줄어들고 일본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또한 명나라가 일본에 휴전을 제안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 벽제관(碧蹄館) :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하루전 날 머물던 역관.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
[2] 여석령(礪石嶺) : 벽제관에서 3km가량 떨어져 있는 고개. 숯돌고개라고도 하며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에 위치해 있다
[3] 혜음령(惠蔭嶺) :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광탄면을 잇는 고개
[4] 이여송(李如松, 1549년~1598년) : 중국 명나라 말기의 장수로 임진왜란 때 파견된 명나라 장군. 요동에서 출생했으며 조선계이며 본관은 성주 이씨라고 전한다
[5] 이유승(李有昇, 생년 미상~1593년) : 명나라 말기의 장수. 이여송의 심복 부장으로 벽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을 보호하였으나 일본군이 쏜 조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6] 양원(楊元, 생년 미상~1598년) : 명나라의 무장. 1592년 임진왜란 시기에 직위는 명군 부총병이었다
[7]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1533년~1597년) : 일본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한 센고쿠 무장이며 다이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격파하는 공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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