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대첩(荒山大捷)

대한민국 일본 사건기간 : 1380년 9월, 조회수 : 262,   등록일 : 2024-04-26
황산대첩은 1380년([1]우왕 6) 9월 이성계 등이 전라도 남원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에서 왜구에게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1350년대부터 왜구의 침략은 비번했다. 왜구는 적게는 20척에서 많게는 400여척의 배로 충청, 전라, 경상도를 포함한 전국을 노략질하였다. 당시의 왜구는 단순한 해적 집단이 아닌 일본의 토호가 직접 운영하는 정규 군대였다.
 
1380년([1]우왕 6년) 나세와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군은 [7]진포에 주둔하던 왜구의 함선 500여 척을 화포로 모두 불태워버리는 대승을 거두었다. 퇴로가 막혀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왜구는 [4]옥주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왜구와 합류하여 충북 영동·황간을 거쳐 경북 상주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약탈을 자행하여 막심한 피해를 주었다. 왜구들은 이어 경상남도가지 이동하여 함양군인 [8]사근내역을 거쳐 황산으로 모였다.
고려 조정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과 맞섰으나 엄청난 참패를 당했다. 

왜구는 남원에 주둔하면서 개경으로 북상하겠다고 위협하자, 고려 조정은 [2]이성계를 [5]양광·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에 임명하여 토벌을 명하였다.
 
[2]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과 [6]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는 황산 북서쪽의 정산봉에서 전투를 벌였다. 왜구들이 먼저 산 위에 위치하여 공격을 하여 전투 초반 승기를 잡았으나, 지리적 열세를 극복하고 총공격을 하여 일대격전 벌인 고려군에 패배하게 된다.
 
이때 전사한 왜구가 흘린 피가 냇물로 흘러들어 인근 주민들이 일주일 가까이 물을 마시지 못했다고 한다. 고려군은 왜구로부터 말 1,600필을 포함하여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병기를 거두어들였다. 바위는 왜구의 피로 붉게 불들어 혈암(血巖)이라 했다.

이성계는 불리한 지형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왜구 70여 명만이 지리산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황산대첩 이후 왜구의 세력은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약화되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이성계는 고려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성계의 군대가 개선하자 영접하러 나온 [3]최영은 눈물을 흘리며 이성계를 치하했다고 한다. [1] 우왕은 이성계와 변안열에게 각각 금 50냥을, 여러 장수들에게 은 50냥씩을 하사하여 전공을 치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에는 전라도 관찰사였던 박계현의 건의로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금의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일제강점기때 파괴되었다가 1977년 새로 복원되었다.
 
[1] 우왕(禑王, 1365년~1389년) : 고려의 제32대 국왕(재위: 1374년 10월 30일~1388년 7월 11일)
[2] 이성계(李成桂), 1335년~1408년) : 고려 말 무신이자 정치가.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 1392년 8월 13일~1398년 10월 22일)
[3]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 : 고려 말기의 장군 겸 정치가. 고려의 충신
[4] 옥주(沃州) :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5] 양광도(楊廣道) : 고려의 행정구역인 5도의 하나로, 양주(현재의 서울 강북지역)와 광주(현재의 서울 강남 지역과 성남시, 하남시, 광주시)의 앞글자를 따서 양광도라 하였다. 현재의 경기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및 강원도 일부 지역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
[6] 아지발도(阿只拔都, ? ~ 1380년) : 고려 우왕(禑王) 6년(1380년) 고려에 침입한 왜구를 지휘했던 일본의 무장으로 매우 수려한 용모와 뛰어난 무용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었는데, 백마를 타고 목과 얼굴을 감싼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채 창을 휘두르며 고려군을 쓰러뜨렸다고 한다. '아지'는 어린아이를 뜻하는 방언이며, '발도'는 몽골어로 용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아지발도는 사람의 이름이 아닌 용감한 소년을 의미한다
[7] 진포(鎭浦) : 금강 하류, 충청남도 서천군 남쪽에 있었던 해포(海浦)
[8] 사근내역(沙近乃驛) : 현재의 경상남도 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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