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First Anglo-Burmese War)
미얀마
인도
영국
사건기간 : 1824년 3월 5일~1826년 2월 24일, 조회수 : 510, 등록일 : 2024-02-02
영국과 [1]미얀마가 싸운 전쟁으로 영국이 승리해 미얀마의 아라칸, 아삼, 마니푸르, 테나세림 지역이 영국령으로 병합되었다. 이후 2차, 3차의 전쟁이후 1885년 미얀마는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버마 [4]꼰바웅 왕조의 [5]보도파야 국왕은 굉장히 호전적인 인물로 서쪽으로 국경을 확장하며 1784년에는 [16]아라칸 지역을, 1814년에는 [3]마니푸르 지역을, 1817년에는 [2]아삼 지역을 편입시켰다.
아삼 왕조의 찬드라칸타 싱하(Chandrakanta Singha)국왕은 버마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군대를 강화하고 버마의 추가침략을 막기 이하여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보도파야 국왕의 뒤를 이은 [6]바기도 국왕은 아삼을 다시 찾기위하여 1821년 2월에 2만명의 군대를 [2]아삼지역으로 파견하여 1년 반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1822년 7월에 아삼 왕국에 승리하였다.
패배한 아삼 왕 찬드라칸타 싱하(Chandrakanta Singha)는 영국 영토인 [18]벵골로 도망쳤다. [19]캘커타에 기반을 둔 영국은 마니푸르, 아삼, 아라칸 지역에서 도주한 반란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버마왕국은 1822년까지 [3]마니푸르와 [2]아삼지역의 정복으로 인하여 영국령 인도 사이에 긴 국경이 생겼다. 영국은 일방적으로 [7]카차르(Cachar)와 자인티아(Jaintia)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언하고 군대를 파견했다.
1824년 1월 버마의 [9]마하 반둘라는 반군을 몰아내기 위해 카차르(Cachar)에 병력을 보냈고, 1824년 3월 5일 [16]아라칸(Arakan)의 국경 충돌 이후 제1차 버마와 영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군은 험난한 지형에서 싸우는 대신 1824년 5월 11일 인도의 [11]세포이를 포함한 1만명의 병력이 남부에 위치한 [13]양곤항구에 입성하여 기습공격했다.
영국군은 양곤의 [10]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내부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군은 공격을 개시했고 버마의 [6]바기도 국왕은 이에 맞서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9]마하 반둘라는 서부전선에서 급히 철수하여 [13]양곤 외곽에 집결하여 3만명의 병력을 지휘하였다. [9]마하 반둘라는 초기의 전투에서 몇 차례 승리했다.
11월 30일 마하 반둘라는 영국군 진지에 정면 공격을 하였으나 훨씬 뛰어난 무기를 갖춘 영국군에 패하여 3만명중 7천명만 남았다.
마하 반둘라는 양곤에서 멀지 않은 이라와디 삼각주(Irrawaddy delta)에 있는 작은 마을인 다누부(Danubyu)에 있는 후방기지로 후퇴했다.
1825년 3월부터 영국군은 다누뷰에 대규모 공격을 가하여 4월 1일 마하 반둘라는 전사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버마 [4]꼰바웅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영국은 기세를 이어 아라칸, 테나세림까지 공략했으며, 영국함대는 버마를 관통하는 이라와디강을 거슬러 당시 버마의 수도 [12]아마라푸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지휘관을 잃은 버마군은 기세를 잃었고, 영국군이 내놓은 강화조건에 1826년 [6]바기도 왕은 굴복하고 말았다.
2월 26일 굴욕적인 내용의 [15]얀다보 조약이 체결되면서 1차 영국-미얀마 전쟁은 끝을 맺는다.
오늘날의 미얀마인 버마는 [9]마하 반둘라가 확장한 영토인 아라칸, 테나세림, 아쌈, 마니푸르를 영국에 넘겼다. 또한 전쟁배상금으로 1백만 파운드의 거금을 물어내야 했다.
이후 영국은 두 차례 더 전쟁을 벌였고, 1885년 결국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 미얀마 : 미얀마는 135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며, 버마족이 68%를 차지하고 있다
[2] 아삼주(Assam) :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주
[3] 마니푸르주(Manipur) :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주, 주도는 임팔(Imphal)
[4] 꼰바웅 왕조(Konbaung dynasty, 1752년~1885년)) :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 영국-미얀마 전쟁에서 연이어 패전하며 완전히 멸망한다
[5] 보도파야 국왕(Bodawpaya, 1745년~1819년) : 꼰바웅 왕조의 제6대 국왕(재임, 1782년 2월 11일~1819년 6월 5일)
[6] 바기도 국왕(Bagyidaw,1784년~1846년) : 꼰바웅 왕조의 제7대 국왕(1819년 6월 5일~1837년 4월 15일)
[7] 카차르(Cachar) : 인도 아삼주에 있는 지역
[8] 치타공(Chittagong) : 방글라데시 제2의 도시로, 치타공 주의 주도. 방글라데시 동부의 거점도시
[9] 마하 반둘라(Maha Bandula, 1782년~1825년) : 왕립 버마군의 총사령관. 오늘날 미얀마의 국가 영웅
[10]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 : 미얀마 양곤에 있는 높이 112.17m인 황금 탑. 미얀마의 랜드마크이자 미얀마 불교도들의 정신적 지주
[11] 세포이(sepoy) : 19세기의 인도 용병. 무슬림과 힌두교도 등으로 구성된 인도인으로 구성된 영국군소속의 용병
[12] 아마라뿌라(Amarapura) : 꼰바옹 왕조의 수도
[13] 양곤(Yangon) : 미얀마의 옛 수도. 원래의 이름은 랑군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랑군의 명칭을 양곤으로 바꾸었다
[14] 다누부(Danubyu) : 미얀마의 양곤에서 약80마일 떨어진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15] 얀다보 조약(Treaty of Yandabo, 1826년 2월 24일) : 수도 아바(Ava)에서 불과 80킬로미터(50마일) 떨어진 얀다보(Yandabo) 마을에서 맺어졌다
[16] 아라칸 왕국(The Kingdom of Arakan, 1429년~1784년) : 미얀마의 라카인주 아라칸족의 왕국. 라카인 왕국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므락우
[17] 아라칸족(Arakan) : 미얀마의 라카인주와 인도, 방글라데시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미얀마 인구의 약 5.53%를 구성하고 있다
[18] 벵골(Bengal) : 현재 인도의 서벵골주, 방글라데시(동벵골)로 나뉘어 있다. 서벵골은 힌두교, 동벵골은 이슬람교를 많이 믿는다
[19] 캘커타(Calcutta) : 인도 동부에 있는 도시이자 인도 서벵골 주의 주도. 2001년 1월 도시의 이름을 캘커타(Calcutta)에서 콜카타(Kolkata)로 공식 변경하였다
버마 [4]꼰바웅 왕조의 [5]보도파야 국왕은 굉장히 호전적인 인물로 서쪽으로 국경을 확장하며 1784년에는 [16]아라칸 지역을, 1814년에는 [3]마니푸르 지역을, 1817년에는 [2]아삼 지역을 편입시켰다.
아삼 왕조의 찬드라칸타 싱하(Chandrakanta Singha)국왕은 버마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군대를 강화하고 버마의 추가침략을 막기 이하여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보도파야 국왕의 뒤를 이은 [6]바기도 국왕은 아삼을 다시 찾기위하여 1821년 2월에 2만명의 군대를 [2]아삼지역으로 파견하여 1년 반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1822년 7월에 아삼 왕국에 승리하였다.
패배한 아삼 왕 찬드라칸타 싱하(Chandrakanta Singha)는 영국 영토인 [18]벵골로 도망쳤다. [19]캘커타에 기반을 둔 영국은 마니푸르, 아삼, 아라칸 지역에서 도주한 반란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버마왕국은 1822년까지 [3]마니푸르와 [2]아삼지역의 정복으로 인하여 영국령 인도 사이에 긴 국경이 생겼다. 영국은 일방적으로 [7]카차르(Cachar)와 자인티아(Jaintia)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언하고 군대를 파견했다.
1824년 1월 버마의 [9]마하 반둘라는 반군을 몰아내기 위해 카차르(Cachar)에 병력을 보냈고, 1824년 3월 5일 [16]아라칸(Arakan)의 국경 충돌 이후 제1차 버마와 영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군은 험난한 지형에서 싸우는 대신 1824년 5월 11일 인도의 [11]세포이를 포함한 1만명의 병력이 남부에 위치한 [13]양곤항구에 입성하여 기습공격했다.
영국군은 양곤의 [10]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내부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군은 공격을 개시했고 버마의 [6]바기도 국왕은 이에 맞서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9]마하 반둘라는 서부전선에서 급히 철수하여 [13]양곤 외곽에 집결하여 3만명의 병력을 지휘하였다. [9]마하 반둘라는 초기의 전투에서 몇 차례 승리했다.
11월 30일 마하 반둘라는 영국군 진지에 정면 공격을 하였으나 훨씬 뛰어난 무기를 갖춘 영국군에 패하여 3만명중 7천명만 남았다.
마하 반둘라는 양곤에서 멀지 않은 이라와디 삼각주(Irrawaddy delta)에 있는 작은 마을인 다누부(Danubyu)에 있는 후방기지로 후퇴했다.
1825년 3월부터 영국군은 다누뷰에 대규모 공격을 가하여 4월 1일 마하 반둘라는 전사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버마 [4]꼰바웅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영국은 기세를 이어 아라칸, 테나세림까지 공략했으며, 영국함대는 버마를 관통하는 이라와디강을 거슬러 당시 버마의 수도 [12]아마라푸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지휘관을 잃은 버마군은 기세를 잃었고, 영국군이 내놓은 강화조건에 1826년 [6]바기도 왕은 굴복하고 말았다.
2월 26일 굴욕적인 내용의 [15]얀다보 조약이 체결되면서 1차 영국-미얀마 전쟁은 끝을 맺는다.
오늘날의 미얀마인 버마는 [9]마하 반둘라가 확장한 영토인 아라칸, 테나세림, 아쌈, 마니푸르를 영국에 넘겼다. 또한 전쟁배상금으로 1백만 파운드의 거금을 물어내야 했다.
이후 영국은 두 차례 더 전쟁을 벌였고, 1885년 결국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 미얀마 : 미얀마는 135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며, 버마족이 68%를 차지하고 있다
[2] 아삼주(Assam) :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주
[3] 마니푸르주(Manipur) :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주, 주도는 임팔(Imphal)
[4] 꼰바웅 왕조(Konbaung dynasty, 1752년~1885년)) :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 영국-미얀마 전쟁에서 연이어 패전하며 완전히 멸망한다
[5] 보도파야 국왕(Bodawpaya, 1745년~1819년) : 꼰바웅 왕조의 제6대 국왕(재임, 1782년 2월 11일~1819년 6월 5일)
[6] 바기도 국왕(Bagyidaw,1784년~1846년) : 꼰바웅 왕조의 제7대 국왕(1819년 6월 5일~1837년 4월 15일)
[7] 카차르(Cachar) : 인도 아삼주에 있는 지역
[8] 치타공(Chittagong) : 방글라데시 제2의 도시로, 치타공 주의 주도. 방글라데시 동부의 거점도시
[9] 마하 반둘라(Maha Bandula, 1782년~1825년) : 왕립 버마군의 총사령관. 오늘날 미얀마의 국가 영웅
[10]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 : 미얀마 양곤에 있는 높이 112.17m인 황금 탑. 미얀마의 랜드마크이자 미얀마 불교도들의 정신적 지주
[11] 세포이(sepoy) : 19세기의 인도 용병. 무슬림과 힌두교도 등으로 구성된 인도인으로 구성된 영국군소속의 용병
[12] 아마라뿌라(Amarapura) : 꼰바옹 왕조의 수도
[13] 양곤(Yangon) : 미얀마의 옛 수도. 원래의 이름은 랑군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랑군의 명칭을 양곤으로 바꾸었다
[14] 다누부(Danubyu) : 미얀마의 양곤에서 약80마일 떨어진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15] 얀다보 조약(Treaty of Yandabo, 1826년 2월 24일) : 수도 아바(Ava)에서 불과 80킬로미터(50마일) 떨어진 얀다보(Yandabo) 마을에서 맺어졌다
[16] 아라칸 왕국(The Kingdom of Arakan, 1429년~1784년) : 미얀마의 라카인주 아라칸족의 왕국. 라카인 왕국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므락우
[17] 아라칸족(Arakan) : 미얀마의 라카인주와 인도, 방글라데시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미얀마 인구의 약 5.53%를 구성하고 있다
[18] 벵골(Bengal) : 현재 인도의 서벵골주, 방글라데시(동벵골)로 나뉘어 있다. 서벵골은 힌두교, 동벵골은 이슬람교를 많이 믿는다
[19] 캘커타(Calcutta) : 인도 동부에 있는 도시이자 인도 서벵골 주의 주도. 2001년 1월 도시의 이름을 캘커타(Calcutta)에서 콜카타(Kolkata)로 공식 변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