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대한민국사건기간 : 1983년 9월 1일, 조회수 : 320, 등록일 : 2023-07-16
1983년 9월 1일 오전 12시 05분(미국 뉴욕시간) 뉴욕 JFK국제공항을 출발하여 급유를 위하여 앵커리지를 경유해서 김포국제공항으로 오던 대한항공(KAL) 007 여객기가 당시 소련의 영공인 [1]사할린에서 소련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인근바다에 추락하여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
KAL 007 여객기는 오전 2시 5분(사할린 시간)경 규정된 항로보다 위쪽의 [3]캄차카반도 북동쪽으로 진입하여 3시 30분에 소련 영공으로 진입하였다가 4시 28분 공해상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다시 [1]사할린 상공으로 진입하자 5시 25분경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 두발을 발사하였다. 공격을 받은 KAL 007기는 일정시간 나선형을 그리며 급강하하면서 [2]모네론섬 인근바다에 추락하였다.
여객기의 연료절감 및 경제적인 비행때문에 고도를 올리는데, 이 당시 조종사는 주변이 너무 어두워 소련 영공상으로 침범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소련은 사건발생 일주일이 지나서야 격추사실을 밝혔으며 수거한 유해와 잔해들을 은폐하였다. 특히 블랙박스를 수거한 사실조차 숨겼다가 소련붕괴이후 10년이 지난 1992년에 관련자료를 공개하였다. 이 자료를 토대로 [5]국제민간항공기구의 정식 보고서에서 KAL 007기는 조종사의 항법 실수로 소련 영공에 진입했고, 이를 미국 정찰기로 혼동한 소련 전투기의 실수가 겹쳐 발생한 사건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군용기라도 위협적이지 않다면 무기개입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하고있다고 한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민간항공기의 격추는 정찰기로 의심한 소련이 매우 민감하게 대응한 매우 이례적인 상황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또한 당시는 미국 정찰기인 [4]RC-135기가 수도 없이 출몰하던 때였고, 냉전시대 소련의 분위기도 날카로웠던 시기였다. 또한 RC-135는 보잉747와 비슷하여 식별이 불가능한 캄캄한 영공상에서 충분히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KAL 007기 격추사건은 당시 미소냉전의 시대적, 국제적인 배경으로 강대국의 냉전이 제3세계인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영향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사건으로 남은 사람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GPS정보가 민간에 개방되었으며 사건 전까지만 해도 항공기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6]관성항법시스템을 사용해 위치를 가늠했다고 한다. 이후 GPS를 사용하면서 위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1] 사할린(Sakhalin) : 북태평양에 있는 러시아의 섬으로 타타르 해협과 오호츠크 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섬 [2] 모네론섬(Moneron Island) : 러시아의 사할린 섬에서 떨어진 작은 섬 [3] 캄차카 반도(Kamchatka Peninsula) : 동쪽의 태평양과 서쪽의 오호츠크해 사이에 있는 러시아 극동지역의 반도 [4] 보잉 RC-135(Boeing RC-135) : 미국 공군의 대형 정찰기. 1961년부터 32대가 생산되어 현재도 사용중이다 [5] 국제민간항공기구(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ICAO) : 유엔 산하 전문기구로, 국제 항공 운송에 필요한 원칙과 기술 및 안전에 대해 모든 회원국이 준수해야 할 표준과 권고를 제정한다 [6] 관성항법시스템(INS : Inertial Navigation System) : 운반체의 운동을 감지하는 관성센서(자이로 및 가속도계)출력으로부터 운반체의 속도, 위치 및 자세 등의 항법정보를 계산해 내는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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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내전, 흔히 "30년 전쟁"이라 불리는 이 분쟁은 냉전 구조 속에서 정치·사회·민족 갈등이 결합된 복합적 충돌이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토지 불평등, 군부 독재, 원주민 차별, 그리고 외세 개입이 중첩되며 점차 격화된 구조적 갈등의 산물이었다.
내전의 직접적 계기는 1960년 11월 13일 일부 군 장교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반정부 세력은 게릴라 조직으로 재편되어 장기적인 무장 투쟁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익 게릴라 조직들이 형성되었고 특히 후기에 이르러서는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이 주요 반군 연합체로 등장하였다.
이 내전의 배경에는 1954년 미국의 후원을 받은 과테말라 쿠데타로 [1]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전복되고 군부 중심의 권위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억압이 심화되었고 토지 개혁이 중단되며 농민과 원주민의 불만이 극대화되었다. 특히 마야계 원주민들은 경제적 소외와 함께 정치적 배제 속에서 가장 큰 피해 집단으로 남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다. 군사 정권은 좌익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강제 실종, 고문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2]에프라인 리오스 몬트가 집권한 1982년부터 1983년 사이에는 "초토화 작전"이라 불리는 강경 정책이 시행되었고 수백 개의 마을이 파괴되며 수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도 집단학살(genocide) 논쟁이 제기될 만큼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된 시기였다.
내전 기간 동안 미국은 냉전 구도 속에서 반공 정책을 이유로 과테말라 정부를 군사·경제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는 군부의 강경 진압을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게릴라 세력은 농민과 일부 도시 지식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정부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열과 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제 사회의 인권 압력과 냉전 종식 분위기 속에서 평화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1990년대에는 유엔의 중재 아래 정부와 반군 간 협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1996년 12월 29일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36년에 걸친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해 약 20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그 중 대다수는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UN이 지원한 역사규명위원회(CEH)의 보고에 따르면 피해자의 83%가 마야계 원주민으로 단순한 이념 갈등을 넘어 민족적 탄압의 성격이 강했다. 가해 행위의 93%가 정부군 및 준군사조직에 의해 저질러졌음이 밝혀졌다.
이 전쟁은 과테말라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과거사 청산과 사회적 화합은 과테말라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남아 있다.
[1]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1914년 11월 4일 ~ 1957년 7월 26일) : 제28대 대통령(재임기간, 1954년 7월 8일 ~ 1957년 7월 26일). 1957년 7월 26일 대통령 근위대 소속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58년부터 보수 세력 출신인 이디고라스(Miguel Ydígoras Fuentes, 1958-1963)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6년 동안의 과테말라 내전이 시작되었다. [2]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Efraín Ríos Montt, 1926년 6월 16일~2018년 4월 1일) : 과테말라의 제38대 대통령(임기, 1982년 3월 23일~1983년 8월 8일)
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점령하여 흡수 통일했고, 캄보디아의 [2]크메르 루주는 [4]론 놀의 [5]크메르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수도 [8]프놈펜에 입성하였고, 1976년 1월에 국명을 [1]민주 캄푸차로 개칭했다.
당시 중-소 갈등이 심화되어, 베트남은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중국과 우호적인 캄보디아의 [6]폴 포트 정권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폴 포트 정권은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정치로 베트남과 대립하였다. [1]민주 캄푸차로 명명한 [6]폴 포트는 1978년 베트남에 대한 다른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개시했다. 베트남은 [6]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맞서 베트남에서 조직된 [7]캄프차 민족해방전선과 연합하여 캄보디아에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 베트남이 프놈펜을 공략하자 [2]크메르 루주 체제는 붕괴되었다.
베트남군은 폴 포트 일파를 태국 국경 근처의 산악 지역까지 쫓아냈다.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1979년 1월 8일 캄보디아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렇지만 베트남군은 밀림 깊숙히 숨은 폴포트파의 게릴라 활동에 시달리며, 내전의 수렁에 빠졌다. 캄보디아는 [2]크메르 루주와 [3]시아누크 국왕파, [4]론 놀파의 세 계파는 연합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캄보디아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베트남군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1985년 1월에 대공세를 펼치며 반베트남 3파의 민주 캄보디아의 거점을 공략하였고, 3월에는 [3]시아누크 국왕파의 거점을 제압하자 민주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베트남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군의 장기간 주둔은 베트남을 적대하던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한 베트남은 캄보디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1986년 7월, 공산주의 베트남을 이끌던 [10]레주언 서기장이 사망했다. 뒤를 이어 [11]쯔엉찐이 서기장을 맡으면서 베타남 경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2월에 [12]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면서, 경제개방과 국제협력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한편, 1989년에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자치 능력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남은 주둔군마저 철수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26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베트남은 1989년 완전히 철군했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붕괴했다. 캄보디아는 [3]노로돔 시아누크와 [9]훈센을 주축으로 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었고 1993년 군주제로 복귀했다.
[1]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민주 캄보디아. 1975~1980년까지 크메르 루주가 배후에서 지배한 공산국가, 집권당은 캄푸치아 공산당(KCP)이었다. 킬링필드가 발생한 국가 [2]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68년에 결성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 군사조직.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3]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2012년)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4]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5]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캄보디아에 존재하던 공화국 [6]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캄프차 민족해방전선(Kampuchean United Front for National Salvation:KUFNS) : 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창립한 조직 [8] 프놈펜(Phnom Penh) : 캄보디아 수도 [9] 훈 센(Hun Sen, 1952년~) : 캄보디아의 제2대 총리(임기,1998년 11월 30일~2023년 8월 22일 ). 캄보디아인민당(CPP, Cambodian People's Party) [10]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11] 쯔엉찐(Truong Chinh, 1907년 ~ 1988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6년 7월 14일~1986년 12월 18일) [12] 도이모이 정책 : '도이'는 베트남어로 '변한다'는 뜻이고 '모이'는 베트남어로 '새롭다'는 뜻으로 쯔엉찐의 주도로 시작되 베트남의 개방개혁정책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79년 12월부터 1989년 2월까지 10년간 지속된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1]무자헤딘(Mujahideen)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1978년 [2]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세우고 여러 급진적인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다. 이에 저항하는 무슬림들이 반발하면서 [1]무자헤딘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3]하피줄라 아민은 1979년 4월에 [2]모하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집권하게 된다.
1979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넘어 수도인 카불에 도착한 소련은 [3]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고 [4]바브락 카르말을 후임으로 세우고 새로운 공산정권을 수립했다(폭풍333호 작전).
이 사건의 여파로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의 반란이 더욱 거세지자 [4]바브락 카르말 정권은 소련에게 진압을 요청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과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쉽게 진압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면서 소련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영토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소련이 부담해야 할 군사적 외교적 비용은 너무나 컸다.
1987년 소련의 서기장으로 집권한 [5]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발표하였다. 소련군은 1988년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전원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가면서 종료되었다.
[1] 무자헤딘(Mujahideen) :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 및 이슬람 세력. 성전(Jihad, 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를 의미한다
[2]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 1917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1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3]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1929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2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4]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 1929년~1996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3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5]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이란은 1979년 팔레비왕조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슬람 공화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반미감정이 강한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1989, 시아파)가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소위 '호메이니 혁명', '이란 이슬람 혁명'이라 불리며 자국내는 물론 주변국가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다.
친미성향의 팔레비왕조와 대조적인 루홀라 호메이니는 반미 정책으로 미국과 관계는 끊어졌고, 이러한 이란의 영향은 주변 중동국가내의 종파의 갈등으로 시아파의 폭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라크는 1979년 새 대통령으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 수니파)이 당선되었다. 후세인은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들에게 파급되는 것을 염려하여 이란 혁명의 혼란기를 틈타 이란과 이라크의 접경 지역인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수로를 둘러싼 영유권문제(양국 간 분쟁의 근원)를 계기로 이란을 선제공격하여 8년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국 및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양국은 1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비공식)가 발생했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측 모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긴채 종식되었다.
이라크는 이 전쟁을 '카디시야 전쟁(Qadisiya War)', 이란은 '강요된 전쟁(Imposed War)'이라고도 부른다.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은 1983년 10월 9일에 버마(현 미얀마)의 수도 랭군(현 양곤)에 위치한 아웅 산 묘소에서 대한민국의 외교사절 다수가 폭탄테러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당시 버마를 친선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은 아웅산 묘역을 참배하기로 하였고, 이 행사를 위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정부요인, 취재기자 등 17명이 폭탄테러로 사망하고, 합참의장 이기백 등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사건직후 공식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 순방일정이었으며 첫 방문국가가 버마였다고 한다.
* 아웅산(Aung San, 1915년~1947년) : 미얀마(버마)의 독립운동 혁명가, 정치인, 군인이며 국부로 칭송받고 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1991년 수상)한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의 아버지이다.
* 양곤(Yangon) : 미얀마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옛 수도. 원래의 이름은 랭군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랭군의 명칭도 양곤으로 바꾸었다.
* 미얀마(Myanmar)는 1989년 이전에는 버마(Burma)라는 국명이 사용되었다. 미얀마의 군부 정권은 '버마'라는 호칭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잔재인데다가 버마족 외에 다른 소수 민족(135개)을 아우르는 명칭인 미얀마로 국호를 변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