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봉기(Easter Rising)

아일랜드 영국 사건기간 : 1916년 4월 24일~1916년 4월 29일, 조회수 : 391,   등록일 : 2023-05-25
12세기 무렵부터 끊임없이 영국의 침략을 받았던 아일랜드는 1800년 영국 연합법에 의해 영국의 일부로 합병된다. 
시간이 흐를 수록 아일랜드의 반영감정이 커져갔고 독립을 위한 운동세력이 강해지면서 영국의회로 진출하여 아일랜드 자치법을 상정하였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포기하지 않고 몇번의 상정끝에 결국 1912년에 아일랜드 자치법은 영국의회에서 통과시킨다. 그러나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16년 2월 영국정부는 아일랜드에 자치권 부여하는 법안 시행을 연기하였다. 
 
이와같이 1886년부터 세 차례 부결되고 1912년에 통과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다시 연기되면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면서 [1]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 [4]아일랜드 의용군 및 [5]아일랜드 시민군들이 1916년 4월 24일 부활절에 [3]더블린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주도세력은 [2]패트릭 피어스가 이끈 아일랜드 의용군이었다. 이들은 중앙우체국을 사령부로 삼고 무력으로 여러 거점 점령하면서 [2]패트릭 피어스가 독립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부활절 봉기로 인해 아일랜드인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이 때문에 대부분의 아일랜드인은 부활절 봉기에 대해 냉담했고 어린 젊은이들의 과격한 행위로 치부하면서 욕을 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정부는 부활절 봉기 진압을 위해 그 당시 최신무기로 무장한 16,000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진압을 했다. 봉기군 300여 명이 사망하고 1,8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영국은 즉결심판으로 90명의 사형선고를 내리고 14명의 지도자를 참옥하게 죽였다. 이중에는 비무장 상태였거나 봉기에 가담하지 않은 아일랜드인들도 처형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무자비한 영국의 과잉진압으로  봉기군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다. 아일랜드 민심은 급격하게 변하고 봉기군에게 동조와 지지를 보내게 되었다. 이후 부활절 봉기를 주도한 세력은 아일랜드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부활절 봉기는 1918년 12월 실시된 총 선거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아일랜드 독립의 도화선이 되었다

[1] 아일랜드공화주의형제단(Irish Republican Brotherhood, IRB) : 19세기 중반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비밀 결사이다. 아일랜드공화주의형제단의 목표는 아일랜드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2] 패트릭 헨리 피어스(Patrick Henry Pearse, 1879년~1916년) : 1916년 더블린에서 발생한 부활절 봉기를 이끈 지도자들 중 한 명이며 더블린 중앙 우체국 앞에서 부활절 선언으로 알려져있는 아일랜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일주일간의 투쟁 끝에 영국군에 체포돼 군사재판을 거쳐 1916년에 처형됐다
[3] 더블린(Dublin) : 아일랜드 수도
[4] 아일랜드 의용군(Irish Volunteers) : 1913년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결성된 무장 단체. 아일랜드 시민군과 함께 1916년 부활절 봉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아일랜드공화국군 설립의 모체가 되었다
[5] 아일랜드 시민군(Irish Citizen Army, ICA) : 아일랜드 경찰로부터 노동자들의 시위를 방어하기 위해 더블린에서 조직된 훈련된 의용병들의 소규모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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