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지마 전투(Battle of Iwo Jima)

미국 일본 괌(미국) 사건기간 : 1945년 2월 19일~1945년 3월 26일, 조회수 : 193,   등록일 : 2023-01-10
이오지마 전투는 일본 도쿄와 마리아나 제도의 중간쯤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인 [1]이오지마에서 벌어진 미 해군 및 해병대와 일본 육군 간의 전투이다. 미군의 작전명은 디태치먼트 작전(Operation Detachment)이었다.

미국은 공습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 본토까지 폭격기가 날아가야 했는데, 당시에 무장한 B-29 폭격기는 5,000km 정도만 비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최소한 일본 본토 2,000 km 이내의 섬들을 점령하여 발진기지로 만들어야 했다. 미국은 1944년 도쿄로부터 2,300km 남쪽의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하였다. 드디어 마리아나 제도의 괌이나 사이판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도쿄까지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11월부터는 B-29 폭격기를 이용해 일본 본토 각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 중간의 이오지마에는 일본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가 있었다. 이오지마의 일본 전투기들이 마리아나 제도에서 이륙한 미군 폭격기들을 미군 폭격기의 이동을 미리 예측하고 저지했다. 심지어는 이오지마에서 발진한 일본 전투기들이 마리아나 제도의 미군 기지를 폭격해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미국은 전진 항공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1]이오지마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1945년 2월에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1945년 2월 19일 미군 해병대가 이오섬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곳곳에 요새와 지하터널을 만들어놓고 기관총과 박격포를 난사하며 미군에 저항했다. 일본군 포병의 사격으로 인해 해안선에 상륙한 해병대는 혼란에 빠졌고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부족한 보급으로 총알이 떨어진 일본군은 이내 미해병대의 필사적인 반격에 뚫리기 시작했다. 3월 17일에 미군은 섬을 장악했으며, 거의 모든 일본군 부대가 전멸했다. 3월 26일 구리바야시 대장 이하 남은 300명의 일본군이 마지막 항전을 했으나 전멸했다. 

5주 동안의 전투로 미군 전사자는 6,821명이지만 부상자는 21,865명으로 집계됐으며, 일본군은 20,933명의 수비 병력 중 20,129명이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태평양전쟁 중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일본보다 미군측 피해가 더 컸던 유일한 전투라고 한다. 당시 일본군 진지 구축에는 한국인 징용자들도 수백 명 동원됐다고 한다.

미 해병대가 이오지마의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 '이오섬의 성조기 게양'은 퓰리처상을 받았을 정도로 유명하다. 

1945년 2월23일 오전 10시35분 이오지마의 수리바치산 정상에 미국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 '이오섬의 성조기 게양'은 퓰리처상을 받았을 정도로 유명하다. 미 해병 5사단 28연대가 이 섬에 내려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지 나흘 만이다. 이 사진은 미 해병대원들의 투혼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오지마는 미국의 공군기지로 사용되다 1968년에 일본에 반환되었다. 현재는 일본 항공자위대의 기자가 이섬에 남아있으며 주민은 살지 않는다.

이오지마 전투는 태평양전쟁 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투 중 하나였다.

미국 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오지마 전투를 일본군과 미군의 입장에서 바라본 두 편의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아버지의 깃발>을 2006년과 2007년 각각 선보였다.

[1] 이오지마 : 도쿄 남쪽으로 1,080km, 괌 북쪽 1,130km에 위치하고 있는 도쿄~괌·사이판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화산섬으로 섬의 표면이 대부분 유황의 축적물로 뒤덮여 있다고 한다. '이오'는 유황, '지마'는 섬을 말한다
[2] 마리아나 제도(Mariana Islands) : 행정상 괌과 미연방에 편입된 북마리아나 제도로 나뉘어 있다. 북마리아나 제도는 괌 북쪽으로 725km까지 펼쳐져 있다. 주요섬으로는 사이판·티니안·아그리한·로타 등이 있고 파간·아순시온·파라욘데파하로스는 활화산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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