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건기간 : 1388년 5월 22일~1388년 6월 3일, 조회수 : 421, 등록일 : 2022-09-04
14세기 말 고려는 권문세족들의 횡포로 사회 기강이 해이해지고 왕권이 약화되었다. 밖으로는 원에서 명으로 교체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명나라의 [1]홍무제는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를 원나라 영토였다는 이유로 반환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1387년(우왕 13) 12월에 [2]철령위 설치를 통고하는 한편,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는 등 강압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고려는 국왕 [3]우왕과 [4]문하시중 [5]최영등 강경세력은 철령위 설치에 반발하여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요동정벌이 단행될 때, [7]이성계는 첫째,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하며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침략할 것이며 넷재,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우왕과 문하시중 최영(崔瑩)이 강력하게 주장해 요동정벌이 실행되었다. 고려군의 총사령관은 팔도도통사 [5]최영, 좌군도통사 [8]조민수, 우군통도사 [7]이성계로 편제하여 우왕과 최영은 서경(평양)에 머물면서 독전하고, [7]이성계와 [8]조민수가 이끄는 좌·우군은 음력 4월 18일 서경(평양)을 출발하였다.
이때 동원된 총 병력은 좌·우군 3만 8,830명과 겸군(傔軍) 1만 1,600명, 그리고 말 2만 1,682필이었으나 10만 대군을 자칭하면서 음력 5월 7일 [6]위화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했고, 마침 큰비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기가 어렵게 되자, [7]이성계는 이러한 실정을 보고하면서 요동정벌을 포기할 것을 우왕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정벌을 독촉하자,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회군을 결정하였다.
5월 22일 출발하여 6월 1일 개경 근처에 도착하여 6월 3일 최영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위화도 병력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최영과 우왕은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궁궐을 장악한 이성계 등은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했다.이를 바탕으로 조선건국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최영은 고봉현(高峰縣, 고양)으로 유배되었으며, 그 해 12월에 개경(개성)으로 압송돼 처형되었고, 우왕은 강화도로 추방됐다가 역시 1년뒤 아들 창왕과 함께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 위키백과, 나무위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홍무제(1328년~1398년) : 명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재위 : 1368년 ~ 1398년). 본명인 주원장(朱元璋)으로 유명하다
[2] 철령위(鐵嶺衛) : 고려 말인 1387년(우왕 13년), 중국 명(明)이 철령 이북의 고려 동북방 변경 지역을 직접 다스리기 위해 설치하려 했던 군사적 행정기구
[3] 우왕(1365년~1389년) : 고려의 제32대 국왕(재위: 1374년~1388년). 최영의 사위
[4]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최고 관리로 품계는 종1품이다. 조선의 영의정과 같고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와 비슷한 벼슬이다.
[5] 최영(1316년~1388년) :고려 말기의 장수이자 정치가
[6] 위화도 : 평안북도 신의주에 속해있는 압록강 한 가운데 있는 섬
[7] 이성계(1335년~1408년) : 고려 말 무신이자 정치가.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 1392년~1398년).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8] 조민수(미상 ~ 1391년) : 고려 말의 무신, 군인, 정치가
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재탄생' 또는 '부흥'을 뜻하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전개된 문화·예술·학문·사상 전반의 변화와 발전을 가리킨다. 역사학에서는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화적·지적 혁신의 시기로 평가한다.
역사적으로는 봉건적이고 기독교 세계관과 교회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에 강하게 작용하던 중세 유럽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와 학문을 다시 연구하고 발전시키려는 문화 운동을 말한다. 단순한 미술 운동이 아니라 문학, 철학, 과학, 건축, 정치,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사고방식이 등장한 시대적 변화였다.
르네상스는 약 14세기 초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에서 시작되어 15세기와 16세기를 거치며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는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가장 큰 배경은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은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경제력이 성장한 상인과 금융업자들은 예술과 학문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환경은 새로운 문화가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1453년 [3]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이후, 일부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유럽으로 이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전 그리스어 문헌의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르네상스 [1]인문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이와 함께 중세의 신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의 능력과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1]인문주의가 확산되면서 르네상스는 더욱 빠르게 발전하였다.
르네상스는 먼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피렌체는 당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2]메디치 가문은 금융업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예술가와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이러한 후원 문화는 미술과 건축, 학문의 발전을 이끌었다.
초기 르네상스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와 사실적인 예술 표현이 발전하였다. 르네상스 전성기에는 회화와 조각, 건축 분야에서 사실성과 조화, 비례를 중시하는 새로운 예술 양식이 확립되었다. 예술가들은 인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원근법과 해부학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16세기에는 르네상스 문화가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프랑스에서는 궁정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종교개혁과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영국에서는 문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연극과 시가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활동하였다.
[7]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 해부학, 공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 대표적인 르네상스의 인물이다. 그의 작품인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인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8]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 다비드상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9]라파엘로는 균형과 조화를 강조한 작품으로 유명하며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작이다.
문학에서는 [4]단테 알리기에리, [5]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6]조반니 보카치오가 활동하며 르네상스 문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과학 분야에서는 [10]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운동한다는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11]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 관측을 통해 태양중심설을 뒷받침하는 관측 결과를 제시하였으며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방법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인문주의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일 뿐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발전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예술에서는 원근법과 명암법, 해부학적 표현이 발전하여 현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건축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둥과 돔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학문에서는 고전 문헌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연구 방법이 점차 자리 잡았다. 이러한 변화는 근대 과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확산시키며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계몽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지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장기적으로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는 상공업과 금융업이 발전하였고 대항해시대를 촉진하는 지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예술과 건축은 이후 수세기 동안 유럽 문화의 기준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세계 문화유산과 미술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인문주의(Humanism) :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 창의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상으로 르네상스의 핵심 정신으로 평가된다. [2]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 :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와 금융을 주도했던 가문으로 르네상스 예술과 학문 발전의 대표적인 후원자였다. [3]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 :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 존속한 동로마 제국으로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다. [4]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년 5월 ~ 1321년 9월 14일) :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철학자로 『신곡』을 통해 중세 문학을 집대성하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이탈리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5]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년 7월 20일 ~ 1374년 7월 19일) :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학자이자 시인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연구하며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6]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년 6월 16일 ~ 1375년 12월 21일) : 이탈리아의 『데카메론』의 저자로 인간의 삶과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르네상스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7]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 이탈리아의 화가, 과학자, 발명가, 건축가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르네상스 최고의 천재이다. 대표작으로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이 있다. [8]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 :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로 활동했으며 『다비드상』과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로 유명하다. 르네상스 미술의 절정을 이끈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9]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년 4월 6일 ~ 1520년 4월 6일) : 이탈리아의 화가로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였다. 대표작 『아테네 학당』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 정신을 예술로 표현하였다. [10]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 : 폴란드의 천문학자로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천문학자이다. 근대 천문학과 과학혁명의 출발점이 된 인물로 평가된다. [11]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 : 이탈리아 출신으로 망원경을 이용한 천체 관측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한 과학자이다.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과학 연구 방법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1337~1453년(116년)동안 싸운 전쟁이다. 양국이 계속 싸운것은 아니었으며 중간에 몇 차례 휴전과 종전등이 있었다.
프랑스 [4]카페왕조의 왕인 [5]샤를 4세가 후사없이 1328년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5]샤를 4세의 뒤를 이을 후보로 샤를 4세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13]에드워드 3세, 사촌동생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결국 필리프가 [7]필리프 6세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여 [6]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잉글랜드는 1066년 [1]노르망디 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의 일부 영토를 소유하였는데 이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분쟁이 계속되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 국왕이 소유한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국왕보다 더 많아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중세 봉건제도 하에서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신하라는 이중 지위를 갖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13]에드워드 3세 시기에 [12]플랜태저넷가가 소유한 프랑스 내 [2]노르망디와 [3]아키텐 지역에 대한 지배권과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등이 누적되면서 1337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장궁을 앞세운 잉글랜드가 연승했지만 [23]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의 반격에 밀려나 프랑스내 영토를 상실하였다.
100년 전쟁 결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100년 전쟁 연표
- 1337년 : 잉글랜드 선전포고
- 1338년 : 잉글랜드의 프랑스 상륙. [13]에드워드 3세
- 1340년 : [20]슬로이스 해전(Battle of Sluys) 잉글랜드의 승리로 해상권 장악
- 1346년 : 크레시 전투. 잉글랜드 승리. 영국의 에드워드 3세 vs 프랑스 [7]필리프 6세
- 1347년~1350년 : 흑사병 창궐, 휴전
- 1350년 : 프랑스 필리프 6세가 죽고 뒤를 이어 [8]장 2세 즉위
- 1356년 :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 잉글랜드 승리.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아들 [14]흑태자 에드워드 vs 장 2세. 장 2세 포로로 잡혀 런던으로 이송
- 1360년 : 브레티니-칼레 조약. 프랑스 브레티니(Brétigny) 지방에서 초안이 작성되어 같은 해 10월 24일에 칼레에서 비준
- 1364년 : 프랑스 [8]장 2세가 죽고 [9]샤를 5세 즉위
- 1364년 : 오레 전투(Bataille d'Auray) 프랑스 승리. 프랑스 [9]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 1369년~1389년 : 개롤라인 전쟁(Caroline War). 프랑스 승리. 프랑스 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프랑스는 잃었던 영토들을 회복
- 1377년 :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가 죽고 [15]리처드 2세 즉위
- 1380년 : 프랑스 샤를 5세가 죽고 [10]샤를 6세 즉위
- 1399년 : 잉글랜드 리처드 2세는 폐위되고 [16]랭커스터 가의 [17]헨리 4세 즉위
- 1413년 : 잉글랜드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18]헨리 5세 즉위
- 1415년 :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 잉글랜드 승리. 잉글랜드의 헨리 5세 vs 샤를 6세
- 1422년 :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19]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 프랑스는 [11]샤를 7세가 왕위 선언
- 1428년 : 잉글랜드의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 포위
- 1429년 : 오를레앙 전투(Orléans) 프랑스 승리. [23]잔 다르크 출현
- 1429년 : 프랑스 [11]샤를 7세 정식으로 즉위
- 1431년 : 잔 다르크 루앙에서 화형
- 1435년 : 1407년부터 시작된 [21]부르고뉴 공국과 프랑스 왕가의 내전. 아라스 조약으로 [22]부르고뉴 공작과 샤를 7세와 평화협정. 이로써 프랑스내에 친 잉글랜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1436년 파리 수복
- 1441년~1453년 : 프랑스의 영토수복
- 백년전쟁의 끝(1475): 잉글랜드의 [2]노르망디와 [3]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1] 노르망디 공국(Duchy of Normandy ) : 프랑스 왕의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의 영지였으나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월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잉글랜드의 영지가 되었다.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1066년~1135년)가 시작되었다
[2] 노르망디(Normandy) : 프랑스 북서부 지방
[3] 아키텐(Aquitaine) :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심도시는 보르도이다. 서쪽으로 대서양과 접하며 남쪽으로 스페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4] 카페왕조(Capetian dynasty) : 프랑스의 왕가. 987년~1328년 존속. 14대
[5] 샤를 4세(Charles IV of France, 1294년~1328년) : 프랑스 카페 왕가의 제14대 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22년 1월 3일~1328년 2월 1일)
[6] 발루아가(House of Valois) : 프랑스 왕국의 왕조. 1328년에서 1589년까지 지속. 발루아가(1328년~1498년, 7대), 발루아 오를레앙가(1498년~1515년, 1대), 발루아 앙굴렘가(1515년~1589년, 5대)로 계승
[7] 필리프 6세(Philip VI, 1293년~1350년) :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의 초대 왕(재위 1328년 4월 1일~1350년 8월 22일)
[8] 장 2세(Jean II, 1319년~1364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1350년 8월 22일~1364년 4월 8일)
[9] 샤를 5세(Charles V, 1338년~1380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3대 국왕(재위: 1364년 ~ 1380년)
[10] 샤를 6세(Charles VI, 1368년~1422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4대 국왕(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11] 샤를 7세(Charles Ⅶ, 1403년~1461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5대 국왕(재위 1422년 10월 21일~1461년 8월 16일). 샤를 6세의 5번째 아들
[12] 플랜태저넷가(House of Plantagenet) :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 성립 이후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던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윌리엄 1세)이었고, 노르망디 왕조의 뒤를 이어 헨리2세가 즉위하여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2세는 프랑스 앙주 백작의 직위를 계승하여 프랑스의 아키텐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13] 에드워드 3세(Edward III, 1312년~1377년) : 잉글랜드의 국왕.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외손자(1325년–1360년). 100년 전쟁을 일으켰다
[14]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1376년) : 에드워드 3세의 장남. 왕위 계승자였으나 아버지 보다 먼저 사망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왕위는 그의 아들 리처드 2세에게 돌아갔다.
[15] 리처드 2세(Richard II, 1367년~1400년) : 잉글랜드 플랜태저넷가의 제8대 국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77년 6월 21일-1399년 9월 30일)
[16] 랭커스터 가(House of Lancaster) : 플랜태저넷 왕가의 방계. 3명의 잉글랜드 국왕 배출
[17] 헨리 4세(Henry Ⅳ, 1366년~1413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초대 국왕이며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의 손자(재위 1399년 9월 30일-1413년 3월 20일)
[18] 헨리 5세(Henry V, 1386년~1422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2대 국왕(재위 1413년 3월 21일-1422년 8월 31일)
[19] 헨리 6세(Henry VI, 1421년~1471년) : 생후 9개월만에 즉위.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3대 국왕(재위 1422년 8월 31일~1461년 5월 4일). 외할아버지 샤를 6세가 갑자기 사망하여 트루아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스의 왕까지 되었다.
[20] 슬로이스(Sluys) : 현재 네덜란드 도시
[21] 부르고뉴 공국(Duchy of Burgundy) : 중세 프랑스 동부의 공국. 1032년 ~ 1477년
[22] 부르고뉴 공작(Philip the Good, 1396년~1467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방계인 부르고뉴-발루아가의 공작으로 필리프 3세라고도 한다
[23]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년~1431년)
1378년부터 1417년까지 서방교회가 두 명, 나중에는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며 심각한 분열을 겪었던 혼란의 시기로, 중세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통일성을 크게 흔들었다.
서방교회 대분열은 [1]아비뇽 유수로 거슬러 올라간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청은 로마 대신 프랑스 아비뇽에 위치하며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1377년 교황 [2]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청을 로마로 복귀시켰으나, 그의 사망 후 새 교황 선출 과정에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1378년, 로마 시민들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출신 교황 [3]우르바노 6세가 선출되었지만, 그의 엄격한 개혁 정책과 독단적인 태도로 인해 일부 추기경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고 아비뇽에서 새로운 교황인 [4]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진영을 형성했다. 서방교회는 두 교황이 서로를 정통성 없는 적으로 간주하며 대립하는 상황에 빠졌다.
유럽 각국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로마파와 아비뇽파로 나뉘어 교황을 지지했으며, 교회는 내부적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409년 [6][7]피사 공의회에서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삼중 교황 체제가 등장했다.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6][8]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대분열은 종식되었다. 공의회는 기존 모든 교황들을 퇴위시키거나 폐위하고, 1417년 [5]마르티노 5세를 유일한 교황으로 선출하면서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했다.
서방교회의 대분열은 중세 교회의 도덕적, 정치적 권위를 크게 약화시키고, 신앙심 있는 일반인들에게 교회 지도부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다. 이는 이후 종교 개혁과 교회 구조 변화의 배경이 되었으며, 중세 말기 유럽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과 정통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1]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 :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해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있던 시기 [2] 그레고리오 11세(Pope Gregory XI, 1329년~1378년 3월 27일) : 제201대 교황(재위: 1371년 1월 5일 - 1378년 3월 27일) [3] 우르바노 6세(Pope Urban VI, 1318년~1389년 10월 15일)는 제202대 교황(재위: 1378년 4월 8일~1389년 10월 15일) [4] 클레멘스 7세(Pope Clement VII, 1478년 5월 26일~1534년 9월 25일) : 제219대 교황(재위: 1523년 11월 26일~1534년 9월 25일) [5] 마르티노 5세(Pope Martin V, 1368년~1431년 2월 20일) : 제206대 교황(재위: 1417년 11월 11일~1431년 2월 20일) [6] 공의회 : 교회 내 주요 교리와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소집되는 주교들의 공식 회의 [7] 피사 공의회(Council of Pisa, 1409년) : 서방교회 대분열 해결을 시도했으나,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오히려 삼중 교황 체제를 초래한 공의회 [8]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 :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공의회로, 서방교회 대분열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여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한 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