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개혁(光武改革)

대한민국 사건기간 : 1896년~1904년, 조회수 : 498,   등록일 : 2022-07-01
광무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직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시행한 대한제국의 근대화 개혁이다.

광무개혁은 '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 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래 부분적으로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여 나라의 발전을 이룩하려 하였다.

대한제국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자주성을 뒷받침하기 이해 국방력 강화와 재정 개혁,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다. 먼저 황제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고, 서울의 중앙군과 지방의 지방군을 대폭 증강하며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다.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함인 양무호를 구입하였다. 양무호는 매우 빈약했으며 이마저도 러일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겨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1896년 1월 11일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폐지되고 대한제국이 건국 후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9년에 [1]양지아문을 설치하고 1899년부터 1903년까지 일부 지역에서 토지조사사업과 [2]지계발급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토지를 법률의 보호 아래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는 토지거래 질서가 확립 되었으며, 국가 재정을 개선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갑오개혁 때 23부로 개편한 행정을 아관파천 이후 13도로 재개편하였다,

적극적으로 추진된 분야는 상공업 진흥책이다. 정부 스스로 제조공장을 설립했으며, 민간의 제조회사 설립을 지원하여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근대적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했으며, 공업전습소 등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황실에서는 방직공장, 유리공장, 제지공장의 설립을 시도했고, 일반 민간인의 공장 설립은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지만 황실이 직영하는 업종 이외의 것은 쉽게 허가하였다.

정부는 근대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근대적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의학교를 설립하여 국민들의 위생과 보건에 노력했으며 중학교를 설립하여 중등교육의 근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한성도시개조상업을 통해 도로와 하수도를 정비하고 교통, 통신, 전기, 전차 등의 근대 시설을 도입하여 산업발전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시기인 1899년에 전차개통과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그 밖에 도량형 제도와 호적제 실시, 순회 재판소 설치, 종합병원인 제중원(濟衆院), 구휼기관인 혜민원(惠民院)등이 설립되었다.

광무개혁은 이처럼 전제군주제의 확립을 통해 근대 주권국가를 지향했고, 짧은 기간에 국방, 산업, 교육, 기술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러일전쟁과 함께 대한제국 정부의 개혁 사업은 중단되었다.

광무개혁은 황제권 강화라는 보수적인 색채와 지계발급, 상공업 진흥, 기술학교 설립, 교통.통신의 인프라 개선등 개혁적이고 새로운 특징을 볼 수 있다. 또한 갑신벙변, 갑오개혁, 을미개혁 같은 개혁들에 비해 자주적으로 추진했던 개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보수적인 인물들이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점을 들어 광무개혁의 개혁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 송찬섭외 지음,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p250-25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광무개혁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양지아문(量地衙門) : 1898년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서
[2] 지계 : 토지 소유권 증명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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