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개혁(光武改革)
대한민국
사건기간 : 1896년~1904년, 조회수 : 498, 등록일 : 2022-07-01
광무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직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시행한 대한제국의 근대화 개혁이다.
광무개혁은 '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 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래 부분적으로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여 나라의 발전을 이룩하려 하였다.
대한제국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자주성을 뒷받침하기 이해 국방력 강화와 재정 개혁,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다. 먼저 황제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고, 서울의 중앙군과 지방의 지방군을 대폭 증강하며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다.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함인 양무호를 구입하였다. 양무호는 매우 빈약했으며 이마저도 러일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겨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1896년 1월 11일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폐지되고 대한제국이 건국 후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9년에 [1]양지아문을 설치하고 1899년부터 1903년까지 일부 지역에서 토지조사사업과 [2]지계발급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토지를 법률의 보호 아래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는 토지거래 질서가 확립 되었으며, 국가 재정을 개선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갑오개혁 때 23부로 개편한 행정을 아관파천 이후 13도로 재개편하였다,
적극적으로 추진된 분야는 상공업 진흥책이다. 정부 스스로 제조공장을 설립했으며, 민간의 제조회사 설립을 지원하여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근대적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했으며, 공업전습소 등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황실에서는 방직공장, 유리공장, 제지공장의 설립을 시도했고, 일반 민간인의 공장 설립은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지만 황실이 직영하는 업종 이외의 것은 쉽게 허가하였다.
정부는 근대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근대적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의학교를 설립하여 국민들의 위생과 보건에 노력했으며 중학교를 설립하여 중등교육의 근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한성도시개조상업을 통해 도로와 하수도를 정비하고 교통, 통신, 전기, 전차 등의 근대 시설을 도입하여 산업발전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시기인 1899년에 전차개통과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그 밖에 도량형 제도와 호적제 실시, 순회 재판소 설치, 종합병원인 제중원(濟衆院), 구휼기관인 혜민원(惠民院)등이 설립되었다.
광무개혁은 이처럼 전제군주제의 확립을 통해 근대 주권국가를 지향했고, 짧은 기간에 국방, 산업, 교육, 기술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러일전쟁과 함께 대한제국 정부의 개혁 사업은 중단되었다.
광무개혁은 황제권 강화라는 보수적인 색채와 지계발급, 상공업 진흥, 기술학교 설립, 교통.통신의 인프라 개선등 개혁적이고 새로운 특징을 볼 수 있다. 또한 갑신벙변, 갑오개혁, 을미개혁 같은 개혁들에 비해 자주적으로 추진했던 개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보수적인 인물들이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점을 들어 광무개혁의 개혁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 송찬섭외 지음,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p250-25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광무개혁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양지아문(量地衙門) : 1898년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서
[2] 지계 : 토지 소유권 증명 문서
광무개혁은 '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 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래 부분적으로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여 나라의 발전을 이룩하려 하였다.
대한제국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자주성을 뒷받침하기 이해 국방력 강화와 재정 개혁,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다. 먼저 황제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고, 서울의 중앙군과 지방의 지방군을 대폭 증강하며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다.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함인 양무호를 구입하였다. 양무호는 매우 빈약했으며 이마저도 러일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겨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1896년 1월 11일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폐지되고 대한제국이 건국 후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9년에 [1]양지아문을 설치하고 1899년부터 1903년까지 일부 지역에서 토지조사사업과 [2]지계발급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토지를 법률의 보호 아래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는 토지거래 질서가 확립 되었으며, 국가 재정을 개선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갑오개혁 때 23부로 개편한 행정을 아관파천 이후 13도로 재개편하였다,
적극적으로 추진된 분야는 상공업 진흥책이다. 정부 스스로 제조공장을 설립했으며, 민간의 제조회사 설립을 지원하여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근대적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했으며, 공업전습소 등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황실에서는 방직공장, 유리공장, 제지공장의 설립을 시도했고, 일반 민간인의 공장 설립은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지만 황실이 직영하는 업종 이외의 것은 쉽게 허가하였다.
정부는 근대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근대적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의학교를 설립하여 국민들의 위생과 보건에 노력했으며 중학교를 설립하여 중등교육의 근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한성도시개조상업을 통해 도로와 하수도를 정비하고 교통, 통신, 전기, 전차 등의 근대 시설을 도입하여 산업발전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시기인 1899년에 전차개통과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그 밖에 도량형 제도와 호적제 실시, 순회 재판소 설치, 종합병원인 제중원(濟衆院), 구휼기관인 혜민원(惠民院)등이 설립되었다.
광무개혁은 이처럼 전제군주제의 확립을 통해 근대 주권국가를 지향했고, 짧은 기간에 국방, 산업, 교육, 기술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러일전쟁과 함께 대한제국 정부의 개혁 사업은 중단되었다.
광무개혁은 황제권 강화라는 보수적인 색채와 지계발급, 상공업 진흥, 기술학교 설립, 교통.통신의 인프라 개선등 개혁적이고 새로운 특징을 볼 수 있다. 또한 갑신벙변, 갑오개혁, 을미개혁 같은 개혁들에 비해 자주적으로 추진했던 개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보수적인 인물들이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점을 들어 광무개혁의 개혁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 송찬섭외 지음,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p250-25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광무개혁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양지아문(量地衙門) : 1898년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서
[2] 지계 : 토지 소유권 증명 문서
- 해당되는 데이터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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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1894년(고종 31) 7월에서 1896년 2월까지 추진되었던 일련의 개혁운동이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제1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한 뒤 조선 정부에 개혁을 강요하였다.
(1) 제1차 갑오개혁(1894년 7월 27일~1894년 12월 17일) - 제1차 김홍집 내각
개혁 추진을 위한 정책의결 기구인 군국기무처 설치하였으며 갑신정변의 14개조 정강과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현 12개조를 반영하여 자주적으로 추진하였다
- 중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원을 연호로 사용
- 왕실 사무를 전담하는 궁내부를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의 사무를 분리함 : 궁내부와 의정부로 나뉨
- 6조를 8아문(내무아문, 외무아문, 탁지아문, 법무아문, 학무아문, 공무아문, 군무아문, 농상아문)으로 개편함.
- 내무아문 예하에 경무청을 설치하여 근대적 경찰제도 시행 및 탁지아문으로 재정을 일원화 함
- 과거제 폐지
- 은 본위 화폐제도를 시행
- 도량형을 통일하고 조세의 금납화를 단행함
- 신분제(공,사노비제)를 폐지함
-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함
(2) 제2차 갑오개혁(1894년 12월 17일~1895년 7월 7일) : 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개혁에 수구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흥선대원군의 거센반발에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군국기무처를 폐지하였다. 대신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가 있었던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전격 임명하여 총 213건의 개혁안이 제정, 실시되었는데, 상당수는 앞서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개혁안을 수정, 보완하는 것이다.
- 홍범14조를 반포
- 의정부는 내각으로 8아문은 아문이 부로 바뀌면서 7부(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농상공부로 통합)로 개편함
- 재판소를 선치하고 사법권을 행정권으로부터 분리함 : 사법부 독립
- 상공업의 활성화를 위하여 육의전을 폐지함
- 군사제도는 훈련대와 시위대를 조직함
- 한성사범학교 및 부속 소학교가 설립되고 외국어 학교 관제가 반포됨
[제3차 김홍집 내각]
청일전쟁에서 승리와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랴오둥반도를 점령하였으나 삼국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으로 랴오등반도를 청에 반환하였다. 이 와중에 2차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지나친 독주로 인하여 박영효는 정변을 꾀했다는 혐의로 실각하여 재차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와 같이 국내외 정세가 바뀌자 조선 왕실은 일본의 내정간섭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과 러시아에 우호적이던 온건개화파를 중심으로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3)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 1895년 10월 8일~1896년 2월 11일) : 제4차 김홍집내각
조선정부의 친러 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친러 정책을 주도한 명성 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감행하였다. 친러내각이 붕괴되고 친일적 성격이 강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추진된 개혁을 을미개혁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
- 군제를 변경하여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
- 단발령 시행
- 태양력을 채택하고 종두법을 시행함
-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우편 사무가 재개됨
-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소학교가 설립됨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시행하자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도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하였다(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미국과 가깝게 지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세웠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나무위키등..
*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 김홍집(1842~1896):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 군국기무처 : 조선말기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던 최고 정책결정 기관. 6월 25일부터 같은 해 12월 17일까지 존속
* 을미사변 :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조선왕후(명성황후) 민씨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일본인 낭인등에게 살해된 사건
* 아관파천 : 을미사변으로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과 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간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
* 홍범14조 : 고종이 종묘에서 선포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정책백서이자 헌법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제1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한 뒤 조선 정부에 개혁을 강요하였다.
(1) 제1차 갑오개혁(1894년 7월 27일~1894년 12월 17일) - 제1차 김홍집 내각
개혁 추진을 위한 정책의결 기구인 군국기무처 설치하였으며 갑신정변의 14개조 정강과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현 12개조를 반영하여 자주적으로 추진하였다
- 중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원을 연호로 사용
- 왕실 사무를 전담하는 궁내부를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의 사무를 분리함 : 궁내부와 의정부로 나뉨
- 6조를 8아문(내무아문, 외무아문, 탁지아문, 법무아문, 학무아문, 공무아문, 군무아문, 농상아문)으로 개편함.
- 내무아문 예하에 경무청을 설치하여 근대적 경찰제도 시행 및 탁지아문으로 재정을 일원화 함
- 과거제 폐지
- 은 본위 화폐제도를 시행
- 도량형을 통일하고 조세의 금납화를 단행함
- 신분제(공,사노비제)를 폐지함
-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함
(2) 제2차 갑오개혁(1894년 12월 17일~1895년 7월 7일) : 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개혁에 수구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흥선대원군의 거센반발에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군국기무처를 폐지하였다. 대신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가 있었던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전격 임명하여 총 213건의 개혁안이 제정, 실시되었는데, 상당수는 앞서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개혁안을 수정, 보완하는 것이다.
- 홍범14조를 반포
- 의정부는 내각으로 8아문은 아문이 부로 바뀌면서 7부(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농상공부로 통합)로 개편함
- 재판소를 선치하고 사법권을 행정권으로부터 분리함 : 사법부 독립
- 상공업의 활성화를 위하여 육의전을 폐지함
- 군사제도는 훈련대와 시위대를 조직함
- 한성사범학교 및 부속 소학교가 설립되고 외국어 학교 관제가 반포됨
[제3차 김홍집 내각]
청일전쟁에서 승리와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랴오둥반도를 점령하였으나 삼국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으로 랴오등반도를 청에 반환하였다. 이 와중에 2차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지나친 독주로 인하여 박영효는 정변을 꾀했다는 혐의로 실각하여 재차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와 같이 국내외 정세가 바뀌자 조선 왕실은 일본의 내정간섭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과 러시아에 우호적이던 온건개화파를 중심으로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3)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 1895년 10월 8일~1896년 2월 11일) : 제4차 김홍집내각
조선정부의 친러 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친러 정책을 주도한 명성 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감행하였다. 친러내각이 붕괴되고 친일적 성격이 강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추진된 개혁을 을미개혁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
- 군제를 변경하여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
- 단발령 시행
- 태양력을 채택하고 종두법을 시행함
-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우편 사무가 재개됨
-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소학교가 설립됨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시행하자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도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하였다(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미국과 가깝게 지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세웠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나무위키등..
*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 김홍집(1842~1896):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 군국기무처 : 조선말기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던 최고 정책결정 기관. 6월 25일부터 같은 해 12월 17일까지 존속
* 을미사변 :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조선왕후(명성황후) 민씨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일본인 낭인등에게 살해된 사건
* 아관파천 : 을미사변으로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과 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간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
* 홍범14조 : 고종이 종묘에서 선포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정책백서이자 헌법
을미개혁은 제1·2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김홍집 내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아 제3차 갑오개혁이라고도 한다.
조선정부의 친러 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친러 정책을 주도한 명성 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감행하였다. 친러내각이 붕괴되고 친일적 성격이 강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추진된 개혁을 을미개혁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
- 군제를 변경하여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
- 단발령 시행
- 태양력을 채택하고 종두법을 시행함
-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우편 사무가 재개됨
-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소학교가 설립됨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시행하자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하였다(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미국과 가깝게 지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세웠다.
이로 인해 김홍집내각은 전복되고 일본의 입지가 추락되었고 강제에 의한 개혁이 중단되었으며, 구내각의 김홍집·정병하·어윤중 등 정부의 몇몇 개화파인사들은 서울과 지방에서 각기 성난 군중에 의해 피살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미개혁)]
조선정부의 친러 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친러 정책을 주도한 명성 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감행하였다. 친러내각이 붕괴되고 친일적 성격이 강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추진된 개혁을 을미개혁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
- 군제를 변경하여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
- 단발령 시행
- 태양력을 채택하고 종두법을 시행함
-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우편 사무가 재개됨
-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소학교가 설립됨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시행하자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하였다(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미국과 가깝게 지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세웠다.
이로 인해 김홍집내각은 전복되고 일본의 입지가 추락되었고 강제에 의한 개혁이 중단되었으며, 구내각의 김홍집·정병하·어윤중 등 정부의 몇몇 개화파인사들은 서울과 지방에서 각기 성난 군중에 의해 피살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미개혁)]
고종은 1895년 [1]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종은 이후 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약 1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했다.
1896년 6월 고종의 명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 자격으로 파견된 [2]민영환은 러시아 외무장관 로바노프를 만나 러시아 군대파견, 군사교관단 파견, 차관제공, 재정고문초빙, 전신선 가설 등의 요청을 하였다.
[2]민영환의 절박함과 진정성으로 1896년 10월 러시아는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을 파견한다. 교관단들은 조선군 1600여 명을 선발해 군사훈련을 시키게 된다.
안전신변이 확보된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덕수궁(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빼았겼던 군주권을 회복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1] 을미사변 : 1895년 일본에 의하여 조선왕후인 명성왕후가 살해된 사건
[2] 민영환(1861년~1905년) :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크게 개탄하며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국민들에게 남기고 11월 30일 자결하였다.
* 아관 : 러시아제국을 한문으로 '아라사'라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였다. 따라서 아라사 공관을 줄여서 아관이라고 불렀으며 러시아 공관을 의미한다
* 파천 :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가는 것
*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 1841년~1910년) :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주(駐)조선 러시아 공사로 활동하면서 고종과 친분을 쌓았으며 아관파천을 주도하였다
고종은 이후 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약 1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했다.
1896년 6월 고종의 명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 자격으로 파견된 [2]민영환은 러시아 외무장관 로바노프를 만나 러시아 군대파견, 군사교관단 파견, 차관제공, 재정고문초빙, 전신선 가설 등의 요청을 하였다.
[2]민영환의 절박함과 진정성으로 1896년 10월 러시아는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을 파견한다. 교관단들은 조선군 1600여 명을 선발해 군사훈련을 시키게 된다.
안전신변이 확보된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덕수궁(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빼았겼던 군주권을 회복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1] 을미사변 : 1895년 일본에 의하여 조선왕후인 명성왕후가 살해된 사건
[2] 민영환(1861년~1905년) :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크게 개탄하며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국민들에게 남기고 11월 30일 자결하였다.
* 아관 : 러시아제국을 한문으로 '아라사'라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였다. 따라서 아라사 공관을 줄여서 아관이라고 불렀으며 러시아 공관을 의미한다
* 파천 :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가는 것
*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 1841년~1910년) :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주(駐)조선 러시아 공사로 활동하면서 고종과 친분을 쌓았으며 아관파천을 주도하였다
아관파천이후 1897년 2월에 덕수궁(경운궁)으로 환궁한 조선의 제26대 국왕 고종은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光武)'로 고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현재의 조선호텔 자리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인 환구단을 건설하였다. 환구단에서 1897년 10월 12일(음력 9월 17일)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내외에 선포하였다. 11월에 그때까지 미뤄졌던 명성왕후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렀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자주독립국가임을 내외에 거듭 재천명한 것이며, 자주독립의 강화를 국내와 세계에 알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강대국들은 대한제국 선포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1899년 근대 헌법의 성격의 전문 9조로 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 반포하여 대내외적으로 전제군주국가의 체제를 확고하게 법률적으로 규정하였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대한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제국이다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정치이다
제3조 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누린다
제5조 대한국 대황제는 육해군을 통솔한다
제6조 대한국 대황제는 법률을 제정하여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고, 대사, 특사, 감형, 복권등을 명한다
제9조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 체결 국가에 사신을 파견하고 선전, 강화 및 제반조규를 체결한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일본과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으며,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으로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자주독립국가임을 내외에 거듭 재천명한 것이며, 자주독립의 강화를 국내와 세계에 알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강대국들은 대한제국 선포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1899년 근대 헌법의 성격의 전문 9조로 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 반포하여 대내외적으로 전제군주국가의 체제를 확고하게 법률적으로 규정하였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대한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제국이다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정치이다
제3조 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누린다
제5조 대한국 대황제는 육해군을 통솔한다
제6조 대한국 대황제는 법률을 제정하여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고, 대사, 특사, 감형, 복권등을 명한다
제9조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 체결 국가에 사신을 파견하고 선전, 강화 및 제반조규를 체결한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일본과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으며,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으로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스페인은 16세기 쿠바를 정복한 이래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배에 가장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 쿠바섬이었다.
[3]먼로 독트린으로 영향을 받은 쿠바에서도 독립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스페인은 쿠바 1차 독립전쟁인 10년 전쟁(1868~1878)을 종결하고 휴전상태였다.
1895년 2월 24일에 스페인의 지배에 반발하는 봉기가 각지에서 발발하면서 쿠바의 2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1898년 1월 쿠바 [2]아바나에서 자국민들의 소요가 발생하자, 미국은 [2]아바나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의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이유로 미국 해군이 주둔하게 된다.
1898년 2월15일 쿠바 아바나만에서 미 해군 함정 메인함이 원인 불명의 폭발과 함께 침몰하여 260명의 승무원들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새로운 제국 미국의 등장을 알린 미국-스페인 전쟁(미-서 전쟁)의 시발이었다.
사건 당시에 미국은 이 사건을 스페인이 일으킨 것으로 몰아서 전쟁의 구실로 삼았다. 미국의 언론들은 애국주의를 부추기면서 스페인간의 대립을 부채질하였다. 4월 11일에 [1]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은 의회에 개입 승인을 요청하였다. 미 의회는 4월 19일 쿠바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의결하여 사실상 전쟁을 선언했다.
황혼의 제국 스페인은 전쟁을 벌일 처지도 아니었고 의지도 없었다. 미국은 쿠바를 점령하고 카리브해에서 승리하여 카리브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아시아의 전진기지로 필리핀을 노리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켜 준다는 명분으로 스페인군을 필리핀에서 몰아내면서 필리핀을 지배하하였다.
전쟁은 필리핀과 쿠바에서 미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에서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의 지배권이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 일본도 이 전쟁의 혜택을 얻었다.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과 서로 필리핀과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상호인정한 것이다.
[1]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1843년~1901년) : 미국의 제25대 대통령(임기 1897년 3월 4일~1901년 9월 14일). 1901년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2] 아바나(Havana) : 쿠바의 수도
[3] 먼로독트린 : 1823년 12월 3일, 제5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에 의해 주창된 외교방침으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간에 상호 불간섭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외교적 고립정책. 미국은 이 선언을 통하여 유럽 열강은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려 하지 말 것, 신생 독립국에 대해 유럽이 간섭하지 말 것, 미국은 유럽이 보유하고 있는 기존의 식민지를 포함해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유럽 국가가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을 식민지화 하려고 한다거나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면 이를 미국에 대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대응하겠다는 내용과 미국 역시 유럽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개입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3]먼로 독트린으로 영향을 받은 쿠바에서도 독립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스페인은 쿠바 1차 독립전쟁인 10년 전쟁(1868~1878)을 종결하고 휴전상태였다.
1895년 2월 24일에 스페인의 지배에 반발하는 봉기가 각지에서 발발하면서 쿠바의 2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1898년 1월 쿠바 [2]아바나에서 자국민들의 소요가 발생하자, 미국은 [2]아바나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의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이유로 미국 해군이 주둔하게 된다.
1898년 2월15일 쿠바 아바나만에서 미 해군 함정 메인함이 원인 불명의 폭발과 함께 침몰하여 260명의 승무원들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새로운 제국 미국의 등장을 알린 미국-스페인 전쟁(미-서 전쟁)의 시발이었다.
사건 당시에 미국은 이 사건을 스페인이 일으킨 것으로 몰아서 전쟁의 구실로 삼았다. 미국의 언론들은 애국주의를 부추기면서 스페인간의 대립을 부채질하였다. 4월 11일에 [1]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은 의회에 개입 승인을 요청하였다. 미 의회는 4월 19일 쿠바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의결하여 사실상 전쟁을 선언했다.
황혼의 제국 스페인은 전쟁을 벌일 처지도 아니었고 의지도 없었다. 미국은 쿠바를 점령하고 카리브해에서 승리하여 카리브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아시아의 전진기지로 필리핀을 노리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켜 준다는 명분으로 스페인군을 필리핀에서 몰아내면서 필리핀을 지배하하였다.
전쟁은 필리핀과 쿠바에서 미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에서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의 지배권이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 일본도 이 전쟁의 혜택을 얻었다.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과 서로 필리핀과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상호인정한 것이다.
[1]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1843년~1901년) : 미국의 제25대 대통령(임기 1897년 3월 4일~1901년 9월 14일). 1901년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2] 아바나(Havana) : 쿠바의 수도
[3] 먼로독트린 : 1823년 12월 3일, 제5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에 의해 주창된 외교방침으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간에 상호 불간섭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외교적 고립정책. 미국은 이 선언을 통하여 유럽 열강은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려 하지 말 것, 신생 독립국에 대해 유럽이 간섭하지 말 것, 미국은 유럽이 보유하고 있는 기존의 식민지를 포함해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유럽 국가가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을 식민지화 하려고 한다거나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면 이를 미국에 대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대응하겠다는 내용과 미국 역시 유럽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개입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한지 1주일만인 5월 1일, 영국령 홍콩에 정박해 있던 미국 아시아함대가 필리핀의 마닐라 만에 출현했다.
4척의 장갑순양함을 중심으로 한 미국 함대는 스페인 함대와 교전을 벌여 격침시키고 스페인 군의 항복을 받아내며 서태평양에서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6월 20일에 미 해군은 괌을 무혈 점령했다.
이를 계기로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시대를 종식하였지만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4척의 장갑순양함을 중심으로 한 미국 함대는 스페인 함대와 교전을 벌여 격침시키고 스페인 군의 항복을 받아내며 서태평양에서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6월 20일에 미 해군은 괌을 무혈 점령했다.
이를 계기로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시대를 종식하였지만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19세기말 서구열강은 산업화에 필요한 금, 은, 고무등의 자원을 위해 아프리카 내륙으로 진출하여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1]종단정책과 프랑스의 [2]횡단정책이 아프리가 수단의 남부 [3]파쇼다(Fashoda)에서 충돌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내부적으로 정치적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외부적으로 독일과 크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빚는 것은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프랑스가 물러섬으로써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긴장관계였던 영국과 프랑스는 1904년에 영불협정으로 가까워졌다.
파쇼다 사건은 동맹간 대립구조(영국-프랑스-러시아 vs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로 확대되어 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었다.
[1] 종단정책 :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까지 아프리카의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정책
[2] 횡단정책 : 서아프리카의 알제리와 마다가스카르 섬을 연결하는 정책
[3] 파쇼다(Fashoda) : 현재 남수단의 코도크(Kodok)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1]종단정책과 프랑스의 [2]횡단정책이 아프리가 수단의 남부 [3]파쇼다(Fashoda)에서 충돌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내부적으로 정치적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외부적으로 독일과 크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빚는 것은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프랑스가 물러섬으로써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긴장관계였던 영국과 프랑스는 1904년에 영불협정으로 가까워졌다.
파쇼다 사건은 동맹간 대립구조(영국-프랑스-러시아 vs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로 확대되어 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었다.
[1] 종단정책 :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까지 아프리카의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정책
[2] 횡단정책 : 서아프리카의 알제리와 마다가스카르 섬을 연결하는 정책
[3] 파쇼다(Fashoda) : 현재 남수단의 코도크(Kodok)
필리핀은 1565년부터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아왔다. 미 해군이 마닐라를 접수할 당시에 필리핀에는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1896년 8월에 시작된 혁명은 미군이 스페인군을 몰아낸 1898년 8월까지 전개되었다.
필리핀의 독립운동가인 [1]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7년 필리핀을 지배해 온 스페인에 맞서 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홍콩으로 망명하였으나 미국-스페인 전쟁을 기회로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8년에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5월 19일 스페인과 무장 투쟁 재개를 선언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스페인군에 대항전을 전개하였다. 5월 24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고, 6월 12일에는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했다. 7월 15일에는 [2]아폴리나리오 마비니를 수상으로 한 내각이 성립되었다. 필리핀군은 미군의 마닐라 입성을 지원하며 스페인군울 몰아냈다.
[1]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이 필리핀을 독립시켜 줄 것이라 믿었지만 마닐라에 입성한 미국은 필리핀 식민지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898년 8월 13일 미군은 마닐라에 입성하였고 다음날 인 8월 14일에 마닐라에 필리핀 제도 미국군정부를 설립하였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1898년 12월 10일에 스페인과 파리에서 평화 조약에서 필리핀의 지배권을 양도받았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필리핀인들은 미국의 배반에 분노하였으며, 미국의 행위를 침략이라고 규탄했다. 1899년 1월 1일에 아기날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월 21일 필리핀 제1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1899년 2월 4일, [3]산후안 델 몬테 다리에서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 들어선 필리핀 병사와 첫 충돌이 발생하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필리핀군은 초기에는 전면전을 펼쳤으나 군사력과 무기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군은 1899년 10월 산속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으로 항전을 이어나갔다. 필리핀군은 미국군을 상대로 산악과 정글 지형을 활용해 저항했으며, 미군은 이에 대응하여 필리핀 민간인들을 집단 거주지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의 전략을 펼쳤다.
미국은 1900년 12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무자비한 학살에 기근과 질병까지 겹쳐 20만명이 넘는 필리핀인이 사망했다.
1901년 3월 23일 [4]프레더릭 펀스튼 장군이 이끄는 미군의 작전으로 [1]아기날도는 미군에게 생포되면서 필리핀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약화되었다.
4월 19일 대부분의 필리핀인들은 항복했고, 1902년 7월 2일 잔여 병력까지 진압된 이후 전쟁 종결되면서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이후 필리핀은 미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모로족이 끝까지 미국의 지배에 반발하여 [5]모로전쟁이 이어졌다. 필리핀 내 독립운동은 계속 확산되었으며, 결국 1946년 필리핀은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필리핀-미국 전쟁은 단순한 식민 전쟁이 아니라, 자주독립을 향한 필리핀인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필리핀은 강대국의 지배 속에서도 독립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는 훗날 필리핀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1869년~1964년) :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재임 1899년 1월 23일~1901년 3월 23일). 필리핀의 국부중 한 사람이자 필리핀 건국의 영웅. 필리핀 화폐 5페소 도완되었다
[2] 아폴리나리오 마비니(Apolinario Mabini, 1864년~1903년) :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필리핀의 현대 헌법의 초안자이자 작성자. 필리핀 초대수장. 필리핀의 국부중 한 사람. 필리핀 화폐 1페소 지폐,10페소 도안되었다
[3] 산후안 델 몬테(San Juan del Monte) :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북동쪽 지역의 도시
[4] 프레더릭 펀스턴(Frederick Funston, 1865년~1917년) : 미국의 군인으로 미국-스페인 전쟁과 미국-필리핀 전쟁에서 활약을 하였다. 미국-필리핀 전쟁의 작전으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5] 모로전쟁(1902년 5월 3일~1913년 6월 15일) :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와 술루 제도에서 미국과 현지 무슬림 모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필리핀의 독립운동가인 [1]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7년 필리핀을 지배해 온 스페인에 맞서 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홍콩으로 망명하였으나 미국-스페인 전쟁을 기회로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8년에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5월 19일 스페인과 무장 투쟁 재개를 선언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스페인군에 대항전을 전개하였다. 5월 24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고, 6월 12일에는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했다. 7월 15일에는 [2]아폴리나리오 마비니를 수상으로 한 내각이 성립되었다. 필리핀군은 미군의 마닐라 입성을 지원하며 스페인군울 몰아냈다.
[1]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이 필리핀을 독립시켜 줄 것이라 믿었지만 마닐라에 입성한 미국은 필리핀 식민지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898년 8월 13일 미군은 마닐라에 입성하였고 다음날 인 8월 14일에 마닐라에 필리핀 제도 미국군정부를 설립하였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1898년 12월 10일에 스페인과 파리에서 평화 조약에서 필리핀의 지배권을 양도받았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필리핀인들은 미국의 배반에 분노하였으며, 미국의 행위를 침략이라고 규탄했다. 1899년 1월 1일에 아기날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월 21일 필리핀 제1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1899년 2월 4일, [3]산후안 델 몬테 다리에서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 들어선 필리핀 병사와 첫 충돌이 발생하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필리핀군은 초기에는 전면전을 펼쳤으나 군사력과 무기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군은 1899년 10월 산속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으로 항전을 이어나갔다. 필리핀군은 미국군을 상대로 산악과 정글 지형을 활용해 저항했으며, 미군은 이에 대응하여 필리핀 민간인들을 집단 거주지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의 전략을 펼쳤다.
미국은 1900년 12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무자비한 학살에 기근과 질병까지 겹쳐 20만명이 넘는 필리핀인이 사망했다.
1901년 3월 23일 [4]프레더릭 펀스튼 장군이 이끄는 미군의 작전으로 [1]아기날도는 미군에게 생포되면서 필리핀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약화되었다.
4월 19일 대부분의 필리핀인들은 항복했고, 1902년 7월 2일 잔여 병력까지 진압된 이후 전쟁 종결되면서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이후 필리핀은 미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모로족이 끝까지 미국의 지배에 반발하여 [5]모로전쟁이 이어졌다. 필리핀 내 독립운동은 계속 확산되었으며, 결국 1946년 필리핀은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필리핀-미국 전쟁은 단순한 식민 전쟁이 아니라, 자주독립을 향한 필리핀인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필리핀은 강대국의 지배 속에서도 독립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는 훗날 필리핀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1869년~1964년) :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재임 1899년 1월 23일~1901년 3월 23일). 필리핀의 국부중 한 사람이자 필리핀 건국의 영웅. 필리핀 화폐 5페소 도완되었다
[2] 아폴리나리오 마비니(Apolinario Mabini, 1864년~1903년) :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필리핀의 현대 헌법의 초안자이자 작성자. 필리핀 초대수장. 필리핀의 국부중 한 사람. 필리핀 화폐 1페소 지폐,10페소 도안되었다
[3] 산후안 델 몬테(San Juan del Monte) :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북동쪽 지역의 도시
[4] 프레더릭 펀스턴(Frederick Funston, 1865년~1917년) : 미국의 군인으로 미국-스페인 전쟁과 미국-필리핀 전쟁에서 활약을 하였다. 미국-필리핀 전쟁의 작전으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5] 모로전쟁(1902년 5월 3일~1913년 6월 15일) :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와 술루 제도에서 미국과 현지 무슬림 모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대한국·대청국 통상 조약(大韓國·大淸國通商條約)으로 불리며 광무 3년(1899년)에 한국과 청국 사이에 조인된 전문 15조의 통상협정이다. 이 조약의 필사본은 1998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어있다.
청나라 전권 대신 서수붕과 한국 전권 대신 박제순은 1899년 2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 간 8차례 회담을 가졌으며 대한제국과 청나라 사이에 한청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약과 비교해 볼 때 동등할 정도로 대등하고 근대적인 조약이며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1) 한청통상조약은 청일전쟁 후, 무조약 관계에 있던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관계를 새로 정립시킨 조약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과 청나라는 수교 국가가 되었다.
(2) 한청통상조약은 대등조약으로서 종전의 조선-청나라 사이의 종속 관계를 부인하고 청나라와 동등한 대한제국의 지위를 규정한 조약이다.
(3) 한청통상조약은 대한제국이 오랫동안 지속되던 중국 중심의 계단식 국제 질서, 사대 조공 질서에서 벗어나 수평적인 근대적 국제 질서로 진입하고, 한편으로 근대적 국제 관계를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 국제 관계를 맺던 이중적 국제 관계에서 탈피해 근대적 국제 관계로 이행을 규정한 조약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 전권대신 : 외교 관계를 수립할 때 국가의 대표 자격을 위임받은 외교사절
청나라 전권 대신 서수붕과 한국 전권 대신 박제순은 1899년 2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 간 8차례 회담을 가졌으며 대한제국과 청나라 사이에 한청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약과 비교해 볼 때 동등할 정도로 대등하고 근대적인 조약이며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1) 한청통상조약은 청일전쟁 후, 무조약 관계에 있던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관계를 새로 정립시킨 조약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과 청나라는 수교 국가가 되었다.
(2) 한청통상조약은 대등조약으로서 종전의 조선-청나라 사이의 종속 관계를 부인하고 청나라와 동등한 대한제국의 지위를 규정한 조약이다.
(3) 한청통상조약은 대한제국이 오랫동안 지속되던 중국 중심의 계단식 국제 질서, 사대 조공 질서에서 벗어나 수평적인 근대적 국제 질서로 진입하고, 한편으로 근대적 국제 관계를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 국제 관계를 맺던 이중적 국제 관계에서 탈피해 근대적 국제 관계로 이행을 규정한 조약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 전권대신 : 외교 관계를 수립할 때 국가의 대표 자격을 위임받은 외교사절
제1·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증국번, [2]이홍장등은 강력한 중국을 위하여 양무운동을 전개했으나 내부혼란으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고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다시 몰락의 길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에서 서구의 경제적 침탈과 중국내 자유로운 포교활동으로 교회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중국 민중들의 전통적인 삶과 문화에 크게 위협받자 반기독교운동과 반외세·반제국주의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원래 [3]의화단은 산동 지방의 무술을 수련하던 권법조직으로 '권법을 익히고 몸을 수련하여 의를 도모한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무술과 주문을 통해 몸에 총알이 통하지 않는다는 신비주의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단결했고 주로 농민층과 하층민들이 중심이 되었다.
의화단은 [4]부청멸양을 내세우며 서구 세력뿐만 아니라 기독교 선교사 및 기독교로 개종한 중국인도 외세의 앞잡이로 간주하고 이들에 대한 공격과 살해를 포함한 격렬한 저항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철도, 전신, 교회 등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시설에 대한 파괴 활동이 집중되었다. 의화단은 외세의 물질문명이 중국의 전통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하여 이를 배격하고자 하였다.
의화단은 1900년 베이징으로 진입하여 서구 외교 공관들을 포위하였으며 일부 서양인들을 살해하는 등 무력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감행하였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외세를 견제할 수단으로 의화단을 공식적으로 지원하였다.
서구 열강들은 자국민이 의화단에 의해 학살당하고 이권이 침탈당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8개국 [5]연합군을 조직해 베이징으로 진입하면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선진화된 전술과 신식 무기를 상대한 청군과 의화단은 연합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결국 1901년,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함으로써 의화단은 진압되었으며, 운동은 종결되었다.
이에 대한 결과로 청나라는 열강과 굴욕적인 베이징 의정서(신축조약)를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외국군의 주둔을 허용했으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청 정부는 내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6]변법자강운동과 [7]신정이라는 일련의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내부 대립으로 효과를 내지못하고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1]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2]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실질적인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3] 의화단(義和團) : 중국 청나라 말기에 반외세·반기독교·반제국주의 성격을 지닌 무장단체로 무장단체이며 농민과 도시 하층민을 주축으로 형성되었다. 당시 외세의 침략과 기독교 세력의 팽창,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 혼란과 경제적 고통에 분노한 민중의 감정을 대변하였다
[4] 부청멸양(扶清滅洋) : 청을 돕고 서양을 멸하자
[5] 연합군 : 영국, 미국, 호주, 인도(영국군 소속),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헝가리, 이탈리아, 일본
[6] 변법장강운동(變法自彊運動, 1898년 6월 11일~1898년 9월 21일) : 상공업 진흥과 신식학교 개설을 포함한 서구식 제도 개혁운동. 변법은 '낡은법을 변화시킴'을 의미. 내부 갈등으로 실패함
[7] 신정(新政, 1901년~1911년) : 서태후 주도하의 행정, 교육, 군사, 재정등의 서구식 개혁과 입헌군주제 실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멸망
이러한 혼란한 상황에서 서구의 경제적 침탈과 중국내 자유로운 포교활동으로 교회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중국 민중들의 전통적인 삶과 문화에 크게 위협받자 반기독교운동과 반외세·반제국주의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원래 [3]의화단은 산동 지방의 무술을 수련하던 권법조직으로 '권법을 익히고 몸을 수련하여 의를 도모한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무술과 주문을 통해 몸에 총알이 통하지 않는다는 신비주의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단결했고 주로 농민층과 하층민들이 중심이 되었다.
의화단은 [4]부청멸양을 내세우며 서구 세력뿐만 아니라 기독교 선교사 및 기독교로 개종한 중국인도 외세의 앞잡이로 간주하고 이들에 대한 공격과 살해를 포함한 격렬한 저항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철도, 전신, 교회 등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시설에 대한 파괴 활동이 집중되었다. 의화단은 외세의 물질문명이 중국의 전통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하여 이를 배격하고자 하였다.
의화단은 1900년 베이징으로 진입하여 서구 외교 공관들을 포위하였으며 일부 서양인들을 살해하는 등 무력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감행하였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외세를 견제할 수단으로 의화단을 공식적으로 지원하였다.
서구 열강들은 자국민이 의화단에 의해 학살당하고 이권이 침탈당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8개국 [5]연합군을 조직해 베이징으로 진입하면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선진화된 전술과 신식 무기를 상대한 청군과 의화단은 연합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결국 1901년,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함으로써 의화단은 진압되었으며, 운동은 종결되었다.
이에 대한 결과로 청나라는 열강과 굴욕적인 베이징 의정서(신축조약)를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외국군의 주둔을 허용했으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청 정부는 내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6]변법자강운동과 [7]신정이라는 일련의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내부 대립으로 효과를 내지못하고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1]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2]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실질적인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3] 의화단(義和團) : 중국 청나라 말기에 반외세·반기독교·반제국주의 성격을 지닌 무장단체로 무장단체이며 농민과 도시 하층민을 주축으로 형성되었다. 당시 외세의 침략과 기독교 세력의 팽창,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 혼란과 경제적 고통에 분노한 민중의 감정을 대변하였다
[4] 부청멸양(扶清滅洋) : 청을 돕고 서양을 멸하자
[5] 연합군 : 영국, 미국, 호주, 인도(영국군 소속),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헝가리, 이탈리아, 일본
[6] 변법장강운동(變法自彊運動, 1898년 6월 11일~1898년 9월 21일) : 상공업 진흥과 신식학교 개설을 포함한 서구식 제도 개혁운동. 변법은 '낡은법을 변화시킴'을 의미. 내부 갈등으로 실패함
[7] 신정(新政, 1901년~1911년) : 서태후 주도하의 행정, 교육, 군사, 재정등의 서구식 개혁과 입헌군주제 실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멸망
1902년 1월 30일 영국 런던에 있는 [1]랜즈다운 후작 저택에서 [2]헨리 페티피츠모리스 영국 외무장관과 [3]하야시 다다스 영국 일본공사가 조인하면서 제1차 영일 동맹이 체결되었다.
영일동맹은 동양의 작은 나라 일본이 외교적 지위를 강화시켜준 커다란 성과였으며, 이는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제사회의 중추국가로 부상했다.
영국은 동아시아 지역에 많은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대단히 우려하였다. 영국은 청일정쟁과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온 자국이익 보호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고 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나 또 다른 세력인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은 대외 정책의 분열까지 초래했다. 러시아 주도하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내주어야 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면 조선의 지배력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또한 독일은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을 조장하여 러시아세력을 극동지역에 묶어두어 영국이 노불동맹 세력과 가까워지는 것을 봉쇄하는 것이 최상의 상황이란 것을 인식하고 영일동맹을 적극적으로 중재하였다.
이러한 각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영국과 일본은 동맹을 맺었으며 협약문은 전문 6개조로 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일 양국은 한(韓)·청(淸) 양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영국은 청에, 일본은 한국에 각각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으므로, 제3국으로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2. 영·일 양국 중 한 나라가 전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3국과 개전할 때는 동맹국은 중립을 지킨다.
3. 위의 경우에서 제3국 혹은 여러 나라들이 일국에 대해 교전할 때는 동맹국은 참전하여 공동 작전을 펴고 강화도 서로의 합의에 의해서 한다.
4. 본 협약의 유효 기간은 5년으로 한다.
영일 동맹의 결과 영국은 러일전쟁 기간 동안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러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만주 진출의 길목에 위치한 조선에서 안정적인 보급로 확보를 위해서 한일의정서를 강요했고, 결국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와 만주로부터 러시아 세력을 제거하였으며, 한반도에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위키백과,나무위키
[1] 랜즈다운 후작(Marquess of Lansdowne) : 잉글랜드의 귀족. 1784년이후 현재 9대인 찰스 페티피즈모리스가 소유하고 있다
[2] 헨리 찰스 키스 페티피츠모리스(Henry Charles Keith Petty-Fitzmaurice, 1845년~1927년) : 제5대 랜즈다운 후작. 영국의 정치인. 캐나다의 총독, 인도 부왕 겸 총독, 영국의 외무장관 등을 지냈다.
[3] 하야시 다다스(1850년~1913년) : 일본 에도 막부의 막신이었으며 메이지 시대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런던에서 1차 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영일동맹은 동양의 작은 나라 일본이 외교적 지위를 강화시켜준 커다란 성과였으며, 이는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제사회의 중추국가로 부상했다.
영국은 동아시아 지역에 많은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대단히 우려하였다. 영국은 청일정쟁과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온 자국이익 보호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고 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나 또 다른 세력인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은 대외 정책의 분열까지 초래했다. 러시아 주도하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내주어야 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면 조선의 지배력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또한 독일은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을 조장하여 러시아세력을 극동지역에 묶어두어 영국이 노불동맹 세력과 가까워지는 것을 봉쇄하는 것이 최상의 상황이란 것을 인식하고 영일동맹을 적극적으로 중재하였다.
이러한 각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영국과 일본은 동맹을 맺었으며 협약문은 전문 6개조로 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일 양국은 한(韓)·청(淸) 양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영국은 청에, 일본은 한국에 각각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으므로, 제3국으로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2. 영·일 양국 중 한 나라가 전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3국과 개전할 때는 동맹국은 중립을 지킨다.
3. 위의 경우에서 제3국 혹은 여러 나라들이 일국에 대해 교전할 때는 동맹국은 참전하여 공동 작전을 펴고 강화도 서로의 합의에 의해서 한다.
4. 본 협약의 유효 기간은 5년으로 한다.
영일 동맹의 결과 영국은 러일전쟁 기간 동안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러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만주 진출의 길목에 위치한 조선에서 안정적인 보급로 확보를 위해서 한일의정서를 강요했고, 결국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와 만주로부터 러시아 세력을 제거하였으며, 한반도에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위키백과,나무위키
[1] 랜즈다운 후작(Marquess of Lansdowne) : 잉글랜드의 귀족. 1784년이후 현재 9대인 찰스 페티피즈모리스가 소유하고 있다
[2] 헨리 찰스 키스 페티피츠모리스(Henry Charles Keith Petty-Fitzmaurice, 1845년~1927년) : 제5대 랜즈다운 후작. 영국의 정치인. 캐나다의 총독, 인도 부왕 겸 총독, 영국의 외무장관 등을 지냈다.
[3] 하야시 다다스(1850년~1913년) : 일본 에도 막부의 막신이었으며 메이지 시대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런던에서 1차 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모로 전쟁은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와 술루 제도에서 미국과 현지 무슬림 [1]모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2]필리핀-미국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이 필리핀 전역을 장악하려 하면서 발생한 저항운동의 일환이었다. [1]모로족은 오랜 기간 스페인의 지배에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통치 시도에도 강한 반발을 보이며 무장 저항을 지속했다.
1898년,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나 필리핀 전역에서 미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에 따라 [2]필리핀-미국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북부 루손 지역과 비사야스를 점령한 후에도 남부 지역의 모로족은 독립을 유지하며 미국의 지배를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모로족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모로족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며 미군에 저항했다. 미국은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모로족은 외세의 지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점점 더 강경한 군사 작전을 펼쳤고, 1906년에는 유명한 [3]바굼바얀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의 거점을 공격하여 600명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를 필리핀 평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정당화했다.
이후에도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었으나 1913년에 벌어진 [4]버드 바그삭 전투가 사실상 모로족의 마지막 대규모 저항이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 전사 500명 이상을 전멸시키며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미국은 필리핀 전역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지만 모로족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모로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필리핀 남부를 강제 통치하며 모로족의 전통적인 정치·사회 체계를 해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기독교화와 서구식 행정 제도를 도입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오히려 모로족의 반감을 더욱 키웠다. 모로족의 독립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필리핀이 1946년 독립한 이후에도 남부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분쟁이 이어졌다.
결국 모로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필리핀 남부의 자치권과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모로족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인 미국 사이의 충돌이었다. 이 전쟁의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여전히 모로족 분리주의 운동과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모로 전쟁은 필리핀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자,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1] 모로족(Moro People) :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술루 군도, 팔라완 등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 민족이다. 필리핀 전체 인구의 약 5~10%를 차지하며 말레이계 혈통을 가진 이슬람 공동체
[2] 필리핀-미국 전쟁(1899년 2월 4일~1902년 7월 4일) : 필리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미국의 새로운 식민 지배에 저항하면서 발생된 전쟁
[3] 바굼바얀 전투(Battle of Bud Dajo) : 1906년 3월 5일부터 3월 7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다호(Bud Dajo) 화산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 이 전투는 미국 식민 통치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었다.
[4] 버드 바그삭 전투(Battle of Bud Bagsak) : 1913년 6월 11일부터 6월 15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바그삭(Bud Bagsak) 산 정상에서 발생한 전투로, 미국군과 모로족 간의 마지막 대규모 충돌이었다. 모로족은 거의 전멸하였다고 한다
1898년,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나 필리핀 전역에서 미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에 따라 [2]필리핀-미국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북부 루손 지역과 비사야스를 점령한 후에도 남부 지역의 모로족은 독립을 유지하며 미국의 지배를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모로족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모로족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며 미군에 저항했다. 미국은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모로족은 외세의 지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점점 더 강경한 군사 작전을 펼쳤고, 1906년에는 유명한 [3]바굼바얀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의 거점을 공격하여 600명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를 필리핀 평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정당화했다.
이후에도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었으나 1913년에 벌어진 [4]버드 바그삭 전투가 사실상 모로족의 마지막 대규모 저항이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 전사 500명 이상을 전멸시키며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미국은 필리핀 전역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지만 모로족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모로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필리핀 남부를 강제 통치하며 모로족의 전통적인 정치·사회 체계를 해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기독교화와 서구식 행정 제도를 도입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오히려 모로족의 반감을 더욱 키웠다. 모로족의 독립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필리핀이 1946년 독립한 이후에도 남부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분쟁이 이어졌다.
결국 모로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필리핀 남부의 자치권과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모로족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인 미국 사이의 충돌이었다. 이 전쟁의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여전히 모로족 분리주의 운동과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모로 전쟁은 필리핀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자,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1] 모로족(Moro People) :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술루 군도, 팔라완 등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 민족이다. 필리핀 전체 인구의 약 5~10%를 차지하며 말레이계 혈통을 가진 이슬람 공동체
[2] 필리핀-미국 전쟁(1899년 2월 4일~1902년 7월 4일) : 필리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미국의 새로운 식민 지배에 저항하면서 발생된 전쟁
[3] 바굼바얀 전투(Battle of Bud Dajo) : 1906년 3월 5일부터 3월 7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다호(Bud Dajo) 화산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 이 전투는 미국 식민 통치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었다.
[4] 버드 바그삭 전투(Battle of Bud Bagsak) : 1913년 6월 11일부터 6월 15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바그삭(Bud Bagsak) 산 정상에서 발생한 전투로, 미국군과 모로족 간의 마지막 대규모 충돌이었다. 모로족은 거의 전멸하였다고 한다
20세기 초, 독일 제국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나미비아 지역에 해당하는 남서아프리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토착 부족인 헤레로족과 나마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독일의 식민 통치 하에서 강제 노동, 토지 몰수, 경제적 착취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독일 정착민들은 토착민들의 농경지를 빼앗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그들을 법적으로 보호하지 않았으며 아프리카인들을 하등한 존재로 여겼다. 1903년까지 독일인 정착민의 수는 5,000명을 넘어섰으며 지속적으로 원주민들의 권리를 박탈했다. 이러한 억압적인 정책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1904년 1월 헤레로족이 독일 식민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헤레로족의 지도자 [1]사무엘 마하레로는 독립을 위한 항쟁을 하여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나마족도 지도자 [2]헨드릭 비트보이의 지휘 아래 반란에 합류했다. 그러나 독일은 이러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고 학살을 주도한 로타르 폰 트로타장군이 남서아프리카에 부임하면서 상황은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었다.
1904년 8월 독일군은 [4]워터베르크 전투에서 헤레로족을 패배시키고 생존한 헤레로족을 [5]오마헤케 사막으로 추방하였다. 독일군은 사막의 식수원을 차단하여 헤레로족 수천 명이 탈수와 굶주림으로 사망했으며 사막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사살했다.
나마족 또한 독일군의 표적이 되었으며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극심한 학대와 처형을 당했다. 독일은 [6]샤크섬에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며 포로들에게 가혹한 강제 노동을 시켰다. 수용소에서는 영양실조와 질병이 만연했으며 일부 포로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생체 실험까지 진행했다.
이 학살로 인해 헤레로족 인구 80,000명 중 80%에 해당하는 약 65,000명이 사망했으며 나마족 인구 20,000명 중 절반인 약 10,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독일 식민지 내에서 극심한 차별과 강제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은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이었으며 이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유사한 방식의 인종말살 정책의 전조로 평가하고 있다. 독일은 이 사건을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100여 년이 지난 2021년에 이르러서야 독일 정부가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집단학살"로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피해자 후손들에게 직접적인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1] 사무엘 마하레로(Samuel Maharero, 1856년 ~ 1923년 3월 14일) : 나미비아 헤레로족의 지도자로, 1904년 독일 식민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이끌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패배한 후 보츠와나로 망명하였으며 그의 저항은 독일군의 대규모 학살로 이어지며,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Genocide)로 기록되는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의 계기가 되었다. 나미비아의 국민 영웅
[2] 헨드릭 비트보이(Hendrik Witbooi, 1830~1905) : 나미비아 나마족의 지도자로 독일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1904년 나마족 반란을 이끌었다. 그는 독일군과의 전투 중 사망했으며 오늘날 나미비아의 독립운동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3] 로타르 폰 트로타(Lothar von Trotha, 1848년 7월 3일~1920년 3월 31일) : 독일 제국의 군인.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저지른 주범으로 악명이 높았다
[4] 워터베르크 전투(Battle of Waterberg, 1904년 8월 11일) : 독일 제국군과 헤레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패배한 헤레로족은 오마헤케 사막으로 추방당했으며 독일군의 식수원 봉쇄로 인해 수천 명이 굶주림과 탈수로 사망하면서 헤레로족 학살로 이어졌다.
[5] 오마헤케 사막(Omaheke Desert) : 나미비아 동부에 위치한 사막으로 1904년 독일군이 헤레로족을 추방한 지역
[6] 샤크섬(Shark Island) : 나미비아 연안에 위치한 섬으로, 1905~1907년 독일이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수용한 강제 수용소가 운영된 곳
독일 정착민들은 토착민들의 농경지를 빼앗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그들을 법적으로 보호하지 않았으며 아프리카인들을 하등한 존재로 여겼다. 1903년까지 독일인 정착민의 수는 5,000명을 넘어섰으며 지속적으로 원주민들의 권리를 박탈했다. 이러한 억압적인 정책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1904년 1월 헤레로족이 독일 식민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헤레로족의 지도자 [1]사무엘 마하레로는 독립을 위한 항쟁을 하여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나마족도 지도자 [2]헨드릭 비트보이의 지휘 아래 반란에 합류했다. 그러나 독일은 이러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고 학살을 주도한 로타르 폰 트로타장군이 남서아프리카에 부임하면서 상황은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었다.
1904년 8월 독일군은 [4]워터베르크 전투에서 헤레로족을 패배시키고 생존한 헤레로족을 [5]오마헤케 사막으로 추방하였다. 독일군은 사막의 식수원을 차단하여 헤레로족 수천 명이 탈수와 굶주림으로 사망했으며 사막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사살했다.
나마족 또한 독일군의 표적이 되었으며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극심한 학대와 처형을 당했다. 독일은 [6]샤크섬에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며 포로들에게 가혹한 강제 노동을 시켰다. 수용소에서는 영양실조와 질병이 만연했으며 일부 포로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생체 실험까지 진행했다.
이 학살로 인해 헤레로족 인구 80,000명 중 80%에 해당하는 약 65,000명이 사망했으며 나마족 인구 20,000명 중 절반인 약 10,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독일 식민지 내에서 극심한 차별과 강제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은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이었으며 이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유사한 방식의 인종말살 정책의 전조로 평가하고 있다. 독일은 이 사건을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100여 년이 지난 2021년에 이르러서야 독일 정부가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집단학살"로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피해자 후손들에게 직접적인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1] 사무엘 마하레로(Samuel Maharero, 1856년 ~ 1923년 3월 14일) : 나미비아 헤레로족의 지도자로, 1904년 독일 식민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이끌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패배한 후 보츠와나로 망명하였으며 그의 저항은 독일군의 대규모 학살로 이어지며,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Genocide)로 기록되는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의 계기가 되었다. 나미비아의 국민 영웅
[2] 헨드릭 비트보이(Hendrik Witbooi, 1830~1905) : 나미비아 나마족의 지도자로 독일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1904년 나마족 반란을 이끌었다. 그는 독일군과의 전투 중 사망했으며 오늘날 나미비아의 독립운동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3] 로타르 폰 트로타(Lothar von Trotha, 1848년 7월 3일~1920년 3월 31일) : 독일 제국의 군인.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저지른 주범으로 악명이 높았다
[4] 워터베르크 전투(Battle of Waterberg, 1904년 8월 11일) : 독일 제국군과 헤레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패배한 헤레로족은 오마헤케 사막으로 추방당했으며 독일군의 식수원 봉쇄로 인해 수천 명이 굶주림과 탈수로 사망하면서 헤레로족 학살로 이어졌다.
[5] 오마헤케 사막(Omaheke Desert) : 나미비아 동부에 위치한 사막으로 1904년 독일군이 헤레로족을 추방한 지역
[6] 샤크섬(Shark Island) : 나미비아 연안에 위치한 섬으로, 1905~1907년 독일이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수용한 강제 수용소가 운영된 곳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청나라로 부터 요동반도와 대만을 할양 받고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측출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야심에 대하여 러시아가 주동이 된 삼국간섭(러시아,프랑스 및 득일)으로 일본은 청나라에 [2]랴오둥반도를 반환하였다.
이에 대한 대가로 1896년 러시아는 러청 비밀협정을 맺고 일본이 중국, 한반도의 극동 러시아령을 침략할 경우 상호 원조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만주 복부를 관통하여 볼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3]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득일이 [4]자오저우만의 칭다오를,영국이 [5]구룡반도와 [6]웨이하이웨이를,프랑스가 광저우만을 조차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1897년 12월 12일 청으로부터 [2]뤼순과 대련을 점령하고 뤼순을 군항으로 개발하였다. 뒤늦게 미국도 1899년에 문호개방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분할에 가담하였다[1].
이렇게 청나라에 대한 열강의 이권확보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만주와 조선의 이권을 둘러싸고 협상을 벌였으나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다.
1904년 2월 6일 양국은 국교를 단절하고 2월 8일 일본의 증원부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인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함정과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에 대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하였으며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전쟁기간중 일본은 1902년 2월에 체결된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미국의 지원과 1905년 5월 쓰시마해전에서 러시아의 [8]발틱함대를 격파하여 승리하였다.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재정지출이 너무 커서 결국 미국의 중재하에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러일전쟁을 종결되었다.
미국 대통령 [7]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만주에서 철수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이익을 인정하였으며,[2]랴오둥반도와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게 양도하였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러시아는 남하정책이 좌절되었으며 패전의 후유증은 정치적 불안을 야기하여 러시아 혁명을 유발하는 간접적인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국제적인 지위확립과 더불어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조선침략을 본격화하고 대륙침략의 계기롤 마련하였다.
[1] 쓰시마 해전 승패에 대한 분석, 김태준, 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 2004.04.03
[2] 랴오둥반도(遼東半島, 요동 반도) : 현재 중국의 랴오닝성 남부의 반도. 뤼순(여순), 다롄(대련)이 위치하고 있다
[3] 동청철도(東淸鐵道) : 중국 하얼빈을 중심으로 하여 서북으로 러시아의 치타()와 남동으로 블라디보스크로 연결된 철도 노선
[4] 자오저우만(膠州灣, 교주만) :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칭다오시에 위치한 만
[5] 구룡반도(九龍半島) : 홍콩 특별행정구에 속하는 중국 남부에 위치하는 반도
[6] 웨이하이웨이(威海衛) : 중국 산둥성 동부에 있는 항구도시로 산둥반도의 동쪽에 있다
[7]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년~1919년) :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임기는 1901년 9월 14일~1909년 3월 4일
[8] 발틱 함대(Baltic Fleet) : 러시아 해군의 4개 함대들 중 하나로 1703년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러시아 해군 함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대가로 1896년 러시아는 러청 비밀협정을 맺고 일본이 중국, 한반도의 극동 러시아령을 침략할 경우 상호 원조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만주 복부를 관통하여 볼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3]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득일이 [4]자오저우만의 칭다오를,영국이 [5]구룡반도와 [6]웨이하이웨이를,프랑스가 광저우만을 조차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1897년 12월 12일 청으로부터 [2]뤼순과 대련을 점령하고 뤼순을 군항으로 개발하였다. 뒤늦게 미국도 1899년에 문호개방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분할에 가담하였다[1].
이렇게 청나라에 대한 열강의 이권확보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만주와 조선의 이권을 둘러싸고 협상을 벌였으나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다.
1904년 2월 6일 양국은 국교를 단절하고 2월 8일 일본의 증원부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인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함정과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에 대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하였으며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전쟁기간중 일본은 1902년 2월에 체결된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미국의 지원과 1905년 5월 쓰시마해전에서 러시아의 [8]발틱함대를 격파하여 승리하였다.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재정지출이 너무 커서 결국 미국의 중재하에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러일전쟁을 종결되었다.
미국 대통령 [7]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만주에서 철수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이익을 인정하였으며,[2]랴오둥반도와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게 양도하였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러시아는 남하정책이 좌절되었으며 패전의 후유증은 정치적 불안을 야기하여 러시아 혁명을 유발하는 간접적인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국제적인 지위확립과 더불어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조선침략을 본격화하고 대륙침략의 계기롤 마련하였다.
[1] 쓰시마 해전 승패에 대한 분석, 김태준, 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 2004.04.03
[2] 랴오둥반도(遼東半島, 요동 반도) : 현재 중국의 랴오닝성 남부의 반도. 뤼순(여순), 다롄(대련)이 위치하고 있다
[3] 동청철도(東淸鐵道) : 중국 하얼빈을 중심으로 하여 서북으로 러시아의 치타()와 남동으로 블라디보스크로 연결된 철도 노선
[4] 자오저우만(膠州灣, 교주만) :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칭다오시에 위치한 만
[5] 구룡반도(九龍半島) : 홍콩 특별행정구에 속하는 중국 남부에 위치하는 반도
[6] 웨이하이웨이(威海衛) : 중국 산둥성 동부에 있는 항구도시로 산둥반도의 동쪽에 있다
[7]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년~1919년) :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임기는 1901년 9월 14일~1909년 3월 4일
[8] 발틱 함대(Baltic Fleet) : 러시아 해군의 4개 함대들 중 하나로 1703년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러시아 해군 함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운이 급박함을 알게 된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하며 양국간의 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와 갈등이 고조되자 1904년 2월 6일 국교를 단절하고, 2월 8일 여순항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기습공격하여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다음 날 2월 9일 인천 제물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여 2척을 침몰시키고 제물포항에 병력을 상륙하여 그날로 서울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 날인 2월 10일에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자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Pavlov)는 2월 12일 러시아군의 보호를 받으며 피신하였다.
일본군은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일본 공사 [6]하야시 곤스케는 전쟁의 불가피성과 협력할 것을 대한제국에 강요하면서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압했다. 반일·친러파였던 [2]탁지부 대신 겸 [3]내장원경 [4]이용익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고, 그 밖에 일본에 반대하던 보부상의 중심 인물 길영수 육군 참장 이학균, 육군 참령 현상건등을 감시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강압으로 대외 중립 유지가 어려움을 인식한 대한제국은 외부대신서리 [5]이지용과 일본 공사 [6]하야시 곤스케는 양국 간 협약을 체결하였다
[전문 6개조]
제1조 한·일 양제국은 항구불역(恒久不易)할 친교를 보지(保持)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를 확신하고 시정(施政)의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들을 것.
제2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황실을 확실한 친의(親誼)로써 안전·강녕(康寧)하게 할 것.
제3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정부는 속히 임기 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하며,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을 것.
제5조 대한제국정부와 대일본제국정부는 상호의 승인을 경유하지 않고 훗날 본 협정의 취지에 위반할 협약을 제3국간에 정립(訂立)할 수 없을 것.
제6조 본 협약에 관련된 미비한 세조(細條)는 대한제국외부대신과 대일본제국대표자 사이에 임기 협정할 것.
이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대한제국을 중립이 아닌 지정학적인 우위를 점하는 전략과 한반도를 점령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의정서 1조에 근거하여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은 서서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일의정서)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여순(뤼순)항 : 중국 랴오둥 반도에 위치한 항구. 현재는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의 구 중 하나이며 명칭은 뤼순구
[2] 탁지부 : 대한제국의 재무를 담당하던 부서. 현재의 기획재정부
[3] 내장원경(內藏院卿) : 황실 재정의 총책임자인 내장사의 장
[4] 이용익(1854년~1907년) :대한제국의 정치인·관료·외교관이며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교의 설립자. 러일전쟁당시 일본으로 압송되어 온갖 회유정책에도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5] 이지용(1870년~1928년) : 대한제국의 왕족이자 관료. 을사오적의 일원(체결당시 내부대신)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당시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엔을 받고 한일의정서에 서명했다
[6] 하야시 곤스케(1860년~1939년) : 일본의 외교관이며 남작. 러일전쟁 중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이어 8월 제1차 한일 협약, 1905년 을사늑약까지 모두 그의 주도 하에 체결되었다
일본은 러시아와 갈등이 고조되자 1904년 2월 6일 국교를 단절하고, 2월 8일 여순항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기습공격하여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다음 날 2월 9일 인천 제물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여 2척을 침몰시키고 제물포항에 병력을 상륙하여 그날로 서울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 날인 2월 10일에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자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Pavlov)는 2월 12일 러시아군의 보호를 받으며 피신하였다.
일본군은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일본 공사 [6]하야시 곤스케는 전쟁의 불가피성과 협력할 것을 대한제국에 강요하면서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압했다. 반일·친러파였던 [2]탁지부 대신 겸 [3]내장원경 [4]이용익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고, 그 밖에 일본에 반대하던 보부상의 중심 인물 길영수 육군 참장 이학균, 육군 참령 현상건등을 감시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강압으로 대외 중립 유지가 어려움을 인식한 대한제국은 외부대신서리 [5]이지용과 일본 공사 [6]하야시 곤스케는 양국 간 협약을 체결하였다
[전문 6개조]
제1조 한·일 양제국은 항구불역(恒久不易)할 친교를 보지(保持)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를 확신하고 시정(施政)의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들을 것.
제2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황실을 확실한 친의(親誼)로써 안전·강녕(康寧)하게 할 것.
제3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정부는 속히 임기 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하며,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을 것.
제5조 대한제국정부와 대일본제국정부는 상호의 승인을 경유하지 않고 훗날 본 협정의 취지에 위반할 협약을 제3국간에 정립(訂立)할 수 없을 것.
제6조 본 협약에 관련된 미비한 세조(細條)는 대한제국외부대신과 대일본제국대표자 사이에 임기 협정할 것.
이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대한제국을 중립이 아닌 지정학적인 우위를 점하는 전략과 한반도를 점령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의정서 1조에 근거하여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은 서서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일의정서)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여순(뤼순)항 : 중국 랴오둥 반도에 위치한 항구. 현재는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의 구 중 하나이며 명칭은 뤼순구
[2] 탁지부 : 대한제국의 재무를 담당하던 부서. 현재의 기획재정부
[3] 내장원경(內藏院卿) : 황실 재정의 총책임자인 내장사의 장
[4] 이용익(1854년~1907년) :대한제국의 정치인·관료·외교관이며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교의 설립자. 러일전쟁당시 일본으로 압송되어 온갖 회유정책에도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5] 이지용(1870년~1928년) : 대한제국의 왕족이자 관료. 을사오적의 일원(체결당시 내부대신)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당시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엔을 받고 한일의정서에 서명했다
[6] 하야시 곤스케(1860년~1939년) : 일본의 외교관이며 남작. 러일전쟁 중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이어 8월 제1차 한일 협약, 1905년 을사늑약까지 모두 그의 주도 하에 체결되었다
덕수궁 대화재는 1904년 4월 14일에 발생한 대형 화재로, 대한제국 시기 덕수궁의 주요 건물들이 소실된 사건이다.
화재의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1]함녕전 아궁이에 밤 10시경에 발화된 불이 [2]중화전·[3]즉조당·[4]석어당의 중심곽 건물뿐만 아니라 [5]관명전과 신주를 모셨던 [7]경효전, 어진·예진을 봉안한 [6]흠문각 등 중요 전각들이 순식간에 소실되면서 사서, 기밀서류, 의례서, 외국서적등 각종 중요한 문서와 귀중품등도 소실되었다.
화재 이후 경운궁을 다시 짓는 동안 고종은 자신의 거처를 수옥헌으로 옮겼다.
1906년에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오늘날 덕수궁은 일부 복원된 상태로 남아 있으며, 대한제국의 역사를 간직한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1] 함녕전(咸寧殿) : 고종이 머물렀던 침전으로 1904년 화재로 다시 지은 건물이며 고종이 1919년 1월 22일 승하하신 곳이다
[2] 중화전(中和殿) :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했으나, 너무 좁아 1920년 새로 지은 건물. 그러나 2년만에 화재로 소실된후 1906년에 중건하였으나 이전과 달리 단층이었다.
[3] 즉조당(卽阼堂) :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즉위한 곳
[4] 석어당(昔御堂) :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로 삼았던 건물
[5] 관명전(觀明殿) : 1902년 6월 28일에 덕경당(德慶堂)을 헐고 확장하여 건립하여 관명전이라 하였다. 내진연(조선시대 왕실의 기념이이나 경사에 벌이는 잔치)의 장소로 사용
[6] 흠문각(欽文閣) : 어진·예진을 봉안한 건물
[7] 경효전(景孝殿) : 명성왕후의 신주를 봉안한 건물
[8] 수옥헌(漱玉軒) : 황실도서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 1906년 중명전(重明殿)으로 변경되었다
화재의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1]함녕전 아궁이에 밤 10시경에 발화된 불이 [2]중화전·[3]즉조당·[4]석어당의 중심곽 건물뿐만 아니라 [5]관명전과 신주를 모셨던 [7]경효전, 어진·예진을 봉안한 [6]흠문각 등 중요 전각들이 순식간에 소실되면서 사서, 기밀서류, 의례서, 외국서적등 각종 중요한 문서와 귀중품등도 소실되었다.
화재 이후 경운궁을 다시 짓는 동안 고종은 자신의 거처를 수옥헌으로 옮겼다.
1906년에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오늘날 덕수궁은 일부 복원된 상태로 남아 있으며, 대한제국의 역사를 간직한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1] 함녕전(咸寧殿) : 고종이 머물렀던 침전으로 1904년 화재로 다시 지은 건물이며 고종이 1919년 1월 22일 승하하신 곳이다
[2] 중화전(中和殿) :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했으나, 너무 좁아 1920년 새로 지은 건물. 그러나 2년만에 화재로 소실된후 1906년에 중건하였으나 이전과 달리 단층이었다.
[3] 즉조당(卽阼堂) :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즉위한 곳
[4] 석어당(昔御堂) :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로 삼았던 건물
[5] 관명전(觀明殿) : 1902년 6월 28일에 덕경당(德慶堂)을 헐고 확장하여 건립하여 관명전이라 하였다. 내진연(조선시대 왕실의 기념이이나 경사에 벌이는 잔치)의 장소로 사용
[6] 흠문각(欽文閣) : 어진·예진을 봉안한 건물
[7] 경효전(景孝殿) : 명성왕후의 신주를 봉안한 건물
[8] 수옥헌(漱玉軒) : 황실도서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 1906년 중명전(重明殿)으로 변경되었다
원래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이나 제1차 한일협약으로 더 알려져 있다.
러일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04년 8월 22일 외무대신 서리 윤치호와 일본 전권 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조인된 협정서다. 이 협약으로 고문통치가 시작되어 일본의 내정 간섭이 확대되었다.
[전문(全文) 3개항]
1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財政顧問)으로 삼아 대한 정부에 용빙(傭聘)하여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2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한 외국인 1명을 외교 고문으로 삼아 외부(外部)에 용빙하여 외교에 관한 중요한 사무는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3 대한 정부는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거나 기타 중요한 외교 안건 즉 외국인에 대한 특권 양여와 계약 등의 문제 처리에 대해서는 미리 대일본 정부와 상의해야 한다.
이 협약에 따라 일제는 재정고문에 대장성 주세국장이었던 메카타 다네타로를, 외교고문에는 주미 일본 공사관에서 근무했던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Durham White Stevens)을 임명했다.
메카타 다네타로는 재정 고문으로 대한제국의 재정과 경제적 예속작업에 착수하였다. 1905년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기간산업이 모두 일본에 넘어가고 조선 상인들이 몰락했으며 나아가 대한제국의 경제권과 종국에는 주권이 일본 제국에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1차 한일 협약은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들이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등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심각하게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내정 전반에 걸쳐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나무위키]
* 윤치호(1865년~1945년) :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정치가, 시민 운동가, 번역가, 기독교 운동가, 계몽 운동가,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 하야시 곤스케(1860년~1939년) : 일본의 외교관이며 남작. 러일전쟁 중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이어 8월 제1차 한일 협약, 1905년 을사늑약까지 모두 그의 주도 하에 체결되었다
* 메가타 다네타로(1853년~1926년) : 일본의 정치가.
*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1851년~1908년) : 미국의 외교관. 일본 외무성과 통감부에서 일했다. 1908년 3월 23일 장인환과 전명운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러일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04년 8월 22일 외무대신 서리 윤치호와 일본 전권 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조인된 협정서다. 이 협약으로 고문통치가 시작되어 일본의 내정 간섭이 확대되었다.
[전문(全文) 3개항]
1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財政顧問)으로 삼아 대한 정부에 용빙(傭聘)하여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2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한 외국인 1명을 외교 고문으로 삼아 외부(外部)에 용빙하여 외교에 관한 중요한 사무는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3 대한 정부는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거나 기타 중요한 외교 안건 즉 외국인에 대한 특권 양여와 계약 등의 문제 처리에 대해서는 미리 대일본 정부와 상의해야 한다.
이 협약에 따라 일제는 재정고문에 대장성 주세국장이었던 메카타 다네타로를, 외교고문에는 주미 일본 공사관에서 근무했던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Durham White Stevens)을 임명했다.
메카타 다네타로는 재정 고문으로 대한제국의 재정과 경제적 예속작업에 착수하였다. 1905년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기간산업이 모두 일본에 넘어가고 조선 상인들이 몰락했으며 나아가 대한제국의 경제권과 종국에는 주권이 일본 제국에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1차 한일 협약은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들이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등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심각하게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내정 전반에 걸쳐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나무위키]
* 윤치호(1865년~1945년) :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정치가, 시민 운동가, 번역가, 기독교 운동가, 계몽 운동가,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 하야시 곤스케(1860년~1939년) : 일본의 외교관이며 남작. 러일전쟁 중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이어 8월 제1차 한일 협약, 1905년 을사늑약까지 모두 그의 주도 하에 체결되었다
* 메가타 다네타로(1853년~1926년) : 일본의 정치가.
*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1851년~1908년) : 미국의 외교관. 일본 외무성과 통감부에서 일했다. 1908년 3월 23일 장인환과 전명운의 저격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