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스라엘사건기간 : 2000년 9월 28일~2005년 2월 8일, 조회수 : 1728, 등록일 : 2022-05-06
2000년 9월 28일 이스라엘 [2]아리엘 샤론 총리는 동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교 성지인 [3]알 아크사 모스크를 군과 경찰등의 호위병을 대동하여 방문했다. 이에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에 이스라엘측은 즉각적인 사격으로 대응하여 팔레스타인인 13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더욱이 2000년 9월 30일 아버지와 외출하였던 12살 어린이인 무함마드 라미 알 두라 소년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희생된 사건이 발생했다. 시위 군중과 이스라엘군 사이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TV를 통하여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이 사건으로 팔레스타인과 전 세계는 이스라엘에 분노하였다.
이로 인하여 [8]오슬로 평화협정이 파기됐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봉기한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를 막기위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다시 점령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이 일어났다. 팔레스타인 경찰까지 민중봉기에 참여하여 준전쟁 상태로 발전하면서 요르단 강 [7]서안지구, [9]가자지구의 주민과 팔레스타인 난민, 이스라엘에 사는 아랍인까지 합세하여 대규모로 파급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전선, [5]하마스, 이슬람 [6]지하드 등의 무장단체들도 전부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자살폭탄테러와 요인암살을 하면서 민족봉기를 자극했다.
팔레스타인 대통령 선거는 2005년 1월 9일에 치러졌고, [4]마흐무드 압바스(Abu Mazen)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5년 2월 8일 [2]아리엘 샤론과 [4]마흐무드 압바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휴전을 선언했다. 서로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기로 하였으며 이스라엘측은 정치범을 제외한 팔레스타인 포로를 석방하며 [7]서안지구에서 철수하는데 동의했다. 팔레스타인측도 봉기와 게릴라전을 멈추기로 합의했다. [5]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이슬람 [6]지하드도 권고를 받아들이면서 2차 인티파다는 끝난다.
2차 인티파다로 팔레스타인은 3,334명이 사망하고 5만 3천명이 부상당했다. 이스라엘 역시 피해가 만만치 않아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1,074명이 사망했다.
[1]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년~2004년)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임기 1994년 7월 5일~ 2004년 11월 11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제3대 정부수반(임기 1969년 2월 4일~2004년 10월 29일) [2]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1928년~2014년) : 이스라엘 제15대 총리(임기 2001년 3월 7일~2006년 4월 14일) [3] 알 아크사 모스크(Al-Aqsa Mosque) : 예루살렘의 성전산 남쪽에 위치한 은색 둥근 지붕의 이슬람교 사원. 이슬람교 3대 성지의 하나 [4]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 1935년~) : 2003년에는 팔레스타인 수상에 임명되었지만 사직. 2004년 아라파트 사망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반. 2005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7년 동안 장기집권하고 있다 [5]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6] 지하드(jihad) : '성전'이라는 뜻으로, 이슬람교의 신앙을 전파하거나 방어하기 위하여 벌이는 이교도와의 투쟁을 이르는 말 [7]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8]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13일에 이스라엘과 분쟁을 계속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분쟁을 종식키로 한 평화협정 [9]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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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라리온 내전(1991~2002)은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발생한 참혹한 무력 충돌로, 약 11년간 지속되며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과 인권 유린을 초래한 내전이다. 1991년 3월 23일 [2]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은 시에라리온 반군 조직인 [1]혁명연합전선이 시에라리온 동부 국경 지역을 점령하며 시작되었다.
[1]혁명연합전선의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는 시에라리온 정부의 부패와 불평등을 비판하며 무장 투쟁을 벌였지만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강제 징집, 성폭행, 어린 병사의 활용, 그리고 도끼로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특히 시에라리온의 풍부한 다이아몬드 자원을 이용해 무기와 자금을 확보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이는 [4]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개념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시에라리온 정부군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양한 민병대 및 외국 용병들과 연합했으며,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한 [5]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의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전은 잦은 휴전과 협정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재개되었고 갈등은 점점 복잡해졌다.
1999년 7월 7일에 토고의 수도인 로메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지만 [1]혁명연합전선은 이 협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2000년 5월 [7]프리타운을 공격 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이후 [6]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투입되었고, 영국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 개입을 단행하여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를 체포함으로써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2년 1월 18일, 당시 대통령 [8]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가 공식적으로 전쟁 종식을 선언하며 종전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약 5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국가의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전후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가 설치되어 전범 처벌이 이뤄졌고 국가 재건과 화해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어졌다.
[1] 혁명연합전선(RUF, Revolutionary United Front) : 시에라리온 내전을 일으킨 반군 조직으로 부패한 정부 타도를 명분으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민간인 학살, 강제 노동, 아동 병사 징집 등 극단적인 폭력을 자행했다. 다이아몬드 자원을 통해 무기를 조달하며 내전을 장기화시켰다. 현재는 해체되었다 [2] 라이베리아 애국전선(NPFL,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 1989년 찰스 테일러가 주도해 결성한 무장 반군 조직으로 라이베리아 내전(1989~1997)의 주요 세력이었다. NPFL은 독재자 사무엘 도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대규모 민간인 학살, 강간, 강제 징집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전쟁 후 찰스 테일러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과 전쟁범죄로 국제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3] 포다이 사이바나 산코(Foday Saybana Sankoh, 1937년 10월 17일~2003년 7월 29일) :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아 시에라리온 반군 단체 혁명연합전선의 설립자. 시에라리온 내전 후 전쟁범죄로 기소되었으며, 2003년 재판을 기다리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4] 블러드 다이아몬드(conflict diamonds, hot diamonds, war diamonds 또는 red diamonds) : 무력분쟁 지역(주로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의 수익금이 전쟁 수행을 위한 무기구매등 자금 조달에 사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5]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ECOMOG, 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Monitoring Group) :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가 설립한 군산 평화유지 기구로,주로 회원국 내 분쟁과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파병된다. 회원국은 가나, 감비아, 기니, 기니비사우, 나이지리아, 베냉, 라이베리아, 세네갈, 시에라리온, 카보베르데, 코트디부아르, 토고 등 12개 국가이다. 아프리카 연합 및 유엔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6] 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UNAMSIL, United Nations Mission in Sierra Leone) :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시에라리온에서 진행된 유엔 평화유지군. 1999년 10월 22일, 안전보장이사회는 로메 평화협정을 이행하는 데 있어 정부와 다른 당사자들과 협력하고 군축, 동원 해제 및 재통합 계획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UNAMSIL을 설립했다. 2005년 12월 유엔 시에라리온 통합 사무소(UNIOSIL)가 뒤를 이었다. UNIOSIL의 임기는 두 번 연장되었고 2008년 9월에 끝났다 [7] 프리타운(Freetown) : 시에라리온의 수도 [8] 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Alhaji Ahmad Tejan Kabbah, 1932년 2월 16일 ~ 2014년 3월 13일) : 시에라리온의 정치인이다. 시에라리온의 제3대 대통령. 두차례 역임(1996년 3월 29일 ~1997년 5월 25일, 1998년 3월 10일~2007년 9월 17일)
1991년 민족과 지역 간 갈등으로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1990년대 내내 일련의 전쟁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어 7개 나라로 분리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불렀지만 내전은 같은 나라 안에서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무력투쟁을 말하는데 1992년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해체되어 내전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연방 분리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연방 유지를 주장한 세르비아간의 전투로 시작되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평양에서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2박 3일 동안 진행한 회담이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었고 회담 결과로 마지막날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됐다.
<6·15 남북 공동 선언>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6·15 남북 공동선언은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을 통해서 발표한 공동 선언이다.
<6·15 남북 공동 선언>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2000년 8월 12일 노르웨이 바렌츠 해(Barents Sea)에서 두차례의 엄청난 폭발음과 함게 훈련중이던 러시아의 핵잠수함 [1] K-141 쿠르스크호가 108m 심해에 침몰한다. 러시아는 수 차례의 인양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고 승조원 118명 전원이 사망하였다. 세계 해군 역사에 남을 비극으로 이 사고를 놓고 전문가들은 러시아군의 부족한 예산과 열악한 군용장비 운용이 빚어낸 인재였다고 평가했다.
침몰 뒤에도 후미쪽 승조원들은 사고 직후 오랜기간 생존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당시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군사기밀 누설과 자국 자존심을 이유로 들며 승조원 구출작업에 늦장을 부렸고 서방의 구조작업 지원 제안도 거절했다. 러시아는 단독으로 수 차례의 인양시도에 실패했다. 결국 16일 영국과 노르웨이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노르웨이 해군 구조대는 19일 현장에 도착하여 가라앉은 잠수함에 먼저 접근하여 승조원들이 모두 질식해 숨져있음을 확인하였다.
러시아 정부는 사고가 나자 이를 숨긴채 쉬쉬하기에 바빴으며 비밀리에 수습하려 했다. 오히려 러시아가 아닌 서방 소식통을 통해 먼저 세계에 알려졌다.
러시아 정부는 사건이 보도되고 이틀이 지나서야 잠수함 침몰 사실을 인정했다. 당시 대통령인 푸틴은 자국 군인들의 생명보다 위신을 챙기려다 최악의 참사를 자초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사건은 2018년에는 '쿠르스크'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으며, 2018년 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돼 한국에도 공개되었다.
[1] K-141 쿠르스크(К-141 Курск) : 러시아 해군의 프로젝트 949A 안테이급 핵추진 순항 미사일 잠수함으로 함번호가 K-141이다. 1994년 취역하여 러시아의 북해 함대에 편입되었다. 길이 154m, 폭 18.2m 3층 높이에 배수량(부상시 14,700T, 잠항시 23,860T)
2001년 9월 11일, 미국은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테러 사건을 경험하였다. 이날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조직 알카에다(al-Qaeda)는 민간 여객기 4대를 동시에 납치하여 미국의 상징적인 건물과 기관을 공격하는 전례 없는 동시다발 자살 테러를 감행하였다.
사건은 아침 8시 46분, 아메리칸 항공 11편이 뉴욕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에 충돌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9시 3분에는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남쪽 타워에 충돌하였고, 9시 37분에는 아메리칸 항공 77편이 버지니아주 펜타곤 건물에 돌진하였다. 마지막으로 납치된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은 원래 워싱턴 D.C.를 목표로 하였으나 승객들의 저항 끝에 10시 3분경 펜실베이니아 [1]샹크스빌 근처 들판에 추락하였다. 이어 9시 59분 남쪽 타워가 붕괴되었고 10시 28분에는 북쪽 타워까지 무너져 내리며 뉴욕 도심은 잿더미로 변하였다.
이날의 참사로 항공기 승객과 승무원, 세계무역센터 및 펜타곤의 근무자,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과 경찰관, 그리고 납치범 19명이 포함하여 약 2,996명이 사망하였다. 부상자는 수천 명에 달했고 구조 활동과 잔해 처리 과정에서 유해 물질에 노출된 수많은 이들이 이후 심각한 호흡기 질환, 암, 정신적 외상에 시달렸다.
미국 정부와 정보 당국은 즉각적으로 사건 배후를 추적하여 알카에다 지도자인 [5]오사마 빈 라덴이 주도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사전에 테러 위협 신호를 포착하고도 정보기관 간의 소통 부족과 대비 미흡으로 사태를 막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2004년에 발간된 [4]"9·11 위원회 보고서"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공식적으로 분석하며 정보 공유 체계의 강화와 항공 보안의 전면적 개혁 등을 권고하였다.
사건 직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알카에다를 보호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개시하였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항공 보안을 대폭 강화하고 [2]애국법을 제정하며, [3]국토안보부를 신설하는 등 국가 안보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였다. 국제적으로는 테러 대응을 위한 정보 교류와 군사 협력이 강화되었고, 이는 이후 20년 넘게 지속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이어졌다.
오사마 빈 라덴은 2011년 파키스탄에서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사살되면서 사건은 상징적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뉴욕 세계무역센터 부지는 이후 재건되었고 [6]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함께 희생자들을 기리는 "9·11 메모리얼 & 뮤지엄"이 세워졌다. 매년 9월 11일에는 희생자 명단을 낭독하며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테러를 넘어 세계 질서를 변화시킨 분수령이 되었으며 안전과 자유, 안보와 인권의 균형이라는 난제를 국제 사회에 남겼다.
[1] 섕크스빌(Shanksville)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마을 [2] 애국법(Patriot Act) :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 제정된 테러방지법으로 Uniting and Strengthening America by Providing Appropriate Tools Required to Intercept and Obstruct Terrorism Act of 2001의 약자이다. 테러 방지와 국가 안보 강화를 위해 정부의 감시 및 수사 권한을 대폭 확대했지만, 이는 시민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한 비판과 논란을 불러왔다. 2015년에는 일부 조항이 폐지되고 미국 자유법(USA Freedom Act)으로 대체되었다 [3]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 미국 국가안보 및 국내 영토의 공공 안전을 담당하는 미국의 국가행정조직으로 2002년 11월 25일에 설치되었다 [4] 9·11 위원회 보고서(The 9/11 Commission Report) : 9·11 테러 공격의 원인과 과정을 조사하기 위해 미국에서 설립된 9/11 위원회가 발표한 최종 보고서로 테러 공격의 배경과 진행 상황을 상세히 분석하고, 미래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권고사항을 제시했다 [5]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 1957년 3월 10일 ~ 2011년 5월 2일) :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의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수장 [6]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One World Trade Center, 1WTC) : 미국 뉴욕주 뉴욕 시 맨해튼의 구 세계 무역 센터가 위치해 있었던 자리에 재건한 타워 건물. 별칭으로 프리덤타워(Freedom Tower)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이 9.11 테러의 주범인 [2]알 카에다와 [1]오사마 빈 라덴을 지원하는 [3]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1세기 최초의 전쟁이자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이다
미국의 목표는 [2]알카에다를 해체하고 [3]탈레반 정권을 축출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전쟁초반 미국의 대대적인 공세에 탈레반군은 순식간에 격멸당했다. 2001년 12월 14일에 미국은 승리 선언하였고 탈레반 정권은 무너졌다. 탈레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고 일부 잔존세력이 남부 산악지대로 은신해 들어가서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이후 미국이 [5]이라크 전쟁에 전념하느라 아프카니스탄에 관심이 줄어든 틈을 타 탈레반은 전력을 재건하여 파키스탄 접경지대등을 기반으로 세력을 빠르게 키우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결국 알 카에다와 탈레반 잔병들이 파키스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개전 당시의 병사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장교단도 물갈이가 됐으며 전쟁 초기에 출생하지도 않았던 세대가 미군 입대 가능 연령이 되면서 "한 세대의 전쟁(war of a generation)"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21년 5월부터 미군이 아프카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흐름이 탈레반으로 넘어갔다.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도시들은 탈레반의 수중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8월 12일, 아프가니스탄의 제2, 3의 도시 헤라트와 칸다하르가 탈레반에게 넘어갔다.
국 2021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탈레반에게 항복했다. 탈레반은 카불에 무혈입성하면서 재집권했다.
이 전쟁으로 총사망자 23만명, 난민 500만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1]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 1957년~2011년) :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났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적 성향의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였으며 2001년 미국의 9.11 테러의 배후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11년 5월 2일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미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2] 알카에다(Al-Qaeda) :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이슬람 수니파의 국제 무장 세력이자 테러리즘 집단이며 반미국, 반유대를 표방한다.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으며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3] 탈레반(Taliban) : 아프가니스탄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무장단체이자 테러조직이며 1990년대 중반 활동을 시작하여 1997년에 아프카니스탄을 집권하여 통치하였으나 2001년 미국의 공격으로 축출되었다. 2021년 8월 미군의 철수로 정권을 다시 집권하였다
[4] 카불(Kabul) : 아프카니스탄의 수도
[5] 이라크 전쟁(제2차 걸프 전쟁) :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침략으로 시작되어 2011년 12월 15일 종전되었다
2002년 5월 31일부터 2002년 6월 30일까지 32개국이 대한민국과 일본에 각 10개씩 총 20개 경기장에서 64경기를 치렀다.
아시아에서 열린 첫 FIFA 월드컵 대회이자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외에서 열린 첫 대회이며, 골든골 제도가 시행된 마지막 FIFA 월드컵이다. 또한 이 대회는 역사상 1번째로 2개 이상의 나라에서 공동으로 개최된 FIFA 월드컵이기도 하다.
결승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2-0으로 승리한 브라질이 역대 최다인 5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2002년 6월 29일 대한민국 서해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NLL) 북서쪽 방향 해상에서 조선인민군 해군 서해함대 8전대 7편대 소속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의 85mm 전차포 선제 포격 도발로 30분 가량 진행된 남북한 간의 군사적 충돌이다.
한군의 선제 공격을 당한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는 교전 후 예인도중 침몰하였고, 정장을 포함하여 총 6명이 전사하였고 19명이 부상당했다. 조선인민군 해군소속 등산곶 684호도 대한민국 해군의 반격으로 13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당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우울증 증세를 보인 김대한(당시 56세)은 뇌졸증까지 겹치면서 이를 비관하여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 정차하고 있던 1079열차에서 방화를 저질러 일어난 대형 화재 참사 사건이다.
2003년 1월 18일 오전 9시 5분경 대구 지하철 1089호 열차는 중앙로역에 도착하기 위하여 서행하고 있었다.
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여 도착한 순간 이 열차에 탑승하고 있었던 김대한은 플라스틱 석유통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자신의 바지에 불이 붙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옷을 태우던 불을 끄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바닥에 던져진 석유통에 의하여 순식간에 열차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 불에서 나온 검은 연기, 유독성 가스가 승강장과 지하 1~2층 대합실에 급속히 확산됐고 승객들이 주출입구쪽의 계단을 통해 대피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중앙로역 맞은편 승강장으로 1080열차가 진입 중이었다. 1080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여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렸으며 승강장에 있던 연기가 열차 안으로 들어오자 기관사가 즉시 출입문을 닫았다. 그리고 1079호 열차의 불이 1080호 열차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때마침 화재로 전원이 끊어지며 전동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기관사는 기관실 바로 옆 1호 칸의 출입문 몇 개만 연 뒤 현장을 이탈했다.
일부 차량은 문이 열리지 않아 승객들은 열차안에 갇혀있었다. 결국 1080호 열차 내부는 연기로 가득차게 되었으며 대피하지 못한 승객들은 유독가스로 인한 연기로 질식되면서 사망했다.
신고를 받고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하였으나 화염과 유독가스로 현장접근이 힘들어 구조가 지연되었다.
오후 1시 38분경에 화재가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구조된 승객들은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079열차의 승객 거의 대부분은 정차중으로 문이 열려 있었고 기관사가 승객들에게 대피를 지시하여 대피하여 비교적 큰 피해가 나지 않은 반면, 반대방향으로 운행 중이던 1080열차는 화재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역에 진입하여 정차함에 따라 화재가 확산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1079열차에는 방화범을 포함한 250여 명이, 1080열차에는 180여 명의 승객이 탑승했었다.
이사고로 192명 사망(1079호열차:50명, 1080열차:142명), 부상자 151명이 발생하는 대형참사였다.
미국은 알 카에다의 9.11 테러 이후 엄청난 혼란에 빠져있었던 상황에서 이라크가 유엔이 금지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명분하에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수행하는 와중에 이라크를 침공하여 두 개의 전선으로 확대되면서 전투는 이기지만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90년의 걸프 전쟁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났다고 해서 '제 2차 걸프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침략 2주만인 4월 9일에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는 함락되었고 후세인 정부는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은 수도인 바그다드 함락 이후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가 그해 12월에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되어 2006년 11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2006년 12월에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바그다드가 함락되면서 전쟁 종전 선언을 했지만 뒷수습하기엔 병력이 한없이 모자랐고 현지의 현황을 무시한 전후 처리로 인해 저항세력이 생겼다. 게다가 전쟁의 혼란으로 국경이 사실상 사라진 틈을 타고 각종 무장세력이 이라크를 기점으로 반미저항뿐 아니라 수니파와 시아파가 충돌하는 사태까지 번지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이들 무장세력과도 싸워야만 했고, 이로인하여 매년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양 전선을 유지하기에 힘에 부친 미국은 2009년 7월부터 미국 병력이 이라크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철수를 준비하여 2010년 8월 20일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2011년 12월 15일 미국에서 공식으로 종전을 선언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18일 미국 병력은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미국이 철수하자 이라크는 계속되는 갈등과 테러를 끝내지 못하며 내전으로 2017까지 휩싸이게 된다.
* 알카에다(Al-Qaeda) :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이슬람 수니파의 국제 무장 세력이자 테러리즘 집단이며 반미국, 반유대를 표방한다.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으며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년~2006년) : 이라크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이라크의 정치인. 제5대 대통령(재임,1979년~2003년)
조지아는 1992년 [1]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 대통령이 사임한 후 [2]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의회 의장이 되었다.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1995년에 조지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세바르드나제 정권은 만연한 부패와 족벌주의로 조지아의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조지아의 경제는 주위 타국에 비해 매우 궁핍하였고, 러시아 지원을 받는 사실상의 분리독립상태인 [3] 압하지야, [4] 남오세티야도 조지아 정부의 영향이 미치지 못했다. 또한 [5] 아자리야 자치공화국도 조지아에서 분리를 외치는 상황이었다.
2003년 11월 2일에 치러진 의회선거의 부정조작으로 야당들은 세바르드나제의 퇴진과 재선거를 요구했으며 국민들에게는 비폭력과 불복종을 외쳤다. 11월 중순에 대규모 시위가 [6] 트빌리시 중심가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조지아 주요도시로 확산되었다.
세바르다나제 정권도 지지자를 모아 친정부 시위를 하였으나 야당 및 국민들의 항의시위는 11월 22일에 정점에 달했다. 이날 [7] 미헤일 사카슈빌리의 야당 지지자들은 손에 장미를 들고 의회 건물을 점거하였다. 세바르드나제는 의회개회연설을 하기 위해 의회에 진입을 하려 했으나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장미혁명'이라 불린다.
다음날인 11월 23일 [2] 세바르드나제는 대통령 사임을 발표하였고, 수많은 시위자들은 환호하였다. 그리고 최고재판소는 이전 의회선거를 무효로 선언했다.
2004년 1월 4일 대통령 선거에서 [7] 사카슈빌리가 압승하여 30대의 젊은 나이로 조지아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004년 3월 28일에 의회 재선거가 실시되어 사카슈빌리를 지지하는 국민동맹-민주당이 대승했다.
장미혁명은 2004년 11월의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과 2005년 키르키니스탄의 튤립혁명에 영향을 미쳤다.
조지아는 장미혁명 이후에도 정치불안이 이어졌고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얍하지아에 주둔하는 등,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도 험악해졌다. 사카슈빌리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베이징 올림픽 개막 하루전인 2008년 8월 7일에 자치주의 독립을 원하는 남오세티야를 침공하였다(남오세티야 전쟁).
결과는 러시아군의 참전을 예상 못했던 조지아의 참패였으며 [4] 남오세티야와 [3] 압하지야는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다.
[1]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Zviad Gamsakhurdia, 1939년~1993년) : 조지아의 제1대 대통령(임기 : 1991년~1992년)
[2]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1928년~2014년) : 조지아의 제2대 대통령(임기:1995년~2003년). 1985년까지 1990년까지 소련의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1995년부터 2003년 장미 혁명으로 물러날 때까지 조지아의 대통령을 지냈다
[3] 압하지야(Abkhazia) : 흑해의 남쪽 연안과 캅카스의 남서쪽에 위치한 미승인 국가로 압하지야인이 주로 거주한다. 수도는 수후미(Sukhumi)이며 조지아의 영토내에 있는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4] 남오세티야(South Ossetia) 또는 츠힌발리(Tskhinvali) : 조지아에 위치한 사실상의 독립상태로 통치되는 지역이자 미승인 국가로 수도는 츠힌발리이다. 정식 국호는 남오세티야 공화국-알라니야국(Republic of South Ossetia–The State of Alania)
[5] 아자리아(Azaria) : 조지아 남서부의 지역에 위치하며 소수민족들의 자치 공화국이다. 수도는 바투미(Batumi)
[6] 트빌리시(Tbilisi) : 조지아의 수도
[7]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1967~현존) : 조지아의 제3대 대통령(임기 : 2004년~2013년, 2008년 재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정치가(우크라이나 국적 부여받자 이중 국적을 제한하는 조지아법에 의해 조지아국적 박탈당함)
우쿠라이나 [1]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이 임기 만료로 물러나면서 2004년 대선은 레오니드 쿠치마정권의 총리인 [2]빅토르 야누코비치와 그에 맞서는 야당 후보로 [3]빅토르 유셴코가 있었다. 빅토르 유셴코는 민주화의 여망을 실현시킬 인물로 각광받던 인물이었다.
2004년 10월 31일 1차 선거에서 과반수 득표가 없어 1,2위를 차지한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빅토르 유셴코는 11월 21일 2차선거(결선투표)에서 재격돌했다. 결선투표 결과 야누코비치가 49.53%, 유셴코가 46.66%의 특표율로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다. 그렇지만 대규모 부정선거로 얼룩짐에 따라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오렌지 혁명'은 시작됐다.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독립) 광장에 있는 국회의사당 앞에 수십만이 모였다. 유셴코 진영은 자신들의 상징으로 오렌지색을 사용하였다. 이제 오렌지색은 자유와 정의의 색깔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최고 재판소는 유권자들의 투표와 예비 집계 과정 중에 위반사실을 확인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2차 선거 결과에 대한 발표를 취소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를 다시 거행하도록 명령했다.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속에 12월 26일에 치러진 재선거 결과 유셴코가 51.99%로 승리했다. 유셴코가 한 달 뒤 대통령에 취힘함으로써 오렌지 혁명은 끝이 났다.
[1] 레오니드 쿠치마(Leonid Kuchma, 1938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제2대 대통령(임기:1994년 7월 19일~2005년 1월 23일)
[2] 빅토르 유셴코(Viktor Yushchenko, 1954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제3대 대통령(임기:2005년 1월 23일~2010년 2월 25일)
[3]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1950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제4대 대통령(임기:2010년 2월 25일~2014년 2월 22일). 5년 임기중 탄핵됨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아체주 서부 해안에 발생한 규모 M9.1-9.3의 초대형 해저 지진으로 사망자의 대부분은 쓰나미에 의해 발생했다.
이 지진 해일로 스리랑카, 몰디브, 인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아프리카의 소말리아까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전 세계에서 28만명 이상 사망했다.
키르키스스탄은 구 소련붕괴이후로 1991년에 키르키스스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키르키스스탄 [1]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1991년 첫 당선이후 1995년,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였다. 장기집권이 독재로 흐르면서 2002년의 반정부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였으며 2003년에는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였다. 이로 인한 국민과 야당의 불신은 더욱 확산됐다.
2005년 2월 27일과 3월 13일 두 번에 걸쳐서 행해진 키르기스스탄의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부정과 개표조작 의혹을 받았다. 아스카르 아카예프의 자녀가 당선되었고 여당은 절대 다수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이에 반발한 국민들의 시위 및 데모가 지역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키르키스스탄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대응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결국 수만명의 군중들이 수도인 [3]비슈케크 거리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시위대는 정부 청사를 장악했다. 국민들의 퇴진 요구를 견디지 못한 [1]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3월 24일 카자흐스탄을 거쳐 러시아 모스크바로 도피하였다. 4월 5일 [1]아스카르 아카예프는 모스코바에서 정식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새로운 대통령선거는 2005년 7월에 실시되어 [2]쿠르만베크 바키예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시민이 직접 독재 권력을 몰아낸 민주 혁명으로 튤립 혁명 또는 레몬 혁명, 제1차 키르기스스탄 혁명으로 불린다.
이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2]쿠르만베크 바키예프 대통령도 비민주적 통치와 부정부패로 2010년에 발생한 제2차 키르기스스탄 혁명으로 물러났다.
[1] 아스카르 아카예프(Askar Akayev, 1944년~ ) : 1991년 소련 붕괴로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2005년)
[2] 쿠르만베크 바키예프(Kurmanbek Bakiyev, 1949년~ ) :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직무 대항(2005년 5월 25일~2005년 8월 14일). 제2대 대통령(2005년 3월 25일~2010년 4월 15일)
[3] 비슈케크(Bishkek) : 키르키스스탄의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