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이 항쟁(Indian Rebellion)

인도 영국 사건기간 : 1857년 5월 10일~1858년 7월 20일, 조회수 : 535,   등록일 : 2022-04-02
1857년 인도항쟁, 제1차 인도 독립전쟁으로도 불린다.

영국은 1757년 [1]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와 인도연합군에 승리한 이후 인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은 총독을 파견해 지배하는 대신 [2]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간접통치하고 있었다.

영국 [2]동인도회사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인도인 용병인 [3]세포이를 고용하였다. [3]세포이는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토후국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갈 때 용병으로 참여했으며 지역에 따라 이슬람교, 힌두교등의 다양한 종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계속되는 팽창 정책으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일대로 세포이의 파병을 요구하였다. 이에 파병을 꺼리던 세포이는 영국과 갈등을 빚었고 처우에 대한 불만도 쌓여갔다. 이러한 불만들이 쌓여가는 가운데 새로 지급된 탄약통이 세포이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새롭게 지급된 [6]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 소총은 보다 빠른 장전을 위하여 개별 포장된 탄약통을 사용하였다. 문제는 탄약통의 방수를 위해 종이에 소나 돼지의 지방 입힌 것에서 비롯되었다. 소는 힌두교도들이 신성시하고 돼지는 이슬람교도들이 싫어했다. 
힌두교나 이슬람교의 신자였던 세포이들은 이 탄약통을 입으로 물어 뜯어 사용하라는 것은 자신들의 종교를 멸시하는 행위라고 받아들였다.

1857년 3월 29일 제34 벵골인 연대의 세포이였던 [5]망갈 판데이는 탄약통을 수령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5]만갈 판데이는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은 선고받았고 4월 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연대는 해산되었으며 항명에 가담한 세포이는 불명예 제대를 하였다. 이들 대다수는 전국적으로 번진 항쟁에 민간인으로 가담하였다.

실제적인 항쟁은 델리에서 북동쪽 70km에 위치하고 있는 [7]메루트 지역에서 비롯되었다.
4월 24일에 [7]메루트의 동인도회사 소속 90명의 세포이에게 탄약통이 지급되었다. 90명의 세포이중에 85명이 수령을 거부하였다. 이때문에 이들은 영국군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5월 9일에 5년~10년형의 선고를 받았다. 이에 분개한 세포이들은 다음날인 5월 10일에 결집하여 병영을 공격하고 영국군 장교를 사살하였다. 5월 10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국 병사들은 교회에 가거나 비번이 상황이었다. 항쟁이 시작되었다.
항쟁 직전 세포이는 20만 명에 달했으나 영국군의 수는 약 4만명에 불과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무굴황제가 인도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기에 약간의 권위를 인정했다. 따라서 황제인 [8]바하두르 샤 2세는 왕궁에 기거하면서 품위 유지 명목으로 델리 일대에서 소수의 근위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5월 11일 아침 세포이는 델리에 도착하여 [8]바하두르 샤 2세가 있는 왕궁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바하두르 샤 2세 황제에게 무굴제국의 부활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통상적인 청원자로 여겨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세포이가 봉기하였다는 소식이 퍼져나갔고 무기고를 탈취하여 항쟁을 계속해 나갔다.
다음날인 5월 12일 바하두르 샤 2세는 실로 오랫만에 국정회의를 소집했다. 세포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황제는 세포이들의 충성을 요구하며 항쟁을 지지하였다. 5월 16일, 황제는 체포되거나 구금된 영국인 50명을 왕궁 밖에 있던 보리수 나무에서 처형하였다

세포이들은 순식간에 델리를 점령하면서 항쟁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인도의 각 지역은 종파와 토후 제후국의 이해득실로 인하여 무굴제국과 세포이 항쟁을 지지하거나 영국 동인도회사를 지지하는 쪽으로 분열되었다. 
항쟁초기에는 세포이들은 기세등등하여 영국군에 승리하였으나 영국군의 반격을 시작되자 명령체계의 구조적인 약점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크림전쟁에 투입되었던 병력과 중국에 주둔해 있던 병력의 일부까지 불러들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영국군은 세포이군과 델리 공방전을 벌인끝에 9월 14일 델리를 탈환하여 점령하였고 바하두르 샤 2세를 체포하였다. 

1857년 말 무렵 영국은 교전의 주도권을 갖기 시작했으며 세포이 항쟁은 1858년 7월 20일 괄리로르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진압되었다. 
포로로 붙잡힌 세포이는 대포입구에 머리가 위치하도록 묶은 뒤 포탄을 쏴 머리를 폭살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8]바하두르 샤 2세는 폐위하여 영국령 미얀마 양곤지역으로 추방되어 사망하였다. 330년간 지속된 무굴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영국은 직접 인도를 통치하기로 결정하고 영국 동인도회사를 해체하였다. 
1877년 영국령 인도제국이 선포되어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제국의 황제가 되어 식민지 배가 본격화했다.

이후 인도는 90년 후인 194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참고문헌]
 - 아틀라스 뉴스(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8)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 영국 동인도회사와 벵골 토후국-프랑스 동인도회사의 전투. 이 전투에서의 승리한 영국은 100년간 인도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2] 영국 동인도 회사 : 인도양, 동아시아에 대한 모직물 시장 및 향료 획득 등의 독점 무역을 목적으로 세워진 영국의 회사
[3] 세포이(sepoy) :  영국 동인도 회사에 채용된 인도인 용병.
[4] 나르마다강(Narmada) : 인도 중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
[5] 망갈 판데이(Mangal Pandey, 1827~1857) : 1857 년 3 월 29 일 영국 장교를 공격 한 인도 군인
[6] 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Enfield Pattern 1853 rifle-musket) : 영국의 엔필드 조병창에서 개발된 전장식 소총
[7] 메루트(Meerut) :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도시. 뉴델리에서 북동쪽으로 70km에 위치하며 1857년 세포이 항쟁이 벌어진 도시이다
[8] 바하두르 샤 2세(Bahadur Shah Zafar, 1775년~1862년) : 인도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티무르 황조의 마지막 군주(재위, 1837년 9월 28일~1857년 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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