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이 항쟁(Indian Rebellion)

인도 영국 사건기간 : 1857년 5월 10일~1858년 7월 20일, 조회수 : 1284,   등록일 : 2022-04-02
1857년 인도항쟁, 제1차 인도 독립전쟁으로도 불린다.

영국은 1757년 [1]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와 인도연합군에 승리한 이후 인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은 총독을 파견해 지배하는 대신 [2]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간접통치하고 있었다.

영국 [2]동인도회사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인도인 용병 [3]세포이를 고용하였다. [3]세포이는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9]토후국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갈 때 용병으로 참여했으며 지역에 따라 이슬람교, 힌두교등의 다양한 종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지속적인 영토 확장 정책에 따라 세포이 병력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및 미얀마 일대로 파견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파병을 꺼리던 세포이는 영국과 갈등을 빚었고 처우에 대한 불만도 쌓여갔다. 이러한 불만들이 쌓여가는 가운데 새로 지급된 탄약통이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새롭게 지급된 [6]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 소총은 보다 빠른 장전을 위하여 개별 포장된 탄약통을 사용하였다. 문제는 탄약통의 방수를 위해 종이에 소나 돼지의 지방을 입힌 것에서 비롯되었다. 소는 힌두교도에게 신성한 존재였으며, 돼지는 이슬람교도에게 불경스러운 대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힌두교 또는 이슬람교 신자였던 세포이들은 해당 탄약통을 입으로 절단해 사용할 것을 강요받은 사실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침해하는 행위로 인식하였다.

1857년 3월 29일 제34 벵골인 연대 소속의 세포이였던 [5]망갈 판데이는 탄약통을 수령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5]만갈 판데이는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은 선고받았고 4월 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연대는 해산되었으며 항명에 가담한 세포이는 불명예 제대를 하였다. 이들 대다수는 전국적으로 번진 항쟁에 민간인으로 가담하였다.

실제적인 항쟁은 델리에서 북동쪽 70km에 위치하고 있는 [7]메루트 지역에서 비롯되었다. 4월 24일에 [7]메루트의 동인도회사 소속 90명의 세포이에게 탄약통이 지급되었다. 90명의 세포이중에 85명이 수령을 거부하였다.
 
이때문에 이들은 영국군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5월 9일에 5년~10년형의 선고를 받았다. 이에 분개한 세포이들은 다음날인 5월 10일에 결집하여 병영을 공격하고 영국군 장교를 사살하였다. 5월 10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국 병사들은 교회에 가거나 비번이 상황이었다. 
 
항쟁은 시작되었으며 초기 직전 세포이는 20만 명에 달했으나 영국군의 수는 약 4만명에 불과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무굴 황제가 인도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정한 권위를 인정하였다. 당시 황제 [8]바하두르 샤 2세는 델리 왕궁에 거주하며, 소수의 근위병만을 거느리고 델리 일대에서 생활하였다.
 
5월 11일 아침, 세포이 병력은 델리에 도착하여 [8]바하두르 샤 2세가 머무르던 왕궁으로 진입하였다. 그들은 황제에게 무굴 제국의 부흥을 촉구하였으나, 바하두르 샤 2세는 이를 통상적인 청원으로 간주하여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같은 날 오후, 세포이의 봉기 소문이 급속히 확산되자 반란군은 무기고를 장악하고 항쟁을 지속하였다.

다음날인 5월 12일 바하두르 샤 2세는 오랫만에 국정회의를 소집하여 세포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세포이들의 충성을 요구하며 항쟁을 지지하였다. 5월 16일, 흥분한 세포이들은 체포되거나 구금된 영국인 50여명을 왕궁 밖에 있던 보리수 나무에서 처형하였다

세포이들은 순식간에 델리를 점령하면서 항쟁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칸푸르, 럭나우, 아그라 등 주요 도시로 반란이 확산되었다. 각지의 토후 세력과 농민, 군인들이 동조하면서 봉기는 단순한 군사 반란에서 영국 통치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인도의 각 지역은 종파와 토후 제후국의 이해득실로 인하여 [10]무굴제국과 세포이 항쟁을 지지하거나 영국 동인도회사를 지지하는 쪽으로 분열되었다. 

항쟁초기에는 세포이들은 기세등등하여 영국군에 승리하였으나 영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명령체계의 구조적인 약점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11]크림전쟁에 투입되었던 병력과 중국에 주둔해 있던 병력의 일부까지 불러들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영국군은 델리 공방전끝에 9월 14일 델리를 점령하였고 9월 20일에 바하두르 샤 2세를 체포하였다. 바로 다음날 바하두르 샤 2세는 폐위되어, 영국령 미얀마 양곤지역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무굴제국은 이렇게 330년 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1857년 말 무렵 영국은 교전의 주도권을 갖기 시작했으며 세포이 항쟁은 [12]괄리로르 전투를 끝으로 1858년 7월 20일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포로로 붙잡힌 세포이들은 대포입구에 머리가 위치하도록 묶은 뒤 포탄을 쏴 머리를 폭살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항쟁은 최종적으로 실패로 끝났으나 이후 인도 통치 방식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1858년 동인도회사가 해체되고 인도 통치권이 영국 국왕에게 직접 이관되면서 “영국령 인도 제국”이 공식 성립되었다. [13]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군제 개편, 행정 구조 변화, 토지 정책 조정 등이 이루어졌으며, 영국은 종교와 전통 관습에 대한 개입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했다.  세포이 항쟁 이후 인도 전역에 대한 영국의 직접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항쟁은 인도인의 민족의식 형성과 독립운동 고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14]마하트마 간디 등의 비폭력 독립운동과 연결되는 장기적 저항의 출발점으로 되었다.

이후 인도는 90년 후인 194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참고문헌] : 아틀라스 뉴스(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8)

[1]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1757년 6월 23일) : 영국 동인도회사와 벵골 토후국-프랑스 동인도회사의 전투. 이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은 100년간 인도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2] 영국 동인도 회사 : 인도양, 동아시아에 대한 모직물 시장 및 향료 획득 등의 독점 무역을 목적으로 세워진 영국의 회사
[3] 세포이(sepoy) :  영국 동인도 회사에 채용된 인도인 용병
[4] 나르마다강(Narmada) : 인도 중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
[5] 망갈 판데이(Mangal Pandey, 1827~1857) : 1857 년 3 월 29 일 영국 장교를 공격 한 인도 군인
[6] 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Enfield Pattern 1853 rifle-musket) : 영국의 엔필드 조병창에서 개발된 전장식 소총
[7] 메루트(Meerut) :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도시. 뉴델리에서 북동쪽으로 70km에 위치하며 1857년 세포이 항쟁이 벌어진 도시이다
[8] 바하두르 샤 2세(Bahadur Shah Zafar, 1775년 10월 24일~1862년 11월 7일) : 인도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티무르 황조의 마지막 군주(재위, 1837년 9월 28일~1857년 9월 14일)
[9] 인도 토호국 : 영국 식민 지배하에서 일정한 자치권을 인정받은 지방 통치 세력으로, 왕이나 군주가 통치하되 외교와 군사권은 영국이 통제하였다. 이들은 세금 납부와 영국에 대한 충성을 조건으로 내부 행정과 사회 운영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47년 인도 독립 이후 대부분 인도연방에 편입되며 정치적 실체로서의 역할을 종료하게 되었다
[10] 무굴 제국(The Mughal Empire,1526년 ~ 1857년) : 1526년  북인도를 중심으로 수립한 이슬람계 왕조로 아크바르와 샤 자한의 통치기에 최전성기를 맞았다. 페르시아 문화와 인도 전통이 융합된 예술·건축·행정 체계를 발전시켰으며, 타지마할 같은 상징적 유산을 남겼다. 18세기 이후 쇠퇴하여 영국 세력에 영향력을 상실했고, 1858년 세포이 항쟁 진압 후 마지막 황제 폐위로 공식적으로 종말을 맞았다
[11] 크림전쟁(Crimean War, 1853년 10월 4일 ~1856년 3월 30일) :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영국, 프랑스 등이 흑해 지역의 패권을 두고 벌인 전쟁이었다. 영국군은 이 전쟁에서 상당한 병력과 자원을 소진하여 세포이 항쟁 초기 인도 내 전력 투입에 제약을 받았다. 그 결과 항쟁 초기에 대응이 지연되면서 반란의 확산을 막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2] 괄리오르 전투(Gwalior Battle, 1858년 6월 17일) : 세포이 항쟁 말기에 벌어진 중요한 전투로 세포이군이 점령한 괄리오르 요새를 영국군이 탈환하면서 항쟁의 마지막 주요 저항세력을 무력화한 사건이다. 이 전투로 델리와 북인도 전역에서 영국의 통치력이 확립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전투는 세포이 항쟁 종결과 인도 내 영국령 통치 체제 확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3]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년 5월 24일~1901년 1월 22일) : 영국 하노버 왕조 제6대 국왕(재위, 1837년 6월 20일~1901년 1월 22일). 인도여왕(재위, 1876년 5월 1일~1901년 1월 22일)
[14]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년 10월 2일 ~ 1948년 1월 30일) : 인도의 독립을 이끈 비폭력 저항 운동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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