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사건(서안사변)

중국 사건기간 : 1936년 12월 12일, 조회수 : 326,   등록일 : 2022-03-28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1]동북군을 물리치고 만주지역을 [2]관동군 휘하에 두게 된다. [3]장쉐량이 이끄는 20만 동북군이 관동군에 패배한 것이다. 

국민당 [4]장제스가 중국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하고 동북지방을 일본에 내어주는 동안 중국내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총을 겨누지 말고 합심하여 일본과 싸우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1936년 12월, 대일항쟁을 요구하는 동북군의 [3]장쉐량은 계속해서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하는 [4]장제스를 [5]시안에서 납치하여 연금하였다. 일련의 하극상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장쉐량은 아래와 같이 8개 항목의 조건을 장제스에게 요구했다.

1. 난징 정부를 개편하여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 공동으로 구국의 책임을 진다.
2. 일체의 내전을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한다.
3. 상하이에서 체포된 애국지도자를 즉시 석방한다.
4. 전국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한다.
5. 인민의 집사, 결사 등 모든 자유를 보장한다.
6. 인민의 애국운동을 개방한다.
7. 쑨원 총리의 유언을 준수하고 실행한다
8. 즉시 전국구국회의를 소집한다.

공산당의 중화소비에트 정부는 찬성을 표시했다. 장제스는 12월 25일 석방되었고 시안사건을 계기로 장제스는 요구사항을 거부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공산당과 합작을 약속했다. 그리고 다음 해 7월 7일 베이징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본격적인 중일전쟁의 신호탄이 된 [7]7.7사변(노구교사변)이 일어나자 9월에는 공산당과 제2차 합작을 하고 기나긴 항일전쟁에 돌입했다. 공산당의 소비에트정부는 국민정부 휘하의 정부로 격하되고 [6]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칭되었다

장쉐량은 난징에서 장제스에게 스스로 처벌을 요청하였고 12월 31일 군사법정에서 10년 금고형과 5년간의 공민권 박탈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해인 1937년 1월 4일  사면을 받았다. 이후 가택연금에 처했으며 1993년이 되어서 풀려났다고 한다.

[출처]
-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세계의 역사, 박구병외 8인, 2021, P.54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동북군 : 중국 동북 지역에서 성립된 장쭤린(장작림)의 군벌로 20만 병력의 대군벌. 국민정부 장제스의 휘하에 들어간다. 봉천군벌, 동북군벌이라고도 부른다.
[2] 관동군 : 일본이 만주에 세운 괴뢰 정권의 부대 
[3] 장쉐량(중1898년~2001년) : 한자음 장학량. 장쭤린(장작림)의 아들로 부친사후 동북군을 물려받았다. 중화민국의 군벌 정치가. 103세로 장수.
[4] 장제스(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5] 시안(서안) : 중국의 산시 성의 성도. 옛 이름은 장안
[6] 홍군 : 중국 인민해방군의 과거(1927년~1937년) 명칭. 제2차 국공합작무렵 편제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1937.8)과 신사군(1939.10)의 명칭으로 불렸다. 일본항복 이후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7] 7.7사변(루거우차오사건) : 루거우차오의 한자음은 노구교. 중국 베이징의 노구교부근에서 총성이 울렸고 이는 중일전쟁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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