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에 일본 [1]간토(關東)지역에서 매그니튜드 7.9의 강진으로 일명 간토(關東)대지진이 발생했다.
일본정부가 밝힌 인적 피해 규모는 사망자와 행불자 총 14만 2,800명, 부상자 10만 3,733명, 피난민 190만 명이다. 물적 피해는 전파 가옥 12만 8,266호, 반파 가옥 12만 6,233호, 소실 가옥 44만 7,128호에 달하였다.
1926년 일본 도쿄시청에서 펴낸 '도쿄지진록 전집'에 따르면, 인명 피해는 이재자 약 340만 명, 사망자 9만 1,344명, 행방불명 1만 3,275명, 중상 1만 6,514명, 경상 3만 5,560명이며, 물적 피해로는 가옥 전소 38만 1,090세대, 전괴 8만 3,819세대, 반괴 9만 1,232세대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피해액은 약 55억 엔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1922년도 일본의 일반 회계 예산 약 14억 7,000만 엔의 약 4배에 이를 정도로 막대하였다.
그 뒤 일본은 지진이 일어난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지정하여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간토대지진이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참고]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대학교출판문화원, 송찬섭외 8, 2020, P83~84
[1] 간토 : 일본 혼슈의 중앙의 동부에 있는 이바라키현, 도치기현, 군마현, 사이타마현, 치바현, 가나가와현, 도쿄도의 1도 6현의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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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라파트 운동은 영국령 인도의 무슬림들이 전개한 범이슬람주의 저항운동으로, 칼리프 운동 또는 인도 무슬림 운동으로도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은 연합국의 결정에 따라 해체 위기에 처했다. 특히 1920년 세브르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축소되고 술탄이자 [1]칼리프의 정치적 권위가 약화되면서 인도 무슬림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인도 무슬림들에게 [1]칼리프는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전 이슬람 세계의 종교적 구심점이었기에 그 지위가 위협받는 것은 종교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 무슬림 사회는 칼리프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운동을 조직하게 된다. 중심인물로는 모하마드 알리와 샤우카트 알리 형제, 압둘 바라크 등이 있으며, 이들은 영국 정부에 오스만 칼리프 제도의 유지와 회복을 요구했다. [2]킬라파트 위원회를 조직하고 전국적인 대중 집회를 열었으며 영국 제품 불매운동, 공공직 거부, 교육기관 보이콧 등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킬라파트 운동은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와도 결합되었다. [3]마하트마 간디는 이슬람과 힌두 공동체의 단결을 강조하며 킬라파트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그는 킬라파트 운동과 자신의 [4]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결합시켜 전국적인 비폭력 저항 운동을 확산시켰다. 인도의 힌두-무슬림 단결이 역사상 전례 없이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 연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2년 2월 [5]차우리 차우라 사건에서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간디는 즉각 운동을 중단하였다. 이로 인해 무슬림 사회는 힌두 지도자들의 일관성에 실망했고 킬라파트 운동의 기반도 약화되기 시작했다.
1924년, 튀르키에의 [6]무스타파 케말이 칼리프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함에 따라 킬라파트 운동은 그 목적 자체를 상실하며 종료되었다. 이후 인도 무슬림 정치운동은 점차 분리주의 노선으로 전환되었고, 훗날 파키스탄 분리 독립 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킬라파트 운동은 단순히 종교 지도자 수호 운동을 넘어 인도 내에서 힌두와 무슬림이 공동의 정치 목표를 위해 협력했던 유일한 시기였다. 또한 식민지 체제에 대한 대중의 조직적 저항을 촉진했으며 인도 독립운동의 전환점을 마련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1] 칼리프(caliph)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최고 종교 권위자의 칭호. 가톨릭의 최고 지위인 교황과 유사하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칼리프를 겸하였다. 아랍어로 칼리파 [2] 킬라파트 위원회(Khilafat Committee) : 1919년 인도에서 결성된 조직으로, 오스만 칼리프의 권위를 보호하고 칼리프 제도의 존속을 촉구하기 위해 활동한 범이슬람 정치 운동의 핵심 기관이었다. 킬라파트 위원회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과도 연대하여 힌두와 무슬림의 협력을 기반으로 영국의 식민 지배에 맞서는 전국적 비협조 운동을 전개하였다. [3]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년 10월 2일 ~ 1948년 1월 30일) : 인도의 독립을 이끈 비폭력 저항 운동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 [4] 비폭력 불복종 운동(Satyagraha) : 국가의 법과 제도가 부당하거나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때 자신의 양심에 따라 공객적으로 거부하거나 위반하는 행동을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라 한다.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폭력을 배제한 채 법과 제도에 대한 도덕적 저항 운동을 통해 식민 지배에 맞서는 운동을 말한다 [5] 차우리 차우라 사건(Chauri Chaura Incident) : 1922년 2월, 인도 남부의 차우리 차우라 마을에서 일어났으며 인도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 비폭력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경찰의 폭력에 격분하여 경찰서를 방화하고 경찰관 22명을 사망시킨 사건이다 [6]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년 ~ 1938년 11월 10일) : 오스만 제국의 군인이며 튀르키예 공화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대통령(재위, 1923년 10월 29일~1938년 11월 10일)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에 일본 [1]간토(關東)지역에서 매그니튜드 7.9의 강진으로 일명 간토(關東)대지진이 발생했다.
분명히 간토대지진은 일본의 자연재해였으나 당시 간토지방에 거주하던 6,661명의 조선인, 600여명의 중국인, 일본인들이 계엄령 아래에서 군대와 경찰, 자경단에 의해 학살당한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시신조차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최근 일본 학계는 1만 명 이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학살현장은 관동 전역에 분포하며 특히 가나가와현 요코하마는 조선인 피학살자 절반 이상이 학설당한 곳이다.
간토 대지진으로 일본 도쿄등을 포함한 간토 지방은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가 속출했고 치안도 무너져 민심과 사회질서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일본정부는 9월 2일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악화된 민심을 간토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을 향하도록 조작하였다.
계엄령하의 학살의 명분이나 구실은 '조선인 폭동설'이었다. '조선인 폭동설'은 지진 발생 당일인 9월 1일부터 유포되기 시작한 유언비어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극물을 넣었다', '폭탄을 던졌다', '부녀자를 강간했다', '조선인이 일본인을 살인 방화하고 있다'등의 다양한 유언비어가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뿌리 깊은 민족 차별의식을 전제로 하고 있는 자연발생설과 일본의 관헌의 조선인의 편견으로 일본내 민간단체를 부추키면서 일반화되어 일본인에게까지 퍼지게 되었다는 조작날조설이 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은 계엄령 아래 일본 군대와 경찰, [2]자경단을 비롯한 일반인 등 일본 민관군이 함께 자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1923년 9월 1일 도쿄에 주둔하고 있던 고노에(근위)사단과 제1사단이 도쿄와 요코하마의 조선인 학살에 관련되었다. 일본군 병사 구보노 시게지의 일기에 따르면 조선인 '노동자 200명 참살했고 부인들은 철사줄로 목을 묶어 연못에 던져넣었다'고 적혀있다. 또 기병 제15연대는 '피의 잔치'라 부르며 조선인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도쿄의 오시마초에서는 일본군대와 자경단이 1923년 9월 3일 오시마초 7초메에서 조선인 방화 소문과 관련하여 세차례에 걸쳐 조선인과 중국인 300명 내지 400명을 총살 또는 타살하였다.
일본 도쿄의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도 조선인 학살에 깊이 관련되었다. 당시 도쿄 경시청 관방 주사 쇼리키 마쓰타로가 조선인이 폭도화했다는 거짓정보를 기자들에게 흘리면서 신문에 그대로 대서특필되면서 조선인 학살이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일본 자경단의 목적은 대지진의 혼란 속에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방어하고 이재민을 구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유언비어가 퍼지자 조선인에 대한 학살로 바뀌었다. 자경단은 562개 시와 583개 군에서 만들어질 정도로 광범위하였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에서 자경단이 자행한 학살이 가장 규모가 크며 유언비어의 유포가 가장 주요한 원인이었다.
자경단은 조선인을 찾아내기 위한 검문에서 조선인에게 어려운 탁음이 연속으로 이루어진 '주고엔 고짓센(15엔 50전)'을 시켜서 발음이 이상하면 학살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뿐 아니라 탁음 발음에 익숙하지 않았던 도쿄가 아닌 타 지방 출신 일본인들도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인들은 불에 태워져 죽거나 개울에 던져져 살해되었다. 또한 자경단원들은 경찰서에 수용되어 있던 조선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여 수용되어 있던 조선인을 살해하였다. 자경단이 사용한 학살 무기는 권총, 일본도, 갈고리, 철사, 축창, 몽둥이 등이었다.
일본 정부는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명분하에 자경단의 만행을 수수방관하였고 군대까지 동원하여 가담하거나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일본 정부는 군대, 경찰의 학살은 모두 은폐하고 그 책임을 자경단으로 돌렸다. 학살 가해자의 사법처리는 형식상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으나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모두 석방되거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