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대한민국
일본
사건기간 : 1894년 1월 11일~1985년 3월 29일, 조회수 : 778, 등록일 : 2022-01-26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조선은 1876년 개항 뒤 외세의 경제 침탈과 지배층의 수탈 심화로 농민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1890년대 들어 농민항쟁이 빈번해졌다.
1860년 창건된 [1]동학은 이 무렵 남부 지방까지 교세가 확장되었으나 조선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었다. 1892~1893년 동학교도들은 대규모 [2]교조신원운동을 일으켰다.
농촌 지식인들은 동학조직을 활용하여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였다.
1894년 1월 전형적인 탐관오리인 전라도 [3]고부 군수 [4]조병갑의 탐학과 부정부패로 인하여 전봉준을 위시한 고부군민은 봉기를 일으켰다. 조선 조정은 고부 민란을 수습하기위해 [5]안핵사 [6]이용태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오히려 농민들을 탄압하고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3월 20일 [7]전봉준, [8]김개남, [9]손화중을 중심으로 전북 [10]무장에서 [11]창의문을 발표하고 '[12]제폭구민 [13]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싸움에 나섰다. 제1차 농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3월25일 이어 고창과 정읍, 태인 등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지역마다 지도자를 달리하는 농민군들이 [3]고부의 백산에 모여들어 연합부대를 이루었다. 농민군은 황토재 전투,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하고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여 전라도 전역은 완전히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병을 요청했다. 5월 5일 아산만에 청나라 군대가 상륙하였다. [17]텐진 조약을 명분으로 일본군도 제물포(인천)에 상륙한다.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게 되자 전봉준과 전라감사 [15]김학진은 7월 6일 전주회담에서 [14]집강소 체제를 합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상황이 안정되자 조선조정은 청나라군과 일본군에게 철군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7월 25일에 청군과 일본군의 해전인 [16]풍도해전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농민군들은 다시 결집하여 10월 하순~11월 중순까지 공주 외곽과 청주 일대에서 조선과 일본의 연합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2차 농민전쟁이었다.
농민군 부대는 패배를 거듭하여 흩어지고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및 관련자들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써 동학 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일본군, 친일 개화파 정권, 보수 유생 토호 세력에 의해 실패했지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 한 투쟁이자 20세기 아시아 민족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또한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린 계기가 된 사건으로 청일전쟁의 결과로 청과 일본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후 동아시아는 일본,영국 연합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로 재편되었다.
[출처]
-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202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동학(東學) :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을 제창하여 1860년(철종 11) 최제우(1824~1864)가 창건한 신흥 종교이다.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1827~1898)이 1898년 순교한 뒤 3대 교주인 손병희(1861~1922)가 1905년에 천도교로 개편하였다
[2]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 1864년(고종 1) 동학 교조 최제우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뒤, 동학교도들이 그의 죄명을 벗기고 교조의 원을 풀어 줌으로써 종교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벌인 운동. 제1차 교조신원운동(1871). 제2차 교조신원운동(1893년)
[3] 고부군 :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덕천면, 소성면, 영원면, 이평면, 정우면과 부안군 백산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진원지로 유명하다
[4] 조병갑(1844년~1912년) : 조선 후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초기의 문신이고 부패한 탐관오리로 조병갑의 탐학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이후 조병갑은 파직당하고 유배당했으나 이후 복권되어 1898년 고등재판소 판사가 되어 동학 지도자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한다. 고종과 친일파 양쪽에게 총애받은 조병갑은 호의호식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다
[5] 안핵사(按覈使) : 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에 이의 처리를 위하여 파견한 임시관직으로 사건의 전말과 상황에 대한 상세한 조사,보고 및 사건의 처리방안을 건의하고 아울러 조정의 지시에 따라 이를 수습하는 것이 임무였다
[6] 이용태(1854년~1922년) : 동학농민혁명을 수습하는 직책이었으나 도리어 확대되자 파직 및 유배되었으나 199년 사법기관인 평리원 재판장과 1901년 주미공사에 임명되었다. 이완용의 친일 내각에서는 학부대신을 지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7] 전봉준(1855년~1895년) :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유난히 키가 작아(약 152cm) 녹두라는 별명을 얻었다
[8] 김개남(1853년~1894년) : 전북 태인(현 전북 정읍시 산외면)지역의 동학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9] 손화중(1861년~1894년) : 전북 고창(무장))에서 활동한 동학의 접주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10] 무장 :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
[11] 창의문 : 1894년 고창 무장 봉기 당시 전봉준등이 만천하에 봉기할 것을 포고한 글
[12] 제폭구민 :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뜻
[13] 보국안민 : 나라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 동학의 교리
[14] 집강소 : 1894년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뒤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한 청나라와 일본군의 철병을 원한 조선정부와 전주화약을 맺은 후 전라도 각 군현에 설치하여 중요한 재판이 있을 때 농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농민 자치 기구
[15] 김학진(1838년~1917년) : 동학농민전쟁을 수습하기 위하여 전라감사로 파견되어 농민군에 대한 적극적인 유화책을 통해 전라도지역을 안정시켰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정계에서 추방되어 있던 김학진은 1897년에 복귀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한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해나가자 김학진은 최익현, 허위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이후 중추원에서 활동하면서 친일내각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김학진은 1905년의 상소에서 국망의 위기감을 표출하면서도 고종에게 마음을 다잡고 정치를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1907년 상소에서는 깊은 절망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김학진은 1908년 즈음부터 친일로 기울었고, 마침내 나라가 망하자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아 조선귀족이 되었다 [참고 : 김학진의 삶과 현실인식, 정종원,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75호, 2019.05]
[16] 풍도해전 : 1894년 7월 25일 조선의 풍도(안산시 단원구)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한 해전으로 청일전쟁의 시발점이며 청나라가 패하였다
[17] 톈진 조약 : 갑신정변 실패의 결과로 1885년(고종 22년) 청나라 이홍장(리훙장)과 일본 이토 히로부미가 맺은 조약으로 청과 일본은 서로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하고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조선은 1876년 개항 뒤 외세의 경제 침탈과 지배층의 수탈 심화로 농민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1890년대 들어 농민항쟁이 빈번해졌다.
1860년 창건된 [1]동학은 이 무렵 남부 지방까지 교세가 확장되었으나 조선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었다. 1892~1893년 동학교도들은 대규모 [2]교조신원운동을 일으켰다.
농촌 지식인들은 동학조직을 활용하여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였다.
1894년 1월 전형적인 탐관오리인 전라도 [3]고부 군수 [4]조병갑의 탐학과 부정부패로 인하여 전봉준을 위시한 고부군민은 봉기를 일으켰다. 조선 조정은 고부 민란을 수습하기위해 [5]안핵사 [6]이용태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오히려 농민들을 탄압하고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3월 20일 [7]전봉준, [8]김개남, [9]손화중을 중심으로 전북 [10]무장에서 [11]창의문을 발표하고 '[12]제폭구민 [13]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싸움에 나섰다. 제1차 농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3월25일 이어 고창과 정읍, 태인 등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지역마다 지도자를 달리하는 농민군들이 [3]고부의 백산에 모여들어 연합부대를 이루었다. 농민군은 황토재 전투,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하고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여 전라도 전역은 완전히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병을 요청했다. 5월 5일 아산만에 청나라 군대가 상륙하였다. [17]텐진 조약을 명분으로 일본군도 제물포(인천)에 상륙한다.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게 되자 전봉준과 전라감사 [15]김학진은 7월 6일 전주회담에서 [14]집강소 체제를 합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상황이 안정되자 조선조정은 청나라군과 일본군에게 철군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7월 25일에 청군과 일본군의 해전인 [16]풍도해전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농민군들은 다시 결집하여 10월 하순~11월 중순까지 공주 외곽과 청주 일대에서 조선과 일본의 연합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2차 농민전쟁이었다.
농민군 부대는 패배를 거듭하여 흩어지고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및 관련자들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써 동학 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일본군, 친일 개화파 정권, 보수 유생 토호 세력에 의해 실패했지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 한 투쟁이자 20세기 아시아 민족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또한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린 계기가 된 사건으로 청일전쟁의 결과로 청과 일본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후 동아시아는 일본,영국 연합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로 재편되었다.
[출처]
-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202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동학(東學) :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을 제창하여 1860년(철종 11) 최제우(1824~1864)가 창건한 신흥 종교이다.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1827~1898)이 1898년 순교한 뒤 3대 교주인 손병희(1861~1922)가 1905년에 천도교로 개편하였다
[2]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 1864년(고종 1) 동학 교조 최제우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뒤, 동학교도들이 그의 죄명을 벗기고 교조의 원을 풀어 줌으로써 종교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벌인 운동. 제1차 교조신원운동(1871). 제2차 교조신원운동(1893년)
[3] 고부군 :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덕천면, 소성면, 영원면, 이평면, 정우면과 부안군 백산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진원지로 유명하다
[4] 조병갑(1844년~1912년) : 조선 후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초기의 문신이고 부패한 탐관오리로 조병갑의 탐학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이후 조병갑은 파직당하고 유배당했으나 이후 복권되어 1898년 고등재판소 판사가 되어 동학 지도자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한다. 고종과 친일파 양쪽에게 총애받은 조병갑은 호의호식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다
[5] 안핵사(按覈使) : 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에 이의 처리를 위하여 파견한 임시관직으로 사건의 전말과 상황에 대한 상세한 조사,보고 및 사건의 처리방안을 건의하고 아울러 조정의 지시에 따라 이를 수습하는 것이 임무였다
[6] 이용태(1854년~1922년) : 동학농민혁명을 수습하는 직책이었으나 도리어 확대되자 파직 및 유배되었으나 199년 사법기관인 평리원 재판장과 1901년 주미공사에 임명되었다. 이완용의 친일 내각에서는 학부대신을 지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7] 전봉준(1855년~1895년) :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유난히 키가 작아(약 152cm) 녹두라는 별명을 얻었다
[8] 김개남(1853년~1894년) : 전북 태인(현 전북 정읍시 산외면)지역의 동학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9] 손화중(1861년~1894년) : 전북 고창(무장))에서 활동한 동학의 접주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10] 무장 :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
[11] 창의문 : 1894년 고창 무장 봉기 당시 전봉준등이 만천하에 봉기할 것을 포고한 글
[12] 제폭구민 :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뜻
[13] 보국안민 : 나라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 동학의 교리
[14] 집강소 : 1894년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뒤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한 청나라와 일본군의 철병을 원한 조선정부와 전주화약을 맺은 후 전라도 각 군현에 설치하여 중요한 재판이 있을 때 농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농민 자치 기구
[15] 김학진(1838년~1917년) : 동학농민전쟁을 수습하기 위하여 전라감사로 파견되어 농민군에 대한 적극적인 유화책을 통해 전라도지역을 안정시켰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정계에서 추방되어 있던 김학진은 1897년에 복귀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한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해나가자 김학진은 최익현, 허위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이후 중추원에서 활동하면서 친일내각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김학진은 1905년의 상소에서 국망의 위기감을 표출하면서도 고종에게 마음을 다잡고 정치를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1907년 상소에서는 깊은 절망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김학진은 1908년 즈음부터 친일로 기울었고, 마침내 나라가 망하자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아 조선귀족이 되었다 [참고 : 김학진의 삶과 현실인식, 정종원,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75호, 2019.05]
[16] 풍도해전 : 1894년 7월 25일 조선의 풍도(안산시 단원구)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한 해전으로 청일전쟁의 시발점이며 청나라가 패하였다
[17] 톈진 조약 : 갑신정변 실패의 결과로 1885년(고종 22년) 청나라 이홍장(리훙장)과 일본 이토 히로부미가 맺은 조약으로 청과 일본은 서로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하고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