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건기간 : 1948년 5월 10일, 조회수 : 413, 등록일 : 2022-01-16
1948년 5월 10일은 대한민국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국회원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시작이었다.
유엔의 결의에 의거하여 보통·평등·비밀·직접의 4대 원칙을 수용한 민주주의 제도로 한국대표 및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남북 총선거 실시를 발표하였다.
남북한을 통하여 인구비례에 의한 선거로 300석의 국회의원을 선출할 방침이었으나, 북한지역의 선거불가능으로 북한지역 할당의석 수 100석을 유보해 두고 남한에서의 의석 수를 200석으로 할당하여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유권자 등록기간을 설정하여 총유권자(813만2517명)중에 96.4%에 해당하는 784만871인이 선거인 명부에 등재되었다. 이 중에 95.5%가 투표에 참가했으며, 이는 역대 선거사상 최고의 투표율로써 정부 수립이라는 염원이 지대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그 해 5월 31일에 선거위원회의 소집에 의하여 한국헌정사상 최초로 제헌의회가 개원되었고, 국회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를 선출하였다
제헌국회는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북한은 9월 9일 정부를 수립한다.
한국사에서 최초로 자유 다당제를 정착시킨 사례이며 성공적으로 자유민주적 방식으로 공직자를 선출한 사례이기도하였으나 남한만의 단독 선거라는 한계로 많은 아쉬움이 남는 선거였다.
이 선거는 1948년 5월 9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 날이 일요일이라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많다는 의견과 5월 9일은 한반도를 통과하는 일식이 예정되어 있어 5월 10일로 하루 연기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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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2차 국공내전은 1945년 8월 14일, 제2차 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일본이 패망하여 중국에서 철수한 뒤 시작되었다. 전쟁의 발단은 중일전쟁 기간 동안 유지되었던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제2차 국공합작이 전쟁 종료 후 이념적 갈등과 권력 다툼으로 붕괴된 데 있다.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중국 대륙의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지만, 공산당은 일본 점령지였던 동북부(만주)를 신속히 장악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소련이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 무기를 공산당에 제공하며 공산당의 군사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내전 초기(1945~1946년), 국민당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우위를 점하며 주요 도시와 철도망을 확보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내부의 부패, 비효율적인 행정, 경제난으로 인해 민중의 지지를 잃어갔다. 반면,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게릴라 전술을 통해 국민당군을 점차 약화시켰고, 홍군은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되어 더욱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1946년, 미국이 중재한 평화회담이 결렬되면서 내전은 본격적인 전면전으로 확산되었다.
1947년부터 공산당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동북 지역에서의 전투를 통해 전략적 주도권을 확보했으며,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토지 개혁 정책으로 민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는 "삼대전역(三大战役)"이라 불리는 세 가지 주요 전투가 내전의 판도를 결정지었다. - 랴오선 전역(1948년 9~11월): 동북 지역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고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 - 화이하이 전역(1948년 11월~1949년 1월): 중원 지역에서 국민당군의 주력을 괴멸. - 핑진 전역(1948년 12월~1949년 1월): 북경(베이징)을 포함한 화북 지역을 공산당이 점령. 이 승리들로 국민당군은 전력을 상실했고, 국민당 정부는 대규모로 후퇴를 거듭했다. 1949년 4월, 공산당은 국민당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며 사실상 전쟁에서 승리했다.
1949년 10월 1일, [1]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공식 선포하며 제2차 국공내전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공산당 [3]인민해방군은 같은 해 10월 14일에는 광저우를 접수하고, 11월 30일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충칭마저 함락시켰다. 12월 10일 [2]장제스는 대륙 최후 거점인 충칭에서 타이완으로 탈출하여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12월 27일 중국 [3]인민해방군이 충칭에 입성함으로써 대륙에서 국민당을 완전히 몰아내고 공산당이 통치하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재편되었다.
제2차 국공내전은 중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공산당의 승리는 민중 기반을 강화하고 군사적 전략을 성공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반면 국민당은 외세 의존, 행정 부패, 민중의 신뢰 상실 등 내부적인 요인으로 패배의 길을 걷게 되었다.
[1]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 중국 공산당의 제1대 중앙위원회 주석(임기, 1945년 6월 19일~1976년 9월 9일). 일본 패망 이후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와 2차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을 장악했다 [2]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3] 인민해방군 :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 또는 단순히 홍군(紅軍)은 1927-1946 사이의 중국 공산당의 무장조직으로 1927년 8월 1일 중국공농혁명군(中國工農革命軍)을 시작으로, 1928년 5월 25일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으로 개칭하였다. 제2차 국공합작(1937.9)무렵, 편제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1937.8)과 신사군(1939.10)으로 개편되었다. 일본패망 이후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후 대부분의 식민 국가들은 독립했으나 프랑스는 베트남의 식민 지배를 재건하려 했고, [2]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인 [3]베트민은 독립을 위해 싸웠다. 베트남 독립전쟁, 프랑스-베트남 전쟁등으로 불린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베트민의 [2]호찌민은 바로 다음날인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9월 2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6년 11월 23일 프랑스가 [5]하이퐁 항구를 포격하여 6,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45년 12월 19일 [4]보응우옌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군은 하노이의 프랑스군을 공격하였다. [2]호찌민은 프랑스군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베트남 독립전쟁인 제1차 [1]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프랑스는 재정문제와 내부의 반발과 비판하는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54년 5월 7일 [6]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전하면서 베트민과 휴전 협정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56일간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천명~3천명의 전사자를 냈고 8년간의 전쟁에서 총 7만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다.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을 통해 양측은 휴전 협정을 통하여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프랑스의 남베트남(월남)과 베트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 월맹)으로 나눠졌으며 남북으로 2km씩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되었다.
[1] 인도차이나 :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또는 인도차이나 연방이라고 불렸다 [2] 호찌민(Ho Chi Minh, 1890년~1969년) : 본명은 응우옌 신 꿍(Nguyen Sinh Cung).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베트남의 초대 국가주석.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 [3] 베트민(Viet Minh) : 베트남 독립동맹회(越南獨立同盟會)의 약칭으로, 1941년 5월 19일 호찌민이 빡보에서 설립한 베트남 민족독립주의 단체이다. 대한민국 한자음으로 월맹(越盟)으로 알려져 있다.1941년에 호찌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남의 민족주의 계열 정당의 동맹으로 결성되었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독립의 주역이다 [4]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1911년~2013년) : 베트남의 장군이자 정치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 뒤이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까지 승리를 이끈 현대 베트남 최고의 명장 [5] 하이퐁(Hai Phong) : 베트남 동북부의 항구 도시 [6] 디엔비엔푸(Điện Biên Phủ) : 베트남 북부, 라오스와의 접경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당시 프랑스군이 베트민의 교통을 차단하고자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였으나 베트민의 포위공격에 항복함으로써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이 기점이 되어 1948년 4월 3일 [1]남조선노동당 무장대 봉기로 시작되어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이 발생되었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죄없는 민간인들이 무차별하게 희생당한 사건이 제주 4.3사건이다. 민간인 희생자는 약 3만명으로 추정된다.
학살 피해자들의 유족 및 제주 도민들은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하여 노력했으나 민주화 이후에도 4.3사건의 부정과 탄압이 계속되었다. 2000년에 이르러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1] 남조선노동당 : 1946년 11월 23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3당 합당으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 당수는 초대 여운형, 2대 허헌, 3대 박헌영이 맡았다
제1차 중동전쟁은 아랍국가에서는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이라 부른다. 이 전쟁을 바라보는 양측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1920년부터 통치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8년에 영국은 파레스타인에서 철수했다.
수천년동안 나라없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은은 2차 세계대전때 홀로코스트를 계기로 명목상 주인없는 땅이 되어버린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한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두고 아랍인과 유대인간의 갈등과 충돌이 지속되었다. 1947년에 팔레스타인지역에는 유대인 60만명, 팔레스타인인은 136만명으로 상호 대립관계가 형성되면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유엔총회(1947년 11월 29일)에서 팔레스타인 영토의 56% 유대인에게 나머지 44%는 아랍민족에게 배분하고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국제관리지구로 지정한다는 결의안이 통과되자,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들은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지게 되었다. 주위 [1]아랍국가들은 연합을 결성하였으며 1948년 1월 팔레스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아랍지원부대를 창설하였다.
이스라엘 초대 총리 [2]벤구리온은 [3]텔아비브에서 1948년 5월14일 독립을 선언했다. 이스라엘 건국에 반발한 [1]아랍연합군은 바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남쪽에서 이집트, 서쪽은 요르단, 북쪽으로 시리아, 레바논이 3면에서 공격하였다. 전력면이나 지정학적으로 이스라엘이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당시 소련은 아랍쪽으로 영향력을 넓히기 싶어했다. 주변국가들의 눈치때문에 위성국가였던 체코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하였다. 수세에 몰리던 이스라엘은 아랍연합군과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서쪽의 요르단의 공격으로 이스라엘 민병대는 예루살렘에서 포위되었으나 격렬한 저항으로 포위망을 뚫고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서로 공격하고 방어하면서 전투가 지속되었으며, 북쪽지역의 시리아군, 레바논군은 이스라엘에 패배하였다. 계속되는 공방전에서 아랍연합군 통합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하여 서로간의 불신으로 단합이 되지 않아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같은 아랍연합군의 내부적으로 분열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더 이상 실효성없다고 판단한 아랍연합군은 각자 차례대로 이스라엘과 휴전을 체결하였다.
1949년 3월 10일 홍해와 접한 항구도시인 [4]에일라트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게양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면적의 78%를 차지했고 나머지 지역 중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장악한 지역에서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70여 만명의 팔레스타인인을 타지역으로 내몰았다.
[1] 아랍연합국 :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파이살 국왕), 이집트(파루크 국왕), 요르단(압둘라 국왕) [2]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1886~1973) : 이스라엘의 초대총리 [3] 텔아비브(Tel Aviv) : 이스라엘 서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 이스라엘의 실질적 수도 [4] 에일라트(Eilat) : 이스라엘 최남단. 홍해에 딸린 아카바 만 최북단에 위치하는 항구도시로 서쪽은 이집트, 동쪽은 요르단에 면하는 국경도시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는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제주도로 출동하라는이승만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14연대 소속 군인 김지회와 지창수를 중심으로 여수 및 순천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이 발효하여 진압하였다.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을 포함하여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 당시 계엄령 발효는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엄령 발효는 위헌행위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 지창수(1906년~1950년) : 여순 14연대 소속 군인
* 김지회(? ~ 1949년 4월 9일) : 여순 14연대 소속 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