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러시아사건기간 : 2014년 2월 27일~2014년 3월 18일, 조회수 : 423, 등록일 : 2022-01-01
소비에트 연방 수립당시 크림반도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해 있었다. 1954년 [1] 니키타 흐루쇼프의 제안으로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시회주의 공화국에 넘어갔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어 자치 공화국이 되었다. 크림 자치 공화국은 1992년 2월 크림 반도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개헌안을 채택했으나, 그해 6월 우크라이나 중앙 정부와의 합의를 통해 우크라이나 잔류에 합의하였다.
2014년 2월 우크라이나 [2] 유로마이단을 계기로 친러세력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물러나고 친서방 세력이 임시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월 27일 친러시아 성향의 [3] 세르게이 악쇼노프가 크림 자치 공화국의 총리가 되었다.
2014년 3월 1일 세르게이 악쇼노프는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크림 반도에 러시아 무장 병력이 투입되면서 사실상 크림 반도를 장악하였다. 러시아는 양국 간 협정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우크라이나 과도정부는 '침공'으로 간주하며 즉각 반발했다.
크림 자치 공화국과 세바스토폴 시는 3월 11일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 선언을 하였으며 세르게이 악쇼노프주도하에 러시아 합병 찬반 투표를 주도하였다. 3월 17일에 실시된 투표결과 96.77%의 찬성으로 종료되었다.
3월 18일에 [4]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연방 대통령과 크림 공화국의 러시아 연방 귀속을 위한 합병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이 체결되면서 크림 자치 공화국은 러시아의 공화국인 크림 공화국이 되었다.
3월 20일 우크라이나는 크림내 자국 병력을 모두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1]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 1894년~1971년) : 러시아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 겸 공산당 서기장을, 1958년부터는 소련 총리와 겸 소련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2] 유로마이단 : 우크라이나 정부의 유럽연합 가입올 반대해 2013년 11월 21일에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 광장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이며 결국 구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친서방 정권을 수립한 사건이다.
[3] 세르게이 악쇼노프(Sergey Aksyonov, 972년 11월 26일~) : 러시아령 크림 공화국의 정치가. 크림 공화국 총리가 되기 직전까지 존재감 없는 정치인이었다
[4]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1952년~ ) : 러시아 제4대 대통령(2012년 5월 7일~현재), 러시아 제2대 대통령(2000년 5월7일~2008년 5월7일), 러시아 제6대총리( 1999년 8월 16일~2000년 5월 7일). 러시아 제10대 총리(2008년 5월 8일~2012년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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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이 9.11 테러의 주범인 [2]알 카에다와 [1]오사마 빈 라덴을 지원하는 [3]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1세기 최초의 전쟁이자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이다
미국의 목표는 [2]알카에다를 해체하고 [3]탈레반 정권을 축출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전쟁초반 미국의 대대적인 공세에 탈레반군은 순식간에 격멸당했다. 2001년 12월 14일에 미국은 승리 선언하였고 탈레반 정권은 무너졌다. 탈레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고 일부 잔존세력이 남부 산악지대로 은신해 들어가서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이후 미국이 [5]이라크 전쟁에 전념하느라 아프카니스탄에 관심이 줄어든 틈을 타 탈레반은 전력을 재건하여 파키스탄 접경지대등을 기반으로 세력을 빠르게 키우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결국 알 카에다와 탈레반 잔병들이 파키스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개전 당시의 병사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장교단도 물갈이가 됐으며 전쟁 초기에 출생하지도 않았던 세대가 미군 입대 가능 연령이 되면서 "한 세대의 전쟁(war of a generation)"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21년 5월부터 미군이 아프카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흐름이 탈레반으로 넘어갔다.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도시들은 탈레반의 수중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8월 12일, 아프가니스탄의 제2, 3의 도시 헤라트와 칸다하르가 탈레반에게 넘어갔다.
국 2021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탈레반에게 항복했다. 탈레반은 카불에 무혈입성하면서 재집권했다.
이 전쟁으로 총사망자 23만명, 난민 500만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1]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 1957년~2011년) :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났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적 성향의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였으며 2001년 미국의 9.11 테러의 배후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11년 5월 2일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미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2] 알카에다(Al-Qaeda) :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이슬람 수니파의 국제 무장 세력이자 테러리즘 집단이며 반미국, 반유대를 표방한다.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으며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3] 탈레반(Taliban) : 아프가니스탄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무장단체이자 테러조직이며 1990년대 중반 활동을 시작하여 1997년에 아프카니스탄을 집권하여 통치하였으나 2001년 미국의 공격으로 축출되었다. 2021년 8월 미군의 철수로 정권을 다시 집권하였다
[4] 카불(Kabul) : 아프카니스탄의 수도
[5] 이라크 전쟁(제2차 걸프 전쟁) :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침략으로 시작되어 2011년 12월 15일 종전되었다
시리아 내전은 2011년 [1]아랍의 봄에서 시작된 시위가 [2]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강경 진압으로 격화되면서 발생했다. 민주화 요구와 경제적 불만을 표출하던 시위대는 정부의 폭력적 대응으로 무장 반군으로 변모했고, 내전으로 확산되었다.
시리아 정부군, 반군,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쿠르드족, 그리고 주변국들과 국제적인 강대국들이 얽혀있는 복잡한 갈등을 띠었던 내전이다. 시리아 정부군은 러시아와 이란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며, 반군은 미국이 지원하였다.
2024년 12월 8일, 수도 다마스쿠스가 반군에게 함락되자 [2]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알아사드 대통령은 53년 부자세습 독재 철권 통치가 막을 내렸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중인 러시아와 정권을 보호하고 방어하느라 효과적으로 대응할 능력이 없어진 이란이 여력이 없어지면서 시리아 정권 몰락을 초래했다
시리아 내전은 50만명 이상 사망자와 1,300만 명 이상 난민 사태의 결과를 낳았다
[1] 아랍의 봄 : 아랍의 봄은 2010년부터 시작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반정부 시위와 혁명 운동이다. 알제리, 바레인, 이집트, 이란, 요르단, 리비아, 모로코, 튀니지, 예멘 등 중동(서아시아)과 북아프리카 일부 지역 모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독재와 부패에 대한 반발로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으며 현재가지도 여파가 미치고 있다. 이로 인해 몇몇 국가에서는 정권이 교체되었으나, 정치적 불안과 내전이 이어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민주화의 성과는 국가마다 크게 달랐다. [2] 바샤르 알아사드(Bashar al-Assad, 1965년 9월 11일 ~ ) : 시리아의 제3대 대통령. 재임기간(2000년 7월 17일 ~ 2024년 12월 8일), 하페즈 알아사드 제2대 대통령의 아들이다
유로마이단은 당시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친러 정책에 반대해 2013년 11월 21일에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 광장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이며 우크라이나 정부의 강경진압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친서방 정권을 수립한 사건이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럽연합(EU) 가입 및 경제협력 진행을 포기하자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경제가 러시아에 예속당할 것이라 주장하며 크게 반발해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2013년 11월 21일 2천여명의 시민들이 키예프 마이단 광장에 모이고 소셜 네크워크를 통하여 시위대를 모집하였다. 다음날 유럽연합(EU) 가입 교섭을 잠정 중단한 정부의 결정을 항의하기 위해 반정부 및 친서방 시위대가 모여 시위를 열었다.
11월 24일에는 독립광장에 모인 5만명에서 10만명의 시위대가 거대한 행진을 진행했고 경찰은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1월 29일에 우크라이나 정부가 유럽연합 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 확인되자 시위대는 만 명으로 늘어났고 무장한 경찰은 시위대 뿐 아니라 주변의 민간인들도 무력으로 진압했다.
12월 1일 시위대 봉기는 전날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키예프 여러 지역의 동시다발적 봉기였으며 12월 1일은 시위대가 정부 청사를 처음으로 점령하게 된 날이기도 했다.
2014년 2월 18일 이후 시위는 전국적인 봉기로 확대되었으며 결국 사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시위대를 주도한 야권과 정부간 협상도 성과 없이 결렬되어 2014년 2월 19일 이후 양측의 충돌은 본격적인 무력 동원과 유혈 충돌로 확대되었다.
2월 23일 시위대가 키예프를 장악하자 빅토르 야누코비치 태통령은 피난길에 올랐으며 우크라이나 의회는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탄핵했다. 그리고 올렉산드르 투르치노프 신임의장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도록 결정했다. 의회는 5월 25일에 조기 대선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이 물러나고 친서방 세력이 급부상하자 우크라이나는 친유럽 성향의 서부와 친러시아 성향의 동부로 나뉘어 서로 합법 정부를 칭하는 이중권력 상태에 놓였다.
유로마이단 사건은 친서방 정권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와 러시아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부의 친러시아계 주민들이 분리독립을 주장해 2014년 크림반도 위기와 내전인 돈바스 전쟁이 일어난 계기가 되었다. 돈바스 전쟁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 마이단광장 : 페르시아어 '메이단'에서 온 단어로 광장을 뜻한다
*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1950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4대 대통령(재위: 2010년 2월 25일~2014년 2월 22일). 5년 임기중 탄핵됨
* 키예프(Kyiv) : 우크라이나의 수도
* 크림반도(Crimean Peninsula) : 흑해 북부연안에 위치한 반도이며 2014년 크림 위기이후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인정하지 않고있다
* 돈바스 전쟁(War in Donbas) :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 2014년 4월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천러 성향의 반군과의 전쟁
* 올렉산드르 투르치노프(Oleksandr Turchynov, 1964년 3월 31일~) : 현재 우크라이나 국회의장이며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임시 대통령을 지냈다
우크라이나 돈바스[1] 지역에서 2014년 4월부터 발발하여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 성향의 반군사이의 전쟁이다. 반군의 목적은 독립 또는 러시아와의 합병이나 우크라이나 정부를 포함한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민족, 러시아 민족, 벨라루스 민족으로 구성된 동슬라이브계 민존이다.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로 강[2]을 중심으로 서부에는 우크라이나 민족, 동부는 러시아 민족이 각각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2013년 11월에 시작된 유로마이단[3]의 여파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친러파들이 시위를 일으키고 반정부 단체가 만들어졌다. 이 시위는 러시아로 크림 공화국이 합병되자 우크라이나의 남동부 지역의 대규모 친러시아 시위로 발전했다.
돈바스를 가리키는 도네츠크[4], 루한스크[5] 지역에서 분리주의를 내세우며 독립투표를 실시/가결하여 인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하며 우크라이나 정부와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군수물자등이 우크라이나 정부의 허가 없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서 들어간 것이 확인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러시아 국경에 있는 우크라이나 군이 준둔해 있는 곳에 대규모 공격이 진행되었고 이후 우크라니아 정부군의 공격과 반군의 저항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속되고 있다.
[1] 돈바스(Donbas) : 우크라이나 동부의 루간스크 주와 도네츠크 주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해당지역이 도네츠 강 주변에 있어 도네츠 분지의 축약어로 돈바스로 불린다. 중심 도시는 도네츠크 [2] 드네프르 강(Dnieper River) : 러시아 서부의 발다이 구릉지대에 내린 눈이 녹아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거쳐 흑해로 흘러드는 길이 2290km의 강 [3] 유로마이단 : 우크라이나 정부의 유럽연합 가입올 반대해 2013년 11월 21일에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 광장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이며 결국 구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친서방 정권을 수립한 사건이다. [4] 루한스크(Luhansk) 공화국 :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에서 분리 독립한 미승인 국가 [5] 도네츠크(Donetsk) 공화국 :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에서 분리 독립한 미승인 국가
인천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4월 15일 09시에 출발하여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는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다음날 오전 8시 48분경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고 약 2시간 만에 완전히 침몰했다. 이 배에는 총 476명이 탑승해 있었으며, 이 중 299명이 사망했으며 5명은 실종되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수학여행을 가던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과 교사들로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단원고 학생 325명 중 250명이 사망하고 교사 11명이 사망하였다.
사고 접수 후, 해양경찰은 출동 및 구조에 나섰다. 9시25분 서해해경청 소속 헬기와 해경이 잇따라 도착했지만 세월호와 교신조차 하지 않았다. 해양경찰청과 정부의 초기 대응도 혼란스러웠으며, 구조 작업은 지연되거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고 발생 몇 시간 뒤에도 정부는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발표했다가 뒤늦게 정정했고, 이로 인해 국민의 분노와 불신은 극에 달했다.
이 사고는 전국적으로 집단적 슬픔과 분노를 촉발했다. 서울 광화문 광장을 중심으로 시민들은 '진실을 밝혀라',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촛불을 들었고, 이후 정치적 저항으로 확장되었다.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은 구조 실패의 진상, 정부의 은폐 시도,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사고 이후 선장과 주요 승무원들은 법정에 섰고 선장은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등 일부 인물은 처벌되었으나 정부 고위 책임자나 당시 청와대의 직접적 책임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비판도 여전히 존재한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사고 당일 7시간 동안 행적이 불분명해 큰 논란이 되었고, 이는 박근혜 정부의 신뢰도 하락 및 이후 탄핵 정국으로 이어지는 촉매 중 하나가 되었다. 7시간의 행적은 박근혜 지정기록물로 지정되어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양경찰청은 한때 해체되었고 정부는 안전 관련 법령을 강화하고 대형 참사에 대비한 대응 시스템을 보완하였다.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와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진상 규명과 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오늘날 세월호는 단순한 해상 사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왜 구조하지 않았는가', '국가는 어디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국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며, '노란 리본'은 이 사건의 상징이 되었다. 매년 4월 16일은 추모의 날로 기념되며, 세월호는 대한민국 사회가 기억해야 할 국가적 교훈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참사는 국민에게 '안전한 사회', '책임지는 정부', '시민의 감시'가 왜 중요한지를 각인시킨 비극이었다.
[외교의 시대 - 한반도의 길을 묻다, P.72참조] 세월호 침몰사고는 관피아 그리고 수많은 '-피아'로 불리는 이익집단들의 담합 구조가 얼마나 한국 사회에 강고하게 뿌리박고 있으며 건전한 발전을 좀먹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제도적, 정책적 개혁없이 방치되는 경우 나라 전체가 쇠퇴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4]가자지구와 [3]서안지구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2]하마스가 통치하고 있다. 반면 서안지구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탈레스타인 자치정부인[1] 파타정권이 통치하고 있다.
2012년에 이스라엘의 [4]가자지구 폭격(2차 가자전쟁)은 민간인 폭격과 명분없는 공격등이 국제사회에서 공분을 일으키게 되고 팔레스타인의 [1]파타정권은 이러한 여론을 이용하여 적극적인 외교활동에 나선다. 결국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옹호에도 불구하고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비회원 참가국가, 즉 국가로 인정했다. 이는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할 수 있고 유엔군의 개입까지 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외교적 성과와 하마스의 성공적인 저항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은 [1]파타 자치정부와 [2]하마스는 다시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지속적인 협상의 끝에 2014년 4월 22일[1] 파타정부와 하마스는 통합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으며 2014년 6월 2일, 7년 만에 서안지구 [5]라말라에서 파타와 하마스의 팔레스타인 통합정부가 다시 구성되기에 이른다. 이것은 파타와 하마스의 분열을 조장하고 이를 적극 이용해 온 이스라엘에는 반갑지 않은 사건이었다.
위와 같은 배경아래 2014년 6월 12일 이스라엘 소년 3명이 [3]요르당 강 서안지구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팔레이스타인측은 즉각 부인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명분삼아 가자지구와 [3]요르단강 서안지구를 폭격하여 수많은 팔레스타인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이에 파레스타인도 박격포와 로켓포로 응수하였다. (소년 3명의 사망사건은 표면상의 명분일 뿐이며 이스라엘의 주된 목표는 이스라엘 영토로 연결되는 가자지구의 땅굴을 무력화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소년 납치살해 사건은 하마스가 벌인 사건이 맞다고 한다)
2014년 7월부터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특수부대를 포함한 지상군을 투입하여 본적적인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4]가자지구의 [2]하마스 무장단체들은 결사항전으로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다보니 전투는 치열해져 민간인을 포함하여 양측의 피해는 점점 커졌다.
계속되는 공방전으로 분쟁이 장기화되면서 소모전으로 이어지자 결국 8월 26일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무기한 휴전하기로 합의하였다. 합의 직후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스라엘은 전투로 인한 군비지출이 막대하여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국 양측은 피해만 입고 끝난 승자없는 싸움이었다.
[1] 파타(PA,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에서 활동 [2]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3] 요르단강 서안 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가자 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5] 라말라(Ramallah) : 요르단강 서쪽에 있는 뚝이라는 의미.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 임시 행정 수도
우산혁명이라 불리는 홍콩 민주화 운동은 홍콩자치정부의 수반인 행정장관 선출 방식이 원인이 되었다.
중국, 1942년 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 패전의 결과로 홍콩은 영국으로 양도되어 1997년까지 영국에 의해 통치되었다.
1997년 7월 홍콩은 다시 중국으로 반환되었고, 반환 당시 중국 [1]덩샤오핑은 홍콩의 경제권과 자치권을 50년간 보장하는 일국양제를 유지하기로 약속하였다.
홍콩의 수반인 행정장관은 '홍콩 기본법 제45조'에 따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통해 선출되므로 상대적으로 친중파가 당선되기 용이한 구조였다. 홍콩의 야당 세력인 '민주파'는 직선제를 꾸준히 요구하여 2017년부터 직접선거를 통한 홍콩의 행정장관 선출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중국의 의회인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과반수 지지를 얻은 2~3인의 후보를 선정하고, 홍콩구민은 이들 중 1명을 직접선거로 선출하도록 하는 선거제도로 개편하게 된다. 이것은 직접선거를 하더라도 친중성향의 후보만 추천하게 되어 중국이 원하는 후보가 행정장관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친중파 행정장관을 통해 일국양제에서 일국일제로 가는 단초가 되는 것이다. 홍콩구민들은 강하게 반발하여 대대적인 시위에 나서게 된다.
초기에는 홍콩사회 지식인 계층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후에 중, 고등학생들과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하여 홍콩 사회의 전체적인 시위로 확대되었다. 당시 행정장관인 [2]렁춘잉은 이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강경진압으로 나섰다. 시위 과정에서 홍콩 경찰들이 최루탄과 살수액으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시민들이 지참하고 나온 우산으로 이를 막아내는 모습이 매스컴에 의해 조명되면서 '우산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2월 15일까지 이어진 민주화시위는 자생력을 잃어가며 종료되었다. 시위대는 어떤 요구도 관철하지 못한 채 자진 해산했으며 지도부 또한 구속됐다.
우산혁명은 시위 정당성을 홍콩사회에 알리는 기회가 됐으며, 중국 중앙정부를 향한 대규모 집단 시위 학습효과를 통해 향후 홍콩구민이 재응집할 수 있는 기반을 마
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 덩샤오핑(Deng Xiaoping,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임기, 1978년 3월 8일~1983년 6월 22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1981년 6월 28일~1989년 11월 7일)등 역임
[2] 렁충잉(Leung Chun-ying, 1954년~ ) : 홍콩의 제4대 행정장관(임기, 2012년 7월 1일~2017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