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프랑스사건기간 : 1803년 4월 30일, 조회수 : 807, 등록일 : 2021-12-15
1803년에 미국은 2,147,000 평방미터의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달러에 매입하였다. 이 지역은 현재의 루이지애나 주가 아니라 미시시피강에서 부터 서쪽의 로키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리켰고 현 미국 영통의 23%를 이룬다.
당시에는 연방헌법이 영토획득과 관련된 조항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위헌소지가 있었으며 큰 논란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미 내륙의 곳곳을 잇던 미시시피 수로의 주요 결절지인 뉴올리언스항을 확보하여 미국 무역에 대한 프랑스와 스페인의 잠재적인 위협을 없애고자 미국 의회를 설득하여 매입을 승인 및 결정하였다.
뉴올리언스 매입을 위해 미국 대표단은 프랑스를 방문하여 나폴레옹과 협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카리브해의 '아이티 혁명'으로 최대의 설탕 생산지를 잃었으며 북아메리카 식민화를 포기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프랑스는 협상에 들어가자 뉴올리언스를 포함하여 루이지애나지역 매입을 권했다. 깜짝놀란 역제안으로 미국 대표단은 루이지애나 지역의 전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표단은 의회의 승인없이 영토 매입을 결정해야 하는 것에 의견이 분분했으나 결과적으로 제안을 수락했고 매매계약은 체결되었다.
이후 미국내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루이지애나 매입은 의회로부터 승인되었다.
당시 가격은 1,125만 달러에 그간의 부채 735만 달러를 포함해 총 1,500만 달러(2018년 기준으로 약 2억 5천만 달러)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본격적인 서부개척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1826년) : 미국 3대 대통령(재임 : 1801년~1809년).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1776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
*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 : 미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으로 미국 중부를 남북으로 흐른다. 미국을 동서로 나눌때 기준점으로 쓰인다
* 뉴올리언스(New Orleans) : 현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최대 도시
*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년~1821년) :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
* 카리브해(Caribbean Sea) : 대서양과 멕시코만에 접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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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디언 전쟁은 17세기 초 유럽 식민자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이래 19세기 말까지 이어진 일련의 무력 충돌과 갈등을 통칭하는 역사적 명칭이다. 이 전쟁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던 원주민(인디언) 부족들과 유럽계 정착민들 그리고 후에 미국 연방정부 간의 영토 분쟁, 문화 충돌, 자원 경쟁, 조약 위반 등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초기 식민지 시기에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 부족들이 식민 전쟁에 참여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대표적인 초기 충돌로는 킹 필립 전쟁(King Philip’s War, 1675~1678), 포하탄 전쟁(Powhatan Wars), 그리고 프랑스-인디언 전쟁(1754~1763)이 있다. 이 시기 인디언들은 대체로 식민지 세력의 군사적 동맹이자 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영토 보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1776년에 독립한 신생 미국 정부는 서부 확장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면서 원주민과의 충돌이 더욱 잦아졌다. 미국-인디언 전쟁의 핵심은 "서부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들의 땅을 몰수하고 강제로 이주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전쟁으로는 북서부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년~1795), 테쿰세 전쟁(Tecumseh's War), 제1차~제3차 세미놀 전쟁(Seminole Wars), 블랙 호크 전쟁(Black Hawk War), 수족 전쟁(Sioux Wars), 치페와 전쟁(Chippewa War), 아파치 전쟁(Apache Wars), 그리고 제로니모 항쟁(Geronimo's resistance) 등이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 미국 정부는 원주민 부족들을 "보호구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이를 거부한 부족들과의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1876년 리틀 빅혼 전투(Battle of the Little Bighorn)에서는 라코타 수우족과 샤이엔족이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군을 전멸시키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미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식량 차단, 협상 파기 등으로 대부분의 부족이 항복하거나 멸족하였다.
1890년, 사우스다코타주 운디드니(Wounded Knee)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은 미국-인디언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에서 미군은 대규모 무장 해제 중이던 라코타 수우족을 공격하여 남녀노소 수백 명을 살해하였다. 운디드니 학살사건 이후 사실상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소규모의 전투가 가끔 벌어졌다.
이 전쟁의 결과 수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빼앗겼으며 미국 전역의 원주민 사회는 급격한 해체와 문화적 침탈을 경험하게 되었다. 미국-인디언 전쟁은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 식민주의·제국주의·인종주의에 기초한 국가 건설과 정복의 역사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미국 사회 내에서 원주민 문제와 정체성 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1791년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혁명의 결과로 식민지의 아프리카인 노예들이 해방되었으며, 아프리카인들이 지배하는 최초의 공화국인 아이티가 세워졌다.
스페인은 히스파니올라 섬의 생도맹그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1697년 이 섬의 서쪽을 프랑스에 내주게 된다.
생도맹그는 전 세계 설탕의 40%를 아이티 원주민과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생산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과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내용을 기초로한 인권선언은 생도맹그의 식민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생도맹그 시민들은 프랑스 혁명 정신을 환영하였다. 흑인노예들과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열)들은 '자유, 평등, 우애'의 원칙을 생도맹그에도 적용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식민지 총독이 이를 거부하자 반발하는 물라토들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이는 아이티 혁명에 불을 지폈다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산토도밍고를 공격하여 그곳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1801년 생도맹그에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혁명군은 1803년 마지막 전투인 베르티에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1804년 1월 1일 아이티 공화국을 세웠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최대의 설탕 생산지를 잃어 큰 타격을 입었으며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 재식민화 계획을 포기하고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게 되었다.
* 생도맹그(Saint-Domingue) : 1697년부터 1804년까지 카리브해의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1/3을 차지했던 프랑스의 식민지. 현재의 아이티
* 히스파니올라 섬(Hispaniola) : 카리브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서쪽 1/3은 아이티의 영토이고, 동쪽 2/3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영토이다, 히스파니올라는 '작은 스페인'을 뜻한다
*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년~1803년) : 아이티의 혁명가, 독립 투사이다. 아이티의 독립의 아버지
* 물라토(mulatto) : 백인과 흑인의 혼혈
*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1801년에서 1805년까지 미합중국과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국가와 벌어진 전쟁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의 국제전쟁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세계 최강 미 해군이 처음 창설된 계기가 되었다. 트리폴리 전쟁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중해 연안의 북아프리카는 오스만 제국의 준독립 국가 상태에 있었다. 바르바리 국가는 트리폴리, 튀니스, 알제리 세 지역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각 오스만 제국 본국에서 파샤가 임명되어 통치를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지중해 일대에는 바르바리 국가들의 보호아래 바르바리 해적들이 난립하였으며 지중해를 통과하는 상선의 통행료를 명목삼아 상납금을 징수했을 뿐만 아니라 상선을 습격하여 포로들을 인질로 삼아 해당 국가와 협상을 벌여 몸값을 받아내고 있었다.
당시 세계 최강 영국 해군 때문에 바르바리 해적들은 영국 국적의 상선은 건드리지 않았으나 독립 직후의 미국 상선을 집중 공격하였다. 미국은 신생 국가로 나라 재정이 열악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1796년에 미국 정부는 바르바리 해적에게 매년 8만여 달러를 상납하는 조건의 트리폴리 조약을 맺으며 미국 국적의 선박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 조약에도 불구하고 바르바리 해적들은 미국 선박을 계속해서 공격했고 이에 격분한 미국은 해군 창설과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하였다.
트리폴리이 파샤인 유수프 카라만르는 1801에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마자 상납요구를 했다. 미국이 이를 거부하자 1801년 5월 10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1801년 6월 1일 미 해군은 4척의 함선을 구성하여 지중해로 들어왔다. 이는 미군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이기도 하다.
8월 1일 미 해군은 함포의 포격으로 바르바리 함선은 전투불능한 상태가 되었다. 미국의 호쾌한 승전이었다. 이후 1803년에는 전함 7척으로 구성된 미 해군 함대가 트리폴리를 봉쇄했고 1805년에는 리비아 북동부 지역을 공격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군이 외국 땅에서 이룬 첫 승리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트리폴리 파샤 유수프 카라만르는 300명에 이르는 미국 포로들을 석방하고 배상금 6만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휴전 조약에 조인하면서 1차 바르바리 전쟁은 종결된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은 미국 군대의 국제적인 평판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고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는 시스템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이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입증했고 미해군과 해병대는 미국의 군사조직으로 위상을 확립하였다.
* 오스만 제국 :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고대 그리스에서 아시아라고 불렸던 지방으로서 오늘날의 터키 영토에 속하는 반도)를 중심으로 유럽동남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 터키제국, 오스만튀르크라고도 불린다
* 바르바리(Barbary) : 유럽에서 베르베르인(북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이 살던 지역을 부르던 말. 특히 아프리카의 북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국가인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의 해안 지역을 말한다.
*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 :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
* 트리폴리(Tripoli) : 리비아의 수도
* 파샤 : 오스만 제국의 최고위층 귀족에게 주어진 호칭. 주로 장군이나 지방 총독에게 주어졌다. 영국의 경(lord)과 비슷하다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1826년) :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재임 : 1801년~1809년.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다.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1803년)이 재임 기간중 일어난 큰 사건이다
* 튀니스(Tunis) : 튀니지의 수도
프랑스 혁명에서 전쟁으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여 나폴레옹 전쟁에서 절정에 이르렀다.이 전쟁은 5개 항목으로 분류된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오스트리아 전쟁 (1805)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독일·폴란드 원정 (1806 ~ 1807)
- 이베리아 반도 전쟁 (1808 ~ 1814)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 (1809)
- 러시아 원정 (1812)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나폴레옹의 몰락 (1813 ~ 1814)
- 빈 회의 (1814. 9. 1 ~ 1815. 6.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