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중국사건기간 : 1899년 9월 11일, 조회수 : 515, 등록일 : 2021-11-09
대한국·대청국 통상 조약(大韓國·大淸國通商條約)으로 불리며 광무 3년(1899년)에 한국과 청국 사이에 조인된 전문 15조의 통상협정이다. 이 조약의 필사본은 1998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어있다.
청나라 전권 대신 서수붕과 한국 전권 대신 박제순은 1899년 2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 간 8차례 회담을 가졌으며 대한제국과 청나라 사이에 한청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약과 비교해 볼 때 동등할 정도로 대등하고 근대적인 조약이며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1) 한청통상조약은 청일전쟁 후, 무조약 관계에 있던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관계를 새로 정립시킨 조약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과 청나라는 수교 국가가 되었다.
(2) 한청통상조약은 대등조약으로서 종전의 조선-청나라 사이의 종속 관계를 부인하고 청나라와 동등한 대한제국의 지위를 규정한 조약이다.
(3) 한청통상조약은 대한제국이 오랫동안 지속되던 중국 중심의 계단식 국제 질서, 사대 조공 질서에서 벗어나 수평적인 근대적 국제 질서로 진입하고, 한편으로 근대적 국제 관계를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 국제 관계를 맺던 이중적 국제 관계에서 탈피해 근대적 국제 관계로 이행을 규정한 조약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 전권대신 : 외교 관계를 수립할 때 국가의 대표 자격을 위임받은 외교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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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광무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직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시행한 대한제국의 근대화 개혁이다.
광무개혁은 '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 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래 부분적으로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여 나라의 발전을 이룩하려 하였다.
대한제국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자주성을 뒷받침하기 이해 국방력 강화와 재정 개혁,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다. 먼저 황제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고, 서울의 중앙군과 지방의 지방군을 대폭 증강하며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다.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함인 양무호를 구입하였다. 양무호는 매우 빈약했으며 이마저도 러일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겨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1896년 1월 11일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폐지되고 대한제국이 건국 후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9년에 [1]양지아문을 설치하고 1899년부터 1903년까지 일부 지역에서 토지조사사업과 [2]지계발급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토지를 법률의 보호 아래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는 토지거래 질서가 확립 되었으며, 국가 재정을 개선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갑오개혁 때 23부로 개편한 행정을 아관파천 이후 13도로 재개편하였다,
적극적으로 추진된 분야는 상공업 진흥책이다. 정부 스스로 제조공장을 설립했으며, 민간의 제조회사 설립을 지원하여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근대적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했으며, 공업전습소 등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황실에서는 방직공장, 유리공장, 제지공장의 설립을 시도했고, 일반 민간인의 공장 설립은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지만 황실이 직영하는 업종 이외의 것은 쉽게 허가하였다.
정부는 근대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근대적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의학교를 설립하여 국민들의 위생과 보건에 노력했으며 중학교를 설립하여 중등교육의 근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한성도시개조상업을 통해 도로와 하수도를 정비하고 교통, 통신, 전기, 전차 등의 근대 시설을 도입하여 산업발전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시기인 1899년에 전차개통과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그 밖에 도량형 제도와 호적제 실시, 순회 재판소 설치, 종합병원인 제중원(濟衆院), 구휼기관인 혜민원(惠民院)등이 설립되었다.
광무개혁은 이처럼 전제군주제의 확립을 통해 근대 주권국가를 지향했고, 짧은 기간에 국방, 산업, 교육, 기술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러일전쟁과 함께 대한제국 정부의 개혁 사업은 중단되었다.
광무개혁은 황제권 강화라는 보수적인 색채와 지계발급, 상공업 진흥, 기술학교 설립, 교통.통신의 인프라 개선등 개혁적이고 새로운 특징을 볼 수 있다. 또한 갑신벙변, 갑오개혁, 을미개혁 같은 개혁들에 비해 자주적으로 추진했던 개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보수적인 인물들이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점을 들어 광무개혁의 개혁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1] 양지아문(量地衙門) : 1898년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서
[2] 지계 : 토지 소유권 증명 문서
필리핀은 1565년부터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아왔다. 미 해군이 마닐라를 접수할 당시에 필리핀에는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1896년 8월에 시작된 혁명은 미군이 스페인군을 몰아낸 1898년 8월까지 전개되었다.
필리핀의 독립운동가인 [1]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7년 필리핀을 지배해 온 스페인에 맞서 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홍콩으로 망명하였으나 미국-스페인 전쟁을 기회로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8년에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5월 19일 스페인과 무장 투쟁 재개를 선언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스페인군에 대항전을 전개하였다. 5월 24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고, 6월 12일에는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했다. 7월 15일에는 [2]아폴리나리오 마비니를 수상으로 한 내각이 성립되었다. 필리핀군은 미군의 마닐라 입성을 지원하며 스페인군울 몰아냈다.
[1]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이 필리핀을 독립시켜 줄 것이라 믿었지만 마닐라에 입성한 미국은 필리핀 식민지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898년 8월 13일 미군은 마닐라에 입성하였고 다음날 인 8월 14일에 마닐라에 필리핀 제도 미국군정부를 설립하였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1898년 12월 10일에 스페인과 파리에서 평화 조약에서 필리핀의 지배권을 양도받았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필리핀인들은 미국의 배반에 분노하였으며, 미국의 행위를 침략이라고 규탄했다. 1899년 1월 1일에 아기날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월 21일 필리핀 제1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1899년 2월 4일, [3]산후안 델 몬테 다리에서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 들어선 필리핀 병사와 첫 충돌이 발생하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필리핀군은 초기에는 전면전을 펼쳤으나 군사력과 무기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군은 1899년 10월 산속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으로 항전을 이어나갔다. 필리핀군은 미국군을 상대로 산악과 정글 지형을 활용해 저항했으며, 미군은 이에 대응하여 필리핀 민간인들을 집단 거주지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의 전략을 펼쳤다.
미국은 1900년 12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무자비한 학살에 기근과 질병까지 겹쳐 20만명이 넘는 필리핀인이 사망했다.
1901년 3월 23일 [4]프레더릭 펀스튼 장군이 이끄는 미군의 작전으로 [1]아기날도는 미군에게 생포되면서 필리핀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약화되었다. 4월 19일 대부분의 필리핀인들은 항복했고, 1902년 7월 2일 잔여 병력까지 진압된 이후 전쟁 종결되면서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이후 필리핀은 미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모로족이 끝까지 미국의 지배에 반발하여 [5]모로전쟁이 이어졌다. 필리핀 내 독립운동은 계속 확산되었으며, 결국 1946년 필리핀은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필리핀-미국 전쟁은 단순한 식민 전쟁이 아니라, 자주독립을 향한 필리핀인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필리핀은 강대국의 지배 속에서도 독립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는 훗날 필리핀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1869년~1964년) :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재임 1899년 1월 23일~1901년 3월 23일). 필리핀의 국부중 한 사람이자 필리핀 건국의 영웅. 필리핀 화폐 5페소 도완되었다 [2] 아폴리나리오 마비니(Apolinario Mabini, 1864년~1903년) :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필리핀의 현대 헌법의 초안자이자 작성자. 필리핀 초대수장. 필리핀의 국부중 한 사람. 필리핀 화폐 1페소 지폐,10페소 도안되었다 [3] 산후안 델 몬테(San Juan del Monte) :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북동쪽 지역의 도시 [4] 프레더릭 펀스턴(Frederick Funston, 1865년~1917년) : 미국의 군인으로 미국-스페인 전쟁과 미국-필리핀 전쟁에서 활약을 하였다. 미국-필리핀 전쟁의 작전으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5] 모로전쟁(1902년 5월 3일~1913년 6월 15일) :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와 술루 제도에서 미국과 현지 무슬림 모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제1·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증국번, [2]이홍장등은 강력한 중국을 위하여 양무운동을 전개했으나 내부혼란으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고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다시 몰락의 길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에서 서구의 경제적 침탈과 중국내 자유로운 포교활동으로 교회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중국 민중들의 전통적인 삶과 문화에 크게 위협받자 반기독교운동과 반외세·반제국주의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원래 [3]의화단은 산동 지방의 무술을 수련하던 권법조직으로 '권법을 익히고 몸을 수련하여 의를 도모한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무술과 주문을 통해 몸에 총알이 통하지 않는다는 신비주의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단결했고 주로 농민층과 하층민들이 중심이 되었다.
의화단은 [4]부청멸양을 내세우며 서구 세력뿐만 아니라 기독교 선교사 및 기독교로 개종한 중국인도 외세의 앞잡이로 간주하고 이들에 대한 공격과 살해를 포함한 격렬한 저항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철도, 전신, 교회 등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시설에 대한 파괴 활동이 집중되었다. 의화단은 외세의 물질문명이 중국의 전통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하여 이를 배격하고자 하였다.
의화단은 1900년 베이징으로 진입하여 서구 외교 공관들을 포위하였으며 일부 서양인들을 살해하는 등 무력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감행하였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외세를 견제할 수단으로 의화단을 공식적으로 지원하였다.
서구 열강들은 자국민이 의화단에 의해 학살당하고 이권이 침탈당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8개국 [5]연합군을 조직해 베이징으로 진입하면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선진화된 전술과 신식 무기를 상대한 청군과 의화단은 연합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결국 1901년,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함으로써 의화단은 진압되었으며, 운동은 종결되었다.
이에 대한 결과로 청나라는 열강과 굴욕적인 베이징 의정서(신축조약)를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외국군의 주둔을 허용했으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청 정부는 내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6]변법자강운동과 [7]신정이라는 일련의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내부 대립으로 효과를 내지못하고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1]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2]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실질적인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3] 의화단(義和團) : 중국 청나라 말기에 반외세·반기독교·반제국주의 성격을 지닌 무장단체로 무장단체이며 농민과 도시 하층민을 주축으로 형성되었다. 당시 외세의 침략과 기독교 세력의 팽창,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 혼란과 경제적 고통에 분노한 민중의 감정을 대변하였다 [4] 부청멸양(扶清滅洋) : 청을 돕고 서양을 멸하자 [5] 연합군 : 영국, 미국, 호주, 인도(영국군 소속),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헝가리, 이탈리아, 일본 [6] 변법장강운동(變法自彊運動, 1898년 6월 11일~1898년 9월 21일) : 상공업 진흥과 신식학교 개설을 포함한 서구식 제도 개혁운동. 변법은 '낡은법을 변화시킴'을 의미. 내부 갈등으로 실패함 [7] 신정(新政, 1901년~1911년) : 서태후 주도하의 행정, 교육, 군사, 재정등의 서구식 개혁과 입헌군주제 실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