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Iraq War)
미국
이라크
영국
사건기간 : 2003년 3월 20일~2011년 12월 15일, 조회수 : 372, 등록일 : 2021-09-01
미국은 알 카에다의 9.11 테러 이후 엄청난 혼란에 빠져있었던 상황에서 이라크가 유엔이 금지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명분하에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수행하는 와중에 이라크를 침공하여 두 개의 전선으로 확대되면서 전투는 이기지만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90년의 걸프 전쟁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났다고 해서 '제 2차 걸프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침략 2주만인 4월 9일에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는 함락되었고 후세인 정부는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은 수도인 바그다드 함락 이후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가 그해 12월에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되어 2006년 11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2006년 12월에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바그다드가 함락되면서 전쟁 종전 선언을 했지만 뒷수습하기엔 병력이 한없이 모자랐고 현지의 현황을 무시한 전후 처리로 인해 저항세력이 생겼다. 게다가 전쟁의 혼란으로 국경이 사실상 사라진 틈을 타고 각종 무장세력이 이라크를 기점으로 반미저항뿐 아니라 수니파와 시아파가 충돌하는 사태까지 번지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이들 무장세력과도 싸워야만 했고, 이로인하여 매년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양 전선을 유지하기에 힘에 부친 미국은 2009년 7월부터 미국 병력이 이라크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철수를 준비하여 2010년 8월 20일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2011년 12월 15일 미국에서 공식으로 종전을 선언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18일 미국 병력은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미국이 철수하자 이라크는 계속되는 갈등과 테러를 끝내지 못하며 내전으로 2017까지 휩싸이게 된다.
* 알카에다(Al-Qaeda) :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이슬람 수니파의 국제 무장 세력이자 테러리즘 집단이며 반미국, 반유대를 표방한다.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으며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년~2006년) : 이라크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이라크의 정치인. 제5대 대통령(재임,1979년~2003년)
1990년의 걸프 전쟁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났다고 해서 '제 2차 걸프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침략 2주만인 4월 9일에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는 함락되었고 후세인 정부는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은 수도인 바그다드 함락 이후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가 그해 12월에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되어 2006년 11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2006년 12월에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바그다드가 함락되면서 전쟁 종전 선언을 했지만 뒷수습하기엔 병력이 한없이 모자랐고 현지의 현황을 무시한 전후 처리로 인해 저항세력이 생겼다. 게다가 전쟁의 혼란으로 국경이 사실상 사라진 틈을 타고 각종 무장세력이 이라크를 기점으로 반미저항뿐 아니라 수니파와 시아파가 충돌하는 사태까지 번지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이들 무장세력과도 싸워야만 했고, 이로인하여 매년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양 전선을 유지하기에 힘에 부친 미국은 2009년 7월부터 미국 병력이 이라크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철수를 준비하여 2010년 8월 20일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2011년 12월 15일 미국에서 공식으로 종전을 선언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18일 미국 병력은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미국이 철수하자 이라크는 계속되는 갈등과 테러를 끝내지 못하며 내전으로 2017까지 휩싸이게 된다.
* 알카에다(Al-Qaeda) :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이슬람 수니파의 국제 무장 세력이자 테러리즘 집단이며 반미국, 반유대를 표방한다.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으며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년~2006년) : 이라크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이라크의 정치인. 제5대 대통령(재임,1979년~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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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 28일 이스라엘 [2]아리엘 샤론 총리는 동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교 성지인 [3]알 아크사 모스크를 군과 경찰등의 호위병을 대동하여 방문했다. 이에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에 이스라엘측은 즉각적인 사격으로 대응하여 팔레스타인인 13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더욱이 2000년 9월 30일 아버지와 외출하였던 12살 어린이인 무함마드 라미 알 두라 소년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희생된 사건이 발생했다. 시위 군중과 이스라엘군 사이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TV를 통하여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이 사건으로 팔레스타인과 전 세계는 이스라엘에 분노하였다.
이로 인하여 [8]오슬로 평화협정이 파기됐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봉기한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를 막기위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다시 점령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이 일어났다. 팔레스타인 경찰까지 민중봉기에 참여하여 준전쟁 상태로 발전하면서 요르단 강 [7]서안지구, [9]가자지구의 주민과 팔레스타인 난민, 이스라엘에 사는 아랍인까지 합세하여 대규모로 파급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전선, [5]하마스, 이슬람 [6]지하드 등의 무장단체들도 전부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자살폭탄테러와 요인암살을 하면서 민족봉기를 자극했다.
팔레스타인 대통령 선거는 2005년 1월 9일에 치러졌고, [4]마흐무드 압바스(Abu Mazen)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5년 2월 8일 [2]아리엘 샤론과 [4]마흐무드 압바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휴전을 선언했다. 서로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기로 하였으며 이스라엘측은 정치범을 제외한 팔레스타인 포로를 석방하며 [7]서안지구에서 철수하는데 동의했다. 팔레스타인측도 봉기와 게릴라전을 멈추기로 합의했다. [5]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이슬람 [6]지하드도 권고를 받아들이면서 2차 인티파다는 끝난다.
2차 인티파다로 팔레스타인은 3,334명이 사망하고 5만 3천명이 부상당했다. 이스라엘 역시 피해가 만만치 않아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1,074명이 사망했다.
[1]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년~2004년)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임기 1994년 7월 5일~ 2004년 11월 11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제3대 정부수반(임기 1969년 2월 4일~2004년 10월 29일)
[2]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1928년~2014년) : 이스라엘 제15대 총리(임기 2001년 3월 7일~2006년 4월 14일)
[3] 알 아크사 모스크(Al-Aqsa Mosque) : 예루살렘의 성전산 남쪽에 위치한 은색 둥근 지붕의 이슬람교 사원. 이슬람교 3대 성지의 하나
[4]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 1935년~) : 2003년에는 팔레스타인 수상에 임명되었지만 사직. 2004년 아라파트 사망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반. 2005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7년 동안 장기집권하고 있다
[5]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6] 지하드(jihad) : '성전'이라는 뜻으로, 이슬람교의 신앙을 전파하거나 방어하기 위하여 벌이는 이교도와의 투쟁을 이르는 말
[7]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8]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13일에 이스라엘과 분쟁을 계속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분쟁을 종식키로 한 평화협정
[9]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더욱이 2000년 9월 30일 아버지와 외출하였던 12살 어린이인 무함마드 라미 알 두라 소년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희생된 사건이 발생했다. 시위 군중과 이스라엘군 사이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TV를 통하여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이 사건으로 팔레스타인과 전 세계는 이스라엘에 분노하였다.
이로 인하여 [8]오슬로 평화협정이 파기됐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봉기한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를 막기위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다시 점령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이 일어났다. 팔레스타인 경찰까지 민중봉기에 참여하여 준전쟁 상태로 발전하면서 요르단 강 [7]서안지구, [9]가자지구의 주민과 팔레스타인 난민, 이스라엘에 사는 아랍인까지 합세하여 대규모로 파급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전선, [5]하마스, 이슬람 [6]지하드 등의 무장단체들도 전부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자살폭탄테러와 요인암살을 하면서 민족봉기를 자극했다.
팔레스타인 대통령 선거는 2005년 1월 9일에 치러졌고, [4]마흐무드 압바스(Abu Mazen)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5년 2월 8일 [2]아리엘 샤론과 [4]마흐무드 압바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휴전을 선언했다. 서로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기로 하였으며 이스라엘측은 정치범을 제외한 팔레스타인 포로를 석방하며 [7]서안지구에서 철수하는데 동의했다. 팔레스타인측도 봉기와 게릴라전을 멈추기로 합의했다. [5]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이슬람 [6]지하드도 권고를 받아들이면서 2차 인티파다는 끝난다.
2차 인티파다로 팔레스타인은 3,334명이 사망하고 5만 3천명이 부상당했다. 이스라엘 역시 피해가 만만치 않아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1,074명이 사망했다.
[1]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년~2004년)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임기 1994년 7월 5일~ 2004년 11월 11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제3대 정부수반(임기 1969년 2월 4일~2004년 10월 29일)
[2]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1928년~2014년) : 이스라엘 제15대 총리(임기 2001년 3월 7일~2006년 4월 14일)
[3] 알 아크사 모스크(Al-Aqsa Mosque) : 예루살렘의 성전산 남쪽에 위치한 은색 둥근 지붕의 이슬람교 사원. 이슬람교 3대 성지의 하나
[4]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 1935년~) : 2003년에는 팔레스타인 수상에 임명되었지만 사직. 2004년 아라파트 사망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반. 2005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7년 동안 장기집권하고 있다
[5]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6] 지하드(jihad) : '성전'이라는 뜻으로, 이슬람교의 신앙을 전파하거나 방어하기 위하여 벌이는 이교도와의 투쟁을 이르는 말
[7]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8]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13일에 이스라엘과 분쟁을 계속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분쟁을 종식키로 한 평화협정
[9]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이 9.11 테러의 주범인 [2]알 카에다와 [1]오사마 빈 라덴을 지원하는 [3]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1세기 최초의 전쟁이자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이다
미국의 목표는 [2]알카에다를 해체하고 [3]탈레반 정권을 축출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전쟁초반 미국의 대대적인 공세에 탈레반군은 순식간에 격멸당했다. 2001년 12월 14일에 미국은 승리 선언하였고 탈레반 정권은 무너졌다. 탈레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고 일부 잔존세력이 남부 산악지대로 은신해 들어가서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이후 미국이 [5]이라크 전쟁에 전념하느라 아프카니스탄에 관심이 줄어든 틈을 타 탈레반은 전력을 재건하여 파키스탄 접경지대등을 기반으로 세력을 빠르게 키우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결국 알 카에다와 탈레반 잔병들이 파키스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개전 당시의 병사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장교단도 물갈이가 됐으며 전쟁 초기에 출생하지도 않았던 세대가 미군 입대 가능 연령이 되면서 "한 세대의 전쟁(war of a generation)"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21년 5월부터 미군이 아프카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흐름이 탈레반으로 넘어갔다.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도시들은 탈레반의 수중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8월 12일, 아프가니스탄의 제2, 3의 도시 헤라트와 칸다하르가 탈레반에게 넘어갔다.
국 2021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탈레반에게 항복했다. 탈레반은 카불에 무혈입성하면서 재집권했다.
이 전쟁으로 총사망자 23만명, 난민 500만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1]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 1957년~2011년) :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났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적 성향의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였으며 2001년 미국의 9.11 테러의 배후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11년 5월 2일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미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2] 알카에다(Al-Qaeda) :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이슬람 수니파의 국제 무장 세력이자 테러리즘 집단이며 반미국, 반유대를 표방한다.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으며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3] 탈레반(Taliban) : 아프가니스탄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무장단체이자 테러조직이며 1990년대 중반 활동을 시작하여 1997년에 아프카니스탄을 집권하여 통치하였으나 2001년 미국의 공격으로 축출되었다. 2021년 8월 미군의 철수로 정권을 다시 집권하였다
[4] 카불(Kabul) : 아프카니스탄의 수도
[5] 이라크 전쟁(제2차 걸프 전쟁) :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침략으로 시작되어 2011년 12월 15일 종전되었다
1세기 최초의 전쟁이자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이다
미국의 목표는 [2]알카에다를 해체하고 [3]탈레반 정권을 축출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전쟁초반 미국의 대대적인 공세에 탈레반군은 순식간에 격멸당했다. 2001년 12월 14일에 미국은 승리 선언하였고 탈레반 정권은 무너졌다. 탈레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고 일부 잔존세력이 남부 산악지대로 은신해 들어가서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이후 미국이 [5]이라크 전쟁에 전념하느라 아프카니스탄에 관심이 줄어든 틈을 타 탈레반은 전력을 재건하여 파키스탄 접경지대등을 기반으로 세력을 빠르게 키우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결국 알 카에다와 탈레반 잔병들이 파키스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개전 당시의 병사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장교단도 물갈이가 됐으며 전쟁 초기에 출생하지도 않았던 세대가 미군 입대 가능 연령이 되면서 "한 세대의 전쟁(war of a generation)"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21년 5월부터 미군이 아프카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흐름이 탈레반으로 넘어갔다.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도시들은 탈레반의 수중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8월 12일, 아프가니스탄의 제2, 3의 도시 헤라트와 칸다하르가 탈레반에게 넘어갔다.
국 2021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탈레반에게 항복했다. 탈레반은 카불에 무혈입성하면서 재집권했다.
이 전쟁으로 총사망자 23만명, 난민 500만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1]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 1957년~2011년) :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났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적 성향의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였으며 2001년 미국의 9.11 테러의 배후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11년 5월 2일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미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2] 알카에다(Al-Qaeda) :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이슬람 수니파의 국제 무장 세력이자 테러리즘 집단이며 반미국, 반유대를 표방한다.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으며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3] 탈레반(Taliban) : 아프가니스탄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무장단체이자 테러조직이며 1990년대 중반 활동을 시작하여 1997년에 아프카니스탄을 집권하여 통치하였으나 2001년 미국의 공격으로 축출되었다. 2021년 8월 미군의 철수로 정권을 다시 집권하였다
[4] 카불(Kabul) : 아프카니스탄의 수도
[5] 이라크 전쟁(제2차 걸프 전쟁) :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침략으로 시작되어 2011년 12월 15일 종전되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우울증 증세를 보인 김대한(당시 56세)은 뇌졸증까지 겹치면서 이를 비관하여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 정차하고 있던 1079열차에서 방화를 저질러 일어난 대형 화재 참사 사건이다.
2003년 1월 18일 오전 9시 5분경 대구 지하철 1089호 열차는 중앙로역에 도착하기 위하여 서행하고 있었다.
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여 도착한 순간 이 열차에 탑승하고 있었던 김대한은 플라스틱 석유통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자신의 바지에 불이 붙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옷을 태우던 불을 끄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바닥에 던져진 석유통에 의하여 순식간에 열차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 불에서 나온 검은 연기, 유독성 가스가 승강장과 지하 1~2층 대합실에 급속히 확산됐고 승객들이 주출입구쪽의 계단을 통해 대피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중앙로역 맞은편 승강장으로 1080열차가 진입 중이었다. 1080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여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렸으며 승강장에 있던 연기가 열차 안으로 들어오자 기관사가 즉시 출입문을 닫았다. 그리고 1079호 열차의 불이 1080호 열차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때마침 화재로 전원이 끊어지며 전동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기관사는 기관실 바로 옆 1호 칸의 출입문 몇 개만 연 뒤 현장을 이탈했다.
일부 차량은 문이 열리지 않아 승객들은 열차안에 갇혀있었다. 결국 1080호 열차 내부는 연기로 가득차게 되었으며 대피하지 못한 승객들은 유독가스로 인한 연기로 질식되면서 사망했다.
신고를 받고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하였으나 화염과 유독가스로 현장접근이 힘들어 구조가 지연되었다.
오후 1시 38분경에 화재가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구조된 승객들은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079열차의 승객 거의 대부분은 정차중으로 문이 열려 있었고 기관사가 승객들에게 대피를 지시하여 대피하여 비교적 큰 피해가 나지 않은 반면, 반대방향으로 운행 중이던 1080열차는 화재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역에 진입하여 정차함에 따라 화재가 확산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1079열차에는 방화범을 포함한 250여 명이, 1080열차에는 180여 명의 승객이 탑승했었다.
이사고로 192명 사망(1079호열차:50명, 1080열차:142명), 부상자 151명이 발생하는 대형참사였다.
2003년 1월 18일 오전 9시 5분경 대구 지하철 1089호 열차는 중앙로역에 도착하기 위하여 서행하고 있었다.
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여 도착한 순간 이 열차에 탑승하고 있었던 김대한은 플라스틱 석유통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자신의 바지에 불이 붙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옷을 태우던 불을 끄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바닥에 던져진 석유통에 의하여 순식간에 열차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 불에서 나온 검은 연기, 유독성 가스가 승강장과 지하 1~2층 대합실에 급속히 확산됐고 승객들이 주출입구쪽의 계단을 통해 대피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중앙로역 맞은편 승강장으로 1080열차가 진입 중이었다. 1080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여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렸으며 승강장에 있던 연기가 열차 안으로 들어오자 기관사가 즉시 출입문을 닫았다. 그리고 1079호 열차의 불이 1080호 열차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때마침 화재로 전원이 끊어지며 전동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기관사는 기관실 바로 옆 1호 칸의 출입문 몇 개만 연 뒤 현장을 이탈했다.
일부 차량은 문이 열리지 않아 승객들은 열차안에 갇혀있었다. 결국 1080호 열차 내부는 연기로 가득차게 되었으며 대피하지 못한 승객들은 유독가스로 인한 연기로 질식되면서 사망했다.
신고를 받고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하였으나 화염과 유독가스로 현장접근이 힘들어 구조가 지연되었다.
오후 1시 38분경에 화재가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구조된 승객들은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079열차의 승객 거의 대부분은 정차중으로 문이 열려 있었고 기관사가 승객들에게 대피를 지시하여 대피하여 비교적 큰 피해가 나지 않은 반면, 반대방향으로 운행 중이던 1080열차는 화재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역에 진입하여 정차함에 따라 화재가 확산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1079열차에는 방화범을 포함한 250여 명이, 1080열차에는 180여 명의 승객이 탑승했었다.
이사고로 192명 사망(1079호열차:50명, 1080열차:142명), 부상자 151명이 발생하는 대형참사였다.
조지아는 1992년 [1]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 대통령이 사임한 후 [2]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의회 의장이 되었다.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1995년에 조지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세바르드나제 정권은 만연한 부패와 족벌주의로 조지아의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조지아의 경제는 주위 타국에 비해 매우 궁핍하였고, 러시아 지원을 받는 사실상의 분리독립상태인 [3] 압하지야, [4] 남오세티야도 조지아 정부의 영향이 미치지 못했다. 또한 [5] 아자리야 자치공화국도 조지아에서 분리를 외치는 상황이었다.
2003년 11월 2일에 치러진 의회선거의 부정조작으로 야당들은 세바르드나제의 퇴진과 재선거를 요구했으며 국민들에게는 비폭력과 불복종을 외쳤다. 11월 중순에 대규모 시위가 [6] 트빌리시 중심가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조지아 주요도시로 확산되었다.
세바르다나제 정권도 지지자를 모아 친정부 시위를 하였으나 야당 및 국민들의 항의시위는 11월 22일에 정점에 달했다. 이날 [7] 미헤일 사카슈빌리의 야당 지지자들은 손에 장미를 들고 의회 건물을 점거하였다. 세바르드나제는 의회개회연설을 하기 위해 의회에 진입을 하려 했으나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장미혁명'이라 불린다.
다음날인 11월 23일 [2] 세바르드나제는 대통령 사임을 발표하였고, 수많은 시위자들은 환호하였다. 그리고 최고재판소는 이전 의회선거를 무효로 선언했다.
2004년 1월 4일 대통령 선거에서 [7] 사카슈빌리가 압승하여 30대의 젊은 나이로 조지아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004년 3월 28일에 의회 재선거가 실시되어 사카슈빌리를 지지하는 국민동맹-민주당이 대승했다.
장미혁명은 2004년 11월의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과 2005년 키르키니스탄의 튤립혁명에 영향을 미쳤다.
조지아는 장미혁명 이후에도 정치불안이 이어졌고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얍하지아에 주둔하는 등,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도 험악해졌다. 사카슈빌리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베이징 올림픽 개막 하루전인 2008년 8월 7일에 자치주의 독립을 원하는 남오세티야를 침공하였다(남오세티야 전쟁).
결과는 러시아군의 참전을 예상 못했던 조지아의 참패였으며 [4] 남오세티야와 [3] 압하지야는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다.
[1]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Zviad Gamsakhurdia, 1939년~1993년) : 조지아의 제1대 대통령(임기 : 1991년~1992년)
[2]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1928년~2014년) : 조지아의 제2대 대통령(임기:1995년~2003년). 1985년까지 1990년까지 소련의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1995년부터 2003년 장미 혁명으로 물러날 때까지 조지아의 대통령을 지냈다
[3] 압하지야(Abkhazia) : 흑해의 남쪽 연안과 캅카스의 남서쪽에 위치한 미승인 국가로 압하지야인이 주로 거주한다. 수도는 수후미(Sukhumi)이며 조지아의 영토내에 있는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4] 남오세티야(South Ossetia) 또는 츠힌발리(Tskhinvali) : 조지아에 위치한 사실상의 독립상태로 통치되는 지역이자 미승인 국가로 수도는 츠힌발리이다. 정식 국호는 남오세티야 공화국-알라니야국(Republic of South Ossetia–The State of Alania)
[5] 아자리아(Azaria) : 조지아 남서부의 지역에 위치하며 소수민족들의 자치 공화국이다. 수도는 바투미(Batumi)
[6] 트빌리시(Tbilisi) : 조지아의 수도
[7]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1967~현존) : 조지아의 제3대 대통령(임기 : 2004년~2013년, 2008년 재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정치가(우크라이나 국적 부여받자 이중 국적을 제한하는 조지아법에 의해 조지아국적 박탈당함)
당시 조지아의 경제는 주위 타국에 비해 매우 궁핍하였고, 러시아 지원을 받는 사실상의 분리독립상태인 [3] 압하지야, [4] 남오세티야도 조지아 정부의 영향이 미치지 못했다. 또한 [5] 아자리야 자치공화국도 조지아에서 분리를 외치는 상황이었다.
2003년 11월 2일에 치러진 의회선거의 부정조작으로 야당들은 세바르드나제의 퇴진과 재선거를 요구했으며 국민들에게는 비폭력과 불복종을 외쳤다. 11월 중순에 대규모 시위가 [6] 트빌리시 중심가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조지아 주요도시로 확산되었다.
세바르다나제 정권도 지지자를 모아 친정부 시위를 하였으나 야당 및 국민들의 항의시위는 11월 22일에 정점에 달했다. 이날 [7] 미헤일 사카슈빌리의 야당 지지자들은 손에 장미를 들고 의회 건물을 점거하였다. 세바르드나제는 의회개회연설을 하기 위해 의회에 진입을 하려 했으나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장미혁명'이라 불린다.
다음날인 11월 23일 [2] 세바르드나제는 대통령 사임을 발표하였고, 수많은 시위자들은 환호하였다. 그리고 최고재판소는 이전 의회선거를 무효로 선언했다.
2004년 1월 4일 대통령 선거에서 [7] 사카슈빌리가 압승하여 30대의 젊은 나이로 조지아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004년 3월 28일에 의회 재선거가 실시되어 사카슈빌리를 지지하는 국민동맹-민주당이 대승했다.
장미혁명은 2004년 11월의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과 2005년 키르키니스탄의 튤립혁명에 영향을 미쳤다.
조지아는 장미혁명 이후에도 정치불안이 이어졌고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얍하지아에 주둔하는 등,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도 험악해졌다. 사카슈빌리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베이징 올림픽 개막 하루전인 2008년 8월 7일에 자치주의 독립을 원하는 남오세티야를 침공하였다(남오세티야 전쟁).
결과는 러시아군의 참전을 예상 못했던 조지아의 참패였으며 [4] 남오세티야와 [3] 압하지야는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다.
[1]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Zviad Gamsakhurdia, 1939년~1993년) : 조지아의 제1대 대통령(임기 : 1991년~1992년)
[2]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1928년~2014년) : 조지아의 제2대 대통령(임기:1995년~2003년). 1985년까지 1990년까지 소련의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1995년부터 2003년 장미 혁명으로 물러날 때까지 조지아의 대통령을 지냈다
[3] 압하지야(Abkhazia) : 흑해의 남쪽 연안과 캅카스의 남서쪽에 위치한 미승인 국가로 압하지야인이 주로 거주한다. 수도는 수후미(Sukhumi)이며 조지아의 영토내에 있는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4] 남오세티야(South Ossetia) 또는 츠힌발리(Tskhinvali) : 조지아에 위치한 사실상의 독립상태로 통치되는 지역이자 미승인 국가로 수도는 츠힌발리이다. 정식 국호는 남오세티야 공화국-알라니야국(Republic of South Ossetia–The State of Alania)
[5] 아자리아(Azaria) : 조지아 남서부의 지역에 위치하며 소수민족들의 자치 공화국이다. 수도는 바투미(Batumi)
[6] 트빌리시(Tbilisi) : 조지아의 수도
[7]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1967~현존) : 조지아의 제3대 대통령(임기 : 2004년~2013년, 2008년 재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정치가(우크라이나 국적 부여받자 이중 국적을 제한하는 조지아법에 의해 조지아국적 박탈당함)
우쿠라이나 [1]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이 임기 만료로 물러나면서 2004년 대선은 레오니드 쿠치마정권의 총리인 [2]빅토르 야누코비치와 그에 맞서는 야당 후보로 [3]빅토르 유셴코가 있었다. 빅토르 유셴코는 민주화의 여망을 실현시킬 인물로 각광받던 인물이었다.
2004년 10월 31일 1차 선거에서 과반수 득표가 없어 1,2위를 차지한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빅토르 유셴코는 11월 21일 2차선거(결선투표)에서 재격돌했다. 결선투표 결과 야누코비치가 49.53%, 유셴코가 46.66%의 특표율로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다. 그렇지만 대규모 부정선거로 얼룩짐에 따라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오렌지 혁명'은 시작됐다.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독립) 광장에 있는 국회의사당 앞에 수십만이 모였다. 유셴코 진영은 자신들의 상징으로 오렌지색을 사용하였다. 이제 오렌지색은 자유와 정의의 색깔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최고 재판소는 유권자들의 투표와 예비 집계 과정 중에 위반사실을 확인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2차 선거 결과에 대한 발표를 취소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를 다시 거행하도록 명령했다.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속에 12월 26일에 치러진 재선거 결과 유셴코가 51.99%로 승리했다. 유셴코가 한 달 뒤 대통령에 취힘함으로써 오렌지 혁명은 끝이 났다.
[1] 레오니드 쿠치마(Leonid Kuchma, 1938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제2대 대통령(임기:1994년 7월 19일~2005년 1월 23일)
[2] 빅토르 유셴코(Viktor Yushchenko, 1954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제3대 대통령(임기:2005년 1월 23일~2010년 2월 25일)
[3]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1950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제4대 대통령(임기:2010년 2월 25일~2014년 2월 22일). 5년 임기중 탄핵됨
2004년 10월 31일 1차 선거에서 과반수 득표가 없어 1,2위를 차지한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빅토르 유셴코는 11월 21일 2차선거(결선투표)에서 재격돌했다. 결선투표 결과 야누코비치가 49.53%, 유셴코가 46.66%의 특표율로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다. 그렇지만 대규모 부정선거로 얼룩짐에 따라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오렌지 혁명'은 시작됐다.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독립) 광장에 있는 국회의사당 앞에 수십만이 모였다. 유셴코 진영은 자신들의 상징으로 오렌지색을 사용하였다. 이제 오렌지색은 자유와 정의의 색깔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최고 재판소는 유권자들의 투표와 예비 집계 과정 중에 위반사실을 확인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2차 선거 결과에 대한 발표를 취소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를 다시 거행하도록 명령했다.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속에 12월 26일에 치러진 재선거 결과 유셴코가 51.99%로 승리했다. 유셴코가 한 달 뒤 대통령에 취힘함으로써 오렌지 혁명은 끝이 났다.
[1] 레오니드 쿠치마(Leonid Kuchma, 1938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제2대 대통령(임기:1994년 7월 19일~2005년 1월 23일)
[2] 빅토르 유셴코(Viktor Yushchenko, 1954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제3대 대통령(임기:2005년 1월 23일~2010년 2월 25일)
[3]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1950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제4대 대통령(임기:2010년 2월 25일~2014년 2월 22일). 5년 임기중 탄핵됨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아체주 서부 해안에 발생한 규모 M9.1-9.3의 초대형 해저 지진으로 사망자의 대부분은 쓰나미에 의해 발생했다.
이 지진 해일로 스리랑카, 몰디브, 인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아프리카의 소말리아까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전 세계에서 28만명 이상 사망했다.
이 지진 해일로 스리랑카, 몰디브, 인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아프리카의 소말리아까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전 세계에서 28만명 이상 사망했다.
키르키스스탄은 구 소련붕괴이후로 1991년에 키르키스스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키르키스스탄 [1]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1991년 첫 당선이후 1995년,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였다. 장기집권이 독재로 흐르면서 2002년의 반정부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였으며 2003년에는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였다. 이로 인한 국민과 야당의 불신은 더욱 확산됐다.
2005년 2월 27일과 3월 13일 두 번에 걸쳐서 행해진 키르기스스탄의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부정과 개표조작 의혹을 받았다. 아스카르 아카예프의 자녀가 당선되었고 여당은 절대 다수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이에 반발한 국민들의 시위 및 데모가 지역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키르키스스탄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대응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결국 수만명의 군중들이 수도인 [3]비슈케크 거리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시위대는 정부 청사를 장악했다. 국민들의 퇴진 요구를 견디지 못한 [1]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3월 24일 카자흐스탄을 거쳐 러시아 모스크바로 도피하였다. 4월 5일 [1]아스카르 아카예프는 모스코바에서 정식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새로운 대통령선거는 2005년 7월에 실시되어 [2]쿠르만베크 바키예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시민이 직접 독재 권력을 몰아낸 민주 혁명으로 튤립 혁명 또는 레몬 혁명, 제1차 키르기스스탄 혁명으로 불린다.
이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2]쿠르만베크 바키예프 대통령도 비민주적 통치와 부정부패로 2010년에 발생한 제2차 키르기스스탄 혁명으로 물러났다.
[1] 아스카르 아카예프(Askar Akayev, 1944년~ ) : 1991년 소련 붕괴로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2005년)
[2] 쿠르만베크 바키예프(Kurmanbek Bakiyev, 1949년~ ) :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직무 대항(2005년 5월 25일~2005년 8월 14일). 제2대 대통령(2005년 3월 25일~2010년 4월 15일)
[3] 비슈케크(Bishkek) : 키르키스스탄의 수도
키르키스스탄 [1]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1991년 첫 당선이후 1995년,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였다. 장기집권이 독재로 흐르면서 2002년의 반정부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였으며 2003년에는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였다. 이로 인한 국민과 야당의 불신은 더욱 확산됐다.
2005년 2월 27일과 3월 13일 두 번에 걸쳐서 행해진 키르기스스탄의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부정과 개표조작 의혹을 받았다. 아스카르 아카예프의 자녀가 당선되었고 여당은 절대 다수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이에 반발한 국민들의 시위 및 데모가 지역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키르키스스탄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대응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결국 수만명의 군중들이 수도인 [3]비슈케크 거리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시위대는 정부 청사를 장악했다. 국민들의 퇴진 요구를 견디지 못한 [1]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3월 24일 카자흐스탄을 거쳐 러시아 모스크바로 도피하였다. 4월 5일 [1]아스카르 아카예프는 모스코바에서 정식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새로운 대통령선거는 2005년 7월에 실시되어 [2]쿠르만베크 바키예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시민이 직접 독재 권력을 몰아낸 민주 혁명으로 튤립 혁명 또는 레몬 혁명, 제1차 키르기스스탄 혁명으로 불린다.
이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2]쿠르만베크 바키예프 대통령도 비민주적 통치와 부정부패로 2010년에 발생한 제2차 키르기스스탄 혁명으로 물러났다.
[1] 아스카르 아카예프(Askar Akayev, 1944년~ ) : 1991년 소련 붕괴로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2005년)
[2] 쿠르만베크 바키예프(Kurmanbek Bakiyev, 1949년~ ) :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직무 대항(2005년 5월 25일~2005년 8월 14일). 제2대 대통령(2005년 3월 25일~2010년 4월 15일)
[3] 비슈케크(Bishkek) : 키르키스스탄의 수도
애플의 공동 창립자이자 당시 CEO였던 [1]스티브 잡스가 2007년 1월 9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맥월드 2007에서 발표하였고, 제품은 2007년 6월 29일 판매가 시작되었다. 그 뒤로 애플은 해마다 새로운 아이폰 모델과 iOS 업데이트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출시하고 있다.
2007년 6월 29일부터 미국 AT&T를 통해 판매가 시작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등 미국 전역의 도심가는 애플 매장을 찾은 사람들로 발디딜틈이 없었다. 수백미터 넘게 줄 선 사람들 중 하루 이상을 꼬박 밤새운 이들도 많았다.
한국에서는 통신망이 호환되지 않는 문제로 인해 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KT에 의해 2009년 11월 28일 첫 도입되었다.
[1] 스티븐 폴 잡스(Steven Paul Jobs, 1955년~2011년) : 미국의 기업인이었으며 애플의 전 CEO이자 공동 창립자. 2011년 10월 5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2007년 6월 29일부터 미국 AT&T를 통해 판매가 시작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등 미국 전역의 도심가는 애플 매장을 찾은 사람들로 발디딜틈이 없었다. 수백미터 넘게 줄 선 사람들 중 하루 이상을 꼬박 밤새운 이들도 많았다.
한국에서는 통신망이 호환되지 않는 문제로 인해 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KT에 의해 2009년 11월 28일 첫 도입되었다.
[1] 스티븐 폴 잡스(Steven Paul Jobs, 1955년~2011년) : 미국의 기업인이었으며 애플의 전 CEO이자 공동 창립자. 2011년 10월 5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2007년 10월 2일부터 10월 4일까지 평양에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간에 진행된 정상회담으로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이다. 10.4 남북정상회담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7년 10월 4일 오후 1시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 정상이 공동으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 내용]
1.남과 북은 6·15 남북 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해 나간다.
2.남과 북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남북관계를 상호존중과 신뢰 관계로 확고히 전환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남과 북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하였다.
4.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5.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 경제협력사업을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6.남과 북은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빛내기 위해 역사, 언어, 교육, 과학기술, 문화예술, 체육 등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7.남과 북은 인도주의 협력사업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8.남과 북은 국제무대에서 민족의 이익과 해외 동포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하였다.
2007년 10월 4일 오후 1시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 정상이 공동으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 내용]
1.남과 북은 6·15 남북 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해 나간다.
2.남과 북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남북관계를 상호존중과 신뢰 관계로 확고히 전환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남과 북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하였다.
4.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5.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 경제협력사업을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6.남과 북은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빛내기 위해 역사, 언어, 교육, 과학기술, 문화예술, 체육 등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7.남과 북은 인도주의 협력사업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8.남과 북은 국제무대에서 민족의 이익과 해외 동포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하였다.
서울 숭례문 방화사건은 2008년 2월 10일, 대한민국의 국보인 숭례문에 문화재 방화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국의 대표적 목조 건축물이자 조선의 상징적 문화유산이었던 숭례문이 대부분 전소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방화의 범인으로 밝혀진 채모 씨는 택지개발에 따른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고 시너가 담긴 1.5리터 페트병 3통을 이용해 불을 지른 것으로 조사되었다.
당시 화재는 오후 8시 40분경 발생하였으며 소방당국이 진화 작업을 벌였으나 목조건물의 구조적 특성과 강풍의 영향으로 불길이 빠르게 번져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0시 40분경에 2층 누각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어 화재 5시간 만인 1시 54분 석축을 제외하고 1,2층이 거의 전소되었다.
숭례문은 이후 복원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문화재청 주관으로 5년여의 복구 과정을 거쳐 2013년 5월 4일 일반시민에 공개되었다.
이 사건은 TV생중계로 지켜본 대한민국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문화재 관리 체계 전반에 대한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특히 방재 설비의 미비, 감시 체계의 허술함, 문화재 주변의 도시 개발과 안전관리의 부조화 등이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숭례문 방화사건은 단순한 방화 사건을 넘어 국가 문화유산 보호 의식의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이었다.
방화의 범인으로 밝혀진 채모 씨는 택지개발에 따른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고 시너가 담긴 1.5리터 페트병 3통을 이용해 불을 지른 것으로 조사되었다.
당시 화재는 오후 8시 40분경 발생하였으며 소방당국이 진화 작업을 벌였으나 목조건물의 구조적 특성과 강풍의 영향으로 불길이 빠르게 번져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0시 40분경에 2층 누각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어 화재 5시간 만인 1시 54분 석축을 제외하고 1,2층이 거의 전소되었다.
숭례문은 이후 복원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문화재청 주관으로 5년여의 복구 과정을 거쳐 2013년 5월 4일 일반시민에 공개되었다.
이 사건은 TV생중계로 지켜본 대한민국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문화재 관리 체계 전반에 대한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특히 방재 설비의 미비, 감시 체계의 허술함, 문화재 주변의 도시 개발과 안전관리의 부조화 등이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숭례문 방화사건은 단순한 방화 사건을 넘어 국가 문화유산 보호 의식의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이었다.
조지아는 2003년 장미혁명으로 만연한 부패와 족벌주의의 세바르드나제 정권을 무너뜨리고 2004년 1월 4일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1] 사카슈빌리가 압승하여 30대의 젊은 나이로 조지아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조지아는 장미혁명 이후에도 정치불안이 이어졌고 2006년 [2] 남오세티야 자치주의 독립찬반투표에서 독립찬성결과로 끝나면서 잠재되어 있던 긴장이 고조된다. 러시아군이 남오세티야에 주둔하고 있었다.
조지아 입장에서는 국제법상 조지아의 영토인 [2] 남오세티야를 러시아가 무단 점거한 침략이자 내정간섭이라 주장하였다. 하지만 남오세티야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3자의 위치의 국가인 러시아군이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주둔하는 것은 흔한 현상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2007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며 [1] 사카슈빌리는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2008년 1월 재선에 성공했지만 정치적 돌파구가 필요하였다. 강한 친미, 친유럽주의 성향의 사카슈빌리는 조지아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지아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가맹 합의를 이끌어내고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4] 베이징 올림픽 개최 하루전인 2008년 8월 7일 조지아는 미국을 믿고 남오세티야를 침공하였다. 이때 평화유지군으로 있던 러시아군 18명이 사망하였다.
8월 8일 러시아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반격을 시작했고 본격 충돌이 시작되었다.
8월11~12일에 러시아군이 츠한발리 지역을 벗어나 총 공세를 개시하면서 조지아군의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조지아는 러시아에게 사실상 항복했으나 러시아는 공세를 멈추지 않고 수도인 [6] 트빌리시 앞까지 진격하여 조지아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결국 미국이 조지아에 개입할 것을 선언하였다. 일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한 러시아는 유럽연합 의장국인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긴급중재한 평화교섭에 합의하였다. 러시아는 군대를 조지에서 철수시키며 종전을 선언하였다.
조지아는 참패의 결과로 [2] 남오세티야와 [5] 압하지야는 실질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러시아-조지아 전쟁(Russo-Georgian War)으로도 불린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제43대 조지부시(George W. Bush)였으며 러시아는 제2대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이었다.
[1]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1967~현존) : 조지아의 제3대 대통령(임기 : 2004년~2013년, 2008년 재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정치가(우크라이나 국적 부여받자 이중 국적을 제한하는 조지아법에 의해 조지아국적 박탈당함)
[2] 남오세티야(South Ossetia) 또는 츠힌발리(Tskhinvali) : 조지아에 위치한 사실상의 독립상태로 통치되는 지역이자 미승인 국가로 수도는 츠힌발리이다. 정식 국호는 남오세티야 공화국-알라니야국(Republic of South Ossetia–The State of Alania)
[3] 츠힌발리(Tskhinvali) : 조지아의 중부에 위치하며 남오세티야의 수도.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Tbilisi)로부터는 약 100km 떨어져 있다
[4] 2008 베이징 올림픽 개최기간 : 2008년 8월 8일 ~ 2008년 8월 24일
[5] 압하지야(Abkhazia) : 흑해의 남쪽 연안과 캅카스의 남서쪽에 위치한 미승인 국가로 압하지야인이 주로 거주한다. 수도는 수후미(Sukhumi)이며 조지아의 영토내에 있는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6] 트빌리시(Tbilisi) : 조지아의 수도
조지아는 장미혁명 이후에도 정치불안이 이어졌고 2006년 [2] 남오세티야 자치주의 독립찬반투표에서 독립찬성결과로 끝나면서 잠재되어 있던 긴장이 고조된다. 러시아군이 남오세티야에 주둔하고 있었다.
조지아 입장에서는 국제법상 조지아의 영토인 [2] 남오세티야를 러시아가 무단 점거한 침략이자 내정간섭이라 주장하였다. 하지만 남오세티야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3자의 위치의 국가인 러시아군이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주둔하는 것은 흔한 현상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2007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며 [1] 사카슈빌리는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2008년 1월 재선에 성공했지만 정치적 돌파구가 필요하였다. 강한 친미, 친유럽주의 성향의 사카슈빌리는 조지아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지아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가맹 합의를 이끌어내고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4] 베이징 올림픽 개최 하루전인 2008년 8월 7일 조지아는 미국을 믿고 남오세티야를 침공하였다. 이때 평화유지군으로 있던 러시아군 18명이 사망하였다.
8월 8일 러시아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반격을 시작했고 본격 충돌이 시작되었다.
8월11~12일에 러시아군이 츠한발리 지역을 벗어나 총 공세를 개시하면서 조지아군의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조지아는 러시아에게 사실상 항복했으나 러시아는 공세를 멈추지 않고 수도인 [6] 트빌리시 앞까지 진격하여 조지아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결국 미국이 조지아에 개입할 것을 선언하였다. 일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한 러시아는 유럽연합 의장국인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긴급중재한 평화교섭에 합의하였다. 러시아는 군대를 조지에서 철수시키며 종전을 선언하였다.
조지아는 참패의 결과로 [2] 남오세티야와 [5] 압하지야는 실질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러시아-조지아 전쟁(Russo-Georgian War)으로도 불린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제43대 조지부시(George W. Bush)였으며 러시아는 제2대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이었다.
[1]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1967~현존) : 조지아의 제3대 대통령(임기 : 2004년~2013년, 2008년 재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정치가(우크라이나 국적 부여받자 이중 국적을 제한하는 조지아법에 의해 조지아국적 박탈당함)
[2] 남오세티야(South Ossetia) 또는 츠힌발리(Tskhinvali) : 조지아에 위치한 사실상의 독립상태로 통치되는 지역이자 미승인 국가로 수도는 츠힌발리이다. 정식 국호는 남오세티야 공화국-알라니야국(Republic of South Ossetia–The State of Alania)
[3] 츠힌발리(Tskhinvali) : 조지아의 중부에 위치하며 남오세티야의 수도.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Tbilisi)로부터는 약 100km 떨어져 있다
[4] 2008 베이징 올림픽 개최기간 : 2008년 8월 8일 ~ 2008년 8월 24일
[5] 압하지야(Abkhazia) : 흑해의 남쪽 연안과 캅카스의 남서쪽에 위치한 미승인 국가로 압하지야인이 주로 거주한다. 수도는 수후미(Sukhumi)이며 조지아의 영토내에 있는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6] 트빌리시(Tbilisi) : 조지아의 수도
1850년에 설립된 리먼 브라더스는 미국의 대표적 투자은행으로 초기에는 면화 무역과 산업금융에 주력하다가 20세기 후반 이후 투자은행, 증권, 부동산, 파생상품 등 다양한 금융 부문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저금리 정책과 부동산택시장 호황에 편승해 [1]서브프라임 모기지관련 상품에 대규모로 투자하였다. 이러한 투자는 단기적으로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지만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채무불이행이 급증하면서 손실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는 6000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채 규모가 이를 상회하면서 지급 불능 상태에 이르렀다. 미국 정부는 민간 시장의 자율 정리에 맡긴다는 방침을 고수하며 구제금융을 지원하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리먼 브라더스는 2008년 9월 15일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을 선언하였다.
이 사건은 전 세계 금융 시스템에 연쇄 충격을 일으켰다. 글로벌 금융기관들은 신용 경색에 빠졌고, 주식시장은 급락했으며, 실물경제 전반으로 불안이 확산되었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은 금융 규제의 취약성과 복잡한 파생상품 시장의 위험성을 드러내었다.
당시 투자은행 랭킹에서 [2]골드만삭스, [3]모건스탠리, [4]메릴린치와 4대 업체로 꼽혔던 글로벌 투자은행이었던 만큼 그 여파는 컸다. 이로 인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임직원도 2만5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은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규모 파산으로 등재되었다.
[1]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 신용등급이 낮은 차입자에게 높은 이자율로 제공된 주택담보대출
[2]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다국적 투자은행
[3] 모건 스탠리(Morgan Stanley) :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다국적 투자은행
[4] 메릴린치(Merrill Lynch) :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최대의 증권 회사. 2008년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인수되었으며 2019년에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증권'으로 명칭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저금리 정책과 부동산택시장 호황에 편승해 [1]서브프라임 모기지관련 상품에 대규모로 투자하였다. 이러한 투자는 단기적으로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지만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채무불이행이 급증하면서 손실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는 6000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채 규모가 이를 상회하면서 지급 불능 상태에 이르렀다. 미국 정부는 민간 시장의 자율 정리에 맡긴다는 방침을 고수하며 구제금융을 지원하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리먼 브라더스는 2008년 9월 15일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을 선언하였다.
이 사건은 전 세계 금융 시스템에 연쇄 충격을 일으켰다. 글로벌 금융기관들은 신용 경색에 빠졌고, 주식시장은 급락했으며, 실물경제 전반으로 불안이 확산되었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은 금융 규제의 취약성과 복잡한 파생상품 시장의 위험성을 드러내었다.
당시 투자은행 랭킹에서 [2]골드만삭스, [3]모건스탠리, [4]메릴린치와 4대 업체로 꼽혔던 글로벌 투자은행이었던 만큼 그 여파는 컸다. 이로 인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임직원도 2만5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은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규모 파산으로 등재되었다.
[1]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 신용등급이 낮은 차입자에게 높은 이자율로 제공된 주택담보대출
[2]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다국적 투자은행
[3] 모건 스탠리(Morgan Stanley) :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다국적 투자은행
[4] 메릴린치(Merrill Lynch) :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최대의 증권 회사. 2008년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인수되었으며 2019년에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증권'으로 명칭으로 통합되었다
인도 뭄바이 테러는 2008년 11월 26일부터 29일까지 인도 최대 도시인 [1]뭄바이에서 대규모 무장 테러가 발생했다.
이 테러는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무장단체 [2]라쉬카르-에-타이바 소속 무장대원 10명이 계획적으로 실행한 동시다발적 테러와 인질극으로 [3]타지마할 팰리스 호텔, [4]나리만 하우스, [5]차트라파티 시바지 터미널, [6]레오폴드 카페 등 여러 주요 장소에서 벌어졌다. 이 테러는 인도 역사상 최악의 테러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뭄바이 테러는 인도-파키스탄 간 갈등과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활동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1]뭄바이를 경제적, 상징적 중심지로 인도에 대한 정치적·종교적 메시지로 해석된다.
11월 26일 테러범 10명은 해상으로 [1]뭄바이에 밀입국하여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도시 곳곳에서 동시다발적 공격을 시작했다.
[5]차트라파티 시바지 터미널에서 무차별 총격으로 수십 명이 희생되었다. 관광객이 많은 [6]레오폴드 카페에서 총격이 발생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테러범들은 [3]타지마할 팰리스 호텔과 오베로이, 트라이던트 호텔을 점거하고, 외국인 관광객과 인도 시민들을 인질로 삼았다. 60시간에 걸친 대치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호텔 일부가 불에 탔다.
유대인 센터인 [4]나리만 하우스에서도 무장대원들이 인질을 잡고 교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인질과 구출 작전을 벌이던 경찰이 사망했다.
이 테러로 인하여 사망자는 175명(테러범 9명 포함), 부상자는 330여 명으로 피해 규모는 호텔과 공공시설 파손으로 관광 산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테러 직후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국제 사회는 테러와의 전쟁과 국경 간 테러리즘 문제를 강력히 비난했다.
유일한 테러범 생존자인 아즈말 카사브(Ajmal Kasab)는 체포되어 2012년에 처형되었다.
뭄바이 테러는 인도의 안보 정책에 변화를 주었고, 대 테러 대응 시스템의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국제적으로 국경을 초월한 테러리즘에 대한 위협을 다시 일깨우며 여러 나라에서 보안 조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 뭄바이(Mumbai) : 인도 서부 아라비아해 연안에 접한 항구 도시. 인도의 경제·금융·문화 중심지이자 최대 도시로, 영화산업과 항만 도시로 세계적 중요성을 지닌 대도시
[2] 라쉬카르-에-타이바(Lashkar-e-Taiba) :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로 인도 카슈미르 분쟁과 대 인도 테러 활동에 관여해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3] 타지마할 팰리스 호텔(The Taj Mahal Palace, Mumbai) : 인도 뭄바이의 고급 호텔. 호텔 건물은 100년이 넘었고, 565개의 객실이 있다. 1903년에 오픈했다
[4] 나리만 하우스(Nariman House) : 뭄바이에 위치한 유대인 문화센터 및 종교 시설
[5] 차트라파티 시바지 터미널(CST, Chhatrapati Shivaji Terminal) : 인도 뭄바이의 주요 역사적 기차역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6] 레오폴드 카페(Leopold Cafe & Bar) : 인도 뭄바이에 있는 식당이자 카페
[7] 카슈미르(Kashmir) : 인도-파키스탄 국경과 인도-중국 국경 지역.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유권을 두고 벌이는 장기적 갈등으로, 종교적·민족적 대립과 국경 분쟁이 얽힌 남아시아의 핵심 분쟁지역
이 테러는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무장단체 [2]라쉬카르-에-타이바 소속 무장대원 10명이 계획적으로 실행한 동시다발적 테러와 인질극으로 [3]타지마할 팰리스 호텔, [4]나리만 하우스, [5]차트라파티 시바지 터미널, [6]레오폴드 카페 등 여러 주요 장소에서 벌어졌다. 이 테러는 인도 역사상 최악의 테러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뭄바이 테러는 인도-파키스탄 간 갈등과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활동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1]뭄바이를 경제적, 상징적 중심지로 인도에 대한 정치적·종교적 메시지로 해석된다.
11월 26일 테러범 10명은 해상으로 [1]뭄바이에 밀입국하여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도시 곳곳에서 동시다발적 공격을 시작했다.
[5]차트라파티 시바지 터미널에서 무차별 총격으로 수십 명이 희생되었다. 관광객이 많은 [6]레오폴드 카페에서 총격이 발생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테러범들은 [3]타지마할 팰리스 호텔과 오베로이, 트라이던트 호텔을 점거하고, 외국인 관광객과 인도 시민들을 인질로 삼았다. 60시간에 걸친 대치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호텔 일부가 불에 탔다.
유대인 센터인 [4]나리만 하우스에서도 무장대원들이 인질을 잡고 교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인질과 구출 작전을 벌이던 경찰이 사망했다.
이 테러로 인하여 사망자는 175명(테러범 9명 포함), 부상자는 330여 명으로 피해 규모는 호텔과 공공시설 파손으로 관광 산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테러 직후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국제 사회는 테러와의 전쟁과 국경 간 테러리즘 문제를 강력히 비난했다.
유일한 테러범 생존자인 아즈말 카사브(Ajmal Kasab)는 체포되어 2012년에 처형되었다.
뭄바이 테러는 인도의 안보 정책에 변화를 주었고, 대 테러 대응 시스템의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국제적으로 국경을 초월한 테러리즘에 대한 위협을 다시 일깨우며 여러 나라에서 보안 조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 뭄바이(Mumbai) : 인도 서부 아라비아해 연안에 접한 항구 도시. 인도의 경제·금융·문화 중심지이자 최대 도시로, 영화산업과 항만 도시로 세계적 중요성을 지닌 대도시
[2] 라쉬카르-에-타이바(Lashkar-e-Taiba) :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로 인도 카슈미르 분쟁과 대 인도 테러 활동에 관여해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3] 타지마할 팰리스 호텔(The Taj Mahal Palace, Mumbai) : 인도 뭄바이의 고급 호텔. 호텔 건물은 100년이 넘었고, 565개의 객실이 있다. 1903년에 오픈했다
[4] 나리만 하우스(Nariman House) : 뭄바이에 위치한 유대인 문화센터 및 종교 시설
[5] 차트라파티 시바지 터미널(CST, Chhatrapati Shivaji Terminal) : 인도 뭄바이의 주요 역사적 기차역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6] 레오폴드 카페(Leopold Cafe & Bar) : 인도 뭄바이에 있는 식당이자 카페
[7] 카슈미르(Kashmir) : 인도-파키스탄 국경과 인도-중국 국경 지역.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유권을 두고 벌이는 장기적 갈등으로, 종교적·민족적 대립과 국경 분쟁이 얽힌 남아시아의 핵심 분쟁지역
팔레스타인은 가자지구(Gaza)와 서안지구(West Bank)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하마스가 통치하고 있다. 반면 서안지구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탈레스타인 자치정부인 파타정권이 통치하고 있다.
가자 전쟁은 파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에서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로켓포 공격을 하자 이스라엘은 대대적인 가자지구를 공습하여 시작되었다. 1차 가자전쟁이라고도 한다.
전황은 이스라엘의 우세로 가자지구를 초토화 시킨뒤 철수하였다. 이 전쟁은 2009년 1월 18일 양측이 휴전을 선언하면서 끝나게 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13명 사망, 523명 부상자, 가자지구는 1,380명 사망, 5,380명이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 파타(PA,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에서 활동
*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 요르단강 서안 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 가자 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가자 전쟁은 파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에서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로켓포 공격을 하자 이스라엘은 대대적인 가자지구를 공습하여 시작되었다. 1차 가자전쟁이라고도 한다.
전황은 이스라엘의 우세로 가자지구를 초토화 시킨뒤 철수하였다. 이 전쟁은 2009년 1월 18일 양측이 휴전을 선언하면서 끝나게 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13명 사망, 523명 부상자, 가자지구는 1,380명 사망, 5,380명이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 파타(PA,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에서 활동
*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 요르단강 서안 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 가자 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아이티 지진은 현지시각 2010년 1월 12일 오후 4시 53분 10초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에서 발생한 지진이다.
아이티 지역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지각판이 만나는 경계 지점이다. 많은 학자들은 북쪽의 북아메리카판과 남쪽의 카리브판이 수평으로 엇갈리면서 서로 충돌하여 발생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인구가 밀집한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고작 25km 떨어진 지역의 지하 13km 지점에서 리히터 규모 7.0의 강진 발생했기 때문에 피해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지진으로 약 30만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전체인구 1/3정도인 3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또한 아이티 대통령궁, 국회의사당, 아이티 대성당등 포르토프랭스의 주요 건물들뿐만 아니라 교도소, 공항, 병원과 같은 시설도 붕괴되었거나 손상됐다.
교도소가 무너져 재소자들(4천 5백여명)이 탈출해 방화, 약탈까지 벌어지는 상황이 연출되었으며 부상자는 넘쳐나는데 병원의 붕괴로 의료기반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였고 아이티 정부의 의료보건국까지 무너져 아이티의 보건 체계 60% 이상 파괴되어 국가적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었고 무능력해진 정부는 결국 홰외국들의 원조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성금과 구호 물품을 지원하였지만 피해가 워낙 컸고 여진이 끊임없이 발생하여 구조에 난항을 겪었다. 11년이 지난 2021년에도 무너진 상태 그대로이며 아이티 주민들의 삶은 극심한 경제난과 정치적 긴장이 심화되고 있다고 한다.
* 리히터 규모(Richter magnitude scale) : 1935년 찰스 리히터(Charles Richter)가 만든 지진 규모. 지진에 의해 리히터 지진계에 기록된 진동수치이다. 지표상 한 지점에서 나타나는 진동의 세기에 관한 척도로 측정된 지진파의 최대 진폭으로 방출된 에너지의 양을 측정할 수 있다(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포르토프랭스(프랑스어: Port-au-Prince) : 인구 약 84만 6,200명의 아이티의 수도
* 카리브판(Caribbean Plate) : 카리브해 및 중앙아메리카의 일부, 남아메리카 대륙 북부의 일부 지각 및 맨틀 위쪽의 암권을 형성하는 대륙판
* 북아메리카판(North American Plate) : 아이슬란드 서부, 그린란드, 북아메리카 대륙 및 동시베리아에 걸쳐 존재하는 지각 및 맨틀 위쪽의 암권을 형성하는 대륙판
아이티 지역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지각판이 만나는 경계 지점이다. 많은 학자들은 북쪽의 북아메리카판과 남쪽의 카리브판이 수평으로 엇갈리면서 서로 충돌하여 발생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인구가 밀집한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고작 25km 떨어진 지역의 지하 13km 지점에서 리히터 규모 7.0의 강진 발생했기 때문에 피해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지진으로 약 30만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전체인구 1/3정도인 3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또한 아이티 대통령궁, 국회의사당, 아이티 대성당등 포르토프랭스의 주요 건물들뿐만 아니라 교도소, 공항, 병원과 같은 시설도 붕괴되었거나 손상됐다.
교도소가 무너져 재소자들(4천 5백여명)이 탈출해 방화, 약탈까지 벌어지는 상황이 연출되었으며 부상자는 넘쳐나는데 병원의 붕괴로 의료기반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였고 아이티 정부의 의료보건국까지 무너져 아이티의 보건 체계 60% 이상 파괴되어 국가적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었고 무능력해진 정부는 결국 홰외국들의 원조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성금과 구호 물품을 지원하였지만 피해가 워낙 컸고 여진이 끊임없이 발생하여 구조에 난항을 겪었다. 11년이 지난 2021년에도 무너진 상태 그대로이며 아이티 주민들의 삶은 극심한 경제난과 정치적 긴장이 심화되고 있다고 한다.
* 리히터 규모(Richter magnitude scale) : 1935년 찰스 리히터(Charles Richter)가 만든 지진 규모. 지진에 의해 리히터 지진계에 기록된 진동수치이다. 지표상 한 지점에서 나타나는 진동의 세기에 관한 척도로 측정된 지진파의 최대 진폭으로 방출된 에너지의 양을 측정할 수 있다(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포르토프랭스(프랑스어: Port-au-Prince) : 인구 약 84만 6,200명의 아이티의 수도
* 카리브판(Caribbean Plate) : 카리브해 및 중앙아메리카의 일부, 남아메리카 대륙 북부의 일부 지각 및 맨틀 위쪽의 암권을 형성하는 대륙판
* 북아메리카판(North American Plate) : 아이슬란드 서부, 그린란드, 북아메리카 대륙 및 동시베리아에 걸쳐 존재하는 지각 및 맨틀 위쪽의 암권을 형성하는 대륙판
2010년 3월 26일 21시 22분, 대한민국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천안함(PCC-772)이 훈련 도중 침몰한 사건이다.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에 따라 천안함이 조선인민군 해군 잠수정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 초계함 : 연안 경비 및 초계임무를 수행하며 해상 상태가 비교적 평온한 상태에서만 작전할 수 있는 배수량 1000톤 내외의 군함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에 따라 천안함이 조선인민군 해군 잠수정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 초계함 : 연안 경비 및 초계임무를 수행하며 해상 상태가 비교적 평온한 상태에서만 작전할 수 있는 배수량 1000톤 내외의 군함
2010년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는 2010년 4월 10일 폴란드의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등이 탑승한 폴란드 공군 소속 항공기 투폴레프 Tu-154M가 러시아 스몰렌스크 인근에서 추락하여 탑승자(승객 87명, 승무원 9명)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카친스키 대통령은 카틴학살 70주년 추모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폴란드 바르샤바를 떠나 러시아 스몰렌스크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비행기에는 대통령외에 영부인과 비서실장, 폴란드 중앙은행 총재, 폴란드군 총참모장 및 각군참모총장, 외무차관, 야당 대선 후보 2명등 고위 관계자 다수가 탑승했다.
사고기는 스몰렌스크 항공 기지에 진입하던 도중에 기지로 부터 1.5km 떨어진 지점에서 추락했다. 이 추락사고는 러시아의 정치적 음모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기상악화로 관제사의 착륙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강제착륙을 시도하다가 사고가 난 것으로 2016년 4월에 사고기의 블랙박스가 공개되면서 음모론 제기는 줄어들었다.
이 사고로 폴란드 대통령과 영부인을 포함하여 수뇌부 전부가 사망하였다. 공교롭게도 스몰렌스크의 카틴 숲에서 학살당한 폴란드인들도 폴란드의 고급 장교와 부사관, 지식인, 기술자 등 폴란드를 이끄는 엘리트층이었다. 방법과 시기, 규모가 다르지만 카틴의 비극이 70년 후에 그대로 재연되었다.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는 폴란드 전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으며 아직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매년 4월 10일은 폴란드 전국이 비탄의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 레흐 알렉산데르 카친스키(Lech Aleksander Kaczynski, 1949년~2010년) : 폴란드 4대 대통령. 재위 : 2005년~2010년
* Tu-154 : 소련의 항공기 제작사 투폴레프에서 만든 3발 중단거리 제트추진 협동체 여객기로 보잉 727과 동급인 항공기. Tu-154M은 Tu-154의 업그레이드 기종
* 스몰렌스크(Smolensk) :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서남쪽으로 362km 정도 떨어진 도시로 인접국가는 벨로루시이다
* 카틴학살(Katyn) :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인 1940년 4월 3일부터 약 두 달간 소련 경찰기관인 NKVD가 스몰렌스크 근방 카틴 숲에서 폴란드인을 대량 학살하고 암매장한 사건
카친스키 대통령은 카틴학살 70주년 추모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폴란드 바르샤바를 떠나 러시아 스몰렌스크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비행기에는 대통령외에 영부인과 비서실장, 폴란드 중앙은행 총재, 폴란드군 총참모장 및 각군참모총장, 외무차관, 야당 대선 후보 2명등 고위 관계자 다수가 탑승했다.
사고기는 스몰렌스크 항공 기지에 진입하던 도중에 기지로 부터 1.5km 떨어진 지점에서 추락했다. 이 추락사고는 러시아의 정치적 음모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기상악화로 관제사의 착륙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강제착륙을 시도하다가 사고가 난 것으로 2016년 4월에 사고기의 블랙박스가 공개되면서 음모론 제기는 줄어들었다.
이 사고로 폴란드 대통령과 영부인을 포함하여 수뇌부 전부가 사망하였다. 공교롭게도 스몰렌스크의 카틴 숲에서 학살당한 폴란드인들도 폴란드의 고급 장교와 부사관, 지식인, 기술자 등 폴란드를 이끄는 엘리트층이었다. 방법과 시기, 규모가 다르지만 카틴의 비극이 70년 후에 그대로 재연되었다.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는 폴란드 전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으며 아직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매년 4월 10일은 폴란드 전국이 비탄의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 레흐 알렉산데르 카친스키(Lech Aleksander Kaczynski, 1949년~2010년) : 폴란드 4대 대통령. 재위 : 2005년~2010년
* Tu-154 : 소련의 항공기 제작사 투폴레프에서 만든 3발 중단거리 제트추진 협동체 여객기로 보잉 727과 동급인 항공기. Tu-154M은 Tu-154의 업그레이드 기종
* 스몰렌스크(Smolensk) :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서남쪽으로 362km 정도 떨어진 도시로 인접국가는 벨로루시이다
* 카틴학살(Katyn) :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인 1940년 4월 3일부터 약 두 달간 소련 경찰기관인 NKVD가 스몰렌스크 근방 카틴 숲에서 폴란드인을 대량 학살하고 암매장한 사건
2011년 3월 11일 14시 46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일본 후쿠시마현 오쿠마마치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한 사고이며, 구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동급인 7등급 사고이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는 제1발전소와 제2발전소 두 곳에 있는데, 사고가 난 것은 제1발전소이며 누출된 방사능 물질로 인해 제1원자력 발전소 인근 지대의 방사능 오염이 심각한 상황이다.
체르노빌은 1기의 원자로가 폭발하였지만 후쿠시마는 손상된 원자로 4개중 3개가 폭발하였다. 다만, 전체적인 총 방사성 물질의 유출량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 비해 적다고 한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는 제1발전소와 제2발전소 두 곳에 있는데, 사고가 난 것은 제1발전소이며 누출된 방사능 물질로 인해 제1원자력 발전소 인근 지대의 방사능 오염이 심각한 상황이다.
체르노빌은 1기의 원자로가 폭발하였지만 후쿠시마는 손상된 원자로 4개중 3개가 폭발하였다. 다만, 전체적인 총 방사성 물질의 유출량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 비해 적다고 한다.
시리아 내전은 2011년 [1]아랍의 봄에서 시작된 시위가 [2]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강경 진압으로 격화되면서 발생했다.
민주화 요구와 경제적 불만을 표출하던 시위대는 정부의 폭력적 대응으로 무장 반군으로 변모했고, 내전으로 확산되었다.
시리아 정부군, 반군,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쿠르드족, 그리고 주변국들과 국제적인 강대국들이 얽혀있는 복잡한 갈등을 띠었던 내전이다.
시리아 정부군은 러시아와 이란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며, 반군은 미국이 지원하였다.
2024년 12월 8일, 수도 다마스쿠스가 반군에게 함락되자 [2]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알아사드 대통령은 53년 부자세습 독재 철권 통치가 막을 내렸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중인 러시아와 정권을 보호하고 방어하느라 효과적으로 대응할 능력이 없어진 이란이 여력이 없어지면서 시리아 정권 몰락을 초래했다
시리아 내전은 50만명 이상 사망자와 1,300만 명 이상 난민 사태의 결과를 낳았다
[1] 아랍의 봄 : 아랍의 봄은 2010년부터 시작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반정부 시위와 혁명 운동이다. 알제리, 바레인, 이집트, 이란, 요르단, 리비아, 모로코, 튀니지, 예멘 등 중동(서아시아)과 북아프리카 일부 지역 모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독재와 부패에 대한 반발로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으며 현재가지도 여파가 미치고 있다. 이로 인해 몇몇 국가에서는 정권이 교체되었으나, 정치적 불안과 내전이 이어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민주화의 성과는 국가마다 크게 달랐다.
[2] 바샤르 알아사드(Bashar al-Assad, 1965년 9월 11일 ~ ) : 시리아의 제3대 대통령. 재임기간(2000년 7월 17일 ~ 2024년 12월 8일), 하페즈 알아사드 제2대 대통령의 아들이다
민주화 요구와 경제적 불만을 표출하던 시위대는 정부의 폭력적 대응으로 무장 반군으로 변모했고, 내전으로 확산되었다.
시리아 정부군, 반군,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쿠르드족, 그리고 주변국들과 국제적인 강대국들이 얽혀있는 복잡한 갈등을 띠었던 내전이다.
시리아 정부군은 러시아와 이란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며, 반군은 미국이 지원하였다.
2024년 12월 8일, 수도 다마스쿠스가 반군에게 함락되자 [2]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알아사드 대통령은 53년 부자세습 독재 철권 통치가 막을 내렸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중인 러시아와 정권을 보호하고 방어하느라 효과적으로 대응할 능력이 없어진 이란이 여력이 없어지면서 시리아 정권 몰락을 초래했다
시리아 내전은 50만명 이상 사망자와 1,300만 명 이상 난민 사태의 결과를 낳았다
[1] 아랍의 봄 : 아랍의 봄은 2010년부터 시작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반정부 시위와 혁명 운동이다. 알제리, 바레인, 이집트, 이란, 요르단, 리비아, 모로코, 튀니지, 예멘 등 중동(서아시아)과 북아프리카 일부 지역 모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독재와 부패에 대한 반발로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으며 현재가지도 여파가 미치고 있다. 이로 인해 몇몇 국가에서는 정권이 교체되었으나, 정치적 불안과 내전이 이어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민주화의 성과는 국가마다 크게 달랐다.
[2] 바샤르 알아사드(Bashar al-Assad, 1965년 9월 11일 ~ ) : 시리아의 제3대 대통령. 재임기간(2000년 7월 17일 ~ 2024년 12월 8일), 하페즈 알아사드 제2대 대통령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