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아프카니스탄 전쟁(War in Afghanistan)
미국
아프가니스탄
사건기간 : 2001년 10월 7일~2021년 8월 31일, 조회수 : 587, 등록일 : 2021-08-31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이 9.11 테러의 주범인 [2]알 카에다와 [1]오사마 빈 라덴을 지원하는 [3]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1세기 최초의 전쟁이자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이다
미국의 목표는 [2]알카에다를 해체하고 [3]탈레반 정권을 축출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전쟁초반 미국의 대대적인 공세에 탈레반군은 순식간에 격멸당했다. 2001년 12월 14일에 미국은 승리 선언하였고 탈레반 정권은 무너졌다. 탈레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고 일부 잔존세력이 남부 산악지대로 은신해 들어가서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이후 미국이 [5]이라크 전쟁에 전념하느라 아프카니스탄에 관심이 줄어든 틈을 타 탈레반은 전력을 재건하여 파키스탄 접경지대등을 기반으로 세력을 빠르게 키우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결국 알 카에다와 탈레반 잔병들이 파키스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개전 당시의 병사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장교단도 물갈이가 됐으며 전쟁 초기에 출생하지도 않았던 세대가 미군 입대 가능 연령이 되면서 "한 세대의 전쟁(war of a generation)"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21년 5월부터 미군이 아프카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흐름이 탈레반으로 넘어갔다.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도시들은 탈레반의 수중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8월 12일, 아프가니스탄의 제2, 3의 도시 헤라트와 칸다하르가 탈레반에게 넘어갔다.
국 2021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탈레반에게 항복했다. 탈레반은 카불에 무혈입성하면서 재집권했다.
이 전쟁으로 총사망자 23만명, 난민 500만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1]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 1957년~2011년) :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났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적 성향의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였으며 2001년 미국의 9.11 테러의 배후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11년 5월 2일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미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2] 알카에다(Al-Qaeda) :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이슬람 수니파의 국제 무장 세력이자 테러리즘 집단이며 반미국, 반유대를 표방한다.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으며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3] 탈레반(Taliban) : 아프가니스탄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무장단체이자 테러조직이며 1990년대 중반 활동을 시작하여 1997년에 아프카니스탄을 집권하여 통치하였으나 2001년 미국의 공격으로 축출되었다. 2021년 8월 미군의 철수로 정권을 다시 집권하였다
[4] 카불(Kabul) : 아프카니스탄의 수도
[5] 이라크 전쟁(제2차 걸프 전쟁) :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침략으로 시작되어 2011년 12월 15일 종전되었다
1세기 최초의 전쟁이자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이다
미국의 목표는 [2]알카에다를 해체하고 [3]탈레반 정권을 축출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전쟁초반 미국의 대대적인 공세에 탈레반군은 순식간에 격멸당했다. 2001년 12월 14일에 미국은 승리 선언하였고 탈레반 정권은 무너졌다. 탈레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고 일부 잔존세력이 남부 산악지대로 은신해 들어가서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이후 미국이 [5]이라크 전쟁에 전념하느라 아프카니스탄에 관심이 줄어든 틈을 타 탈레반은 전력을 재건하여 파키스탄 접경지대등을 기반으로 세력을 빠르게 키우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결국 알 카에다와 탈레반 잔병들이 파키스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개전 당시의 병사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장교단도 물갈이가 됐으며 전쟁 초기에 출생하지도 않았던 세대가 미군 입대 가능 연령이 되면서 "한 세대의 전쟁(war of a generation)"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21년 5월부터 미군이 아프카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흐름이 탈레반으로 넘어갔다.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도시들은 탈레반의 수중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8월 12일, 아프가니스탄의 제2, 3의 도시 헤라트와 칸다하르가 탈레반에게 넘어갔다.
국 2021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탈레반에게 항복했다. 탈레반은 카불에 무혈입성하면서 재집권했다.
이 전쟁으로 총사망자 23만명, 난민 500만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1]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 1957년~2011년) :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났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적 성향의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였으며 2001년 미국의 9.11 테러의 배후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11년 5월 2일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미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2] 알카에다(Al-Qaeda) :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이슬람 수니파의 국제 무장 세력이자 테러리즘 집단이며 반미국, 반유대를 표방한다.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으며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3] 탈레반(Taliban) : 아프가니스탄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무장단체이자 테러조직이며 1990년대 중반 활동을 시작하여 1997년에 아프카니스탄을 집권하여 통치하였으나 2001년 미국의 공격으로 축출되었다. 2021년 8월 미군의 철수로 정권을 다시 집권하였다
[4] 카불(Kabul) : 아프카니스탄의 수도
[5] 이라크 전쟁(제2차 걸프 전쟁) :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침략으로 시작되어 2011년 12월 15일 종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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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라리온 내전(1991~2002)은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발생한 참혹한 무력 충돌로, 약 11년간 지속되며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과 인권 유린을 초래한 내전이다. 1991년 3월 23일 [2]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은 시에라리온 반군 조직인 [1]혁명연합전선이 시에라리온 동부 국경 지역을 점령하며 시작되었다.
[1]혁명연합전선의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는 시에라리온 정부의 부패와 불평등을 비판하며 무장 투쟁을 벌였지만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강제 징집, 성폭행, 어린 병사의 활용, 그리고 도끼로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특히 시에라리온의 풍부한 다이아몬드 자원을 이용해 무기와 자금을 확보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이는 [4]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개념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시에라리온 정부군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양한 민병대 및 외국 용병들과 연합했으며,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한 [5]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의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전은 잦은 휴전과 협정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재개되었고 갈등은 점점 복잡해졌다.
1999년 7월 7일에 토고의 수도인 로메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지만 [1]혁명연합전선은 이 협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2000년 5월 [7]프리타운을 공격 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이후 [6]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투입되었고, 영국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 개입을 단행하여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를 체포함으로써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2년 1월 18일, 당시 대통령 [8]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가 공식적으로 전쟁 종식을 선언하며 종전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약 5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국가의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전후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가 설치되어 전범 처벌이 이뤄졌고 국가 재건과 화해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어졌다.
[1] 혁명연합전선(RUF, Revolutionary United Front) : 시에라리온 내전을 일으킨 반군 조직으로 부패한 정부 타도를 명분으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민간인 학살, 강제 노동, 아동 병사 징집 등 극단적인 폭력을 자행했다. 다이아몬드 자원을 통해 무기를 조달하며 내전을 장기화시켰다. 현재는 해체되었다
[2] 라이베리아 애국전선(NPFL,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 1989년 찰스 테일러가 주도해 결성한 무장 반군 조직으로 라이베리아 내전(1989~1997)의 주요 세력이었다. NPFL은 독재자 사무엘 도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대규모 민간인 학살, 강간, 강제 징집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전쟁 후 찰스 테일러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과 전쟁범죄로 국제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3] 포다이 사이바나 산코(Foday Saybana Sankoh, 1937년 10월 17일~2003년 7월 29일) :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아 시에라리온 반군 단체 혁명연합전선의 설립자. 시에라리온 내전 후 전쟁범죄로 기소되었으며, 2003년 재판을 기다리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4] 블러드 다이아몬드(conflict diamonds, hot diamonds, war diamonds 또는 red diamonds) : 무력분쟁 지역(주로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의 수익금이 전쟁 수행을 위한 무기구매등 자금 조달에 사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5]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ECOMOG, 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Monitoring Group) :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가 설립한 군산 평화유지 기구로,주로 회원국 내 분쟁과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파병된다. 회원국은 가나, 감비아, 기니, 기니비사우, 나이지리아, 베냉, 라이베리아, 세네갈, 시에라리온, 카보베르데, 코트디부아르, 토고 등 12개 국가이다. 아프리카 연합 및 유엔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6] 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UNAMSIL, United Nations Mission in Sierra Leone) :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시에라리온에서 진행된 유엔 평화유지군. 1999년 10월 22일, 안전보장이사회는 로메 평화협정을 이행하는 데 있어 정부와 다른 당사자들과 협력하고 군축, 동원 해제 및 재통합 계획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UNAMSIL을 설립했다. 2005년 12월 유엔 시에라리온 통합 사무소(UNIOSIL)가 뒤를 이었다. UNIOSIL의 임기는 두 번 연장되었고 2008년 9월에 끝났다
[7] 프리타운(Freetown) : 시에라리온의 수도
[8] 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Alhaji Ahmad Tejan Kabbah, 1932년 2월 16일 ~ 2014년 3월 13일) : 시에라리온의 정치인이다. 시에라리온의 제3대 대통령. 두차례 역임(1996년 3월 29일 ~1997년 5월 25일, 1998년 3월 10일~2007년 9월 17일)
[1]혁명연합전선의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는 시에라리온 정부의 부패와 불평등을 비판하며 무장 투쟁을 벌였지만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강제 징집, 성폭행, 어린 병사의 활용, 그리고 도끼로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특히 시에라리온의 풍부한 다이아몬드 자원을 이용해 무기와 자금을 확보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이는 [4]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개념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시에라리온 정부군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양한 민병대 및 외국 용병들과 연합했으며,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한 [5]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의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전은 잦은 휴전과 협정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재개되었고 갈등은 점점 복잡해졌다.
1999년 7월 7일에 토고의 수도인 로메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지만 [1]혁명연합전선은 이 협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2000년 5월 [7]프리타운을 공격 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이후 [6]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투입되었고, 영국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 개입을 단행하여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를 체포함으로써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2년 1월 18일, 당시 대통령 [8]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가 공식적으로 전쟁 종식을 선언하며 종전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약 5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국가의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전후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가 설치되어 전범 처벌이 이뤄졌고 국가 재건과 화해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어졌다.
[1] 혁명연합전선(RUF, Revolutionary United Front) : 시에라리온 내전을 일으킨 반군 조직으로 부패한 정부 타도를 명분으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민간인 학살, 강제 노동, 아동 병사 징집 등 극단적인 폭력을 자행했다. 다이아몬드 자원을 통해 무기를 조달하며 내전을 장기화시켰다. 현재는 해체되었다
[2] 라이베리아 애국전선(NPFL,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 1989년 찰스 테일러가 주도해 결성한 무장 반군 조직으로 라이베리아 내전(1989~1997)의 주요 세력이었다. NPFL은 독재자 사무엘 도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대규모 민간인 학살, 강간, 강제 징집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전쟁 후 찰스 테일러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과 전쟁범죄로 국제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3] 포다이 사이바나 산코(Foday Saybana Sankoh, 1937년 10월 17일~2003년 7월 29일) :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아 시에라리온 반군 단체 혁명연합전선의 설립자. 시에라리온 내전 후 전쟁범죄로 기소되었으며, 2003년 재판을 기다리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4] 블러드 다이아몬드(conflict diamonds, hot diamonds, war diamonds 또는 red diamonds) : 무력분쟁 지역(주로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의 수익금이 전쟁 수행을 위한 무기구매등 자금 조달에 사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5]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ECOMOG, 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Monitoring Group) :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가 설립한 군산 평화유지 기구로,주로 회원국 내 분쟁과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파병된다. 회원국은 가나, 감비아, 기니, 기니비사우, 나이지리아, 베냉, 라이베리아, 세네갈, 시에라리온, 카보베르데, 코트디부아르, 토고 등 12개 국가이다. 아프리카 연합 및 유엔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6] 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UNAMSIL, United Nations Mission in Sierra Leone) :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시에라리온에서 진행된 유엔 평화유지군. 1999년 10월 22일, 안전보장이사회는 로메 평화협정을 이행하는 데 있어 정부와 다른 당사자들과 협력하고 군축, 동원 해제 및 재통합 계획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UNAMSIL을 설립했다. 2005년 12월 유엔 시에라리온 통합 사무소(UNIOSIL)가 뒤를 이었다. UNIOSIL의 임기는 두 번 연장되었고 2008년 9월에 끝났다
[7] 프리타운(Freetown) : 시에라리온의 수도
[8] 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Alhaji Ahmad Tejan Kabbah, 1932년 2월 16일 ~ 2014년 3월 13일) : 시에라리온의 정치인이다. 시에라리온의 제3대 대통령. 두차례 역임(1996년 3월 29일 ~1997년 5월 25일, 1998년 3월 10일~2007년 9월 17일)
1991년 민족과 지역 간 갈등으로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1990년대 내내 일련의 전쟁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어 7개 나라로 분리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불렀지만 내전은 같은 나라 안에서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무력투쟁을 말하는데 1992년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해체되어 내전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연방 분리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연방 유지를 주장한 세르비아간의 전투로 시작되었다.
* 유고연방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코소보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불렀지만 내전은 같은 나라 안에서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무력투쟁을 말하는데 1992년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해체되어 내전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연방 분리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연방 유지를 주장한 세르비아간의 전투로 시작되었다.
* 유고연방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코소보
2000년 9월 28일 이스라엘 [2]아리엘 샤론 총리는 동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교 성지인 [3]알 아크사 모스크를 군과 경찰등의 호위병을 대동하여 방문했다. 이에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에 이스라엘측은 즉각적인 사격으로 대응하여 팔레스타인인 13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더욱이 2000년 9월 30일 아버지와 외출하였던 12살 어린이인 무함마드 라미 알 두라 소년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희생된 사건이 발생했다. 시위 군중과 이스라엘군 사이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TV를 통하여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이 사건으로 팔레스타인과 전 세계는 이스라엘에 분노하였다.
이로 인하여 [8]오슬로 평화협정이 파기됐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봉기한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를 막기위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다시 점령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이 일어났다. 팔레스타인 경찰까지 민중봉기에 참여하여 준전쟁 상태로 발전하면서 요르단 강 [7]서안지구, [9]가자지구의 주민과 팔레스타인 난민, 이스라엘에 사는 아랍인까지 합세하여 대규모로 파급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전선, [5]하마스, 이슬람 [6]지하드 등의 무장단체들도 전부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자살폭탄테러와 요인암살을 하면서 민족봉기를 자극했다.
팔레스타인 대통령 선거는 2005년 1월 9일에 치러졌고, [4]마흐무드 압바스(Abu Mazen)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5년 2월 8일 [2]아리엘 샤론과 [4]마흐무드 압바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휴전을 선언했다. 서로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기로 하였으며 이스라엘측은 정치범을 제외한 팔레스타인 포로를 석방하며 [7]서안지구에서 철수하는데 동의했다. 팔레스타인측도 봉기와 게릴라전을 멈추기로 합의했다. [5]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이슬람 [6]지하드도 권고를 받아들이면서 2차 인티파다는 끝난다.
2차 인티파다로 팔레스타인은 3,334명이 사망하고 5만 3천명이 부상당했다. 이스라엘 역시 피해가 만만치 않아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1,074명이 사망했다.
[1]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년~2004년)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임기 1994년 7월 5일~ 2004년 11월 11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제3대 정부수반(임기 1969년 2월 4일~2004년 10월 29일)
[2]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1928년~2014년) : 이스라엘 제15대 총리(임기 2001년 3월 7일~2006년 4월 14일)
[3] 알 아크사 모스크(Al-Aqsa Mosque) : 예루살렘의 성전산 남쪽에 위치한 은색 둥근 지붕의 이슬람교 사원. 이슬람교 3대 성지의 하나
[4]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 1935년~) : 2003년에는 팔레스타인 수상에 임명되었지만 사직. 2004년 아라파트 사망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반. 2005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7년 동안 장기집권하고 있다
[5]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6] 지하드(jihad) : '성전'이라는 뜻으로, 이슬람교의 신앙을 전파하거나 방어하기 위하여 벌이는 이교도와의 투쟁을 이르는 말
[7]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8]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13일에 이스라엘과 분쟁을 계속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분쟁을 종식키로 한 평화협정
[9]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더욱이 2000년 9월 30일 아버지와 외출하였던 12살 어린이인 무함마드 라미 알 두라 소년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희생된 사건이 발생했다. 시위 군중과 이스라엘군 사이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TV를 통하여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이 사건으로 팔레스타인과 전 세계는 이스라엘에 분노하였다.
이로 인하여 [8]오슬로 평화협정이 파기됐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봉기한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를 막기위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다시 점령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이 일어났다. 팔레스타인 경찰까지 민중봉기에 참여하여 준전쟁 상태로 발전하면서 요르단 강 [7]서안지구, [9]가자지구의 주민과 팔레스타인 난민, 이스라엘에 사는 아랍인까지 합세하여 대규모로 파급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전선, [5]하마스, 이슬람 [6]지하드 등의 무장단체들도 전부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자살폭탄테러와 요인암살을 하면서 민족봉기를 자극했다.
팔레스타인 대통령 선거는 2005년 1월 9일에 치러졌고, [4]마흐무드 압바스(Abu Mazen)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5년 2월 8일 [2]아리엘 샤론과 [4]마흐무드 압바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휴전을 선언했다. 서로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기로 하였으며 이스라엘측은 정치범을 제외한 팔레스타인 포로를 석방하며 [7]서안지구에서 철수하는데 동의했다. 팔레스타인측도 봉기와 게릴라전을 멈추기로 합의했다. [5]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이슬람 [6]지하드도 권고를 받아들이면서 2차 인티파다는 끝난다.
2차 인티파다로 팔레스타인은 3,334명이 사망하고 5만 3천명이 부상당했다. 이스라엘 역시 피해가 만만치 않아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1,074명이 사망했다.
[1]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년~2004년)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임기 1994년 7월 5일~ 2004년 11월 11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제3대 정부수반(임기 1969년 2월 4일~2004년 10월 29일)
[2]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1928년~2014년) : 이스라엘 제15대 총리(임기 2001년 3월 7일~2006년 4월 14일)
[3] 알 아크사 모스크(Al-Aqsa Mosque) : 예루살렘의 성전산 남쪽에 위치한 은색 둥근 지붕의 이슬람교 사원. 이슬람교 3대 성지의 하나
[4]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 1935년~) : 2003년에는 팔레스타인 수상에 임명되었지만 사직. 2004년 아라파트 사망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반. 2005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7년 동안 장기집권하고 있다
[5]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6] 지하드(jihad) : '성전'이라는 뜻으로, 이슬람교의 신앙을 전파하거나 방어하기 위하여 벌이는 이교도와의 투쟁을 이르는 말
[7]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8]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13일에 이스라엘과 분쟁을 계속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분쟁을 종식키로 한 평화협정
[9]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은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테러 사건을 경험하였다. 이날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조직 알카에다(al-Qaeda)는 민간 여객기 4대를 동시에 납치하여 미국의 상징적인 건물과 기관을 공격하는 전례 없는 동시다발 자살 테러를 감행하였다.
사건은 아침 8시 46분, 아메리칸 항공 11편이 뉴욕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에 충돌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9시 3분에는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남쪽 타워에 충돌하였고, 9시 37분에는 아메리칸 항공 77편이 버지니아주 펜타곤 건물에 돌진하였다. 마지막으로 납치된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은 원래 워싱턴 D.C.를 목표로 하였으나 승객들의 저항 끝에 10시 3분경 펜실베이니아 [1]샹크스빌 근처 들판에 추락하였다. 이어 9시 59분 남쪽 타워가 붕괴되었고 10시 28분에는 북쪽 타워까지 무너져 내리며 뉴욕 도심은 잿더미로 변하였다.
이날의 참사로 항공기 승객과 승무원, 세계무역센터 및 펜타곤의 근무자,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과 경찰관, 그리고 납치범 19명이 포함하여 약 2,996명이 사망하였다. 부상자는 수천 명에 달했고 구조 활동과 잔해 처리 과정에서 유해 물질에 노출된 수많은 이들이 이후 심각한 호흡기 질환, 암, 정신적 외상에 시달렸다.
미국 정부와 정보 당국은 즉각적으로 사건 배후를 추적하여 알카에다 지도자인 [5]오사마 빈 라덴이 주도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사전에 테러 위협 신호를 포착하고도 정보기관 간의 소통 부족과 대비 미흡으로 사태를 막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2004년에 발간된 [4]"9·11 위원회 보고서"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공식적으로 분석하며 정보 공유 체계의 강화와 항공 보안의 전면적 개혁 등을 권고하였다.
사건 직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알카에다를 보호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개시하였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항공 보안을 대폭 강화하고 [2]애국법을 제정하며, [3]국토안보부를 신설하는 등 국가 안보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였다. 국제적으로는 테러 대응을 위한 정보 교류와 군사 협력이 강화되었고, 이는 이후 20년 넘게 지속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이어졌다.
오사마 빈 라덴은 2011년 파키스탄에서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사살되면서 사건은 상징적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뉴욕 세계무역센터 부지는 이후 재건되었고 [6]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함께 희생자들을 기리는 "9·11 메모리얼 & 뮤지엄"이 세워졌다. 매년 9월 11일에는 희생자 명단을 낭독하며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테러를 넘어 세계 질서를 변화시킨 분수령이 되었으며 안전과 자유, 안보와 인권의 균형이라는 난제를 국제 사회에 남겼다.
[1] 섕크스빌(Shanksville)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마을
[2] 애국법(Patriot Act) :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 제정된 테러방지법으로 Uniting and Strengthening America by Providing Appropriate Tools Required to Intercept and Obstruct Terrorism Act of 2001의 약자이다. 테러 방지와 국가 안보 강화를 위해 정부의 감시 및 수사 권한을 대폭 확대했지만, 이는 시민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한 비판과 논란을 불러왔다. 2015년에는 일부 조항이 폐지되고 미국 자유법(USA Freedom Act)으로 대체되었다
[3]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 미국 국가안보 및 국내 영토의 공공 안전을 담당하는 미국의 국가행정조직으로 2002년 11월 25일에 설치되었다
[4] 9·11 위원회 보고서(The 9/11 Commission Report) : 9·11 테러 공격의 원인과 과정을 조사하기 위해 미국에서 설립된 9/11 위원회가 발표한 최종 보고서로 테러 공격의 배경과 진행 상황을 상세히 분석하고, 미래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권고사항을 제시했다
[5]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 1957년 3월 10일 ~ 2011년 5월 2일) :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의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수장
[6]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One World Trade Center, 1WTC) : 미국 뉴욕주 뉴욕 시 맨해튼의 구 세계 무역 센터가 위치해 있었던 자리에 재건한 타워 건물. 별칭으로 프리덤타워(Freedom Tower)
사건은 아침 8시 46분, 아메리칸 항공 11편이 뉴욕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에 충돌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9시 3분에는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남쪽 타워에 충돌하였고, 9시 37분에는 아메리칸 항공 77편이 버지니아주 펜타곤 건물에 돌진하였다. 마지막으로 납치된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은 원래 워싱턴 D.C.를 목표로 하였으나 승객들의 저항 끝에 10시 3분경 펜실베이니아 [1]샹크스빌 근처 들판에 추락하였다. 이어 9시 59분 남쪽 타워가 붕괴되었고 10시 28분에는 북쪽 타워까지 무너져 내리며 뉴욕 도심은 잿더미로 변하였다.
이날의 참사로 항공기 승객과 승무원, 세계무역센터 및 펜타곤의 근무자,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과 경찰관, 그리고 납치범 19명이 포함하여 약 2,996명이 사망하였다. 부상자는 수천 명에 달했고 구조 활동과 잔해 처리 과정에서 유해 물질에 노출된 수많은 이들이 이후 심각한 호흡기 질환, 암, 정신적 외상에 시달렸다.
미국 정부와 정보 당국은 즉각적으로 사건 배후를 추적하여 알카에다 지도자인 [5]오사마 빈 라덴이 주도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사전에 테러 위협 신호를 포착하고도 정보기관 간의 소통 부족과 대비 미흡으로 사태를 막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2004년에 발간된 [4]"9·11 위원회 보고서"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공식적으로 분석하며 정보 공유 체계의 강화와 항공 보안의 전면적 개혁 등을 권고하였다.
사건 직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알카에다를 보호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개시하였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항공 보안을 대폭 강화하고 [2]애국법을 제정하며, [3]국토안보부를 신설하는 등 국가 안보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였다. 국제적으로는 테러 대응을 위한 정보 교류와 군사 협력이 강화되었고, 이는 이후 20년 넘게 지속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이어졌다.
오사마 빈 라덴은 2011년 파키스탄에서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사살되면서 사건은 상징적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뉴욕 세계무역센터 부지는 이후 재건되었고 [6]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함께 희생자들을 기리는 "9·11 메모리얼 & 뮤지엄"이 세워졌다. 매년 9월 11일에는 희생자 명단을 낭독하며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테러를 넘어 세계 질서를 변화시킨 분수령이 되었으며 안전과 자유, 안보와 인권의 균형이라는 난제를 국제 사회에 남겼다.
[1] 섕크스빌(Shanksville)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마을
[2] 애국법(Patriot Act) :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 제정된 테러방지법으로 Uniting and Strengthening America by Providing Appropriate Tools Required to Intercept and Obstruct Terrorism Act of 2001의 약자이다. 테러 방지와 국가 안보 강화를 위해 정부의 감시 및 수사 권한을 대폭 확대했지만, 이는 시민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한 비판과 논란을 불러왔다. 2015년에는 일부 조항이 폐지되고 미국 자유법(USA Freedom Act)으로 대체되었다
[3]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 미국 국가안보 및 국내 영토의 공공 안전을 담당하는 미국의 국가행정조직으로 2002년 11월 25일에 설치되었다
[4] 9·11 위원회 보고서(The 9/11 Commission Report) : 9·11 테러 공격의 원인과 과정을 조사하기 위해 미국에서 설립된 9/11 위원회가 발표한 최종 보고서로 테러 공격의 배경과 진행 상황을 상세히 분석하고, 미래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권고사항을 제시했다
[5]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 1957년 3월 10일 ~ 2011년 5월 2일) :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의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수장
[6]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One World Trade Center, 1WTC) : 미국 뉴욕주 뉴욕 시 맨해튼의 구 세계 무역 센터가 위치해 있었던 자리에 재건한 타워 건물. 별칭으로 프리덤타워(Freedom Tower)
2002년 5월 31일부터 2002년 6월 30일까지 32개국이 대한민국과 일본에 각 10개씩 총 20개 경기장에서 64경기를 치렀다.
아시아에서 열린 첫 FIFA 월드컵 대회이자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외에서 열린 첫 대회이며, 골든골 제도가 시행된 마지막 FIFA 월드컵이다. 또한 이 대회는 역사상 1번째로 2개 이상의 나라에서 공동으로 개최된 FIFA 월드컵이기도 하다.
결승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2-0으로 승리한 브라질이 역대 최다인 5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아시아에서 열린 첫 FIFA 월드컵 대회이자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외에서 열린 첫 대회이며, 골든골 제도가 시행된 마지막 FIFA 월드컵이다. 또한 이 대회는 역사상 1번째로 2개 이상의 나라에서 공동으로 개최된 FIFA 월드컵이기도 하다.
결승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2-0으로 승리한 브라질이 역대 최다인 5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2002년 6월 29일 대한민국 서해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NLL) 북서쪽 방향 해상에서 조선인민군 해군 서해함대 8전대 7편대 소속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의 85mm 전차포 선제 포격 도발로 30분 가량 진행된 남북한 간의 군사적 충돌이다.
한군의 선제 공격을 당한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는 교전 후 예인도중 침몰하였고, 정장을 포함하여 총 6명이 전사하였고 19명이 부상당했다. 조선인민군 해군소속 등산곶 684호도 대한민국 해군의 반격으로 13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당했다.
한군의 선제 공격을 당한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는 교전 후 예인도중 침몰하였고, 정장을 포함하여 총 6명이 전사하였고 19명이 부상당했다. 조선인민군 해군소속 등산곶 684호도 대한민국 해군의 반격으로 13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당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우울증 증세를 보인 김대한(당시 56세)은 뇌졸증까지 겹치면서 이를 비관하여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 정차하고 있던 1079열차에서 방화를 저질러 일어난 대형 화재 참사 사건이다.
2003년 1월 18일 오전 9시 5분경 대구 지하철 1089호 열차는 중앙로역에 도착하기 위하여 서행하고 있었다.
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여 도착한 순간 이 열차에 탑승하고 있었던 김대한은 플라스틱 석유통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자신의 바지에 불이 붙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옷을 태우던 불을 끄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바닥에 던져진 석유통에 의하여 순식간에 열차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 불에서 나온 검은 연기, 유독성 가스가 승강장과 지하 1~2층 대합실에 급속히 확산됐고 승객들이 주출입구쪽의 계단을 통해 대피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중앙로역 맞은편 승강장으로 1080열차가 진입 중이었다. 1080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여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렸으며 승강장에 있던 연기가 열차 안으로 들어오자 기관사가 즉시 출입문을 닫았다. 그리고 1079호 열차의 불이 1080호 열차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때마침 화재로 전원이 끊어지며 전동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기관사는 기관실 바로 옆 1호 칸의 출입문 몇 개만 연 뒤 현장을 이탈했다.
일부 차량은 문이 열리지 않아 승객들은 열차안에 갇혀있었다. 결국 1080호 열차 내부는 연기로 가득차게 되었으며 대피하지 못한 승객들은 유독가스로 인한 연기로 질식되면서 사망했다.
신고를 받고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하였으나 화염과 유독가스로 현장접근이 힘들어 구조가 지연되었다.
오후 1시 38분경에 화재가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구조된 승객들은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079열차의 승객 거의 대부분은 정차중으로 문이 열려 있었고 기관사가 승객들에게 대피를 지시하여 대피하여 비교적 큰 피해가 나지 않은 반면, 반대방향으로 운행 중이던 1080열차는 화재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역에 진입하여 정차함에 따라 화재가 확산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1079열차에는 방화범을 포함한 250여 명이, 1080열차에는 180여 명의 승객이 탑승했었다.
이사고로 192명 사망(1079호열차:50명, 1080열차:142명), 부상자 151명이 발생하는 대형참사였다.
2003년 1월 18일 오전 9시 5분경 대구 지하철 1089호 열차는 중앙로역에 도착하기 위하여 서행하고 있었다.
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여 도착한 순간 이 열차에 탑승하고 있었던 김대한은 플라스틱 석유통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자신의 바지에 불이 붙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옷을 태우던 불을 끄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바닥에 던져진 석유통에 의하여 순식간에 열차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 불에서 나온 검은 연기, 유독성 가스가 승강장과 지하 1~2층 대합실에 급속히 확산됐고 승객들이 주출입구쪽의 계단을 통해 대피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중앙로역 맞은편 승강장으로 1080열차가 진입 중이었다. 1080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여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렸으며 승강장에 있던 연기가 열차 안으로 들어오자 기관사가 즉시 출입문을 닫았다. 그리고 1079호 열차의 불이 1080호 열차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때마침 화재로 전원이 끊어지며 전동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기관사는 기관실 바로 옆 1호 칸의 출입문 몇 개만 연 뒤 현장을 이탈했다.
일부 차량은 문이 열리지 않아 승객들은 열차안에 갇혀있었다. 결국 1080호 열차 내부는 연기로 가득차게 되었으며 대피하지 못한 승객들은 유독가스로 인한 연기로 질식되면서 사망했다.
신고를 받고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하였으나 화염과 유독가스로 현장접근이 힘들어 구조가 지연되었다.
오후 1시 38분경에 화재가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구조된 승객들은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079열차의 승객 거의 대부분은 정차중으로 문이 열려 있었고 기관사가 승객들에게 대피를 지시하여 대피하여 비교적 큰 피해가 나지 않은 반면, 반대방향으로 운행 중이던 1080열차는 화재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역에 진입하여 정차함에 따라 화재가 확산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1079열차에는 방화범을 포함한 250여 명이, 1080열차에는 180여 명의 승객이 탑승했었다.
이사고로 192명 사망(1079호열차:50명, 1080열차:142명), 부상자 151명이 발생하는 대형참사였다.
미국은 알 카에다의 9.11 테러 이후 엄청난 혼란에 빠져있었던 상황에서 이라크가 유엔이 금지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명분하에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수행하는 와중에 이라크를 침공하여 두 개의 전선으로 확대되면서 전투는 이기지만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90년의 걸프 전쟁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났다고 해서 '제 2차 걸프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침략 2주만인 4월 9일에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는 함락되었고 후세인 정부는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은 수도인 바그다드 함락 이후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가 그해 12월에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되어 2006년 11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2006년 12월에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바그다드가 함락되면서 전쟁 종전 선언을 했지만 뒷수습하기엔 병력이 한없이 모자랐고 현지의 현황을 무시한 전후 처리로 인해 저항세력이 생겼다. 게다가 전쟁의 혼란으로 국경이 사실상 사라진 틈을 타고 각종 무장세력이 이라크를 기점으로 반미저항뿐 아니라 수니파와 시아파가 충돌하는 사태까지 번지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이들 무장세력과도 싸워야만 했고, 이로인하여 매년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양 전선을 유지하기에 힘에 부친 미국은 2009년 7월부터 미국 병력이 이라크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철수를 준비하여 2010년 8월 20일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2011년 12월 15일 미국에서 공식으로 종전을 선언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18일 미국 병력은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미국이 철수하자 이라크는 계속되는 갈등과 테러를 끝내지 못하며 내전으로 2017까지 휩싸이게 된다.
* 알카에다(Al-Qaeda) :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이슬람 수니파의 국제 무장 세력이자 테러리즘 집단이며 반미국, 반유대를 표방한다.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으며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년~2006년) : 이라크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이라크의 정치인. 제5대 대통령(재임,1979년~2003년)
1990년의 걸프 전쟁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났다고 해서 '제 2차 걸프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침략 2주만인 4월 9일에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는 함락되었고 후세인 정부는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은 수도인 바그다드 함락 이후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가 그해 12월에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되어 2006년 11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2006년 12월에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바그다드가 함락되면서 전쟁 종전 선언을 했지만 뒷수습하기엔 병력이 한없이 모자랐고 현지의 현황을 무시한 전후 처리로 인해 저항세력이 생겼다. 게다가 전쟁의 혼란으로 국경이 사실상 사라진 틈을 타고 각종 무장세력이 이라크를 기점으로 반미저항뿐 아니라 수니파와 시아파가 충돌하는 사태까지 번지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이들 무장세력과도 싸워야만 했고, 이로인하여 매년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양 전선을 유지하기에 힘에 부친 미국은 2009년 7월부터 미국 병력이 이라크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철수를 준비하여 2010년 8월 20일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2011년 12월 15일 미국에서 공식으로 종전을 선언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18일 미국 병력은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미국이 철수하자 이라크는 계속되는 갈등과 테러를 끝내지 못하며 내전으로 2017까지 휩싸이게 된다.
* 알카에다(Al-Qaeda) :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이슬람 수니파의 국제 무장 세력이자 테러리즘 집단이며 반미국, 반유대를 표방한다.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으며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년~2006년) : 이라크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이라크의 정치인. 제5대 대통령(재임,1979년~2003년)
조지아는 1992년 [1]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 대통령이 사임한 후 [2]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의회 의장이 되었다.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1995년에 조지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세바르드나제 정권은 만연한 부패와 족벌주의로 조지아의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조지아의 경제는 주위 타국에 비해 매우 궁핍하였고, 러시아 지원을 받는 사실상의 분리독립상태인 [3] 압하지야, [4] 남오세티야도 조지아 정부의 영향이 미치지 못했다. 또한 [5] 아자리야 자치공화국도 조지아에서 분리를 외치는 상황이었다.
2003년 11월 2일에 치러진 의회선거의 부정조작으로 야당들은 세바르드나제의 퇴진과 재선거를 요구했으며 국민들에게는 비폭력과 불복종을 외쳤다. 11월 중순에 대규모 시위가 [6] 트빌리시 중심가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조지아 주요도시로 확산되었다.
세바르다나제 정권도 지지자를 모아 친정부 시위를 하였으나 야당 및 국민들의 항의시위는 11월 22일에 정점에 달했다. 이날 [7] 미헤일 사카슈빌리의 야당 지지자들은 손에 장미를 들고 의회 건물을 점거하였다. 세바르드나제는 의회개회연설을 하기 위해 의회에 진입을 하려 했으나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장미혁명'이라 불린다.
다음날인 11월 23일 [2] 세바르드나제는 대통령 사임을 발표하였고, 수많은 시위자들은 환호하였다. 그리고 최고재판소는 이전 의회선거를 무효로 선언했다.
2004년 1월 4일 대통령 선거에서 [7] 사카슈빌리가 압승하여 30대의 젊은 나이로 조지아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004년 3월 28일에 의회 재선거가 실시되어 사카슈빌리를 지지하는 국민동맹-민주당이 대승했다.
장미혁명은 2004년 11월의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과 2005년 키르키니스탄의 튤립혁명에 영향을 미쳤다.
조지아는 장미혁명 이후에도 정치불안이 이어졌고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얍하지아에 주둔하는 등,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도 험악해졌다. 사카슈빌리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베이징 올림픽 개막 하루전인 2008년 8월 7일에 자치주의 독립을 원하는 남오세티야를 침공하였다(남오세티야 전쟁).
결과는 러시아군의 참전을 예상 못했던 조지아의 참패였으며 [4] 남오세티야와 [3] 압하지야는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다.
[1]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Zviad Gamsakhurdia, 1939년~1993년) : 조지아의 제1대 대통령(임기 : 1991년~1992년)
[2]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1928년~2014년) : 조지아의 제2대 대통령(임기:1995년~2003년). 1985년까지 1990년까지 소련의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1995년부터 2003년 장미 혁명으로 물러날 때까지 조지아의 대통령을 지냈다
[3] 압하지야(Abkhazia) : 흑해의 남쪽 연안과 캅카스의 남서쪽에 위치한 미승인 국가로 압하지야인이 주로 거주한다. 수도는 수후미(Sukhumi)이며 조지아의 영토내에 있는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4] 남오세티야(South Ossetia) 또는 츠힌발리(Tskhinvali) : 조지아에 위치한 사실상의 독립상태로 통치되는 지역이자 미승인 국가로 수도는 츠힌발리이다. 정식 국호는 남오세티야 공화국-알라니야국(Republic of South Ossetia–The State of Alania)
[5] 아자리아(Azaria) : 조지아 남서부의 지역에 위치하며 소수민족들의 자치 공화국이다. 수도는 바투미(Batumi)
[6] 트빌리시(Tbilisi) : 조지아의 수도
[7]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1967~현존) : 조지아의 제3대 대통령(임기 : 2004년~2013년, 2008년 재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정치가(우크라이나 국적 부여받자 이중 국적을 제한하는 조지아법에 의해 조지아국적 박탈당함)
당시 조지아의 경제는 주위 타국에 비해 매우 궁핍하였고, 러시아 지원을 받는 사실상의 분리독립상태인 [3] 압하지야, [4] 남오세티야도 조지아 정부의 영향이 미치지 못했다. 또한 [5] 아자리야 자치공화국도 조지아에서 분리를 외치는 상황이었다.
2003년 11월 2일에 치러진 의회선거의 부정조작으로 야당들은 세바르드나제의 퇴진과 재선거를 요구했으며 국민들에게는 비폭력과 불복종을 외쳤다. 11월 중순에 대규모 시위가 [6] 트빌리시 중심가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조지아 주요도시로 확산되었다.
세바르다나제 정권도 지지자를 모아 친정부 시위를 하였으나 야당 및 국민들의 항의시위는 11월 22일에 정점에 달했다. 이날 [7] 미헤일 사카슈빌리의 야당 지지자들은 손에 장미를 들고 의회 건물을 점거하였다. 세바르드나제는 의회개회연설을 하기 위해 의회에 진입을 하려 했으나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장미혁명'이라 불린다.
다음날인 11월 23일 [2] 세바르드나제는 대통령 사임을 발표하였고, 수많은 시위자들은 환호하였다. 그리고 최고재판소는 이전 의회선거를 무효로 선언했다.
2004년 1월 4일 대통령 선거에서 [7] 사카슈빌리가 압승하여 30대의 젊은 나이로 조지아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004년 3월 28일에 의회 재선거가 실시되어 사카슈빌리를 지지하는 국민동맹-민주당이 대승했다.
장미혁명은 2004년 11월의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과 2005년 키르키니스탄의 튤립혁명에 영향을 미쳤다.
조지아는 장미혁명 이후에도 정치불안이 이어졌고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얍하지아에 주둔하는 등,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도 험악해졌다. 사카슈빌리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베이징 올림픽 개막 하루전인 2008년 8월 7일에 자치주의 독립을 원하는 남오세티야를 침공하였다(남오세티야 전쟁).
결과는 러시아군의 참전을 예상 못했던 조지아의 참패였으며 [4] 남오세티야와 [3] 압하지야는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다.
[1]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Zviad Gamsakhurdia, 1939년~1993년) : 조지아의 제1대 대통령(임기 : 1991년~1992년)
[2]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1928년~2014년) : 조지아의 제2대 대통령(임기:1995년~2003년). 1985년까지 1990년까지 소련의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1995년부터 2003년 장미 혁명으로 물러날 때까지 조지아의 대통령을 지냈다
[3] 압하지야(Abkhazia) : 흑해의 남쪽 연안과 캅카스의 남서쪽에 위치한 미승인 국가로 압하지야인이 주로 거주한다. 수도는 수후미(Sukhumi)이며 조지아의 영토내에 있는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4] 남오세티야(South Ossetia) 또는 츠힌발리(Tskhinvali) : 조지아에 위치한 사실상의 독립상태로 통치되는 지역이자 미승인 국가로 수도는 츠힌발리이다. 정식 국호는 남오세티야 공화국-알라니야국(Republic of South Ossetia–The State of Alania)
[5] 아자리아(Azaria) : 조지아 남서부의 지역에 위치하며 소수민족들의 자치 공화국이다. 수도는 바투미(Batumi)
[6] 트빌리시(Tbilisi) : 조지아의 수도
[7]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1967~현존) : 조지아의 제3대 대통령(임기 : 2004년~2013년, 2008년 재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정치가(우크라이나 국적 부여받자 이중 국적을 제한하는 조지아법에 의해 조지아국적 박탈당함)
우쿠라이나 [1]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이 임기 만료로 물러나면서 2004년 대선은 레오니드 쿠치마정권의 총리인 [2]빅토르 야누코비치와 그에 맞서는 야당 후보로 [3]빅토르 유셴코가 있었다. 빅토르 유셴코는 민주화의 여망을 실현시킬 인물로 각광받던 인물이었다.
2004년 10월 31일 1차 선거에서 과반수 득표가 없어 1,2위를 차지한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빅토르 유셴코는 11월 21일 2차선거(결선투표)에서 재격돌했다. 결선투표 결과 야누코비치가 49.53%, 유셴코가 46.66%의 특표율로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다. 그렇지만 대규모 부정선거로 얼룩짐에 따라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오렌지 혁명'은 시작됐다.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독립) 광장에 있는 국회의사당 앞에 수십만이 모였다. 유셴코 진영은 자신들의 상징으로 오렌지색을 사용하였다. 이제 오렌지색은 자유와 정의의 색깔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최고 재판소는 유권자들의 투표와 예비 집계 과정 중에 위반사실을 확인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2차 선거 결과에 대한 발표를 취소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를 다시 거행하도록 명령했다.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속에 12월 26일에 치러진 재선거 결과 유셴코가 51.99%로 승리했다. 유셴코가 한 달 뒤 대통령에 취힘함으로써 오렌지 혁명은 끝이 났다.
[1] 레오니드 쿠치마(Leonid Kuchma, 1938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제2대 대통령(임기:1994년 7월 19일~2005년 1월 23일)
[2] 빅토르 유셴코(Viktor Yushchenko, 1954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제3대 대통령(임기:2005년 1월 23일~2010년 2월 25일)
[3]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1950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제4대 대통령(임기:2010년 2월 25일~2014년 2월 22일). 5년 임기중 탄핵됨
2004년 10월 31일 1차 선거에서 과반수 득표가 없어 1,2위를 차지한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빅토르 유셴코는 11월 21일 2차선거(결선투표)에서 재격돌했다. 결선투표 결과 야누코비치가 49.53%, 유셴코가 46.66%의 특표율로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다. 그렇지만 대규모 부정선거로 얼룩짐에 따라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오렌지 혁명'은 시작됐다.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독립) 광장에 있는 국회의사당 앞에 수십만이 모였다. 유셴코 진영은 자신들의 상징으로 오렌지색을 사용하였다. 이제 오렌지색은 자유와 정의의 색깔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최고 재판소는 유권자들의 투표와 예비 집계 과정 중에 위반사실을 확인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2차 선거 결과에 대한 발표를 취소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를 다시 거행하도록 명령했다.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속에 12월 26일에 치러진 재선거 결과 유셴코가 51.99%로 승리했다. 유셴코가 한 달 뒤 대통령에 취힘함으로써 오렌지 혁명은 끝이 났다.
[1] 레오니드 쿠치마(Leonid Kuchma, 1938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제2대 대통령(임기:1994년 7월 19일~2005년 1월 23일)
[2] 빅토르 유셴코(Viktor Yushchenko, 1954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제3대 대통령(임기:2005년 1월 23일~2010년 2월 25일)
[3]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1950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제4대 대통령(임기:2010년 2월 25일~2014년 2월 22일). 5년 임기중 탄핵됨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아체주 서부 해안에 발생한 규모 M9.1-9.3의 초대형 해저 지진으로 사망자의 대부분은 쓰나미에 의해 발생했다.
이 지진 해일로 스리랑카, 몰디브, 인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아프리카의 소말리아까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전 세계에서 28만명 이상 사망했다.
이 지진 해일로 스리랑카, 몰디브, 인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아프리카의 소말리아까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전 세계에서 28만명 이상 사망했다.
키르키스스탄은 구 소련붕괴이후로 1991년에 키르키스스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키르키스스탄 [1]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1991년 첫 당선이후 1995년,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였다. 장기집권이 독재로 흐르면서 2002년의 반정부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였으며 2003년에는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였다. 이로 인한 국민과 야당의 불신은 더욱 확산됐다.
2005년 2월 27일과 3월 13일 두 번에 걸쳐서 행해진 키르기스스탄의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부정과 개표조작 의혹을 받았다. 아스카르 아카예프의 자녀가 당선되었고 여당은 절대 다수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이에 반발한 국민들의 시위 및 데모가 지역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키르키스스탄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대응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결국 수만명의 군중들이 수도인 [3]비슈케크 거리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시위대는 정부 청사를 장악했다. 국민들의 퇴진 요구를 견디지 못한 [1]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3월 24일 카자흐스탄을 거쳐 러시아 모스크바로 도피하였다. 4월 5일 [1]아스카르 아카예프는 모스코바에서 정식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새로운 대통령선거는 2005년 7월에 실시되어 [2]쿠르만베크 바키예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시민이 직접 독재 권력을 몰아낸 민주 혁명으로 튤립 혁명 또는 레몬 혁명, 제1차 키르기스스탄 혁명으로 불린다.
이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2]쿠르만베크 바키예프 대통령도 비민주적 통치와 부정부패로 2010년에 발생한 제2차 키르기스스탄 혁명으로 물러났다.
[1] 아스카르 아카예프(Askar Akayev, 1944년~ ) : 1991년 소련 붕괴로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2005년)
[2] 쿠르만베크 바키예프(Kurmanbek Bakiyev, 1949년~ ) :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직무 대항(2005년 5월 25일~2005년 8월 14일). 제2대 대통령(2005년 3월 25일~2010년 4월 15일)
[3] 비슈케크(Bishkek) : 키르키스스탄의 수도
키르키스스탄 [1]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1991년 첫 당선이후 1995년,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였다. 장기집권이 독재로 흐르면서 2002년의 반정부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였으며 2003년에는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였다. 이로 인한 국민과 야당의 불신은 더욱 확산됐다.
2005년 2월 27일과 3월 13일 두 번에 걸쳐서 행해진 키르기스스탄의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부정과 개표조작 의혹을 받았다. 아스카르 아카예프의 자녀가 당선되었고 여당은 절대 다수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이에 반발한 국민들의 시위 및 데모가 지역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키르키스스탄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대응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결국 수만명의 군중들이 수도인 [3]비슈케크 거리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시위대는 정부 청사를 장악했다. 국민들의 퇴진 요구를 견디지 못한 [1]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3월 24일 카자흐스탄을 거쳐 러시아 모스크바로 도피하였다. 4월 5일 [1]아스카르 아카예프는 모스코바에서 정식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새로운 대통령선거는 2005년 7월에 실시되어 [2]쿠르만베크 바키예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시민이 직접 독재 권력을 몰아낸 민주 혁명으로 튤립 혁명 또는 레몬 혁명, 제1차 키르기스스탄 혁명으로 불린다.
이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2]쿠르만베크 바키예프 대통령도 비민주적 통치와 부정부패로 2010년에 발생한 제2차 키르기스스탄 혁명으로 물러났다.
[1] 아스카르 아카예프(Askar Akayev, 1944년~ ) : 1991년 소련 붕괴로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2005년)
[2] 쿠르만베크 바키예프(Kurmanbek Bakiyev, 1949년~ ) :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직무 대항(2005년 5월 25일~2005년 8월 14일). 제2대 대통령(2005년 3월 25일~2010년 4월 15일)
[3] 비슈케크(Bishkek) : 키르키스스탄의 수도
애플의 공동 창립자이자 당시 CEO였던 [1]스티브 잡스가 2007년 1월 9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맥월드 2007에서 발표하였고, 제품은 2007년 6월 29일 판매가 시작되었다. 그 뒤로 애플은 해마다 새로운 아이폰 모델과 iOS 업데이트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출시하고 있다.
2007년 6월 29일부터 미국 AT&T를 통해 판매가 시작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등 미국 전역의 도심가는 애플 매장을 찾은 사람들로 발디딜틈이 없었다. 수백미터 넘게 줄 선 사람들 중 하루 이상을 꼬박 밤새운 이들도 많았다.
한국에서는 통신망이 호환되지 않는 문제로 인해 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KT에 의해 2009년 11월 28일 첫 도입되었다.
[1] 스티븐 폴 잡스(Steven Paul Jobs, 1955년~2011년) : 미국의 기업인이었으며 애플의 전 CEO이자 공동 창립자. 2011년 10월 5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2007년 6월 29일부터 미국 AT&T를 통해 판매가 시작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등 미국 전역의 도심가는 애플 매장을 찾은 사람들로 발디딜틈이 없었다. 수백미터 넘게 줄 선 사람들 중 하루 이상을 꼬박 밤새운 이들도 많았다.
한국에서는 통신망이 호환되지 않는 문제로 인해 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KT에 의해 2009년 11월 28일 첫 도입되었다.
[1] 스티븐 폴 잡스(Steven Paul Jobs, 1955년~2011년) : 미국의 기업인이었으며 애플의 전 CEO이자 공동 창립자. 2011년 10월 5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2007년 10월 2일부터 10월 4일까지 평양에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간에 진행된 정상회담으로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이다. 10.4 남북정상회담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7년 10월 4일 오후 1시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 정상이 공동으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 내용]
1.남과 북은 6·15 남북 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해 나간다.
2.남과 북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남북관계를 상호존중과 신뢰 관계로 확고히 전환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남과 북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하였다.
4.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5.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 경제협력사업을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6.남과 북은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빛내기 위해 역사, 언어, 교육, 과학기술, 문화예술, 체육 등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7.남과 북은 인도주의 협력사업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8.남과 북은 국제무대에서 민족의 이익과 해외 동포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하였다.
2007년 10월 4일 오후 1시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 정상이 공동으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 내용]
1.남과 북은 6·15 남북 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해 나간다.
2.남과 북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남북관계를 상호존중과 신뢰 관계로 확고히 전환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남과 북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하였다.
4.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5.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 경제협력사업을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6.남과 북은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빛내기 위해 역사, 언어, 교육, 과학기술, 문화예술, 체육 등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7.남과 북은 인도주의 협력사업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8.남과 북은 국제무대에서 민족의 이익과 해외 동포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하였다.
서울 숭례문 방화사건은 2008년 2월 10일, 대한민국의 국보인 숭례문에 문화재 방화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국의 대표적 목조 건축물이자 조선의 상징적 문화유산이었던 숭례문이 대부분 전소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방화의 범인으로 밝혀진 채모 씨는 택지개발에 따른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고 시너가 담긴 1.5리터 페트병 3통을 이용해 불을 지른 것으로 조사되었다.
당시 화재는 오후 8시 40분경 발생하였으며 소방당국이 진화 작업을 벌였으나 목조건물의 구조적 특성과 강풍의 영향으로 불길이 빠르게 번져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0시 40분경에 2층 누각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어 화재 5시간 만인 1시 54분 석축을 제외하고 1,2층이 거의 전소되었다.
숭례문은 이후 복원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문화재청 주관으로 5년여의 복구 과정을 거쳐 2013년 5월 4일 일반시민에 공개되었다.
이 사건은 TV생중계로 지켜본 대한민국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문화재 관리 체계 전반에 대한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특히 방재 설비의 미비, 감시 체계의 허술함, 문화재 주변의 도시 개발과 안전관리의 부조화 등이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숭례문 방화사건은 단순한 방화 사건을 넘어 국가 문화유산 보호 의식의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이었다.
방화의 범인으로 밝혀진 채모 씨는 택지개발에 따른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고 시너가 담긴 1.5리터 페트병 3통을 이용해 불을 지른 것으로 조사되었다.
당시 화재는 오후 8시 40분경 발생하였으며 소방당국이 진화 작업을 벌였으나 목조건물의 구조적 특성과 강풍의 영향으로 불길이 빠르게 번져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0시 40분경에 2층 누각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어 화재 5시간 만인 1시 54분 석축을 제외하고 1,2층이 거의 전소되었다.
숭례문은 이후 복원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문화재청 주관으로 5년여의 복구 과정을 거쳐 2013년 5월 4일 일반시민에 공개되었다.
이 사건은 TV생중계로 지켜본 대한민국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문화재 관리 체계 전반에 대한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특히 방재 설비의 미비, 감시 체계의 허술함, 문화재 주변의 도시 개발과 안전관리의 부조화 등이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숭례문 방화사건은 단순한 방화 사건을 넘어 국가 문화유산 보호 의식의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이었다.
조지아는 2003년 장미혁명으로 만연한 부패와 족벌주의의 세바르드나제 정권을 무너뜨리고 2004년 1월 4일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1] 사카슈빌리가 압승하여 30대의 젊은 나이로 조지아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조지아는 장미혁명 이후에도 정치불안이 이어졌고 2006년 [2] 남오세티야 자치주의 독립찬반투표에서 독립찬성결과로 끝나면서 잠재되어 있던 긴장이 고조된다. 러시아군이 남오세티야에 주둔하고 있었다.
조지아 입장에서는 국제법상 조지아의 영토인 [2] 남오세티야를 러시아가 무단 점거한 침략이자 내정간섭이라 주장하였다. 하지만 남오세티야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3자의 위치의 국가인 러시아군이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주둔하는 것은 흔한 현상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2007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며 [1] 사카슈빌리는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2008년 1월 재선에 성공했지만 정치적 돌파구가 필요하였다. 강한 친미, 친유럽주의 성향의 사카슈빌리는 조지아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지아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가맹 합의를 이끌어내고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4] 베이징 올림픽 개최 하루전인 2008년 8월 7일 조지아는 미국을 믿고 남오세티야를 침공하였다. 이때 평화유지군으로 있던 러시아군 18명이 사망하였다.
8월 8일 러시아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반격을 시작했고 본격 충돌이 시작되었다.
8월11~12일에 러시아군이 츠한발리 지역을 벗어나 총 공세를 개시하면서 조지아군의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조지아는 러시아에게 사실상 항복했으나 러시아는 공세를 멈추지 않고 수도인 [6] 트빌리시 앞까지 진격하여 조지아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결국 미국이 조지아에 개입할 것을 선언하였다. 일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한 러시아는 유럽연합 의장국인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긴급중재한 평화교섭에 합의하였다. 러시아는 군대를 조지에서 철수시키며 종전을 선언하였다.
조지아는 참패의 결과로 [2] 남오세티야와 [5] 압하지야는 실질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러시아-조지아 전쟁(Russo-Georgian War)으로도 불린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제43대 조지부시(George W. Bush)였으며 러시아는 제2대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이었다.
[1]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1967~현존) : 조지아의 제3대 대통령(임기 : 2004년~2013년, 2008년 재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정치가(우크라이나 국적 부여받자 이중 국적을 제한하는 조지아법에 의해 조지아국적 박탈당함)
[2] 남오세티야(South Ossetia) 또는 츠힌발리(Tskhinvali) : 조지아에 위치한 사실상의 독립상태로 통치되는 지역이자 미승인 국가로 수도는 츠힌발리이다. 정식 국호는 남오세티야 공화국-알라니야국(Republic of South Ossetia–The State of Alania)
[3] 츠힌발리(Tskhinvali) : 조지아의 중부에 위치하며 남오세티야의 수도.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Tbilisi)로부터는 약 100km 떨어져 있다
[4] 2008 베이징 올림픽 개최기간 : 2008년 8월 8일 ~ 2008년 8월 24일
[5] 압하지야(Abkhazia) : 흑해의 남쪽 연안과 캅카스의 남서쪽에 위치한 미승인 국가로 압하지야인이 주로 거주한다. 수도는 수후미(Sukhumi)이며 조지아의 영토내에 있는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6] 트빌리시(Tbilisi) : 조지아의 수도
조지아는 장미혁명 이후에도 정치불안이 이어졌고 2006년 [2] 남오세티야 자치주의 독립찬반투표에서 독립찬성결과로 끝나면서 잠재되어 있던 긴장이 고조된다. 러시아군이 남오세티야에 주둔하고 있었다.
조지아 입장에서는 국제법상 조지아의 영토인 [2] 남오세티야를 러시아가 무단 점거한 침략이자 내정간섭이라 주장하였다. 하지만 남오세티야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3자의 위치의 국가인 러시아군이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주둔하는 것은 흔한 현상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2007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며 [1] 사카슈빌리는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2008년 1월 재선에 성공했지만 정치적 돌파구가 필요하였다. 강한 친미, 친유럽주의 성향의 사카슈빌리는 조지아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지아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가맹 합의를 이끌어내고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4] 베이징 올림픽 개최 하루전인 2008년 8월 7일 조지아는 미국을 믿고 남오세티야를 침공하였다. 이때 평화유지군으로 있던 러시아군 18명이 사망하였다.
8월 8일 러시아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반격을 시작했고 본격 충돌이 시작되었다.
8월11~12일에 러시아군이 츠한발리 지역을 벗어나 총 공세를 개시하면서 조지아군의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조지아는 러시아에게 사실상 항복했으나 러시아는 공세를 멈추지 않고 수도인 [6] 트빌리시 앞까지 진격하여 조지아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결국 미국이 조지아에 개입할 것을 선언하였다. 일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한 러시아는 유럽연합 의장국인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긴급중재한 평화교섭에 합의하였다. 러시아는 군대를 조지에서 철수시키며 종전을 선언하였다.
조지아는 참패의 결과로 [2] 남오세티야와 [5] 압하지야는 실질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러시아-조지아 전쟁(Russo-Georgian War)으로도 불린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제43대 조지부시(George W. Bush)였으며 러시아는 제2대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이었다.
[1]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1967~현존) : 조지아의 제3대 대통령(임기 : 2004년~2013년, 2008년 재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정치가(우크라이나 국적 부여받자 이중 국적을 제한하는 조지아법에 의해 조지아국적 박탈당함)
[2] 남오세티야(South Ossetia) 또는 츠힌발리(Tskhinvali) : 조지아에 위치한 사실상의 독립상태로 통치되는 지역이자 미승인 국가로 수도는 츠힌발리이다. 정식 국호는 남오세티야 공화국-알라니야국(Republic of South Ossetia–The State of Alania)
[3] 츠힌발리(Tskhinvali) : 조지아의 중부에 위치하며 남오세티야의 수도.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Tbilisi)로부터는 약 100km 떨어져 있다
[4] 2008 베이징 올림픽 개최기간 : 2008년 8월 8일 ~ 2008년 8월 24일
[5] 압하지야(Abkhazia) : 흑해의 남쪽 연안과 캅카스의 남서쪽에 위치한 미승인 국가로 압하지야인이 주로 거주한다. 수도는 수후미(Sukhumi)이며 조지아의 영토내에 있는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6] 트빌리시(Tbilisi) : 조지아의 수도
1850년에 설립된 리먼 브라더스는 미국의 대표적 투자은행으로 초기에는 면화 무역과 산업금융에 주력하다가 20세기 후반 이후 투자은행, 증권, 부동산, 파생상품 등 다양한 금융 부문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저금리 정책과 부동산택시장 호황에 편승해 [1]서브프라임 모기지관련 상품에 대규모로 투자하였다. 이러한 투자는 단기적으로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지만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채무불이행이 급증하면서 손실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는 6000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채 규모가 이를 상회하면서 지급 불능 상태에 이르렀다. 미국 정부는 민간 시장의 자율 정리에 맡긴다는 방침을 고수하며 구제금융을 지원하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리먼 브라더스는 2008년 9월 15일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을 선언하였다.
이 사건은 전 세계 금융 시스템에 연쇄 충격을 일으켰다. 글로벌 금융기관들은 신용 경색에 빠졌고, 주식시장은 급락했으며, 실물경제 전반으로 불안이 확산되었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은 금융 규제의 취약성과 복잡한 파생상품 시장의 위험성을 드러내었다.
당시 투자은행 랭킹에서 [2]골드만삭스, [3]모건스탠리, [4]메릴린치와 4대 업체로 꼽혔던 글로벌 투자은행이었던 만큼 그 여파는 컸다. 이로 인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임직원도 2만5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은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규모 파산으로 등재되었다.
[1]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 신용등급이 낮은 차입자에게 높은 이자율로 제공된 주택담보대출
[2]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다국적 투자은행
[3] 모건 스탠리(Morgan Stanley) :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다국적 투자은행
[4] 메릴린치(Merrill Lynch) :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최대의 증권 회사. 2008년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인수되었으며 2019년에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증권'으로 명칭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저금리 정책과 부동산택시장 호황에 편승해 [1]서브프라임 모기지관련 상품에 대규모로 투자하였다. 이러한 투자는 단기적으로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지만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채무불이행이 급증하면서 손실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는 6000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채 규모가 이를 상회하면서 지급 불능 상태에 이르렀다. 미국 정부는 민간 시장의 자율 정리에 맡긴다는 방침을 고수하며 구제금융을 지원하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리먼 브라더스는 2008년 9월 15일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을 선언하였다.
이 사건은 전 세계 금융 시스템에 연쇄 충격을 일으켰다. 글로벌 금융기관들은 신용 경색에 빠졌고, 주식시장은 급락했으며, 실물경제 전반으로 불안이 확산되었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은 금융 규제의 취약성과 복잡한 파생상품 시장의 위험성을 드러내었다.
당시 투자은행 랭킹에서 [2]골드만삭스, [3]모건스탠리, [4]메릴린치와 4대 업체로 꼽혔던 글로벌 투자은행이었던 만큼 그 여파는 컸다. 이로 인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임직원도 2만5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은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규모 파산으로 등재되었다.
[1]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 신용등급이 낮은 차입자에게 높은 이자율로 제공된 주택담보대출
[2]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다국적 투자은행
[3] 모건 스탠리(Morgan Stanley) :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다국적 투자은행
[4] 메릴린치(Merrill Lynch) :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최대의 증권 회사. 2008년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인수되었으며 2019년에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증권'으로 명칭으로 통합되었다
인도 뭄바이 테러는 2008년 11월 26일부터 29일까지 인도 최대 도시인 [1]뭄바이에서 대규모 무장 테러가 발생했다.
이 테러는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무장단체 [2]라쉬카르-에-타이바 소속 무장대원 10명이 계획적으로 실행한 동시다발적 테러와 인질극으로 [3]타지마할 팰리스 호텔, [4]나리만 하우스, [5]차트라파티 시바지 터미널, [6]레오폴드 카페 등 여러 주요 장소에서 벌어졌다. 이 테러는 인도 역사상 최악의 테러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뭄바이 테러는 인도-파키스탄 간 갈등과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활동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1]뭄바이를 경제적, 상징적 중심지로 인도에 대한 정치적·종교적 메시지로 해석된다.
11월 26일 테러범 10명은 해상으로 [1]뭄바이에 밀입국하여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도시 곳곳에서 동시다발적 공격을 시작했다.
[5]차트라파티 시바지 터미널에서 무차별 총격으로 수십 명이 희생되었다. 관광객이 많은 [6]레오폴드 카페에서 총격이 발생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테러범들은 [3]타지마할 팰리스 호텔과 오베로이, 트라이던트 호텔을 점거하고, 외국인 관광객과 인도 시민들을 인질로 삼았다. 60시간에 걸친 대치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호텔 일부가 불에 탔다.
유대인 센터인 [4]나리만 하우스에서도 무장대원들이 인질을 잡고 교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인질과 구출 작전을 벌이던 경찰이 사망했다.
이 테러로 인하여 사망자는 175명(테러범 9명 포함), 부상자는 330여 명으로 피해 규모는 호텔과 공공시설 파손으로 관광 산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테러 직후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국제 사회는 테러와의 전쟁과 국경 간 테러리즘 문제를 강력히 비난했다.
유일한 테러범 생존자인 아즈말 카사브(Ajmal Kasab)는 체포되어 2012년에 처형되었다.
뭄바이 테러는 인도의 안보 정책에 변화를 주었고, 대 테러 대응 시스템의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국제적으로 국경을 초월한 테러리즘에 대한 위협을 다시 일깨우며 여러 나라에서 보안 조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 뭄바이(Mumbai) : 인도 서부 아라비아해 연안에 접한 항구 도시. 인도의 경제·금융·문화 중심지이자 최대 도시로, 영화산업과 항만 도시로 세계적 중요성을 지닌 대도시
[2] 라쉬카르-에-타이바(Lashkar-e-Taiba) :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로 인도 카슈미르 분쟁과 대 인도 테러 활동에 관여해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3] 타지마할 팰리스 호텔(The Taj Mahal Palace, Mumbai) : 인도 뭄바이의 고급 호텔. 호텔 건물은 100년이 넘었고, 565개의 객실이 있다. 1903년에 오픈했다
[4] 나리만 하우스(Nariman House) : 뭄바이에 위치한 유대인 문화센터 및 종교 시설
[5] 차트라파티 시바지 터미널(CST, Chhatrapati Shivaji Terminal) : 인도 뭄바이의 주요 역사적 기차역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6] 레오폴드 카페(Leopold Cafe & Bar) : 인도 뭄바이에 있는 식당이자 카페
[7] 카슈미르(Kashmir) : 인도-파키스탄 국경과 인도-중국 국경 지역.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유권을 두고 벌이는 장기적 갈등으로, 종교적·민족적 대립과 국경 분쟁이 얽힌 남아시아의 핵심 분쟁지역
이 테러는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무장단체 [2]라쉬카르-에-타이바 소속 무장대원 10명이 계획적으로 실행한 동시다발적 테러와 인질극으로 [3]타지마할 팰리스 호텔, [4]나리만 하우스, [5]차트라파티 시바지 터미널, [6]레오폴드 카페 등 여러 주요 장소에서 벌어졌다. 이 테러는 인도 역사상 최악의 테러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뭄바이 테러는 인도-파키스탄 간 갈등과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활동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1]뭄바이를 경제적, 상징적 중심지로 인도에 대한 정치적·종교적 메시지로 해석된다.
11월 26일 테러범 10명은 해상으로 [1]뭄바이에 밀입국하여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도시 곳곳에서 동시다발적 공격을 시작했다.
[5]차트라파티 시바지 터미널에서 무차별 총격으로 수십 명이 희생되었다. 관광객이 많은 [6]레오폴드 카페에서 총격이 발생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테러범들은 [3]타지마할 팰리스 호텔과 오베로이, 트라이던트 호텔을 점거하고, 외국인 관광객과 인도 시민들을 인질로 삼았다. 60시간에 걸친 대치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호텔 일부가 불에 탔다.
유대인 센터인 [4]나리만 하우스에서도 무장대원들이 인질을 잡고 교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인질과 구출 작전을 벌이던 경찰이 사망했다.
이 테러로 인하여 사망자는 175명(테러범 9명 포함), 부상자는 330여 명으로 피해 규모는 호텔과 공공시설 파손으로 관광 산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테러 직후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국제 사회는 테러와의 전쟁과 국경 간 테러리즘 문제를 강력히 비난했다.
유일한 테러범 생존자인 아즈말 카사브(Ajmal Kasab)는 체포되어 2012년에 처형되었다.
뭄바이 테러는 인도의 안보 정책에 변화를 주었고, 대 테러 대응 시스템의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국제적으로 국경을 초월한 테러리즘에 대한 위협을 다시 일깨우며 여러 나라에서 보안 조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 뭄바이(Mumbai) : 인도 서부 아라비아해 연안에 접한 항구 도시. 인도의 경제·금융·문화 중심지이자 최대 도시로, 영화산업과 항만 도시로 세계적 중요성을 지닌 대도시
[2] 라쉬카르-에-타이바(Lashkar-e-Taiba) :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로 인도 카슈미르 분쟁과 대 인도 테러 활동에 관여해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3] 타지마할 팰리스 호텔(The Taj Mahal Palace, Mumbai) : 인도 뭄바이의 고급 호텔. 호텔 건물은 100년이 넘었고, 565개의 객실이 있다. 1903년에 오픈했다
[4] 나리만 하우스(Nariman House) : 뭄바이에 위치한 유대인 문화센터 및 종교 시설
[5] 차트라파티 시바지 터미널(CST, Chhatrapati Shivaji Terminal) : 인도 뭄바이의 주요 역사적 기차역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6] 레오폴드 카페(Leopold Cafe & Bar) : 인도 뭄바이에 있는 식당이자 카페
[7] 카슈미르(Kashmir) : 인도-파키스탄 국경과 인도-중국 국경 지역.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유권을 두고 벌이는 장기적 갈등으로, 종교적·민족적 대립과 국경 분쟁이 얽힌 남아시아의 핵심 분쟁지역
팔레스타인은 가자지구(Gaza)와 서안지구(West Bank)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하마스가 통치하고 있다. 반면 서안지구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탈레스타인 자치정부인 파타정권이 통치하고 있다.
가자 전쟁은 파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에서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로켓포 공격을 하자 이스라엘은 대대적인 가자지구를 공습하여 시작되었다. 1차 가자전쟁이라고도 한다.
전황은 이스라엘의 우세로 가자지구를 초토화 시킨뒤 철수하였다. 이 전쟁은 2009년 1월 18일 양측이 휴전을 선언하면서 끝나게 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13명 사망, 523명 부상자, 가자지구는 1,380명 사망, 5,380명이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 파타(PA,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에서 활동
*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 요르단강 서안 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 가자 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가자 전쟁은 파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에서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로켓포 공격을 하자 이스라엘은 대대적인 가자지구를 공습하여 시작되었다. 1차 가자전쟁이라고도 한다.
전황은 이스라엘의 우세로 가자지구를 초토화 시킨뒤 철수하였다. 이 전쟁은 2009년 1월 18일 양측이 휴전을 선언하면서 끝나게 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13명 사망, 523명 부상자, 가자지구는 1,380명 사망, 5,380명이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 파타(PA,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에서 활동
*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 요르단강 서안 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 가자 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아이티 지진은 현지시각 2010년 1월 12일 오후 4시 53분 10초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에서 발생한 지진이다.
아이티 지역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지각판이 만나는 경계 지점이다. 많은 학자들은 북쪽의 북아메리카판과 남쪽의 카리브판이 수평으로 엇갈리면서 서로 충돌하여 발생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인구가 밀집한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고작 25km 떨어진 지역의 지하 13km 지점에서 리히터 규모 7.0의 강진 발생했기 때문에 피해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지진으로 약 30만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전체인구 1/3정도인 3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또한 아이티 대통령궁, 국회의사당, 아이티 대성당등 포르토프랭스의 주요 건물들뿐만 아니라 교도소, 공항, 병원과 같은 시설도 붕괴되었거나 손상됐다.
교도소가 무너져 재소자들(4천 5백여명)이 탈출해 방화, 약탈까지 벌어지는 상황이 연출되었으며 부상자는 넘쳐나는데 병원의 붕괴로 의료기반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였고 아이티 정부의 의료보건국까지 무너져 아이티의 보건 체계 60% 이상 파괴되어 국가적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었고 무능력해진 정부는 결국 홰외국들의 원조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성금과 구호 물품을 지원하였지만 피해가 워낙 컸고 여진이 끊임없이 발생하여 구조에 난항을 겪었다. 11년이 지난 2021년에도 무너진 상태 그대로이며 아이티 주민들의 삶은 극심한 경제난과 정치적 긴장이 심화되고 있다고 한다.
* 리히터 규모(Richter magnitude scale) : 1935년 찰스 리히터(Charles Richter)가 만든 지진 규모. 지진에 의해 리히터 지진계에 기록된 진동수치이다. 지표상 한 지점에서 나타나는 진동의 세기에 관한 척도로 측정된 지진파의 최대 진폭으로 방출된 에너지의 양을 측정할 수 있다(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포르토프랭스(프랑스어: Port-au-Prince) : 인구 약 84만 6,200명의 아이티의 수도
* 카리브판(Caribbean Plate) : 카리브해 및 중앙아메리카의 일부, 남아메리카 대륙 북부의 일부 지각 및 맨틀 위쪽의 암권을 형성하는 대륙판
* 북아메리카판(North American Plate) : 아이슬란드 서부, 그린란드, 북아메리카 대륙 및 동시베리아에 걸쳐 존재하는 지각 및 맨틀 위쪽의 암권을 형성하는 대륙판
아이티 지역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지각판이 만나는 경계 지점이다. 많은 학자들은 북쪽의 북아메리카판과 남쪽의 카리브판이 수평으로 엇갈리면서 서로 충돌하여 발생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인구가 밀집한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고작 25km 떨어진 지역의 지하 13km 지점에서 리히터 규모 7.0의 강진 발생했기 때문에 피해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지진으로 약 30만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전체인구 1/3정도인 3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또한 아이티 대통령궁, 국회의사당, 아이티 대성당등 포르토프랭스의 주요 건물들뿐만 아니라 교도소, 공항, 병원과 같은 시설도 붕괴되었거나 손상됐다.
교도소가 무너져 재소자들(4천 5백여명)이 탈출해 방화, 약탈까지 벌어지는 상황이 연출되었으며 부상자는 넘쳐나는데 병원의 붕괴로 의료기반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였고 아이티 정부의 의료보건국까지 무너져 아이티의 보건 체계 60% 이상 파괴되어 국가적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었고 무능력해진 정부는 결국 홰외국들의 원조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성금과 구호 물품을 지원하였지만 피해가 워낙 컸고 여진이 끊임없이 발생하여 구조에 난항을 겪었다. 11년이 지난 2021년에도 무너진 상태 그대로이며 아이티 주민들의 삶은 극심한 경제난과 정치적 긴장이 심화되고 있다고 한다.
* 리히터 규모(Richter magnitude scale) : 1935년 찰스 리히터(Charles Richter)가 만든 지진 규모. 지진에 의해 리히터 지진계에 기록된 진동수치이다. 지표상 한 지점에서 나타나는 진동의 세기에 관한 척도로 측정된 지진파의 최대 진폭으로 방출된 에너지의 양을 측정할 수 있다(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포르토프랭스(프랑스어: Port-au-Prince) : 인구 약 84만 6,200명의 아이티의 수도
* 카리브판(Caribbean Plate) : 카리브해 및 중앙아메리카의 일부, 남아메리카 대륙 북부의 일부 지각 및 맨틀 위쪽의 암권을 형성하는 대륙판
* 북아메리카판(North American Plate) : 아이슬란드 서부, 그린란드, 북아메리카 대륙 및 동시베리아에 걸쳐 존재하는 지각 및 맨틀 위쪽의 암권을 형성하는 대륙판
2010년 3월 26일 21시 22분, 대한민국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천안함(PCC-772)이 훈련 도중 침몰한 사건이다.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에 따라 천안함이 조선인민군 해군 잠수정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 초계함 : 연안 경비 및 초계임무를 수행하며 해상 상태가 비교적 평온한 상태에서만 작전할 수 있는 배수량 1000톤 내외의 군함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에 따라 천안함이 조선인민군 해군 잠수정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 초계함 : 연안 경비 및 초계임무를 수행하며 해상 상태가 비교적 평온한 상태에서만 작전할 수 있는 배수량 1000톤 내외의 군함
2010년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는 2010년 4월 10일 폴란드의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등이 탑승한 폴란드 공군 소속 항공기 투폴레프 Tu-154M가 러시아 스몰렌스크 인근에서 추락하여 탑승자(승객 87명, 승무원 9명)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카친스키 대통령은 카틴학살 70주년 추모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폴란드 바르샤바를 떠나 러시아 스몰렌스크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비행기에는 대통령외에 영부인과 비서실장, 폴란드 중앙은행 총재, 폴란드군 총참모장 및 각군참모총장, 외무차관, 야당 대선 후보 2명등 고위 관계자 다수가 탑승했다.
사고기는 스몰렌스크 항공 기지에 진입하던 도중에 기지로 부터 1.5km 떨어진 지점에서 추락했다. 이 추락사고는 러시아의 정치적 음모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기상악화로 관제사의 착륙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강제착륙을 시도하다가 사고가 난 것으로 2016년 4월에 사고기의 블랙박스가 공개되면서 음모론 제기는 줄어들었다.
이 사고로 폴란드 대통령과 영부인을 포함하여 수뇌부 전부가 사망하였다. 공교롭게도 스몰렌스크의 카틴 숲에서 학살당한 폴란드인들도 폴란드의 고급 장교와 부사관, 지식인, 기술자 등 폴란드를 이끄는 엘리트층이었다. 방법과 시기, 규모가 다르지만 카틴의 비극이 70년 후에 그대로 재연되었다.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는 폴란드 전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으며 아직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매년 4월 10일은 폴란드 전국이 비탄의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 레흐 알렉산데르 카친스키(Lech Aleksander Kaczynski, 1949년~2010년) : 폴란드 4대 대통령. 재위 : 2005년~2010년
* Tu-154 : 소련의 항공기 제작사 투폴레프에서 만든 3발 중단거리 제트추진 협동체 여객기로 보잉 727과 동급인 항공기. Tu-154M은 Tu-154의 업그레이드 기종
* 스몰렌스크(Smolensk) :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서남쪽으로 362km 정도 떨어진 도시로 인접국가는 벨로루시이다
* 카틴학살(Katyn) :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인 1940년 4월 3일부터 약 두 달간 소련 경찰기관인 NKVD가 스몰렌스크 근방 카틴 숲에서 폴란드인을 대량 학살하고 암매장한 사건
카친스키 대통령은 카틴학살 70주년 추모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폴란드 바르샤바를 떠나 러시아 스몰렌스크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비행기에는 대통령외에 영부인과 비서실장, 폴란드 중앙은행 총재, 폴란드군 총참모장 및 각군참모총장, 외무차관, 야당 대선 후보 2명등 고위 관계자 다수가 탑승했다.
사고기는 스몰렌스크 항공 기지에 진입하던 도중에 기지로 부터 1.5km 떨어진 지점에서 추락했다. 이 추락사고는 러시아의 정치적 음모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기상악화로 관제사의 착륙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강제착륙을 시도하다가 사고가 난 것으로 2016년 4월에 사고기의 블랙박스가 공개되면서 음모론 제기는 줄어들었다.
이 사고로 폴란드 대통령과 영부인을 포함하여 수뇌부 전부가 사망하였다. 공교롭게도 스몰렌스크의 카틴 숲에서 학살당한 폴란드인들도 폴란드의 고급 장교와 부사관, 지식인, 기술자 등 폴란드를 이끄는 엘리트층이었다. 방법과 시기, 규모가 다르지만 카틴의 비극이 70년 후에 그대로 재연되었다.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는 폴란드 전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으며 아직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매년 4월 10일은 폴란드 전국이 비탄의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 레흐 알렉산데르 카친스키(Lech Aleksander Kaczynski, 1949년~2010년) : 폴란드 4대 대통령. 재위 : 2005년~2010년
* Tu-154 : 소련의 항공기 제작사 투폴레프에서 만든 3발 중단거리 제트추진 협동체 여객기로 보잉 727과 동급인 항공기. Tu-154M은 Tu-154의 업그레이드 기종
* 스몰렌스크(Smolensk) :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서남쪽으로 362km 정도 떨어진 도시로 인접국가는 벨로루시이다
* 카틴학살(Katyn) :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인 1940년 4월 3일부터 약 두 달간 소련 경찰기관인 NKVD가 스몰렌스크 근방 카틴 숲에서 폴란드인을 대량 학살하고 암매장한 사건
2011년 3월 11일 14시 46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일본 후쿠시마현 오쿠마마치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한 사고이며, 구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동급인 7등급 사고이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는 제1발전소와 제2발전소 두 곳에 있는데, 사고가 난 것은 제1발전소이며 누출된 방사능 물질로 인해 제1원자력 발전소 인근 지대의 방사능 오염이 심각한 상황이다.
체르노빌은 1기의 원자로가 폭발하였지만 후쿠시마는 손상된 원자로 4개중 3개가 폭발하였다. 다만, 전체적인 총 방사성 물질의 유출량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 비해 적다고 한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는 제1발전소와 제2발전소 두 곳에 있는데, 사고가 난 것은 제1발전소이며 누출된 방사능 물질로 인해 제1원자력 발전소 인근 지대의 방사능 오염이 심각한 상황이다.
체르노빌은 1기의 원자로가 폭발하였지만 후쿠시마는 손상된 원자로 4개중 3개가 폭발하였다. 다만, 전체적인 총 방사성 물질의 유출량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 비해 적다고 한다.
시리아 내전은 2011년 [1]아랍의 봄에서 시작된 시위가 [2]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강경 진압으로 격화되면서 발생했다.
민주화 요구와 경제적 불만을 표출하던 시위대는 정부의 폭력적 대응으로 무장 반군으로 변모했고, 내전으로 확산되었다.
시리아 정부군, 반군,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쿠르드족, 그리고 주변국들과 국제적인 강대국들이 얽혀있는 복잡한 갈등을 띠었던 내전이다.
시리아 정부군은 러시아와 이란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며, 반군은 미국이 지원하였다.
2024년 12월 8일, 수도 다마스쿠스가 반군에게 함락되자 [2]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알아사드 대통령은 53년 부자세습 독재 철권 통치가 막을 내렸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중인 러시아와 정권을 보호하고 방어하느라 효과적으로 대응할 능력이 없어진 이란이 여력이 없어지면서 시리아 정권 몰락을 초래했다
시리아 내전은 50만명 이상 사망자와 1,300만 명 이상 난민 사태의 결과를 낳았다
[1] 아랍의 봄 : 아랍의 봄은 2010년부터 시작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반정부 시위와 혁명 운동이다. 알제리, 바레인, 이집트, 이란, 요르단, 리비아, 모로코, 튀니지, 예멘 등 중동(서아시아)과 북아프리카 일부 지역 모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독재와 부패에 대한 반발로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으며 현재가지도 여파가 미치고 있다. 이로 인해 몇몇 국가에서는 정권이 교체되었으나, 정치적 불안과 내전이 이어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민주화의 성과는 국가마다 크게 달랐다.
[2] 바샤르 알아사드(Bashar al-Assad, 1965년 9월 11일 ~ ) : 시리아의 제3대 대통령. 재임기간(2000년 7월 17일 ~ 2024년 12월 8일), 하페즈 알아사드 제2대 대통령의 아들이다
민주화 요구와 경제적 불만을 표출하던 시위대는 정부의 폭력적 대응으로 무장 반군으로 변모했고, 내전으로 확산되었다.
시리아 정부군, 반군,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쿠르드족, 그리고 주변국들과 국제적인 강대국들이 얽혀있는 복잡한 갈등을 띠었던 내전이다.
시리아 정부군은 러시아와 이란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며, 반군은 미국이 지원하였다.
2024년 12월 8일, 수도 다마스쿠스가 반군에게 함락되자 [2]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알아사드 대통령은 53년 부자세습 독재 철권 통치가 막을 내렸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중인 러시아와 정권을 보호하고 방어하느라 효과적으로 대응할 능력이 없어진 이란이 여력이 없어지면서 시리아 정권 몰락을 초래했다
시리아 내전은 50만명 이상 사망자와 1,300만 명 이상 난민 사태의 결과를 낳았다
[1] 아랍의 봄 : 아랍의 봄은 2010년부터 시작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반정부 시위와 혁명 운동이다. 알제리, 바레인, 이집트, 이란, 요르단, 리비아, 모로코, 튀니지, 예멘 등 중동(서아시아)과 북아프리카 일부 지역 모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독재와 부패에 대한 반발로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으며 현재가지도 여파가 미치고 있다. 이로 인해 몇몇 국가에서는 정권이 교체되었으나, 정치적 불안과 내전이 이어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민주화의 성과는 국가마다 크게 달랐다.
[2] 바샤르 알아사드(Bashar al-Assad, 1965년 9월 11일 ~ ) : 시리아의 제3대 대통령. 재임기간(2000년 7월 17일 ~ 2024년 12월 8일), 하페즈 알아사드 제2대 대통령의 아들이다
팔레스타인은 [4]가자지구와 [3]서안지구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2]하마스가 통치하고 있다. 반면 서안지구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탈레스타인 자치정부인[1] 파타정권이 통치하고 있다.
2012년 11월 14일부터 11월 21일 오후 9시까지 일어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면전이다. 이전의 전쟁에 빗대어 2차 가자전쟁이라고 명명되기도 한다.
2012년 11월 14일,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공습하여 하마스 최고 군 최고 사령관인 아흐마드 알 자바리가 사망하였다. 이에 하마스는 로켓으로 보복공격을 하였으며 이스라엘은 [5]아이언돔으로 맞섰다. 이처럼 하마스의 반격도 있지만 사실상은 팔레스타인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사상자는 팔레스타인에서 최소 139명이 사망하고 최소 900명이 부상당했으며 이스라엘은 5명이 죽고 80명이 부상당했다. 단순한 비율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팔레스타인의 사망자 절대수가 민간인이다.
하마스입장에서 자바리 사령관이 사망한 것 외에는 별다른 피해도 없고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지지여론만 굳세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입장에서도 '전쟁 자체는 지지하더라도 이번 전쟁을 이겼다 볼 수는 없다'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더구나 2012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이 사상 처음으로 유엔 비회원 참관국가(참관 단체라고 나라로 인정도 못 받았다)로 인정받았다. 이는 국제형사재판소와 유엔 산하기구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고 이스라엘이 함부로 포격한다면 형사재판소에 제소가 가능하고 유엔군이 주둔할 명분이 주어졌다.
유엔상임이사국 미국이 결사반대하였지만 다른 이사국인 러시아, 중국, 프랑스가 지지하고 영국도 기권은 했지만 반대는 하지 않는다는 태도라서 유엔 평화유지군이 일부 주둔하는 것에 대하여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막을 수도 없게 되었다. [출처 : 나무위키]
[1] 파타(PA,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에서 활동
[2]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3] 요르단강 서안 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가자 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5] 아이언 돔(Iron Dome) : 이스라엘 라파엘사와 이스라엘 항공우주 산업에서 개발한 전천후 이동식 방공 시스템
2012년 11월 14일부터 11월 21일 오후 9시까지 일어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면전이다. 이전의 전쟁에 빗대어 2차 가자전쟁이라고 명명되기도 한다.
2012년 11월 14일,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공습하여 하마스 최고 군 최고 사령관인 아흐마드 알 자바리가 사망하였다. 이에 하마스는 로켓으로 보복공격을 하였으며 이스라엘은 [5]아이언돔으로 맞섰다. 이처럼 하마스의 반격도 있지만 사실상은 팔레스타인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사상자는 팔레스타인에서 최소 139명이 사망하고 최소 900명이 부상당했으며 이스라엘은 5명이 죽고 80명이 부상당했다. 단순한 비율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팔레스타인의 사망자 절대수가 민간인이다.
하마스입장에서 자바리 사령관이 사망한 것 외에는 별다른 피해도 없고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지지여론만 굳세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입장에서도 '전쟁 자체는 지지하더라도 이번 전쟁을 이겼다 볼 수는 없다'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더구나 2012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이 사상 처음으로 유엔 비회원 참관국가(참관 단체라고 나라로 인정도 못 받았다)로 인정받았다. 이는 국제형사재판소와 유엔 산하기구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고 이스라엘이 함부로 포격한다면 형사재판소에 제소가 가능하고 유엔군이 주둔할 명분이 주어졌다.
유엔상임이사국 미국이 결사반대하였지만 다른 이사국인 러시아, 중국, 프랑스가 지지하고 영국도 기권은 했지만 반대는 하지 않는다는 태도라서 유엔 평화유지군이 일부 주둔하는 것에 대하여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막을 수도 없게 되었다. [출처 : 나무위키]
[1] 파타(PA,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에서 활동
[2]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3] 요르단강 서안 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가자 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5] 아이언 돔(Iron Dome) : 이스라엘 라파엘사와 이스라엘 항공우주 산업에서 개발한 전천후 이동식 방공 시스템
유로마이단은 당시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친러 정책에 반대해 2013년 11월 21일에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 광장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이며 우크라이나 정부의 강경진압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친서방 정권을 수립한 사건이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럽연합(EU) 가입 및 경제협력 진행을 포기하자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경제가 러시아에 예속당할 것이라 주장하며 크게 반발해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2013년 11월 21일 2천여명의 시민들이 키예프 마이단 광장에 모이고 소셜 네크워크를 통하여 시위대를 모집하였다. 다음날 유럽연합(EU) 가입 교섭을 잠정 중단한 정부의 결정을 항의하기 위해 반정부 및 친서방 시위대가 모여 시위를 열었다.
11월 24일에는 독립광장에 모인 5만명에서 10만명의 시위대가 거대한 행진을 진행했고 경찰은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1월 29일에 우크라이나 정부가 유럽연합 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 확인되자 시위대는 만 명으로 늘어났고 무장한 경찰은 시위대 뿐 아니라 주변의 민간인들도 무력으로 진압했다.
12월 1일 시위대 봉기는 전날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키예프 여러 지역의 동시다발적 봉기였으며 12월 1일은 시위대가 정부 청사를 처음으로 점령하게 된 날이기도 했다.
2014년 2월 18일 이후 시위는 전국적인 봉기로 확대되었으며 결국 사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시위대를 주도한 야권과 정부간 협상도 성과 없이 결렬되어 2014년 2월 19일 이후 양측의 충돌은 본격적인 무력 동원과 유혈 충돌로 확대되었다.
2월 23일 시위대가 키예프를 장악하자 빅토르 야누코비치 태통령은 피난길에 올랐으며 우크라이나 의회는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탄핵했다. 그리고 올렉산드르 투르치노프 신임의장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도록 결정했다. 의회는 5월 25일에 조기 대선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이 물러나고 친서방 세력이 급부상하자 우크라이나는 친유럽 성향의 서부와 친러시아 성향의 동부로 나뉘어 서로 합법 정부를 칭하는 이중권력 상태에 놓였다.
유로마이단 사건은 친서방 정권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와 러시아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부의 친러시아계 주민들이 분리독립을 주장해 2014년 크림반도 위기와 내전인 돈바스 전쟁이 일어난 계기가 되었다. 돈바스 전쟁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 마이단광장 : 페르시아어 '메이단'에서 온 단어로 광장을 뜻한다
*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1950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4대 대통령(재위: 2010년 2월 25일~2014년 2월 22일). 5년 임기중 탄핵됨
* 키예프(Kyiv) : 우크라이나의 수도
* 크림반도(Crimean Peninsula) : 흑해 북부연안에 위치한 반도이며 2014년 크림 위기이후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인정하지 않고있다
* 돈바스 전쟁(War in Donbas) :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 2014년 4월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천러 성향의 반군과의 전쟁
* 올렉산드르 투르치노프(Oleksandr Turchynov, 1964년 3월 31일~) : 현재 우크라이나 국회의장이며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임시 대통령을 지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럽연합(EU) 가입 및 경제협력 진행을 포기하자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경제가 러시아에 예속당할 것이라 주장하며 크게 반발해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2013년 11월 21일 2천여명의 시민들이 키예프 마이단 광장에 모이고 소셜 네크워크를 통하여 시위대를 모집하였다. 다음날 유럽연합(EU) 가입 교섭을 잠정 중단한 정부의 결정을 항의하기 위해 반정부 및 친서방 시위대가 모여 시위를 열었다.
11월 24일에는 독립광장에 모인 5만명에서 10만명의 시위대가 거대한 행진을 진행했고 경찰은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1월 29일에 우크라이나 정부가 유럽연합 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 확인되자 시위대는 만 명으로 늘어났고 무장한 경찰은 시위대 뿐 아니라 주변의 민간인들도 무력으로 진압했다.
12월 1일 시위대 봉기는 전날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키예프 여러 지역의 동시다발적 봉기였으며 12월 1일은 시위대가 정부 청사를 처음으로 점령하게 된 날이기도 했다.
2014년 2월 18일 이후 시위는 전국적인 봉기로 확대되었으며 결국 사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시위대를 주도한 야권과 정부간 협상도 성과 없이 결렬되어 2014년 2월 19일 이후 양측의 충돌은 본격적인 무력 동원과 유혈 충돌로 확대되었다.
2월 23일 시위대가 키예프를 장악하자 빅토르 야누코비치 태통령은 피난길에 올랐으며 우크라이나 의회는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탄핵했다. 그리고 올렉산드르 투르치노프 신임의장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도록 결정했다. 의회는 5월 25일에 조기 대선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이 물러나고 친서방 세력이 급부상하자 우크라이나는 친유럽 성향의 서부와 친러시아 성향의 동부로 나뉘어 서로 합법 정부를 칭하는 이중권력 상태에 놓였다.
유로마이단 사건은 친서방 정권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와 러시아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부의 친러시아계 주민들이 분리독립을 주장해 2014년 크림반도 위기와 내전인 돈바스 전쟁이 일어난 계기가 되었다. 돈바스 전쟁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 마이단광장 : 페르시아어 '메이단'에서 온 단어로 광장을 뜻한다
*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1950년~현존) : 우크라이나의 4대 대통령(재위: 2010년 2월 25일~2014년 2월 22일). 5년 임기중 탄핵됨
* 키예프(Kyiv) : 우크라이나의 수도
* 크림반도(Crimean Peninsula) : 흑해 북부연안에 위치한 반도이며 2014년 크림 위기이후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인정하지 않고있다
* 돈바스 전쟁(War in Donbas) :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 2014년 4월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천러 성향의 반군과의 전쟁
* 올렉산드르 투르치노프(Oleksandr Turchynov, 1964년 3월 31일~) : 현재 우크라이나 국회의장이며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임시 대통령을 지냈다
소비에트 연방 수립당시 크림반도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해 있었다. 1954년 [1] 니키타 흐루쇼프의 제안으로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시회주의 공화국에 넘어갔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어 자치 공화국이 되었다. 크림 자치 공화국은 1992년 2월 크림 반도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개헌안을 채택했으나, 그해 6월 우크라이나 중앙 정부와의 합의를 통해 우크라이나 잔류에 합의하였다.
2014년 2월 우크라이나 [2] 유로마이단을 계기로 친러세력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물러나고 친서방 세력이 임시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월 27일 친러시아 성향의 [3] 세르게이 악쇼노프가 크림 자치 공화국의 총리가 되었다.
2014년 3월 1일 세르게이 악쇼노프는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크림 반도에 러시아 무장 병력이 투입되면서 사실상 크림 반도를 장악하였다. 러시아는 양국 간 협정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우크라이나 과도정부는 '침공'으로 간주하며 즉각 반발했다.
크림 자치 공화국과 세바스토폴 시는 3월 11일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 선언을 하였으며 세르게이 악쇼노프주도하에 러시아 합병 찬반 투표를 주도하였다. 3월 17일에 실시된 투표결과 96.77%의 찬성으로 종료되었다.
3월 18일에 [4]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연방 대통령과 크림 공화국의 러시아 연방 귀속을 위한 합병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이 체결되면서 크림 자치 공화국은 러시아의 공화국인 크림 공화국이 되었다.
3월 20일 우크라이나는 크림내 자국 병력을 모두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1]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 1894년~1971년) : 러시아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 겸 공산당 서기장을, 1958년부터는 소련 총리와 겸 소련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2] 유로마이단 : 우크라이나 정부의 유럽연합 가입올 반대해 2013년 11월 21일에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 광장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이며 결국 구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친서방 정권을 수립한 사건이다.
[3] 세르게이 악쇼노프(Sergey Aksyonov, 972년 11월 26일~) : 러시아령 크림 공화국의 정치가. 크림 공화국 총리가 되기 직전까지 존재감 없는 정치인이었다
[4]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1952년~ ) : 러시아 제4대 대통령(2012년 5월 7일~현재), 러시아 제2대 대통령(2000년 5월7일~2008년 5월7일), 러시아 제6대총리( 1999년 8월 16일~2000년 5월 7일). 러시아 제10대 총리(2008년 5월 8일~2012년 5월 7일)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어 자치 공화국이 되었다. 크림 자치 공화국은 1992년 2월 크림 반도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개헌안을 채택했으나, 그해 6월 우크라이나 중앙 정부와의 합의를 통해 우크라이나 잔류에 합의하였다.
2014년 2월 우크라이나 [2] 유로마이단을 계기로 친러세력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물러나고 친서방 세력이 임시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월 27일 친러시아 성향의 [3] 세르게이 악쇼노프가 크림 자치 공화국의 총리가 되었다.
2014년 3월 1일 세르게이 악쇼노프는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크림 반도에 러시아 무장 병력이 투입되면서 사실상 크림 반도를 장악하였다. 러시아는 양국 간 협정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우크라이나 과도정부는 '침공'으로 간주하며 즉각 반발했다.
크림 자치 공화국과 세바스토폴 시는 3월 11일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 선언을 하였으며 세르게이 악쇼노프주도하에 러시아 합병 찬반 투표를 주도하였다. 3월 17일에 실시된 투표결과 96.77%의 찬성으로 종료되었다.
3월 18일에 [4]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연방 대통령과 크림 공화국의 러시아 연방 귀속을 위한 합병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이 체결되면서 크림 자치 공화국은 러시아의 공화국인 크림 공화국이 되었다.
3월 20일 우크라이나는 크림내 자국 병력을 모두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1]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 1894년~1971년) : 러시아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 겸 공산당 서기장을, 1958년부터는 소련 총리와 겸 소련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2] 유로마이단 : 우크라이나 정부의 유럽연합 가입올 반대해 2013년 11월 21일에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 광장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이며 결국 구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친서방 정권을 수립한 사건이다.
[3] 세르게이 악쇼노프(Sergey Aksyonov, 972년 11월 26일~) : 러시아령 크림 공화국의 정치가. 크림 공화국 총리가 되기 직전까지 존재감 없는 정치인이었다
[4]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1952년~ ) : 러시아 제4대 대통령(2012년 5월 7일~현재), 러시아 제2대 대통령(2000년 5월7일~2008년 5월7일), 러시아 제6대총리( 1999년 8월 16일~2000년 5월 7일). 러시아 제10대 총리(2008년 5월 8일~2012년 5월 7일)
우크라이나 돈바스[1] 지역에서 2014년 4월부터 발발하여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 성향의 반군사이의 전쟁이다.
반군의 목적은 독립 또는 러시아와의 합병이나 우크라이나 정부를 포함한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민족, 러시아 민족, 벨라루스 민족으로 구성된 동슬라이브계 민존이다.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로 강[2]을 중심으로 서부에는 우크라이나 민족, 동부는 러시아 민족이 각각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2013년 11월에 시작된 유로마이단[3]의 여파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친러파들이 시위를 일으키고 반정부 단체가 만들어졌다. 이 시위는 러시아로 크림 공화국이 합병되자 우크라이나의 남동부 지역의 대규모 친러시아 시위로 발전했다.
돈바스를 가리키는 도네츠크[4], 루한스크[5] 지역에서 분리주의를 내세우며 독립투표를 실시/가결하여 인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하며 우크라이나 정부와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군수물자등이 우크라이나 정부의 허가 없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서 들어간 것이 확인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러시아 국경에 있는 우크라이나 군이 준둔해 있는 곳에 대규모 공격이 진행되었고 이후 우크라니아 정부군의 공격과 반군의 저항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속되고 있다.
[1] 돈바스(Donbas) : 우크라이나 동부의 루간스크 주와 도네츠크 주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해당지역이 도네츠 강 주변에 있어 도네츠 분지의 축약어로 돈바스로 불린다. 중심 도시는 도네츠크
[2] 드네프르 강(Dnieper River) : 러시아 서부의 발다이 구릉지대에 내린 눈이 녹아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거쳐 흑해로 흘러드는 길이 2290km의 강
[3] 유로마이단 : 우크라이나 정부의 유럽연합 가입올 반대해 2013년 11월 21일에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 광장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이며 결국 구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친서방 정권을 수립한 사건이다.
[4] 루한스크(Luhansk) 공화국 :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에서 분리 독립한 미승인 국가
[5] 도네츠크(Donetsk) 공화국 :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에서 분리 독립한 미승인 국가
반군의 목적은 독립 또는 러시아와의 합병이나 우크라이나 정부를 포함한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민족, 러시아 민족, 벨라루스 민족으로 구성된 동슬라이브계 민존이다.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로 강[2]을 중심으로 서부에는 우크라이나 민족, 동부는 러시아 민족이 각각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2013년 11월에 시작된 유로마이단[3]의 여파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친러파들이 시위를 일으키고 반정부 단체가 만들어졌다. 이 시위는 러시아로 크림 공화국이 합병되자 우크라이나의 남동부 지역의 대규모 친러시아 시위로 발전했다.
돈바스를 가리키는 도네츠크[4], 루한스크[5] 지역에서 분리주의를 내세우며 독립투표를 실시/가결하여 인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하며 우크라이나 정부와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군수물자등이 우크라이나 정부의 허가 없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서 들어간 것이 확인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러시아 국경에 있는 우크라이나 군이 준둔해 있는 곳에 대규모 공격이 진행되었고 이후 우크라니아 정부군의 공격과 반군의 저항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속되고 있다.
[1] 돈바스(Donbas) : 우크라이나 동부의 루간스크 주와 도네츠크 주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해당지역이 도네츠 강 주변에 있어 도네츠 분지의 축약어로 돈바스로 불린다. 중심 도시는 도네츠크
[2] 드네프르 강(Dnieper River) : 러시아 서부의 발다이 구릉지대에 내린 눈이 녹아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거쳐 흑해로 흘러드는 길이 2290km의 강
[3] 유로마이단 : 우크라이나 정부의 유럽연합 가입올 반대해 2013년 11월 21일에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 광장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이며 결국 구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친서방 정권을 수립한 사건이다.
[4] 루한스크(Luhansk) 공화국 :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에서 분리 독립한 미승인 국가
[5] 도네츠크(Donetsk) 공화국 :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에서 분리 독립한 미승인 국가
인천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4월 15일 09시에 출발하여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는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다음날 오전 8시 48분경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고 약 2시간 만에 완전히 침몰했다. 이 배에는 총 476명이 탑승해 있었으며, 이 중 299명이 사망했으며 5명은 실종되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수학여행을 가던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과 교사들로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단원고 학생 325명 중 250명이 사망하고 교사 11명이 사망하였다.
사고 접수 후, 해양경찰은 출동 및 구조에 나섰다. 9시25분 서해해경청 소속 헬기와 해경이 잇따라 도착했지만 세월호와 교신조차 하지 않았다. 해양경찰청과 정부의 초기 대응도 혼란스러웠으며, 구조 작업은 지연되거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고 발생 몇 시간 뒤에도 정부는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발표했다가 뒤늦게 정정했고, 이로 인해 국민의 분노와 불신은 극에 달했다.
이 사고는 전국적으로 집단적 슬픔과 분노를 촉발했다. 서울 광화문 광장을 중심으로 시민들은 '진실을 밝혀라',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촛불을 들었고, 이후 정치적 저항으로 확장되었다.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은 구조 실패의 진상, 정부의 은폐 시도,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사고 이후 선장과 주요 승무원들은 법정에 섰고 선장은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등 일부 인물은 처벌되었으나 정부 고위 책임자나 당시 청와대의 직접적 책임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비판도 여전히 존재한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사고 당일 7시간 동안 행적이 불분명해 큰 논란이 되었고, 이는 박근혜 정부의 신뢰도 하락 및 이후 탄핵 정국으로 이어지는 촉매 중 하나가 되었다. 7시간의 행적은 박근혜 지정기록물로 지정되어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양경찰청은 한때 해체되었고 정부는 안전 관련 법령을 강화하고 대형 참사에 대비한 대응 시스템을 보완하였다.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와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진상 규명과 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오늘날 세월호는 단순한 해상 사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왜 구조하지 않았는가', '국가는 어디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국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며, '노란 리본'은 이 사건의 상징이 되었다. 매년 4월 16일은 추모의 날로 기념되며, 세월호는 대한민국 사회가 기억해야 할 국가적 교훈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참사는 국민에게 '안전한 사회', '책임지는 정부', '시민의 감시'가 왜 중요한지를 각인시킨 비극이었다.
[외교의 시대 - 한반도의 길을 묻다, P.72참조]
세월호 침몰사고는 관피아 그리고 수많은 '-피아'로 불리는 이익집단들의 담합 구조가 얼마나 한국 사회에 강고하게 뿌리박고 있으며 건전한 발전을 좀먹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제도적, 정책적 개혁없이 방치되는 경우 나라 전체가 쇠퇴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고 접수 후, 해양경찰은 출동 및 구조에 나섰다. 9시25분 서해해경청 소속 헬기와 해경이 잇따라 도착했지만 세월호와 교신조차 하지 않았다. 해양경찰청과 정부의 초기 대응도 혼란스러웠으며, 구조 작업은 지연되거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고 발생 몇 시간 뒤에도 정부는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발표했다가 뒤늦게 정정했고, 이로 인해 국민의 분노와 불신은 극에 달했다.
이 사고는 전국적으로 집단적 슬픔과 분노를 촉발했다. 서울 광화문 광장을 중심으로 시민들은 '진실을 밝혀라',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촛불을 들었고, 이후 정치적 저항으로 확장되었다.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은 구조 실패의 진상, 정부의 은폐 시도,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사고 이후 선장과 주요 승무원들은 법정에 섰고 선장은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등 일부 인물은 처벌되었으나 정부 고위 책임자나 당시 청와대의 직접적 책임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비판도 여전히 존재한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사고 당일 7시간 동안 행적이 불분명해 큰 논란이 되었고, 이는 박근혜 정부의 신뢰도 하락 및 이후 탄핵 정국으로 이어지는 촉매 중 하나가 되었다. 7시간의 행적은 박근혜 지정기록물로 지정되어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양경찰청은 한때 해체되었고 정부는 안전 관련 법령을 강화하고 대형 참사에 대비한 대응 시스템을 보완하였다.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와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진상 규명과 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오늘날 세월호는 단순한 해상 사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왜 구조하지 않았는가', '국가는 어디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국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며, '노란 리본'은 이 사건의 상징이 되었다. 매년 4월 16일은 추모의 날로 기념되며, 세월호는 대한민국 사회가 기억해야 할 국가적 교훈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참사는 국민에게 '안전한 사회', '책임지는 정부', '시민의 감시'가 왜 중요한지를 각인시킨 비극이었다.
[외교의 시대 - 한반도의 길을 묻다, P.72참조]
세월호 침몰사고는 관피아 그리고 수많은 '-피아'로 불리는 이익집단들의 담합 구조가 얼마나 한국 사회에 강고하게 뿌리박고 있으며 건전한 발전을 좀먹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제도적, 정책적 개혁없이 방치되는 경우 나라 전체가 쇠퇴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4]가자지구와 [3]서안지구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2]하마스가 통치하고 있다. 반면 서안지구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탈레스타인 자치정부인[1] 파타정권이 통치하고 있다.
2012년에 이스라엘의 [4]가자지구 폭격(2차 가자전쟁)은 민간인 폭격과 명분없는 공격등이 국제사회에서 공분을 일으키게 되고 팔레스타인의 [1]파타정권은 이러한 여론을 이용하여 적극적인 외교활동에 나선다. 결국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옹호에도 불구하고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비회원 참가국가, 즉 국가로 인정했다. 이는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할 수 있고 유엔군의 개입까지 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외교적 성과와 하마스의 성공적인 저항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은 [1]파타 자치정부와 [2]하마스는 다시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지속적인 협상의 끝에 2014년 4월 22일[1] 파타정부와 하마스는 통합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으며 2014년 6월 2일, 7년 만에 서안지구 [5]라말라에서 파타와 하마스의 팔레스타인 통합정부가 다시 구성되기에 이른다. 이것은 파타와 하마스의 분열을 조장하고 이를 적극 이용해 온 이스라엘에는 반갑지 않은 사건이었다.
위와 같은 배경아래 2014년 6월 12일 이스라엘 소년 3명이 [3]요르당 강 서안지구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팔레이스타인측은 즉각 부인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명분삼아 가자지구와 [3]요르단강 서안지구를 폭격하여 수많은 팔레스타인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이에 파레스타인도 박격포와 로켓포로 응수하였다.
(소년 3명의 사망사건은 표면상의 명분일 뿐이며 이스라엘의 주된 목표는 이스라엘 영토로 연결되는 가자지구의 땅굴을 무력화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소년 납치살해 사건은 하마스가 벌인 사건이 맞다고 한다)
2014년 7월부터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특수부대를 포함한 지상군을 투입하여 본적적인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4]가자지구의 [2]하마스 무장단체들은 결사항전으로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다보니 전투는 치열해져 민간인을 포함하여 양측의 피해는 점점 커졌다.
계속되는 공방전으로 분쟁이 장기화되면서 소모전으로 이어지자 결국 8월 26일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무기한 휴전하기로 합의하였다. 합의 직후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스라엘은 전투로 인한 군비지출이 막대하여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국 양측은 피해만 입고 끝난 승자없는 싸움이었다.
[1] 파타(PA,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에서 활동
[2]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3] 요르단강 서안 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가자 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5] 라말라(Ramallah) : 요르단강 서쪽에 있는 뚝이라는 의미.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 임시 행정 수도
2012년에 이스라엘의 [4]가자지구 폭격(2차 가자전쟁)은 민간인 폭격과 명분없는 공격등이 국제사회에서 공분을 일으키게 되고 팔레스타인의 [1]파타정권은 이러한 여론을 이용하여 적극적인 외교활동에 나선다. 결국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옹호에도 불구하고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비회원 참가국가, 즉 국가로 인정했다. 이는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할 수 있고 유엔군의 개입까지 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외교적 성과와 하마스의 성공적인 저항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은 [1]파타 자치정부와 [2]하마스는 다시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지속적인 협상의 끝에 2014년 4월 22일[1] 파타정부와 하마스는 통합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으며 2014년 6월 2일, 7년 만에 서안지구 [5]라말라에서 파타와 하마스의 팔레스타인 통합정부가 다시 구성되기에 이른다. 이것은 파타와 하마스의 분열을 조장하고 이를 적극 이용해 온 이스라엘에는 반갑지 않은 사건이었다.
위와 같은 배경아래 2014년 6월 12일 이스라엘 소년 3명이 [3]요르당 강 서안지구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팔레이스타인측은 즉각 부인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명분삼아 가자지구와 [3]요르단강 서안지구를 폭격하여 수많은 팔레스타인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이에 파레스타인도 박격포와 로켓포로 응수하였다.
(소년 3명의 사망사건은 표면상의 명분일 뿐이며 이스라엘의 주된 목표는 이스라엘 영토로 연결되는 가자지구의 땅굴을 무력화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소년 납치살해 사건은 하마스가 벌인 사건이 맞다고 한다)
2014년 7월부터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특수부대를 포함한 지상군을 투입하여 본적적인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4]가자지구의 [2]하마스 무장단체들은 결사항전으로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다보니 전투는 치열해져 민간인을 포함하여 양측의 피해는 점점 커졌다.
계속되는 공방전으로 분쟁이 장기화되면서 소모전으로 이어지자 결국 8월 26일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무기한 휴전하기로 합의하였다. 합의 직후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스라엘은 전투로 인한 군비지출이 막대하여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국 양측은 피해만 입고 끝난 승자없는 싸움이었다.
[1] 파타(PA,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에서 활동
[2]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3] 요르단강 서안 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가자 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5] 라말라(Ramallah) : 요르단강 서쪽에 있는 뚝이라는 의미.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 임시 행정 수도
우산혁명이라 불리는 홍콩 민주화 운동은 홍콩자치정부의 수반인 행정장관 선출 방식이 원인이 되었다.
중국, 1942년 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 패전의 결과로 홍콩은 영국으로 양도되어 1997년까지 영국에 의해 통치되었다.
1997년 7월 홍콩은 다시 중국으로 반환되었고, 반환 당시 중국 [1]덩샤오핑은 홍콩의 경제권과 자치권을 50년간 보장하는 일국양제를 유지하기로 약속하였다.
홍콩의 수반인 행정장관은 '홍콩 기본법 제45조'에 따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통해 선출되므로 상대적으로 친중파가 당선되기 용이한 구조였다. 홍콩의 야당 세력인 '민주파'는 직선제를 꾸준히 요구하여 2017년부터 직접선거를 통한 홍콩의 행정장관 선출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중국의 의회인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과반수 지지를 얻은 2~3인의 후보를 선정하고, 홍콩구민은 이들 중 1명을 직접선거로 선출하도록 하는 선거제도로 개편하게 된다. 이것은 직접선거를 하더라도 친중성향의 후보만 추천하게 되어 중국이 원하는 후보가 행정장관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친중파 행정장관을 통해 일국양제에서 일국일제로 가는 단초가 되는 것이다. 홍콩구민들은 강하게 반발하여 대대적인 시위에 나서게 된다.
초기에는 홍콩사회 지식인 계층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후에 중, 고등학생들과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하여 홍콩 사회의 전체적인 시위로 확대되었다. 당시 행정장관인 [2]렁춘잉은 이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강경진압으로 나섰다. 시위 과정에서 홍콩 경찰들이 최루탄과 살수액으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시민들이 지참하고 나온 우산으로 이를 막아내는 모습이 매스컴에 의해 조명되면서 '우산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2월 15일까지 이어진 민주화시위는 자생력을 잃어가며 종료되었다. 시위대는 어떤 요구도 관철하지 못한 채 자진 해산했으며 지도부 또한 구속됐다.
우산혁명은 시위 정당성을 홍콩사회에 알리는 기회가 됐으며, 중국 중앙정부를 향한 대규모 집단 시위 학습효과를 통해 향후 홍콩구민이 재응집할 수 있는 기반을 마
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 덩샤오핑(Deng Xiaoping,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임기, 1978년 3월 8일~1983년 6월 22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1981년 6월 28일~1989년 11월 7일)등 역임
[2] 렁충잉(Leung Chun-ying, 1954년~ ) : 홍콩의 제4대 행정장관(임기, 2012년 7월 1일~2017년 7월 1일)
중국, 1942년 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 패전의 결과로 홍콩은 영국으로 양도되어 1997년까지 영국에 의해 통치되었다.
1997년 7월 홍콩은 다시 중국으로 반환되었고, 반환 당시 중국 [1]덩샤오핑은 홍콩의 경제권과 자치권을 50년간 보장하는 일국양제를 유지하기로 약속하였다.
홍콩의 수반인 행정장관은 '홍콩 기본법 제45조'에 따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통해 선출되므로 상대적으로 친중파가 당선되기 용이한 구조였다. 홍콩의 야당 세력인 '민주파'는 직선제를 꾸준히 요구하여 2017년부터 직접선거를 통한 홍콩의 행정장관 선출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중국의 의회인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과반수 지지를 얻은 2~3인의 후보를 선정하고, 홍콩구민은 이들 중 1명을 직접선거로 선출하도록 하는 선거제도로 개편하게 된다. 이것은 직접선거를 하더라도 친중성향의 후보만 추천하게 되어 중국이 원하는 후보가 행정장관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친중파 행정장관을 통해 일국양제에서 일국일제로 가는 단초가 되는 것이다. 홍콩구민들은 강하게 반발하여 대대적인 시위에 나서게 된다.
초기에는 홍콩사회 지식인 계층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후에 중, 고등학생들과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하여 홍콩 사회의 전체적인 시위로 확대되었다. 당시 행정장관인 [2]렁춘잉은 이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강경진압으로 나섰다. 시위 과정에서 홍콩 경찰들이 최루탄과 살수액으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시민들이 지참하고 나온 우산으로 이를 막아내는 모습이 매스컴에 의해 조명되면서 '우산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2월 15일까지 이어진 민주화시위는 자생력을 잃어가며 종료되었다. 시위대는 어떤 요구도 관철하지 못한 채 자진 해산했으며 지도부 또한 구속됐다.
우산혁명은 시위 정당성을 홍콩사회에 알리는 기회가 됐으며, 중국 중앙정부를 향한 대규모 집단 시위 학습효과를 통해 향후 홍콩구민이 재응집할 수 있는 기반을 마
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 덩샤오핑(Deng Xiaoping,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임기, 1978년 3월 8일~1983년 6월 22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1981년 6월 28일~1989년 11월 7일)등 역임
[2] 렁충잉(Leung Chun-ying, 1954년~ ) : 홍콩의 제4대 행정장관(임기, 2012년 7월 1일~2017년 7월 1일)
박근혜 정부 퇴진운동, 즉 촛불혁명은 대한민국 전역에서 벌어진 평화적 시민 항쟁이었으며 대한민국 헌정 질서 회복과 대통령 탄핵, 파면을 이끌어 내었다.
이 운동의 발단은 2016년 10월 24일, [2]최순실의 태블릿PC에서 대통령 연설문과 청와대 문건이 발견되며 시작되었다. 최순실이라는 민간인이 청와대의 기밀 정보에 접근하고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깊숙이 개입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헌법상 권력 분립과 민주주의 원칙을 위배한 국정농단 사건으로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국민들은 이를 "국가의 기능이 사적으로 유린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거리로 나섰다. 2016년 10월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첫 촛불집회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민들이 매주 토요일마다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고 나왔다. 특히 이 집회는 정치·이념·세대를 초월해 모든 시민 계층이 참여한 평화 시위였다. 일부 집회는 최대 170만 명 이상이 참가했으며, 전체 누적 인원은 1,7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촛불집회의 특징은 '질서와 비폭력'이었다. 참가자들은 스스로 쓰레기를 치우고 경찰과 충돌 없이 시위를 마무리하는등 시민의식을 전 세계에 보여 주었다. 구호는 '이게 나라냐', '박근혜 퇴진', '모이자! 바꾸자! 끝내자!' 등 간결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고, 음악, 풍자극, 문화공연을 곁들여 문화적 저항의 형식을 띠기도 했다.
이러한 국민적 압박 속에서 2016년 12월 9일, 대한민국 국회는 [1]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 절차를 통하여 2017년 3월 10일, 재판관 8인 전원일치로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했다. 이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이 파면되었다.
그 결과 2017년 5월 9일 조기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3]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였다.
촛불혁명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닌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성숙을 보여주었다. 국민은 더 이상 투표자에 머물지 않고 정치에 참여하고 감시하는 주체가 되었다.
이 운동은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았으며 '비폭력 민주주의 운동의 모범'으로 평가되었다. 촛불 하나가 만든 거대한 흐름은 헌법 정신과 시민의식으로 대한민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변화를 이끌어냈다.
[1] 박근혜(朴槿惠, 1952년 2월 2일 ~ ) :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임기 : 2013년 2월 25일~2017년 3월 10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탄핵 소추 및 심판을 거쳐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2] 최순실(1956년 7월 30일~) : 2014년 2월 최서원으로 개명. 18대 대통령 박근혜의 측근으로 국정 농단 사태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주요인물이다
[3] 문재인(文在寅, 1953년 1월 24일 ~ ) :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임기:2017년 5월 10일~2022년 5월 9일)
이 운동의 발단은 2016년 10월 24일, [2]최순실의 태블릿PC에서 대통령 연설문과 청와대 문건이 발견되며 시작되었다. 최순실이라는 민간인이 청와대의 기밀 정보에 접근하고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깊숙이 개입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헌법상 권력 분립과 민주주의 원칙을 위배한 국정농단 사건으로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국민들은 이를 "국가의 기능이 사적으로 유린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거리로 나섰다. 2016년 10월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첫 촛불집회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민들이 매주 토요일마다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고 나왔다. 특히 이 집회는 정치·이념·세대를 초월해 모든 시민 계층이 참여한 평화 시위였다. 일부 집회는 최대 170만 명 이상이 참가했으며, 전체 누적 인원은 1,7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촛불집회의 특징은 '질서와 비폭력'이었다. 참가자들은 스스로 쓰레기를 치우고 경찰과 충돌 없이 시위를 마무리하는등 시민의식을 전 세계에 보여 주었다. 구호는 '이게 나라냐', '박근혜 퇴진', '모이자! 바꾸자! 끝내자!' 등 간결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고, 음악, 풍자극, 문화공연을 곁들여 문화적 저항의 형식을 띠기도 했다.
이러한 국민적 압박 속에서 2016년 12월 9일, 대한민국 국회는 [1]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 절차를 통하여 2017년 3월 10일, 재판관 8인 전원일치로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했다. 이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이 파면되었다.
그 결과 2017년 5월 9일 조기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3]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였다.
촛불혁명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닌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성숙을 보여주었다. 국민은 더 이상 투표자에 머물지 않고 정치에 참여하고 감시하는 주체가 되었다.
이 운동은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았으며 '비폭력 민주주의 운동의 모범'으로 평가되었다. 촛불 하나가 만든 거대한 흐름은 헌법 정신과 시민의식으로 대한민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변화를 이끌어냈다.
[1] 박근혜(朴槿惠, 1952년 2월 2일 ~ ) :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임기 : 2013년 2월 25일~2017년 3월 10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탄핵 소추 및 심판을 거쳐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2] 최순실(1956년 7월 30일~) : 2014년 2월 최서원으로 개명. 18대 대통령 박근혜의 측근으로 국정 농단 사태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주요인물이다
[3] 문재인(文在寅, 1953년 1월 24일 ~ ) :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임기:2017년 5월 10일~2022년 5월 9일)
2016년 12월 3일 [1]박근혜 대통령은 [2]최순실 등 비선들에 의한 국정 농단 사건으로 탄핵소추안이 발의되어 12월 9일 16시 10분에 재석의원 299명, 찬성 234표, 반대 56표, 기권 2표, 무효 7표로 가결되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65조에 따르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국회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와 국회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헌번재판소의 탄핵심판 절차를 통하여 2017년 3월 10일 11시 헌번재판소 재판관 8명 전원일치로 대통령 박근혜 탄핵 소추안을 인용하여 박근혜는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탄핵 인용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2]최순실에게 대통령 권한을 넘긴 것은 헌법 위반이다. 박 대통령은 공적인 업무 자료(예: 연설문, 정책문서 등)를 아무 자격도 없는 최순실에게 보여주고 그의 의견을 반영했다.
이는 민주주의 원칙과 공직기강을 무너뜨린 것이다.
- 대기업에게 부당한 압력을 가했다. 최순실이 만든 재단(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에 돈을 내도록 대기업들에게 사실상 강요했다. 이는 직권을 남용한 것이고 기업의 자유를 침해했다.
- 진실을 숨기고 책임을 회피했다. 사태가 밝혀진 후에도 대통령은 진실을 말하지 않고 수사에도 협조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는 이를 "헌법을 지키려는 태도가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 국가 기밀 유출은 중대한 잘못이다. 최순실에게 청와대 기밀을 넘긴 행위는 국가 안전에도 해를 끼칠 수 있는 심각한 일이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현직 대통령이 파면되었다.
[1] 박근혜(朴槿惠, 1952년 2월 2일 ~ ) :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임기 : 2013년 2월 25일~2017년 3월 10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탄핵 소추 및 심판을 거쳐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2] 최순실(1956년 7월 30일~) : 2014년 2월 최서원으로 개명. 18대 대통령 박근혜의 측근으로 국정 농단 사태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주요인물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65조에 따르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국회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와 국회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헌번재판소의 탄핵심판 절차를 통하여 2017년 3월 10일 11시 헌번재판소 재판관 8명 전원일치로 대통령 박근혜 탄핵 소추안을 인용하여 박근혜는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탄핵 인용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2]최순실에게 대통령 권한을 넘긴 것은 헌법 위반이다. 박 대통령은 공적인 업무 자료(예: 연설문, 정책문서 등)를 아무 자격도 없는 최순실에게 보여주고 그의 의견을 반영했다.
이는 민주주의 원칙과 공직기강을 무너뜨린 것이다.
- 대기업에게 부당한 압력을 가했다. 최순실이 만든 재단(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에 돈을 내도록 대기업들에게 사실상 강요했다. 이는 직권을 남용한 것이고 기업의 자유를 침해했다.
- 진실을 숨기고 책임을 회피했다. 사태가 밝혀진 후에도 대통령은 진실을 말하지 않고 수사에도 협조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는 이를 "헌법을 지키려는 태도가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 국가 기밀 유출은 중대한 잘못이다. 최순실에게 청와대 기밀을 넘긴 행위는 국가 안전에도 해를 끼칠 수 있는 심각한 일이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현직 대통령이 파면되었다.
[1] 박근혜(朴槿惠, 1952년 2월 2일 ~ ) :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임기 : 2013년 2월 25일~2017년 3월 10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탄핵 소추 및 심판을 거쳐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2] 최순실(1956년 7월 30일~) : 2014년 2월 최서원으로 개명. 18대 대통령 박근혜의 측근으로 국정 농단 사태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주요인물이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은 2018년 2월 9일부터 25일까지 대한민국 강원도 평창군 등에서 개최된 제23회 동계 올림픽이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개최하는 동계올림픽이자 아시아에서 세번째로 열린 동계올림픽이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만난 남북정상회담.
헌정사 세 번째 남북정상회담이자 처음으로 남한에서 열렸으며 10년 6개월 만에 열린 남북정상회담이다.
공식명칭은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며, 4.27 남북정상회담이나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라고도 부른다.
헌정사 세 번째 남북정상회담이자 처음으로 남한에서 열렸으며 10년 6개월 만에 열린 남북정상회담이다.
공식명칭은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며, 4.27 남북정상회담이나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라고도 부른다.
2018년 5월 26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 달 만에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비밀리에 열린 회담이다.
.26 남북정상회담 또는 제4차 남북정상회담이라고도 부른다.
2018년 1차 남북정상회담과 다르게 예보없이 열린 깜짝 회담이다.
북한에서는 “력사적인 제4차 북남수뇌상봉과 회담”이라고 지칭하였다.
.26 남북정상회담 또는 제4차 남북정상회담이라고도 부른다.
2018년 1차 남북정상회담과 다르게 예보없이 열린 깜짝 회담이다.
북한에서는 “력사적인 제4차 북남수뇌상봉과 회담”이라고 지칭하였다.
2018년 6월 12일 현지 시간 오전 9시 싱가포르 센토사의 카펠라 호텔(Capella Singapore Hotel)에서 역사상 최초로 열린 미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정상회담이다.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카펠라 호텔에서 만나 역사적인 12초간 악수했으며 이후 회담장으로 이동하여 모두발언을 한 뒤 단독회담을 38분간 진행하였다. 두 정상은 단독회담이 끝나자 100분간 확대회담을 진행하였다.
회담이후 "싱가포르 정상 회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은 위원장과 미합중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공동 선언"이라는 공동 성명서에 서명했다.
긍정적인 측면으로 이번 회담의 상징성에 주목하고 있으며 혹평 혹은 아쉬움을 표하는 측에서는 내용이 없다고 보고 있다.
일단 양측 모두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것에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카펠라 호텔에서 만나 역사적인 12초간 악수했으며 이후 회담장으로 이동하여 모두발언을 한 뒤 단독회담을 38분간 진행하였다. 두 정상은 단독회담이 끝나자 100분간 확대회담을 진행하였다.
회담이후 "싱가포르 정상 회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은 위원장과 미합중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공동 선언"이라는 공동 성명서에 서명했다.
긍정적인 측면으로 이번 회담의 상징성에 주목하고 있으며 혹평 혹은 아쉬움을 표하는 측에서는 내용이 없다고 보고 있다.
일단 양측 모두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것에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2018년 9월 18일 ~ 9월 20일에 평양에서 열렸다. 북한에서는 제5차 북남수뇌상봉이라고 부른다. 2018년 가을 평양 정상회담은 2018년 4월 27일 선언한 판문점 선언의 마지막 줄에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가을 평양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 언급된 대목이다.
2박 3일 동안 문재인과 김정은은 대부분의 일정을 함께 하여 친밀감과 신뢰를 보였으며, 문재인은 릉라도5월1일경기장에서 북한 주민을 상대로 대중 연설도 했다.
남북 정상 간에 9월 평양공동선언도 발표되었다.
2박 3일 동안 문재인과 김정은은 대부분의 일정을 함께 하여 친밀감과 신뢰를 보였으며, 문재인은 릉라도5월1일경기장에서 북한 주민을 상대로 대중 연설도 했다.
남북 정상 간에 9월 평양공동선언도 발표되었다.
2019년 2월 27~28일 베트남 하노이(Vietnam Hanoi)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Hotel Sofitel Legend Metropole)에서 열린 김정일 위원장과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간의 두 번째 정상회담이다.
현지 시각 2월 27일 18시 29분경(한국시간 20시 29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하노이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만났다. 이후 20분간 일대일 단독 회담을 한 뒤 이후 19시 9분(한국시간 21시 9분)부터 하노이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 라 베란다 홀에서 1시간 30여 분 정도 친교 만찬을 했다.
다음날 2월 28일 기자회견후 양국 정상 지도자들은 회의실로 회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업무 오찬이 돌연 취소됐고 곧이어 뜻밖에도 회담 결렬이 선언됐다.
현지 시각 2월 27일 18시 29분경(한국시간 20시 29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하노이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만났다. 이후 20분간 일대일 단독 회담을 한 뒤 이후 19시 9분(한국시간 21시 9분)부터 하노이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 라 베란다 홀에서 1시간 30여 분 정도 친교 만찬을 했다.
다음날 2월 28일 기자회견후 양국 정상 지도자들은 회의실로 회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업무 오찬이 돌연 취소됐고 곧이어 뜻밖에도 회담 결렬이 선언됐다.
2019년 5월 29일 오후 9시(한국시간 30일 오전 4시)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에서 한국인 승객 33명 - 패키지 여행객 30명, 사진기사 1명, 가이드 2명(동행/현지), 헝가리인 승무원 2명(선장/기관장)등 총 35명이 탄 유람선 허블레아니호(헝가리어: Hableány, '허블레아뉴'는 인어라는 뜻)가 크루즈 MV 바이킹시긴호(MV Viking Sigyn)선박과 충돌 후 침몰한 사건이다.
COVID-19는 SARS-CoV-2라는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했다. 이 바이러스는 코로나바이러스 계열로,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박쥐와 같은 동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SARS-CoV-2는 특정 중간 숙주를 통해 인간에게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초의 확진 사례는 2019년 12월, 중국 우한시의 화난 수산시장과 연관되었으며, 이곳은 야생동물 거래로 유명한 시장이었다.
2019년 12월 말, 우한에서 원인 불명의 폐렴 사례가 다수 보고되었다. 2020년 1월, SARS-CoV-2가 원인 바이러스로 확인되었고, 인간 간 전염이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중국 내에서 급속히 확산되었고, 이후 국제선 항공 여행 등을 통해 전 세계로 퍼졌다.
2020년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WHO)는 COVID-19를 세계적 대유행(Pandemic)으로 선언했다.
초기에는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 등 방역 수칙이 권고되었다.
2020년에서 2021년에 다수의 국가에서 의료 시스템이 과부하되었고, 중증 환자와 사망자가 급증했으며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영향을 초래했다.
2020년 말부터 여러 제약회사가 개발한 백신(예: Pfizer-BioNTech, Moderna, AstraZeneca 등)이 긴급 승인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접종이 시작되었다.
백신 접종이 진행되면서 중증 환자와 사망자 수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2021년부터 알파, 델타, 오미크론 등 변이 바이러스가 등장하면서 전파력 및 백신 효과에 대한 새로운 도전 과제가 생겼다. 특히 오미크론 변이는 전염력이 높아 재확산의 원인이 되었다.
지속적인 백신과 치료제의 발전과 자연 면역의 확산으로 인해 COVID-19는 점차 심각도가 낮아지지면서 2023년 5월 계절성 유행병(엔데믹)으로 전환되었다.
COVID-19로 인하여 의료 시스템의 과부하, 경제 침체, 실업 증가 등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으며 비대면 기술과 원격 근무, 온라인 학습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또한 개인 위생과 공공 건강에 대한 경각심이 증가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박쥐와 같은 동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SARS-CoV-2는 특정 중간 숙주를 통해 인간에게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초의 확진 사례는 2019년 12월, 중국 우한시의 화난 수산시장과 연관되었으며, 이곳은 야생동물 거래로 유명한 시장이었다.
2019년 12월 말, 우한에서 원인 불명의 폐렴 사례가 다수 보고되었다. 2020년 1월, SARS-CoV-2가 원인 바이러스로 확인되었고, 인간 간 전염이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중국 내에서 급속히 확산되었고, 이후 국제선 항공 여행 등을 통해 전 세계로 퍼졌다.
2020년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WHO)는 COVID-19를 세계적 대유행(Pandemic)으로 선언했다.
초기에는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 등 방역 수칙이 권고되었다.
2020년에서 2021년에 다수의 국가에서 의료 시스템이 과부하되었고, 중증 환자와 사망자가 급증했으며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영향을 초래했다.
2020년 말부터 여러 제약회사가 개발한 백신(예: Pfizer-BioNTech, Moderna, AstraZeneca 등)이 긴급 승인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접종이 시작되었다.
백신 접종이 진행되면서 중증 환자와 사망자 수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2021년부터 알파, 델타, 오미크론 등 변이 바이러스가 등장하면서 전파력 및 백신 효과에 대한 새로운 도전 과제가 생겼다. 특히 오미크론 변이는 전염력이 높아 재확산의 원인이 되었다.
지속적인 백신과 치료제의 발전과 자연 면역의 확산으로 인해 COVID-19는 점차 심각도가 낮아지지면서 2023년 5월 계절성 유행병(엔데믹)으로 전환되었다.
COVID-19로 인하여 의료 시스템의 과부하, 경제 침체, 실업 증가 등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으며 비대면 기술과 원격 근무, 온라인 학습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또한 개인 위생과 공공 건강에 대한 경각심이 증가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 3월 11일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COVID-19)에 대해 세계적 대유행, 즉 팬데믹(pandemic)을 선언했다.
WHO는 감염병 위험 수준에 따라 1~6단계의 경보 단계를 설정한다. 이 가운데 가장 높은 6단계가 팬데믹이다.
WHO가 지금까지 팬데믹을 선언한 경우는 1968년 홍콩 독감과 2009년 신종플루 두차례였으나, 이번 코로나19가 세번째다.
전문가들은 최근 교통기관의 발달로 어느 나라든 하루 안에 갈 수 있게 되면서 코로나19가 빠르게 대유행했다고 분석했다.
WHO는 감염병 위험 수준에 따라 1~6단계의 경보 단계를 설정한다. 이 가운데 가장 높은 6단계가 팬데믹이다.
WHO가 지금까지 팬데믹을 선언한 경우는 1968년 홍콩 독감과 2009년 신종플루 두차례였으나, 이번 코로나19가 세번째다.
전문가들은 최근 교통기관의 발달로 어느 나라든 하루 안에 갈 수 있게 되면서 코로나19가 빠르게 대유행했다고 분석했다.
파키스탄 국제항공 소속 A320 여객기가 공항 인근에 추락한 사건이며 승무원 포함하여 99명이 탑승하였으며 97명 사망하고 2명은 극적으로 생존하였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홍콩 보안법을 2885표중 찬성 2878표, 반대 1표, 기권 6표로 가결되여 통과되었다.
홍콩 보안법은 8월 시행 예정이며 홍콩 내 반정부 활동을 감시·처벌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있으며, 이 법이 시행되면 2019년 홍콩을 휩쓸었던 범죄인 송환법 반대 시위와 같은 대규모 시위가 사실상 부가능해진다.
홍콩 보안법은 8월 시행 예정이며 홍콩 내 반정부 활동을 감시·처벌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있으며, 이 법이 시행되면 2019년 홍콩을 휩쓸었던 범죄인 송환법 반대 시위와 같은 대규모 시위가 사실상 부가능해진다.
중국이 홍콩 내 국가 분열 행위를 처벌하는 국가보안법(홍콩 보안법)을 최종 통과시켰다.
중국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는 30일 오전 사흘간의 회의를 마무리하며 홍콩 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오전 9시에 시작한 회의는 15분 만에 끝났고 162명 위원 만장일치로 법안이 통과되었다. 홍콩 보안법은 홍콩 반환 23주년 기념일인 7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중국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는 30일 오전 사흘간의 회의를 마무리하며 홍콩 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오전 9시에 시작한 회의는 15분 만에 끝났고 162명 위원 만장일치로 법안이 통과되었다. 홍콩 보안법은 홍콩 반환 23주년 기념일인 7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대규모 폭발이 발생하였다. 이 폭발사고에 따른 사상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한 창고에 6년간 보관돼 온 폭발물이 폭발 원인이라고 말하며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가 진행중이다.
* 베리루트(Beirut) : 레바논의 수도이며 주요항구. 레바논 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중해 동쪽해안에 자리잡고 있다
* 베리루트(Beirut) : 레바논의 수도이며 주요항구. 레바논 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중해 동쪽해안에 자리잡고 있다
2020년 8월 7일 19시 40분(현재시간)쯤 UAE의 두바이(Dubai)를 출발한 인도 항공사 '에어인디아익스프레스' 소속 보잉 737 항공기가 인도 남부 케랄라주 코지코드 캘리컷(Kozhikode Calicut) 국제공항에 착륙하는 과정에서 활주로를 이탈해 두 동강이 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여객기에는 174명의 승객과 10명의 유아, 2명의 조종사, 5명의 승무원등 총 191명이 타고 있었다.
NYT는 이 사고로 조종사 1명과 승객 16명이 사망했으며 30~40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전했다.
* 에어 인디아 익스프레스(Air India Express) : 인도의 저비용 항공사. IATA : IX
* 케랄라주(Kerala) : 인도 남서부 해안에 위치한 연방주
* 코지코드(Kozhikode) : 인도 케랄라 주 북부에 있는 항구도시로 옛 이름은 캘리컷. 1948년 5월 포루투칼의 항해자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기항한 곳으로 유명하다
NYT는 이 사고로 조종사 1명과 승객 16명이 사망했으며 30~40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전했다.
* 에어 인디아 익스프레스(Air India Express) : 인도의 저비용 항공사. IATA : IX
* 케랄라주(Kerala) : 인도 남서부 해안에 위치한 연방주
* 코지코드(Kozhikode) : 인도 케랄라 주 북부에 있는 항구도시로 옛 이름은 캘리컷. 1948년 5월 포루투칼의 항해자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기항한 곳으로 유명하다
아브라함 협정은 미국의 중재로 8월 13일부터 12월사이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체결된 외교 정상화 합의이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아랍 에미리트, 바레인, 수단, 모로코 등과 공식적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상호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의 적극적인 외교 전략으로 추진된 이 협정은 수십 년간 중동 분쟁의 핵심이었던 이스라엘-아랍 간 갈등 구도에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협정을 통해 체결국들은 상호 대사관 개설, 직항 항공편 운항, 경제·기술·보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약속하였으며, 이는 미국과 이스라엘 양국의 전략적 영향력 확대에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 정상화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진행된 것이어서 비판도 받았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다수의 아랍 국민들은 이를 "배신"으로 여겼고, 이스라엘과의 평화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수립이 우선이라는 기존 아랍 연대 원칙에 대한 이탈로 간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협정은 중동 외교 지형의 재편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자리잡았으며, 이후의 지역 정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협정은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예언자 아브라함에 대한 공통된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아브라함 협정’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2020년 9월 15일 : 아브라함 협정 선언(미국, 이스라엘,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2020년 9월 15일 : 아브라함 협정 평화 조약 (이스라엘, 아랍에미리트)
2020년 9월 15일 : 아르바함 협정(이스라엘, 바레인)
2020년 10월 23일 : 이스라엘-수단 정상화(이스라엘, 수단) 2020년 10월 23일 발표
2021년 1월 5일 서명 및 선언
2020년 12월 10일 : 모로코-이스라엘 정상화 협정(이스라엘, 모로코) 발표
2020년 12월 22일 서명 및 선언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아랍 에미리트, 바레인, 수단, 모로코 등과 공식적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상호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의 적극적인 외교 전략으로 추진된 이 협정은 수십 년간 중동 분쟁의 핵심이었던 이스라엘-아랍 간 갈등 구도에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협정을 통해 체결국들은 상호 대사관 개설, 직항 항공편 운항, 경제·기술·보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약속하였으며, 이는 미국과 이스라엘 양국의 전략적 영향력 확대에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 정상화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진행된 것이어서 비판도 받았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다수의 아랍 국민들은 이를 "배신"으로 여겼고, 이스라엘과의 평화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수립이 우선이라는 기존 아랍 연대 원칙에 대한 이탈로 간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협정은 중동 외교 지형의 재편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자리잡았으며, 이후의 지역 정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협정은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예언자 아브라함에 대한 공통된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아브라함 협정’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2020년 9월 15일 : 아브라함 협정 선언(미국, 이스라엘,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2020년 9월 15일 : 아브라함 협정 평화 조약 (이스라엘, 아랍에미리트)
2020년 9월 15일 : 아르바함 협정(이스라엘, 바레인)
2020년 10월 23일 : 이스라엘-수단 정상화(이스라엘, 수단) 2020년 10월 23일 발표
2021년 1월 5일 서명 및 선언
2020년 12월 10일 : 모로코-이스라엘 정상화 협정(이스라엘, 모로코) 발표
2020년 12월 22일 서명 및 선언
2020년 9월 27일부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서 나고르노ㆍ카라바흐지역에 대한 영유권 문제로 인하여 발생한 전쟁이다. 2020년 10월 10일 러시아의 중재하에 휴전이 선언되었고 양국은 시신 수습과 포로 교환을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 아르차흐 공화국(Republic of Artsakh) :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Caucasus)지역의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수도이자 최대도시는 스테파나케르트(Stepanakert, 아르메니아)/한켄디(Khankendi, 아제르바이잔)이다.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대내외적인 공식 명칭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공화국(Nagorno-Karabakh)'이였으나 2017년 2월 20일에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거쳐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다수의 지도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혹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영토 분쟁지로 표시된다.
*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 아르차흐 공화국(Republic of Artsakh) :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Caucasus)지역의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수도이자 최대도시는 스테파나케르트(Stepanakert, 아르메니아)/한켄디(Khankendi, 아제르바이잔)이다.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대내외적인 공식 명칭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공화국(Nagorno-Karabakh)'이였으나 2017년 2월 20일에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거쳐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다수의 지도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혹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영토 분쟁지로 표시된다.
브렉시트(BREXIT)란 영국(BRitain)이 유럽연합에서 탈퇴(EXIT)하는 것을 뜻한다.
2016년 6월 열린 영국 국민투표 개표 결과 72.2%의 투표율에 51.9%의 찬성으로 통과되어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가 공식화되었다.
2020년 12월 24일 영국이 국민투표를 통해 브렉시트를 결정한 지 4년 6개월 만에 영국과 유럽연합(EU)간 관련 미래관계 협상(무역협상)이 최종 타결됐다. 이 무역협정은 영국과 유럽연합 사이의 기존 경제 및 안보 관계를 끊고 이를 새롭게 설정한다.
따라서 영국은 2020년 12월 31일 23:00시로 EU에서 탈퇴되었으며 영국과 유럽연합의 새 무역협정이 발효되었다.
2016년 6월 열린 영국 국민투표 개표 결과 72.2%의 투표율에 51.9%의 찬성으로 통과되어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가 공식화되었다.
2020년 12월 24일 영국이 국민투표를 통해 브렉시트를 결정한 지 4년 6개월 만에 영국과 유럽연합(EU)간 관련 미래관계 협상(무역협상)이 최종 타결됐다. 이 무역협정은 영국과 유럽연합 사이의 기존 경제 및 안보 관계를 끊고 이를 새롭게 설정한다.
따라서 영국은 2020년 12월 31일 23:00시로 EU에서 탈퇴되었으며 영국과 유럽연합의 새 무역협정이 발효되었다.
2020년 11월 3일, 미국 제 46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1]조 바이든이 공화당 후보이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2]도널드 트럼프를 이기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은 선거에서 광범위한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선거 이후 몇 주 동안 트럼프 측은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해 여러 주에서 법적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대부분의 소송을 기각했다. 선거인단 투표에서도 바이든이 승리한 것이 확정되었지만,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를 계속해서 부정했다.
2021년 1월 6일은 상·하원 합동 회의에서 각 주의 선거인단 투표 결과를 인증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당시 트럼프는 백악관 근처에서 열린 "Save America" 집회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하며 선거가 도난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옥처럼 싸우지 않으면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는 등의 강한 표현을 사용하며 지지자들에게 행동을 촉구했다. 이 연설이 끝난 후 수천 명의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으로 행진했다.
오후 1시경, 시위대는 경찰 바리케이드를 뚫고 국회의사당으로 진입했다. 일부는 창문을 깨고 건물 내부로 들어갔으며, 상원과 하원 회의실을 점거하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보였다. 당시 의회에서는 [3]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포함한 상·하원 의원들이 바이든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인증하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으며, 의회 경찰대는 상·하원 회의장에서 대피시켰다.
국회의사당을 점거한 시위대는 "트럼프를 위해 싸워라", "선거를 도둑맞았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내부를 훼손했고, 일부는 의원들의 사무실을 침입하여 기물을 파손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시위대 간의 충돌이 발생했으며, 총격 사건으로 시위대 1명이 사망했다. 이후 경찰관 1명을 포함해 총 5명이 숨지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국회의사당이 점령당한 지 수시간 후, 경찰과 주 방위군이 동원되면서 상황은 점차 진정되었고, 오후 6시 이후에는 의사당 내 질서가 회복되었다. 이후 의회는 다시 개회하여 조 바이든의 대통령 당선을 공식 인증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도널드 트럼프는 폭동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두 번째 탄핵 절차를 밟았으며, 이는 미국 역사상 전직 대통령이 두 번 탄핵당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또한 FBI는 사건 가담자들을 조사하여 수백 명을 체포하고 기소했다. 국회의사당의 보안도 대폭 강화되었으며, 2021년 1월 20일 조 바이든의 대통령 취임식은 엄격한 경비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사건은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와 극단주의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주었으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1] 조 바이든(Joe Biden, 1942년 11월 20일~) : 미국 제46대 대통령(임기, 2021년 1월 20일~2025년 1월 20일)
[2] 도널드 존 트럼프(Donald John Trump, 1946년 6월 14일~) : 미국 제45대 대통령(임기, 2017년 1월 20일~2021년 1월 20일), 미국 제47대 대통령(임기, 2025년 1월 20일~)
[3] 마이크 펜스(Mike Pence, 1959년 6월 7일~) : 미국 제48대 부통령(임기, 2017년 1월 20일~2021년 1월 20일)
2021년 1월 6일은 상·하원 합동 회의에서 각 주의 선거인단 투표 결과를 인증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당시 트럼프는 백악관 근처에서 열린 "Save America" 집회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하며 선거가 도난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옥처럼 싸우지 않으면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는 등의 강한 표현을 사용하며 지지자들에게 행동을 촉구했다. 이 연설이 끝난 후 수천 명의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으로 행진했다.
오후 1시경, 시위대는 경찰 바리케이드를 뚫고 국회의사당으로 진입했다. 일부는 창문을 깨고 건물 내부로 들어갔으며, 상원과 하원 회의실을 점거하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보였다. 당시 의회에서는 [3]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포함한 상·하원 의원들이 바이든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인증하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으며, 의회 경찰대는 상·하원 회의장에서 대피시켰다.
국회의사당을 점거한 시위대는 "트럼프를 위해 싸워라", "선거를 도둑맞았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내부를 훼손했고, 일부는 의원들의 사무실을 침입하여 기물을 파손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시위대 간의 충돌이 발생했으며, 총격 사건으로 시위대 1명이 사망했다. 이후 경찰관 1명을 포함해 총 5명이 숨지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국회의사당이 점령당한 지 수시간 후, 경찰과 주 방위군이 동원되면서 상황은 점차 진정되었고, 오후 6시 이후에는 의사당 내 질서가 회복되었다. 이후 의회는 다시 개회하여 조 바이든의 대통령 당선을 공식 인증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도널드 트럼프는 폭동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두 번째 탄핵 절차를 밟았으며, 이는 미국 역사상 전직 대통령이 두 번 탄핵당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또한 FBI는 사건 가담자들을 조사하여 수백 명을 체포하고 기소했다. 국회의사당의 보안도 대폭 강화되었으며, 2021년 1월 20일 조 바이든의 대통령 취임식은 엄격한 경비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사건은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와 극단주의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주었으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1] 조 바이든(Joe Biden, 1942년 11월 20일~) : 미국 제46대 대통령(임기, 2021년 1월 20일~2025년 1월 20일)
[2] 도널드 존 트럼프(Donald John Trump, 1946년 6월 14일~) : 미국 제45대 대통령(임기, 2017년 1월 20일~2021년 1월 20일), 미국 제47대 대통령(임기, 2025년 1월 20일~)
[3] 마이크 펜스(Mike Pence, 1959년 6월 7일~) : 미국 제48대 부통령(임기, 2017년 1월 20일~2021년 1월 20일)
[1]아웅산수찌가 이끄는 [2]국민민주연맹이 2020년 11월 총선에서 압승하자 결과에 불복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웅산수찌를 포함하여 정부 주요 인사를 구금하고 1년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1989년부터 2010년까지 21년간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구금과 석방을 반복했던 [1]아웅산수찌는 지난 2015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군부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 정부를 출범시켰으나 5년 만에 다시 민주화 붕괴 직전에 몰렸다.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민주주의 회복과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민 시위가 촉발되었으며, 군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면서 수많은 사상자와 인권 침해 사례가 발생하였다. 국제사회는 [3]미얀마 쿠데타에 대해 강한 비난을 쏟으며, 군사정권의 철회와 민주주의 복원을 촉구하였지만, 이후 미얀마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 위기가 가중되는 등 심각한 내부 위기를 맞이하였다.
[1]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1945년 6월 19일~현재) : 미얀마의 대표적 민주화 운동 지도자이자 정치인. 1988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국제적 주목을 받았으며, 오랜 기간 군사 정권에 대항해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199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그녀는 국민민주연맹을 이끌며 2015년 역사적인 선거 승리를 거두었으나, 2021년 쿠데타 이후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국부로 숭상받는 아웅산의 딸이다
[2] 국민민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 :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미얀마의 민주주의 정당으로, 오랜 군사 독재에 맞서 평화적 정치 개혁을 추구하며 2015년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집권하였다. 그러나 2021년 쿠데타로 무너졌다
[3] 미얀마(Myanmar)는 1989년 이전에는 버마(Burma)라는 국명이 사용되었다. 미얀마의 군부 정권은 '버마'라는 호칭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잔재인데다가 버마족 외에 다른 소수 민족(135개)을 아우르는 명칭인 미얀마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1989년부터 2010년까지 21년간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구금과 석방을 반복했던 [1]아웅산수찌는 지난 2015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군부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 정부를 출범시켰으나 5년 만에 다시 민주화 붕괴 직전에 몰렸다.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민주주의 회복과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민 시위가 촉발되었으며, 군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면서 수많은 사상자와 인권 침해 사례가 발생하였다. 국제사회는 [3]미얀마 쿠데타에 대해 강한 비난을 쏟으며, 군사정권의 철회와 민주주의 복원을 촉구하였지만, 이후 미얀마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 위기가 가중되는 등 심각한 내부 위기를 맞이하였다.
[1]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1945년 6월 19일~현재) : 미얀마의 대표적 민주화 운동 지도자이자 정치인. 1988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국제적 주목을 받았으며, 오랜 기간 군사 정권에 대항해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199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그녀는 국민민주연맹을 이끌며 2015년 역사적인 선거 승리를 거두었으나, 2021년 쿠데타 이후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국부로 숭상받는 아웅산의 딸이다
[2] 국민민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 :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미얀마의 민주주의 정당으로, 오랜 군사 독재에 맞서 평화적 정치 개혁을 추구하며 2015년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집권하였다. 그러나 2021년 쿠데타로 무너졌다
[3] 미얀마(Myanmar)는 1989년 이전에는 버마(Burma)라는 국명이 사용되었다. 미얀마의 군부 정권은 '버마'라는 호칭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잔재인데다가 버마족 외에 다른 소수 민족(135개)을 아우르는 명칭인 미얀마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2021년 5월 7일 [1]알아크사 [2]모스크에서 예배를 마친 팔레스타인 수천명이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대한 항의 시위를 벌이자 이스라엘 군경이 출동하여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충돌이 발생되었다. 이 충돌로 인해 상호 부상자가 발생되었으며 사태의 확대를 우려한 이스라엘은 5월 10일 증원군을 파견하였다.
파레스타인 [3]하마스는 알아크사 모스크에 증원된 이스라엘군 병력을 오후 6시까지 철수하라고 요구하였으나 6시가 지나도 변화가 없자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향해 로켓포를 발사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10일부터 연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있는 하마스를 공습하였다.
이스라엘은 연일 지속적으로 가자지역 공습이 계속되면서 수 많은 팔레스타인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무력사용 중단을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휴전을 위한 결의안이 제출되었고 5월 21일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휴전하기로 협의했다. 휴전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하마스 상호 간 아무조건없이 진행되었다
이스라엘 공습으로 파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아동 61명을 포함해 총 232명이 사망하고 1900여명이 다쳤다. 이스라엘은 12명의 사망자와 3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1] 알아크사 모스크(Al-Aqsa Mosque) : 성전산 남쪽에 위치한 은색 둥근 지붕의 이슬람교 사원. 메디나, 메카와 더불어 이슬람교 3대 성지의 하나로 8세기 압델 말릭과 그의 아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군의 왕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사원 내부는 7개의 홀로 되어 있고 스테인글래스와 타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2] 모스크(Mosque) : 이슬람교의 예배 및 집회장소
[3]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파레스타인 [3]하마스는 알아크사 모스크에 증원된 이스라엘군 병력을 오후 6시까지 철수하라고 요구하였으나 6시가 지나도 변화가 없자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향해 로켓포를 발사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10일부터 연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있는 하마스를 공습하였다.
이스라엘은 연일 지속적으로 가자지역 공습이 계속되면서 수 많은 팔레스타인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무력사용 중단을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휴전을 위한 결의안이 제출되었고 5월 21일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휴전하기로 협의했다. 휴전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하마스 상호 간 아무조건없이 진행되었다
이스라엘 공습으로 파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아동 61명을 포함해 총 232명이 사망하고 1900여명이 다쳤다. 이스라엘은 12명의 사망자와 3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1] 알아크사 모스크(Al-Aqsa Mosque) : 성전산 남쪽에 위치한 은색 둥근 지붕의 이슬람교 사원. 메디나, 메카와 더불어 이슬람교 3대 성지의 하나로 8세기 압델 말릭과 그의 아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군의 왕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사원 내부는 7개의 홀로 되어 있고 스테인글래스와 타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2] 모스크(Mosque) : 이슬람교의 예배 및 집회장소
[3]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아이티 대통령 [1]조브넬 모이즈는 2021년 7월 7일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그는 정부에 대한 비판과 정치적 갈등 속에서 재임 중이었으며, 암살 당시 자택에서 여러 총격이 발생했다.
[1]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의 암살은 아이티 전역에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며, 국가의 안보 상황을 악화시켰다. 암살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사건의 배후와 범죄 조직의 연루에 관한 국제적인 조사가 이어졌다. 이 사건은 아이티 내외에서 큰 충격을 주었고, 정국은 불안정해졌으며, 후속 조치로 여러 인물들이 체포되었지만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다
[1] 조브넬 모이즈(Jovenel Moïse, 1968년~2021년) : 아이티 제59대 대통령, 재임기간 : 2017년 2월 7일 ~ 2021년 7월 7일
[1]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의 암살은 아이티 전역에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며, 국가의 안보 상황을 악화시켰다. 암살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사건의 배후와 범죄 조직의 연루에 관한 국제적인 조사가 이어졌다. 이 사건은 아이티 내외에서 큰 충격을 주었고, 정국은 불안정해졌으며, 후속 조치로 여러 인물들이 체포되었지만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다
[1] 조브넬 모이즈(Jovenel Moïse, 1968년~2021년) : 아이티 제59대 대통령, 재임기간 : 2017년 2월 7일 ~ 2021년 7월 7일
미국은 경제적 부담, 정치·군사적 피로감, 전략적 재배치 필요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2021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결정하면서, 이슬람 무장조직인 [2]텔레반은 정치적·군사적 기반으로 빠르게 권력을 장악했다. 미군 철군 결정이 진행되면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지방 도시부터 수도 카불까지 텔레반의 공격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특히 8월 16일 수도인 카불이 함락되면서 정부 체제가 붕괴되었고, 이에 따라 혼란과 공포가 확산되었다. 수많은 아프가니스탄 시민과 외국인들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하여 긴급 대피에 나섰으며, 카불 국제공항에서 대규모 탈출 작전이 이루어졌지만, 그 과정은 극심한 혼잡과 혼란을 동반했다.
아프카니스탄의 [1]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타지키스탄으로 도피했다.
텔레반의 아프니스탄 재집권은 여성과 소수자 인권 제한, 표현의 자유 억압 등 심각한 인권 문제를 야기하였고, 국제 사회는 이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또한,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다.
[1] 아슈라프 가니(Ashraf Ghani, 1949년~)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 임기(2014년 9월 29일~2021년 8월 15일)
[2] 텔레반(Taliban) :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조직으로,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했으며, 2021년에 다시 권력을 장악한 후 엄격한 종교 법칙과 인권 제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8월 16일 수도인 카불이 함락되면서 정부 체제가 붕괴되었고, 이에 따라 혼란과 공포가 확산되었다. 수많은 아프가니스탄 시민과 외국인들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하여 긴급 대피에 나섰으며, 카불 국제공항에서 대규모 탈출 작전이 이루어졌지만, 그 과정은 극심한 혼잡과 혼란을 동반했다.
아프카니스탄의 [1]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타지키스탄으로 도피했다.
텔레반의 아프니스탄 재집권은 여성과 소수자 인권 제한, 표현의 자유 억압 등 심각한 인권 문제를 야기하였고, 국제 사회는 이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또한,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다.
[1] 아슈라프 가니(Ashraf Ghani, 1949년~)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 임기(2014년 9월 29일~2021년 8월 15일)
[2] 텔레반(Taliban) :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조직으로,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했으며, 2021년에 다시 권력을 장악한 후 엄격한 종교 법칙과 인권 제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아프가니스칸의 수도 카불이 예상보다 빠르게 탈레반에게 점령당하자 아프가니스탄의 치안 상황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면서 대대적 혼란이 발생되었다. 아프가니스탄 국민은 탈출을 위하여 카불공항으로 몰려들었고 카불을 점령한 텔레반은 자국민 이탈을 막기 위하여 공항을 통제하였다.
공항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곳곳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공항주변에는 탈레반 저격수가 배치되어 있으며 공항에 테러가 있을 것이다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카불이 피바다로 변할 거란 우려 속에 각국은 외교관이나 주재무관, 교민들을 탈출시키는 데에 급급했다. 이는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으며 대한민국을 도운 통역, 의료종사자 등도 위험에 처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을 위해 일해온 아프가니스탄 특별공로자들의 국내 이송을 결정하였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공군조종사, 정비요원, CCT등 66명의 특수 임무단을 긴급파견하였다. 특수임무단은 미사일 회피 능력을 탑재한 공군전술수송기(C-130J)에 동승하여 8월 24일 오전 8시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예정대로라면 공항에는 400여명의 조력자가 집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단 26명만이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긴급대책회의가 열렸고 남은 인원을 버스로 한 번에 공항으로 들여보내기로 한다. 공항으로 들어가는 길목 곳곳에 탈레반 검문소가 있어 진입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다행히 공항이 아닌 다른 집결지에 인원을 모은 후 단체 버스로 공항에 진입하는 방안으로 8월 25일 새벽 4시에 364명이 무사히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8월 25일 아침 공군 수송기 C-130J 2대에 나눠 타고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공항으로 출발했다. 앞서 카불공항에 스스로 도착한 협력자 26명은 이미 파키스탄에 도착해있는 상황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아프가니스탄 특별공로자 390명 전원을 무사히 이송시켰다. 390명중 절반이 아이들이었다.
대한민국에 입국 예정 아프가니스타인들은 총 427명이 될 것으로 추산하였으나 실제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한 인원은 390명이다. 나머지 인원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남기로 결심하거나 제3국행을 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본격적인 작전 개시 2주 전인 카불이 함락되기 직전 시점부터 치밀하게 계획에 착수, 작전을 준비해왔으며 이에 대해 대외비로서 기자와 언론에 엠바고를 철저하게 걸어놓은 상태에서 작전을 진행하였다.
*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Hamid Karzai International Airport) :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 북부에 있는 민/군 복합 국제공항
* 이슬라마바드(Islamabad) : 파키스탄의 수도
* 공군 공정통제사(CCT: Combat Control Team) : 대한민국 공군의 특수임무부대
* C-130J : C-130의 최신 개량형으로 Super Hercules라고 불린다
* 뉴스 엠바고(news embargo) : 취재한 내용을 보도하는 것을 일정 기간 미루기로 약속하는 것
공항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곳곳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공항주변에는 탈레반 저격수가 배치되어 있으며 공항에 테러가 있을 것이다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카불이 피바다로 변할 거란 우려 속에 각국은 외교관이나 주재무관, 교민들을 탈출시키는 데에 급급했다. 이는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으며 대한민국을 도운 통역, 의료종사자 등도 위험에 처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을 위해 일해온 아프가니스탄 특별공로자들의 국내 이송을 결정하였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공군조종사, 정비요원, CCT등 66명의 특수 임무단을 긴급파견하였다. 특수임무단은 미사일 회피 능력을 탑재한 공군전술수송기(C-130J)에 동승하여 8월 24일 오전 8시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예정대로라면 공항에는 400여명의 조력자가 집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단 26명만이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긴급대책회의가 열렸고 남은 인원을 버스로 한 번에 공항으로 들여보내기로 한다. 공항으로 들어가는 길목 곳곳에 탈레반 검문소가 있어 진입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다행히 공항이 아닌 다른 집결지에 인원을 모은 후 단체 버스로 공항에 진입하는 방안으로 8월 25일 새벽 4시에 364명이 무사히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8월 25일 아침 공군 수송기 C-130J 2대에 나눠 타고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공항으로 출발했다. 앞서 카불공항에 스스로 도착한 협력자 26명은 이미 파키스탄에 도착해있는 상황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아프가니스탄 특별공로자 390명 전원을 무사히 이송시켰다. 390명중 절반이 아이들이었다.
대한민국에 입국 예정 아프가니스타인들은 총 427명이 될 것으로 추산하였으나 실제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한 인원은 390명이다. 나머지 인원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남기로 결심하거나 제3국행을 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본격적인 작전 개시 2주 전인 카불이 함락되기 직전 시점부터 치밀하게 계획에 착수, 작전을 준비해왔으며 이에 대해 대외비로서 기자와 언론에 엠바고를 철저하게 걸어놓은 상태에서 작전을 진행하였다.
*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Hamid Karzai International Airport) :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 북부에 있는 민/군 복합 국제공항
* 이슬라마바드(Islamabad) : 파키스탄의 수도
* 공군 공정통제사(CCT: Combat Control Team) : 대한민국 공군의 특수임무부대
* C-130J : C-130의 최신 개량형으로 Super Hercules라고 불린다
* 뉴스 엠바고(news embargo) : 취재한 내용을 보도하는 것을 일정 기간 미루기로 약속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