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강화조약(시모노세키 조약)

중화민국 일본 중국 사건기간 : 1895년 3월 20일~1895년 4월 17일, 조회수 : 589,   등록일 : 2021-08-03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청일전쟁을 벌였다.
 
청일전쟁 개전부터 일방적으로 연패하자 [8]공친왕이 미국에 화친 중재를 요청하여 미국이 응했으나 일본이 거절한다. 중재가 이루어지지 않자 1985년 3월 19일 [2]이홍장이 직접 [1]시모노세키로 건너가 3월 20일 굴욕적인 협상을 시작한다.
 
협상은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2]이홍장은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몇 차례 협상이 진행되던중 3월 24일 이홍장이 회견장에서 숙소로 돌아가던 도중에 고야마 도요타로라는 일본인이 쏜 총탄이 왼쪽 뺨에 맞으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일본은 정전을 부탁하려고 온 이홍장에게 오히려 사과를 표해야 했고, 이에 영향을 받아 [9]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은 1895년 4월 17일 전문 11개 조항의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의 주요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청나라는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일본과 대등한 국가임을 인정한다. 이는 청나라의 조선간섭을 배제함을 의미한다.
2. 청나라는 [7]랴오둥 반도, [6]타이완 섬, [3]펑후 제도 등 부속 여러 섬의 주권 및 그 지방에 있는 성루, 병기제조소 등을 일본에 양도한다.
3. 청나라는 일본에 배상금 2억 3천냥을 지불한다. 당시 일본 화폐로 환산하면 3억 6천만 엔으로 일본 정부 4년치 세입이다.
4. 청나라는 사스(沙市), 충칭(重慶),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를 개방하고 일본인의 거주, 영업, 무역의 자유를 승인한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배제되었고 일본은 조선에서 만주까지 지배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패배한 청나라는 조선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열강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는 일본의 [5]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와 청나라의 [4]양무운동 이후의 근대화를 비교해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의 엄청난 이득이 알려지자 일본의 세력 확대를 염려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는 청나라에 반환하였다. 

[1] 시모노세키 : 일본의 야마구치현에 있는 항구도시로 도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으로 조선통신사도 이곳을 통해 일본을 왕복했다
[2] 이홍장(리훙장,李鴻章,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정치가로 중국 부국강병을 위하여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3] 펑후 제도 : 중화민국 타이완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총 연장은 약 300km에 이르며 크고 작은 90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4] 양무(洋務)운동 : 양무는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교류 등을 일컫는 말. 청나라는 국제사회에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하는 운동
[5] 메이지 유신 : 1868년 일본이 정치·경제·문화등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과정
[6] 타이완 : 현 중화민국.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동안 일본 식민지배로 있었다
[7] 랴오둥반도(遼東半島) : 요동반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에 할양했으나, 삼국간섭으로 반환받았다. 이후 러시아가 지배했다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다시 지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국공내전을 거친 중화인민공화국의 랴오닝성에 남아 현재에 이른다
[8] 공친왕(1833년~1898년) : 청나라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9] 이토 히로부미(1841년~1909년) : 일본의 1,5,7,10대 내각총리대신.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인물들 중의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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