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

대한민국 일본 사건기간 : 1904년 2월 23일, 조회수 : 383,   등록일 : 2021-08-01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운이 급박함을 알게 된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하며 양국간의 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와 갈등이 고조되자 1904년 2월 6일 국교를 단절하고, 2월 8일 여순항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기습공격하여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다음 날 2월 9일 인천 제물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여 2척을 침몰시키고 제물포항에 병력을 상륙하여 그날로 서울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 날인 2월 10일에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자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Pavlov)는 2월 12일 러시아군의 보호를 받으며 피신하였다.

일본군은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일본 공사 [6]하야시 곤스케는 전쟁의 불가피성과 협력할 것을 대한제국에 강요하면서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압했다. 반일·친러파였던 [2]탁지부 대신 겸 [3]내장원경 [4]이용익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고, 그 밖에 일본에 반대하던 보부상의 중심 인물 길영수 육군 참장 이학균, 육군 참령 현상건등을 감시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강압으로 대외 중립 유지가 어려움을 인식한 대한제국은 외부대신서리 [5]이지용과 일본 공사 [6]하야시 곤스케는 양국 간 협약을 체결하였다

[전문 6개조]

제1조 한·일 양제국은 항구불역(恒久不易)할 친교를 보지(保持)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를 확신하고 시정(施政)의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들을 것.
제2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황실을 확실한 친의(親誼)로써 안전·강녕(康寧)하게 할 것.
제3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정부는 속히 임기 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하며,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을 것.
제5조 대한제국정부와 대일본제국정부는 상호의 승인을 경유하지 않고 훗날 본 협정의 취지에 위반할 협약을 제3국간에 정립(訂立)할 수 없을 것.
제6조 본 협약에 관련된 미비한 세조(細條)는 대한제국외부대신과 대일본제국대표자 사이에 임기 협정할 것.

이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대한제국을 중립이 아닌 지정학적인 우위를 점하는 전략과 한반도를 점령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의정서 1조에 근거하여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은 서서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일의정서)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여순(뤼순)항 : 중국 랴오둥 반도에 위치한 항구. 현재는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의 구 중 하나이며 명칭은 뤼순구
[2] 탁지부 : 대한제국의 재무를 담당하던 부서. 현재의 기획재정부
[3] 내장원경(內藏院卿) : 황실 재정의 총책임자인 내장사의 장
[4] 이용익(1854년~1907년) :대한제국의 정치인·관료·외교관이며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교의 설립자. 러일전쟁당시 일본으로 압송되어 온갖 회유정책에도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5] 이지용(1870년~1928년) : 대한제국의 왕족이자 관료. 을사오적의 일원(체결당시 내부대신)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당시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엔을 받고 한일의정서에 서명했다
[6] 하야시 곤스케(1860년~1939년) : 일본의 외교관이며 남작. 러일전쟁 중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이어 8월 제1차 한일 협약, 1905년 을사늑약까지 모두 그의 주도 하에 체결되었다

Copyright 2020 TMSTOR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