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대한민국중국사건기간 : 1882년 5월 22일, 조회수 : 668, 등록일 : 2021-07-31
1880년에 제2차 수신사로 파견된 김홍집이 청의 외교관 황준헌(황쭌셴)의 '조선책략'을 국내에 가지고 돌아왔으며 내용은 러시아의 서양 공략을 막기위하여 조선은 중국을 가까이하며 일본과 관계를 공고히 하고 미국과 연계하여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 이며 이는 곧 '친중국','결일본','연미국'으로 정리된다.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확인받고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주선하였다. 미국과 수교를 맺는데 '조선책략'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제물포에서 이홍장이 중재하는 가운데 조선 측에서는 신헌, 김홍집이 전권대사로, 미국 측은 전권위원 로버트 슈펠트가 참가한 가운데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구미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조약의 내용은 앞서 맺은 조일수호조규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등한 항목이 많았다. 그것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가 조약 초안 작성에 직접 개입했고, 미국이 동아시아에 개입이나 관심 정도가 아직까지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은 최혜국 대우 조항으로 인해 후일 구미 국가와 같은 조건으로 조선에서의 제반 권리를 향유하게 된다.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은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구미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로버트 윌슨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 1822년~1895년) : 미국의 해군 제독이자 외교관
*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조정 말기의 한족계 정치가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청나라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 신헌(1810년~1884년) : 조선 말의 무신이자 외교관
* 김홍집(1842년~1896년) :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온건개화파
* 황준헌(1848년~1905년) : 중국 청나라의 외교관 겸 정치가
조선과 미국은 1882년 5월 22일 이곳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조선이 서구와 맺은 최초의 수호통상조약으로 이후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때 기준이 되었다.
그 동안 체결 장소에 대한 이견이 있어 인천 동구 화도진공원과 중구 올림포스호텔 두 곳에 표지석을 세워 기념해 왔으나 최근 조약 체결의 주요 근거인 '인천해관장 사택 터(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위)'가 명기된 지도가 발견(2013년)됨에 다라 그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고 이를 알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다.
인천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32번길에 위치하고 있다.
- 2019년 6월 11일 인천광역시 -
[촬영일 :2022-04-14]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지 : 인천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32번길에 위치하고 있다
미국-인디언 전쟁은 17세기 초 유럽 식민자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이래 19세기 말까지 이어진 일련의 무력 충돌과 갈등을 통칭하는 역사적 명칭이다. 이 전쟁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던 원주민(인디언) 부족들과 유럽계 정착민들 그리고 후에 미국 연방정부 간의 영토 분쟁, 문화 충돌, 자원 경쟁, 조약 위반 등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초기 식민지 시기에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 부족들이 식민 전쟁에 참여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대표적인 초기 충돌로는 킹 필립 전쟁(King Philip’s War, 1675~1678), 포하탄 전쟁(Powhatan Wars), 그리고 프랑스-인디언 전쟁(1754~1763)이 있다. 이 시기 인디언들은 대체로 식민지 세력의 군사적 동맹이자 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영토 보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1776년에 독립한 신생 미국 정부는 서부 확장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면서 원주민과의 충돌이 더욱 잦아졌다. 미국-인디언 전쟁의 핵심은 "서부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들의 땅을 몰수하고 강제로 이주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전쟁으로는 북서부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년~1795), 테쿰세 전쟁(Tecumseh's War), 제1차~제3차 세미놀 전쟁(Seminole Wars), 블랙 호크 전쟁(Black Hawk War), 수족 전쟁(Sioux Wars), 치페와 전쟁(Chippewa War), 아파치 전쟁(Apache Wars), 그리고 제로니모 항쟁(Geronimo's resistance) 등이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 미국 정부는 원주민 부족들을 "보호구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이를 거부한 부족들과의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1876년 리틀 빅혼 전투(Battle of the Little Bighorn)에서는 라코타 수우족과 샤이엔족이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군을 전멸시키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미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식량 차단, 협상 파기 등으로 대부분의 부족이 항복하거나 멸족하였다.
1890년, 사우스다코타주 운디드니(Wounded Knee)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은 미국-인디언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에서 미군은 대규모 무장 해제 중이던 라코타 수우족을 공격하여 남녀노소 수백 명을 살해하였다. 운디드니 학살사건 이후 사실상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소규모의 전투가 가끔 벌어졌다.
이 전쟁의 결과 수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빼앗겼으며 미국 전역의 원주민 사회는 급격한 해체와 문화적 침탈을 경험하게 되었다. 미국-인디언 전쟁은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 식민주의·제국주의·인종주의에 기초한 국가 건설과 정복의 역사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미국 사회 내에서 원주민 문제와 정체성 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청나라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무기력하게 패하고 태평천국운동을 겪은 뒤 국제사회의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군수 공장과 조선소(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 제철소, 방직 공장등을 만들었다. 근대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한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고,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근대적인 학교도 세웠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는 데 힘썼다고 하여 [1]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운동, 신유정변을 거치면서 한족인 [2]증국번, [3]이홍장 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 세력들이 주도하였다.
이시기의 권력 중심은 [4]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5]공친왕이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무운동은 반대세력에 의해 비판과 견제를 받아왔다. 관리의 기업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점등으로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곧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1] 양무(洋務) :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
[2]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3]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제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5]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태평양 전쟁은 1879년 4월 칠레와 페루, 볼리비아 세 나라가 아타카마 사막의 초석 광산 지대를 놓고 일어난 분쟁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다.
초석 전쟁(硝石戰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태평양 연안 지역인 안토파가스타는 원래 볼리비아의 영토였으며 볼리비아의 유일한 태평양 출구였다. 이 지역의 볼리비아내 칠레광업기업에게 과세 혜택등으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볼리비아는 형제국인 페루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조약을 파기하고 칠레의 기업에 과세를 강화하자 칠레군이 볼리비아를 공격하여 안토파가스타 주를 점령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때마침 세나라 모두 경제 공황에 빠져있었던 상태라서 이 광산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다.
볼리비아는 형제국인 페루와 동맹을 체결하여 칠레군에게 맞섰으나 해상 및 지상군까지 칠레군에게 연패하여 볼리비아는 안데스 산맥 너머 본토로 쫓겨났으며 페루는 수도 리마가 함락되면서 항전불가상태가 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결과는 볼리비아는 안토파가스타 지역을 페루는 타라파카, 아리카, 타크나등이 칠레의 영토로 병합되면서 칠레의 영토는 확장되었다. 이 때문에 볼리비아는 바다로 이어지는 영토를 잃고 내륙국이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는 광물 자원 수출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이루게 된다.
1929년 페루에게 타크나 지역을 돌려주었으나 볼리비아와는 아직도 안토파가스타 지역의 영유권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 :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서쪽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사막. 황무지같지만 광물자원이 풍부한 노다지 땅이며 원래는 볼리비아령이었으나 위 전쟁으로 칠레로 넘어갔다.
* 초석 : 무색무취의 무기물 결정. 질산칼륨 분자 KNO3의 광물 형태. 구성물질인 질소와 칼륨이 모두 비료의 주 원료이나 역사적으로 초석은 흑색화약의 원료였다.
* 타라파카(Tarapacá) : 칠레의 북쪽에 있는 도시이며 볼리비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 안토파가스타(Antofagast) : 칠레 북쪽지방의 항구도시
* 아리카(Arica) : 칠레 북쪽지방에 있는 항구도시
* 타크나(Tacna) : 페루 남부 칠레 국경 근처에 있는 도시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13개월이나 밀린 급료 중 1개월분을 지불하였는데 급료내역이 겨와 모래가 섞이고 분량도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불량쌀을 지급해 일어난 군란이다.
조선이 멸망의 길을 걷는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사건이며 이 날을 기점으로 조선왕조는 회생불가의 상태가 되었다.
조선이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여 군인들이 백성들과 함께 손잡고 난을 일으켰을 정도로 조선의 국방력이 사실상 상실되었다.
이 난을 막기위하여 외국 군대(청나라)에게 지원요청을 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 임진왜란 발발시에도 외국군대(명나라)에게 지원요청했듯이 같은 역사가 반복이 되었다. 특히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주둔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