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건기간 : 1980년 5월 17일, 조회수 : 389, 등록일 : 2021-06-25
5·17 쿠데타는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육군 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이후 신군부)가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권유린, 헌정파괴 행위를 자행하여 정권을 잡은 사건으로 '5.17내란'이라고도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피살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는 10월 27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임기는 박정희의 잔여임기인 1984년 12월 6일까지였다.
그러나 6일 뒤인 12월 12일 신군부에 의해 12.12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국정의 실권이 대통령과 정부가 아닌 신군부에게 넘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정치권에서는 계엄을 해제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유신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로 나아가는 길을 열고자 했고 학생과 시민들은 군부퇴진과 민주화를 거세게 요구했다.
5월 17일 신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발표했다. 이는 곧 신군부에게 모든 전권이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18일 부터 정치활동이 전면 중단되고 영장없이 학생,정치인,재야인사등을 구금하기 시작했다.
5월 18일부터 시작된 광주의 저항까지 유혈진압으로 마무리한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8월 16일 최규하대통령이 사임하자 9월에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국보위는 10월 27일 정치규제법을 통과시켜 국회와 모든 제도권 정당을 강제해산하고 새로 만들어진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전두환이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쿠데타는 반란세력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 통일주체국민회의 :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헌법에 따라 구성된 간접민주주의 기관이다
* 국보위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5.17 쿠데타세력이 내각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행정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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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점령하여 흡수 통일했고, 캄보디아의 [2]크메르 루주는 [4]론 놀의 [5]크메르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수도 [8]프놈펜에 입성하였고, 1976년 1월에 국명을 [1]민주 캄푸차로 개칭했다.
당시 중-소 갈등이 심화되어, 베트남은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중국과 우호적인 캄보디아의 [6]폴 포트 정권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폴 포트 정권은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정치로 베트남과 대립하였다. [1]민주 캄푸차로 명명한 [6]폴 포트는 1978년 베트남에 대한 다른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개시했다. 베트남은 [6]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맞서 베트남에서 조직된 [7]캄프차 민족해방전선과 연합하여 캄보디아에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 베트남이 프놈펜을 공략하자 [2]크메르 루주 체제는 붕괴되었다.
베트남군은 폴 포트 일파를 태국 국경 근처의 산악 지역까지 쫓아냈다.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1979년 1월 8일 캄보디아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렇지만 베트남군은 밀림 깊숙히 숨은 폴포트파의 게릴라 활동에 시달리며, 내전의 수렁에 빠졌다. 캄보디아는 [2]크메르 루주와 [3]시아누크 국왕파, [4]론 놀파의 세 계파는 연합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캄보디아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베트남군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1985년 1월에 대공세를 펼치며 반베트남 3파의 민주 캄보디아의 거점을 공략하였고, 3월에는 [3]시아누크 국왕파의 거점을 제압하자 민주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베트남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군의 장기간 주둔은 베트남을 적대하던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한 베트남은 캄보디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1986년 7월, 공산주의 베트남을 이끌던 [10]레주언 서기장이 사망했다. 뒤를 이어 [11]쯔엉찐이 서기장을 맡으면서 베타남 경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2월에 [12]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면서, 경제개방과 국제협력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한편, 1989년에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자치 능력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남은 주둔군마저 철수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26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베트남은 1989년 완전히 철군했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붕괴했다. 캄보디아는 [3]노로돔 시아누크와 [9]훈센을 주축으로 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었고 1993년 군주제로 복귀했다.
[1]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민주 캄보디아. 1975~1980년까지 크메르 루주가 배후에서 지배한 공산국가, 집권당은 캄푸치아 공산당(KCP)이었다. 킬링필드가 발생한 국가 [2]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68년에 결성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 군사조직.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3]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2012년)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4]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5]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캄보디아에 존재하던 공화국 [6]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캄프차 민족해방전선(Kampuchean United Front for National Salvation:KUFNS) : 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창립한 조직 [8] 프놈펜(Phnom Penh) : 캄보디아 수도 [9] 훈 센(Hun Sen, 1952년~) : 캄보디아의 제2대 총리(임기,1998년 11월 30일~2023년 8월 22일 ). 캄보디아인민당(CPP, Cambodian People's Party) [10]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11] 쯔엉찐(Truong Chinh, 1907년 ~ 1988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6년 7월 14일~1986년 12월 18일) [12] 도이모이 정책 : '도이'는 베트남어로 '변한다'는 뜻이고 '모이'는 베트남어로 '새롭다'는 뜻으로 쯔엉찐의 주도로 시작되 베트남의 개방개혁정책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79년 12월부터 1989년 2월까지 10년간 지속된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1]무자헤딘(Mujahideen)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1978년 [2]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세우고 여러 급진적인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다. 이에 저항하는 무슬림들이 반발하면서 [1]무자헤딘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3]하피줄라 아민은 1979년 4월에 [2]모하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집권하게 된다.
1979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넘어 수도인 카불에 도착한 소련은 [3]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고 [4]바브락 카르말을 후임으로 세우고 새로운 공산정권을 수립했다(폭풍333호 작전).
이 사건의 여파로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의 반란이 더욱 거세지자 [4]바브락 카르말 정권은 소련에게 진압을 요청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과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쉽게 진압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면서 소련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영토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소련이 부담해야 할 군사적 외교적 비용은 너무나 컸다.
1987년 소련의 서기장으로 집권한 [5]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발표하였다. 소련군은 1988년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전원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가면서 종료되었다.
[1] 무자헤딘(Mujahideen) :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 및 이슬람 세력. 성전(Jihad, 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를 의미한다
[2]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 1917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1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3]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1929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2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4]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 1929년~1996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3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5]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혹은 광주민중항쟁은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며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
이란은 1979년 팔레비왕조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슬람 공화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반미감정이 강한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1989, 시아파)가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소위 '호메이니 혁명', '이란 이슬람 혁명'이라 불리며 자국내는 물론 주변국가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다.
친미성향의 팔레비왕조와 대조적인 루홀라 호메이니는 반미 정책으로 미국과 관계는 끊어졌고, 이러한 이란의 영향은 주변 중동국가내의 종파의 갈등으로 시아파의 폭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라크는 1979년 새 대통령으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 수니파)이 당선되었다. 후세인은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들에게 파급되는 것을 염려하여 이란 혁명의 혼란기를 틈타 이란과 이라크의 접경 지역인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수로를 둘러싼 영유권문제(양국 간 분쟁의 근원)를 계기로 이란을 선제공격하여 8년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국 및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양국은 1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비공식)가 발생했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측 모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긴채 종식되었다.
이라크는 이 전쟁을 '카디시야 전쟁(Qadisiya War)', 이란은 '강요된 전쟁(Imposed War)'이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