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건기간 : 1960년 2월 28일, 조회수 : 288, 등록일 : 2021-03-19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상북도 대구시의 8개 고교 학생들이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과 [1]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여 2월 28일에 일어난 학생의거이다. 2.28 학생민주의거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최초의 민주화운동이었으며, 2018년 2월 6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일요일이었던 1960년 2월 28일은 대구 수성천변에서 야당 부통령 후보인 [2]장면 후보의 선거 연설이 계획되어 있었다. 장면 후보의 유세장에 많은 인원이 모이는 것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는 이를 방지하고자 학생들이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학교 등교를 지시를 내린것이다.
경북고등학교는 3월 3일부터 예정되었던 중간고사가 앞당겨 변경되었다는 사유를 들어 학교 등교를 강요하였다. 이외에 대구 시내에 있던 다른 국공립 고등학교 7개 역시 토끼사냥, 영화관람, 졸업생 송별회등과 같이 다채롭고 궁색하고 황당한 사유로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각 학교는 부당함을 지적하고 등교 철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2월 28일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대구시청등 대구 시내를 돌며 시위를 하였다.
각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커졌으며, 8개 학교 총 1,2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그 중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였다.
이 시위는 하루 만에 끝났지만, 이후 전국으로 번지면서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8개 고교와 등교사유는 다음과 같다
- 경북고등학고 : 중간고사
- 대구고등학교 : 토끼사냥
-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 임시수업
-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 졸업생 송별회
- 대구농림고등학교(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
- 대구공업고등학교
- 경북여자고등학고 : 무조건 등교
- 대구여자고등학교 : 무용발표회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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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은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선으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Second Indochina war)이라고도 한다. 베트남은 항미전쟁이라고 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남전으로 부른다.
이 전쟁은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의 내전으로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 전쟁 양상을 띠었다. 1964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하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전선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치러졌다.
미국은 [2]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1964년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남베트남을 수호하려던 미국은 결국 북베트남의 20여년동안 끈질긴 공세와 저항에 지치게 되고 미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1973년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미군이 철수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공세에 패배하였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호찌민까지 함락되면서 기나긴 전쟁은 종결된다. 그리하여 1976년 베트남은 통일을 선언하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 1946년 12월 19일 ~ 1954년 8월 1일) : 프랑스-베트남 전쟁. 베트남 독립전쟁 [2]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 : 1964년 8월 2일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의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함을 공격한 사건
대약진운동은 [1]마오쩌둥의 주도하에 1958년부터 1962년경까지 실시되었던 경제, 사회 개발 운동이다.
대규모 경제·사회적 운동으로, 공산주의 이상을 실현하고 농업과 공업 생산을 급속히 증대시키려는 목표로 시작되었다. 내수 시장과 자국 생산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을 이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농업 집단화를 통해 생산성 극대화, 철강 생산 증대를 위해 농촌에서도 소규모 제철소 설치, 공산주의 사회로 빠르게 전환하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되었으나, 잘못된 계획과 과장된 생산목표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비현실적 정책과 자원의 낭비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였다. 약 1500만~45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아사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과는 중국 경제와 사회에 막대한 혼란을 야기하며, 실패로 평가되었으며, [1]마오쩌둥의 정치적 권위가 약화되었다. 대약진운동은 1966년에 일어난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1]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Mao Zedong, 1893년~1976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1]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어 일어난 시민 혁명이다. 2월 28일 대구학생의거를 시작으로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15부정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민주화를 외치던 3.15마산의거에 참여한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2]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이 왼쪽 눈에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보도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 후 괴한에 의해 습격을 당한 것이 알려져 반정부 정서가 점차 심화되었다. 4월 19일 수많은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와 자유당의 독재규탄을 외치며 국회의사당과 [6]경무대를 향해 나아갔다. 경무대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치열한 대치 끝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시위대 100여 명이 사망했으며,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2018년 4.19혁명 58주년을 맞아 종로구 청와대앞 분수광장 바닥에는 4.19 최초 발포현장 표지석을 설치했다.
전 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다. 이승만의 하야로 당시 외무부장관인 [3]허정은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과도정부는 제1공화국헌법을 개정하여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7월 29일 총선거를 거쳐서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4]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그 해 8월 18일 [5]장면이 총리로 지명되었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김주열(1944년~1960년) : 3·15 민주화의거중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 허정(1896년~1988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 서울특별시장, 외무부장관, 이승만 하야후 대통령 권한대행등을 역임 [4]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5]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6]경무대(景武臺) : 현재의 청와대로 2022년 5월 9일까지 사용한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
3.15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의 개표조작이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여당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는 [1]이승만, 부통령 후보는 [2]이기붕이었으며, 야당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3]조병옥, 부통령 후보는 [4]장면이었다.
1960년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신병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으로 떠났으나 선거일 한달전인 2월 15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은 당선이 확정적었다.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조병옥 2명이었으므로 조병옥이 사망했으니 이승만은 유일한 후보가 된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전체 유권자의 30%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당선되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3·15 부정선거는 이전의 선거 부정과 달리 사전 계획에 의해 자행되었다. 재판기록에 의하면, [6]최인규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던 1959년 3월부터 부정선거에 대한 기획과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준비된 부정선거의 기획은 광범위하고 구체적이었다.
부정선거에서 사용된 가장 핵심적인 수단은 4할 사전선거였다. 이는 선거인 명부를 허위기재하거나 유령유권자를 만들고 나아가 유권자를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투표용지를 미리 빼돌리는 것이었다. 그 밖에 3인조 9인조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이 사전에 준비, 계획되었다.
3월 15일 마침내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종료되었다.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95%∼99%까지 나온 지역이 속출하였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은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에게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역에서 감표로 조정하여 최종집계는 이승만 88% 득표, 이기붕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나 당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표와 개표상의 부정행위에 대한 전국민의 저항은 3월 15일 저녁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찰의 무자비한 강경대응으로 마산시민이 사망 및 부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는 더 격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마산에서 시작된 3.15마산의거는 전국적인 규모의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내각책임제 헌법이 공포되어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공포된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5]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 18일 장면은 총리로 지명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기록원 - 나라기록포털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이기붕(1896년~1960년) : 대한민국 제3대 국방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
[3] 조병옥(1894년~1960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
[4]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5]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6] 최인규(1919년~1961년) : 대한민국 제18대 내무부 장관(1959년 3월 20일~1960년 3월 23일), 제7대 교통부 장관(1958년 9월 9일~1959년 3월 20일).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으로 1961년 12월 21일 교수형당한다
과테말라 내전, 흔히 "30년 전쟁"이라 불리는 이 분쟁은 냉전 구조 속에서 정치·사회·민족 갈등이 결합된 복합적 충돌이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토지 불평등, 군부 독재, 원주민 차별, 그리고 외세 개입이 중첩되며 점차 격화된 구조적 갈등의 산물이었다.
내전의 직접적 계기는 1960년 11월 13일 일부 군 장교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반정부 세력은 게릴라 조직으로 재편되어 장기적인 무장 투쟁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익 게릴라 조직들이 형성되었고 특히 후기에 이르러서는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이 주요 반군 연합체로 등장하였다.
이 내전의 배경에는 1954년 미국의 후원을 받은 과테말라 쿠데타로 [1]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전복되고 군부 중심의 권위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억압이 심화되었고 토지 개혁이 중단되며 농민과 원주민의 불만이 극대화되었다. 특히 마야계 원주민들은 경제적 소외와 함께 정치적 배제 속에서 가장 큰 피해 집단으로 남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다. 군사 정권은 좌익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강제 실종, 고문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2]에프라인 리오스 몬트가 집권한 1982년부터 1983년 사이에는 "초토화 작전"이라 불리는 강경 정책이 시행되었고 수백 개의 마을이 파괴되며 수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도 집단학살(genocide) 논쟁이 제기될 만큼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된 시기였다.
내전 기간 동안 미국은 냉전 구도 속에서 반공 정책을 이유로 과테말라 정부를 군사·경제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는 군부의 강경 진압을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게릴라 세력은 농민과 일부 도시 지식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정부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열과 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제 사회의 인권 압력과 냉전 종식 분위기 속에서 평화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1990년대에는 유엔의 중재 아래 정부와 반군 간 협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1996년 12월 29일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36년에 걸친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해 약 20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그 중 대다수는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UN이 지원한 역사규명위원회(CEH)의 보고에 따르면 피해자의 83%가 마야계 원주민으로 단순한 이념 갈등을 넘어 민족적 탄압의 성격이 강했다. 가해 행위의 93%가 정부군 및 준군사조직에 의해 저질러졌음이 밝혀졌다.
이 전쟁은 과테말라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과거사 청산과 사회적 화합은 과테말라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남아 있다.
[1]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1914년 11월 4일 ~ 1957년 7월 26일) : 제28대 대통령(재임기간, 1954년 7월 8일 ~ 1957년 7월 26일). 1957년 7월 26일 대통령 근위대 소속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58년부터 보수 세력 출신인 이디고라스(Miguel Ydígoras Fuentes, 1958-1963)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6년 동안의 과테말라 내전이 시작되었다. [2]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Efraín Ríos Montt, 1926년 6월 16일~2018년 4월 1일) : 과테말라의 제38대 대통령(임기, 1982년 3월 23일~1983년 8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