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
중국
사건기간 : 1850년 12월~1864년 8월, 조회수 : 564, 등록일 : 2021-03-14
태평천국운동 청나라 말기의 사회적·경제적 혼란과 외세의 침략으로 중화제국의 질서가 붕괴되어 가는 동안에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이자 종교 혁명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운동의 지도자인 [1]홍수전은 [2]광시성 출신의 몰락한 유생으로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한 후 기독교 서적을 접하고 자신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중국에서 태어난 메시아라는 교리를 세우고 전파하였다. 그는 서양 기독교의 사상과 중국 민간 신앙을 혼합하여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고 평등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1851년, 홍수전은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 열망을 바탕으로 농민과 하층민,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아 태평천국이라는 국가를 선포하고 스스로 천왕에 올랐다. 그는 청조의 통치를 부정하며 새 질서를 세우고자 하였다. 태평천국은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고 1853년에는 중국의 중심 도시인 [3]난징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태평천국은 재산의 공동 소유, 남녀평등, 신분제 폐지, 전족 금지 등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등 근대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많은 농민과 억압받는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권력 다툼, 통치 경험 부족, 과도한 종교 중심주의 등으로 인해 점차 혼란이 커졌고 외부적으로는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후 청나라군과 서양 열강(영국, 프랑스)에 패퇴하였다. 결국 [5]중국번의 [4]상군에 희하여 난징이 함락되고 홍수전이 사망하면서 14년간의 태평천국운동은 종결되었다.
이 운동은 청나라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이후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 신해혁명 등의 근대화에 영향을 주었다.
[1] 홍수전(1814년~1864) : 청나라 내에서 기독교에 기초한 종교국가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을 건국하여 청나라 조정과 대립하였다
[2] 광시성 :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로 성도는 난닝시이다. 1958년 이전에는 광시성이었지만 1958년에 좡족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3] 난징(Nanjing) : 중화민국(대만, 지도자 쑨원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의 명목상 수도이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쑤성의 성도
[4] 상군 : 청나라 말기 후난성 지방군의 호칭. 후난성의 상향출신의 증국번이 향용을 조직했으며 상군은 향용조식중 하나이다
[5] 증국번(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이 운동의 지도자인 [1]홍수전은 [2]광시성 출신의 몰락한 유생으로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한 후 기독교 서적을 접하고 자신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중국에서 태어난 메시아라는 교리를 세우고 전파하였다. 그는 서양 기독교의 사상과 중국 민간 신앙을 혼합하여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고 평등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1851년, 홍수전은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 열망을 바탕으로 농민과 하층민,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아 태평천국이라는 국가를 선포하고 스스로 천왕에 올랐다. 그는 청조의 통치를 부정하며 새 질서를 세우고자 하였다. 태평천국은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고 1853년에는 중국의 중심 도시인 [3]난징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태평천국은 재산의 공동 소유, 남녀평등, 신분제 폐지, 전족 금지 등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등 근대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많은 농민과 억압받는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권력 다툼, 통치 경험 부족, 과도한 종교 중심주의 등으로 인해 점차 혼란이 커졌고 외부적으로는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후 청나라군과 서양 열강(영국, 프랑스)에 패퇴하였다. 결국 [5]중국번의 [4]상군에 희하여 난징이 함락되고 홍수전이 사망하면서 14년간의 태평천국운동은 종결되었다.
이 운동은 청나라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이후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 신해혁명 등의 근대화에 영향을 주었다.
[1] 홍수전(1814년~1864) : 청나라 내에서 기독교에 기초한 종교국가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을 건국하여 청나라 조정과 대립하였다
[2] 광시성 :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로 성도는 난닝시이다. 1958년 이전에는 광시성이었지만 1958년에 좡족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3] 난징(Nanjing) : 중화민국(대만, 지도자 쑨원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의 명목상 수도이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쑤성의 성도
[4] 상군 : 청나라 말기 후난성 지방군의 호칭. 후난성의 상향출신의 증국번이 향용을 조직했으며 상군은 향용조식중 하나이다
[5] 증국번(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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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에서 1890년 사이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미국 백인 정착민과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사이의 정복 전쟁을 통틀어 일컫는 말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100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다수가 해외로 집단이주하였다.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Irish Potato Femine)이라고도 한다.
1801년 연합법에 의해 아일랜드는 영국에 합병되었다.
1843년 북아메리카에서 시작된 감자역병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흰 곰팡이가 생겨 잎파리는 물로 땅속의 씨감자까지 죽게 만들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출신의 대지주가 농지를 독점하고 있을 정도로 빈부격차 심했으며 생산되는 농작물은 영국으로 수탈당하는 구조였다. 감자가 유일한 식량이었던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무려 5년간 이어진 감자역병으로 아일랜드인 10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더구나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 이질병등의 전염병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아사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결국 생존을 위해 아일랜드를 떠나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했는데,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올랐던 20여만명이 열악한 환경으로 배 안에서 사망하였다. 아메리카에 정착해서도 현실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존 이민자, 토착민들과는 다른 언어, 다른 종교를 믿는 이방인이었으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배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함께 매장된 공동묘지가 있다.
대기근이 일어나기 직전인 1840년대 후반의 아일랜드 인구는 850만 명이었다. 대기근 기간 중에 사망 또는 이주로 인해 전체인구의 약 20%~25% 정도가 줄어들었다.
기근의 주된 원인은 감자 역병 이었으나 그 외에도 영국의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차별정책이 사태가 심각해지도록 만든 또 다른 원인이었다.
이 사건으로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졌으며 독립의 열망이 증가하였다.
감자 역병을 보낸 건 물론 신이었지만, 그것을 대기근으로 바꾼 것은 잉글랜드인들이다
The almighty indeed sent the potato blight but the english created the famine.
-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 존 미첼(John Mitchel)
1801년 연합법에 의해 아일랜드는 영국에 합병되었다.
1843년 북아메리카에서 시작된 감자역병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흰 곰팡이가 생겨 잎파리는 물로 땅속의 씨감자까지 죽게 만들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출신의 대지주가 농지를 독점하고 있을 정도로 빈부격차 심했으며 생산되는 농작물은 영국으로 수탈당하는 구조였다. 감자가 유일한 식량이었던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무려 5년간 이어진 감자역병으로 아일랜드인 10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더구나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 이질병등의 전염병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아사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결국 생존을 위해 아일랜드를 떠나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했는데,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올랐던 20여만명이 열악한 환경으로 배 안에서 사망하였다. 아메리카에 정착해서도 현실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존 이민자, 토착민들과는 다른 언어, 다른 종교를 믿는 이방인이었으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배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함께 매장된 공동묘지가 있다.
대기근이 일어나기 직전인 1840년대 후반의 아일랜드 인구는 850만 명이었다. 대기근 기간 중에 사망 또는 이주로 인해 전체인구의 약 20%~25% 정도가 줄어들었다.
기근의 주된 원인은 감자 역병 이었으나 그 외에도 영국의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차별정책이 사태가 심각해지도록 만든 또 다른 원인이었다.
이 사건으로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졌으며 독립의 열망이 증가하였다.
감자 역병을 보낸 건 물론 신이었지만, 그것을 대기근으로 바꾼 것은 잉글랜드인들이다
The almighty indeed sent the potato blight but the english created the famine.
-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 존 미첼(John Mitchel)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California Gold Rush)는 캘리포니아의 세크라멘토 근교인 콜로마(Coloma)라는 마을의 제재소(Sutter's Mill)에서 일하던 제임스 마셜(James W. Marshall)이 아메리칸 리버(American river)에서 금가루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이내 확산되어 미국의 각지역 그리고 해외에서 남녀노소를 비롯하여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오늘날의 금액으로 수십억달러에 해당하는 금이 채집되었다.
이 과정에서 캘리포니아는 작은 정착촌에서 신흥도시가 되고 늘어난 인구에 따른 각종 기간 시설이 건설되고 법체제가 갖춰지면서 1850년에 미국의 31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유입된 채굴자들 중 1849년에 캘리포니아로 향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연도를 따서 '포티나이너(Forty-niner, 약칭 49er)'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이내 확산되어 미국의 각지역 그리고 해외에서 남녀노소를 비롯하여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오늘날의 금액으로 수십억달러에 해당하는 금이 채집되었다.
이 과정에서 캘리포니아는 작은 정착촌에서 신흥도시가 되고 늘어난 인구에 따른 각종 기간 시설이 건설되고 법체제가 갖춰지면서 1850년에 미국의 31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유입된 채굴자들 중 1849년에 캘리포니아로 향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연도를 따서 '포티나이너(Forty-niner, 약칭 49er)'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크림 전쟁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여기에 영국, 프랑스, [1]사르데냐 왕국이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며 개입하면서 국제적인 충돌로 확대되었다. 이 전쟁의 주요 원인은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틈타 흑해와 발칸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령 [2]다뉴브 공국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하며 개입을 시도했고, 이에 맞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인 1853년 [3]시노페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이 오스만 제국 함대를 대파하며 우위를 점했으나 러시아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1854년에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1854년에 연합군은 러시아의 [10]크림반도를 공격하며 [4]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시작했고, 같은 해 [5]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군의 무모한 돌격으로 유명한 [6]경기병 여단의 돌격이 벌어졌다.
전쟁은 1855년 9월, 세바스토폴이 함락되면서 러시아의 패색이 확실해졌고, 결국 1856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7]몰다비아와 [8]왈라키아에서 철수해야 했으며 흑해에서 군사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유럽 내 세력 균형을 재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크림 전쟁은 단순한 영토 전쟁을 넘어 근대 전쟁의 특징을 처음으로 보여준 전쟁이었다. 철도와 전신이 군사 작전에 활용되었으며 언론과 전쟁 사진 보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9]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참전하여 군 병원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체계적인 간호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근대 간호학의 발전을 촉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패배를 계기로 내부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861년 농노 해방령을 발표하는 등 사회 변화를 겪게 되었다. 또한 사르데냐 왕국의 참전은 이후 이탈리아 통일의 발판이 되었으며 유럽 전체적으로는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고 오스만 제국을 일정 부분 유지하려는 외교적 균형이 유지되었다.
크림 전쟁은 유럽 세력 균형을 조정하는 중요한 전쟁이었으며 근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전쟁으로서 군사, 외교,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1] 사르데냐 왕국(Kingdom of Sardinia) : 1720년부터 1861년까지 토리노를 수도로 하여 존재했던 이탈리아의 왕국으로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을 탄생시키는 기반을 마련한 왕국
[2] 다뉴브 공국(Danubian Principalities) :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역(현재 루마니아)으로,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주요 분쟁 지역이었다
[3] 시노페 해전(Battle of Sinop, 1853년 11월 30일) : 크림 전쟁 초기 러시아 해군이 오스만 제국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섬멸한 전투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며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세바스토폴 공방전(Siege of Sevastopol, 1854년 ~ 1855년) : 크림 전쟁 중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이 11개월간 러시아의 요새 도시 세바스토폴을 포위하여 함락시킨 전투로 러시아의 패배를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5] 발라클라바 전투(Battle of Balaclava, 1854년 10월 25일) : 크림 전쟁 중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과 러시아군의 전투로, 특히 영국군의 무모한 "경기병 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으로 유명하다
[6] 경기병 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 1854) : 크림 전쟁 중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 기병대가 잘못된 명령으로 러시아 대포 진지를 향해 돌격하여 막대한 희생을 낳은 사건으로 용맹함과 군사 지휘 실수의 상징이 되었다
[7] 몰다비아(Moldavia) : 현재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다가 러시아-오스만 갈등의 주요 무대가 되었으며, 이후 루마니아 통일의 기초가 되었다
[8] 왈라키아(Wallachia) : 현재 루마니아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1859년 몰다비아와 합병하여 루마니아 왕국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년 5월 12일 ~ 1910년 8월 13일) : 크림 전쟁 중 병원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근대 간호학의 기초를 확립한 영국의 간호사이자 의료 개혁가
[10] 크림반도(Crimea Peninsula) : 흑해 북쪽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역사적으로 여러 제국과 국가들이 차지하려 했던 분쟁 지역이며 현재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갈등 중심지이다.
전쟁 초기인 1853년 [3]시노페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이 오스만 제국 함대를 대파하며 우위를 점했으나 러시아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1854년에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1854년에 연합군은 러시아의 [10]크림반도를 공격하며 [4]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시작했고, 같은 해 [5]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군의 무모한 돌격으로 유명한 [6]경기병 여단의 돌격이 벌어졌다.
전쟁은 1855년 9월, 세바스토폴이 함락되면서 러시아의 패색이 확실해졌고, 결국 1856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7]몰다비아와 [8]왈라키아에서 철수해야 했으며 흑해에서 군사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유럽 내 세력 균형을 재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크림 전쟁은 단순한 영토 전쟁을 넘어 근대 전쟁의 특징을 처음으로 보여준 전쟁이었다. 철도와 전신이 군사 작전에 활용되었으며 언론과 전쟁 사진 보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9]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참전하여 군 병원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체계적인 간호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근대 간호학의 발전을 촉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패배를 계기로 내부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861년 농노 해방령을 발표하는 등 사회 변화를 겪게 되었다. 또한 사르데냐 왕국의 참전은 이후 이탈리아 통일의 발판이 되었으며 유럽 전체적으로는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고 오스만 제국을 일정 부분 유지하려는 외교적 균형이 유지되었다.
크림 전쟁은 유럽 세력 균형을 조정하는 중요한 전쟁이었으며 근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전쟁으로서 군사, 외교,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1] 사르데냐 왕국(Kingdom of Sardinia) : 1720년부터 1861년까지 토리노를 수도로 하여 존재했던 이탈리아의 왕국으로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을 탄생시키는 기반을 마련한 왕국
[2] 다뉴브 공국(Danubian Principalities) :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역(현재 루마니아)으로,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주요 분쟁 지역이었다
[3] 시노페 해전(Battle of Sinop, 1853년 11월 30일) : 크림 전쟁 초기 러시아 해군이 오스만 제국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섬멸한 전투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며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세바스토폴 공방전(Siege of Sevastopol, 1854년 ~ 1855년) : 크림 전쟁 중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이 11개월간 러시아의 요새 도시 세바스토폴을 포위하여 함락시킨 전투로 러시아의 패배를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5] 발라클라바 전투(Battle of Balaclava, 1854년 10월 25일) : 크림 전쟁 중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과 러시아군의 전투로, 특히 영국군의 무모한 "경기병 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으로 유명하다
[6] 경기병 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 1854) : 크림 전쟁 중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 기병대가 잘못된 명령으로 러시아 대포 진지를 향해 돌격하여 막대한 희생을 낳은 사건으로 용맹함과 군사 지휘 실수의 상징이 되었다
[7] 몰다비아(Moldavia) : 현재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다가 러시아-오스만 갈등의 주요 무대가 되었으며, 이후 루마니아 통일의 기초가 되었다
[8] 왈라키아(Wallachia) : 현재 루마니아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1859년 몰다비아와 합병하여 루마니아 왕국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년 5월 12일 ~ 1910년 8월 13일) : 크림 전쟁 중 병원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근대 간호학의 기초를 확립한 영국의 간호사이자 의료 개혁가
[10] 크림반도(Crimea Peninsula) : 흑해 북쪽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역사적으로 여러 제국과 국가들이 차지하려 했던 분쟁 지역이며 현재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갈등 중심지이다.
미일화친조약은 일본과 미국이 체결한 조약으로 일본이 쇄국 정책을 끝내고 서구 국가들과 외교 및 무역 관계를 시작한 사건이다.
이 조약은 미국 해군 제독 [1]매튜 페리가 이끄는 함대가 일본에 무력 시위를 벌인 후 강제적으로 체결되었으며 일본의 근대화와 개항을 촉진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은 [2]시모다와 [3]하코다테의 두 항구를 미국 선박에 개방하여 연료와 식량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미국 선박이 조난당한 경우 일본이 구조하고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 셋째, 양국이 평등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이 일본에 영사관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약 220년간 유지해온 쇄국 정책을 종식했으며 서구 열강과 조약이 연이어 체결하면서 본격적인 개항 시대가 시작되었다.
미일화친조약은 일본의 [4]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근대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일본이 국제 사회로 진출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은 중국과 무역 경유지를 확보하였으며 태평양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 매튜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년 ~ 1858년) : 미국 해군 제독
[2] 시모다(Shimoda) : 일본 시즈오카현의 이즈반도 남부에 위치하는 도시. 일본 에도시대 말의 1854년에 미일 화친 조약이 조인된 도시
[3] 하코다테(Hakodate) : 일본 홋카이도 남부에 있는 도시
[4] 메이지 유신(Meiji Restoration, 1868) : 일본이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로 전환한 정치·사회 개혁 운동으로, 서구식 군대·산업·교육 시스템을 도입하며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서구 열강과 경쟁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조약은 미국 해군 제독 [1]매튜 페리가 이끄는 함대가 일본에 무력 시위를 벌인 후 강제적으로 체결되었으며 일본의 근대화와 개항을 촉진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은 [2]시모다와 [3]하코다테의 두 항구를 미국 선박에 개방하여 연료와 식량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미국 선박이 조난당한 경우 일본이 구조하고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 셋째, 양국이 평등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이 일본에 영사관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약 220년간 유지해온 쇄국 정책을 종식했으며 서구 열강과 조약이 연이어 체결하면서 본격적인 개항 시대가 시작되었다.
미일화친조약은 일본의 [4]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근대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일본이 국제 사회로 진출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은 중국과 무역 경유지를 확보하였으며 태평양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 매튜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년 ~ 1858년) : 미국 해군 제독
[2] 시모다(Shimoda) : 일본 시즈오카현의 이즈반도 남부에 위치하는 도시. 일본 에도시대 말의 1854년에 미일 화친 조약이 조인된 도시
[3] 하코다테(Hakodate) : 일본 홋카이도 남부에 있는 도시
[4] 메이지 유신(Meiji Restoration, 1868) : 일본이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로 전환한 정치·사회 개혁 운동으로, 서구식 군대·산업·교육 시스템을 도입하며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서구 열강과 경쟁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피의 캔자스는 미국역사에서 '피로 물든 캔자스(Bloody Kansas) 혹은 경계지역의 전쟁(Border War)'라고 언급된다.
피의 캔자스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자유주 정착민과 노예제를 찬성하는 노예주 정착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일련의 폭력적, 정치적 대립 사건을 말한다.
미국의 노예제 문제를 놓고 벌어진 폭력적인 사태는 미국 북부와 남부의 노예 제도를 둘러싼 대리 전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미국 남북전쟁의 사전 징후가 되었다.
이러한 폭력적인 사건들은 캔자스 준주와 인접한 미주리주 서쪽의 프런티어 타운에서 발생했다. 갈등의 주요 이슈는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할 것인가 아니면 노예주로 가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노예주로서 미주리주는 두 면이 자유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일리노이주, 북쪽으로는 아이오와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한다면 미주리는 삼면이 자유주들로 경계를 이루는 상황에 처한다.이는 미주리 노예 소유주들에게 위협이었다.
극심한 감정대결은 몇 년 동안 이어졌고 이후 진행된 주민투표에서 캔자스주에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법안은 주 의회의 인준을 받았고 1861년 1월 29일 노예제도를 거부하는 자유주로서 연방에 새로 편입되었다.
캔자스주의 연방가입 후 세 달 뒤에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 준주(準州) : 미합중국 자산의 일부로 병합되었거나 미국 연방 의회에서 제정된 조직법에 따라 입법, 행정, 사법 등의 조직을 갖춘 곳을 말한다. 1912년 애리조나가 주가 된 것을 마지막으로 미국 본토내의 준주는 없으며, 하와이와 알래스카가 1959년 준주에서 주가 되면서 현재 미국내 준주인 곳은 없다
* 노예주(slave state) : 미국 남북 전쟁 이전에 있었던 노예 제도가 합법적이었던 주
* 자유주(free state) : 노예 제도를 금지했거나 이미 폐지한 주
피의 캔자스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자유주 정착민과 노예제를 찬성하는 노예주 정착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일련의 폭력적, 정치적 대립 사건을 말한다.
미국의 노예제 문제를 놓고 벌어진 폭력적인 사태는 미국 북부와 남부의 노예 제도를 둘러싼 대리 전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미국 남북전쟁의 사전 징후가 되었다.
이러한 폭력적인 사건들은 캔자스 준주와 인접한 미주리주 서쪽의 프런티어 타운에서 발생했다. 갈등의 주요 이슈는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할 것인가 아니면 노예주로 가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노예주로서 미주리주는 두 면이 자유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일리노이주, 북쪽으로는 아이오와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한다면 미주리는 삼면이 자유주들로 경계를 이루는 상황에 처한다.이는 미주리 노예 소유주들에게 위협이었다.
극심한 감정대결은 몇 년 동안 이어졌고 이후 진행된 주민투표에서 캔자스주에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법안은 주 의회의 인준을 받았고 1861년 1월 29일 노예제도를 거부하는 자유주로서 연방에 새로 편입되었다.
캔자스주의 연방가입 후 세 달 뒤에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 준주(準州) : 미합중국 자산의 일부로 병합되었거나 미국 연방 의회에서 제정된 조직법에 따라 입법, 행정, 사법 등의 조직을 갖춘 곳을 말한다. 1912년 애리조나가 주가 된 것을 마지막으로 미국 본토내의 준주는 없으며, 하와이와 알래스카가 1959년 준주에서 주가 되면서 현재 미국내 준주인 곳은 없다
* 노예주(slave state) : 미국 남북 전쟁 이전에 있었던 노예 제도가 합법적이었던 주
* 자유주(free state) : 노예 제도를 금지했거나 이미 폐지한 주
1856년 발발한 제2차 아편 전쟁은 일명 애로우호 전쟁이라고 불린다. 제2차 중영전쟁이다
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의 승리로 청나라의 개항과 무역 독점권을 얻었지만 생각보다 큰 이득이 되지 않았고 여전히 아편수출에 의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인들이 아편을 몰래 자체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무역적자가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의 차 수출량이 급증하는 상황까지 되었다.
게다가 당시 청나라는 프랑스인 선교사 처형문제로 프랑스와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영국인 선주의 청나라 선박인 애로우호의 영국국기를 바다에 던진 사건, 일명 애로우호 사건을 핑게삼아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였다.
내부적으로 태평천국의 난으로 국가적 역량이 크게 쇠퇴하였던 청나라는 베이징이 함락된 후 러시아의 중재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베이징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청나라는 1차 아편전쟁의 패배의 결과인 난징조약(1842년)에서 영국에 홍콩 섬을 내준데 이어 홍콩섬 맞은 편의 주룽(Kowloon)반도까지 내주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넘겨받으면서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만주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청나라에서 프랑스인의 천주교 전파 등 포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패하면서 허약한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게 된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덩치 큰 호구,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베이징 조약을 맺은 이후 청은 서구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중화 우위의 질서가 무너지고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 애로우호(Arrow) : 영국인 선주 소유의 청나라 선박
* 태평천국 운동 :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대봉기이자 신정국가(종교적 원리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지는 정치형태)인 태평천국 건국 운동
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의 승리로 청나라의 개항과 무역 독점권을 얻었지만 생각보다 큰 이득이 되지 않았고 여전히 아편수출에 의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인들이 아편을 몰래 자체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무역적자가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의 차 수출량이 급증하는 상황까지 되었다.
게다가 당시 청나라는 프랑스인 선교사 처형문제로 프랑스와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영국인 선주의 청나라 선박인 애로우호의 영국국기를 바다에 던진 사건, 일명 애로우호 사건을 핑게삼아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였다.
내부적으로 태평천국의 난으로 국가적 역량이 크게 쇠퇴하였던 청나라는 베이징이 함락된 후 러시아의 중재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베이징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청나라는 1차 아편전쟁의 패배의 결과인 난징조약(1842년)에서 영국에 홍콩 섬을 내준데 이어 홍콩섬 맞은 편의 주룽(Kowloon)반도까지 내주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넘겨받으면서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만주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청나라에서 프랑스인의 천주교 전파 등 포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패하면서 허약한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게 된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덩치 큰 호구,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베이징 조약을 맺은 이후 청은 서구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중화 우위의 질서가 무너지고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 애로우호(Arrow) : 영국인 선주 소유의 청나라 선박
* 태평천국 운동 :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대봉기이자 신정국가(종교적 원리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지는 정치형태)인 태평천국 건국 운동
1857년 인도항쟁, 제1차 인도 독립전쟁으로도 불린다.
영국은 1757년 [1]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와 인도연합군에 승리한 이후 인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은 총독을 파견해 지배하는 대신 [2]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간접통치하고 있었다.
영국 [2]동인도회사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인도인 용병인 [3]세포이를 고용하였다. [3]세포이는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토후국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갈 때 용병으로 참여했으며 지역에 따라 이슬람교, 힌두교등의 다양한 종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계속되는 팽창 정책으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일대로 세포이의 파병을 요구하였다. 이에 파병을 꺼리던 세포이는 영국과 갈등을 빚었고 처우에 대한 불만도 쌓여갔다. 이러한 불만들이 쌓여가는 가운데 새로 지급된 탄약통이 세포이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새롭게 지급된 [6]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 소총은 보다 빠른 장전을 위하여 개별 포장된 탄약통을 사용하였다. 문제는 탄약통의 방수를 위해 종이에 소나 돼지의 지방 입힌 것에서 비롯되었다. 소는 힌두교도들이 신성시하고 돼지는 이슬람교도들이 싫어했다.
힌두교나 이슬람교의 신자였던 세포이들은 이 탄약통을 입으로 물어 뜯어 사용하라는 것은 자신들의 종교를 멸시하는 행위라고 받아들였다.
1857년 3월 29일 제34 벵골인 연대의 세포이였던 [5]망갈 판데이는 탄약통을 수령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5]만갈 판데이는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은 선고받았고 4월 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연대는 해산되었으며 항명에 가담한 세포이는 불명예 제대를 하였다. 이들 대다수는 전국적으로 번진 항쟁에 민간인으로 가담하였다.
실제적인 항쟁은 델리에서 북동쪽 70km에 위치하고 있는 [7]메루트 지역에서 비롯되었다.
4월 24일에 [7]메루트의 동인도회사 소속 90명의 세포이에게 탄약통이 지급되었다. 90명의 세포이중에 85명이 수령을 거부하였다. 이때문에 이들은 영국군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5월 9일에 5년~10년형의 선고를 받았다. 이에 분개한 세포이들은 다음날인 5월 10일에 결집하여 병영을 공격하고 영국군 장교를 사살하였다. 5월 10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국 병사들은 교회에 가거나 비번이 상황이었다. 항쟁이 시작되었다.
항쟁 직전 세포이는 20만 명에 달했으나 영국군의 수는 약 4만명에 불과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무굴황제가 인도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기에 약간의 권위를 인정했다. 따라서 황제인 [8]바하두르 샤 2세는 왕궁에 기거하면서 품위 유지 명목으로 델리 일대에서 소수의 근위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5월 11일 아침 세포이는 델리에 도착하여 [8]바하두르 샤 2세가 있는 왕궁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바하두르 샤 2세 황제에게 무굴제국의 부활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통상적인 청원자로 여겨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세포이가 봉기하였다는 소식이 퍼져나갔고 무기고를 탈취하여 항쟁을 계속해 나갔다.
다음날인 5월 12일 바하두르 샤 2세는 실로 오랫만에 국정회의를 소집했다. 세포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황제는 세포이들의 충성을 요구하며 항쟁을 지지하였다. 5월 16일, 황제는 체포되거나 구금된 영국인 50명을 왕궁 밖에 있던 보리수 나무에서 처형하였다
세포이들은 순식간에 델리를 점령하면서 항쟁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인도의 각 지역은 종파와 토후 제후국의 이해득실로 인하여 무굴제국과 세포이 항쟁을 지지하거나 영국 동인도회사를 지지하는 쪽으로 분열되었다.
항쟁초기에는 세포이들은 기세등등하여 영국군에 승리하였으나 영국군의 반격을 시작되자 명령체계의 구조적인 약점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크림전쟁에 투입되었던 병력과 중국에 주둔해 있던 병력의 일부까지 불러들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영국군은 세포이군과 델리 공방전을 벌인끝에 9월 14일 델리를 탈환하여 점령하였고 바하두르 샤 2세를 체포하였다.
1857년 말 무렵 영국은 교전의 주도권을 갖기 시작했으며 세포이 항쟁은 1858년 7월 20일 괄리로르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진압되었다.
포로로 붙잡힌 세포이는 대포입구에 머리가 위치하도록 묶은 뒤 포탄을 쏴 머리를 폭살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8]바하두르 샤 2세는 폐위하여 영국령 미얀마 양곤지역으로 추방되어 사망하였다. 330년간 지속된 무굴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영국은 직접 인도를 통치하기로 결정하고 영국 동인도회사를 해체하였다.
1877년 영국령 인도제국이 선포되어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제국의 황제가 되어 식민지 배가 본격화했다.
이후 인도는 90년 후인 194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참고문헌]
- 아틀라스 뉴스(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8)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 영국 동인도회사와 벵골 토후국-프랑스 동인도회사의 전투. 이 전투에서의 승리한 영국은 100년간 인도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2] 영국 동인도 회사 : 인도양, 동아시아에 대한 모직물 시장 및 향료 획득 등의 독점 무역을 목적으로 세워진 영국의 회사
[3] 세포이(sepoy) : 영국 동인도 회사에 채용된 인도인 용병.
[4] 나르마다강(Narmada) : 인도 중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
[5] 망갈 판데이(Mangal Pandey, 1827~1857) : 1857 년 3 월 29 일 영국 장교를 공격 한 인도 군인
[6] 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Enfield Pattern 1853 rifle-musket) : 영국의 엔필드 조병창에서 개발된 전장식 소총
[7] 메루트(Meerut) :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도시. 뉴델리에서 북동쪽으로 70km에 위치하며 1857년 세포이 항쟁이 벌어진 도시이다
[8] 바하두르 샤 2세(Bahadur Shah Zafar, 1775년~1862년) : 인도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티무르 황조의 마지막 군주(재위, 1837년 9월 28일~1857년 9월 14일)
영국은 1757년 [1]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와 인도연합군에 승리한 이후 인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은 총독을 파견해 지배하는 대신 [2]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간접통치하고 있었다.
영국 [2]동인도회사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인도인 용병인 [3]세포이를 고용하였다. [3]세포이는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토후국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갈 때 용병으로 참여했으며 지역에 따라 이슬람교, 힌두교등의 다양한 종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계속되는 팽창 정책으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일대로 세포이의 파병을 요구하였다. 이에 파병을 꺼리던 세포이는 영국과 갈등을 빚었고 처우에 대한 불만도 쌓여갔다. 이러한 불만들이 쌓여가는 가운데 새로 지급된 탄약통이 세포이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새롭게 지급된 [6]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 소총은 보다 빠른 장전을 위하여 개별 포장된 탄약통을 사용하였다. 문제는 탄약통의 방수를 위해 종이에 소나 돼지의 지방 입힌 것에서 비롯되었다. 소는 힌두교도들이 신성시하고 돼지는 이슬람교도들이 싫어했다.
힌두교나 이슬람교의 신자였던 세포이들은 이 탄약통을 입으로 물어 뜯어 사용하라는 것은 자신들의 종교를 멸시하는 행위라고 받아들였다.
1857년 3월 29일 제34 벵골인 연대의 세포이였던 [5]망갈 판데이는 탄약통을 수령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5]만갈 판데이는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은 선고받았고 4월 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연대는 해산되었으며 항명에 가담한 세포이는 불명예 제대를 하였다. 이들 대다수는 전국적으로 번진 항쟁에 민간인으로 가담하였다.
실제적인 항쟁은 델리에서 북동쪽 70km에 위치하고 있는 [7]메루트 지역에서 비롯되었다.
4월 24일에 [7]메루트의 동인도회사 소속 90명의 세포이에게 탄약통이 지급되었다. 90명의 세포이중에 85명이 수령을 거부하였다. 이때문에 이들은 영국군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5월 9일에 5년~10년형의 선고를 받았다. 이에 분개한 세포이들은 다음날인 5월 10일에 결집하여 병영을 공격하고 영국군 장교를 사살하였다. 5월 10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국 병사들은 교회에 가거나 비번이 상황이었다. 항쟁이 시작되었다.
항쟁 직전 세포이는 20만 명에 달했으나 영국군의 수는 약 4만명에 불과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무굴황제가 인도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기에 약간의 권위를 인정했다. 따라서 황제인 [8]바하두르 샤 2세는 왕궁에 기거하면서 품위 유지 명목으로 델리 일대에서 소수의 근위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5월 11일 아침 세포이는 델리에 도착하여 [8]바하두르 샤 2세가 있는 왕궁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바하두르 샤 2세 황제에게 무굴제국의 부활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통상적인 청원자로 여겨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세포이가 봉기하였다는 소식이 퍼져나갔고 무기고를 탈취하여 항쟁을 계속해 나갔다.
다음날인 5월 12일 바하두르 샤 2세는 실로 오랫만에 국정회의를 소집했다. 세포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황제는 세포이들의 충성을 요구하며 항쟁을 지지하였다. 5월 16일, 황제는 체포되거나 구금된 영국인 50명을 왕궁 밖에 있던 보리수 나무에서 처형하였다
세포이들은 순식간에 델리를 점령하면서 항쟁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인도의 각 지역은 종파와 토후 제후국의 이해득실로 인하여 무굴제국과 세포이 항쟁을 지지하거나 영국 동인도회사를 지지하는 쪽으로 분열되었다.
항쟁초기에는 세포이들은 기세등등하여 영국군에 승리하였으나 영국군의 반격을 시작되자 명령체계의 구조적인 약점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크림전쟁에 투입되었던 병력과 중국에 주둔해 있던 병력의 일부까지 불러들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영국군은 세포이군과 델리 공방전을 벌인끝에 9월 14일 델리를 탈환하여 점령하였고 바하두르 샤 2세를 체포하였다.
1857년 말 무렵 영국은 교전의 주도권을 갖기 시작했으며 세포이 항쟁은 1858년 7월 20일 괄리로르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진압되었다.
포로로 붙잡힌 세포이는 대포입구에 머리가 위치하도록 묶은 뒤 포탄을 쏴 머리를 폭살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8]바하두르 샤 2세는 폐위하여 영국령 미얀마 양곤지역으로 추방되어 사망하였다. 330년간 지속된 무굴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영국은 직접 인도를 통치하기로 결정하고 영국 동인도회사를 해체하였다.
1877년 영국령 인도제국이 선포되어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제국의 황제가 되어 식민지 배가 본격화했다.
이후 인도는 90년 후인 194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참고문헌]
- 아틀라스 뉴스(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8)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 영국 동인도회사와 벵골 토후국-프랑스 동인도회사의 전투. 이 전투에서의 승리한 영국은 100년간 인도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2] 영국 동인도 회사 : 인도양, 동아시아에 대한 모직물 시장 및 향료 획득 등의 독점 무역을 목적으로 세워진 영국의 회사
[3] 세포이(sepoy) : 영국 동인도 회사에 채용된 인도인 용병.
[4] 나르마다강(Narmada) : 인도 중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
[5] 망갈 판데이(Mangal Pandey, 1827~1857) : 1857 년 3 월 29 일 영국 장교를 공격 한 인도 군인
[6] 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Enfield Pattern 1853 rifle-musket) : 영국의 엔필드 조병창에서 개발된 전장식 소총
[7] 메루트(Meerut) :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도시. 뉴델리에서 북동쪽으로 70km에 위치하며 1857년 세포이 항쟁이 벌어진 도시이다
[8] 바하두르 샤 2세(Bahadur Shah Zafar, 1775년~1862년) : 인도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티무르 황조의 마지막 군주(재위, 1837년 9월 28일~1857년 9월 14일)
제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1860년 러시아의 중재하에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의 주요내용으로 외국 공사의 베이징 주재, 천진을 포함한 11개 항 개항, 내지에서의 여행,통상,포교의 자유, 양쯔 강 및 통상항으로의 군함 진입권, 중국인 노동자의 이민 허용, 배상금 등이 규정되었다. 또 교회는 토지를 임대하거나 구매해 교회를 건립할 수 있는 토지조매권을 얻었다.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에 홍콩 섬을 내준데 이어 홍콩섬 맞은 편의 주룽(Kowloon)반도까지 내주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넘겨받았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는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만주로 영향력을 확대하게 된다. 프랑스는 청나라 내에서 프랑스인의 천주교 전파 등 포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이 조약의 주요내용으로 외국 공사의 베이징 주재, 천진을 포함한 11개 항 개항, 내지에서의 여행,통상,포교의 자유, 양쯔 강 및 통상항으로의 군함 진입권, 중국인 노동자의 이민 허용, 배상금 등이 규정되었다. 또 교회는 토지를 임대하거나 구매해 교회를 건립할 수 있는 토지조매권을 얻었다.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에 홍콩 섬을 내준데 이어 홍콩섬 맞은 편의 주룽(Kowloon)반도까지 내주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넘겨받았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는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만주로 영향력을 확대하게 된다. 프랑스는 청나라 내에서 프랑스인의 천주교 전파 등 포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청나라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무기력하게 패하고 태평천국운동을 겪은 뒤 국제사회의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군수 공장과 조선소(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 제철소, 방직 공장등을 만들었다. 근대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한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고,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근대적인 학교도 세웠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는 데 힘썼다고 하여 [1]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운동, 신유정변을 거치면서 한족인 [2]증국번, [3]이홍장 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 세력들이 주도하였다.
이시기의 권력 중심은 [4]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5]공친왕이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무운동은 반대세력에 의해 비판과 견제를 받아왔다. 관리의 기업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점등으로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곧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1] 양무(洋務) :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
[2]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3]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제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5]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이 시기에 군수 공장과 조선소(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 제철소, 방직 공장등을 만들었다. 근대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한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고,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근대적인 학교도 세웠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는 데 힘썼다고 하여 [1]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운동, 신유정변을 거치면서 한족인 [2]증국번, [3]이홍장 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 세력들이 주도하였다.
이시기의 권력 중심은 [4]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5]공친왕이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무운동은 반대세력에 의해 비판과 견제를 받아왔다. 관리의 기업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점등으로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곧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1] 양무(洋務) :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
[2]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3]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제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5]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미국 남북 전쟁(American Civil War)은 미국에서 아메리카 합중국과 아메리카 연합국 사이에서 일어난 내전이다.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후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 포격을 시작으로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 결과 남부연합군이 패했고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폐지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후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 포격을 시작으로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 결과 남부연합군이 패했고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폐지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 함풍제는 제2차 아편전쟁(애로호 전쟁) 이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베이징 북쪽에 위치한 열하에 있는 별궁(피서산장)으로 피신해 있었다.
아편전쟁은 이복동생인 공친왕의 주도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음으로써 종결되었지만 상심한 함풍제는 수도인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열하에 남아있었으며 1년 뒤인 1861년 11월 21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함풍제는 사망하기전에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 황권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막기위하여 가까운 황족종친을 배제하고 황실의 먼 종친이거나 고명대신인 이친왕, 정친왕을 비롯하여 숙순, 경수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보정대신 8인을 구성하였다.
이 기미를 알아챈 서태후(함풍제의 후궁)는 소외되어 있던 황족 공친왕을 끌어들여 황제의 시신을 베이징의 자금성으로 운구하던 두 친왕과 숙순 및 그 일당을 체포한다. 두 친왕은 자결명령을 받았고 열하행궁 일체의 실무 책임자인 숙순등은 모두 처형당했다. 결국 함풍제가 지정한 보정대신 8인은 모두 숙청당한다.
이 궁정반란은 신유년에 일어났다하여 신유정변이라 한다. 함풍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서태후의 집권을 열어준 사건이 되었다.
이후 서태후의 어린 아들(당시 6세)은 함풍제에 이어 황제에 등극하는데, 그가 청나라 10대 황제 동치제이다. 서태후와 동태후(함풍제의 두번째 황후)는 태후로서 동치제의 공동섭정이 시작되면서 권력을 잡게 되었다.
특히, 서태후는 1861년부터 1908년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이 청나라를 통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가 죽은지 4년후에 대청제국은 종말을 고했으니 청나라 말기는 거의 서태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함풍제(1831년~1861년) : 중국 청나라 제9대 황제.혁저. 재위 : 1850년~1861년. 묘호는 문종.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4남
* 동치제(1856년~1875년) : 중국 청나라 제10대 황제. 재위 : 1861년~1874년). 묘호는 목종
*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림
* 동태후(자안황태후,1837년~1881년) : 함풍제의 두번째 황후. 처소가 자금성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태후라 불림
*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
* 열하 : 중국 허베이성에 위치한 현재의 청더시를 말하며 청나라 황제의 행궁(피서산장)이 있다.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230km 떨어져 있으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유명해진 지역이기도 하다
아편전쟁은 이복동생인 공친왕의 주도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음으로써 종결되었지만 상심한 함풍제는 수도인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열하에 남아있었으며 1년 뒤인 1861년 11월 21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함풍제는 사망하기전에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 황권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막기위하여 가까운 황족종친을 배제하고 황실의 먼 종친이거나 고명대신인 이친왕, 정친왕을 비롯하여 숙순, 경수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보정대신 8인을 구성하였다.
이 기미를 알아챈 서태후(함풍제의 후궁)는 소외되어 있던 황족 공친왕을 끌어들여 황제의 시신을 베이징의 자금성으로 운구하던 두 친왕과 숙순 및 그 일당을 체포한다. 두 친왕은 자결명령을 받았고 열하행궁 일체의 실무 책임자인 숙순등은 모두 처형당했다. 결국 함풍제가 지정한 보정대신 8인은 모두 숙청당한다.
이 궁정반란은 신유년에 일어났다하여 신유정변이라 한다. 함풍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서태후의 집권을 열어준 사건이 되었다.
이후 서태후의 어린 아들(당시 6세)은 함풍제에 이어 황제에 등극하는데, 그가 청나라 10대 황제 동치제이다. 서태후와 동태후(함풍제의 두번째 황후)는 태후로서 동치제의 공동섭정이 시작되면서 권력을 잡게 되었다.
특히, 서태후는 1861년부터 1908년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이 청나라를 통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가 죽은지 4년후에 대청제국은 종말을 고했으니 청나라 말기는 거의 서태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함풍제(1831년~1861년) : 중국 청나라 제9대 황제.혁저. 재위 : 1850년~1861년. 묘호는 문종.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4남
* 동치제(1856년~1875년) : 중국 청나라 제10대 황제. 재위 : 1861년~1874년). 묘호는 목종
*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림
* 동태후(자안황태후,1837년~1881년) : 함풍제의 두번째 황후. 처소가 자금성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태후라 불림
*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
* 열하 : 중국 허베이성에 위치한 현재의 청더시를 말하며 청나라 황제의 행궁(피서산장)이 있다.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230km 떨어져 있으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유명해진 지역이기도 하다
19세기 중반, 프랑스는 동남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베트남 내 가톨릭 선교사 보호와 경제적 이익을 명분으로 개입하면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프랑스는 1858년 [3]다낭을 공격하며 베트남 [1]응우옌 왕조와 전쟁을 본격화하였고 1859년에는 [2]사이공을 점령하였다. 이후 몇 년간 베트남과 프랑스 간의 전쟁이 지속되었으며 프랑스는 남부 지역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결국 베트남은 프랑스와 협상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1862년 6월 5일 제1차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으로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에게 남부 [4]코친차이나 일부 지역을 할양하기로 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 내 영토를 직접적으로 첫 번재로 차지하였으며 이후 베트남 전역으로 식민지 지배가 확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약에 따라 베트남은 프랑스의 무역을 개방했으며 프랑스 상인들이 특정 항구에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이는 베트남의 경제적 주권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프랑스가 점진적으로 경제적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가 개입한 중요한 명분 중 하나였던 가톨릭 신앙의 자유 보장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베트남은 가톨릭 선교사와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종교 활동을 보장해야 했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 내부에 지속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으며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베트남은 프랑스에 전쟁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는 [1]응우옌 왕조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고 베트남의 국력이 더욱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에서 본격적으로 식민 통치를 시작하였다. 1867년에 프랑스는 [4]코친차이나 전체를 완전히 점령하며 영토 확장을 지속하였다. 한편, 조약에 반발하는 베트남 내부의 저항으로 반프랑스 운동이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영향력은 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1884년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전락하면서 완전한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사이공 조약은 20세기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식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 응우옌 왕조 (Nguyễn Dynasty) :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다. 베트남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응우옌 왕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 사이공(Saigon) :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며 현재는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로 불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다.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점령하였고 이후 1976년 7월 2일을 기해 호찌민으로 변경하였다
[3] 다낭(Da Nang) : 다낭은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이자 경제 및 관광 중심지이다. 1858년 프랑스가 다낭을 공격하면서 베트남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다낭은 프랑스의 주요 군사 거점이 되었다.
[4] 코친차이나(Cochinchina) :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식민지 통치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과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베트남 남부 지역(호찌민시 및 메콩 델타)으로 발전하여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메콩 델타(Mekong Delta) : 베트남 남서부에 위치한 광대한 삼각주 지역으로 메콩강이 남중국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형성되었다. 베트남 최대의 쌀 생산지이자 풍부한 수자원으로 경제적으로 주용한 지역이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으로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에게 남부 [4]코친차이나 일부 지역을 할양하기로 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 내 영토를 직접적으로 첫 번재로 차지하였으며 이후 베트남 전역으로 식민지 지배가 확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약에 따라 베트남은 프랑스의 무역을 개방했으며 프랑스 상인들이 특정 항구에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이는 베트남의 경제적 주권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프랑스가 점진적으로 경제적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가 개입한 중요한 명분 중 하나였던 가톨릭 신앙의 자유 보장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베트남은 가톨릭 선교사와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종교 활동을 보장해야 했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 내부에 지속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으며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베트남은 프랑스에 전쟁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는 [1]응우옌 왕조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고 베트남의 국력이 더욱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에서 본격적으로 식민 통치를 시작하였다. 1867년에 프랑스는 [4]코친차이나 전체를 완전히 점령하며 영토 확장을 지속하였다. 한편, 조약에 반발하는 베트남 내부의 저항으로 반프랑스 운동이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영향력은 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1884년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전락하면서 완전한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사이공 조약은 20세기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식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 응우옌 왕조 (Nguyễn Dynasty) :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다. 베트남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응우옌 왕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 사이공(Saigon) :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며 현재는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로 불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다.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점령하였고 이후 1976년 7월 2일을 기해 호찌민으로 변경하였다
[3] 다낭(Da Nang) : 다낭은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이자 경제 및 관광 중심지이다. 1858년 프랑스가 다낭을 공격하면서 베트남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다낭은 프랑스의 주요 군사 거점이 되었다.
[4] 코친차이나(Cochinchina) :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식민지 통치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과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베트남 남부 지역(호찌민시 및 메콩 델타)으로 발전하여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메콩 델타(Mekong Delta) : 베트남 남서부에 위치한 광대한 삼각주 지역으로 메콩강이 남중국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형성되었다. 베트남 최대의 쌀 생산지이자 풍부한 수자원으로 경제적으로 주용한 지역이다
미국 남북전쟁은 1861년 4월에 일어났다.
1862년 7월 22일 링컨 대통령은 그의 각료들에게 역사적인 노예 해방 선언의 초안을 낭독해 보였으며 9월22일 노예해방 선언의 제 2초안을 내각에게 낭독했다. 몇 가지 수정을 가하여 이 선언문은 예비선언으로 발표되었다.
정식 노예해방 선언문은 1863년 1월 1일에 발표되었다.
*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1865년) : 미국의 16대 대통령. 임기 :1861년 ~1865년
* 윌리엄 스워드(William Seward) : 미국 국무장관이며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862년 7월 22일 링컨 대통령은 그의 각료들에게 역사적인 노예 해방 선언의 초안을 낭독해 보였으며 9월22일 노예해방 선언의 제 2초안을 내각에게 낭독했다. 몇 가지 수정을 가하여 이 선언문은 예비선언으로 발표되었다.
정식 노예해방 선언문은 1863년 1월 1일에 발표되었다.
*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1865년) : 미국의 16대 대통령. 임기 :1861년 ~1865년
* 윌리엄 스워드(William Seward) : 미국 국무장관이며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 전투의 격전지였던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열린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링컨 대통령이 한 연설이다.
272 단어에 3분여의 짧은 연설이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이자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문이 되었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 we can not consecrate - we can not hallow -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지금으로부터 여든하고도 일곱 해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 자유의 정신으로 잉태되고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신념이 바쳐진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나라가, 아니 이러한 정신과 신념으로 잉태되고 헌신하는 어느 나라이든지, 과연 오래도록 굳건할 수 있는가 하는 시험대인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전쟁의 거대한 싸움터인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 싸움터의 일부를, 이 곳에서 자신의 삶을 바쳐 바로 그 나라를 살리고자 한 영령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봉헌하기 위함입니다.
리의 이 헌정은 지극히 마땅하고 옳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 땅을 헌정할 수도, 축성할 수도, 신성화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싸웠던 용맹한 전사자와 생존 용사들이 이미 이 곳을 신성한 땅으로
272 단어에 3분여의 짧은 연설이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이자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문이 되었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 we can not consecrate - we can not hallow -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지금으로부터 여든하고도 일곱 해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 자유의 정신으로 잉태되고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신념이 바쳐진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나라가, 아니 이러한 정신과 신념으로 잉태되고 헌신하는 어느 나라이든지, 과연 오래도록 굳건할 수 있는가 하는 시험대인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전쟁의 거대한 싸움터인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 싸움터의 일부를, 이 곳에서 자신의 삶을 바쳐 바로 그 나라를 살리고자 한 영령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봉헌하기 위함입니다.
리의 이 헌정은 지극히 마땅하고 옳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 땅을 헌정할 수도, 축성할 수도, 신성화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싸웠던 용맹한 전사자와 생존 용사들이 이미 이 곳을 신성한 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