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영국중국사건기간 : 1842년 8월 29일, 조회수 : 473, 등록일 : 2021-03-05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가 영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인해 홍콩 섬이 영국 통치로 넘어갔고, 청나라의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가 강제적으로 개항되었다.
청나라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 열강의 반(半)식민지적 지위로 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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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에서 1890년 사이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미국 백인 정착민과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사이의 정복 전쟁을 통틀어 일컫는 말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19세기 영국에서 노동 계층을 중심으로 전개된 정치 개혁 운동으로, 당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노동자들이 정치적 권리를 얻고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해 벌였던 중요한 운동이다. 이 운동의 이름은 1838년에 발표된 인민헌장(People’s Charter)에서 유래했으며, 헌장은 영국 의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6가지 주요 항목을 포함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빠른 경제적 성장과 함께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었으며, 노동 계층은 투표권과 정치 참여에서 배제된 상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차티스트들은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며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하고 서명 운동과 집회를 통해 인민헌장의 내용을 홍보했다. 인민헌장에서 요구한 6대 개혁안은 다음과 같다.
(1) 보통선거권: 모든 성인 남성에게 선거권 부여. (2) 비밀투표제: 투표 과정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비밀투표를 실시. (3) 의회 정기선거: 의회의 연간 선거를 통해 국민의 의사를 정기적으로 반영. (4) 평등한 선거구제: 지역 간 인구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공평한 선거구 설정. (5) 국회의원 자격 제한 폐지: 모든 계층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도록 자격 제한 철폐. (6) 국회의원 보수 지급: 경제적 여건에 상관없이 누구나 국회의원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보수 지급.
차티스트 운동은 1830~1850년대에 걸쳐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청원 운동과 의회 제출을 진행했으나, 당대 영국 정부와 의회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노동 계층의 불만과 정치적 의식을 높였으며, 전국적인 단결을 통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차티스트들은 시위를 통해 평화적인 방법과 폭력적인 방법을 병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반영한다. 차티스트 운동이 즉각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선거법 개정과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 계층의 권리 신장을 위한 민주주의 투쟁의 선구적 사례로 기억되며,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와 영국의 완충지역이 되었다.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러시아 제국의 부동항 진출(남하정책)을 막기위해 영국이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과 일어난 전쟁으로 영국에 의하여 아프카니스탄 국왕 도스트 모하마드는 쫓겨나고 샤 슈자가 왕위에 복위되었다.
그러나 샤 슈자의 통치력과 영국인의 방탕한 행태로 아프가니스탄은 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에 대한 아프가니스탄인의 적개심이 노골적으로 표출되면서 대대적으로 저항하게 되었다. 결국 샤 슈자는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주둔하고 있었던 영국군도 전멸되었다. 살아남아 영국으로 되돌아간 영국군은 단 한명이었다고 한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으로 부터 해방되었으며 '도스트 무함마드'가 다시 왕위로 복위되면서 독립국이 되었다.
36년후인 1878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공격했다. 이를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고 한다.
* 도스트 모하마드(Dost Mohammad, 1793년~1863년) : 아프가니스탄 바라크자이 왕조(아프카니스탄 아미르국 - Emirate of Afghanistan, 1826 ~ 1919)의 창시자. 아미르국은 1919년 이후 아프카니스탄 왕국(1919년~1973년)이라 한다
* 샤 슈자(Shah Shujah) : 바라크자이 왕조의 전 왕조였던 두라니 왕조에서 1803년경에 재위했으나 6년만에 쿠데타로 쫒겨났던 왕으로 영국에 의해 1839년 다시 왕으로 복위한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화한후 청나라(중국)과 무역을 시작하였다. 청나라의 최대수출품은 차였고 영국의 주요수출품은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였다.
영국은 자국의 수출품에 비하여 청나라의 차가 큰 인기를 끌자 무역적자가 지속되었다. 영국은 이러한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하여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청나라에 몰래 팔기시작하였다.
마침 청나라의 정치가 혼란해지고 백성들이 힘들어하자 아편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설상가상으로 아편의 독성과 해악성에 대한 경각심이 미비하던 당시에 아편의 환각효과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상황은 청나라가 해결해야 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청나라 조정은 대대적인 아편단속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영국은 청나라의 이러한 아편 단속에 반발하여 제1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영국의 최신식 대포와 군함앞에 청나라는 패배하고 결과로 난징조약을 체결하였다.
난징조약으로 홍콩 섬이 영국 통치로 넘어갔고, 청나라의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가 강제적으로 개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