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러시아
영국
사건기간 : 1813년 10월 12일~1907년 8월 31일, 조회수 : 1122, 등록일 : 2021-02-15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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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디언 전쟁은 17세기 초 유럽 식민자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이래 19세기 말까지 이어진 일련의 무력 충돌과 갈등을 통칭하는 역사적 명칭이다. 이 전쟁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던 원주민(인디언) 부족들과 유럽계 정착민들 그리고 후에 미국 연방정부 간의 영토 분쟁, 문화 충돌, 자원 경쟁, 조약 위반 등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초기 식민지 시기에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 부족들이 식민 전쟁에 참여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대표적인 초기 충돌로는 킹 필립 전쟁(King Philip’s War, 1675~1678), 포하탄 전쟁(Powhatan Wars), 그리고 프랑스-인디언 전쟁(1754~1763)이 있다. 이 시기 인디언들은 대체로 식민지 세력의 군사적 동맹이자 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영토 보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1776년에 독립한 신생 미국 정부는 서부 확장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면서 원주민과의 충돌이 더욱 잦아졌다. 미국-인디언 전쟁의 핵심은 "서부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들의 땅을 몰수하고 강제로 이주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전쟁으로는 북서부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년~1795), 테쿰세 전쟁(Tecumseh's War), 제1차~제3차 세미놀 전쟁(Seminole Wars), 블랙 호크 전쟁(Black Hawk War), 수족 전쟁(Sioux Wars), 치페와 전쟁(Chippewa War), 아파치 전쟁(Apache Wars), 그리고 제로니모 항쟁(Geronimo's resistance) 등이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 미국 정부는 원주민 부족들을 "보호구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이를 거부한 부족들과의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1876년 리틀 빅혼 전투(Battle of the Little Bighorn)에서는 라코타 수우족과 샤이엔족이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군을 전멸시키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미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식량 차단, 협상 파기 등으로 대부분의 부족이 항복하거나 멸족하였다.
1890년, 사우스다코타주 운디드니(Wounded Knee)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은 미국-인디언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에서 미군은 대규모 무장 해제 중이던 라코타 수우족을 공격하여 남녀노소 수백 명을 살해하였다. 운디드니 학살사건 이후 사실상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소규모의 전투가 가끔 벌어졌다.
이 전쟁의 결과 수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빼앗겼으며 미국 전역의 원주민 사회는 급격한 해체와 문화적 침탈을 경험하게 되었다. 미국-인디언 전쟁은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 식민주의·제국주의·인종주의에 기초한 국가 건설과 정복의 역사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미국 사회 내에서 원주민 문제와 정체성 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초기 식민지 시기에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 부족들이 식민 전쟁에 참여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대표적인 초기 충돌로는 킹 필립 전쟁(King Philip’s War, 1675~1678), 포하탄 전쟁(Powhatan Wars), 그리고 프랑스-인디언 전쟁(1754~1763)이 있다. 이 시기 인디언들은 대체로 식민지 세력의 군사적 동맹이자 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영토 보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1776년에 독립한 신생 미국 정부는 서부 확장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면서 원주민과의 충돌이 더욱 잦아졌다. 미국-인디언 전쟁의 핵심은 "서부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들의 땅을 몰수하고 강제로 이주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전쟁으로는 북서부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년~1795), 테쿰세 전쟁(Tecumseh's War), 제1차~제3차 세미놀 전쟁(Seminole Wars), 블랙 호크 전쟁(Black Hawk War), 수족 전쟁(Sioux Wars), 치페와 전쟁(Chippewa War), 아파치 전쟁(Apache Wars), 그리고 제로니모 항쟁(Geronimo's resistance) 등이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 미국 정부는 원주민 부족들을 "보호구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이를 거부한 부족들과의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1876년 리틀 빅혼 전투(Battle of the Little Bighorn)에서는 라코타 수우족과 샤이엔족이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군을 전멸시키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미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식량 차단, 협상 파기 등으로 대부분의 부족이 항복하거나 멸족하였다.
1890년, 사우스다코타주 운디드니(Wounded Knee)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은 미국-인디언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에서 미군은 대규모 무장 해제 중이던 라코타 수우족을 공격하여 남녀노소 수백 명을 살해하였다. 운디드니 학살사건 이후 사실상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소규모의 전투가 가끔 벌어졌다.
이 전쟁의 결과 수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빼앗겼으며 미국 전역의 원주민 사회는 급격한 해체와 문화적 침탈을 경험하게 되었다. 미국-인디언 전쟁은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 식민주의·제국주의·인종주의에 기초한 국가 건설과 정복의 역사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미국 사회 내에서 원주민 문제와 정체성 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 혁명에서 전쟁으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여 나폴레옹 전쟁에서 절정에 이르렀다.이 전쟁은 5개 항목으로 분류된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오스트리아 전쟁 (1805)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독일·폴란드 원정 (1806 ~ 1807)
- 이베리아 반도 전쟁 (1808 ~ 1814)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 (1809)
- 러시아 원정 (1812)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나폴레옹의 몰락 (1813 ~ 1814)
- 빈 회의 (1814. 9. 1 ~ 1815. 6. 9)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워털루 전투(1615)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오스트리아 전쟁 (1805)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독일·폴란드 원정 (1806 ~ 1807)
- 이베리아 반도 전쟁 (1808 ~ 1814)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 (1809)
- 러시아 원정 (1812)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나폴레옹의 몰락 (1813 ~ 1814)
- 빈 회의 (1814. 9. 1 ~ 1815. 6. 9)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워털루 전투(1615)
1521년에 [1]아즈텍 문명이 스페인의 정복자 [2]에르난 코르테스에게 정복당한후 300여 년의 기간 동안 멕시코는 스페인 식민지로 통치되었다.
멕시코는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하여 1810년 9월 16일 [3]돌로레스에서 [4]미겔 이달고 코스티야 신부의 외침(일명 돌로레스의 외침, 울부짖음)으로 멕시코 인디오들과 인디오와 백인의 혼혈인 [5]메스티조들은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한다. 1811년 [4]미겔 이달고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그의 정신은 [6]누에바에스파냐에 전해져 각지에서 항전이 이어졌다.
이달고 신부가 1811년 사망한 이후 [8]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4년간 독립운동은 계속하였으나 1815년 스페인군 소속 사령관인 [7]아구스틴 데이투르비데에게 패배당하고 만다.
독립군을 진압하던 [7]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스페인에 회의를 느끼고 무장투쟁을 하여 1821년 8월 24일 [6]누에바에스파냐의 부왕과 코르도바 조약(Treaty of Córdoba)을 체결하여 멕시코는 독립하였다.
이후 [7]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의회를 구성하고 입헌군주국 헌법을 제정한다. 1822년 5월 19일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스스로 아구스틴 1세(Agustin I)로 칭하면서 멕시코 제국을 성립했다.
[4]미겔 이달고 코스티야 신부의 외침은 멕시코 독립전쟁의 발단이 되어 9월 16일은 멕시코 독립기념일이 되었다
[1] 아즈텍 제국(Aztec Empire, 1248년~1521년): 라틴아메리카의 멕시코 중부 부근에 존재했던 아즈텍인들의 국가
[2]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 1485년~1547년) :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화의 첫 단계를 끊은 식민지 개척자로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3] 돌로레스 이달고(Dolores Hidalgo): 멕시코 중부 과나후아토(Guanajuato)주에 위치한 도시
[4] 미겔 이달고 코스티야(Miguel Hidalgo Costilla, 1753년~1811년) : 멕시코에서 태어난 토착민(크리오요)로서 카톨릭 신부. 멕시코 독립 초기 지도자.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5] 크리오요(스페인어: Crioll), 크리올(영어, Criole) : 본래 유럽인의 자손으로 식민지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보통 유럽계와 현지인의 혼혈을 부르는 말로 쓰인다. 그 무렵 멕시코에는 4개의 인종 집단이 있었다. 원주민인 인디오, 혼혈인 메스티조(Mestizo), 스페인 후손인 크리올, 스페인에서 건너온 백인 페닌슈랄(Peninsular) 등이다
[6] 누에바에스파냐(스페인어: Virreinato de Nueva España) : 북아메리카와 아시아-태평양에 위치한 스페인의 영토 행정 단위. 누에바에스파냐의 영토는 오늘날 미국 남서부, 멕시코, 중앙아메리카(파나마 제외), 카리브 해, 필리핀을 아울렀다.
[7]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 1783년~1824년) : 멕시코의 정치가로 당시 멕시코 독립 전쟁의 지도자이자 멕시코 제1제국의 초대 황제.
[8]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1765년~1815년) : 멕시코의 성직자이며 독립운동가
멕시코는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하여 1810년 9월 16일 [3]돌로레스에서 [4]미겔 이달고 코스티야 신부의 외침(일명 돌로레스의 외침, 울부짖음)으로 멕시코 인디오들과 인디오와 백인의 혼혈인 [5]메스티조들은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한다. 1811년 [4]미겔 이달고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그의 정신은 [6]누에바에스파냐에 전해져 각지에서 항전이 이어졌다.
이달고 신부가 1811년 사망한 이후 [8]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4년간 독립운동은 계속하였으나 1815년 스페인군 소속 사령관인 [7]아구스틴 데이투르비데에게 패배당하고 만다.
독립군을 진압하던 [7]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스페인에 회의를 느끼고 무장투쟁을 하여 1821년 8월 24일 [6]누에바에스파냐의 부왕과 코르도바 조약(Treaty of Córdoba)을 체결하여 멕시코는 독립하였다.
이후 [7]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의회를 구성하고 입헌군주국 헌법을 제정한다. 1822년 5월 19일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스스로 아구스틴 1세(Agustin I)로 칭하면서 멕시코 제국을 성립했다.
[4]미겔 이달고 코스티야 신부의 외침은 멕시코 독립전쟁의 발단이 되어 9월 16일은 멕시코 독립기념일이 되었다
[1] 아즈텍 제국(Aztec Empire, 1248년~1521년): 라틴아메리카의 멕시코 중부 부근에 존재했던 아즈텍인들의 국가
[2]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 1485년~1547년) :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화의 첫 단계를 끊은 식민지 개척자로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3] 돌로레스 이달고(Dolores Hidalgo): 멕시코 중부 과나후아토(Guanajuato)주에 위치한 도시
[4] 미겔 이달고 코스티야(Miguel Hidalgo Costilla, 1753년~1811년) : 멕시코에서 태어난 토착민(크리오요)로서 카톨릭 신부. 멕시코 독립 초기 지도자.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5] 크리오요(스페인어: Crioll), 크리올(영어, Criole) : 본래 유럽인의 자손으로 식민지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보통 유럽계와 현지인의 혼혈을 부르는 말로 쓰인다. 그 무렵 멕시코에는 4개의 인종 집단이 있었다. 원주민인 인디오, 혼혈인 메스티조(Mestizo), 스페인 후손인 크리올, 스페인에서 건너온 백인 페닌슈랄(Peninsular) 등이다
[6] 누에바에스파냐(스페인어: Virreinato de Nueva España) : 북아메리카와 아시아-태평양에 위치한 스페인의 영토 행정 단위. 누에바에스파냐의 영토는 오늘날 미국 남서부, 멕시코, 중앙아메리카(파나마 제외), 카리브 해, 필리핀을 아울렀다.
[7]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 1783년~1824년) : 멕시코의 정치가로 당시 멕시코 독립 전쟁의 지도자이자 멕시코 제1제국의 초대 황제.
[8]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1765년~1815년) : 멕시코의 성직자이며 독립운동가
러다이트 운동은 19세기 초 영국에서 발생한 노동자들의 저항 운동으로, 산업혁명으로 인한 급격한 기술 발전과 기계화의 확산으로 인해 직물 산업 노동자들이 직면한 생계 위협과 실업 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1811년부터 1816년까지 주로 노팅엄셔(Nottinghamshire), 요크셔(Yorkshire), 랭커셔(Lancashire) 등의 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방적기, 직조기와 같은 기계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수공업 기반의 생산 방식을 빠르게 대체했다. 이로 인해 숙련된 직물 노동자들이 노동 시장에서 밀려나거나 임금이 급감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특히 고용주들은 기계 도입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한편, 노동자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노동 조건을 악화시키면서 노동자들 사이에 불만이 커졌다.
운동의 이름은 전설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네드 러드(Ned Ludd)에서 유래했으며,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며,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한 사건과 관련된 상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러다이트 운동의 주요 특징은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공장과 기계 설비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저항을 표시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주로 야간에 활동하며 공장에 침입하여 기계를 부수거나, 이를 제조하는 시설을 공격했다.
운동의 배경에는 단순히 기술 혁신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기술 도입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특히 숙련 노동자의 소외와 저임금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기계가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믿었으며, 기계화의 영향을 최소화하거나 철폐하려는 목적으로 이러한 행동을 취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영국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했다. 1812년, 정부는 "기계 파괴법"을 제정하여 기계 파괴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로 규정했고, 군대를 동원하여 운동을 진압했다. 수백 명의 러다이트 운동 참가자들이 체포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당했다. 이러한 영국정부의 강경한 진압으로 인해 러다이트 운동은 1816년경 사실상 종식되었다. 많은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되면서 조직적인 저항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단순히 기술 발전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는, 산업화와 기술 혁신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사회적·경제적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와 기술 도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으며, 이후 노동조합 운동 및 사회적 안전망 강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현대에는 인공지능(AI)과 자동화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며 일자리 감소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러다이트 운동은 기술 혁신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논의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는 기술 발전이 필연적이더라도,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사회적 공정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방적기, 직조기와 같은 기계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수공업 기반의 생산 방식을 빠르게 대체했다. 이로 인해 숙련된 직물 노동자들이 노동 시장에서 밀려나거나 임금이 급감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특히 고용주들은 기계 도입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한편, 노동자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노동 조건을 악화시키면서 노동자들 사이에 불만이 커졌다.
운동의 이름은 전설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네드 러드(Ned Ludd)에서 유래했으며,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며,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한 사건과 관련된 상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러다이트 운동의 주요 특징은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공장과 기계 설비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저항을 표시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주로 야간에 활동하며 공장에 침입하여 기계를 부수거나, 이를 제조하는 시설을 공격했다.
운동의 배경에는 단순히 기술 혁신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기술 도입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특히 숙련 노동자의 소외와 저임금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기계가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믿었으며, 기계화의 영향을 최소화하거나 철폐하려는 목적으로 이러한 행동을 취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영국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했다. 1812년, 정부는 "기계 파괴법"을 제정하여 기계 파괴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로 규정했고, 군대를 동원하여 운동을 진압했다. 수백 명의 러다이트 운동 참가자들이 체포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당했다. 이러한 영국정부의 강경한 진압으로 인해 러다이트 운동은 1816년경 사실상 종식되었다. 많은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되면서 조직적인 저항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단순히 기술 발전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는, 산업화와 기술 혁신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사회적·경제적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와 기술 도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으며, 이후 노동조합 운동 및 사회적 안전망 강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현대에는 인공지능(AI)과 자동화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며 일자리 감소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러다이트 운동은 기술 혁신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논의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는 기술 발전이 필연적이더라도,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사회적 공정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1]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인 1811년([2]순조 11년)부터 1812년까지 평안도 지역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으로, 홍경래, 우군칙, 김창시등이 중심으로 농민들의 저항 의식 성장과 [4]서북 지역의 특성이 결합하면서 일어났다. 이 난은 조선 사회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지역 차별, 그리고 지배층의 부패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다.
조선 후기 평안도는 청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중앙 정부로부터 지역적 차별을 받았다. 평안도 출신 사람들은 주요 관직에 오르기 어려웠고, 이는 지역 엘리트 계층과 농민들 사이에서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과도한 세금과 지배층의 수탈로 인해 농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락 양반 출신인 홍경래는 부유한 상인들과 농민들을 규합해 봉기를 계획했다.
1811년 12월, 홍경래는 [3]정주성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켜 영세 농민, 상인, 그리고 소외된 양반 계층을 이끌었다. 그는 평안도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3]정주성을 본거지로 삼아 조선 정부에 대항했다.
봉기 세력은 순식간에 가산, 선천, 곽산 등 평안도의 주요 지역을 장악하며 세력을 키웠지만, 조직력과 무기 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조선 정부는 중앙군과 관군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정주성에 고립되었고, 결국 1812년 초에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봉기는 진압되었다. 홍경래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처형되거나 사로잡혔으며, 반란에 가담했던 농민들도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홍경래의 난은 단순한 농민 봉기가 아니라, 지역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집단적 저항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는 조선 후기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평가되며, 이후 동학 농민 운동과 같은 다른 저항 운동의 선구적인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1] 홍경래(洪景來, 1780년~1812년 5월 29일) : 조선 후기 몰락 양반 출신으로, 평안도 지역의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저항하여 1811년 농민 봉기를 주도한 지도자
[2] 순조(純祖, 1790년~1834년) : 조선의 제23대 왕, 재위: 1800년 7월 4일 ~ 1834년 11월 13일 (음력)
[3] 정주성 :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에 있는 성곽
[4] 서북지역 : 평양직할시,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의 대부분, 량강도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
조선 후기 평안도는 청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중앙 정부로부터 지역적 차별을 받았다. 평안도 출신 사람들은 주요 관직에 오르기 어려웠고, 이는 지역 엘리트 계층과 농민들 사이에서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과도한 세금과 지배층의 수탈로 인해 농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락 양반 출신인 홍경래는 부유한 상인들과 농민들을 규합해 봉기를 계획했다.
1811년 12월, 홍경래는 [3]정주성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켜 영세 농민, 상인, 그리고 소외된 양반 계층을 이끌었다. 그는 평안도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3]정주성을 본거지로 삼아 조선 정부에 대항했다.
봉기 세력은 순식간에 가산, 선천, 곽산 등 평안도의 주요 지역을 장악하며 세력을 키웠지만, 조직력과 무기 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조선 정부는 중앙군과 관군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정주성에 고립되었고, 결국 1812년 초에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봉기는 진압되었다. 홍경래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처형되거나 사로잡혔으며, 반란에 가담했던 농민들도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홍경래의 난은 단순한 농민 봉기가 아니라, 지역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집단적 저항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는 조선 후기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평가되며, 이후 동학 농민 운동과 같은 다른 저항 운동의 선구적인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1] 홍경래(洪景來, 1780년~1812년 5월 29일) : 조선 후기 몰락 양반 출신으로, 평안도 지역의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저항하여 1811년 농민 봉기를 주도한 지도자
[2] 순조(純祖, 1790년~1834년) : 조선의 제23대 왕, 재위: 1800년 7월 4일 ~ 1834년 11월 13일 (음력)
[3] 정주성 :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에 있는 성곽
[4] 서북지역 : 평양직할시,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의 대부분, 량강도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
20여 년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하고 유럽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5]발하우스플라츠에서 모여 개최한 회의이다.
빈 회의의 기본목적은 세력균형과 정통주의라는 원칙이다.
세력균형의 원칙은 프랑스의 재침략을 예방할 수 있는 장치 마련과 나폴레옹에 의해 개편된 유럽의 국경선을 어떻게 다시 정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정통주의 원칙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말미암아 퇴위한 과거 왕조들을 복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오스트리아는 회의 주재국으로 [1]메테르니히가, 영국은 [4]로버트 스튜어트, 러시아는 [13]알렉산드르 1세, [3]프로이센은 [14]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참석하였다
주요 현안은 러시아, [3]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등 승전 4대강국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패전국인 프랑스는 [2]탈레랑페리고르의 유능함과 능란한 책략으로 강대국의 일원으로 협상에 참여하였다.
빈 회의는 각국 대표단이 하나둘씩 도착하는 데만 한 달여를 소비한 끝에 11월에 들어서야 공식개회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더디고 느린 진행이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틈새마다 축제와 연회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참가국이 많이 크고 작은 90개 왕국과 52개 공국, 교황령등이 참가했으나 전체 회의는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4대 강국과 패전국인 프랑스는 연일 머리를 맞댔지만 모두가 만족할 방안이 없었다. 각 국의 영토와 이권을 둘러싼 각국의 대립과 갈등으로 회의가 지속되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무너지고 부르봉 왕조가 복귀했으나 민심을 얻지 못했다. 1815년 3월초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서 파리에 다시 입성했고 루이 18세는 벨기에로 도피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지지부진했던 각국들의 회의는 속도가 붙었다. 예상치 못한 나폴레옹의 재등장은 오히려 꼬여만 가던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타결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열강들을 비롯한 각국은 [12]워털루 전투를 열흘 남짓 앞두고 위기감에 한 마음 한 뜻으로 타협하여, 마침내 합의 사항들을 121개 조항과 17개 부속규정으로 이루어진 '최종의정서’, 이른바 '빈 조약'을 1815년 6월 9일에 공포했다.
빈 회의의 결과로 형성된 유럽의 체제를 빈 체제라 부른다.
최종의정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러시아는 바르샤바 대공국의 대부분과 핀란드 영토를 차지한다.
② 프로이센은 작센의 북부와 [6]바르샤바 공국의 일부인 [7]포젠지역과 라인란트, [8]베스트팔렌, 단치히를 차지한다.
③ 옛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인 38개의 공국으로 이루어진 독일연방을 구성한다. 연방의 의장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맡는다.
④ 네덜란드와 [9]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연합왕국으로 통합한다.
⑤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를 포기하는 대신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와 달마티아 지역의 라구사를 차지한다.
⑥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8국위원회(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스웨덴, 포르투갈, 에스파냐)에 의해 인정받는다.
⑦ 하노버 왕국은 라우엔부르크 공국을 덴마크에 내주는 대신 뮌스터 주교령과 프로이센령 동프리지아를 얻는다.
⑧ 바이에른 왕국은 팔라티나 지방, 뷔르츠부르크 공작령의 일부, 프랑크푸르트 공국을 차지하며, [11]헤센 대공국은 [8]베스트팔렌을 [3]프로이센에 내주는 대신 라인-헤센 지역을 차지한다.
⑨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토바고, 모리셔스, 세인트루시아 등 대서양 식민지들을 차지하며, 네덜란드로부터 실론과 케이프 식민지를 얻는다.
⑩ 사르데냐 왕국은 피에몬테, 니스, 사부아, 제노아를 되찾는다.추가로 제노바 공화국을 왕국의 영토로 흡수한다.
⑪ 나폴리 왕국은 부르봉나폴리 왕가의 페르디난도 4세가 복위하며, 시칠리아 왕국을 합병한다.
⑫ 파르마, 모데나, 투스카니아 공국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복귀한다.
[1]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1773년 ~ 1859년) : 합스부르크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교관, 정치가
[2]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1754년~1838년) : 프랑스의 정치가,
[3] 프로이센(Prussia) : 1701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한 독일 제국 내의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동북쪽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출발하여 독일 제국 수립의 주역으로 성장한 국가
[4] 로버트 스튜어트(Robert Stewart, 1769년~1822년) : 영국의 정치가·외교관. 흔히 캐슬레이 경(Lord Castlereagh) 혹은 캐슬레이 자작(Viscount Castlereagh)으로 림, 외무상으로 재임(1812년~1822년)하는 동안, 빈 체제 성립에 기여했다
[5] 발하우스플라츠(Ballhausplatz) : 오스트리아의 정치1번지. 현재 현재 오스트리아의 총리 관저
[6] 바르샤바 공국(Duchy of Warsaw) : 1807년부터 1815년까지 지금의 폴란드 지역에 존속했던 국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이 폴란드 지역에 만든 국가
[7] 포젠(Posen) : 독일과 폴란드 두 국가의 역사가 겹치는 지역. 나폴레옹 전쟁시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로 편입. 현재는 폴란드 지역
[8] 베스트팔렌(Westfalen) : 독일의 서부 지역 중 하나.
[9]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Austrian Netherlands) : 합스부르크 제국의 남네덜란드로 현재의 벨기에
[10] 라구사 공화국(Respublica Ragusina) : 현재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지역에 14세기부터 1808년까지 이어졌던 공화국. 수도 라구사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 해당. 나폴레옹전쟁으로 1808년에 멸망
[11] 헤센 대공국(Grand Duchy of Hesse) : 1806년부터 1918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서부의 대공국. 오늘날 독일의 헤센 주 지역을 구성
[12]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 1815년 6월 18일 오늘날의 벨기에 워털루 인근에서 벌어진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의 대프랑스 연합군 간의 벌어진 전투. 이 전투로 나폴레옹은 완전히 종결되고, 길었던 나폴레옹 전쟁은 종식되었다
[13]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 of Russia, 1777년~1825년) : 러시아 제국의 황제(재위 1801년 3월 23일 ~ 1825년 12월 1일). 로마노프 왕조의 10대 황제
[14]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ederick William III of Prussia, 1770년~1840년) : 프로이센의 제5대 국왕(재위 1797년 11월 16일~1840년 6월 7일)
빈 회의의 기본목적은 세력균형과 정통주의라는 원칙이다.
세력균형의 원칙은 프랑스의 재침략을 예방할 수 있는 장치 마련과 나폴레옹에 의해 개편된 유럽의 국경선을 어떻게 다시 정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정통주의 원칙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말미암아 퇴위한 과거 왕조들을 복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오스트리아는 회의 주재국으로 [1]메테르니히가, 영국은 [4]로버트 스튜어트, 러시아는 [13]알렉산드르 1세, [3]프로이센은 [14]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참석하였다
주요 현안은 러시아, [3]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등 승전 4대강국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패전국인 프랑스는 [2]탈레랑페리고르의 유능함과 능란한 책략으로 강대국의 일원으로 협상에 참여하였다.
빈 회의는 각국 대표단이 하나둘씩 도착하는 데만 한 달여를 소비한 끝에 11월에 들어서야 공식개회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더디고 느린 진행이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틈새마다 축제와 연회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참가국이 많이 크고 작은 90개 왕국과 52개 공국, 교황령등이 참가했으나 전체 회의는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4대 강국과 패전국인 프랑스는 연일 머리를 맞댔지만 모두가 만족할 방안이 없었다. 각 국의 영토와 이권을 둘러싼 각국의 대립과 갈등으로 회의가 지속되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무너지고 부르봉 왕조가 복귀했으나 민심을 얻지 못했다. 1815년 3월초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서 파리에 다시 입성했고 루이 18세는 벨기에로 도피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지지부진했던 각국들의 회의는 속도가 붙었다. 예상치 못한 나폴레옹의 재등장은 오히려 꼬여만 가던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타결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열강들을 비롯한 각국은 [12]워털루 전투를 열흘 남짓 앞두고 위기감에 한 마음 한 뜻으로 타협하여, 마침내 합의 사항들을 121개 조항과 17개 부속규정으로 이루어진 '최종의정서’, 이른바 '빈 조약'을 1815년 6월 9일에 공포했다.
빈 회의의 결과로 형성된 유럽의 체제를 빈 체제라 부른다.
최종의정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러시아는 바르샤바 대공국의 대부분과 핀란드 영토를 차지한다.
② 프로이센은 작센의 북부와 [6]바르샤바 공국의 일부인 [7]포젠지역과 라인란트, [8]베스트팔렌, 단치히를 차지한다.
③ 옛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인 38개의 공국으로 이루어진 독일연방을 구성한다. 연방의 의장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맡는다.
④ 네덜란드와 [9]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연합왕국으로 통합한다.
⑤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를 포기하는 대신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와 달마티아 지역의 라구사를 차지한다.
⑥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8국위원회(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스웨덴, 포르투갈, 에스파냐)에 의해 인정받는다.
⑦ 하노버 왕국은 라우엔부르크 공국을 덴마크에 내주는 대신 뮌스터 주교령과 프로이센령 동프리지아를 얻는다.
⑧ 바이에른 왕국은 팔라티나 지방, 뷔르츠부르크 공작령의 일부, 프랑크푸르트 공국을 차지하며, [11]헤센 대공국은 [8]베스트팔렌을 [3]프로이센에 내주는 대신 라인-헤센 지역을 차지한다.
⑨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토바고, 모리셔스, 세인트루시아 등 대서양 식민지들을 차지하며, 네덜란드로부터 실론과 케이프 식민지를 얻는다.
⑩ 사르데냐 왕국은 피에몬테, 니스, 사부아, 제노아를 되찾는다.추가로 제노바 공화국을 왕국의 영토로 흡수한다.
⑪ 나폴리 왕국은 부르봉나폴리 왕가의 페르디난도 4세가 복위하며, 시칠리아 왕국을 합병한다.
⑫ 파르마, 모데나, 투스카니아 공국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복귀한다.
[1]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1773년 ~ 1859년) : 합스부르크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교관, 정치가
[2]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1754년~1838년) : 프랑스의 정치가,
[3] 프로이센(Prussia) : 1701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한 독일 제국 내의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동북쪽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출발하여 독일 제국 수립의 주역으로 성장한 국가
[4] 로버트 스튜어트(Robert Stewart, 1769년~1822년) : 영국의 정치가·외교관. 흔히 캐슬레이 경(Lord Castlereagh) 혹은 캐슬레이 자작(Viscount Castlereagh)으로 림, 외무상으로 재임(1812년~1822년)하는 동안, 빈 체제 성립에 기여했다
[5] 발하우스플라츠(Ballhausplatz) : 오스트리아의 정치1번지. 현재 현재 오스트리아의 총리 관저
[6] 바르샤바 공국(Duchy of Warsaw) : 1807년부터 1815년까지 지금의 폴란드 지역에 존속했던 국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이 폴란드 지역에 만든 국가
[7] 포젠(Posen) : 독일과 폴란드 두 국가의 역사가 겹치는 지역. 나폴레옹 전쟁시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로 편입. 현재는 폴란드 지역
[8] 베스트팔렌(Westfalen) : 독일의 서부 지역 중 하나.
[9]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Austrian Netherlands) : 합스부르크 제국의 남네덜란드로 현재의 벨기에
[10] 라구사 공화국(Respublica Ragusina) : 현재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지역에 14세기부터 1808년까지 이어졌던 공화국. 수도 라구사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 해당. 나폴레옹전쟁으로 1808년에 멸망
[11] 헤센 대공국(Grand Duchy of Hesse) : 1806년부터 1918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서부의 대공국. 오늘날 독일의 헤센 주 지역을 구성
[12]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 1815년 6월 18일 오늘날의 벨기에 워털루 인근에서 벌어진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의 대프랑스 연합군 간의 벌어진 전투. 이 전투로 나폴레옹은 완전히 종결되고, 길었던 나폴레옹 전쟁은 종식되었다
[13]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 of Russia, 1777년~1825년) : 러시아 제국의 황제(재위 1801년 3월 23일 ~ 1825년 12월 1일). 로마노프 왕조의 10대 황제
[14]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ederick William III of Prussia, 1770년~1840년) : 프로이센의 제5대 국왕(재위 1797년 11월 16일~1840년 6월 7일)
알제리 전쟁(Algerian war)이라고도 한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 이후 바르바리의 해적들의 미국과 유럽의 상선에 대한 해적 행위는 멈췄다. 통행료를 납부하던 관습을 끝내고 원할하게 이 지역을 통과했다.
하지만 1812년 미국-영국 전쟁으로 국력이 내부에 쏠리면서 북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졌다.
바르바리 국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과 유럽 상선에 대한 해적 행위를 다시 시작하여 선원들을 나포하여 몸값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침내 1815년 2월 미국-영국 전쟁이 끝나고 미국 의회는 3월에 미 해군 파견을 승인했다. 2개의 전투대대를 구성하여 전쟁준비에 나섰다.
윌리엄 베인브리지 함장이 지휘하는 전대는 보스텅 항구로, 스티븐 디케이터 함장이 지휘하는 전대는 뉴욕 항으로 집결했다. 디케이터의 전대가 먼저 준비를 마치고 5월 20일에 출항하여 6월 15일 지브롤터를 지났다.
6월 17일 스티븐 디케이터 함대는 지중해로 이동중에 알제리 전함인 메슈다(Meshuda)호를 만나 바로 공격하였고 나포하였다. 이어 이틀후에 파로스 곶 해안에서 알제리의 에스테디호(Estedio)호도 전투 끝에 나포했다.
6월말 알제리 항구에 도착한 미국은 당시 알제리 파샤인 데이 오마르(Omar Agha)와 협상에 들어갔다.
도시를 파괴하겠다는 위협으로 인질석방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미국의 조건에 알제리의 파샤는 받아들였다. 7월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나포한 '메슈다(Meshuda)호와 에스테디호(Estedio)호는 돌려주었으며 미국의 인질은 돌아왔고 미국의 상선은 더 이상 통행료를 납부하지 않아도 됐다.
* 오스만 제국 :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고대 그리스에서 아시아라고 불렸던 지방으로서 오늘날의 터키 영토에 속하는 반도)를 중심으로 유럽동남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 터키제국, 오스만튀르크라고도 불린다
* 바르바리국가 :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는 트리폴리, 알제리, 튀니스의 3개 나라를 합쳐 부르는 명칭
* 바르바리(Barbary) : 유럽에서 베르베르인(북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이 살던 지역을 부르던 말. 특히 아프리카의 북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국가인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의 해안 지역을 말한다.
*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 :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
* 파로스 곳(Cape Palos) : 스페인의 남부 지중해와 접한 카르타헤나(Cartagena)에 있는 곳
* 트리폴리(Tripoli) : 리비아의 수도
* 튀니스(Tunis) : 튀니지의 수도
* 스티븐 디케이터(Stephen Decatur, 1779년~1820년) : 미국의 군인으로 해군 준장. 바르바리 전쟁과 미영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미국 해군 사상 가장 어린 나이인 25세에 대령(Captain)의 계급으로 승진하였으며 국가적 영웅으로 기리고 있다
* 파샤 : 오스만 제국의 최고위층 귀족에게 주어진 호칭. 주로 장군이나 지방 총독에게 주어졌다. 영국의 경(lord)과 비슷하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 이후 바르바리의 해적들의 미국과 유럽의 상선에 대한 해적 행위는 멈췄다. 통행료를 납부하던 관습을 끝내고 원할하게 이 지역을 통과했다.
하지만 1812년 미국-영국 전쟁으로 국력이 내부에 쏠리면서 북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졌다.
바르바리 국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과 유럽 상선에 대한 해적 행위를 다시 시작하여 선원들을 나포하여 몸값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침내 1815년 2월 미국-영국 전쟁이 끝나고 미국 의회는 3월에 미 해군 파견을 승인했다. 2개의 전투대대를 구성하여 전쟁준비에 나섰다.
윌리엄 베인브리지 함장이 지휘하는 전대는 보스텅 항구로, 스티븐 디케이터 함장이 지휘하는 전대는 뉴욕 항으로 집결했다. 디케이터의 전대가 먼저 준비를 마치고 5월 20일에 출항하여 6월 15일 지브롤터를 지났다.
6월 17일 스티븐 디케이터 함대는 지중해로 이동중에 알제리 전함인 메슈다(Meshuda)호를 만나 바로 공격하였고 나포하였다. 이어 이틀후에 파로스 곶 해안에서 알제리의 에스테디호(Estedio)호도 전투 끝에 나포했다.
6월말 알제리 항구에 도착한 미국은 당시 알제리 파샤인 데이 오마르(Omar Agha)와 협상에 들어갔다.
도시를 파괴하겠다는 위협으로 인질석방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미국의 조건에 알제리의 파샤는 받아들였다. 7월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나포한 '메슈다(Meshuda)호와 에스테디호(Estedio)호는 돌려주었으며 미국의 인질은 돌아왔고 미국의 상선은 더 이상 통행료를 납부하지 않아도 됐다.
* 오스만 제국 :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고대 그리스에서 아시아라고 불렸던 지방으로서 오늘날의 터키 영토에 속하는 반도)를 중심으로 유럽동남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 터키제국, 오스만튀르크라고도 불린다
* 바르바리국가 :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는 트리폴리, 알제리, 튀니스의 3개 나라를 합쳐 부르는 명칭
* 바르바리(Barbary) : 유럽에서 베르베르인(북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이 살던 지역을 부르던 말. 특히 아프리카의 북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국가인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의 해안 지역을 말한다.
*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 :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
* 파로스 곳(Cape Palos) : 스페인의 남부 지중해와 접한 카르타헤나(Cartagena)에 있는 곳
* 트리폴리(Tripoli) : 리비아의 수도
* 튀니스(Tunis) : 튀니지의 수도
* 스티븐 디케이터(Stephen Decatur, 1779년~1820년) : 미국의 군인으로 해군 준장. 바르바리 전쟁과 미영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미국 해군 사상 가장 어린 나이인 25세에 대령(Captain)의 계급으로 승진하였으며 국가적 영웅으로 기리고 있다
* 파샤 : 오스만 제국의 최고위층 귀족에게 주어진 호칭. 주로 장군이나 지방 총독에게 주어졌다. 영국의 경(lord)과 비슷하다
워털루 전투는 1803년부터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 최후의 전투이며, 이전투에서 프랑스가 패하면서 길었던 나폴레옹 전쟁은 끝나게 된다.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 네덜란드(당시 브뤼셀은 네덜란드 소속이었다)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싸운 전투이며, 이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추방되었던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복귀하였으나)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프랑스 제1제국 또한 붕괴되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년~1821년) :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였다
* 프로이센(Kingdom of Prussia) : 유럽 동북부와 중부(중앙유럽)지방 일대를 부르던 지명이자 해당 지역에 존재했던 나라의 국호.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한 국가
* 워털루(Waterloo) : 벨기에 동남부의 지명. 수도 브뤼셀에서 동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지역에 위치
* 웰링턴 공작(Duke of Wellington) : 영국의 귀족 작위. 초대 공작(1814년)의 자손들이 상속받으며 현재는 제9대(2014년~) 공작으로 아서 찰스 발레리언 웰즐리이다
*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 1769년~1852년) : 제1대 웰링턴 공작. 군인출신으로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정치가로 활동하여 총리를 역임했으며, 이후 영국 육군 총사령관이 되기도 하였다.
*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1742년~1819년) :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육군원수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 네덜란드(당시 브뤼셀은 네덜란드 소속이었다)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싸운 전투이며, 이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추방되었던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복귀하였으나)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프랑스 제1제국 또한 붕괴되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년~1821년) :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였다
* 프로이센(Kingdom of Prussia) : 유럽 동북부와 중부(중앙유럽)지방 일대를 부르던 지명이자 해당 지역에 존재했던 나라의 국호.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한 국가
* 워털루(Waterloo) : 벨기에 동남부의 지명. 수도 브뤼셀에서 동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지역에 위치
* 웰링턴 공작(Duke of Wellington) : 영국의 귀족 작위. 초대 공작(1814년)의 자손들이 상속받으며 현재는 제9대(2014년~) 공작으로 아서 찰스 발레리언 웰즐리이다
*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 1769년~1852년) : 제1대 웰링턴 공작. 군인출신으로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정치가로 활동하여 총리를 역임했으며, 이후 영국 육군 총사령관이 되기도 하였다.
*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1742년~1819년) :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육군원수
그리스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민족적·종교적·문화적으로 다른 민족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데 대한 그리스인의 반감과 오스만 제국 투르크의 가중되는 여러 가지 압력이 독립에의 의지를 강하게 했다.
1821년 3월 6일 [1]필리케 헤타이리아의 지도자인 [2]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3]몰다비아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1821년 6월 19일 도나우 강 북편의 드러거샤니 전투(Battle of Dragashani)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패했다. 그는 체포되었고 감금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의 봉기에 호응하여 [4]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 그리스, 마케도니아 등의 그리스 각 지역에서 연달아 봉기가 일어나면서 그리스 독립전쟁은 오히려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821년 3월 25일 [4]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본격적인 봉기가 시작되었다. 10월 5일 [5]데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주도인 [6]트리폴리를 함락시켰다. 이 때문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봉기가 처음 일어난 3월 23일이 오늘날 그리스의 독립기념일로 지정되었다.
그리스 중부에서 오스만군은 알라마나 전투(Battle of Alamana, 1821년 4월 22일)에서 그리스군을 패배시켰다. 그리고 페로폰네소스 반도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라이바 인 전투(Battle of Gravia Inn, 1821년 5월 8일)에서 일격을 당하면서 오스만군은 큰 손실을 입고 후퇴하였다. 이 전투는 그리스 독립의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821년의 8월 25일, 바실리카 전투(Battle of Vasilika)의 승리는 중부 그리스의 오스만 군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1822년 1월 1일 공화제를 근간으로 하는 그리스 헌법을 채택하고 1월 13일 그리스 제1공화국이 출범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822년부터 1824년까지 3차례에 걸쳐 공격을 하였지만 육지와 바다에서 그리스를 쉽게 제압하지 못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 총독인 [7]무함마드 알리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 사이 그리스 제1공화국은 내분에 휩싸였다. 중앙 그리스와 지역 정부간의 내전상태에 빠졌다. 1차, 2차 내전이 일어나는 등 그리스는 사분오열하고 있었다.
오스만의 도움을 수락한 [7]무함마드 알리는 아들 [8]이브라힘 파샤에게 원정대를 맡겨 그리스에 파병하였다. [8]이브라힘 파샤이집트 함대는 1825년 2월 24일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하여 서부 지역을 장악하여 그리스군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빈 체제의 원칙에 따라 그리스 독립전쟁을 불간섭의 원칙을 내세우며 관망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리스가 불리하게 진행되자 그리스를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리스 독립전쟁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인 대립이기도 하였다. 동방정교회의 그리스인과 이슬람교 무슬림 사이의 학살이 서로 자행되었다. 특히 당시에는 고대 그리스 문화를 동경하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유행했다.
전황은 계속하여 오스만-이집트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어 오스만군은 1826년 4월 중앙 그리스의 [9]미솔링기가 함락시켰고 1826년 8월에 아테네 중심가를, 1827년 6월에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까지 점령했다.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 3개국은 1827년 7월 6일 [10]런던조약을 체결하고 오스만 제국에게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하도록 하는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이를 거부하고 결국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서쪽의 나바리노 만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유럽연합함대와 오스만-이집트 연합함대 사이에 해전이 벌어졌다. 일명 나바리노 해전(Battle of Navarino, 1827년 10월 20일)해전이다. 결과는 유럽 연합함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오스만-이집트 함대는 궤멸되었다. 이 해전으로 오스만 제국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그리스 독립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오스만 제국은 보복으로 러시아 상선의 [12]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를 거부하자 이를 명분으로 1828년 4월 오스만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제10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주력부대가 러시아 국경지대인 왈라키아와 몰도비아로 옮기자 그 틈을 이용하여 그리스 독립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장악하였다.
러시아는 초기에 오스만군에 고전하였으나 1829년 8월 [11]에디르네를 함락시켰다. 오스만 제국은 패배하였고 결과로 1829년 9월 14일 에디르아노플 조약(Treaty of Adrianople)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자유로운 항해권 획득, 오스만 제국내에서 러시아의 통상권 획득, 세르비아에 대한 자치를 보장받았으며 전쟁배상금의 지불이 완료될 때까지 러시아 군을 [13]왈라키아와 [3]몰다비아에 주둔하였다.
1828년 8월 30일 프랑스 군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하면서 이집트 군마저 몰아내어 그리스 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넘어 본토의 아테네와 테베까지 회복하였다.
독립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난 전투는 [14]아티키주의 북쪽에서 일어난 페트라 전투(1829년 8월 12일)였다. 이 전투는 그리스군이 정규군으로 승리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오스만 제국과 그리스가 전장에서 처음으로 교섭한 날이기도 하다.
1828년 11월 런던 의정서(London Protocol)를 채택하여 영국, 러시아, 프랑스 3개국이 그리스를 오스만 제국하의 자치국을 성립되었다.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가 발칸반도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자 위기 의식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는 그리스가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독립시키기로 하여 1830년 2월 새로운 런던의정서를 통해 그리스는 독립국임이 선언되었다.
1832년 7월에 '이스탄불 조약(Treaty of Istanbul)'을 통해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1] 필리케 헤타이리아(Filiki Eteria) : 1814년 오데사(현,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그리스 상인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
[2]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Alexander Ypsilantis, 1792년~1828년) : 1820년 헤타이리아 필리케의 지도자가 되어 1821년에 앞장서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그리스 독립의 실마리가 되었다. 8년 뒤인 1829년에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였다
[3] 몰다비아(Moldavia) : 현재의 루마니아와 몰도바, 우크라이나 사이에 걸쳐 있었던 공국이며 1859년에 왈라키아 공국과 동군연합을 구성하였다
[4] 펠로폰네소스(Peloponnesian) 반도 : 그리스 남부의 반도. 펠로폰네소스주, 서그리스주, 아티키주 3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5]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Theodoros Kolokotronis, 1770년~1843년) : 그리스의 장군이자 독립전쟁의 지도자
[6] 트리폴리(Tripoli) 또는 트리폴리스 :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부에 위치한 하고 있으며 펠로폰네소스주의 주도
[7]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of Egypt, 1769년~1849년)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재위 ,1805년 5월 17일 ~ 1848년 3월 2일). 이집트 마지막 왕조인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창시자
[8]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 of Egypt, 1789년~1848년) :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이집트의 총독(재위, 1848년 3월 2일~1848년 11월 10일)
[9] 메솔롱기(Missolonghi) : 그리스 서부에 위치한 도시.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많은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 운동을 벌였던 곳. 1824년에 그리스 독립 전쟁에 참전한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 이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메솔롱기에는 조지 고든 바이런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0] 런던조약(Treaty of London) :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이 1827년 7월 6일 체결한 조약.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에게 1821년 3월 6일 그리스의 독립으로 지속되었던 전쟁을 중단하는 것을 요구했다
[11] 에디르네(Edirne) : 터키의 가장 서쪽에 있는 도시. 그리스와 불가리아 국경근처의 도시로 터키의 에디르네 주의 주도. 영어 아드리아노플로 알려져 있다
[12]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Strait) : 에게 해와 내해인 마르마라 해를 잇는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과 함께 터키를 아시아와 유럽으로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
[13] 왈라키아(Wallachia) : 오스만 제국의 제후국. 1859년에 몰다비아 공국과 동군연합이 이루어졌으며, 1861년에 국호를 루마니아 공국으로 바꾸었다. 이후 루마니아 왕국이 되었다. 현재 루마니아 남부 일대
[14] 아티키주(Attica) : 에게 해와 접한 반도 지대로서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주
1821년 3월 6일 [1]필리케 헤타이리아의 지도자인 [2]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3]몰다비아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1821년 6월 19일 도나우 강 북편의 드러거샤니 전투(Battle of Dragashani)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패했다. 그는 체포되었고 감금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의 봉기에 호응하여 [4]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 그리스, 마케도니아 등의 그리스 각 지역에서 연달아 봉기가 일어나면서 그리스 독립전쟁은 오히려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821년 3월 25일 [4]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본격적인 봉기가 시작되었다. 10월 5일 [5]데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주도인 [6]트리폴리를 함락시켰다. 이 때문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봉기가 처음 일어난 3월 23일이 오늘날 그리스의 독립기념일로 지정되었다.
그리스 중부에서 오스만군은 알라마나 전투(Battle of Alamana, 1821년 4월 22일)에서 그리스군을 패배시켰다. 그리고 페로폰네소스 반도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라이바 인 전투(Battle of Gravia Inn, 1821년 5월 8일)에서 일격을 당하면서 오스만군은 큰 손실을 입고 후퇴하였다. 이 전투는 그리스 독립의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821년의 8월 25일, 바실리카 전투(Battle of Vasilika)의 승리는 중부 그리스의 오스만 군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1822년 1월 1일 공화제를 근간으로 하는 그리스 헌법을 채택하고 1월 13일 그리스 제1공화국이 출범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822년부터 1824년까지 3차례에 걸쳐 공격을 하였지만 육지와 바다에서 그리스를 쉽게 제압하지 못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 총독인 [7]무함마드 알리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 사이 그리스 제1공화국은 내분에 휩싸였다. 중앙 그리스와 지역 정부간의 내전상태에 빠졌다. 1차, 2차 내전이 일어나는 등 그리스는 사분오열하고 있었다.
오스만의 도움을 수락한 [7]무함마드 알리는 아들 [8]이브라힘 파샤에게 원정대를 맡겨 그리스에 파병하였다. [8]이브라힘 파샤이집트 함대는 1825년 2월 24일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하여 서부 지역을 장악하여 그리스군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빈 체제의 원칙에 따라 그리스 독립전쟁을 불간섭의 원칙을 내세우며 관망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리스가 불리하게 진행되자 그리스를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리스 독립전쟁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인 대립이기도 하였다. 동방정교회의 그리스인과 이슬람교 무슬림 사이의 학살이 서로 자행되었다. 특히 당시에는 고대 그리스 문화를 동경하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유행했다.
전황은 계속하여 오스만-이집트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어 오스만군은 1826년 4월 중앙 그리스의 [9]미솔링기가 함락시켰고 1826년 8월에 아테네 중심가를, 1827년 6월에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까지 점령했다.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 3개국은 1827년 7월 6일 [10]런던조약을 체결하고 오스만 제국에게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하도록 하는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이를 거부하고 결국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서쪽의 나바리노 만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유럽연합함대와 오스만-이집트 연합함대 사이에 해전이 벌어졌다. 일명 나바리노 해전(Battle of Navarino, 1827년 10월 20일)해전이다. 결과는 유럽 연합함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오스만-이집트 함대는 궤멸되었다. 이 해전으로 오스만 제국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그리스 독립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오스만 제국은 보복으로 러시아 상선의 [12]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를 거부하자 이를 명분으로 1828년 4월 오스만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제10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주력부대가 러시아 국경지대인 왈라키아와 몰도비아로 옮기자 그 틈을 이용하여 그리스 독립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장악하였다.
러시아는 초기에 오스만군에 고전하였으나 1829년 8월 [11]에디르네를 함락시켰다. 오스만 제국은 패배하였고 결과로 1829년 9월 14일 에디르아노플 조약(Treaty of Adrianople)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자유로운 항해권 획득, 오스만 제국내에서 러시아의 통상권 획득, 세르비아에 대한 자치를 보장받았으며 전쟁배상금의 지불이 완료될 때까지 러시아 군을 [13]왈라키아와 [3]몰다비아에 주둔하였다.
1828년 8월 30일 프랑스 군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하면서 이집트 군마저 몰아내어 그리스 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넘어 본토의 아테네와 테베까지 회복하였다.
독립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난 전투는 [14]아티키주의 북쪽에서 일어난 페트라 전투(1829년 8월 12일)였다. 이 전투는 그리스군이 정규군으로 승리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오스만 제국과 그리스가 전장에서 처음으로 교섭한 날이기도 하다.
1828년 11월 런던 의정서(London Protocol)를 채택하여 영국, 러시아, 프랑스 3개국이 그리스를 오스만 제국하의 자치국을 성립되었다.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가 발칸반도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자 위기 의식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는 그리스가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독립시키기로 하여 1830년 2월 새로운 런던의정서를 통해 그리스는 독립국임이 선언되었다.
1832년 7월에 '이스탄불 조약(Treaty of Istanbul)'을 통해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1] 필리케 헤타이리아(Filiki Eteria) : 1814년 오데사(현,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그리스 상인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
[2]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Alexander Ypsilantis, 1792년~1828년) : 1820년 헤타이리아 필리케의 지도자가 되어 1821년에 앞장서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그리스 독립의 실마리가 되었다. 8년 뒤인 1829년에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였다
[3] 몰다비아(Moldavia) : 현재의 루마니아와 몰도바, 우크라이나 사이에 걸쳐 있었던 공국이며 1859년에 왈라키아 공국과 동군연합을 구성하였다
[4] 펠로폰네소스(Peloponnesian) 반도 : 그리스 남부의 반도. 펠로폰네소스주, 서그리스주, 아티키주 3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5]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Theodoros Kolokotronis, 1770년~1843년) : 그리스의 장군이자 독립전쟁의 지도자
[6] 트리폴리(Tripoli) 또는 트리폴리스 :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부에 위치한 하고 있으며 펠로폰네소스주의 주도
[7]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of Egypt, 1769년~1849년)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재위 ,1805년 5월 17일 ~ 1848년 3월 2일). 이집트 마지막 왕조인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창시자
[8]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 of Egypt, 1789년~1848년) :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이집트의 총독(재위, 1848년 3월 2일~1848년 11월 10일)
[9] 메솔롱기(Missolonghi) : 그리스 서부에 위치한 도시.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많은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 운동을 벌였던 곳. 1824년에 그리스 독립 전쟁에 참전한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 이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메솔롱기에는 조지 고든 바이런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0] 런던조약(Treaty of London) :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이 1827년 7월 6일 체결한 조약.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에게 1821년 3월 6일 그리스의 독립으로 지속되었던 전쟁을 중단하는 것을 요구했다
[11] 에디르네(Edirne) : 터키의 가장 서쪽에 있는 도시. 그리스와 불가리아 국경근처의 도시로 터키의 에디르네 주의 주도. 영어 아드리아노플로 알려져 있다
[12]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Strait) : 에게 해와 내해인 마르마라 해를 잇는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과 함께 터키를 아시아와 유럽으로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
[13] 왈라키아(Wallachia) : 오스만 제국의 제후국. 1859년에 몰다비아 공국과 동군연합이 이루어졌으며, 1861년에 국호를 루마니아 공국으로 바꾸었다. 이후 루마니아 왕국이 되었다. 현재 루마니아 남부 일대
[14] 아티키주(Attica) : 에게 해와 접한 반도 지대로서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주
미국 제5대 대통령 [1]제임스 먼로가 의회 연설을 통해 발표한 외교 정책 원칙으로, 미국이 유럽 열강의 아메리카 대륙 내 간섭을 거부하고 독립된 외교 노선을 취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선언은 유럽의 식민지 확장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으며, 유럽 국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신생 독립국에 간섭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동시에 미국도 유럽에서 일어나는 정치나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상호 불간섭의 원칙을 천명했다.
[1]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1758년 4월 28일 ~ 1831년 7월 4일) : 미국의 제5대 대통령(재임 1817년 3월 4일~1825년 3월 4일)
이 선언은 유럽의 식민지 확장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으며, 유럽 국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신생 독립국에 간섭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동시에 미국도 유럽에서 일어나는 정치나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상호 불간섭의 원칙을 천명했다.
[1]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1758년 4월 28일 ~ 1831년 7월 4일) : 미국의 제5대 대통령(재임 1817년 3월 4일~1825년 3월 4일)
영국과 [1]미얀마가 싸운 전쟁으로 영국이 승리해 미얀마의 아라칸, 아삼, 마니푸르, 테나세림 지역이 영국령으로 병합되었다. 이후 2차, 3차의 전쟁이후 1885년 미얀마는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버마 [4]꼰바웅 왕조의 [5]보도파야 국왕은 굉장히 호전적인 인물로 서쪽으로 국경을 확장하며 1784년에는 [16]아라칸 지역을, 1814년에는 [3]마니푸르 지역을, 1817년에는 [2]아삼 지역을 편입시켰다.
아삼 왕조의 찬드라칸타 싱하(Chandrakanta Singha)국왕은 버마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군대를 강화하고 버마의 추가침략을 막기 이하여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보도파야 국왕의 뒤를 이은 [6]바기도 국왕은 아삼을 다시 찾기위하여 1821년 2월에 2만명의 군대를 [2]아삼지역으로 파견하여 1년 반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1822년 7월에 아삼 왕국에 승리하였다.
패배한 아삼 왕 찬드라칸타 싱하(Chandrakanta Singha)는 영국 영토인 [18]벵골로 도망쳤다. [19]캘커타에 기반을 둔 영국은 마니푸르, 아삼, 아라칸 지역에서 도주한 반란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버마왕국은 1822년까지 [3]마니푸르와 [2]아삼지역의 정복으로 인하여 영국령 인도 사이에 긴 국경이 생겼다. 영국은 일방적으로 [7]카차르(Cachar)와 자인티아(Jaintia)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언하고 군대를 파견했다.
1824년 1월 버마의 [9]마하 반둘라는 반군을 몰아내기 위해 카차르(Cachar)에 병력을 보냈고, 1824년 3월 5일 [16]아라칸(Arakan)의 국경 충돌 이후 제1차 버마와 영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군은 험난한 지형에서 싸우는 대신 1824년 5월 11일 인도의 [11]세포이를 포함한 1만명의 병력이 남부에 위치한 [13]양곤항구에 입성하여 기습공격했다.
영국군은 양곤의 [10]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내부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군은 공격을 개시했고 버마의 [6]바기도 국왕은 이에 맞서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9]마하 반둘라는 서부전선에서 급히 철수하여 [13]양곤 외곽에 집결하여 3만명의 병력을 지휘하였다. [9]마하 반둘라는 초기의 전투에서 몇 차례 승리했다.
11월 30일 마하 반둘라는 영국군 진지에 정면 공격을 하였으나 훨씬 뛰어난 무기를 갖춘 영국군에 패하여 3만명중 7천명만 남았다.
마하 반둘라는 양곤에서 멀지 않은 이라와디 삼각주(Irrawaddy delta)에 있는 작은 마을인 다누부(Danubyu)에 있는 후방기지로 후퇴했다.
1825년 3월부터 영국군은 다누뷰에 대규모 공격을 가하여 4월 1일 마하 반둘라는 전사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버마 [4]꼰바웅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영국은 기세를 이어 아라칸, 테나세림까지 공략했으며, 영국함대는 버마를 관통하는 이라와디강을 거슬러 당시 버마의 수도 [12]아마라푸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지휘관을 잃은 버마군은 기세를 잃었고, 영국군이 내놓은 강화조건에 1826년 [6]바기도 왕은 굴복하고 말았다.
2월 26일 굴욕적인 내용의 [15]얀다보 조약이 체결되면서 1차 영국-미얀마 전쟁은 끝을 맺는다.
오늘날의 미얀마인 버마는 [9]마하 반둘라가 확장한 영토인 아라칸, 테나세림, 아쌈, 마니푸르를 영국에 넘겼다. 또한 전쟁배상금으로 1백만 파운드의 거금을 물어내야 했다.
이후 영국은 두 차례 더 전쟁을 벌였고, 1885년 결국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 미얀마 : 미얀마는 135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며, 버마족이 68%를 차지하고 있다
[2] 아삼주(Assam) :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주
[3] 마니푸르주(Manipur) :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주, 주도는 임팔(Imphal)
[4] 꼰바웅 왕조(Konbaung dynasty, 1752년~1885년)) :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 영국-미얀마 전쟁에서 연이어 패전하며 완전히 멸망한다
[5] 보도파야 국왕(Bodawpaya, 1745년~1819년) : 꼰바웅 왕조의 제6대 국왕(재임, 1782년 2월 11일~1819년 6월 5일)
[6] 바기도 국왕(Bagyidaw,1784년~1846년) : 꼰바웅 왕조의 제7대 국왕(1819년 6월 5일~1837년 4월 15일)
[7] 카차르(Cachar) : 인도 아삼주에 있는 지역
[8] 치타공(Chittagong) : 방글라데시 제2의 도시로, 치타공 주의 주도. 방글라데시 동부의 거점도시
[9] 마하 반둘라(Maha Bandula, 1782년~1825년) : 왕립 버마군의 총사령관. 오늘날 미얀마의 국가 영웅
[10]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 : 미얀마 양곤에 있는 높이 112.17m인 황금 탑. 미얀마의 랜드마크이자 미얀마 불교도들의 정신적 지주
[11] 세포이(sepoy) : 19세기의 인도 용병. 무슬림과 힌두교도 등으로 구성된 인도인으로 구성된 영국군소속의 용병
[12] 아마라뿌라(Amarapura) : 꼰바옹 왕조의 수도
[13] 양곤(Yangon) : 미얀마의 옛 수도. 원래의 이름은 랑군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랑군의 명칭을 양곤으로 바꾸었다
[14] 다누부(Danubyu) : 미얀마의 양곤에서 약80마일 떨어진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15] 얀다보 조약(Treaty of Yandabo, 1826년 2월 24일) : 수도 아바(Ava)에서 불과 80킬로미터(50마일) 떨어진 얀다보(Yandabo) 마을에서 맺어졌다
[16] 아라칸 왕국(The Kingdom of Arakan, 1429년~1784년) : 미얀마의 라카인주 아라칸족의 왕국. 라카인 왕국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므락우
[17] 아라칸족(Arakan) : 미얀마의 라카인주와 인도, 방글라데시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미얀마 인구의 약 5.53%를 구성하고 있다
[18] 벵골(Bengal) : 현재 인도의 서벵골주, 방글라데시(동벵골)로 나뉘어 있다. 서벵골은 힌두교, 동벵골은 이슬람교를 많이 믿는다
[19] 캘커타(Calcutta) : 인도 동부에 있는 도시이자 인도 서벵골 주의 주도. 2001년 1월 도시의 이름을 캘커타(Calcutta)에서 콜카타(Kolkata)로 공식 변경하였다
버마 [4]꼰바웅 왕조의 [5]보도파야 국왕은 굉장히 호전적인 인물로 서쪽으로 국경을 확장하며 1784년에는 [16]아라칸 지역을, 1814년에는 [3]마니푸르 지역을, 1817년에는 [2]아삼 지역을 편입시켰다.
아삼 왕조의 찬드라칸타 싱하(Chandrakanta Singha)국왕은 버마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군대를 강화하고 버마의 추가침략을 막기 이하여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보도파야 국왕의 뒤를 이은 [6]바기도 국왕은 아삼을 다시 찾기위하여 1821년 2월에 2만명의 군대를 [2]아삼지역으로 파견하여 1년 반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1822년 7월에 아삼 왕국에 승리하였다.
패배한 아삼 왕 찬드라칸타 싱하(Chandrakanta Singha)는 영국 영토인 [18]벵골로 도망쳤다. [19]캘커타에 기반을 둔 영국은 마니푸르, 아삼, 아라칸 지역에서 도주한 반란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버마왕국은 1822년까지 [3]마니푸르와 [2]아삼지역의 정복으로 인하여 영국령 인도 사이에 긴 국경이 생겼다. 영국은 일방적으로 [7]카차르(Cachar)와 자인티아(Jaintia)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언하고 군대를 파견했다.
1824년 1월 버마의 [9]마하 반둘라는 반군을 몰아내기 위해 카차르(Cachar)에 병력을 보냈고, 1824년 3월 5일 [16]아라칸(Arakan)의 국경 충돌 이후 제1차 버마와 영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군은 험난한 지형에서 싸우는 대신 1824년 5월 11일 인도의 [11]세포이를 포함한 1만명의 병력이 남부에 위치한 [13]양곤항구에 입성하여 기습공격했다.
영국군은 양곤의 [10]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내부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군은 공격을 개시했고 버마의 [6]바기도 국왕은 이에 맞서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9]마하 반둘라는 서부전선에서 급히 철수하여 [13]양곤 외곽에 집결하여 3만명의 병력을 지휘하였다. [9]마하 반둘라는 초기의 전투에서 몇 차례 승리했다.
11월 30일 마하 반둘라는 영국군 진지에 정면 공격을 하였으나 훨씬 뛰어난 무기를 갖춘 영국군에 패하여 3만명중 7천명만 남았다.
마하 반둘라는 양곤에서 멀지 않은 이라와디 삼각주(Irrawaddy delta)에 있는 작은 마을인 다누부(Danubyu)에 있는 후방기지로 후퇴했다.
1825년 3월부터 영국군은 다누뷰에 대규모 공격을 가하여 4월 1일 마하 반둘라는 전사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버마 [4]꼰바웅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영국은 기세를 이어 아라칸, 테나세림까지 공략했으며, 영국함대는 버마를 관통하는 이라와디강을 거슬러 당시 버마의 수도 [12]아마라푸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지휘관을 잃은 버마군은 기세를 잃었고, 영국군이 내놓은 강화조건에 1826년 [6]바기도 왕은 굴복하고 말았다.
2월 26일 굴욕적인 내용의 [15]얀다보 조약이 체결되면서 1차 영국-미얀마 전쟁은 끝을 맺는다.
오늘날의 미얀마인 버마는 [9]마하 반둘라가 확장한 영토인 아라칸, 테나세림, 아쌈, 마니푸르를 영국에 넘겼다. 또한 전쟁배상금으로 1백만 파운드의 거금을 물어내야 했다.
이후 영국은 두 차례 더 전쟁을 벌였고, 1885년 결국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 미얀마 : 미얀마는 135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며, 버마족이 68%를 차지하고 있다
[2] 아삼주(Assam) :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주
[3] 마니푸르주(Manipur) :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주, 주도는 임팔(Imphal)
[4] 꼰바웅 왕조(Konbaung dynasty, 1752년~1885년)) :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 영국-미얀마 전쟁에서 연이어 패전하며 완전히 멸망한다
[5] 보도파야 국왕(Bodawpaya, 1745년~1819년) : 꼰바웅 왕조의 제6대 국왕(재임, 1782년 2월 11일~1819년 6월 5일)
[6] 바기도 국왕(Bagyidaw,1784년~1846년) : 꼰바웅 왕조의 제7대 국왕(1819년 6월 5일~1837년 4월 15일)
[7] 카차르(Cachar) : 인도 아삼주에 있는 지역
[8] 치타공(Chittagong) : 방글라데시 제2의 도시로, 치타공 주의 주도. 방글라데시 동부의 거점도시
[9] 마하 반둘라(Maha Bandula, 1782년~1825년) : 왕립 버마군의 총사령관. 오늘날 미얀마의 국가 영웅
[10]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 : 미얀마 양곤에 있는 높이 112.17m인 황금 탑. 미얀마의 랜드마크이자 미얀마 불교도들의 정신적 지주
[11] 세포이(sepoy) : 19세기의 인도 용병. 무슬림과 힌두교도 등으로 구성된 인도인으로 구성된 영국군소속의 용병
[12] 아마라뿌라(Amarapura) : 꼰바옹 왕조의 수도
[13] 양곤(Yangon) : 미얀마의 옛 수도. 원래의 이름은 랑군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랑군의 명칭을 양곤으로 바꾸었다
[14] 다누부(Danubyu) : 미얀마의 양곤에서 약80마일 떨어진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15] 얀다보 조약(Treaty of Yandabo, 1826년 2월 24일) : 수도 아바(Ava)에서 불과 80킬로미터(50마일) 떨어진 얀다보(Yandabo) 마을에서 맺어졌다
[16] 아라칸 왕국(The Kingdom of Arakan, 1429년~1784년) : 미얀마의 라카인주 아라칸족의 왕국. 라카인 왕국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므락우
[17] 아라칸족(Arakan) : 미얀마의 라카인주와 인도, 방글라데시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미얀마 인구의 약 5.53%를 구성하고 있다
[18] 벵골(Bengal) : 현재 인도의 서벵골주, 방글라데시(동벵골)로 나뉘어 있다. 서벵골은 힌두교, 동벵골은 이슬람교를 많이 믿는다
[19] 캘커타(Calcutta) : 인도 동부에 있는 도시이자 인도 서벵골 주의 주도. 2001년 1월 도시의 이름을 캘커타(Calcutta)에서 콜카타(Kolkata)로 공식 변경하였다
인도네시아는 1602년부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업적 식민 지배를 시작으로 1800년도에 동인도회사가 해산되면서 네덜란드 정부의 식민 통치가 이어졌다.
디파느가라 전쟁은 인도네시아 자와섬에서 네덜란드 식민 통치에 맞서 일어난 대규모 저항 전쟁이다. 인도네시아 [4]자와섬에서 [2]욕야카르타 술탄국의 [3]디파느가라(디폰느고로) 왕자가 주도하여 일어난 전쟁으로 자와전쟁 혹은 디파느가라(디폰느고로) 전쟁이라 불린다.
전쟁의 배경은 정치적, 사회경제적, 종교적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3]디파느가라는 욕야카르타 왕국의 왕자였지만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고 이는 그의 정치적 불만을 증폭시켰다. 네덜란드는 자와의 전통 귀족 체계를 약화시키고 행정과 세금, 치안권을 직접 장악해 나가면서 현지 엘리트들의 권위를 무시했다. 이러한 통치는 디파느가라를 비롯한 자와 귀족과 농민들의 불만을 키웠다.
또한 네덜란드의 식민 수탈 체계가 자와 농민들의 삶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커피, 설탕, 인디고 등 현지 자원을 착취했고, 자와 주민들에게 과도한 세금과 강제노동을 요구했다. 전통적인 공동체 구조가 무너지며 농민들은 경제적 압박과 불안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기에 종교적 긴장도 더해졌다.
디파느가라는 세력을 확장하여 많은 왕족과 귀족들과 무슬림 사회의 폭넓은 후원을 등에 업고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이 전개했다. 1825년부터 전쟁은 시작되어 자와 중심부에서 게릴라 전술을 이용해 네덜란드군을 공격했고, 수많은 농민들과 일부 귀족 세력이 그의 편에 가담했다. 반란은 [1]욕야카르타를 넘어 자와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네덜란드는 1827년부터 본격적인 진압 작전을 준비하였다. [5]헨드릭 메르크스가 지휘한 네덜란드군은 군사력 증강과 함께 전략적 요새 건설, 주요 지도자 회유, 지역 간의 이간책 등 체계적인 대응 전략을 실행했다. 또한 반군과 민간인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게릴라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점차 디파느가라는 고립되었고 병력과 자원의 부족으로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몰렸다.
1830년 3월 28일, 디파느가라는 협상을 위한 회담에 참여하가 위하여 회담장으로 나갔다가 네덜란드에 체포되면서 전쟁은 종료되었다.
전쟁의 결과는 자와 지역에 심각한 피해를 남겼다. 약 20만 명에 달하는 자와인이 전쟁과 그 여파로 사망했고 전통 농촌 사회는 황폐화되었다.
네덜란드는 이후 간접통치 방식에서 벗어나 직접 통치 체계를 강화했고 자와의 귀족 권한을 대폭 축소시키는 정책을 단행했다. 이는 인도네시아 식민 지배 전반에 걸쳐 권력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식민 관료제 중심의 행정 체계가 자리잡게 되었다.
비록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디파느가라는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게 되었다. 그의 반식민 저항은 이후 세대에 영향을 미쳤고, 특히 20세기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시기에 그는 식민 통치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재조명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를 국민영웅으로 공식 지정했고 현재도 역사 교과서와 문화 콘텐츠에서 주요 인물로 다뤄진다.
[1] 욕야카르타(Yogyakarta) :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 특별주의 주도. 전통적으로 자와 미술의 중심지였으며 바틱, 무용, 연극, 음악, 시, 와양(그림자 연극) 등의 문화가 발달했다.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중이던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인도네시아의 임시 수도였다
[2] 욕야카르타 술탄국(Sultanate of Yogyakarta) : 인도네시아 자와섬에 위치한 전통적인 이슬람 왕국으로, 현재까지도 문화적·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특수 자치 지역
[3] 디파느가라(인도네시아어 : Diponegoro, 자와어:Dipanagara, 1785년 11월 11일 ~ 1855년 1월 8일) : 욕야카르타 술탄국의 왕자. 인도네시아의 영웅 중 한 사람이다
[4] 자와(인도네시아어: Jawa, 영어: Java) : 인도네시아의 섬으로 수도인 자카르타와 반둥, 욕야카르타, 보고르 등 주요 도시들 대부분이 이 섬에 위치해 있다. 영어 이름은 '자바(Java)'이다
[5] 헨드릭 메르크스(Hendrik Merkus, 1779년 5월 25일~1845년 4월 12일) : 네덜란드의 군인 겸 식민 행정가. 네덜란드 식민지 통치 강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며, 인도네시아 측에서는 디폰느고로 체포를 통해 식민 지배를 연장시켰다
디파느가라 전쟁은 인도네시아 자와섬에서 네덜란드 식민 통치에 맞서 일어난 대규모 저항 전쟁이다. 인도네시아 [4]자와섬에서 [2]욕야카르타 술탄국의 [3]디파느가라(디폰느고로) 왕자가 주도하여 일어난 전쟁으로 자와전쟁 혹은 디파느가라(디폰느고로) 전쟁이라 불린다.
전쟁의 배경은 정치적, 사회경제적, 종교적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3]디파느가라는 욕야카르타 왕국의 왕자였지만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고 이는 그의 정치적 불만을 증폭시켰다. 네덜란드는 자와의 전통 귀족 체계를 약화시키고 행정과 세금, 치안권을 직접 장악해 나가면서 현지 엘리트들의 권위를 무시했다. 이러한 통치는 디파느가라를 비롯한 자와 귀족과 농민들의 불만을 키웠다.
또한 네덜란드의 식민 수탈 체계가 자와 농민들의 삶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커피, 설탕, 인디고 등 현지 자원을 착취했고, 자와 주민들에게 과도한 세금과 강제노동을 요구했다. 전통적인 공동체 구조가 무너지며 농민들은 경제적 압박과 불안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기에 종교적 긴장도 더해졌다.
디파느가라는 세력을 확장하여 많은 왕족과 귀족들과 무슬림 사회의 폭넓은 후원을 등에 업고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이 전개했다. 1825년부터 전쟁은 시작되어 자와 중심부에서 게릴라 전술을 이용해 네덜란드군을 공격했고, 수많은 농민들과 일부 귀족 세력이 그의 편에 가담했다. 반란은 [1]욕야카르타를 넘어 자와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네덜란드는 1827년부터 본격적인 진압 작전을 준비하였다. [5]헨드릭 메르크스가 지휘한 네덜란드군은 군사력 증강과 함께 전략적 요새 건설, 주요 지도자 회유, 지역 간의 이간책 등 체계적인 대응 전략을 실행했다. 또한 반군과 민간인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게릴라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점차 디파느가라는 고립되었고 병력과 자원의 부족으로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몰렸다.
1830년 3월 28일, 디파느가라는 협상을 위한 회담에 참여하가 위하여 회담장으로 나갔다가 네덜란드에 체포되면서 전쟁은 종료되었다.
전쟁의 결과는 자와 지역에 심각한 피해를 남겼다. 약 20만 명에 달하는 자와인이 전쟁과 그 여파로 사망했고 전통 농촌 사회는 황폐화되었다.
네덜란드는 이후 간접통치 방식에서 벗어나 직접 통치 체계를 강화했고 자와의 귀족 권한을 대폭 축소시키는 정책을 단행했다. 이는 인도네시아 식민 지배 전반에 걸쳐 권력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식민 관료제 중심의 행정 체계가 자리잡게 되었다.
비록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디파느가라는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게 되었다. 그의 반식민 저항은 이후 세대에 영향을 미쳤고, 특히 20세기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시기에 그는 식민 통치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재조명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를 국민영웅으로 공식 지정했고 현재도 역사 교과서와 문화 콘텐츠에서 주요 인물로 다뤄진다.
[1] 욕야카르타(Yogyakarta) :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 특별주의 주도. 전통적으로 자와 미술의 중심지였으며 바틱, 무용, 연극, 음악, 시, 와양(그림자 연극) 등의 문화가 발달했다.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중이던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인도네시아의 임시 수도였다
[2] 욕야카르타 술탄국(Sultanate of Yogyakarta) : 인도네시아 자와섬에 위치한 전통적인 이슬람 왕국으로, 현재까지도 문화적·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특수 자치 지역
[3] 디파느가라(인도네시아어 : Diponegoro, 자와어:Dipanagara, 1785년 11월 11일 ~ 1855년 1월 8일) : 욕야카르타 술탄국의 왕자. 인도네시아의 영웅 중 한 사람이다
[4] 자와(인도네시아어: Jawa, 영어: Java) : 인도네시아의 섬으로 수도인 자카르타와 반둥, 욕야카르타, 보고르 등 주요 도시들 대부분이 이 섬에 위치해 있다. 영어 이름은 '자바(Java)'이다
[5] 헨드릭 메르크스(Hendrik Merkus, 1779년 5월 25일~1845년 4월 12일) : 네덜란드의 군인 겸 식민 행정가. 네덜란드 식민지 통치 강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며, 인도네시아 측에서는 디폰느고로 체포를 통해 식민 지배를 연장시켰다
오늘날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우루과이 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이루고 있다. 우루과이 강 서쪽은 아르헨티나, 동쪽은 우루과이가 위치하고 있다.
스페인 점령시대 당시 우루과이강 동쪽에 위치한 오리엔탈 주(오늘날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에 속해 있었는데, 1811년에 [1]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는 오리엔탈 주의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아르헨티나와 연합하여 스페인을 물리친 후에 아르헨티나에서 독립을 위하여 싸웠다. 당시 아르헨티나에 속한 주였으며 중앙집권을 꾀하는 아르헨티나 정부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1816년 8월 포르투갈과 브라질 제국 연합이 오리엔탈 주를 침략하였다. 포르투갈 연합군은 1817년 1월 몬테비데오(Montevideo)를 점령했으며 3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오리엔탈 주를 점령한 브라질 제국은 '시스플라티나 주'로 합병시켰다.
몬테비데오(Montevideo)는 아르헨티나를 지배하던 스페인이 브라질을 지배하던 포르투갈에 대항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요새에서 출발한 도시이며 오늘날 우루과이의 수도이다.
1822년 9월 7일 브라질 제국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자 [2]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가 이끄는 동방의 33인을 중심으로 아르헨티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825년 8월 25일 브라질 제국으로 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로 인하여 브라질 제국과 아르헨티나가 충돌해 500여일간의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일어났다.
어느 한쪽의 세력이 훨씬 더 커지는 것을 염려한 영국과 프랑스가 중재에 나섰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도 계속되는 전쟁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고,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1828년 몬테비데오 조약'을 맺으면서 신생 독립국으로 '우루과이 공화국'이 탄생되었다.
신생 독립국 우루과이는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싸워준 아르헨티나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자국의 국기에 아르헨티나의 국기에 있는 5월의 태양을 모양만 변형해서 사용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이후로 영원한 우방국이다. 이에 반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앙숙관계가 되었다.
[1]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JJosé Gervasio Artigas, 1764년~1850년) : 우루과이 독립의 아버지
[2]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Juan Antonio Lavalleja, 1784년~1853년) : 우루과이의 정치인이자 혁명가
스페인 점령시대 당시 우루과이강 동쪽에 위치한 오리엔탈 주(오늘날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에 속해 있었는데, 1811년에 [1]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는 오리엔탈 주의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아르헨티나와 연합하여 스페인을 물리친 후에 아르헨티나에서 독립을 위하여 싸웠다. 당시 아르헨티나에 속한 주였으며 중앙집권을 꾀하는 아르헨티나 정부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1816년 8월 포르투갈과 브라질 제국 연합이 오리엔탈 주를 침략하였다. 포르투갈 연합군은 1817년 1월 몬테비데오(Montevideo)를 점령했으며 3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오리엔탈 주를 점령한 브라질 제국은 '시스플라티나 주'로 합병시켰다.
몬테비데오(Montevideo)는 아르헨티나를 지배하던 스페인이 브라질을 지배하던 포르투갈에 대항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요새에서 출발한 도시이며 오늘날 우루과이의 수도이다.
1822년 9월 7일 브라질 제국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자 [2]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가 이끄는 동방의 33인을 중심으로 아르헨티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825년 8월 25일 브라질 제국으로 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로 인하여 브라질 제국과 아르헨티나가 충돌해 500여일간의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일어났다.
어느 한쪽의 세력이 훨씬 더 커지는 것을 염려한 영국과 프랑스가 중재에 나섰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도 계속되는 전쟁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고,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1828년 몬테비데오 조약'을 맺으면서 신생 독립국으로 '우루과이 공화국'이 탄생되었다.
신생 독립국 우루과이는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싸워준 아르헨티나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자국의 국기에 아르헨티나의 국기에 있는 5월의 태양을 모양만 변형해서 사용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이후로 영원한 우방국이다. 이에 반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앙숙관계가 되었다.
[1]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JJosé Gervasio Artigas, 1764년~1850년) : 우루과이 독립의 아버지
[2]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Juan Antonio Lavalleja, 1784년~1853년) : 우루과이의 정치인이자 혁명가
프랑의 7월 혁명의 영향과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종교절 갈등등으로 1830년 8월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남부 지역이었던 벨기에가 독립하기 위해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벨기에 혁명군은 빠르게 브뤼셀 지역의 정부 청사들을 점령해나갔고 9월말 사흘에 걸친 시가전에서 네덜란드 군은 패퇴하고 만다. 10월 4일 마침내 벨기에는 공식적으로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해 12월 런던에 모인 유럽 열강(영국, 프랑스 왕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등)들은 공식적으로 독립을 승인하면서 벨기에라는 국가가 최초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이후 벨기에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레오폴트를 레오폴드 1세로 국왕으로 추대하였으며 레오폴드 1세의 즉위일인 7월 21일은 벨기에의 독립 기념일이다.
* 빌럼 1세(William I of the Netherlands, 1772년~1843년) :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초대 국왕.
* 레오폴드 1세(Leopold I, 1790년~1865년) : 벨기에의 초대 국왕. 재위: 1831년~1865년. 작센코부르크고타(House of Saxe‑Coburg and Gotha)가문 출신
* 브뤼셀(Brussels) : 벨기에의 수도
벨기에 혁명군은 빠르게 브뤼셀 지역의 정부 청사들을 점령해나갔고 9월말 사흘에 걸친 시가전에서 네덜란드 군은 패퇴하고 만다. 10월 4일 마침내 벨기에는 공식적으로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해 12월 런던에 모인 유럽 열강(영국, 프랑스 왕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등)들은 공식적으로 독립을 승인하면서 벨기에라는 국가가 최초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이후 벨기에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레오폴트를 레오폴드 1세로 국왕으로 추대하였으며 레오폴드 1세의 즉위일인 7월 21일은 벨기에의 독립 기념일이다.
* 빌럼 1세(William I of the Netherlands, 1772년~1843년) :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초대 국왕.
* 레오폴드 1세(Leopold I, 1790년~1865년) : 벨기에의 초대 국왕. 재위: 1831년~1865년. 작센코부르크고타(House of Saxe‑Coburg and Gotha)가문 출신
* 브뤼셀(Brussels) : 벨기에의 수도
1835년 10월 2일부터 1836년 4월 21일까지 멕시코와 멕시코의 한 주였던 코아우일라 테하스 주 중 테하스지역이 분리 독립을 목표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텍사스 독립 전쟁이라고도 한다.
미국은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백인 정착자들이 서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텍사스는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한 멕시코의 땅이 된 이후에도 서부로 향하는 이민은 계속되었다.
멕시코는 자국의 국교인 로마 가톨릭이 아니라 개신교를 믿는 이주민자들과 스페인어를 쓰고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조건으로 정착을 인정받았으며 이후로 이민은 계속되어 텍사스 인구의 90%가 미국인 이주민들이었다. 결국 미국 이민자들과 멕시코의 잦은 충돌로 멕시코 대통령인 산타 안나는 이주민의 철수를 명령하였으나 이주민은 이에 반발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계속되는 전투에서 산타 안나는 텍사스 이민자군에 포로가 되면서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 코아우일라 테하스(Coahuila Tejas) : 1824년 멕시코 헌법으로 설립된 멕시코 북동부에 위치한 주였다. 텍사스 혁명과 멕시코-미국 전쟁으로 현재는 코아우일라는 멕시코 코아우일라주로 테하스는 미국의 텍사스로 분리되었다.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 1794년~1876년) : 멕시코 제1공화국의 정치 지도자. 22년여의 기간동안 10차례 멕시코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미국은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백인 정착자들이 서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텍사스는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한 멕시코의 땅이 된 이후에도 서부로 향하는 이민은 계속되었다.
멕시코는 자국의 국교인 로마 가톨릭이 아니라 개신교를 믿는 이주민자들과 스페인어를 쓰고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조건으로 정착을 인정받았으며 이후로 이민은 계속되어 텍사스 인구의 90%가 미국인 이주민들이었다. 결국 미국 이민자들과 멕시코의 잦은 충돌로 멕시코 대통령인 산타 안나는 이주민의 철수를 명령하였으나 이주민은 이에 반발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계속되는 전투에서 산타 안나는 텍사스 이민자군에 포로가 되면서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 코아우일라 테하스(Coahuila Tejas) : 1824년 멕시코 헌법으로 설립된 멕시코 북동부에 위치한 주였다. 텍사스 혁명과 멕시코-미국 전쟁으로 현재는 코아우일라는 멕시코 코아우일라주로 테하스는 미국의 텍사스로 분리되었다.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 1794년~1876년) : 멕시코 제1공화국의 정치 지도자. 22년여의 기간동안 10차례 멕시코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세기 영국에서 노동 계층을 중심으로 전개된 정치 개혁 운동으로, 당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노동자들이 정치적 권리를 얻고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해 벌였던 중요한 운동이다. 이 운동의 이름은 1838년에 발표된 인민헌장(People’s Charter)에서 유래했으며, 헌장은 영국 의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6가지 주요 항목을 포함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빠른 경제적 성장과 함께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었으며, 노동 계층은 투표권과 정치 참여에서 배제된 상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차티스트들은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며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하고 서명 운동과 집회를 통해 인민헌장의 내용을 홍보했다. 인민헌장에서 요구한 6대 개혁안은 다음과 같다.
(1) 보통선거권: 모든 성인 남성에게 선거권 부여.
(2) 비밀투표제: 투표 과정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비밀투표를 실시.
(3) 의회 정기선거: 의회의 연간 선거를 통해 국민의 의사를 정기적으로 반영.
(4) 평등한 선거구제: 지역 간 인구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공평한 선거구 설정.
(5) 국회의원 자격 제한 폐지: 모든 계층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도록 자격 제한 철폐.
(6) 국회의원 보수 지급: 경제적 여건에 상관없이 누구나 국회의원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보수 지급.
차티스트 운동은 1830~1850년대에 걸쳐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청원 운동과 의회 제출을 진행했으나, 당대 영국 정부와 의회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노동 계층의 불만과 정치적 의식을 높였으며, 전국적인 단결을 통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차티스트들은 시위를 통해 평화적인 방법과 폭력적인 방법을 병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반영한다. 차티스트 운동이 즉각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선거법 개정과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 계층의 권리 신장을 위한 민주주의 투쟁의 선구적 사례로 기억되며,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빠른 경제적 성장과 함께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었으며, 노동 계층은 투표권과 정치 참여에서 배제된 상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차티스트들은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며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하고 서명 운동과 집회를 통해 인민헌장의 내용을 홍보했다. 인민헌장에서 요구한 6대 개혁안은 다음과 같다.
(1) 보통선거권: 모든 성인 남성에게 선거권 부여.
(2) 비밀투표제: 투표 과정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비밀투표를 실시.
(3) 의회 정기선거: 의회의 연간 선거를 통해 국민의 의사를 정기적으로 반영.
(4) 평등한 선거구제: 지역 간 인구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공평한 선거구 설정.
(5) 국회의원 자격 제한 폐지: 모든 계층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도록 자격 제한 철폐.
(6) 국회의원 보수 지급: 경제적 여건에 상관없이 누구나 국회의원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보수 지급.
차티스트 운동은 1830~1850년대에 걸쳐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청원 운동과 의회 제출을 진행했으나, 당대 영국 정부와 의회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노동 계층의 불만과 정치적 의식을 높였으며, 전국적인 단결을 통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차티스트들은 시위를 통해 평화적인 방법과 폭력적인 방법을 병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반영한다. 차티스트 운동이 즉각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선거법 개정과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 계층의 권리 신장을 위한 민주주의 투쟁의 선구적 사례로 기억되며,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조선 후기 1839년(헌종 5년)에 발생한 두 번째 천주교 박해사건이다.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벽파인 풍양조씨가 시파 안동김씨로 부터 권력을 탈취하기 위하여 일으켰다.
프랑스인 선교사 앵베르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및 조선신자들이 처형되었다.
* 헌종(憲宗, 1827년~1849년) : 조선의 제24대 왕, 재위:1834년~1849년
* 벽파(僻派) : 사도세자의 추숭에 반대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반대한 정파
* 시파(時派) :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 세력
*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Laurent-Joseph-Marius Imbert, 1797년~1839) : 로마 카톨릭교회의 사제, 천주교 조선교구 2대 교구장,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중 한명. 한국어명은 범세형
*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1803~1839) : 한국교회사 최초의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중 한명
* 자크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 Chastan, 1803~1839) : 프랑스인 사제.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명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벽파인 풍양조씨가 시파 안동김씨로 부터 권력을 탈취하기 위하여 일으켰다.
프랑스인 선교사 앵베르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및 조선신자들이 처형되었다.
* 헌종(憲宗, 1827년~1849년) : 조선의 제24대 왕, 재위:1834년~1849년
* 벽파(僻派) : 사도세자의 추숭에 반대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반대한 정파
* 시파(時派) :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 세력
*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Laurent-Joseph-Marius Imbert, 1797년~1839) : 로마 카톨릭교회의 사제, 천주교 조선교구 2대 교구장,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중 한명. 한국어명은 범세형
*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1803~1839) : 한국교회사 최초의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중 한명
* 자크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 Chastan, 1803~1839) : 프랑스인 사제.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명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와 영국의 완충지역이 되었다.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러시아 제국의 부동항 진출(남하정책)을 막기위해 영국이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과 일어난 전쟁으로 영국에 의하여 아프카니스탄 국왕 도스트 모하마드는 쫓겨나고 샤 슈자가 왕위에 복위되었다.
그러나 샤 슈자의 통치력과 영국인의 방탕한 행태로 아프가니스탄은 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에 대한 아프가니스탄인의 적개심이 노골적으로 표출되면서 대대적으로 저항하게 되었다. 결국 샤 슈자는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주둔하고 있었던 영국군도 전멸되었다. 살아남아 영국으로 되돌아간 영국군은 단 한명이었다고 한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으로 부터 해방되었으며 '도스트 무함마드'가 다시 왕위로 복위되면서 독립국이 되었다.
36년후인 1878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공격했다. 이를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고 한다.
* 도스트 모하마드(Dost Mohammad, 1793년~1863년) : 아프가니스탄 바라크자이 왕조(아프카니스탄 아미르국 - Emirate of Afghanistan, 1826 ~ 1919)의 창시자. 아미르국은 1919년 이후 아프카니스탄 왕국(1919년~1973년)이라 한다
* 샤 슈자(Shah Shujah) : 바라크자이 왕조의 전 왕조였던 두라니 왕조에서 1803년경에 재위했으나 6년만에 쿠데타로 쫒겨났던 왕으로 영국에 의해 1839년 다시 왕으로 복위한다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러시아 제국의 부동항 진출(남하정책)을 막기위해 영국이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과 일어난 전쟁으로 영국에 의하여 아프카니스탄 국왕 도스트 모하마드는 쫓겨나고 샤 슈자가 왕위에 복위되었다.
그러나 샤 슈자의 통치력과 영국인의 방탕한 행태로 아프가니스탄은 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에 대한 아프가니스탄인의 적개심이 노골적으로 표출되면서 대대적으로 저항하게 되었다. 결국 샤 슈자는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주둔하고 있었던 영국군도 전멸되었다. 살아남아 영국으로 되돌아간 영국군은 단 한명이었다고 한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으로 부터 해방되었으며 '도스트 무함마드'가 다시 왕위로 복위되면서 독립국이 되었다.
36년후인 1878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공격했다. 이를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고 한다.
* 도스트 모하마드(Dost Mohammad, 1793년~1863년) : 아프가니스탄 바라크자이 왕조(아프카니스탄 아미르국 - Emirate of Afghanistan, 1826 ~ 1919)의 창시자. 아미르국은 1919년 이후 아프카니스탄 왕국(1919년~1973년)이라 한다
* 샤 슈자(Shah Shujah) : 바라크자이 왕조의 전 왕조였던 두라니 왕조에서 1803년경에 재위했으나 6년만에 쿠데타로 쫒겨났던 왕으로 영국에 의해 1839년 다시 왕으로 복위한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화한후 청나라(중국)과 무역을 시작하였다. 청나라의 최대수출품은 차였고 영국의 주요수출품은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였다.
영국은 자국의 수출품에 비하여 청나라의 차가 큰 인기를 끌자 무역적자가 지속되었다. 영국은 이러한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하여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청나라에 몰래 팔기시작하였다.
마침 청나라의 정치가 혼란해지고 백성들이 힘들어하자 아편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설상가상으로 아편의 독성과 해악성에 대한 경각심이 미비하던 당시에 아편의 환각효과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상황은 청나라가 해결해야 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청나라 조정은 대대적인 아편단속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영국은 청나라의 이러한 아편 단속에 반발하여 제1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영국의 최신식 대포와 군함앞에 청나라는 패배하고 결과로 난징조약을 체결하였다.
난징조약으로 홍콩 섬이 영국 통치로 넘어갔고, 청나라의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가 강제적으로 개항되었다.
* 아편(opium) : 양귀비의 덜 익은 꽃봉오리와 꽃씨에서 채취되는 향정신성 마약
영국은 자국의 수출품에 비하여 청나라의 차가 큰 인기를 끌자 무역적자가 지속되었다. 영국은 이러한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하여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청나라에 몰래 팔기시작하였다.
마침 청나라의 정치가 혼란해지고 백성들이 힘들어하자 아편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설상가상으로 아편의 독성과 해악성에 대한 경각심이 미비하던 당시에 아편의 환각효과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상황은 청나라가 해결해야 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청나라 조정은 대대적인 아편단속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영국은 청나라의 이러한 아편 단속에 반발하여 제1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영국의 최신식 대포와 군함앞에 청나라는 패배하고 결과로 난징조약을 체결하였다.
난징조약으로 홍콩 섬이 영국 통치로 넘어갔고, 청나라의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가 강제적으로 개항되었다.
* 아편(opium) : 양귀비의 덜 익은 꽃봉오리와 꽃씨에서 채취되는 향정신성 마약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가 영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인해 홍콩 섬이 영국 통치로 넘어갔고, 청나라의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가 강제적으로 개항되었다.
청나라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 열강의 반(半)식민지적 지위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홍콩 섬이 영국 통치로 넘어갔고, 청나라의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가 강제적으로 개항되었다.
청나라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 열강의 반(半)식민지적 지위로 떨어지게 되었다.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100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다수가 해외로 집단이주하였다.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Irish Potato Femine)이라고도 한다.
1801년 연합법에 의해 아일랜드는 영국에 합병되었다.
1843년 북아메리카에서 시작된 감자역병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흰 곰팡이가 생겨 잎파리는 물로 땅속의 씨감자까지 죽게 만들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출신의 대지주가 농지를 독점하고 있을 정도로 빈부격차 심했으며 생산되는 농작물은 영국으로 수탈당하는 구조였다. 감자가 유일한 식량이었던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무려 5년간 이어진 감자역병으로 아일랜드인 10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더구나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 이질병등의 전염병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아사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결국 생존을 위해 아일랜드를 떠나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했는데,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올랐던 20여만명이 열악한 환경으로 배 안에서 사망하였다. 아메리카에 정착해서도 현실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존 이민자, 토착민들과는 다른 언어, 다른 종교를 믿는 이방인이었으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배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함께 매장된 공동묘지가 있다.
대기근이 일어나기 직전인 1840년대 후반의 아일랜드 인구는 850만 명이었다. 대기근 기간 중에 사망 또는 이주로 인해 전체인구의 약 20%~25% 정도가 줄어들었다.
기근의 주된 원인은 감자 역병 이었으나 그 외에도 영국의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차별정책이 사태가 심각해지도록 만든 또 다른 원인이었다.
이 사건으로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졌으며 독립의 열망이 증가하였다.
감자 역병을 보낸 건 물론 신이었지만, 그것을 대기근으로 바꾼 것은 잉글랜드인들이다
The almighty indeed sent the potato blight but the english created the famine.
-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 존 미첼(John Mitchel)
1801년 연합법에 의해 아일랜드는 영국에 합병되었다.
1843년 북아메리카에서 시작된 감자역병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흰 곰팡이가 생겨 잎파리는 물로 땅속의 씨감자까지 죽게 만들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출신의 대지주가 농지를 독점하고 있을 정도로 빈부격차 심했으며 생산되는 농작물은 영국으로 수탈당하는 구조였다. 감자가 유일한 식량이었던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무려 5년간 이어진 감자역병으로 아일랜드인 10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더구나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 이질병등의 전염병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아사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결국 생존을 위해 아일랜드를 떠나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했는데,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올랐던 20여만명이 열악한 환경으로 배 안에서 사망하였다. 아메리카에 정착해서도 현실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존 이민자, 토착민들과는 다른 언어, 다른 종교를 믿는 이방인이었으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배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함께 매장된 공동묘지가 있다.
대기근이 일어나기 직전인 1840년대 후반의 아일랜드 인구는 850만 명이었다. 대기근 기간 중에 사망 또는 이주로 인해 전체인구의 약 20%~25% 정도가 줄어들었다.
기근의 주된 원인은 감자 역병 이었으나 그 외에도 영국의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차별정책이 사태가 심각해지도록 만든 또 다른 원인이었다.
이 사건으로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졌으며 독립의 열망이 증가하였다.
감자 역병을 보낸 건 물론 신이었지만, 그것을 대기근으로 바꾼 것은 잉글랜드인들이다
The almighty indeed sent the potato blight but the english created the famine.
-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 존 미첼(John Mitchel)
멕시코-미국 전쟁은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미국의 서부 확장 정책과 국경 분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미국은 1845년 텍사스를 정식으로 합병했지만, 멕시코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을 [2]리오그란데 강과 [3]누에세스 강 중 어디로 설정할 것인지를 두고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 대통령 [1]제임스 녹스 포크는 서부 영토 확장을 추진하기 위해 전쟁을 불사했다.
1845년, 미국은 텍사스를 정식으로 합병했으며, 이는 멕시코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후 포크 대통령은 [5]재커리 테일러 장군을 이끌고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지대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1846년 4월, 미국과 멕시코 군대가 리오그란데 강 근처에서 충돌하였고, 이 사건을 구실로 미국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은 [5]재커리 테일러 장군과 [6]윈필드 스콧 장군을 중심으로 멕시코를 공격했다. 미국군은 [7]팔로 알토 전투, [8]몬테레이 전투, [9]부에나 비스타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며 멕시코 북부를 장악했고, 1847년에는 [10]베라크루스 상륙 작전을 통해 멕시코 동부 해안을 점령한 뒤,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진격했다. 1847년 9월, 미국군이 멕시코시티를 점령하면서 사실상 전쟁은 끝이 났다.
1848년 2월 2일, [4]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네바다, 유타, 와이오밍, 콜로라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으며, 국경을 리오그란데 강으로 확정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멕시코에 1,500만 달러를 지급하고, 멕시코 정부의 미국인 부채 350만 달러를 탕감해 주었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서부 개척의 기반을 마련하며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나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노예제도를 허용할 것인지의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심화되면서 남북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멕시코는 국토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하며 심각한 정치·경제적 혼란에 빠졌고, 이는 반미 감정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멕시코-미국 전쟁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영토 확장의 계기가 되었으며, 오늘날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과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친 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1] 제임스 녹스 포크(James Knox Polk, 1795년~1849년) : 미국의 11대 대통령(임기 : 1845년~1849년)
[2]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약 3,034km 길이의 강으로, 미국의 텍사스주와 멕시코 북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경계선이다.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국경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도 양국 간 이민 및 수자원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3] 누에세스 강(Nueces River) : 미국 텍사스주 남부를 흐르는 약 507km 길이의 강으로, 리오그란데 강과 함께 미국-멕시코 국경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멕시코는 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으나,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간주하면서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4]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 : 이 조약으로 멕시코는 1500만달러에 대한 대가로 미국에 광대한 토지를 양도했다. 동시에 멕시코의 대미 부채 325만 달러를 탕감했다. 양도된 곳은 현재 텍사스 주, 콜로라도 주,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 와이오밍 주의 일부, 캘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유타 주의 전체 면적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은 *리오그란데 강으로 확정했다
[5]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1784년 11월 24일 ~ 1850년 7월 9일) : 미국의 군인이자, 12대 대통령. 임기, 1849년 3월 4일~1850년 7월 9일
[6]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1786년 6월 13일 ~ 1866년 5월 29일) : 미국 육군의 장군, 외교관이자 대통령 후보
[7] 팔로 알토 전투(Battle of Palo Alto, 1846년 5월 8일) : 멕시코-미국 전쟁의 첫 번째 주요 전투로, 미국의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멕시코군을 격파하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전투이다. 미국군의 우수한 포병 전술과 기동력이 승리를 이끌었으며, 이 승리로 미군은 멕시코 북부로 진격할 기반을 마련했다
[8] 몬테레이 전투(Battle of Monterrey, 1846년 9월 21~24일) : 멕시코-미국 전쟁 중 미국의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멕시코의 요새화된 도시 몬테레이를 공격하여 점령한 전투이다. 격렬한 시가전 끝에 미군이 승리했지만, 멕시코군이 무장을 유지한 채 철수하는 조건으로 휴전이 체결되어 논란이 되었다.
[9] 부에나 비스타 전투(Battle of Buena Vista, 1847년 2월 22~23일) : 멕시코-미국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 장군의 멕시코군을 격퇴한 전투이다. 미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지형을 활용한 방어 전략과 강력한 포병 전력으로 승리하며 미국의 멕시코 북부 장악을 확고히 했다.
[10] 베라크루스 상륙 작전(Siege of Veracruz, 1847년 3월 9일~29일) : 미국군이 멕시코 동부 해안의 요새 도시 베라크루스를 포위하고 점령한 작전으로, 멕시코-미국 전쟁 중 최초의 대규모 상륙 작전이었다. 윈필드 스콧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해상 포격과 포위전을 통해 베라크루스를 함락시켰으며, 이를 발판으로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진격했다
미국은 1845년 텍사스를 정식으로 합병했지만, 멕시코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을 [2]리오그란데 강과 [3]누에세스 강 중 어디로 설정할 것인지를 두고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 대통령 [1]제임스 녹스 포크는 서부 영토 확장을 추진하기 위해 전쟁을 불사했다.
1845년, 미국은 텍사스를 정식으로 합병했으며, 이는 멕시코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후 포크 대통령은 [5]재커리 테일러 장군을 이끌고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지대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1846년 4월, 미국과 멕시코 군대가 리오그란데 강 근처에서 충돌하였고, 이 사건을 구실로 미국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은 [5]재커리 테일러 장군과 [6]윈필드 스콧 장군을 중심으로 멕시코를 공격했다. 미국군은 [7]팔로 알토 전투, [8]몬테레이 전투, [9]부에나 비스타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며 멕시코 북부를 장악했고, 1847년에는 [10]베라크루스 상륙 작전을 통해 멕시코 동부 해안을 점령한 뒤,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진격했다. 1847년 9월, 미국군이 멕시코시티를 점령하면서 사실상 전쟁은 끝이 났다.
1848년 2월 2일, [4]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네바다, 유타, 와이오밍, 콜로라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으며, 국경을 리오그란데 강으로 확정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멕시코에 1,500만 달러를 지급하고, 멕시코 정부의 미국인 부채 350만 달러를 탕감해 주었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서부 개척의 기반을 마련하며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나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노예제도를 허용할 것인지의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심화되면서 남북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멕시코는 국토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하며 심각한 정치·경제적 혼란에 빠졌고, 이는 반미 감정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멕시코-미국 전쟁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영토 확장의 계기가 되었으며, 오늘날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과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친 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1] 제임스 녹스 포크(James Knox Polk, 1795년~1849년) : 미국의 11대 대통령(임기 : 1845년~1849년)
[2]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약 3,034km 길이의 강으로, 미국의 텍사스주와 멕시코 북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경계선이다.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국경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도 양국 간 이민 및 수자원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3] 누에세스 강(Nueces River) : 미국 텍사스주 남부를 흐르는 약 507km 길이의 강으로, 리오그란데 강과 함께 미국-멕시코 국경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멕시코는 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으나,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간주하면서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4]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 : 이 조약으로 멕시코는 1500만달러에 대한 대가로 미국에 광대한 토지를 양도했다. 동시에 멕시코의 대미 부채 325만 달러를 탕감했다. 양도된 곳은 현재 텍사스 주, 콜로라도 주,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 와이오밍 주의 일부, 캘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유타 주의 전체 면적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은 *리오그란데 강으로 확정했다
[5]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1784년 11월 24일 ~ 1850년 7월 9일) : 미국의 군인이자, 12대 대통령. 임기, 1849년 3월 4일~1850년 7월 9일
[6]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1786년 6월 13일 ~ 1866년 5월 29일) : 미국 육군의 장군, 외교관이자 대통령 후보
[7] 팔로 알토 전투(Battle of Palo Alto, 1846년 5월 8일) : 멕시코-미국 전쟁의 첫 번째 주요 전투로, 미국의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멕시코군을 격파하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전투이다. 미국군의 우수한 포병 전술과 기동력이 승리를 이끌었으며, 이 승리로 미군은 멕시코 북부로 진격할 기반을 마련했다
[8] 몬테레이 전투(Battle of Monterrey, 1846년 9월 21~24일) : 멕시코-미국 전쟁 중 미국의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멕시코의 요새화된 도시 몬테레이를 공격하여 점령한 전투이다. 격렬한 시가전 끝에 미군이 승리했지만, 멕시코군이 무장을 유지한 채 철수하는 조건으로 휴전이 체결되어 논란이 되었다.
[9] 부에나 비스타 전투(Battle of Buena Vista, 1847년 2월 22~23일) : 멕시코-미국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 장군의 멕시코군을 격퇴한 전투이다. 미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지형을 활용한 방어 전략과 강력한 포병 전력으로 승리하며 미국의 멕시코 북부 장악을 확고히 했다.
[10] 베라크루스 상륙 작전(Siege of Veracruz, 1847년 3월 9일~29일) : 미국군이 멕시코 동부 해안의 요새 도시 베라크루스를 포위하고 점령한 작전으로, 멕시코-미국 전쟁 중 최초의 대규모 상륙 작전이었다. 윈필드 스콧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해상 포격과 포위전을 통해 베라크루스를 함락시켰으며, 이를 발판으로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진격했다
1846년(헌종 12)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이다. 조선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처형하였다.
* 헌종(憲宗, 1827년~1849년) : 조선의 제24대 왕, 재위:1834년~1849년
* 헌종(憲宗, 1827년~1849년) : 조선의 제24대 왕, 재위:1834년~1849년
몬테레이 전투는 미국-멕시코 전쟁중 벌어진 전투이며, 미국과 멕시코 간의 초기 교전 중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 중 하나이다. 미국의 [3]제임스 녹스 포크 대통령은 멕시코령이었던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를 포함한 서부 지역을 미국 영토로 편입하려 했다.
1846년 4월,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 분쟁이 격화되면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미국은 [6]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지만, 멕시코는 [7]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하며 미국의 텍사스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미국은 멕시코 북부로 군대를 진격시켰고, 이 과정에서 [4]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멕시코의 [1]몬테레이를 목표로 삼았다.
몬테레이는 멕시코 북부 누에보레온 주의 수도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요새화된 방어 시설과 멕시코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곳을 점령하면 멕시코 북부 전역을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1846년 9월, 미국의 [4]재커리 테일러는 6,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1]몬테레이를 공격했다. 멕시코군은 약 7,000명이 이를 방어하고 있었다. 멕시코군의 지휘관은 [5]페드로 데 암푸디아였다.
전투는 9월 21일부터 시작되었으며 미국군은 도시 외곽에의 요새화된 방어선을 점령한 뒤 시내로 진격했다. 하지만 멕시코군은 몬테레이의 강력한 요새와 좁은 골목과 건물들을 활용해 격렬한 저항을 하였다. 미국군은 이 과정에서 상당한 사상자를 냈으나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동원했다. 9월 23일, 미국군은 주요 건물을 하나씩 폭파하는 방식으로 돌파하며 시내 중심부로 전진했다. 전투가 지속되자 멕시코군의 [5]페드로 데 암푸디아는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협상을 시도했다.
결국 9월 24일, 양측은 8주 동안 전투를 중단하고 멕시코군이 무기를 가지고 퇴각하는 조건으로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몬테레이를 점령했으며 멕시코군은 전투를 중단하고 철수했다.
몬테레이 전투는 미국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를 점령하면서 멕시코 북부 공략의 발판을 마련한 중요한 승리였다. 그러나 재커리 테일러의 휴전 협정으로 워싱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더 강경한 조치를 원했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미국이 중요한 요충지를 확보한 것이었고, 이후 미국군은 멕시코 내륙으로 더 깊이 진격할 수 있었다.
이 전투 이후 미국은 멕시코시티까지 진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결국 1847년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 점령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몬테레이 전투는 멕시코-미국 전쟁의 전환점 중 하나로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보여주었으며, 시가전 전술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미국 역사에서 재커리 테일러의 명성을 크게 높였으며 그는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1] 몬테레이(Monterrey) : 멕시코 북동부 누에보레온주의 주도로 멕시코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및 경제 중심지 중 하나다. 현대적인 도시 인프라와 강력한 제조업 기반을 갖추고 있으며, 교육, 기술, 금융 부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 : 미국의 영토 확장 정책과 텍사스 합병 문제로 발생한 전쟁으로 미국이 승리하며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3] 제임스 녹스 포크(James Knox Polk, 1795년 11월 2일 ~ 1849년 6월 15일) : 미국 11대 대통령. 임기, 1845년 3월 4일~1849년 3월 4일
[4]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1784년 11월 24일 ~ 1850년 7월 9일) : 미국의 군인이자, 12대 대통령. 임기, 1849년 3월 4일~1850년 7월 9일
[5] 페드로 데 암푸디아(Pedro de Ampudia, 1805년 1월 30일 ~ 1868년 8월 7일) : 쿠바 하바나에서 태어나 멕시코의 군인 겸 정치가
[6]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약 3,034km 길이의 강으로, 미국의 텍사스주와 멕시코 북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경계선이다.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국경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도 양국 간 이민 및 수자원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7] 누에세스 강(Nueces River) : 미국 텍사스주 남부를 흐르는 약 507km 길이의 강으로, 리오그란데 강과 함께 미국-멕시코 국경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멕시코는 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으나,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간주하면서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1846년 4월,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 분쟁이 격화되면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미국은 [6]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지만, 멕시코는 [7]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하며 미국의 텍사스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미국은 멕시코 북부로 군대를 진격시켰고, 이 과정에서 [4]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멕시코의 [1]몬테레이를 목표로 삼았다.
몬테레이는 멕시코 북부 누에보레온 주의 수도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요새화된 방어 시설과 멕시코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곳을 점령하면 멕시코 북부 전역을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1846년 9월, 미국의 [4]재커리 테일러는 6,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1]몬테레이를 공격했다. 멕시코군은 약 7,000명이 이를 방어하고 있었다. 멕시코군의 지휘관은 [5]페드로 데 암푸디아였다.
전투는 9월 21일부터 시작되었으며 미국군은 도시 외곽에의 요새화된 방어선을 점령한 뒤 시내로 진격했다. 하지만 멕시코군은 몬테레이의 강력한 요새와 좁은 골목과 건물들을 활용해 격렬한 저항을 하였다. 미국군은 이 과정에서 상당한 사상자를 냈으나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동원했다. 9월 23일, 미국군은 주요 건물을 하나씩 폭파하는 방식으로 돌파하며 시내 중심부로 전진했다. 전투가 지속되자 멕시코군의 [5]페드로 데 암푸디아는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협상을 시도했다.
결국 9월 24일, 양측은 8주 동안 전투를 중단하고 멕시코군이 무기를 가지고 퇴각하는 조건으로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몬테레이를 점령했으며 멕시코군은 전투를 중단하고 철수했다.
몬테레이 전투는 미국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를 점령하면서 멕시코 북부 공략의 발판을 마련한 중요한 승리였다. 그러나 재커리 테일러의 휴전 협정으로 워싱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더 강경한 조치를 원했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미국이 중요한 요충지를 확보한 것이었고, 이후 미국군은 멕시코 내륙으로 더 깊이 진격할 수 있었다.
이 전투 이후 미국은 멕시코시티까지 진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결국 1847년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 점령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몬테레이 전투는 멕시코-미국 전쟁의 전환점 중 하나로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보여주었으며, 시가전 전술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미국 역사에서 재커리 테일러의 명성을 크게 높였으며 그는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1] 몬테레이(Monterrey) : 멕시코 북동부 누에보레온주의 주도로 멕시코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및 경제 중심지 중 하나다. 현대적인 도시 인프라와 강력한 제조업 기반을 갖추고 있으며, 교육, 기술, 금융 부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 : 미국의 영토 확장 정책과 텍사스 합병 문제로 발생한 전쟁으로 미국이 승리하며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3] 제임스 녹스 포크(James Knox Polk, 1795년 11월 2일 ~ 1849년 6월 15일) : 미국 11대 대통령. 임기, 1845년 3월 4일~1849년 3월 4일
[4]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1784년 11월 24일 ~ 1850년 7월 9일) : 미국의 군인이자, 12대 대통령. 임기, 1849년 3월 4일~1850년 7월 9일
[5] 페드로 데 암푸디아(Pedro de Ampudia, 1805년 1월 30일 ~ 1868년 8월 7일) : 쿠바 하바나에서 태어나 멕시코의 군인 겸 정치가
[6]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약 3,034km 길이의 강으로, 미국의 텍사스주와 멕시코 북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경계선이다.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국경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도 양국 간 이민 및 수자원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7] 누에세스 강(Nueces River) : 미국 텍사스주 남부를 흐르는 약 507km 길이의 강으로, 리오그란데 강과 함께 미국-멕시코 국경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멕시코는 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으나,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간주하면서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존더분트 전쟁(Sonderbund War)이라고도 한다. 스위스 연방정부의 권력을 확대하는 신헌법을 반대하여 7개 주가 조직한 존더분트와 치른 스위스 내전이다.
스위스 연방군에 의하여 존더분트의 프리부르 주를 시작으로 발레 주가 마지막으로 항복하면서 존더분트는 해체되었다.
내전의 결과로 느슨한 국가 연합이였던 스위스는 이듬해인 1848년에 연방 헌법이 발효되어 연방 국가로 조직되었다.
존더분트의 패배로 스위스에서는 예수회가 추방당하고 헌법으로 예수회의 활동이 금지된다. 그러나 백년이 넘게 지난 1973년 5월에 헌법 개정을 통해 예수회의 활동이 허용되었다.
* 존더분트(독일어: Sonderbund, 분리연방) : 스위스의 가톨릭을 믿는 7개 주(루체른, 프리부르, 발레,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추크)가 조직한 동맹. 정식명칭은 방어동맹(독일어: Schutzvereinigung)이다.
스위스 연방군에 의하여 존더분트의 프리부르 주를 시작으로 발레 주가 마지막으로 항복하면서 존더분트는 해체되었다.
내전의 결과로 느슨한 국가 연합이였던 스위스는 이듬해인 1848년에 연방 헌법이 발효되어 연방 국가로 조직되었다.
존더분트의 패배로 스위스에서는 예수회가 추방당하고 헌법으로 예수회의 활동이 금지된다. 그러나 백년이 넘게 지난 1973년 5월에 헌법 개정을 통해 예수회의 활동이 허용되었다.
* 존더분트(독일어: Sonderbund, 분리연방) : 스위스의 가톨릭을 믿는 7개 주(루체른, 프리부르, 발레,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추크)가 조직한 동맹. 정식명칭은 방어동맹(독일어: Schutzvereinigung)이다.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California Gold Rush)는 캘리포니아의 세크라멘토 근교인 콜로마(Coloma)라는 마을의 제재소(Sutter's Mill)에서 일하던 제임스 마셜(James W. Marshall)이 아메리칸 리버(American river)에서 금가루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이내 확산되어 미국의 각지역 그리고 해외에서 남녀노소를 비롯하여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오늘날의 금액으로 수십억달러에 해당하는 금이 채집되었다.
이 과정에서 캘리포니아는 작은 정착촌에서 신흥도시가 되고 늘어난 인구에 따른 각종 기간 시설이 건설되고 법체제가 갖춰지면서 1850년에 미국의 31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유입된 채굴자들 중 1849년에 캘리포니아로 향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연도를 따서 '포티나이너(Forty-niner, 약칭 49er)'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이내 확산되어 미국의 각지역 그리고 해외에서 남녀노소를 비롯하여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오늘날의 금액으로 수십억달러에 해당하는 금이 채집되었다.
이 과정에서 캘리포니아는 작은 정착촌에서 신흥도시가 되고 늘어난 인구에 따른 각종 기간 시설이 건설되고 법체제가 갖춰지면서 1850년에 미국의 31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유입된 채굴자들 중 1849년에 캘리포니아로 향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연도를 따서 '포티나이너(Forty-niner, 약칭 49er)'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1]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은 1848년 2월 2일, 멕시코-미국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체결된 평화 조약으로, 멕시코와 미국 간의 국경 분쟁을 해결하고 미국의 대륙 확장을 확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약은 멕시코시티 북쪽의 과달루페 이달고에서 체결되었으며, 이 조약으로 미국은 멕시코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할양받았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멕시코는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네바다, 유타, 와이오밍, 콜로라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약 200만㎢의 광대한 영토를 미국에 넘겼다. 이로써 미국은 멕시코 영토의 약 절반을 획득하며 현재의 서남부 지역을 획득하였다. 둘째,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이 [2]리오그란데 강으로 확정되었으며, 이는 멕시코가 주장했던 [3]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삼으려 했던 입장을 철회한 것이었다. 셋째, 미국은 이에 대한 대가로 멕시코에 1,500만 달러를 지급하고 멕시코 정부가 미국 시민들에게 지고 있던 350만 달러의 부채를 탕감해 주었다. 넷째, 미국이 새롭게 획득한 영토에 살고 있던 멕시코 거주민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권리를 부여했으나, 이후 이 지역의 멕시코계 주민들은 차별과 토지 몰수 등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미국은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경제적·전략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으며, 특히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로 인해 서부로의 이주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노예제를 허용할 것인지의 여부가 논쟁이 되면서 미국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결국 남북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멕시코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며 국토의 절반 가까이를 잃고 경제적·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이는 멕시코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이후 멕시코 역사에서 반미 감정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은 미국과 멕시코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미국 서남부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과달루페 이달고(Guadalupe Hidalgo) : 멕시코시티 북쪽에 위치한 역사적인 도시로 1848년 멕시코-미국 전쟁을 종결짓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이 체결된 장소로 유명하다. 현재는 멕시코시티의 일부로 통합되었으며, 가톨릭 성지인 과달루페 성모 대성당(Basílica de Guadalupe)이 있는 중요한 종교적·역사적 중심지이다
[2]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약 3,034km 길이의 강으로, 미국의 텍사스주와 멕시코 북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경계선이다.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국경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도 양국 간 이민 및 수자원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3] 누에세스 강(Nueces River) : 미국 텍사스주 남부를 흐르는 약 507km 길이의 강으로, 리오그란데 강과 함께 미국-멕시코 국경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멕시코는 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으나,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간주하면서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멕시코는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네바다, 유타, 와이오밍, 콜로라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약 200만㎢의 광대한 영토를 미국에 넘겼다. 이로써 미국은 멕시코 영토의 약 절반을 획득하며 현재의 서남부 지역을 획득하였다. 둘째,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이 [2]리오그란데 강으로 확정되었으며, 이는 멕시코가 주장했던 [3]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삼으려 했던 입장을 철회한 것이었다. 셋째, 미국은 이에 대한 대가로 멕시코에 1,500만 달러를 지급하고 멕시코 정부가 미국 시민들에게 지고 있던 350만 달러의 부채를 탕감해 주었다. 넷째, 미국이 새롭게 획득한 영토에 살고 있던 멕시코 거주민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권리를 부여했으나, 이후 이 지역의 멕시코계 주민들은 차별과 토지 몰수 등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미국은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경제적·전략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으며, 특히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로 인해 서부로의 이주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노예제를 허용할 것인지의 여부가 논쟁이 되면서 미국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결국 남북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멕시코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며 국토의 절반 가까이를 잃고 경제적·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이는 멕시코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이후 멕시코 역사에서 반미 감정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은 미국과 멕시코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미국 서남부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과달루페 이달고(Guadalupe Hidalgo) : 멕시코시티 북쪽에 위치한 역사적인 도시로 1848년 멕시코-미국 전쟁을 종결짓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이 체결된 장소로 유명하다. 현재는 멕시코시티의 일부로 통합되었으며, 가톨릭 성지인 과달루페 성모 대성당(Basílica de Guadalupe)이 있는 중요한 종교적·역사적 중심지이다
[2]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약 3,034km 길이의 강으로, 미국의 텍사스주와 멕시코 북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경계선이다.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국경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도 양국 간 이민 및 수자원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3] 누에세스 강(Nueces River) : 미국 텍사스주 남부를 흐르는 약 507km 길이의 강으로, 리오그란데 강과 함께 미국-멕시코 국경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멕시코는 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으나,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간주하면서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태평천국운동 청나라 말기의 사회적·경제적 혼란과 외세의 침략으로 중화제국의 질서가 붕괴되어 가는 동안에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이자 종교 혁명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운동의 지도자인 [1]홍수전은 [2]광시성 출신의 몰락한 유생으로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한 후 기독교 서적을 접하고 자신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중국에서 태어난 메시아라는 교리를 세우고 전파하였다. 그는 서양 기독교의 사상과 중국 민간 신앙을 혼합하여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고 평등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1851년, 홍수전은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 열망을 바탕으로 농민과 하층민,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아 태평천국이라는 국가를 선포하고 스스로 천왕에 올랐다. 그는 청조의 통치를 부정하며 새 질서를 세우고자 하였다. 태평천국은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고 1853년에는 중국의 중심 도시인 [3]난징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태평천국은 재산의 공동 소유, 남녀평등, 신분제 폐지, 전족 금지 등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등 근대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많은 농민과 억압받는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권력 다툼, 통치 경험 부족, 과도한 종교 중심주의 등으로 인해 점차 혼란이 커졌고 외부적으로는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후 청나라군과 서양 열강(영국, 프랑스)에 패퇴하였다. 결국 [5]중국번의 [4]상군에 희하여 난징이 함락되고 홍수전이 사망하면서 14년간의 태평천국운동은 종결되었다.
이 운동은 청나라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이후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 신해혁명 등의 근대화에 영향을 주었다.
[1] 홍수전(1814년~1864) : 청나라 내에서 기독교에 기초한 종교국가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을 건국하여 청나라 조정과 대립하였다
[2] 광시성 :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로 성도는 난닝시이다. 1958년 이전에는 광시성이었지만 1958년에 좡족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3] 난징(Nanjing) : 중화민국(대만, 지도자 쑨원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의 명목상 수도이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쑤성의 성도
[4] 상군 : 청나라 말기 후난성 지방군의 호칭. 후난성의 상향출신의 증국번이 향용을 조직했으며 상군은 향용조식중 하나이다
[5] 증국번(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이 운동의 지도자인 [1]홍수전은 [2]광시성 출신의 몰락한 유생으로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한 후 기독교 서적을 접하고 자신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중국에서 태어난 메시아라는 교리를 세우고 전파하였다. 그는 서양 기독교의 사상과 중국 민간 신앙을 혼합하여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고 평등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1851년, 홍수전은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 열망을 바탕으로 농민과 하층민,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아 태평천국이라는 국가를 선포하고 스스로 천왕에 올랐다. 그는 청조의 통치를 부정하며 새 질서를 세우고자 하였다. 태평천국은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고 1853년에는 중국의 중심 도시인 [3]난징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태평천국은 재산의 공동 소유, 남녀평등, 신분제 폐지, 전족 금지 등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등 근대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많은 농민과 억압받는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권력 다툼, 통치 경험 부족, 과도한 종교 중심주의 등으로 인해 점차 혼란이 커졌고 외부적으로는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후 청나라군과 서양 열강(영국, 프랑스)에 패퇴하였다. 결국 [5]중국번의 [4]상군에 희하여 난징이 함락되고 홍수전이 사망하면서 14년간의 태평천국운동은 종결되었다.
이 운동은 청나라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이후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 신해혁명 등의 근대화에 영향을 주었다.
[1] 홍수전(1814년~1864) : 청나라 내에서 기독교에 기초한 종교국가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을 건국하여 청나라 조정과 대립하였다
[2] 광시성 :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로 성도는 난닝시이다. 1958년 이전에는 광시성이었지만 1958년에 좡족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3] 난징(Nanjing) : 중화민국(대만, 지도자 쑨원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의 명목상 수도이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쑤성의 성도
[4] 상군 : 청나라 말기 후난성 지방군의 호칭. 후난성의 상향출신의 증국번이 향용을 조직했으며 상군은 향용조식중 하나이다
[5] 증국번(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크림 전쟁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여기에 영국, 프랑스, [1]사르데냐 왕국이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며 개입하면서 국제적인 충돌로 확대되었다. 이 전쟁의 주요 원인은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틈타 흑해와 발칸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령 [2]다뉴브 공국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하며 개입을 시도했고, 이에 맞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인 1853년 [3]시노페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이 오스만 제국 함대를 대파하며 우위를 점했으나 러시아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1854년에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1854년에 연합군은 러시아의 [10]크림반도를 공격하며 [4]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시작했고, 같은 해 [5]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군의 무모한 돌격으로 유명한 [6]경기병 여단의 돌격이 벌어졌다.
전쟁은 1855년 9월, 세바스토폴이 함락되면서 러시아의 패색이 확실해졌고, 결국 1856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7]몰다비아와 [8]왈라키아에서 철수해야 했으며 흑해에서 군사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유럽 내 세력 균형을 재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크림 전쟁은 단순한 영토 전쟁을 넘어 근대 전쟁의 특징을 처음으로 보여준 전쟁이었다. 철도와 전신이 군사 작전에 활용되었으며 언론과 전쟁 사진 보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9]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참전하여 군 병원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체계적인 간호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근대 간호학의 발전을 촉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패배를 계기로 내부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861년 농노 해방령을 발표하는 등 사회 변화를 겪게 되었다. 또한 사르데냐 왕국의 참전은 이후 이탈리아 통일의 발판이 되었으며 유럽 전체적으로는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고 오스만 제국을 일정 부분 유지하려는 외교적 균형이 유지되었다.
크림 전쟁은 유럽 세력 균형을 조정하는 중요한 전쟁이었으며 근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전쟁으로서 군사, 외교,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1] 사르데냐 왕국(Kingdom of Sardinia) : 1720년부터 1861년까지 토리노를 수도로 하여 존재했던 이탈리아의 왕국으로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을 탄생시키는 기반을 마련한 왕국
[2] 다뉴브 공국(Danubian Principalities) :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역(현재 루마니아)으로,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주요 분쟁 지역이었다
[3] 시노페 해전(Battle of Sinop, 1853년 11월 30일) : 크림 전쟁 초기 러시아 해군이 오스만 제국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섬멸한 전투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며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세바스토폴 공방전(Siege of Sevastopol, 1854년 ~ 1855년) : 크림 전쟁 중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이 11개월간 러시아의 요새 도시 세바스토폴을 포위하여 함락시킨 전투로 러시아의 패배를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5] 발라클라바 전투(Battle of Balaclava, 1854년 10월 25일) : 크림 전쟁 중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과 러시아군의 전투로, 특히 영국군의 무모한 "경기병 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으로 유명하다
[6] 경기병 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 1854) : 크림 전쟁 중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 기병대가 잘못된 명령으로 러시아 대포 진지를 향해 돌격하여 막대한 희생을 낳은 사건으로 용맹함과 군사 지휘 실수의 상징이 되었다
[7] 몰다비아(Moldavia) : 현재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다가 러시아-오스만 갈등의 주요 무대가 되었으며, 이후 루마니아 통일의 기초가 되었다
[8] 왈라키아(Wallachia) : 현재 루마니아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1859년 몰다비아와 합병하여 루마니아 왕국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년 5월 12일 ~ 1910년 8월 13일) : 크림 전쟁 중 병원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근대 간호학의 기초를 확립한 영국의 간호사이자 의료 개혁가
[10] 크림반도(Crimea Peninsula) : 흑해 북쪽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역사적으로 여러 제국과 국가들이 차지하려 했던 분쟁 지역이며 현재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갈등 중심지이다.
전쟁 초기인 1853년 [3]시노페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이 오스만 제국 함대를 대파하며 우위를 점했으나 러시아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1854년에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1854년에 연합군은 러시아의 [10]크림반도를 공격하며 [4]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시작했고, 같은 해 [5]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군의 무모한 돌격으로 유명한 [6]경기병 여단의 돌격이 벌어졌다.
전쟁은 1855년 9월, 세바스토폴이 함락되면서 러시아의 패색이 확실해졌고, 결국 1856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7]몰다비아와 [8]왈라키아에서 철수해야 했으며 흑해에서 군사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유럽 내 세력 균형을 재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크림 전쟁은 단순한 영토 전쟁을 넘어 근대 전쟁의 특징을 처음으로 보여준 전쟁이었다. 철도와 전신이 군사 작전에 활용되었으며 언론과 전쟁 사진 보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9]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참전하여 군 병원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체계적인 간호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근대 간호학의 발전을 촉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패배를 계기로 내부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861년 농노 해방령을 발표하는 등 사회 변화를 겪게 되었다. 또한 사르데냐 왕국의 참전은 이후 이탈리아 통일의 발판이 되었으며 유럽 전체적으로는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고 오스만 제국을 일정 부분 유지하려는 외교적 균형이 유지되었다.
크림 전쟁은 유럽 세력 균형을 조정하는 중요한 전쟁이었으며 근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전쟁으로서 군사, 외교,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1] 사르데냐 왕국(Kingdom of Sardinia) : 1720년부터 1861년까지 토리노를 수도로 하여 존재했던 이탈리아의 왕국으로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을 탄생시키는 기반을 마련한 왕국
[2] 다뉴브 공국(Danubian Principalities) :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역(현재 루마니아)으로,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주요 분쟁 지역이었다
[3] 시노페 해전(Battle of Sinop, 1853년 11월 30일) : 크림 전쟁 초기 러시아 해군이 오스만 제국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섬멸한 전투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며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세바스토폴 공방전(Siege of Sevastopol, 1854년 ~ 1855년) : 크림 전쟁 중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이 11개월간 러시아의 요새 도시 세바스토폴을 포위하여 함락시킨 전투로 러시아의 패배를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5] 발라클라바 전투(Battle of Balaclava, 1854년 10월 25일) : 크림 전쟁 중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과 러시아군의 전투로, 특히 영국군의 무모한 "경기병 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으로 유명하다
[6] 경기병 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 1854) : 크림 전쟁 중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 기병대가 잘못된 명령으로 러시아 대포 진지를 향해 돌격하여 막대한 희생을 낳은 사건으로 용맹함과 군사 지휘 실수의 상징이 되었다
[7] 몰다비아(Moldavia) : 현재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다가 러시아-오스만 갈등의 주요 무대가 되었으며, 이후 루마니아 통일의 기초가 되었다
[8] 왈라키아(Wallachia) : 현재 루마니아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1859년 몰다비아와 합병하여 루마니아 왕국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년 5월 12일 ~ 1910년 8월 13일) : 크림 전쟁 중 병원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근대 간호학의 기초를 확립한 영국의 간호사이자 의료 개혁가
[10] 크림반도(Crimea Peninsula) : 흑해 북쪽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역사적으로 여러 제국과 국가들이 차지하려 했던 분쟁 지역이며 현재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갈등 중심지이다.
미일화친조약은 일본과 미국이 체결한 조약으로 일본이 쇄국 정책을 끝내고 서구 국가들과 외교 및 무역 관계를 시작한 사건이다.
이 조약은 미국 해군 제독 [1]매튜 페리가 이끄는 함대가 일본에 무력 시위를 벌인 후 강제적으로 체결되었으며 일본의 근대화와 개항을 촉진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은 [2]시모다와 [3]하코다테의 두 항구를 미국 선박에 개방하여 연료와 식량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미국 선박이 조난당한 경우 일본이 구조하고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 셋째, 양국이 평등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이 일본에 영사관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약 220년간 유지해온 쇄국 정책을 종식했으며 서구 열강과 조약이 연이어 체결하면서 본격적인 개항 시대가 시작되었다.
미일화친조약은 일본의 [4]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근대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일본이 국제 사회로 진출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은 중국과 무역 경유지를 확보하였으며 태평양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 매튜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년 ~ 1858년) : 미국 해군 제독
[2] 시모다(Shimoda) : 일본 시즈오카현의 이즈반도 남부에 위치하는 도시. 일본 에도시대 말의 1854년에 미일 화친 조약이 조인된 도시
[3] 하코다테(Hakodate) : 일본 홋카이도 남부에 있는 도시
[4] 메이지 유신(Meiji Restoration, 1868) : 일본이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로 전환한 정치·사회 개혁 운동으로, 서구식 군대·산업·교육 시스템을 도입하며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서구 열강과 경쟁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조약은 미국 해군 제독 [1]매튜 페리가 이끄는 함대가 일본에 무력 시위를 벌인 후 강제적으로 체결되었으며 일본의 근대화와 개항을 촉진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은 [2]시모다와 [3]하코다테의 두 항구를 미국 선박에 개방하여 연료와 식량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미국 선박이 조난당한 경우 일본이 구조하고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 셋째, 양국이 평등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이 일본에 영사관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약 220년간 유지해온 쇄국 정책을 종식했으며 서구 열강과 조약이 연이어 체결하면서 본격적인 개항 시대가 시작되었다.
미일화친조약은 일본의 [4]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근대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일본이 국제 사회로 진출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은 중국과 무역 경유지를 확보하였으며 태평양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 매튜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년 ~ 1858년) : 미국 해군 제독
[2] 시모다(Shimoda) : 일본 시즈오카현의 이즈반도 남부에 위치하는 도시. 일본 에도시대 말의 1854년에 미일 화친 조약이 조인된 도시
[3] 하코다테(Hakodate) : 일본 홋카이도 남부에 있는 도시
[4] 메이지 유신(Meiji Restoration, 1868) : 일본이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로 전환한 정치·사회 개혁 운동으로, 서구식 군대·산업·교육 시스템을 도입하며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서구 열강과 경쟁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피의 캔자스는 미국역사에서 '피로 물든 캔자스(Bloody Kansas) 혹은 경계지역의 전쟁(Border War)'라고 언급된다.
피의 캔자스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자유주 정착민과 노예제를 찬성하는 노예주 정착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일련의 폭력적, 정치적 대립 사건을 말한다.
미국의 노예제 문제를 놓고 벌어진 폭력적인 사태는 미국 북부와 남부의 노예 제도를 둘러싼 대리 전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미국 남북전쟁의 사전 징후가 되었다.
이러한 폭력적인 사건들은 캔자스 준주와 인접한 미주리주 서쪽의 프런티어 타운에서 발생했다. 갈등의 주요 이슈는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할 것인가 아니면 노예주로 가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노예주로서 미주리주는 두 면이 자유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일리노이주, 북쪽으로는 아이오와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한다면 미주리는 삼면이 자유주들로 경계를 이루는 상황에 처한다.이는 미주리 노예 소유주들에게 위협이었다.
극심한 감정대결은 몇 년 동안 이어졌고 이후 진행된 주민투표에서 캔자스주에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법안은 주 의회의 인준을 받았고 1861년 1월 29일 노예제도를 거부하는 자유주로서 연방에 새로 편입되었다.
캔자스주의 연방가입 후 세 달 뒤에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 준주(準州) : 미합중국 자산의 일부로 병합되었거나 미국 연방 의회에서 제정된 조직법에 따라 입법, 행정, 사법 등의 조직을 갖춘 곳을 말한다. 1912년 애리조나가 주가 된 것을 마지막으로 미국 본토내의 준주는 없으며, 하와이와 알래스카가 1959년 준주에서 주가 되면서 현재 미국내 준주인 곳은 없다
* 노예주(slave state) : 미국 남북 전쟁 이전에 있었던 노예 제도가 합법적이었던 주
* 자유주(free state) : 노예 제도를 금지했거나 이미 폐지한 주
피의 캔자스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자유주 정착민과 노예제를 찬성하는 노예주 정착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일련의 폭력적, 정치적 대립 사건을 말한다.
미국의 노예제 문제를 놓고 벌어진 폭력적인 사태는 미국 북부와 남부의 노예 제도를 둘러싼 대리 전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미국 남북전쟁의 사전 징후가 되었다.
이러한 폭력적인 사건들은 캔자스 준주와 인접한 미주리주 서쪽의 프런티어 타운에서 발생했다. 갈등의 주요 이슈는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할 것인가 아니면 노예주로 가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노예주로서 미주리주는 두 면이 자유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일리노이주, 북쪽으로는 아이오와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한다면 미주리는 삼면이 자유주들로 경계를 이루는 상황에 처한다.이는 미주리 노예 소유주들에게 위협이었다.
극심한 감정대결은 몇 년 동안 이어졌고 이후 진행된 주민투표에서 캔자스주에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법안은 주 의회의 인준을 받았고 1861년 1월 29일 노예제도를 거부하는 자유주로서 연방에 새로 편입되었다.
캔자스주의 연방가입 후 세 달 뒤에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 준주(準州) : 미합중국 자산의 일부로 병합되었거나 미국 연방 의회에서 제정된 조직법에 따라 입법, 행정, 사법 등의 조직을 갖춘 곳을 말한다. 1912년 애리조나가 주가 된 것을 마지막으로 미국 본토내의 준주는 없으며, 하와이와 알래스카가 1959년 준주에서 주가 되면서 현재 미국내 준주인 곳은 없다
* 노예주(slave state) : 미국 남북 전쟁 이전에 있었던 노예 제도가 합법적이었던 주
* 자유주(free state) : 노예 제도를 금지했거나 이미 폐지한 주
1856년 발발한 제2차 아편 전쟁은 일명 애로우호 전쟁이라고 불린다. 제2차 중영전쟁이다
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의 승리로 청나라의 개항과 무역 독점권을 얻었지만 생각보다 큰 이득이 되지 않았고 여전히 아편수출에 의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인들이 아편을 몰래 자체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무역적자가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의 차 수출량이 급증하는 상황까지 되었다.
게다가 당시 청나라는 프랑스인 선교사 처형문제로 프랑스와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영국인 선주의 청나라 선박인 애로우호의 영국국기를 바다에 던진 사건, 일명 애로우호 사건을 핑게삼아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였다.
내부적으로 태평천국의 난으로 국가적 역량이 크게 쇠퇴하였던 청나라는 베이징이 함락된 후 러시아의 중재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베이징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청나라는 1차 아편전쟁의 패배의 결과인 난징조약(1842년)에서 영국에 홍콩 섬을 내준데 이어 홍콩섬 맞은 편의 주룽(Kowloon)반도까지 내주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넘겨받으면서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만주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청나라에서 프랑스인의 천주교 전파 등 포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패하면서 허약한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게 된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덩치 큰 호구,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베이징 조약을 맺은 이후 청은 서구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중화 우위의 질서가 무너지고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 애로우호(Arrow) : 영국인 선주 소유의 청나라 선박
* 태평천국 운동 :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대봉기이자 신정국가(종교적 원리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지는 정치형태)인 태평천국 건국 운동
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의 승리로 청나라의 개항과 무역 독점권을 얻었지만 생각보다 큰 이득이 되지 않았고 여전히 아편수출에 의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인들이 아편을 몰래 자체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무역적자가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의 차 수출량이 급증하는 상황까지 되었다.
게다가 당시 청나라는 프랑스인 선교사 처형문제로 프랑스와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영국인 선주의 청나라 선박인 애로우호의 영국국기를 바다에 던진 사건, 일명 애로우호 사건을 핑게삼아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였다.
내부적으로 태평천국의 난으로 국가적 역량이 크게 쇠퇴하였던 청나라는 베이징이 함락된 후 러시아의 중재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베이징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청나라는 1차 아편전쟁의 패배의 결과인 난징조약(1842년)에서 영국에 홍콩 섬을 내준데 이어 홍콩섬 맞은 편의 주룽(Kowloon)반도까지 내주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넘겨받으면서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만주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청나라에서 프랑스인의 천주교 전파 등 포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패하면서 허약한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게 된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덩치 큰 호구,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베이징 조약을 맺은 이후 청은 서구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중화 우위의 질서가 무너지고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 애로우호(Arrow) : 영국인 선주 소유의 청나라 선박
* 태평천국 운동 :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대봉기이자 신정국가(종교적 원리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지는 정치형태)인 태평천국 건국 운동
1857년 인도항쟁, 제1차 인도 독립전쟁으로도 불린다.
영국은 1757년 [1]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와 인도연합군에 승리한 이후 인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은 총독을 파견해 지배하는 대신 [2]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간접통치하고 있었다.
영국 [2]동인도회사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인도인 용병인 [3]세포이를 고용하였다. [3]세포이는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토후국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갈 때 용병으로 참여했으며 지역에 따라 이슬람교, 힌두교등의 다양한 종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계속되는 팽창 정책으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일대로 세포이의 파병을 요구하였다. 이에 파병을 꺼리던 세포이는 영국과 갈등을 빚었고 처우에 대한 불만도 쌓여갔다. 이러한 불만들이 쌓여가는 가운데 새로 지급된 탄약통이 세포이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새롭게 지급된 [6]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 소총은 보다 빠른 장전을 위하여 개별 포장된 탄약통을 사용하였다. 문제는 탄약통의 방수를 위해 종이에 소나 돼지의 지방 입힌 것에서 비롯되었다. 소는 힌두교도들이 신성시하고 돼지는 이슬람교도들이 싫어했다.
힌두교나 이슬람교의 신자였던 세포이들은 이 탄약통을 입으로 물어 뜯어 사용하라는 것은 자신들의 종교를 멸시하는 행위라고 받아들였다.
1857년 3월 29일 제34 벵골인 연대의 세포이였던 [5]망갈 판데이는 탄약통을 수령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5]만갈 판데이는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은 선고받았고 4월 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연대는 해산되었으며 항명에 가담한 세포이는 불명예 제대를 하였다. 이들 대다수는 전국적으로 번진 항쟁에 민간인으로 가담하였다.
실제적인 항쟁은 델리에서 북동쪽 70km에 위치하고 있는 [7]메루트 지역에서 비롯되었다.
4월 24일에 [7]메루트의 동인도회사 소속 90명의 세포이에게 탄약통이 지급되었다. 90명의 세포이중에 85명이 수령을 거부하였다. 이때문에 이들은 영국군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5월 9일에 5년~10년형의 선고를 받았다. 이에 분개한 세포이들은 다음날인 5월 10일에 결집하여 병영을 공격하고 영국군 장교를 사살하였다. 5월 10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국 병사들은 교회에 가거나 비번이 상황이었다. 항쟁이 시작되었다.
항쟁 직전 세포이는 20만 명에 달했으나 영국군의 수는 약 4만명에 불과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무굴황제가 인도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기에 약간의 권위를 인정했다. 따라서 황제인 [8]바하두르 샤 2세는 왕궁에 기거하면서 품위 유지 명목으로 델리 일대에서 소수의 근위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5월 11일 아침 세포이는 델리에 도착하여 [8]바하두르 샤 2세가 있는 왕궁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바하두르 샤 2세 황제에게 무굴제국의 부활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통상적인 청원자로 여겨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세포이가 봉기하였다는 소식이 퍼져나갔고 무기고를 탈취하여 항쟁을 계속해 나갔다.
다음날인 5월 12일 바하두르 샤 2세는 실로 오랫만에 국정회의를 소집했다. 세포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황제는 세포이들의 충성을 요구하며 항쟁을 지지하였다. 5월 16일, 황제는 체포되거나 구금된 영국인 50명을 왕궁 밖에 있던 보리수 나무에서 처형하였다
세포이들은 순식간에 델리를 점령하면서 항쟁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인도의 각 지역은 종파와 토후 제후국의 이해득실로 인하여 무굴제국과 세포이 항쟁을 지지하거나 영국 동인도회사를 지지하는 쪽으로 분열되었다.
항쟁초기에는 세포이들은 기세등등하여 영국군에 승리하였으나 영국군의 반격을 시작되자 명령체계의 구조적인 약점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크림전쟁에 투입되었던 병력과 중국에 주둔해 있던 병력의 일부까지 불러들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영국군은 세포이군과 델리 공방전을 벌인끝에 9월 14일 델리를 탈환하여 점령하였고 바하두르 샤 2세를 체포하였다.
1857년 말 무렵 영국은 교전의 주도권을 갖기 시작했으며 세포이 항쟁은 1858년 7월 20일 괄리로르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진압되었다.
포로로 붙잡힌 세포이는 대포입구에 머리가 위치하도록 묶은 뒤 포탄을 쏴 머리를 폭살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8]바하두르 샤 2세는 폐위하여 영국령 미얀마 양곤지역으로 추방되어 사망하였다. 330년간 지속된 무굴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영국은 직접 인도를 통치하기로 결정하고 영국 동인도회사를 해체하였다.
1877년 영국령 인도제국이 선포되어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제국의 황제가 되어 식민지 배가 본격화했다.
이후 인도는 90년 후인 194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참고문헌]
- 아틀라스 뉴스(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8)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 영국 동인도회사와 벵골 토후국-프랑스 동인도회사의 전투. 이 전투에서의 승리한 영국은 100년간 인도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2] 영국 동인도 회사 : 인도양, 동아시아에 대한 모직물 시장 및 향료 획득 등의 독점 무역을 목적으로 세워진 영국의 회사
[3] 세포이(sepoy) : 영국 동인도 회사에 채용된 인도인 용병.
[4] 나르마다강(Narmada) : 인도 중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
[5] 망갈 판데이(Mangal Pandey, 1827~1857) : 1857 년 3 월 29 일 영국 장교를 공격 한 인도 군인
[6] 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Enfield Pattern 1853 rifle-musket) : 영국의 엔필드 조병창에서 개발된 전장식 소총
[7] 메루트(Meerut) :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도시. 뉴델리에서 북동쪽으로 70km에 위치하며 1857년 세포이 항쟁이 벌어진 도시이다
[8] 바하두르 샤 2세(Bahadur Shah Zafar, 1775년~1862년) : 인도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티무르 황조의 마지막 군주(재위, 1837년 9월 28일~1857년 9월 14일)
영국은 1757년 [1]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와 인도연합군에 승리한 이후 인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은 총독을 파견해 지배하는 대신 [2]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간접통치하고 있었다.
영국 [2]동인도회사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인도인 용병인 [3]세포이를 고용하였다. [3]세포이는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토후국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갈 때 용병으로 참여했으며 지역에 따라 이슬람교, 힌두교등의 다양한 종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계속되는 팽창 정책으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일대로 세포이의 파병을 요구하였다. 이에 파병을 꺼리던 세포이는 영국과 갈등을 빚었고 처우에 대한 불만도 쌓여갔다. 이러한 불만들이 쌓여가는 가운데 새로 지급된 탄약통이 세포이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새롭게 지급된 [6]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 소총은 보다 빠른 장전을 위하여 개별 포장된 탄약통을 사용하였다. 문제는 탄약통의 방수를 위해 종이에 소나 돼지의 지방 입힌 것에서 비롯되었다. 소는 힌두교도들이 신성시하고 돼지는 이슬람교도들이 싫어했다.
힌두교나 이슬람교의 신자였던 세포이들은 이 탄약통을 입으로 물어 뜯어 사용하라는 것은 자신들의 종교를 멸시하는 행위라고 받아들였다.
1857년 3월 29일 제34 벵골인 연대의 세포이였던 [5]망갈 판데이는 탄약통을 수령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5]만갈 판데이는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은 선고받았고 4월 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연대는 해산되었으며 항명에 가담한 세포이는 불명예 제대를 하였다. 이들 대다수는 전국적으로 번진 항쟁에 민간인으로 가담하였다.
실제적인 항쟁은 델리에서 북동쪽 70km에 위치하고 있는 [7]메루트 지역에서 비롯되었다.
4월 24일에 [7]메루트의 동인도회사 소속 90명의 세포이에게 탄약통이 지급되었다. 90명의 세포이중에 85명이 수령을 거부하였다. 이때문에 이들은 영국군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5월 9일에 5년~10년형의 선고를 받았다. 이에 분개한 세포이들은 다음날인 5월 10일에 결집하여 병영을 공격하고 영국군 장교를 사살하였다. 5월 10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국 병사들은 교회에 가거나 비번이 상황이었다. 항쟁이 시작되었다.
항쟁 직전 세포이는 20만 명에 달했으나 영국군의 수는 약 4만명에 불과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무굴황제가 인도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기에 약간의 권위를 인정했다. 따라서 황제인 [8]바하두르 샤 2세는 왕궁에 기거하면서 품위 유지 명목으로 델리 일대에서 소수의 근위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5월 11일 아침 세포이는 델리에 도착하여 [8]바하두르 샤 2세가 있는 왕궁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바하두르 샤 2세 황제에게 무굴제국의 부활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통상적인 청원자로 여겨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세포이가 봉기하였다는 소식이 퍼져나갔고 무기고를 탈취하여 항쟁을 계속해 나갔다.
다음날인 5월 12일 바하두르 샤 2세는 실로 오랫만에 국정회의를 소집했다. 세포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황제는 세포이들의 충성을 요구하며 항쟁을 지지하였다. 5월 16일, 황제는 체포되거나 구금된 영국인 50명을 왕궁 밖에 있던 보리수 나무에서 처형하였다
세포이들은 순식간에 델리를 점령하면서 항쟁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인도의 각 지역은 종파와 토후 제후국의 이해득실로 인하여 무굴제국과 세포이 항쟁을 지지하거나 영국 동인도회사를 지지하는 쪽으로 분열되었다.
항쟁초기에는 세포이들은 기세등등하여 영국군에 승리하였으나 영국군의 반격을 시작되자 명령체계의 구조적인 약점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크림전쟁에 투입되었던 병력과 중국에 주둔해 있던 병력의 일부까지 불러들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영국군은 세포이군과 델리 공방전을 벌인끝에 9월 14일 델리를 탈환하여 점령하였고 바하두르 샤 2세를 체포하였다.
1857년 말 무렵 영국은 교전의 주도권을 갖기 시작했으며 세포이 항쟁은 1858년 7월 20일 괄리로르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진압되었다.
포로로 붙잡힌 세포이는 대포입구에 머리가 위치하도록 묶은 뒤 포탄을 쏴 머리를 폭살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8]바하두르 샤 2세는 폐위하여 영국령 미얀마 양곤지역으로 추방되어 사망하였다. 330년간 지속된 무굴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영국은 직접 인도를 통치하기로 결정하고 영국 동인도회사를 해체하였다.
1877년 영국령 인도제국이 선포되어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제국의 황제가 되어 식민지 배가 본격화했다.
이후 인도는 90년 후인 194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참고문헌]
- 아틀라스 뉴스(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8)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 영국 동인도회사와 벵골 토후국-프랑스 동인도회사의 전투. 이 전투에서의 승리한 영국은 100년간 인도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2] 영국 동인도 회사 : 인도양, 동아시아에 대한 모직물 시장 및 향료 획득 등의 독점 무역을 목적으로 세워진 영국의 회사
[3] 세포이(sepoy) : 영국 동인도 회사에 채용된 인도인 용병.
[4] 나르마다강(Narmada) : 인도 중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
[5] 망갈 판데이(Mangal Pandey, 1827~1857) : 1857 년 3 월 29 일 영국 장교를 공격 한 인도 군인
[6] 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Enfield Pattern 1853 rifle-musket) : 영국의 엔필드 조병창에서 개발된 전장식 소총
[7] 메루트(Meerut) :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도시. 뉴델리에서 북동쪽으로 70km에 위치하며 1857년 세포이 항쟁이 벌어진 도시이다
[8] 바하두르 샤 2세(Bahadur Shah Zafar, 1775년~1862년) : 인도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티무르 황조의 마지막 군주(재위, 1837년 9월 28일~1857년 9월 14일)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베이징 조약은 청나라와 영국, 프랑스, 러시아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은 청나라의 패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서구 열강들의 중국 내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대폭 확장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여러 중요한 양보를 해야 했다. 우선, 영국과 프랑스는 청나라로부터 영구적인 외국 공사관 소재지를 확보하였으며 북경과 톈진 간의 통상과 외교 활동에 있어 상당한 자유를 보장받았다. 또한 청나라는 영국에 대해 아편전쟁 당시 파괴된 영국 공사관 건물의 보상과 전쟁 배상금으로 막대한 은전을 지급하였다.
이와 더불어 청나라는 톈진 항구를 국제 무역항으로 개방하고 영국과 프랑스에게 내륙 진출과 선교 활동을 허용하는 등 사실상 외국 세력의 권한을 확대하는 조치를 받아들였다.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에 홍콩 섬을 내준데 이어 홍콩섬 맞은 편에 있는 [1]주룽반도까지 내주었다.
러시아는 이 조약을 통해 [2]아무르강 이북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 지역은 풍부한 자연자원과 전략적 위치 때문에 19세기 러시아의 극동 확장 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베이징 조약은 중국 근대사에서 굴욕적인 조약 중 하나로 평가되며 청나라의 주권이 크게 훼손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중국 내에서 반외세 감정이 증폭되었고 이후 신흥열강들이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 주룽(Kowloon)반도 : 홍콩의 중북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빅토리아 항을 사이에 두고 홍콩섬과 마주 보고 있다. 오늘날 홍콩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이다. 홍콩은 1997년 7월 1일에 영국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에 공식 반환되었다
[2] 이무르 강(Amur River) :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역할을 하는 큰 강. 베이징 조약(1860년)을 통해 청나라는 러시아에 아무르강 이북 땅에 대한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이 지역이 공식적으로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이 지역은 풍부한 자연자원과 전략적 위치 때문에 19세기 러시아의 극동 확장 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여러 중요한 양보를 해야 했다. 우선, 영국과 프랑스는 청나라로부터 영구적인 외국 공사관 소재지를 확보하였으며 북경과 톈진 간의 통상과 외교 활동에 있어 상당한 자유를 보장받았다. 또한 청나라는 영국에 대해 아편전쟁 당시 파괴된 영국 공사관 건물의 보상과 전쟁 배상금으로 막대한 은전을 지급하였다.
이와 더불어 청나라는 톈진 항구를 국제 무역항으로 개방하고 영국과 프랑스에게 내륙 진출과 선교 활동을 허용하는 등 사실상 외국 세력의 권한을 확대하는 조치를 받아들였다.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에 홍콩 섬을 내준데 이어 홍콩섬 맞은 편에 있는 [1]주룽반도까지 내주었다.
러시아는 이 조약을 통해 [2]아무르강 이북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 지역은 풍부한 자연자원과 전략적 위치 때문에 19세기 러시아의 극동 확장 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베이징 조약은 중국 근대사에서 굴욕적인 조약 중 하나로 평가되며 청나라의 주권이 크게 훼손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중국 내에서 반외세 감정이 증폭되었고 이후 신흥열강들이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 주룽(Kowloon)반도 : 홍콩의 중북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빅토리아 항을 사이에 두고 홍콩섬과 마주 보고 있다. 오늘날 홍콩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이다. 홍콩은 1997년 7월 1일에 영국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에 공식 반환되었다
[2] 이무르 강(Amur River) :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역할을 하는 큰 강. 베이징 조약(1860년)을 통해 청나라는 러시아에 아무르강 이북 땅에 대한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이 지역이 공식적으로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이 지역은 풍부한 자연자원과 전략적 위치 때문에 19세기 러시아의 극동 확장 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청나라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무기력하게 패하고 태평천국운동을 겪은 뒤 국제사회의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군수 공장과 조선소(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 제철소, 방직 공장등을 만들었다. 근대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한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고,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근대적인 학교도 세웠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는 데 힘썼다고 하여 [1]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운동, 신유정변을 거치면서 한족인 [2]증국번, [3]이홍장 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 세력들이 주도하였다.
이시기의 권력 중심은 [4]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5]공친왕이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무운동은 반대세력에 의해 비판과 견제를 받아왔다. 관리의 기업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점등으로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곧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1] 양무(洋務) :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
[2]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3]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제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5]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이 시기에 군수 공장과 조선소(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 제철소, 방직 공장등을 만들었다. 근대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한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고,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근대적인 학교도 세웠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는 데 힘썼다고 하여 [1]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운동, 신유정변을 거치면서 한족인 [2]증국번, [3]이홍장 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 세력들이 주도하였다.
이시기의 권력 중심은 [4]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5]공친왕이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무운동은 반대세력에 의해 비판과 견제를 받아왔다. 관리의 기업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점등으로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곧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1] 양무(洋務) :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
[2]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3]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제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5]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미국 남북 전쟁(American Civil War)은 미국에서 아메리카 합중국과 아메리카 연합국 사이에서 일어난 내전이다.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후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 포격을 시작으로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 결과 남부연합군이 패했고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폐지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후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 포격을 시작으로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 결과 남부연합군이 패했고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폐지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 함풍제는 제2차 아편전쟁(애로호 전쟁) 이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베이징 북쪽에 위치한 열하에 있는 별궁(피서산장)으로 피신해 있었다.
아편전쟁은 이복동생인 공친왕의 주도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음으로써 종결되었지만 상심한 함풍제는 수도인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열하에 남아있었으며 1년 뒤인 1861년 11월 21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함풍제는 사망하기전에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 황권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막기위하여 가까운 황족종친을 배제하고 황실의 먼 종친이거나 고명대신인 이친왕, 정친왕을 비롯하여 숙순, 경수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보정대신 8인을 구성하였다.
이 기미를 알아챈 서태후(함풍제의 후궁)는 소외되어 있던 황족 공친왕을 끌어들여 황제의 시신을 베이징의 자금성으로 운구하던 두 친왕과 숙순 및 그 일당을 체포한다. 두 친왕은 자결명령을 받았고 열하행궁 일체의 실무 책임자인 숙순등은 모두 처형당했다. 결국 함풍제가 지정한 보정대신 8인은 모두 숙청당한다.
이 궁정반란은 신유년에 일어났다하여 신유정변이라 한다. 함풍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서태후의 집권을 열어준 사건이 되었다.
이후 서태후의 어린 아들(당시 6세)은 함풍제에 이어 황제에 등극하는데, 그가 청나라 10대 황제 동치제이다. 서태후와 동태후(함풍제의 두번째 황후)는 태후로서 동치제의 공동섭정이 시작되면서 권력을 잡게 되었다.
특히, 서태후는 1861년부터 1908년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이 청나라를 통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가 죽은지 4년후에 대청제국은 종말을 고했으니 청나라 말기는 거의 서태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함풍제(1831년~1861년) : 중국 청나라 제9대 황제.혁저. 재위 : 1850년~1861년. 묘호는 문종.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4남
* 동치제(1856년~1875년) : 중국 청나라 제10대 황제. 재위 : 1861년~1874년). 묘호는 목종
*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림
* 동태후(자안황태후,1837년~1881년) : 함풍제의 두번째 황후. 처소가 자금성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태후라 불림
*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
* 열하 : 중국 허베이성에 위치한 현재의 청더시를 말하며 청나라 황제의 행궁(피서산장)이 있다.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230km 떨어져 있으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유명해진 지역이기도 하다
아편전쟁은 이복동생인 공친왕의 주도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음으로써 종결되었지만 상심한 함풍제는 수도인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열하에 남아있었으며 1년 뒤인 1861년 11월 21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함풍제는 사망하기전에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 황권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막기위하여 가까운 황족종친을 배제하고 황실의 먼 종친이거나 고명대신인 이친왕, 정친왕을 비롯하여 숙순, 경수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보정대신 8인을 구성하였다.
이 기미를 알아챈 서태후(함풍제의 후궁)는 소외되어 있던 황족 공친왕을 끌어들여 황제의 시신을 베이징의 자금성으로 운구하던 두 친왕과 숙순 및 그 일당을 체포한다. 두 친왕은 자결명령을 받았고 열하행궁 일체의 실무 책임자인 숙순등은 모두 처형당했다. 결국 함풍제가 지정한 보정대신 8인은 모두 숙청당한다.
이 궁정반란은 신유년에 일어났다하여 신유정변이라 한다. 함풍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서태후의 집권을 열어준 사건이 되었다.
이후 서태후의 어린 아들(당시 6세)은 함풍제에 이어 황제에 등극하는데, 그가 청나라 10대 황제 동치제이다. 서태후와 동태후(함풍제의 두번째 황후)는 태후로서 동치제의 공동섭정이 시작되면서 권력을 잡게 되었다.
특히, 서태후는 1861년부터 1908년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이 청나라를 통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가 죽은지 4년후에 대청제국은 종말을 고했으니 청나라 말기는 거의 서태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함풍제(1831년~1861년) : 중국 청나라 제9대 황제.혁저. 재위 : 1850년~1861년. 묘호는 문종.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4남
* 동치제(1856년~1875년) : 중국 청나라 제10대 황제. 재위 : 1861년~1874년). 묘호는 목종
*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림
* 동태후(자안황태후,1837년~1881년) : 함풍제의 두번째 황후. 처소가 자금성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태후라 불림
*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
* 열하 : 중국 허베이성에 위치한 현재의 청더시를 말하며 청나라 황제의 행궁(피서산장)이 있다.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230km 떨어져 있으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유명해진 지역이기도 하다
19세기 중반에 프랑스는 동남아시아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베트남 내 가톨릭 선교사 보호와 경제적 이익을 명분으로 개입하면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프랑스는 1858년 [3]다낭을 공격하며 베트남 [1]응우옌 왕조와 전쟁을 본격화하였고 1859년에는 [2]사이공을 점령하였다. 이후 몇 년간 전쟁이 지속되면서 베트남 남부 지역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결국 베트남은 프랑스와 협상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1862년 6월 5일 제1차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으로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에게 남부 [4]코친차이나 일부 지역을 할양하기로 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첫 번째로 베트남 내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이후 베트남 전역으로 식민지 지배가 확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약에 따라 베트남은 프랑스의 무역을 개방했으며 프랑스 상인들이 특정 항구에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이는 베트남의 경제적 주권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프랑스가 점진적으로 경제적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가 개입한 중요한 명분 중 하나였던 가톨릭 신앙의 자유 보장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베트남은 가톨릭 선교사와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종교 활동을 보장해야 했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 내부에 지속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으며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전쟁 배상금 지급은 [1]응우옌 왕조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고 베트남의 국력이 더욱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에서 본격적으로 식민 통치를 시작하였다. 1867년에 프랑스는 [4]코친차이나 전체를 완전히 점령하며 영토 확장을 지속하였다. 한편, 조약에 반발하는 베트남 내부의 저항으로 반프랑스 운동이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영향력은 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1884년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전락하면서 완전한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사이공 조약은 20세기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식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 응우옌 왕조 (Nguyễn Dynasty) :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다. 베트남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응우옌 왕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 사이공(Saigon) :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며 현재는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로 불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다.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점령하였고 이후 1976년 7월 2일을 기해 호찌민으로 변경하였다
[3] 다낭(Da Nang) : 다낭은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이자 경제 및 관광 중심지이다. 1858년 프랑스가 다낭을 공격하면서 베트남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다낭은 프랑스의 주요 군사 거점이 되었다.
[4] 코친차이나(Cochinchina) :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식민지 통치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과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베트남 남부 지역(호찌민시 및 메콩 델타)으로 발전하여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메콩 델타(Mekong Delta) : 베트남 남서부에 위치한 광대한 삼각주 지역으로 메콩강이 남중국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형성되었다. 베트남 최대의 쌀 생산지이자 풍부한 수자원으로 경제적으로 주요한 지역이다
프랑스는 1858년 [3]다낭을 공격하며 베트남 [1]응우옌 왕조와 전쟁을 본격화하였고 1859년에는 [2]사이공을 점령하였다. 이후 몇 년간 전쟁이 지속되면서 베트남 남부 지역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결국 베트남은 프랑스와 협상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1862년 6월 5일 제1차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으로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에게 남부 [4]코친차이나 일부 지역을 할양하기로 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첫 번째로 베트남 내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이후 베트남 전역으로 식민지 지배가 확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약에 따라 베트남은 프랑스의 무역을 개방했으며 프랑스 상인들이 특정 항구에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이는 베트남의 경제적 주권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프랑스가 점진적으로 경제적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가 개입한 중요한 명분 중 하나였던 가톨릭 신앙의 자유 보장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베트남은 가톨릭 선교사와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종교 활동을 보장해야 했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 내부에 지속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으며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전쟁 배상금 지급은 [1]응우옌 왕조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고 베트남의 국력이 더욱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에서 본격적으로 식민 통치를 시작하였다. 1867년에 프랑스는 [4]코친차이나 전체를 완전히 점령하며 영토 확장을 지속하였다. 한편, 조약에 반발하는 베트남 내부의 저항으로 반프랑스 운동이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영향력은 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1884년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전락하면서 완전한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사이공 조약은 20세기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식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 응우옌 왕조 (Nguyễn Dynasty) :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다. 베트남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응우옌 왕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 사이공(Saigon) :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며 현재는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로 불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다.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점령하였고 이후 1976년 7월 2일을 기해 호찌민으로 변경하였다
[3] 다낭(Da Nang) : 다낭은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이자 경제 및 관광 중심지이다. 1858년 프랑스가 다낭을 공격하면서 베트남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다낭은 프랑스의 주요 군사 거점이 되었다.
[4] 코친차이나(Cochinchina) :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식민지 통치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과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베트남 남부 지역(호찌민시 및 메콩 델타)으로 발전하여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메콩 델타(Mekong Delta) : 베트남 남서부에 위치한 광대한 삼각주 지역으로 메콩강이 남중국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형성되었다. 베트남 최대의 쌀 생산지이자 풍부한 수자원으로 경제적으로 주요한 지역이다
미국 남북전쟁은 1861년 4월에 일어났다.
1862년 7월 22일 링컨 대통령은 그의 각료들에게 역사적인 노예 해방 선언의 초안을 낭독해 보였으며 9월22일 노예해방 선언의 제 2초안을 내각에게 낭독했다. 몇 가지 수정을 가하여 이 선언문은 예비선언으로 발표되었다.
정식 노예해방 선언문은 1863년 1월 1일에 발표되었다.
*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1865년) : 미국의 16대 대통령. 임기 :1861년 ~1865년
* 윌리엄 스워드(William Seward) : 미국 국무장관이며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862년 7월 22일 링컨 대통령은 그의 각료들에게 역사적인 노예 해방 선언의 초안을 낭독해 보였으며 9월22일 노예해방 선언의 제 2초안을 내각에게 낭독했다. 몇 가지 수정을 가하여 이 선언문은 예비선언으로 발표되었다.
정식 노예해방 선언문은 1863년 1월 1일에 발표되었다.
*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1865년) : 미국의 16대 대통령. 임기 :1861년 ~1865년
* 윌리엄 스워드(William Seward) : 미국 국무장관이며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 전투의 격전지였던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열린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링컨 대통령이 한 연설이다.
272 단어에 3분여의 짧은 연설이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이자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문이 되었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 we can not consecrate - we can not hallow -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지금으로부터 여든하고도 일곱 해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 자유의 정신으로 잉태되고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신념이 바쳐진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나라가, 아니 이러한 정신과 신념으로 잉태되고 헌신하는 어느 나라이든지, 과연 오래도록 굳건할 수 있는가 하는 시험대인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전쟁의 거대한 싸움터인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 싸움터의 일부를, 이 곳에서 자신의 삶을 바쳐 바로 그 나라를 살리고자 한 영령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봉헌하기 위함입니다.
리의 이 헌정은 지극히 마땅하고 옳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 땅을 헌정할 수도, 축성할 수도, 신성화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싸웠던 용맹한 전사자와 생존 용사들이 이미 이 곳을 신성한 땅으로
272 단어에 3분여의 짧은 연설이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이자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문이 되었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 we can not consecrate - we can not hallow -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지금으로부터 여든하고도 일곱 해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 자유의 정신으로 잉태되고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신념이 바쳐진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나라가, 아니 이러한 정신과 신념으로 잉태되고 헌신하는 어느 나라이든지, 과연 오래도록 굳건할 수 있는가 하는 시험대인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전쟁의 거대한 싸움터인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 싸움터의 일부를, 이 곳에서 자신의 삶을 바쳐 바로 그 나라를 살리고자 한 영령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봉헌하기 위함입니다.
리의 이 헌정은 지극히 마땅하고 옳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 땅을 헌정할 수도, 축성할 수도, 신성화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싸웠던 용맹한 전사자와 생존 용사들이 이미 이 곳을 신성한 땅으로
병인박해는 1866년(고종 3년) 흥선대원군의 대규모 천주교 탄압을 말하며 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한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며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 신도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살아남은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청나라로 탈출해 천진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고 이는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천주교 탄압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1873년에 종료되었으며 1886년 프랑스와 조선이 국교를 맺고 병인박해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인정하며 추숭 조치로 박해는 마무리된다.
해방 이후인 1968년에는 순교자들을 복자로 추숭하였고 1984년에는 성인으로 추앙하였다.
*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 흥선대원군(1821년~1898년) :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본명은 이하응
* 펠릭스 클레르 리델(1830년~1884) : 프랑스 낭트 출생의 가톨릭 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한국이름은 이복명
* 피에르귀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년~1882년) : 프랑스의 해군 제독. 병인양요 때 조선 공격을 지휘하였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며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 신도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살아남은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청나라로 탈출해 천진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고 이는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천주교 탄압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1873년에 종료되었으며 1886년 프랑스와 조선이 국교를 맺고 병인박해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인정하며 추숭 조치로 박해는 마무리된다.
해방 이후인 1968년에는 순교자들을 복자로 추숭하였고 1984년에는 성인으로 추앙하였다.
*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 흥선대원군(1821년~1898년) :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본명은 이하응
* 펠릭스 클레르 리델(1830년~1884) : 프랑스 낭트 출생의 가톨릭 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한국이름은 이복명
* 피에르귀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년~1882년) : 프랑스의 해군 제독. 병인양요 때 조선 공격을 지휘하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66년(조선 고종 3년) 평양 군민들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에 태워 격침시킨 사건이다.
이 배는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마을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였다. 이에 평양 감사 박규수의 지휘 아래 평양 관민이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고 선원들은 처형하였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이 배는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마을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였다. 이에 평양 감사 박규수의 지휘 아래 평양 관민이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고 선원들은 처형하였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1866년([1]고종 3년)에 [2]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인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가 사망하자, 이를 구실로 프랑스의 [3] 로즈 제독은 함대 7척을 이끌고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수교를 요구했다.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무력으로 대항하며 강화도 곳곳에서 교전이 일어났다. 교전이 계속되자 프랑스군은 더 이상의 교전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철수를 결정했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점령했던 [4] 강화성을 파괴하고 관아에 불을 지르고 [5] 외규장각 의궤, 서적등 각종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후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거세졌고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병인양요는 병인년에 양이(洋夷 : 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요(騷擾)라는 뜻이다.
[1]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2] 흥선대원군(1821년~1898년) :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본명은 이하응
[3] 피에르귀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년~1882년) : 프랑스의 해군 제독
[4] 강화성 :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고려궁지이며 고려시대 몽골 침입 당시에 사용하던 고려 궁궐터
[5] 외규장각 : 조선 정조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무력으로 대항하며 강화도 곳곳에서 교전이 일어났다. 교전이 계속되자 프랑스군은 더 이상의 교전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철수를 결정했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점령했던 [4] 강화성을 파괴하고 관아에 불을 지르고 [5] 외규장각 의궤, 서적등 각종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후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거세졌고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병인양요는 병인년에 양이(洋夷 : 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요(騷擾)라는 뜻이다.
[1]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2] 흥선대원군(1821년~1898년) :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본명은 이하응
[3] 피에르귀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년~1882년) : 프랑스의 해군 제독
[4] 강화성 :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고려궁지이며 고려시대 몽골 침입 당시에 사용하던 고려 궁궐터
[5] 외규장각 : 조선 정조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
1868년 9월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 [1]이사벨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폐위되었다. 1869년 스페인 혁명정부는 새로운 왕위 계승자를 물색하였다. 후보를 탐색하다가 1870년 프로이센 왕국의 [2]빌헬름 1세 국왕의 사촌인 레오폴트에게 왕위를 제안하였다.
레오폴트는 처음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작 프로이센 왕국의 [2]빌헬름 1세는 혁명후 내전상태인 스페인으로 가는 것에 반대했다. 또한 프랑스는 레오폴트가 스페인의 국왕이 되면 스페인과 독일에 둘러쌓이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대의 뜻을 강력히 전달하였다. 결국 1870년 7월 11일 레오폴트는 스페인 왕위 수락을 철회하였다.
프랑스 외교관이 스페인 왕위 포기의 재확인을 위하여 휴양중이던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에게 요구한 사건을 [3]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전달했다. 전보를 받은 [3]비스마르크는 내용을 편집하여 언론에 흘렸다. 일명 [4]엠스전보사건으로 프로이센과 프랑스 양국은 서로 분노하였고 여론이 들끓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감정이 악화되자 프랑스의 [5]나폴레옹 3세는 1870년 7월 19일에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등 유럽 열강이 프랑스에 동조하지 않도록 외교정책에 주력했으며 그 결과로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상태가 되었다.
독일 남부 제후 국가들은 프로이센편으로 참전하면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뭉친 독일과 프랑스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실전 경험까지 쌓은 프로이센군에게 연속적으로 패배하였고, 이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1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참전하여 진군했으나 [6]스당전투에서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의 패전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1870년 9월 4일 프랑스 제2제정은 붕괴되고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3세는 이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프로이센은 여세를 몰아 9월 15일 파리외곽에 당도하여 [9]알자스-로렌지역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파리 방어사령관인 [7]루이 쥘 트로쉬는 이를 거부하고 저항했으나 9월 18일 파리가 포위당했다.
1871년 1월 18일 프랑스의 [10]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2]빌헬름 1세는 초대황제로 즉위하고 독일제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수상이자 독일제국의 수상이 되었다.
포위된 파리는 비참한 겨울을 보내고 1871년 1월 28일 항복했고, 휴전협상이 시작되어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프랑스는 50억 프랑을 배상해야 했으며, 알자스-로렌지역을 넘겨주었다. 또한 배상금 완납전까지 프랑스 북부지역에 독일군이 주둔했다.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굴욕, 분노, 상실감과 복수심으로 반독 감정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까지 적대적인 사이가 되었다. 독일은 통일이 완성되어 유럽내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1] 이사벨 2세(Isabel II of Spain, 1830년~1904년) :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유일한 여왕. 여왕이 쫓겨난 후 스페인은 왕위계승의 내분을 겪다가 결국은 이사벨 2세의 왕세자인 알폰소 12세가 즉위하여 스페인은 보르봉 왕조를 계승한다.
[2] 빌헬름 1세(William I,1797년~1888년) : 프로이센의 국왕(1861년~1888년). 독일 제국의 황제(1871년~1888년)
[3]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년~1898년) : 프로이센 수상(1862~1890년). 통일독일제국 수상(1871년~1890년)
[4] 엠스전보사건(Ems Dispatch) :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와 독일 주재 프랑스 대사 사이에 있었던 일을 프로이센 수상 비스마르크에게 알리는 내부 전보를 비스마르크가 의도적으로 편집하여 언론에 배포한 사건
[5]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1808년~1873년) :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초대 대통령(재임,1848년 12월 20일~1852년 12월 2일)이자 프랑스 제2제국의 유일한 황제(재위,1852년 12월 2일~1870년 9월 4일)
[6] 스당(Sedan) : 프랑스 아르덴주에 위치한 코뮌(프랑스 공화국의 최하위 행정구역)중 하나
[7] 루이 쥘 트로쉬(Louis Jules Trochu, 1815년~1896년) : 프랑스의 군 장교이자 정치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중 국민방위정부 수반
[8]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 1797년~1877년) : 프랑스 제3공화국 임시정부 수반. 제2대 대통령(1871년 8월 31일~1873년 5월 24일)
[9]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 : 프랑스와 독일사이에 위치한 프랑스 행정 구역. 프랑스와 독일사이의 주요한 분쟁지역
[10] 베르사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 : 프랑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km 가량 떨어진 베르사유 시에 있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건설한 궁전.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루이 14세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레오폴트는 처음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작 프로이센 왕국의 [2]빌헬름 1세는 혁명후 내전상태인 스페인으로 가는 것에 반대했다. 또한 프랑스는 레오폴트가 스페인의 국왕이 되면 스페인과 독일에 둘러쌓이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대의 뜻을 강력히 전달하였다. 결국 1870년 7월 11일 레오폴트는 스페인 왕위 수락을 철회하였다.
프랑스 외교관이 스페인 왕위 포기의 재확인을 위하여 휴양중이던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에게 요구한 사건을 [3]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전달했다. 전보를 받은 [3]비스마르크는 내용을 편집하여 언론에 흘렸다. 일명 [4]엠스전보사건으로 프로이센과 프랑스 양국은 서로 분노하였고 여론이 들끓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감정이 악화되자 프랑스의 [5]나폴레옹 3세는 1870년 7월 19일에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등 유럽 열강이 프랑스에 동조하지 않도록 외교정책에 주력했으며 그 결과로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상태가 되었다.
독일 남부 제후 국가들은 프로이센편으로 참전하면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뭉친 독일과 프랑스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실전 경험까지 쌓은 프로이센군에게 연속적으로 패배하였고, 이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1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참전하여 진군했으나 [6]스당전투에서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의 패전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1870년 9월 4일 프랑스 제2제정은 붕괴되고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3세는 이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프로이센은 여세를 몰아 9월 15일 파리외곽에 당도하여 [9]알자스-로렌지역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파리 방어사령관인 [7]루이 쥘 트로쉬는 이를 거부하고 저항했으나 9월 18일 파리가 포위당했다.
1871년 1월 18일 프랑스의 [10]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2]빌헬름 1세는 초대황제로 즉위하고 독일제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수상이자 독일제국의 수상이 되었다.
포위된 파리는 비참한 겨울을 보내고 1871년 1월 28일 항복했고, 휴전협상이 시작되어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프랑스는 50억 프랑을 배상해야 했으며, 알자스-로렌지역을 넘겨주었다. 또한 배상금 완납전까지 프랑스 북부지역에 독일군이 주둔했다.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굴욕, 분노, 상실감과 복수심으로 반독 감정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까지 적대적인 사이가 되었다. 독일은 통일이 완성되어 유럽내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1] 이사벨 2세(Isabel II of Spain, 1830년~1904년) :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유일한 여왕. 여왕이 쫓겨난 후 스페인은 왕위계승의 내분을 겪다가 결국은 이사벨 2세의 왕세자인 알폰소 12세가 즉위하여 스페인은 보르봉 왕조를 계승한다.
[2] 빌헬름 1세(William I,1797년~1888년) : 프로이센의 국왕(1861년~1888년). 독일 제국의 황제(1871년~1888년)
[3]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년~1898년) : 프로이센 수상(1862~1890년). 통일독일제국 수상(1871년~1890년)
[4] 엠스전보사건(Ems Dispatch) :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와 독일 주재 프랑스 대사 사이에 있었던 일을 프로이센 수상 비스마르크에게 알리는 내부 전보를 비스마르크가 의도적으로 편집하여 언론에 배포한 사건
[5]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1808년~1873년) :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초대 대통령(재임,1848년 12월 20일~1852년 12월 2일)이자 프랑스 제2제국의 유일한 황제(재위,1852년 12월 2일~1870년 9월 4일)
[6] 스당(Sedan) : 프랑스 아르덴주에 위치한 코뮌(프랑스 공화국의 최하위 행정구역)중 하나
[7] 루이 쥘 트로쉬(Louis Jules Trochu, 1815년~1896년) : 프랑스의 군 장교이자 정치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중 국민방위정부 수반
[8]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 1797년~1877년) : 프랑스 제3공화국 임시정부 수반. 제2대 대통령(1871년 8월 31일~1873년 5월 24일)
[9]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 : 프랑스와 독일사이에 위치한 프랑스 행정 구역. 프랑스와 독일사이의 주요한 분쟁지역
[10] 베르사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 : 프랑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km 가량 떨어진 베르사유 시에 있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건설한 궁전.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루이 14세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신미양요는 미국이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해 벌인 무력 침략 사건이다. '신미'는 간지 연도인 1871년을 의미하고, '양요'는 서양 오랑캐들이 일으킨 난리를 뜻한다.
사건의 발단은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었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 정부의 허가 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침입했으며, 통상을 강요하고 무력으로 대응하다 조선 관민의 저항으로 불에 타 침몰되었다. 이후 미국은 이를 빌미로 조선의 사과와 개항을 요구하며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이에 미국은 무력 시위를 통해 조선을 굴복시키려 했다.
1871년 5월 14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항한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1]존 로저스 제독은 대규모 병력과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인근 조선 해역에 나타났다. 그는 통상 요구 및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 규명을 위해 조선 정부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조선은 강경한 쇄국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고 외국 선박의 접근을 금지한 상황이었다. 결국 미군은 6월 1일에 강화도에 접근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미군은 6월 10일 [6]초지진, [7]덕진진 등을 차례로 점령한 후 가장 강력한 방어선이던 [2]광성보에 도달했다. 광성보 전투는 신미양요의 최대 격전지로 [3]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결사항전을 펼쳤다. 그러나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화력 앞에 무너졌고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 다수의 조선군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조선군 어재연 [5]장군기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는데 미국 [4]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다가 2007년부터 국내로 반환되어 강화전쟁박물관에 보관되었었다. 그러다 2024년 3월에 다시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반납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본격적인 개항 요구를 준비했지만 조선 정부는 끝까지 교섭을 거부하고 완강한 쇄국 정책으로 아무런 협상을 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강화하였다.
신미양요는 조선이 서구 열강의 무력 개항 압력에 정면으로 저항했던 사건으로 당시 조선의 군사력 한계와 근대화의 필요성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국권 수호를 위한 민족적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한말 의병운동 등 근대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 되었다.
[1] 존 로저스(John Rodgers,1812년 8월 8일 ~ 1882년 5월 5일) : 남북 전쟁 당시 북군 해군으로 활약한 미국의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해군 소장이었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군 지휘관이었다
[2] 광성보(廣城堡)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효종 9년(1658)에 강화도 방비를 위해 해안가에 설치된 12진보중 하나
[3] 어재연(魚在淵, 1823년~1871년)은 조선 말기의 무신.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미군과 치열한 전투중에 전사하였다. 그해 5월 3일에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4] 아나폴리스(Annapolis) : 미국 메릴랜드주의 주도이다. 미국 해군사관학교의 소재지
[5] 장군기 :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수비하던 진무영 중군 어재연이 사용한 군기로 일명 수자기(帥字旗)로도 알려져 있다. '수(帥)'는 '장수, '장군', '우두머리' 등을 상징하는 뜻을 갖고 있다
[6] 초지진(草芝鎭)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하고 1679년 조선 숙종때 성으로 지은 요새이다. 1971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7] 덕진진(德津鎭)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조선시대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1971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었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 정부의 허가 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침입했으며, 통상을 강요하고 무력으로 대응하다 조선 관민의 저항으로 불에 타 침몰되었다. 이후 미국은 이를 빌미로 조선의 사과와 개항을 요구하며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이에 미국은 무력 시위를 통해 조선을 굴복시키려 했다.
1871년 5월 14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항한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1]존 로저스 제독은 대규모 병력과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인근 조선 해역에 나타났다. 그는 통상 요구 및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 규명을 위해 조선 정부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조선은 강경한 쇄국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고 외국 선박의 접근을 금지한 상황이었다. 결국 미군은 6월 1일에 강화도에 접근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미군은 6월 10일 [6]초지진, [7]덕진진 등을 차례로 점령한 후 가장 강력한 방어선이던 [2]광성보에 도달했다. 광성보 전투는 신미양요의 최대 격전지로 [3]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결사항전을 펼쳤다. 그러나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화력 앞에 무너졌고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 다수의 조선군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조선군 어재연 [5]장군기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는데 미국 [4]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다가 2007년부터 국내로 반환되어 강화전쟁박물관에 보관되었었다. 그러다 2024년 3월에 다시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반납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본격적인 개항 요구를 준비했지만 조선 정부는 끝까지 교섭을 거부하고 완강한 쇄국 정책으로 아무런 협상을 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강화하였다.
신미양요는 조선이 서구 열강의 무력 개항 압력에 정면으로 저항했던 사건으로 당시 조선의 군사력 한계와 근대화의 필요성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국권 수호를 위한 민족적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한말 의병운동 등 근대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 되었다.
[1] 존 로저스(John Rodgers,1812년 8월 8일 ~ 1882년 5월 5일) : 남북 전쟁 당시 북군 해군으로 활약한 미국의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해군 소장이었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군 지휘관이었다
[2] 광성보(廣城堡)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효종 9년(1658)에 강화도 방비를 위해 해안가에 설치된 12진보중 하나
[3] 어재연(魚在淵, 1823년~1871년)은 조선 말기의 무신.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미군과 치열한 전투중에 전사하였다. 그해 5월 3일에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4] 아나폴리스(Annapolis) : 미국 메릴랜드주의 주도이다. 미국 해군사관학교의 소재지
[5] 장군기 :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수비하던 진무영 중군 어재연이 사용한 군기로 일명 수자기(帥字旗)로도 알려져 있다. '수(帥)'는 '장수, '장군', '우두머리' 등을 상징하는 뜻을 갖고 있다
[6] 초지진(草芝鎭)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하고 1679년 조선 숙종때 성으로 지은 요새이다. 1971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7] 덕진진(德津鎭)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조선시대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1971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19세기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 통치 아래 있었으며, 필리핀 원주민들은 심각한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었다. 특히 [2]포로스라는 강제 노동 제도와 과도한 세금 부과로 인해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또한, 1868년 스페인 본국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며 필리핀에서도 개혁의 기대가 있었지만, 보수적인 스페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식민 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필리핀인 군인과 노동자들에게 주어졌던 세금 감면 등의 특혜가 철회되었다. 이는 군부와 노동 계층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72년 1월 20일 밤, [1]카비테 해군 조선소의 필리핀인 군인들과 노동자들이 스페인 식민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조선소와 일부 군사 시설을 점령하려 계획했지만 사전에 [3]마누엘 솔라노라는 스페인 장교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스페인 군대는 신속히 대응하여 반란군을 제압하였다. 이후 필리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스페인 정부는 반란에 가담한 군인과 노동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다. 또한 필리핀 독립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반란과 관련이 없던 필리핀 [4]고모부르자 사제인 마리아노 고메스(Mariano Góm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gos), 하신토 삼오라(Jacinto Zamora)를 반역죄로 몰아 1872년 2월 17일 마닐라의 바고움바얀(Bagumbayan)광장에서 공개 처형하였다. 이들은 필리핀의 독립운동에 깊은 영향을 준 인물들로 그들의 처형은 민족주의 감정을 더욱 고조시켰다.
카비테 반란과 [4]고모부르자 사제 처형은 필리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필리핀 지식인 계층과 개혁주의자들은 스페인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을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1896년 필리핀 혁명으로 이어졌다.
카비테 반란은 단순한 군사적 봉기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필리핀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스페인 당국의 강경 대응은 필리핀 민족주의자들의 저항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으며, 이후 필리핀의 독립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반란은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불만에서 비롯된 군사 반란이었지만, 스페인 정부가 이를 과장하고 가혹하게 진압하면서 필리핀 국민들에게 스페인 통치의 부당함을 각인시켰다. 결과적으로 카비테 반란은 필리핀 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1] 카비테(Cavite) : 필리핀 루손섬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
[2] 포로스(Polo y Servicios) : 스페인 식민지 시대 필리핀에서 16~60세의 남성이 일정 기간 강제 노동에 동원되던 의무 노동 제도
[3] 마누엘 솔라노(Manuel Solano) : 카비테 반란 당시 스페인 식민 정부에 반란 계획을 밀고하여 스페인군이 사전에 대비하고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스페인 장교
[4] 고모부르자(Gomburza) : 카비테 반란 이후 스페인 식민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된 필리핀의 세 명의 가톨릭 사제 마리아노 고메스(Mariano Góm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gos), 하신토 삼오라(Jacinto Zamora)를 지칭하며, 이들의 처형은 필리핀 독립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868년 스페인 본국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며 필리핀에서도 개혁의 기대가 있었지만, 보수적인 스페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식민 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필리핀인 군인과 노동자들에게 주어졌던 세금 감면 등의 특혜가 철회되었다. 이는 군부와 노동 계층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72년 1월 20일 밤, [1]카비테 해군 조선소의 필리핀인 군인들과 노동자들이 스페인 식민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조선소와 일부 군사 시설을 점령하려 계획했지만 사전에 [3]마누엘 솔라노라는 스페인 장교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스페인 군대는 신속히 대응하여 반란군을 제압하였다. 이후 필리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스페인 정부는 반란에 가담한 군인과 노동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다. 또한 필리핀 독립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반란과 관련이 없던 필리핀 [4]고모부르자 사제인 마리아노 고메스(Mariano Góm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gos), 하신토 삼오라(Jacinto Zamora)를 반역죄로 몰아 1872년 2월 17일 마닐라의 바고움바얀(Bagumbayan)광장에서 공개 처형하였다. 이들은 필리핀의 독립운동에 깊은 영향을 준 인물들로 그들의 처형은 민족주의 감정을 더욱 고조시켰다.
카비테 반란과 [4]고모부르자 사제 처형은 필리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필리핀 지식인 계층과 개혁주의자들은 스페인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을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1896년 필리핀 혁명으로 이어졌다.
카비테 반란은 단순한 군사적 봉기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필리핀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스페인 당국의 강경 대응은 필리핀 민족주의자들의 저항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으며, 이후 필리핀의 독립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반란은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불만에서 비롯된 군사 반란이었지만, 스페인 정부가 이를 과장하고 가혹하게 진압하면서 필리핀 국민들에게 스페인 통치의 부당함을 각인시켰다. 결과적으로 카비테 반란은 필리핀 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1] 카비테(Cavite) : 필리핀 루손섬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
[2] 포로스(Polo y Servicios) : 스페인 식민지 시대 필리핀에서 16~60세의 남성이 일정 기간 강제 노동에 동원되던 의무 노동 제도
[3] 마누엘 솔라노(Manuel Solano) : 카비테 반란 당시 스페인 식민 정부에 반란 계획을 밀고하여 스페인군이 사전에 대비하고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스페인 장교
[4] 고모부르자(Gomburza) : 카비테 반란 이후 스페인 식민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된 필리핀의 세 명의 가톨릭 사제 마리아노 고메스(Mariano Góm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gos), 하신토 삼오라(Jacinto Zamora)를 지칭하며, 이들의 처형은 필리핀 독립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사이공 조약은 프랑스가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고 베트남 남부의 식민지 지배를 공식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베트남 북부에서도 프랑스의 상업적·정치적 개입을 허용하는 조치들이 포함되었으며 결국 베트남 전역이 프랑스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1862년 제1차 사이공 조약을 통해 베트남이 [2]사이공과 남부 일부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넘어 [3]코친차이나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지속했다.
1867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여 [3]코친차이나 전체를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었고 이후 북부 베트남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러던 중 1873년, 프랑스 해군의 [4]프란시스 가르니에가 하노이를 침공하여 프랑스의 북부 진출이 현실화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1]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와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결국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 코친차이나 전역에 대한 지배를 공식화하였다. 제1차 사이공 조약에서는 일부 지역만 프랑스에 할양되었지만 이번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의 통치권이 베트남 남부 전체로 확대되었다. 이로써 코친차이나는 프랑스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으며 베트남의 주권은 더욱 약화되었다.
또한 베트남의 독립을 명목상 인정하는 조항이 포함되었지만 이는 형식적인 선언에 불과했다. 즉, 기존의 속국 관계를 유지하던 당시 청나라의 조공 체계가 폐지되고 베트남이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된다고 명시되었지만 이는 베트남을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한 조치였다. 오히려 베트남이 청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프랑스의 간섭이 더욱 강화될 수 밖에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프랑스는 조약을 통해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이권을 확대하였다. 조약에 따라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 베트남의 주요 항구가 프랑스 상인들에게 개방되었으며 프랑스는 이를 통해 베트남 내 무역을 장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공식적으로 프랑스군은 하노이에서 철수하기로 했지만 이는 단기적인 조치에 불과했으며 이후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 북부를 통제하기 위한 전략을 추진했다.
제2차 사이공 조약은 프랑스가 베트남의 식민 지배를 확고하게 다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베트남 남부를 완전히 통제하는 동시에 북부 지역에서도 경제적·정치적 개입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이후 베트남이 완전히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1] 응우옌 왕조 (Nguyễn Dynasty) :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다. 베트남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응우옌 왕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 사이공(Saigon) :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며 현재는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로 불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다.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점령하였고 이후 1976년 7월 2일을 기해 호찌민으로 변경하였다
[3] 코친차이나(Cochinchina) :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식민지 통치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과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베트남 남부 지역(호찌민시 및 메콩 델타)으로 발전하여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메콩 델타(Mekong Delta) : 베트남 남서부에 위치한 광대한 삼각주 지역으로 메콩강이 남중국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형성되었다. 베트남 최대의 쌀 생산지이자 풍부한 수자원으로 경제적으로 주용한 지역이다.
[4] 프란시스 가르니에(Francis Garnier, 1839년 7월 25일~1873년 12월 21) : 19세기 프랑스의 해군 장교이자 탐험가로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과 식민지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메콩강 탐사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정복 과정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하노이에서 베트남군과 중국 용병(흑기군)으로 이루어진 전투에서 사망
1862년 제1차 사이공 조약을 통해 베트남이 [2]사이공과 남부 일부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넘어 [3]코친차이나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지속했다.
1867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여 [3]코친차이나 전체를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었고 이후 북부 베트남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러던 중 1873년, 프랑스 해군의 [4]프란시스 가르니에가 하노이를 침공하여 프랑스의 북부 진출이 현실화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1]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와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결국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 코친차이나 전역에 대한 지배를 공식화하였다. 제1차 사이공 조약에서는 일부 지역만 프랑스에 할양되었지만 이번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의 통치권이 베트남 남부 전체로 확대되었다. 이로써 코친차이나는 프랑스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으며 베트남의 주권은 더욱 약화되었다.
또한 베트남의 독립을 명목상 인정하는 조항이 포함되었지만 이는 형식적인 선언에 불과했다. 즉, 기존의 속국 관계를 유지하던 당시 청나라의 조공 체계가 폐지되고 베트남이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된다고 명시되었지만 이는 베트남을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한 조치였다. 오히려 베트남이 청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프랑스의 간섭이 더욱 강화될 수 밖에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프랑스는 조약을 통해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이권을 확대하였다. 조약에 따라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 베트남의 주요 항구가 프랑스 상인들에게 개방되었으며 프랑스는 이를 통해 베트남 내 무역을 장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공식적으로 프랑스군은 하노이에서 철수하기로 했지만 이는 단기적인 조치에 불과했으며 이후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 북부를 통제하기 위한 전략을 추진했다.
제2차 사이공 조약은 프랑스가 베트남의 식민 지배를 확고하게 다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베트남 남부를 완전히 통제하는 동시에 북부 지역에서도 경제적·정치적 개입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이후 베트남이 완전히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1] 응우옌 왕조 (Nguyễn Dynasty) :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다. 베트남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응우옌 왕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 사이공(Saigon) :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며 현재는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로 불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다.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점령하였고 이후 1976년 7월 2일을 기해 호찌민으로 변경하였다
[3] 코친차이나(Cochinchina) :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식민지 통치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과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베트남 남부 지역(호찌민시 및 메콩 델타)으로 발전하여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메콩 델타(Mekong Delta) : 베트남 남서부에 위치한 광대한 삼각주 지역으로 메콩강이 남중국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형성되었다. 베트남 최대의 쌀 생산지이자 풍부한 수자원으로 경제적으로 주용한 지역이다.
[4] 프란시스 가르니에(Francis Garnier, 1839년 7월 25일~1873년 12월 21) : 19세기 프랑스의 해군 장교이자 탐험가로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과 식민지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메콩강 탐사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정복 과정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하노이에서 베트남군과 중국 용병(흑기군)으로 이루어진 전투에서 사망
동중국해 남단의 류큐 제도를 영토로 하는 [1]류큐국은 일본과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독립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이 1609년 류큐 침공이후 [2]사쓰마번의 속국으로 전체 실효지배는 아니어도 명목상 지배를 하고 있었다.
1871년 10월 18일, [1]류큐왕국의 선원 66명이 태풍으로 타이완 남부에 표류하였다. 그리고 상륙한 곳은 [3]파이완족 원주민 지역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54명이 살해당했다. 남은 생존자들은 당시 청나라 정부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 일본은 청나라에 항의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중화문화권 밖의 민족이라 책임질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시 타이완은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청 정부는 대만의 남부 산악 지역의 원주민 사회는 중화문화권 밖이라 직접적인 지배를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이 일을 류큐인에 대한 외국인의 침해로 간주하고 이를 구실로 대만 원주민 지역에 무력 개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874년 5월 5일, 일본은 약 3,600명의 병력을 타이완 남부로 파병했다. 이는 일본이 [4]메이지 유신이후 해외에서 처음 벌인 군사 작전이었다. 일본군은 타이완 남부의 [5]모란사 지역을 중심으로 [3]파이완족과 충돌했다. 전투는 치열했으나 일본은 현대식 무기와 조직된 병력으로 일방적인 승리로 7월 1일 전투는 끝났다.
일본의 군사 행동에 대해 청나라는 군사 수천명을 타이완에 파병하였고, 영국의 중재로 일본과 협상햐였다. 협상결과 청나라는 일본이 대만에 출병한 사실이 자국민 보호 조치였음을 인정하여 보상금 50만을 지불하고, 대만 남부 원주민 지역을 좀 더 적극적으로 통치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 전투를 통해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고, 청나라는 통치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타이완에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4]메이지유신 이후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대외 확장의 첫 사례였으며 류큐국을 일본에 합병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는 약점을 드러내어 이후 청일전쟁 결과로 타이완을 넘겨주는 흐름을 형성했다. 그리고 타이완 원주민 사회에 외부 세력의 강제적 통치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 류큐국 : 1429s년부터 1879년까지 오키나와 제도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독립 왕국이다. 중국과 일본 모두에 조공을 바치며 해상 무역 중심지로 번영했다. 1879년 일본에 의해 병합되어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2] 사쓰마 번 : 일본 에도시대 규슈 남부의 사쓰마 국. 현재의 가고시마현 전역과 미야자키현의 남서부에 속해 있다
[3] 파이완족(排灣族, Paiwan people) : 타이완 남부에 거주하는 원주민으로 고산족의 한 종족
[4]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 1868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근대화 개혁으로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로 전환하면서 정치, 사회, 경제, 군사 전반에 걸친 근대 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5] 모란사(牡丹社) : 현재의 대만의 핑둥현
1871년 10월 18일, [1]류큐왕국의 선원 66명이 태풍으로 타이완 남부에 표류하였다. 그리고 상륙한 곳은 [3]파이완족 원주민 지역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54명이 살해당했다. 남은 생존자들은 당시 청나라 정부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 일본은 청나라에 항의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중화문화권 밖의 민족이라 책임질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시 타이완은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청 정부는 대만의 남부 산악 지역의 원주민 사회는 중화문화권 밖이라 직접적인 지배를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이 일을 류큐인에 대한 외국인의 침해로 간주하고 이를 구실로 대만 원주민 지역에 무력 개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874년 5월 5일, 일본은 약 3,600명의 병력을 타이완 남부로 파병했다. 이는 일본이 [4]메이지 유신이후 해외에서 처음 벌인 군사 작전이었다. 일본군은 타이완 남부의 [5]모란사 지역을 중심으로 [3]파이완족과 충돌했다. 전투는 치열했으나 일본은 현대식 무기와 조직된 병력으로 일방적인 승리로 7월 1일 전투는 끝났다.
일본의 군사 행동에 대해 청나라는 군사 수천명을 타이완에 파병하였고, 영국의 중재로 일본과 협상햐였다. 협상결과 청나라는 일본이 대만에 출병한 사실이 자국민 보호 조치였음을 인정하여 보상금 50만을 지불하고, 대만 남부 원주민 지역을 좀 더 적극적으로 통치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 전투를 통해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고, 청나라는 통치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타이완에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4]메이지유신 이후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대외 확장의 첫 사례였으며 류큐국을 일본에 합병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는 약점을 드러내어 이후 청일전쟁 결과로 타이완을 넘겨주는 흐름을 형성했다. 그리고 타이완 원주민 사회에 외부 세력의 강제적 통치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 류큐국 : 1429s년부터 1879년까지 오키나와 제도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독립 왕국이다. 중국과 일본 모두에 조공을 바치며 해상 무역 중심지로 번영했다. 1879년 일본에 의해 병합되어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2] 사쓰마 번 : 일본 에도시대 규슈 남부의 사쓰마 국. 현재의 가고시마현 전역과 미야자키현의 남서부에 속해 있다
[3] 파이완족(排灣族, Paiwan people) : 타이완 남부에 거주하는 원주민으로 고산족의 한 종족
[4]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 1868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근대화 개혁으로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로 전환하면서 정치, 사회, 경제, 군사 전반에 걸친 근대 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5] 모란사(牡丹社) : 현재의 대만의 핑둥현
윤요호 사건은 일본이 조선의 문호를 강제로 열기 위해 계획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강화도 사건으로도 불린다. 이 사건은 이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 체결)로 이어지며 조선 근대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외세의 접촉을 꺼리고 있었고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며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고 있었다. 일본은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조선에 개항을 유도했으나 거부당하자 무력 도발을 계획하였다.
1875년 5월 25일에 일본 해군의 [1]운요호가 부산에 도착했다. 뒤를 이어 6월 12일에 [2]다이니테이보호가 부산에 당도했다. 이 두 척의 함선은 영국제 함포가 장착된 목제 소형 범선으로 부산 앞에서 포격 연습을 하며 무력 시위를 벌였고 심지어 운요호는 동해안을 측량하고 함경도 원상항 입구인 영흥만까지 침투하여 상륙하기도 했다.
1875년 9월 20일 운요호는 강화도 초지진까지 접근했고 이를 위협으로 간주한 조선 수비군이 포격을 가했다. 다음날 21일 일본군은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공격하여 포대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22일에는 [3]영종진을 기습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군 35명이 사망하고 16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 등을 약탈당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피해는 단 두 명의 부상자에 불과했다. 이후 운요호는 나가사키로 귀환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조선의 선제공격으로 몰고 가며 강력하게 항의했고 배상과 개항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열세였기 때문에 강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1876년 2월,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조선을 자주국으로 규정하며 일본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에게 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을 부여하고 항구를 개방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윤요호 사건은 조선이 근대 국제 질서로 강제로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은 이를 기회로 삼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1] 운요호 : 일본이 영국에서 구입한 묵제 범선으로 일본 해군에 편입된 군함
[2] 다이니테이보호: 일본이 영국에서 구입한 목제 범선으로 일본 해군에 편입된 군함
[3] 영종진 : 조선 시대에 강화도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영종도에 설치된 해안 요새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외세의 접촉을 꺼리고 있었고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며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고 있었다. 일본은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조선에 개항을 유도했으나 거부당하자 무력 도발을 계획하였다.
1875년 5월 25일에 일본 해군의 [1]운요호가 부산에 도착했다. 뒤를 이어 6월 12일에 [2]다이니테이보호가 부산에 당도했다. 이 두 척의 함선은 영국제 함포가 장착된 목제 소형 범선으로 부산 앞에서 포격 연습을 하며 무력 시위를 벌였고 심지어 운요호는 동해안을 측량하고 함경도 원상항 입구인 영흥만까지 침투하여 상륙하기도 했다.
1875년 9월 20일 운요호는 강화도 초지진까지 접근했고 이를 위협으로 간주한 조선 수비군이 포격을 가했다. 다음날 21일 일본군은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공격하여 포대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22일에는 [3]영종진을 기습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군 35명이 사망하고 16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 등을 약탈당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피해는 단 두 명의 부상자에 불과했다. 이후 운요호는 나가사키로 귀환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조선의 선제공격으로 몰고 가며 강력하게 항의했고 배상과 개항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열세였기 때문에 강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1876년 2월,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조선을 자주국으로 규정하며 일본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에게 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을 부여하고 항구를 개방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윤요호 사건은 조선이 근대 국제 질서로 강제로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은 이를 기회로 삼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1] 운요호 : 일본이 영국에서 구입한 묵제 범선으로 일본 해군에 편입된 군함
[2] 다이니테이보호: 일본이 영국에서 구입한 목제 범선으로 일본 해군에 편입된 군함
[3] 영종진 : 조선 시대에 강화도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영종도에 설치된 해안 요새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는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으로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이라고도 불린다.
이 조약은 1875년 9월 일본 군함 [1]운요호가 강화해협에 무단 침입하여 조선군과 교전한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체결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을 일본과 동등한 자주국으로 규정(제1조)하여 청과의 전통적인 조공·책봉 관계를 부정하였다.
둘째, 부산항 외에 인천과 원산을 개항하여 일본 상인과 선박의 자유로운 왕래를 허용하였다.
셋째, 개항장에서 일본인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하고 치외법권(제10조)을 인정하여 일본인이 조선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일본 영사 재판권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였다.
넷째, 일본은 조선 연안에서의 측량권을 획득하여 군사·지리 정보를 수집할 수 있게 되었다.
조일수호조규는 형식상 양국 간의 수호·통상 조약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고 경제적·군사적 침투를 합법화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근대적 국제조약 체제에 편입되는 동시에 외세의 압력과 침탈에 직접 노출되는 계기를 맞이하였고 서구 열강과의 조약 체결로 이어지는 문호 개방의 출발점이 되었다.
[1] 운요호(雲揚號) : 일본이 영국에서 구입한 묵제 범선으로 일본 해군에 편입된 군함
이 조약은 1875년 9월 일본 군함 [1]운요호가 강화해협에 무단 침입하여 조선군과 교전한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체결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을 일본과 동등한 자주국으로 규정(제1조)하여 청과의 전통적인 조공·책봉 관계를 부정하였다.
둘째, 부산항 외에 인천과 원산을 개항하여 일본 상인과 선박의 자유로운 왕래를 허용하였다.
셋째, 개항장에서 일본인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하고 치외법권(제10조)을 인정하여 일본인이 조선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일본 영사 재판권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였다.
넷째, 일본은 조선 연안에서의 측량권을 획득하여 군사·지리 정보를 수집할 수 있게 되었다.
조일수호조규는 형식상 양국 간의 수호·통상 조약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고 경제적·군사적 침투를 합법화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근대적 국제조약 체제에 편입되는 동시에 외세의 압력과 침탈에 직접 노출되는 계기를 맞이하였고 서구 열강과의 조약 체결로 이어지는 문호 개방의 출발점이 되었다.
[1] 운요호(雲揚號) : 일본이 영국에서 구입한 묵제 범선으로 일본 해군에 편입된 군함
리틀빅혼 전투는 미국 몬태나 주의 [1]리틀빅혼 강 인근에서 벌어진 미국 정부와 원주민 부족 간의 갈등 중 가장 격렬하고 유명한 전투 중 하나이다. 이 전투는 [7]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의 지휘 하의 미 육군 [8]제7기병대와 [3]라코타 수족, [4]북부 샤이엔족, [5]아라파호족 연합 부족 사이에 벌어진 무력 충돌이었다.
미국 정부는 19세기 중반 서부로 영토 확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 부족의 영토를 점차 잠식해 나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과 충돌을 완화하고 백인 이주민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6]포트 라래미 조약을 체결하였다. 특히 1868년에 체결된 [6]포트 라래미 조약에서 블랙힐스 지역은 라코타족의 영구 영토로 보장하였다.
블랙힐스는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와 와이오밍주에 걸쳐 있는 산악 지역으로 대평원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독특한 지리적·문화적 중요성을 지닌다. 이 지역은 [3]라코타 수족에게 신성한 영토로 여겨지며 전통적으로 그들의 문화와 종교 활동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874년에 이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수많은 백인 탐광꾼들이 몰려들었고 미국 정부는 이를 묵인하였다. 이로 인해 라코타를 비롯한 부족들은 조약 위반에 반발하며 무장 저항에 나섰다. 이로 인해 라코타 부족과 미국 정부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블랙힐스는 원주민 권리와 토지 반환 문제의 상징적인 장소로 남아 있다.
[7]커스터 중령은 1876년 미국 정부의 대대적인 원주민 무장 해제 작전에 참여하며 [8]제7기병대 병력 600여명을 이끌고 라코타 연합부족이 집결한 것으로 알려진 [1]리틀빅혼 강 주변을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합 부족의 병력 규모를 과소평가한 채 기병대를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공격을 시도하였다. 연합부족의 병력은 약 2,000명에서 2,500명이었다.
커스터 중령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약 210명의 부대를 중심으로 강 동쪽에서 부족 진영을 공격하였으며 나머지 병력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지원 작전을 수행하도록 분할되었다. 그러나 이 병력 분할은 결과적으로 미군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분산된 부대들은 개별적으로 공격받으며 효과적으로 협력하지 못했다.
특히 커스터가 이끈 부대는 라코타 수족 [2]오글라라 부족의 지도자인 [9]크레이지 호스와 [2]흐눈파파 부족의 정신적 지도자인 [10]시팅 불이 이끄는 부족 전사들에게 포위되었다. 시팅 불은 전투 직전 대규모 영적 의식을 통해 부족의 사기를 끌어올렸고 크레이지 호스는 실전 지휘를 맡아 빠르고 유동적인 기병 전술로 미군을 압도하였다.
결과적으로 커스터와 약 210명의 병력이 전멸당하였으며 다른 부대도 고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나머지 한 부대는 제 때 도착하지 못해 지원에 실패하였다.
리틀빅혼 전투는 미국 군사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전투는 원주민들에게는 큰 영광의 승리였으나 미국 정부는 더욱 강경한 군사적 대응을 단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원주민 부족들은 점차 군사적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1877년 이후 크레이지 호스는 항복하였고 시팅 불은 캐나다로 망명하였다가 식량 부족과 혹독한 환경, 그리고 캐나다 정부와 미국 정부의 압박 속에서 생존이 어려워지자 결국 미국 군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원주민들이 지속적인 저항을 이어가기에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리틀 빅혼 전투는 미국 역사에서 "커스터의 최후(Custer’s Last Stand)"로 불리며 미국 내에서 원주민 문제, 군사 전략 실패, 제국주의적 확장 정책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오랫동안 회자되어 왔다. 현재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리틀 빅혼 전적 국립기념지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1] 리틀빅혼(Little Bighorn) : 미국 몬태나주 남부에 위치한 지역. 이 지역은 현재 "리틀빅혼 전적지 국립기념지(Little Bighorn Battlefield National Monument)"로 지정되어 있다. 방문객들이 당시 전투의 경로와 주요 지점을 따라 걸으며 역사적 배경을 배울 수 있는 교육 및 추모의 장소로 보존되어 있다
[2] 수족(Lakota) : 북미 원주민인 수(Sioux) 계열 부족 가운데 하나로 가장 영향력 있던 부족 중 하나다. 라코타는 7개의 하위 부족으로 나뉘며 대표적으로 오글라라(Oglala), 흐눈파파(Hunkpapa), 미니코우주(Minicoujou) 등이 있다.
[3] 라코타 수족(Lakota Sioux) : 북아메리카에서 활동한 수(Sioux) 계열의 대표적인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이다. 이들은 원래 중서부 지역에서 살다가 17세기 이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몬태나, 와이오밍 등지의 대초원 지대에 정착하였다.
[4] 샤이엔(Cheyenne) :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부족으로 북부 샤이엔(Northern Cheyenne)과 남부 샤이엔(Southern Cheyenne)으로 나뉘며 각각 몬태나와 오클라호마의 보호구역에 거주한다. 이들은 복잡한 전사 사회 체계와 의회 형태의 부족 정치 제도, 태양춤(Sun Dance) 같은 종교 의식으로도 알려져 있다. 원래는 미네소타 지역의 삼림 지대에서 농업과 수렵을 하며 살았지만 18세기 이후 말과 총기의 도입을 계기로 서부로 이동하여 기마 유목 문화를 발전시켰다.
[5] 아라파호(Arapaho) :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부족으로 현재는 주로 와이오밍(Wyoming)과 오클라호마(Oklahoma)에 거주한다. 본래는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농경을 하며 살았으나 말의 도입 이후 18세기경 대평원으로 이동하여 기마 수렵 생활을 하게 되었다.
[6] 포트 라래미 조약(Fort Laramie Treaty) : 미국 정부와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 체결된 두 차례의 조약으로 각각 1851년과 1868년에 와이오밍주의 포트 라래미에서 조인되었다. 1851년의 첫 조약은 라코타 수족, 샤이엔족, 아라파호족, 크로우족 등 여러 부족의 전통적인 영토를 미국 정부가 인정하고 정착민들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부족 간 경계 설정이 불명확했고, 미국 측이 조약을 자주 위반하면서 갈등이 깊어졌다. 1868년의 두 번째 조약은 라코타 수족을 중심으로 체결되었으며 블랙힐스를 포함한 광범위한 보호구역을 설정하고 미국의 요새 철수 및 정착민 출입 금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이후 블랙힐스에서 금이 발견되자 미국은 이를 일방적으로 점령하고 조약을 위반했으며 이로 인해 라코타족과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1876년의 리틀빅혼 전투이다.
[7]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George Armstrong Custer, 1839년 11월 11일 ~ 1876년 6월 25일) : 미국 남북전쟁과 인디언 전쟁에 참전한 기병 장교이다. 남북전쟁 중에 장군으로 임시 승진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 정규군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중령으로 강등되었다. 그는 리틀빅혼 전투에서 무리한 병력 분산과 과감한 공격으로 전멸당하며 전사했다.
[8] 제7기병대(7th Cavalry Regiment) : 미국 육군의 정규 기병 연대 중 하나로 1866년에 창설되었다. 주로 미국 서부 개척과 인디언 전쟁 시기에 활약하였다. 이후 미서전쟁,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도 활동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미 육군의 기계화 보병 부대로 존재하고 있다.
[9]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1840~1877년 9월 5일) : 일명 미친말. 원주민 언어의 이름은 타슝카 위트코(Tȟašúŋke Witkó). 19세기 후반 수족(Lakota) 부족내 오글라라족의 유명한 전사이자 지도자였다. 그는 미국 정부의 서부 확장과 원주민 영토 침범에 강력히 저항한 인물로 미국-인디언 전쟁에서 게릴라 전술을 통해 큰 전과를 올렸다. 오늘날 그는 미 원주민 저항의 상징적 인물로 기억되며 사우스다코타 주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크레이지 호스 기념 조각상이 건립 중이다.
[10] 시팅 불(Sitting Bull, 1831년 경 ~ 1890년 12월 15일) : 일명 앉은황소. 원주민 언어의 이름은 타탕카 이요탕카(Tȟatȟáŋka Íyotake). 라코타족내의 흐눈파라(Hunkpapa Lakota)의 지도자이자 전사였다. 미국 정부의 강제 이주 정책과 평화조약 위반에 끝까지 저항한 상징적인 인물로 미국-인디언 전쟁 기간 동안 라코타, 샤이엔, 아라파호 연합 부족의 단결을 이끌었다
미국 정부는 19세기 중반 서부로 영토 확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 부족의 영토를 점차 잠식해 나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과 충돌을 완화하고 백인 이주민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6]포트 라래미 조약을 체결하였다. 특히 1868년에 체결된 [6]포트 라래미 조약에서 블랙힐스 지역은 라코타족의 영구 영토로 보장하였다.
블랙힐스는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와 와이오밍주에 걸쳐 있는 산악 지역으로 대평원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독특한 지리적·문화적 중요성을 지닌다. 이 지역은 [3]라코타 수족에게 신성한 영토로 여겨지며 전통적으로 그들의 문화와 종교 활동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874년에 이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수많은 백인 탐광꾼들이 몰려들었고 미국 정부는 이를 묵인하였다. 이로 인해 라코타를 비롯한 부족들은 조약 위반에 반발하며 무장 저항에 나섰다. 이로 인해 라코타 부족과 미국 정부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블랙힐스는 원주민 권리와 토지 반환 문제의 상징적인 장소로 남아 있다.
[7]커스터 중령은 1876년 미국 정부의 대대적인 원주민 무장 해제 작전에 참여하며 [8]제7기병대 병력 600여명을 이끌고 라코타 연합부족이 집결한 것으로 알려진 [1]리틀빅혼 강 주변을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합 부족의 병력 규모를 과소평가한 채 기병대를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공격을 시도하였다. 연합부족의 병력은 약 2,000명에서 2,500명이었다.
커스터 중령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약 210명의 부대를 중심으로 강 동쪽에서 부족 진영을 공격하였으며 나머지 병력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지원 작전을 수행하도록 분할되었다. 그러나 이 병력 분할은 결과적으로 미군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분산된 부대들은 개별적으로 공격받으며 효과적으로 협력하지 못했다.
특히 커스터가 이끈 부대는 라코타 수족 [2]오글라라 부족의 지도자인 [9]크레이지 호스와 [2]흐눈파파 부족의 정신적 지도자인 [10]시팅 불이 이끄는 부족 전사들에게 포위되었다. 시팅 불은 전투 직전 대규모 영적 의식을 통해 부족의 사기를 끌어올렸고 크레이지 호스는 실전 지휘를 맡아 빠르고 유동적인 기병 전술로 미군을 압도하였다.
결과적으로 커스터와 약 210명의 병력이 전멸당하였으며 다른 부대도 고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나머지 한 부대는 제 때 도착하지 못해 지원에 실패하였다.
리틀빅혼 전투는 미국 군사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전투는 원주민들에게는 큰 영광의 승리였으나 미국 정부는 더욱 강경한 군사적 대응을 단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원주민 부족들은 점차 군사적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1877년 이후 크레이지 호스는 항복하였고 시팅 불은 캐나다로 망명하였다가 식량 부족과 혹독한 환경, 그리고 캐나다 정부와 미국 정부의 압박 속에서 생존이 어려워지자 결국 미국 군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원주민들이 지속적인 저항을 이어가기에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리틀 빅혼 전투는 미국 역사에서 "커스터의 최후(Custer’s Last Stand)"로 불리며 미국 내에서 원주민 문제, 군사 전략 실패, 제국주의적 확장 정책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오랫동안 회자되어 왔다. 현재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리틀 빅혼 전적 국립기념지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1] 리틀빅혼(Little Bighorn) : 미국 몬태나주 남부에 위치한 지역. 이 지역은 현재 "리틀빅혼 전적지 국립기념지(Little Bighorn Battlefield National Monument)"로 지정되어 있다. 방문객들이 당시 전투의 경로와 주요 지점을 따라 걸으며 역사적 배경을 배울 수 있는 교육 및 추모의 장소로 보존되어 있다
[2] 수족(Lakota) : 북미 원주민인 수(Sioux) 계열 부족 가운데 하나로 가장 영향력 있던 부족 중 하나다. 라코타는 7개의 하위 부족으로 나뉘며 대표적으로 오글라라(Oglala), 흐눈파파(Hunkpapa), 미니코우주(Minicoujou) 등이 있다.
[3] 라코타 수족(Lakota Sioux) : 북아메리카에서 활동한 수(Sioux) 계열의 대표적인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이다. 이들은 원래 중서부 지역에서 살다가 17세기 이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몬태나, 와이오밍 등지의 대초원 지대에 정착하였다.
[4] 샤이엔(Cheyenne) :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부족으로 북부 샤이엔(Northern Cheyenne)과 남부 샤이엔(Southern Cheyenne)으로 나뉘며 각각 몬태나와 오클라호마의 보호구역에 거주한다. 이들은 복잡한 전사 사회 체계와 의회 형태의 부족 정치 제도, 태양춤(Sun Dance) 같은 종교 의식으로도 알려져 있다. 원래는 미네소타 지역의 삼림 지대에서 농업과 수렵을 하며 살았지만 18세기 이후 말과 총기의 도입을 계기로 서부로 이동하여 기마 유목 문화를 발전시켰다.
[5] 아라파호(Arapaho) :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부족으로 현재는 주로 와이오밍(Wyoming)과 오클라호마(Oklahoma)에 거주한다. 본래는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농경을 하며 살았으나 말의 도입 이후 18세기경 대평원으로 이동하여 기마 수렵 생활을 하게 되었다.
[6] 포트 라래미 조약(Fort Laramie Treaty) : 미국 정부와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 체결된 두 차례의 조약으로 각각 1851년과 1868년에 와이오밍주의 포트 라래미에서 조인되었다. 1851년의 첫 조약은 라코타 수족, 샤이엔족, 아라파호족, 크로우족 등 여러 부족의 전통적인 영토를 미국 정부가 인정하고 정착민들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부족 간 경계 설정이 불명확했고, 미국 측이 조약을 자주 위반하면서 갈등이 깊어졌다. 1868년의 두 번째 조약은 라코타 수족을 중심으로 체결되었으며 블랙힐스를 포함한 광범위한 보호구역을 설정하고 미국의 요새 철수 및 정착민 출입 금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이후 블랙힐스에서 금이 발견되자 미국은 이를 일방적으로 점령하고 조약을 위반했으며 이로 인해 라코타족과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1876년의 리틀빅혼 전투이다.
[7]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George Armstrong Custer, 1839년 11월 11일 ~ 1876년 6월 25일) : 미국 남북전쟁과 인디언 전쟁에 참전한 기병 장교이다. 남북전쟁 중에 장군으로 임시 승진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 정규군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중령으로 강등되었다. 그는 리틀빅혼 전투에서 무리한 병력 분산과 과감한 공격으로 전멸당하며 전사했다.
[8] 제7기병대(7th Cavalry Regiment) : 미국 육군의 정규 기병 연대 중 하나로 1866년에 창설되었다. 주로 미국 서부 개척과 인디언 전쟁 시기에 활약하였다. 이후 미서전쟁,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도 활동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미 육군의 기계화 보병 부대로 존재하고 있다.
[9]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1840~1877년 9월 5일) : 일명 미친말. 원주민 언어의 이름은 타슝카 위트코(Tȟašúŋke Witkó). 19세기 후반 수족(Lakota) 부족내 오글라라족의 유명한 전사이자 지도자였다. 그는 미국 정부의 서부 확장과 원주민 영토 침범에 강력히 저항한 인물로 미국-인디언 전쟁에서 게릴라 전술을 통해 큰 전과를 올렸다. 오늘날 그는 미 원주민 저항의 상징적 인물로 기억되며 사우스다코타 주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크레이지 호스 기념 조각상이 건립 중이다.
[10] 시팅 불(Sitting Bull, 1831년 경 ~ 1890년 12월 15일) : 일명 앉은황소. 원주민 언어의 이름은 타탕카 이요탕카(Tȟatȟáŋka Íyotake). 라코타족내의 흐눈파라(Hunkpapa Lakota)의 지도자이자 전사였다. 미국 정부의 강제 이주 정책과 평화조약 위반에 끝까지 저항한 상징적인 인물로 미국-인디언 전쟁 기간 동안 라코타, 샤이엔, 아라파호 연합 부족의 단결을 이끌었다
[1]세이난 전쟁은 일본 [2]규슈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메이지 정부와 [4]사쓰마번 출신 무사들의 충돌이었다. 이 전쟁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봉건적 무사 계급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가장 격렬한 무력 저항으로 일본의 마지막 무사 반란이었다.
전쟁의 중심 인물은 [5]사이고 다카모리로 그는 메이지 유신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으나 점점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메이지 정부의 개혁에 실망하고 정계를 떠난 뒤 고향 가고시마로 돌아가 사관학교를 설립하며 무사 출신 청년들을 교육했다. 당시 메이지 정부는 무사 계급을 폐지하고 징병제를 도입하는 등 급속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무사들은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러한 무사들의 불만을 대변하며 반정부적인 분위기를 형성했고 정부가 이를 위협으로 간주해 견제하자 무장 봉기가 촉발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군은 초반에 메이지 정부군의 [6]구마모토 성을 포위하며 수 차례 포화를 퍼부으며 맹공했다. 구마모토 성의 철벽 방어로 공성전은 57일이나 지속되었다. 마침내 정부는 징병제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와 서구식 무기를 동원해 반격에 나섰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군은 전국에서 병력을 집중시키며 반란군을 압박했고 [5]사이고 다카모리군은 병력과 보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점점 불리해졌다.
최후의 전투는 [7]시로야마에서 벌어졌고 이곳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활복 자결하면서 전쟁은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1]세이난 전쟁의 결과로 무사 계급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메이지 정부는 중앙집권 체제를 확고히 하며 일본의 근대 국가 형성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징병군의 전투력이 입증되었고 일본 군대는 본격적인 근대화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사이고 다카모리는 비록 반란군의 지도자였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의로움을 지닌 인물로 추앙받았으며 사후에는 명예가 회복되어 [8]가고시마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 전쟁은 영화 “마지막 사무라이”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모티브로 사용되며 일본 근대화 과정의 비극적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1] 세이난(西南) : 문자 그대로 서남쪽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일본 본토의 서남부에 위치한 규슈 지방에서 발생한 전쟁이라는 지리적 위치를 나타낸 명칭으로 반란의 중심이었던 사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이 일본의 서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세이난 전쟁"이라 불린다.
[2] 규슈(Kyushu) :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대 섬 중 가장 서쪽과 남쪽에 있는 섬
[3] 번(藩) : 일본에서 다이묘(봉건영주)들이 통치하던 영지
[4] 사쓰마번(Satsuma) : 일본 에도시대 규슈 남부(현재의 가고시마현)에 위치한 번으로 시마즈 가문이 지배했다. 메이지 유신의 핵심 세력 중 하나로 서구식 근대화와 무사 계층 중심 정치의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다
[5] 사이고 다카모리(Saigo Takamori, 1828년 1월 23일 ~ 1877년 9월 24일) : 일본 사쓰마의 번사, 군인, 정치인이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유신 3명중 한 명으로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였으나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한 후 할복하였다
[6] 구마모토 성(Kumamoto Castle) :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에 위치한 성. 일본 3대 성으로 알려져 있다
[7] 시로야마(城山) : 일본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에 위치한 산으로 가고시마 시내 중심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높이는 약 107미터로 비교적 낮지만, 가고시마만과 사쿠라지마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지로 유명하다. 이곳은 세이난 전쟁의 최후 전투지이며 사이고 다카모리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이기도 하다
[8] 가고시마(Kagoshima) : 일본 규슈 최남단에 위치한 가고시마현의 주 도시이다. 오키나와섬 북쪽의 류큐 열도도 관할한다
전쟁의 중심 인물은 [5]사이고 다카모리로 그는 메이지 유신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으나 점점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메이지 정부의 개혁에 실망하고 정계를 떠난 뒤 고향 가고시마로 돌아가 사관학교를 설립하며 무사 출신 청년들을 교육했다. 당시 메이지 정부는 무사 계급을 폐지하고 징병제를 도입하는 등 급속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무사들은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러한 무사들의 불만을 대변하며 반정부적인 분위기를 형성했고 정부가 이를 위협으로 간주해 견제하자 무장 봉기가 촉발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군은 초반에 메이지 정부군의 [6]구마모토 성을 포위하며 수 차례 포화를 퍼부으며 맹공했다. 구마모토 성의 철벽 방어로 공성전은 57일이나 지속되었다. 마침내 정부는 징병제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와 서구식 무기를 동원해 반격에 나섰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군은 전국에서 병력을 집중시키며 반란군을 압박했고 [5]사이고 다카모리군은 병력과 보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점점 불리해졌다.
최후의 전투는 [7]시로야마에서 벌어졌고 이곳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활복 자결하면서 전쟁은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1]세이난 전쟁의 결과로 무사 계급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메이지 정부는 중앙집권 체제를 확고히 하며 일본의 근대 국가 형성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징병군의 전투력이 입증되었고 일본 군대는 본격적인 근대화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사이고 다카모리는 비록 반란군의 지도자였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의로움을 지닌 인물로 추앙받았으며 사후에는 명예가 회복되어 [8]가고시마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 전쟁은 영화 “마지막 사무라이”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모티브로 사용되며 일본 근대화 과정의 비극적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1] 세이난(西南) : 문자 그대로 서남쪽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일본 본토의 서남부에 위치한 규슈 지방에서 발생한 전쟁이라는 지리적 위치를 나타낸 명칭으로 반란의 중심이었던 사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이 일본의 서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세이난 전쟁"이라 불린다.
[2] 규슈(Kyushu) :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대 섬 중 가장 서쪽과 남쪽에 있는 섬
[3] 번(藩) : 일본에서 다이묘(봉건영주)들이 통치하던 영지
[4] 사쓰마번(Satsuma) : 일본 에도시대 규슈 남부(현재의 가고시마현)에 위치한 번으로 시마즈 가문이 지배했다. 메이지 유신의 핵심 세력 중 하나로 서구식 근대화와 무사 계층 중심 정치의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다
[5] 사이고 다카모리(Saigo Takamori, 1828년 1월 23일 ~ 1877년 9월 24일) : 일본 사쓰마의 번사, 군인, 정치인이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유신 3명중 한 명으로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였으나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한 후 할복하였다
[6] 구마모토 성(Kumamoto Castle) :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에 위치한 성. 일본 3대 성으로 알려져 있다
[7] 시로야마(城山) : 일본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에 위치한 산으로 가고시마 시내 중심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높이는 약 107미터로 비교적 낮지만, 가고시마만과 사쿠라지마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지로 유명하다. 이곳은 세이난 전쟁의 최후 전투지이며 사이고 다카모리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이기도 하다
[8] 가고시마(Kagoshima) : 일본 규슈 최남단에 위치한 가고시마현의 주 도시이다. 오키나와섬 북쪽의 류큐 열도도 관할한다
1차 영국-아프카니스탄 전쟁에서 독립하여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던 도스트 무함마드가 사망하면서 이후 계승한 지도자는 영국에 적대적이라 영국에 많은 모욕을 주었다. 이에 분개한 영국은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이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은 패배하였으며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1919년에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게 된다.
* 도스트 모하마드(Dost Mohammad, 1793년~1863년) : 아프가니스탄 바라크자이 왕조(아프카니스탄 아미르국 - Emirate of Afghanistan, 1826 ~ 1919)의 창시자. 아미르국은 1919년 이후 아프카니스탄 왕국(1919년~1973년)이라 한다
이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은 패배하였으며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1919년에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게 된다.
* 도스트 모하마드(Dost Mohammad, 1793년~1863년) : 아프가니스탄 바라크자이 왕조(아프카니스탄 아미르국 - Emirate of Afghanistan, 1826 ~ 1919)의 창시자. 아미르국은 1919년 이후 아프카니스탄 왕국(1919년~1973년)이라 한다
태평양 전쟁은 1879년 4월 칠레와 페루, 볼리비아 세 나라가 아타카마 사막의 초석 광산 지대를 놓고 일어난 분쟁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다.
초석 전쟁(硝石戰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태평양 연안 지역인 안토파가스타는 원래 볼리비아의 영토였으며 볼리비아의 유일한 태평양 출구였다. 이 지역의 볼리비아내 칠레광업기업에게 과세 혜택등으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볼리비아는 형제국인 페루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조약을 파기하고 칠레의 기업에 과세를 강화하자 칠레군이 볼리비아를 공격하여 안토파가스타 주를 점령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때마침 세나라 모두 경제 공황에 빠져있었던 상태라서 이 광산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다.
볼리비아는 형제국인 페루와 동맹을 체결하여 칠레군에게 맞섰으나 해상 및 지상군까지 칠레군에게 연패하여 볼리비아는 안데스 산맥 너머 본토로 쫓겨났으며 페루는 수도 리마가 함락되면서 항전불가상태가 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결과는 볼리비아는 안토파가스타 지역을 페루는 타라파카, 아리카, 타크나등이 칠레의 영토로 병합되면서 칠레의 영토는 확장되었다. 이 때문에 볼리비아는 바다로 이어지는 영토를 잃고 내륙국이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는 광물 자원 수출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이루게 된다.
1929년 페루에게 타크나 지역을 돌려주었으나 볼리비아와는 아직도 안토파가스타 지역의 영유권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 :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서쪽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사막. 황무지같지만 광물자원이 풍부한 노다지 땅이며 원래는 볼리비아령이었으나 위 전쟁으로 칠레로 넘어갔다.
* 초석 : 무색무취의 무기물 결정. 질산칼륨 분자 KNO3의 광물 형태. 구성물질인 질소와 칼륨이 모두 비료의 주 원료이나 역사적으로 초석은 흑색화약의 원료였다.
* 타라파카(Tarapacá) : 칠레의 북쪽에 있는 도시이며 볼리비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 안토파가스타(Antofagast) : 칠레 북쪽지방의 항구도시
* 아리카(Arica) : 칠레 북쪽지방에 있는 항구도시
* 타크나(Tacna) : 페루 남부 칠레 국경 근처에 있는 도시
초석 전쟁(硝石戰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태평양 연안 지역인 안토파가스타는 원래 볼리비아의 영토였으며 볼리비아의 유일한 태평양 출구였다. 이 지역의 볼리비아내 칠레광업기업에게 과세 혜택등으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볼리비아는 형제국인 페루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조약을 파기하고 칠레의 기업에 과세를 강화하자 칠레군이 볼리비아를 공격하여 안토파가스타 주를 점령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때마침 세나라 모두 경제 공황에 빠져있었던 상태라서 이 광산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다.
볼리비아는 형제국인 페루와 동맹을 체결하여 칠레군에게 맞섰으나 해상 및 지상군까지 칠레군에게 연패하여 볼리비아는 안데스 산맥 너머 본토로 쫓겨났으며 페루는 수도 리마가 함락되면서 항전불가상태가 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결과는 볼리비아는 안토파가스타 지역을 페루는 타라파카, 아리카, 타크나등이 칠레의 영토로 병합되면서 칠레의 영토는 확장되었다. 이 때문에 볼리비아는 바다로 이어지는 영토를 잃고 내륙국이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는 광물 자원 수출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이루게 된다.
1929년 페루에게 타크나 지역을 돌려주었으나 볼리비아와는 아직도 안토파가스타 지역의 영유권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 :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서쪽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사막. 황무지같지만 광물자원이 풍부한 노다지 땅이며 원래는 볼리비아령이었으나 위 전쟁으로 칠레로 넘어갔다.
* 초석 : 무색무취의 무기물 결정. 질산칼륨 분자 KNO3의 광물 형태. 구성물질인 질소와 칼륨이 모두 비료의 주 원료이나 역사적으로 초석은 흑색화약의 원료였다.
* 타라파카(Tarapacá) : 칠레의 북쪽에 있는 도시이며 볼리비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 안토파가스타(Antofagast) : 칠레 북쪽지방의 항구도시
* 아리카(Arica) : 칠레 북쪽지방에 있는 항구도시
* 타크나(Tacna) : 페루 남부 칠레 국경 근처에 있는 도시
1880년에 제2차 수신사로 파견된 김홍집이 청의 외교관 황준헌(황쭌셴)의 '조선책략'을 국내에 가지고 돌아왔으며 내용은 러시아의 서양 공략을 막기위하여 조선은 중국을 가까이하며 일본과 관계를 공고히 하고 미국과 연계하여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 이며 이는 곧 '친중국','결일본','연미국'으로 정리된다.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확인받고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주선하였다. 미국과 수교를 맺는데 '조선책략'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제물포에서 이홍장이 중재하는 가운데 조선 측에서는 신헌, 김홍집이 전권대사로, 미국 측은 전권위원 로버트 슈펠트가 참가한 가운데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구미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조약의 내용은 앞서 맺은 조일수호조규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등한 항목이 많았다. 그것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가 조약 초안 작성에 직접 개입했고, 미국이 동아시아에 개입이나 관심 정도가 아직까지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은 최혜국 대우 조항으로 인해 후일 구미 국가와 같은 조건으로 조선에서의 제반 권리를 향유하게 된다.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은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구미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로버트 윌슨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 1822년~1895년) : 미국의 해군 제독이자 외교관
*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조정 말기의 한족계 정치가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청나라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 신헌(1810년~1884년) : 조선 말의 무신이자 외교관
* 김홍집(1842년~1896년) :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온건개화파
* 황준헌(1848년~1905년) : 중국 청나라의 외교관 겸 정치가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확인받고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주선하였다. 미국과 수교를 맺는데 '조선책략'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제물포에서 이홍장이 중재하는 가운데 조선 측에서는 신헌, 김홍집이 전권대사로, 미국 측은 전권위원 로버트 슈펠트가 참가한 가운데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구미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조약의 내용은 앞서 맺은 조일수호조규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등한 항목이 많았다. 그것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가 조약 초안 작성에 직접 개입했고, 미국이 동아시아에 개입이나 관심 정도가 아직까지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은 최혜국 대우 조항으로 인해 후일 구미 국가와 같은 조건으로 조선에서의 제반 권리를 향유하게 된다.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은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구미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로버트 윌슨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 1822년~1895년) : 미국의 해군 제독이자 외교관
*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조정 말기의 한족계 정치가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청나라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 신헌(1810년~1884년) : 조선 말의 무신이자 외교관
* 김홍집(1842년~1896년) :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온건개화파
* 황준헌(1848년~1905년) : 중국 청나라의 외교관 겸 정치가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13개월이나 밀린 급료 중 1개월분을 지불하였는데 급료내역이 겨와 모래가 섞이고 분량도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불량쌀을 지급해 일어난 군란이다.
조선이 멸망의 길을 걷는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사건이며 이 날을 기점으로 조선왕조는 회생불가의 상태가 되었다.
조선이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여 군인들이 백성들과 함께 손잡고 난을 일으켰을 정도로 조선의 국방력이 사실상 상실되었다.
이 난을 막기위하여 외국 군대(청나라)에게 지원요청을 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 임진왜란 발발시에도 외국군대(명나라)에게 지원요청했듯이 같은 역사가 반복이 되었다. 특히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주둔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이 멸망의 길을 걷는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사건이며 이 날을 기점으로 조선왕조는 회생불가의 상태가 되었다.
조선이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여 군인들이 백성들과 함께 손잡고 난을 일으켰을 정도로 조선의 국방력이 사실상 상실되었다.
이 난을 막기위하여 외국 군대(청나라)에게 지원요청을 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 임진왜란 발발시에도 외국군대(명나라)에게 지원요청했듯이 같은 역사가 반복이 되었다. 특히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주둔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러시아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부동항 획득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계속 남하하여 조선과 통상체결을 원했다.
러시아는 조선과 수교를 위해 청나라에 접근하지만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청나라는 이를 거절하자 청나라의 러시아공사인 베베르를 통하여 조선의 묄레도르프에게 접근하여 교섭하였다. 이에 조선은 러시아 베베르와 외무장관 김병시는 1884년 7월 7일에 한로 조약의 비준을 교환하여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후 베베르는 조선의 러시아공사로 부임하게 된다.
* 묄렌도르프(Möllendorff, 1848년~1901년) : 독일(프로이센왕국)출신의 외교관 겸 언어학자로 조선에서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최초의 서양인.한국이름 목인덕
* 베베르(Weber, 1841년~1910년) :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1882년에 청나라의 러시아공사로 부임하였으며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주(駐)조선 러시아 공사등을 역임
러시아는 조선과 수교를 위해 청나라에 접근하지만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청나라는 이를 거절하자 청나라의 러시아공사인 베베르를 통하여 조선의 묄레도르프에게 접근하여 교섭하였다. 이에 조선은 러시아 베베르와 외무장관 김병시는 1884년 7월 7일에 한로 조약의 비준을 교환하여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후 베베르는 조선의 러시아공사로 부임하게 된다.
* 묄렌도르프(Möllendorff, 1848년~1901년) : 독일(프로이센왕국)출신의 외교관 겸 언어학자로 조선에서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최초의 서양인.한국이름 목인덕
* 베베르(Weber, 1841년~1910년) :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1882년에 청나라의 러시아공사로 부임하였으며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주(駐)조선 러시아 공사등을 역임
이 전쟁은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며 청불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의 하나로서 베트남 [3]응우옌 왕조의 카톨릭 탄압은 프랑스에게 베트남 침공 명분을 만들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는 베트남 공략을 적극화하여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 내용은 청나라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국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청나라는 거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베트남에 들어와 있던 [1]흑기군은 프랑스 군대를 공격했으며 프랑스는 1883년에 이 세력을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하노이를 점령했다.
1884년 8월 프랑스는 베트남으로부터 북상하여 타이완(대만)을 공격하고 청나라 [2]복건성의 함대를 대파했다. 청나라는 프랑스의 도발행위에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해전은 프랑스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육전에서는 청나라가 분전했지만 유리하지 못하였다.
전세가 청나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실권을 쥐고 있던 [4]서태후는 1885년 6월 22일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함으로써 청나라의 종주권은 상실되었다. 그리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전쟁으로로 인해 수천년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해온 중국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는 시초가 된다.
[1] 흑기군 : 유영복이 거느린 사병조직. 중국의 윈난성(운남성)과 베트남 사이의 국경지대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2] 푸젠성(복건성) : 중국 남동부의 성. 대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중국의 성
* 청나라 말기의 해군 :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 광동함대
[3] 응우옌 왕조(Nguyen Dynasty) :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의 하나로서 베트남 [3]응우옌 왕조의 카톨릭 탄압은 프랑스에게 베트남 침공 명분을 만들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는 베트남 공략을 적극화하여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 내용은 청나라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국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청나라는 거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베트남에 들어와 있던 [1]흑기군은 프랑스 군대를 공격했으며 프랑스는 1883년에 이 세력을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하노이를 점령했다.
1884년 8월 프랑스는 베트남으로부터 북상하여 타이완(대만)을 공격하고 청나라 [2]복건성의 함대를 대파했다. 청나라는 프랑스의 도발행위에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해전은 프랑스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육전에서는 청나라가 분전했지만 유리하지 못하였다.
전세가 청나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실권을 쥐고 있던 [4]서태후는 1885년 6월 22일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함으로써 청나라의 종주권은 상실되었다. 그리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전쟁으로로 인해 수천년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해온 중국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는 시초가 된다.
[1] 흑기군 : 유영복이 거느린 사병조직. 중국의 윈난성(운남성)과 베트남 사이의 국경지대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2] 푸젠성(복건성) : 중국 남동부의 성. 대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중국의 성
* 청나라 말기의 해군 :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 광동함대
[3] 응우옌 왕조(Nguyen Dynasty) :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1876년 벨기에 국왕 [1]레오폴 2세는 미국의 유명한 탐험가 [2]헨리 모턴 스탠리에게 충분한 재정적 지원을 해주며 콩고 탐험을 의뢰했다. 헨리 스탠리의 탐험 결과 벨기에가 콩고 지역에 진출하게 되자, 아프리카 전역에 산재한 풍부한 지하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유럽 주요 국가들은 너나할것 없이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발벗고 나섰다.
당시 영국은 이집트 카이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및 인도 캘커타를 잇는 이른바 3C정책과 아프리카 종단정책을 추구했다. 프랑스는 모로코, 알제리를 거점으로 해서 동쪽으로 점령해 나가는 아프리카 횡단정책을 추구했다. 독일은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잇는 3B정책으로 중부유럽과 발칸 지역을 넘어서서 서아시아와 아프리카로까지 세력범위를 확장시키려 했다. 여기에 벨기에, 포르투갈도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나섰다.
이리하여 중동에서는 독일의 3B정책과 영국의 3C정책이 대립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부딪쳤다. 또 모로코에서는 독일과 프랑스가 부딪쳤다. 유럽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졌다.
벨기에의 [1]레오폴드 2세와 독일의 [3]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를 주도하여 콩고분지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분할 문제를 두고 유럽 각국은 협의를 하였다. 이 회의에서 콩고는 자유무역국(중립국)으로 선포하고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개인자격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벨기에는 콩고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할 수 있었다.
유럽열강들의 식민지화로 1914년 무렵에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모든 지역이 유럽의 식민지로 분할되었다.
이렇게 유럽열강들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원주민들의 문화적, 언어적 경계를 무시하고 만들어진 일직선에 가까운 국경선은 130년 지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1] 레오폴 2세(Leopold II of Belgium, 1835년~1909년) : 벨기에왕국의 2대 국왕(재외 1865년~1909년). 아프리카 콩고 식민지를 사유지처럼 사용하면서 수천만 명의 주민을 노예로 만들어 착취하고 집단살해하였다
[2] 헨리 모턴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년~1904년) : 영국의 탐험가이자 언론인. 아프리카 탐험과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구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1877년부터 1884년까지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의 후원을 얻어 콩고 지방을 탐험하였다
[3]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년~1898년) : 프로이센 수상(재임 : 1862~1890년). 통일독일제국 수상(재임 :1871년~1890년)
당시 영국은 이집트 카이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및 인도 캘커타를 잇는 이른바 3C정책과 아프리카 종단정책을 추구했다. 프랑스는 모로코, 알제리를 거점으로 해서 동쪽으로 점령해 나가는 아프리카 횡단정책을 추구했다. 독일은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잇는 3B정책으로 중부유럽과 발칸 지역을 넘어서서 서아시아와 아프리카로까지 세력범위를 확장시키려 했다. 여기에 벨기에, 포르투갈도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나섰다.
이리하여 중동에서는 독일의 3B정책과 영국의 3C정책이 대립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부딪쳤다. 또 모로코에서는 독일과 프랑스가 부딪쳤다. 유럽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졌다.
벨기에의 [1]레오폴드 2세와 독일의 [3]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를 주도하여 콩고분지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분할 문제를 두고 유럽 각국은 협의를 하였다. 이 회의에서 콩고는 자유무역국(중립국)으로 선포하고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개인자격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벨기에는 콩고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할 수 있었다.
유럽열강들의 식민지화로 1914년 무렵에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모든 지역이 유럽의 식민지로 분할되었다.
이렇게 유럽열강들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원주민들의 문화적, 언어적 경계를 무시하고 만들어진 일직선에 가까운 국경선은 130년 지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1] 레오폴 2세(Leopold II of Belgium, 1835년~1909년) : 벨기에왕국의 2대 국왕(재외 1865년~1909년). 아프리카 콩고 식민지를 사유지처럼 사용하면서 수천만 명의 주민을 노예로 만들어 착취하고 집단살해하였다
[2] 헨리 모턴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년~1904년) : 영국의 탐험가이자 언론인. 아프리카 탐험과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구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1877년부터 1884년까지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의 후원을 얻어 콩고 지방을 탐험하였다
[3]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년~1898년) : 프로이센 수상(재임 : 1862~1890년). 통일독일제국 수상(재임 :1871년~1890년)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1]급진개화파 세력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2]온건개화파를 몰아내고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일으킨 정변이다.
1884년(고종 21), 청나라는 [4]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의 일부를 조선에서 철수시켰다. 이를 기회로 삼아 급진개화파는 일본공사의 협조를 얻어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우정국 낙성식이라 불린다)을 계기로 준비한 폭탄으로 혼란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폭탄이 불발되자 근처 민가에 불을 질러 축하연 연회장은 소란스러워 졌고, 이를 틈타 정변을 일으켰다.
급진 개화파 세력은 창덕궁에 있던 고종을 [3]경우궁으로 이동시켜 신병을 확보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이들은 창덕궁으로 돌아와 개혁구상이 담긴 14개조 정강을 발표하는 등 개혁을 진행시켜 나갔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조선에 남아 있던 청나라군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12월 6일 청나라 병력이 창덕궁을 공격하자 불리함을 감지한 일본 공사는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급진개화파 군대는 청나라군과 응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여 흩어져 버렸다.
결국 급진 개화세력의 집권은 저녁 9시경에 시작되어 12월 6일 오후 7시경에 막을 내렸다. 정변이 진행된 시간은 46시간으로 만 이틀이 채 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 청나라의 세력이 강대해진 가운데 청나라와 일본 두나라의 조선에 대한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어 청일전쟁의 불씨가 된다.
정변 주동자는 인천항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김옥균을 제외하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김옥균은 암살되었고 서광범은 병사했으며 박영효는 친일 개화파로 변신하게 된다.
[14개조 정강]
①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신분제 폐지).
③ 전국의 지조법(地組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히 한다(조세제도 개혁).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는 등용한다(내시 제도 폐지).
⑤ 국가에 해독을 끼친 부정한 관리 중에서 그 죄가 심한 자는 처벌한다.
⑥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환곡제 폐지).
⑦ 규장각을 폐지한다(규장각은 세도 정치의 기반으로 변질).
⑧ 순사제도를 시급히 설치하여 도둑을 방지한다(근대적 경잘체도 도입).
⑨ 혜상공국을 혁파한다(특정상인의 특권 폐지).
⑩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군사제도 개혁).
⑫ 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게 하며 그 밖의 재무 관청은 폐지한다(재정의 일원화).
⑬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입헌 군주제 실시).
⑭ 의정부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정부조직 개편).
[1] 급진개화파 : 일본의 메이지유신(문명개화론)을 모델로 삼아 급진적인 개혁 추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등
[2] 온건개화파 : 중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점진적인 개혁 주장. 김홍집, 김윤식등
[3] 경우궁 :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23대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사당
[4] 청불전쟁(1884년 8월 ~ 1885년 4월) : 베트남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
1884년(고종 21), 청나라는 [4]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의 일부를 조선에서 철수시켰다. 이를 기회로 삼아 급진개화파는 일본공사의 협조를 얻어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우정국 낙성식이라 불린다)을 계기로 준비한 폭탄으로 혼란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폭탄이 불발되자 근처 민가에 불을 질러 축하연 연회장은 소란스러워 졌고, 이를 틈타 정변을 일으켰다.
급진 개화파 세력은 창덕궁에 있던 고종을 [3]경우궁으로 이동시켜 신병을 확보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이들은 창덕궁으로 돌아와 개혁구상이 담긴 14개조 정강을 발표하는 등 개혁을 진행시켜 나갔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조선에 남아 있던 청나라군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12월 6일 청나라 병력이 창덕궁을 공격하자 불리함을 감지한 일본 공사는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급진개화파 군대는 청나라군과 응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여 흩어져 버렸다.
결국 급진 개화세력의 집권은 저녁 9시경에 시작되어 12월 6일 오후 7시경에 막을 내렸다. 정변이 진행된 시간은 46시간으로 만 이틀이 채 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 청나라의 세력이 강대해진 가운데 청나라와 일본 두나라의 조선에 대한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어 청일전쟁의 불씨가 된다.
정변 주동자는 인천항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김옥균을 제외하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김옥균은 암살되었고 서광범은 병사했으며 박영효는 친일 개화파로 변신하게 된다.
[14개조 정강]
①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신분제 폐지).
③ 전국의 지조법(地組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히 한다(조세제도 개혁).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는 등용한다(내시 제도 폐지).
⑤ 국가에 해독을 끼친 부정한 관리 중에서 그 죄가 심한 자는 처벌한다.
⑥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환곡제 폐지).
⑦ 규장각을 폐지한다(규장각은 세도 정치의 기반으로 변질).
⑧ 순사제도를 시급히 설치하여 도둑을 방지한다(근대적 경잘체도 도입).
⑨ 혜상공국을 혁파한다(특정상인의 특권 폐지).
⑩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군사제도 개혁).
⑫ 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게 하며 그 밖의 재무 관청은 폐지한다(재정의 일원화).
⑬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입헌 군주제 실시).
⑭ 의정부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정부조직 개편).
[1] 급진개화파 : 일본의 메이지유신(문명개화론)을 모델로 삼아 급진적인 개혁 추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등
[2] 온건개화파 : 중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점진적인 개혁 주장. 김홍집, 김윤식등
[3] 경우궁 :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23대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사당
[4] 청불전쟁(1884년 8월 ~ 1885년 4월) : 베트남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
1885년(고종 22)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영국이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면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의 일환인 부동항 획득을 위하여 더 좋은 항만 조건을 지닌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이다.
영국은 거문도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Port Hamilton)'이라고 불렀다.
청나라의 중재로 러시아, 영국 상호 조선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을 함으로써 영국 함대는 1887년(고종 24년)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주권국인 조선의 양해 없이 점령이 감행된 점과 처리 과정에서도 조선 정부를 배제하고 열강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 교섭이 진행된 점에서, 조선의 허약한 국제적 지위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
거문도에는 당시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영국해군수병들의 묘가 아직 3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 거문도 : 전라남도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 섬으로서 고도·동도·서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전략적 경쟁을 뜻한다. 보통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러시아-페르시아 굴리스탄 조약)부터 1907년(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영국은 거문도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Port Hamilton)'이라고 불렀다.
청나라의 중재로 러시아, 영국 상호 조선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을 함으로써 영국 함대는 1887년(고종 24년)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주권국인 조선의 양해 없이 점령이 감행된 점과 처리 과정에서도 조선 정부를 배제하고 열강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 교섭이 진행된 점에서, 조선의 허약한 국제적 지위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
거문도에는 당시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영국해군수병들의 묘가 아직 3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 거문도 : 전라남도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 섬으로서 고도·동도·서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전략적 경쟁을 뜻한다. 보통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러시아-페르시아 굴리스탄 조약)부터 1907년(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갑신정변을 진압한 청군의 내정간섭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충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고자 청나라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1885년(고종 22)에 체결한 조약이다.
조선내 양국 주둔군 철수가 주 내용이며 다음과 같다.
1. 청과 일본 양 군 모두 조선에서 즉시 철수를 시작해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한다.
2. 청과 일본 양국은 조선에 대해 군사 고문을 파견하지 않는다. 조선은 청일 양국이 아닌 제3국에서 1명 이상 수 명의 군인을 초청한다.
3.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
톈진 조약으로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여 충돌을 막을 수 있었으나 조약 내용이 애매했기 때문에(제3조) 양국은 10년 후 청일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실제로 제3조에 의거하여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이 파병되자 일본 역시 군대를 보냈으며, 이는 청일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 이홍장(1823~1901) :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이에 따라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충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고자 청나라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1885년(고종 22)에 체결한 조약이다.
조선내 양국 주둔군 철수가 주 내용이며 다음과 같다.
1. 청과 일본 양 군 모두 조선에서 즉시 철수를 시작해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한다.
2. 청과 일본 양국은 조선에 대해 군사 고문을 파견하지 않는다. 조선은 청일 양국이 아닌 제3국에서 1명 이상 수 명의 군인을 초청한다.
3.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
톈진 조약으로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여 충돌을 막을 수 있었으나 조약 내용이 애매했기 때문에(제3조) 양국은 10년 후 청일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실제로 제3조에 의거하여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이 파병되자 일본 역시 군대를 보냈으며, 이는 청일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 이홍장(1823~1901) :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미국의 서부개척 역사는 백인이 아메리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원주민을 몰아내고, 학살하는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1890년은 인디언 전쟁 막바지였고 소탕되지 않은 인디언들 대부분 보호구역에 수용되었다.
신의 땅을 빼앗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1889년 유령춤(Ghost Dance)이라는 신앙 의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들은 부족의 죽음, 빼앗긴 영토, 파괴된 생활방식등으로 얼룩진 자신의 현재 삶을 애도하며 자유 세상과 함께 버팔로들이 초원에 돌아온다는 신앙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악마적 의식이면서 국가에 대한 불복종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했다.
미 육군은 [2]제7기병연대 500여 명을 원주민 [3]수족이 있던 [1]사우스다코타 주 인디언 보호구역내 운디드 니(wounded knee)로 보냈고, 원주민들은 바로 항복을 했다.
운디드 니(wounded knee)에서 원주민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다툼이 발생했으며 어느 쪽에선지 총탄이 발사됐다. 이에 제7기병연대는 원주민들에게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추장 큰발(Big Foot)을 비롯하여 노인,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포함된 수족 350명 중 300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미군은 25명이 죽고, 39명이 부상당했다.
미국 정부는 '운디드 니 전투(battle)'라고 했고, 원주민들은 '학살(massacre)'이라고 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제7기병대원에게 22개의 훈장이 수여됐다. 오늘날 원주민과 시민단체들이 이에 대한 정당성 문제를 지적하고 서훈 취소를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미군과 원주민들 사이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 학살이 벌어진 지역을 현재 국립역사지역으로 지정해 놓고 있다.
제7기병연대는 60년 후인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일으킨 부대이다
[1] 사우스다코타주(State of South Dakota) : 미국 중서부의 주. 미국의 4명의 위대한 대통령을 조각한 조각상이 있는 러시모어 산으로 유명하다
[2] 제7기병연대(7th Cavalry Regiment) : 미국 육군의 기병 연대로 1866년 창성되었다. 미국 남북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3] 수족(Sioux) : 북아메리카 원주민. 오늘날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네브래스카, 미네소타, 몬태나의 여러 보호 구역과 지역 사회에 흩어져 있는 많은 별도의 부족 정부를 유지하고 있다
1890년은 인디언 전쟁 막바지였고 소탕되지 않은 인디언들 대부분 보호구역에 수용되었다.
신의 땅을 빼앗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1889년 유령춤(Ghost Dance)이라는 신앙 의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들은 부족의 죽음, 빼앗긴 영토, 파괴된 생활방식등으로 얼룩진 자신의 현재 삶을 애도하며 자유 세상과 함께 버팔로들이 초원에 돌아온다는 신앙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악마적 의식이면서 국가에 대한 불복종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했다.
미 육군은 [2]제7기병연대 500여 명을 원주민 [3]수족이 있던 [1]사우스다코타 주 인디언 보호구역내 운디드 니(wounded knee)로 보냈고, 원주민들은 바로 항복을 했다.
운디드 니(wounded knee)에서 원주민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다툼이 발생했으며 어느 쪽에선지 총탄이 발사됐다. 이에 제7기병연대는 원주민들에게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추장 큰발(Big Foot)을 비롯하여 노인,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포함된 수족 350명 중 300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미군은 25명이 죽고, 39명이 부상당했다.
미국 정부는 '운디드 니 전투(battle)'라고 했고, 원주민들은 '학살(massacre)'이라고 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제7기병대원에게 22개의 훈장이 수여됐다. 오늘날 원주민과 시민단체들이 이에 대한 정당성 문제를 지적하고 서훈 취소를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미군과 원주민들 사이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 학살이 벌어진 지역을 현재 국립역사지역으로 지정해 놓고 있다.
제7기병연대는 60년 후인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일으킨 부대이다
[1] 사우스다코타주(State of South Dakota) : 미국 중서부의 주. 미국의 4명의 위대한 대통령을 조각한 조각상이 있는 러시모어 산으로 유명하다
[2] 제7기병연대(7th Cavalry Regiment) : 미국 육군의 기병 연대로 1866년 창성되었다. 미국 남북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3] 수족(Sioux) : 북아메리카 원주민. 오늘날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네브래스카, 미네소타, 몬태나의 여러 보호 구역과 지역 사회에 흩어져 있는 많은 별도의 부족 정부를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가 [4]인도차이나에서 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1]시암과 국경 분쟁이 격화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과 시암의 독립 유지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으로, 결국 시암이 메콩강 동쪽의 라오스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세기 후반에 프랑스는 베트남을 점령하며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1887년,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포함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식민지화했으며 이 과정에서 라오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라오스는 [1]시암의 보호국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시암 정부는 메콩강을 자국의 동부 국경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라오스가 역사적으로 베트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따라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프랑스는 태국에 라오스 지역을 포기할 것을 압박했다.
시암은 이에 반대하며 국경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프랑스의 움직임을 저지하려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와 시암 사이의 긴장이 점점 고조되었으며, 결국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1893년 4월 25일, 프랑스군과 시암군은 메콩강을 둘러싼 지역에서 첫 번째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프랑스는 라오스 지역에서 시암군이 프랑스 소속 군인들을 공격했다고 주장하며 보복 조치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해군은 캄보디아를 거점으로 시암을 압박하기 위해 군함을 동원해 [3]차오프라야강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시암군은 이를 막기 위해 해군력을 동원하여 차오프라야강 하구의 [2]팍남지역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1893년 7월 13일, 프랑스군은 방콕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시암군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5]팍남전투가 벌어졌다. 시암군은 포격을 가하며 저항했지만 프랑스군은 현대적인 군함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어 시암군을 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프랑스 함대는 방콕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시암 정부를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다.
이와 동시에 프랑스는 외교적으로도 시암을 강하게 압박했다. 프랑스는 방콕을 봉쇄하고 시암이 요구를 거부할 경우 수도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팍남 전투 이후 시암은 프랑스와 전면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프랑스는 시암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내면서 메콩강 동쪽의 라오스 지역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할양할 것과 메콩강 서쪽 25km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설정하고 프랑스와 영국이 보장하는 태국의 중립 상태를 인정할 것등을 강요했다.
시암은 군사적 열세와 프랑스의 봉쇄 압박으로 인해 협상에서 불리한 입장이었으며, 결국 1893년 10월 3일에 프랑스와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태국은 메콩강 동쪽의 라오스 지역을 프랑스에 공식적으로 넘겨야 했으며,이후 라오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시암 전쟁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의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시암이 서구 열강의 지배를 직접적으로 받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쟁 이후 시암은 균형 외교를 통해 완전한 식민지화를 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시암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전략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근대화를 추진했고 그 결과 동남아시아에서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유일한 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1] 시암(Siam) : 태국의 옛 명칭으로 1939년 공식적으로 국명을 시암에서 태국(Thailand)로 변경하였다.
[2] 팍남(Paknam) : 태국 차오프라야강하구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방콕 남쪽의 사뭇프라깐(Samut Prakan)지역에 속한다
[3] 차오프라야강(Chao Phraya River) : 태국의 수도인 방콕을 가로 질러 흐르는 강으로 태국에서 가장 큰 강
[4] 인도차이나(Indochina) : 동남아시아의 반도지역을 가리키며, 인도와 중국의 문화적·지리적 영향권 사이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하며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등의 국가들이 포함된다
[5] 팍남전투(Battle of Paknam, 1893년 7월 13일) : 프랑스군이 시암의 차오프라야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방콕을 압박하며, 시암이 라오스를 프랑스에 할양하도록 강요한 결정적인 전투
19세기 후반에 프랑스는 베트남을 점령하며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1887년,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포함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식민지화했으며 이 과정에서 라오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라오스는 [1]시암의 보호국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시암 정부는 메콩강을 자국의 동부 국경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라오스가 역사적으로 베트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따라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프랑스는 태국에 라오스 지역을 포기할 것을 압박했다.
시암은 이에 반대하며 국경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프랑스의 움직임을 저지하려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와 시암 사이의 긴장이 점점 고조되었으며, 결국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1893년 4월 25일, 프랑스군과 시암군은 메콩강을 둘러싼 지역에서 첫 번째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프랑스는 라오스 지역에서 시암군이 프랑스 소속 군인들을 공격했다고 주장하며 보복 조치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해군은 캄보디아를 거점으로 시암을 압박하기 위해 군함을 동원해 [3]차오프라야강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시암군은 이를 막기 위해 해군력을 동원하여 차오프라야강 하구의 [2]팍남지역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1893년 7월 13일, 프랑스군은 방콕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시암군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5]팍남전투가 벌어졌다. 시암군은 포격을 가하며 저항했지만 프랑스군은 현대적인 군함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어 시암군을 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프랑스 함대는 방콕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시암 정부를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다.
이와 동시에 프랑스는 외교적으로도 시암을 강하게 압박했다. 프랑스는 방콕을 봉쇄하고 시암이 요구를 거부할 경우 수도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팍남 전투 이후 시암은 프랑스와 전면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프랑스는 시암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내면서 메콩강 동쪽의 라오스 지역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할양할 것과 메콩강 서쪽 25km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설정하고 프랑스와 영국이 보장하는 태국의 중립 상태를 인정할 것등을 강요했다.
시암은 군사적 열세와 프랑스의 봉쇄 압박으로 인해 협상에서 불리한 입장이었으며, 결국 1893년 10월 3일에 프랑스와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태국은 메콩강 동쪽의 라오스 지역을 프랑스에 공식적으로 넘겨야 했으며,이후 라오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시암 전쟁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의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시암이 서구 열강의 지배를 직접적으로 받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쟁 이후 시암은 균형 외교를 통해 완전한 식민지화를 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시암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전략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근대화를 추진했고 그 결과 동남아시아에서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유일한 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1] 시암(Siam) : 태국의 옛 명칭으로 1939년 공식적으로 국명을 시암에서 태국(Thailand)로 변경하였다.
[2] 팍남(Paknam) : 태국 차오프라야강하구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방콕 남쪽의 사뭇프라깐(Samut Prakan)지역에 속한다
[3] 차오프라야강(Chao Phraya River) : 태국의 수도인 방콕을 가로 질러 흐르는 강으로 태국에서 가장 큰 강
[4] 인도차이나(Indochina) : 동남아시아의 반도지역을 가리키며, 인도와 중국의 문화적·지리적 영향권 사이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하며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등의 국가들이 포함된다
[5] 팍남전투(Battle of Paknam, 1893년 7월 13일) : 프랑스군이 시암의 차오프라야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방콕을 압박하며, 시암이 라오스를 프랑스에 할양하도록 강요한 결정적인 전투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조선은 1876년 개항 뒤 외세의 경제 침탈과 지배층의 수탈 심화로 농민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1890년대 들어 농민항쟁이 빈번해졌다.
1860년 창건된 [1]동학은 이 무렵 남부 지방까지 교세가 확장되었으나 조선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었다. 1892~1893년 동학교도들은 대규모 [2]교조신원운동을 일으켰다.
농촌 지식인들은 동학조직을 활용하여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였다.
1894년 1월 전형적인 탐관오리인 전라도 [3]고부 군수 [4]조병갑의 탐학과 부정부패로 인하여 전봉준을 위시한 고부군민은 봉기를 일으켰다. 조선 조정은 고부 민란을 수습하기위해 [5]안핵사 [6]이용태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오히려 농민들을 탄압하고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3월 20일 [7]전봉준, [8]김개남, [9]손화중을 중심으로 전북 [10]무장에서 [11]창의문을 발표하고 '[12]제폭구민 [13]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싸움에 나섰다. 제1차 농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3월25일 이어 고창과 정읍, 태인 등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지역마다 지도자를 달리하는 농민군들이 [3]고부의 백산에 모여들어 연합부대를 이루었다. 농민군은 황토재 전투,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하고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여 전라도 전역은 완전히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병을 요청했다. 5월 5일 아산만에 청나라 군대가 상륙하였다. [17]텐진 조약을 명분으로 일본군도 제물포(인천)에 상륙한다.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게 되자 전봉준과 전라감사 [15]김학진은 7월 6일 전주회담에서 [14]집강소 체제를 합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상황이 안정되자 조선조정은 청나라군과 일본군에게 철군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7월 25일에 청군과 일본군의 해전인 [16]풍도해전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농민군들은 다시 결집하여 10월 하순~11월 중순까지 공주 외곽과 청주 일대에서 조선과 일본의 연합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2차 농민전쟁이었다.
농민군 부대는 패배를 거듭하여 흩어지고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및 관련자들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써 동학 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일본군, 친일 개화파 정권, 보수 유생 토호 세력에 의해 실패했지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 한 투쟁이자 20세기 아시아 민족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또한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린 계기가 된 사건으로 청일전쟁의 결과로 청과 일본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후 동아시아는 일본,영국 연합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로 재편되었다.
[출처]
-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202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동학(東學) :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을 제창하여 1860년(철종 11) 최제우(1824~1864)가 창건한 신흥 종교이다.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1827~1898)이 1898년 순교한 뒤 3대 교주인 손병희(1861~1922)가 1905년에 천도교로 개편하였다
[2]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 1864년(고종 1) 동학 교조 최제우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뒤, 동학교도들이 그의 죄명을 벗기고 교조의 원을 풀어 줌으로써 종교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벌인 운동. 제1차 교조신원운동(1871). 제2차 교조신원운동(1893년)
[3] 고부군 :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덕천면, 소성면, 영원면, 이평면, 정우면과 부안군 백산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진원지로 유명하다
[4] 조병갑(1844년~1912년) : 조선 후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초기의 문신이고 부패한 탐관오리로 조병갑의 탐학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이후 조병갑은 파직당하고 유배당했으나 이후 복권되어 1898년 고등재판소 판사가 되어 동학 지도자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한다. 고종과 친일파 양쪽에게 총애받은 조병갑은 호의호식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다
[5] 안핵사(按覈使) : 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에 이의 처리를 위하여 파견한 임시관직으로 사건의 전말과 상황에 대한 상세한 조사,보고 및 사건의 처리방안을 건의하고 아울러 조정의 지시에 따라 이를 수습하는 것이 임무였다
[6] 이용태(1854년~1922년) : 동학농민혁명을 수습하는 직책이었으나 도리어 확대되자 파직 및 유배되었으나 199년 사법기관인 평리원 재판장과 1901년 주미공사에 임명되었다. 이완용의 친일 내각에서는 학부대신을 지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7] 전봉준(1855년~1895년) :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유난히 키가 작아(약 152cm) 녹두라는 별명을 얻었다
[8] 김개남(1853년~1894년) : 전북 태인(현 전북 정읍시 산외면)지역의 동학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9] 손화중(1861년~1894년) : 전북 고창(무장))에서 활동한 동학의 접주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10] 무장 :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
[11] 창의문 : 1894년 고창 무장 봉기 당시 전봉준등이 만천하에 봉기할 것을 포고한 글
[12] 제폭구민 :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뜻
[13] 보국안민 : 나라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 동학의 교리
[14] 집강소 : 1894년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뒤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한 청나라와 일본군의 철병을 원한 조선정부와 전주화약을 맺은 후 전라도 각 군현에 설치하여 중요한 재판이 있을 때 농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농민 자치 기구
[15] 김학진(1838년~1917년) : 동학농민전쟁을 수습하기 위하여 전라감사로 파견되어 농민군에 대한 적극적인 유화책을 통해 전라도지역을 안정시켰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정계에서 추방되어 있던 김학진은 1897년에 복귀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한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해나가자 김학진은 최익현, 허위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이후 중추원에서 활동하면서 친일내각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김학진은 1905년의 상소에서 국망의 위기감을 표출하면서도 고종에게 마음을 다잡고 정치를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1907년 상소에서는 깊은 절망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김학진은 1908년 즈음부터 친일로 기울었고, 마침내 나라가 망하자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아 조선귀족이 되었다 [참고 : 김학진의 삶과 현실인식, 정종원,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75호, 2019.05]
[16] 풍도해전 : 1894년 7월 25일 조선의 풍도(안산시 단원구)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한 해전으로 청일전쟁의 시발점이며 청나라가 패하였다
[17] 톈진 조약 : 갑신정변 실패의 결과로 1885년(고종 22년) 청나라 이홍장(리훙장)과 일본 이토 히로부미가 맺은 조약으로 청과 일본은 서로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하고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조선은 1876년 개항 뒤 외세의 경제 침탈과 지배층의 수탈 심화로 농민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1890년대 들어 농민항쟁이 빈번해졌다.
1860년 창건된 [1]동학은 이 무렵 남부 지방까지 교세가 확장되었으나 조선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었다. 1892~1893년 동학교도들은 대규모 [2]교조신원운동을 일으켰다.
농촌 지식인들은 동학조직을 활용하여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였다.
1894년 1월 전형적인 탐관오리인 전라도 [3]고부 군수 [4]조병갑의 탐학과 부정부패로 인하여 전봉준을 위시한 고부군민은 봉기를 일으켰다. 조선 조정은 고부 민란을 수습하기위해 [5]안핵사 [6]이용태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오히려 농민들을 탄압하고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3월 20일 [7]전봉준, [8]김개남, [9]손화중을 중심으로 전북 [10]무장에서 [11]창의문을 발표하고 '[12]제폭구민 [13]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싸움에 나섰다. 제1차 농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3월25일 이어 고창과 정읍, 태인 등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지역마다 지도자를 달리하는 농민군들이 [3]고부의 백산에 모여들어 연합부대를 이루었다. 농민군은 황토재 전투,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하고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여 전라도 전역은 완전히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병을 요청했다. 5월 5일 아산만에 청나라 군대가 상륙하였다. [17]텐진 조약을 명분으로 일본군도 제물포(인천)에 상륙한다.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게 되자 전봉준과 전라감사 [15]김학진은 7월 6일 전주회담에서 [14]집강소 체제를 합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상황이 안정되자 조선조정은 청나라군과 일본군에게 철군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7월 25일에 청군과 일본군의 해전인 [16]풍도해전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농민군들은 다시 결집하여 10월 하순~11월 중순까지 공주 외곽과 청주 일대에서 조선과 일본의 연합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2차 농민전쟁이었다.
농민군 부대는 패배를 거듭하여 흩어지고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및 관련자들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써 동학 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일본군, 친일 개화파 정권, 보수 유생 토호 세력에 의해 실패했지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 한 투쟁이자 20세기 아시아 민족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또한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린 계기가 된 사건으로 청일전쟁의 결과로 청과 일본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후 동아시아는 일본,영국 연합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로 재편되었다.
[출처]
-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202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동학(東學) :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을 제창하여 1860년(철종 11) 최제우(1824~1864)가 창건한 신흥 종교이다.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1827~1898)이 1898년 순교한 뒤 3대 교주인 손병희(1861~1922)가 1905년에 천도교로 개편하였다
[2]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 1864년(고종 1) 동학 교조 최제우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뒤, 동학교도들이 그의 죄명을 벗기고 교조의 원을 풀어 줌으로써 종교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벌인 운동. 제1차 교조신원운동(1871). 제2차 교조신원운동(1893년)
[3] 고부군 :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덕천면, 소성면, 영원면, 이평면, 정우면과 부안군 백산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진원지로 유명하다
[4] 조병갑(1844년~1912년) : 조선 후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초기의 문신이고 부패한 탐관오리로 조병갑의 탐학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이후 조병갑은 파직당하고 유배당했으나 이후 복권되어 1898년 고등재판소 판사가 되어 동학 지도자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한다. 고종과 친일파 양쪽에게 총애받은 조병갑은 호의호식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다
[5] 안핵사(按覈使) : 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에 이의 처리를 위하여 파견한 임시관직으로 사건의 전말과 상황에 대한 상세한 조사,보고 및 사건의 처리방안을 건의하고 아울러 조정의 지시에 따라 이를 수습하는 것이 임무였다
[6] 이용태(1854년~1922년) : 동학농민혁명을 수습하는 직책이었으나 도리어 확대되자 파직 및 유배되었으나 199년 사법기관인 평리원 재판장과 1901년 주미공사에 임명되었다. 이완용의 친일 내각에서는 학부대신을 지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7] 전봉준(1855년~1895년) :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유난히 키가 작아(약 152cm) 녹두라는 별명을 얻었다
[8] 김개남(1853년~1894년) : 전북 태인(현 전북 정읍시 산외면)지역의 동학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9] 손화중(1861년~1894년) : 전북 고창(무장))에서 활동한 동학의 접주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10] 무장 :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
[11] 창의문 : 1894년 고창 무장 봉기 당시 전봉준등이 만천하에 봉기할 것을 포고한 글
[12] 제폭구민 :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뜻
[13] 보국안민 : 나라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 동학의 교리
[14] 집강소 : 1894년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뒤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한 청나라와 일본군의 철병을 원한 조선정부와 전주화약을 맺은 후 전라도 각 군현에 설치하여 중요한 재판이 있을 때 농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농민 자치 기구
[15] 김학진(1838년~1917년) : 동학농민전쟁을 수습하기 위하여 전라감사로 파견되어 농민군에 대한 적극적인 유화책을 통해 전라도지역을 안정시켰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정계에서 추방되어 있던 김학진은 1897년에 복귀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한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해나가자 김학진은 최익현, 허위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이후 중추원에서 활동하면서 친일내각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김학진은 1905년의 상소에서 국망의 위기감을 표출하면서도 고종에게 마음을 다잡고 정치를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1907년 상소에서는 깊은 절망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김학진은 1908년 즈음부터 친일로 기울었고, 마침내 나라가 망하자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아 조선귀족이 되었다 [참고 : 김학진의 삶과 현실인식, 정종원,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75호, 2019.05]
[16] 풍도해전 : 1894년 7월 25일 조선의 풍도(안산시 단원구)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한 해전으로 청일전쟁의 시발점이며 청나라가 패하였다
[17] 톈진 조약 : 갑신정변 실패의 결과로 1885년(고종 22년) 청나라 이홍장(리훙장)과 일본 이토 히로부미가 맺은 조약으로 청과 일본은 서로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하고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1894년 동학혁명 직후 어수선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고 일본과 청나라는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풍도해전은 7월 25일 조선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청나라 군대는 풍도 안쪽에 있는 충청도 아산만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해전은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첫번째 단추가 되었다.
풍도해전은 전투 개시 6시간 30여분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어 7월 28일 한양에서 아산만까지 약 4천명의 일본군은 아산과 성환에서 주둔한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청나라는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이로써 일본과 청나라의 전면전은 피하기 어려워졌고 8월 1일 일본은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풍도해전은 중국과 일본 역사교과서 기재 및 기념관 건립을 통해 역사적 의미를 기억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구전에 그치고 있다.
* 풍도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
* 성환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풍도해전은 7월 25일 조선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청나라 군대는 풍도 안쪽에 있는 충청도 아산만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해전은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첫번째 단추가 되었다.
풍도해전은 전투 개시 6시간 30여분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어 7월 28일 한양에서 아산만까지 약 4천명의 일본군은 아산과 성환에서 주둔한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청나라는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이로써 일본과 청나라의 전면전은 피하기 어려워졌고 8월 1일 일본은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풍도해전은 중국과 일본 역사교과서 기재 및 기념관 건립을 통해 역사적 의미를 기억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구전에 그치고 있다.
* 풍도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
* 성환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청나라는 서구 열강과의 대립이 시작되면서 2차례의 아편전쟁 패배와 자국내 태평천국의 난으로 극심한 혼란한 상황이었다.
청나라는 재기를 위하여 [3] 양무운동을 통해 동아시아 패권국의 위치를 되찾기 위해 서구화 및 사회개혁에 힘쓰고 있었다. 일본은 [5] 메이지 유신 이후로 급격한 근대화를 이루었고 조선 침략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때마침 [1]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자 자력으로 막지 못하게 된 조선은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일본도 조선에 병력을 파병하였다.
청나라군은 충남 아산만으로 상륙하여 주둔하였고 일본군은 인천으로 상륙하여 한양에 주둔하게 된다.
타국의 지원을 받아 동학농민운동이 마무리되어 조선은 철군을 요구하였으나 한반도내의 영향력을 지배하기 위하여 청나라군과 일본군은 계속주둔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 친일 내각을 구성하여 청나라의 조선개입을 막으려 했다.
7월 25일 일본은 아산 앞바다 풍도에서 일본 해군이 청나라 해군을 공격하면서 청나라 보급로를 차단하였다(풍도해전). 이는 청일전쟁의 서막이었다.
7월 28일 일본군은 아산에 주둔중이던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하고 패한 청나라군은 평양으로 후퇴하였다(성환전투).
8월 1일 청나라와 일본은 선전포고하고 청일전쟁은 한반도 조선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패배하여 청나라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연승한 일본은 중국 요동반도까지 점령하였고 청나라가 자랑하는 [4]북양함대는 일분군에게 궤멸당했다(황해해전).
청나라는 연패하자 당시 실권자인 [2]공친왕 혁흔은 화친쪽으로 기울었고 마침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청일강화조약(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진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으며 배상금으로 2억 3천냥을 일본에 지불하였다. 이 금액은 당시 일본 1년 예산의 4배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또한 랴우둥반도, 타이완섬, [6]펑후제도를 일본에 넘겨주었다. 추후 랴우둥 반도는 3국 간섭(독일, 프랑스, 러시아)으로 다시 청나라에 반환하게 된다.
청일전쟁은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와 일본군은 조선을 위해 싸운다는 명목하에 보급품은 조선에서 공급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군수물자 대부분은 현지에서 조달하면서 조선 주민들의 피해는 엄청났다.
청일전쟁 결과로 청나라의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 열강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으며 일본에게 동북아의 맹주 자리를 내주었다. 또한 일본은 대만과 중국 영토일부를 식민지로 확보하였으며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제국주의 국가로 자리잡았으며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향하는 운명이 되었다.
[1] 동학농민운동 : 탐관오리의 부조리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
[2]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3] 양무(洋務)운동 : 양무는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교류 등을 일컫는 말. 청나라는 국제사회에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하는 운동
[4] 북양함대 : 청나라 말기 중국의 현대화된 해군으로 1871년 북양대신 이홍장의 지원으로 창설되었다. 북양함대는 청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극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 함대였다
[5] 메이지 유신 : 1868년 일본이 정치·경제·문화등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과정
[6] 펑후 제도 : 중화민국 타이완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총 연장은 약 300km에 이르며 크고 작은 90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청나라는 재기를 위하여 [3] 양무운동을 통해 동아시아 패권국의 위치를 되찾기 위해 서구화 및 사회개혁에 힘쓰고 있었다. 일본은 [5] 메이지 유신 이후로 급격한 근대화를 이루었고 조선 침략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때마침 [1]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자 자력으로 막지 못하게 된 조선은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일본도 조선에 병력을 파병하였다.
청나라군은 충남 아산만으로 상륙하여 주둔하였고 일본군은 인천으로 상륙하여 한양에 주둔하게 된다.
타국의 지원을 받아 동학농민운동이 마무리되어 조선은 철군을 요구하였으나 한반도내의 영향력을 지배하기 위하여 청나라군과 일본군은 계속주둔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 친일 내각을 구성하여 청나라의 조선개입을 막으려 했다.
7월 25일 일본은 아산 앞바다 풍도에서 일본 해군이 청나라 해군을 공격하면서 청나라 보급로를 차단하였다(풍도해전). 이는 청일전쟁의 서막이었다.
7월 28일 일본군은 아산에 주둔중이던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하고 패한 청나라군은 평양으로 후퇴하였다(성환전투).
8월 1일 청나라와 일본은 선전포고하고 청일전쟁은 한반도 조선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패배하여 청나라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연승한 일본은 중국 요동반도까지 점령하였고 청나라가 자랑하는 [4]북양함대는 일분군에게 궤멸당했다(황해해전).
청나라는 연패하자 당시 실권자인 [2]공친왕 혁흔은 화친쪽으로 기울었고 마침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청일강화조약(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진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으며 배상금으로 2억 3천냥을 일본에 지불하였다. 이 금액은 당시 일본 1년 예산의 4배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또한 랴우둥반도, 타이완섬, [6]펑후제도를 일본에 넘겨주었다. 추후 랴우둥 반도는 3국 간섭(독일, 프랑스, 러시아)으로 다시 청나라에 반환하게 된다.
청일전쟁은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와 일본군은 조선을 위해 싸운다는 명목하에 보급품은 조선에서 공급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군수물자 대부분은 현지에서 조달하면서 조선 주민들의 피해는 엄청났다.
청일전쟁 결과로 청나라의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 열강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으며 일본에게 동북아의 맹주 자리를 내주었다. 또한 일본은 대만과 중국 영토일부를 식민지로 확보하였으며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제국주의 국가로 자리잡았으며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향하는 운명이 되었다.
[1] 동학농민운동 : 탐관오리의 부조리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
[2]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3] 양무(洋務)운동 : 양무는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교류 등을 일컫는 말. 청나라는 국제사회에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하는 운동
[4] 북양함대 : 청나라 말기 중국의 현대화된 해군으로 1871년 북양대신 이홍장의 지원으로 창설되었다. 북양함대는 청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극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 함대였다
[5] 메이지 유신 : 1868년 일본이 정치·경제·문화등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과정
[6] 펑후 제도 : 중화민국 타이완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총 연장은 약 300km에 이르며 크고 작은 90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1894년(고종 31) 7월에서 1896년 2월까지 추진되었던 일련의 개혁운동이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제1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한 뒤 조선 정부에 개혁을 강요하였다.
(1) 제1차 갑오개혁(1894년 7월 27일~1894년 12월 17일) - 제1차 김홍집 내각
개혁 추진을 위한 정책의결 기구인 군국기무처 설치하였으며 갑신정변의 14개조 정강과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현 12개조를 반영하여 자주적으로 추진하였다
- 중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원을 연호로 사용
- 왕실 사무를 전담하는 궁내부를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의 사무를 분리함 : 궁내부와 의정부로 나뉨
- 6조를 8아문(내무아문, 외무아문, 탁지아문, 법무아문, 학무아문, 공무아문, 군무아문, 농상아문)으로 개편함.
- 내무아문 예하에 경무청을 설치하여 근대적 경찰제도 시행 및 탁지아문으로 재정을 일원화 함
- 과거제 폐지
- 은 본위 화폐제도를 시행
- 도량형을 통일하고 조세의 금납화를 단행함
- 신분제(공,사노비제)를 폐지함
-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함
(2) 제2차 갑오개혁(1894년 12월 17일~1895년 7월 7일) : 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개혁에 수구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흥선대원군의 거센반발에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군국기무처를 폐지하였다. 대신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가 있었던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전격 임명하여 총 213건의 개혁안이 제정, 실시되었는데, 상당수는 앞서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개혁안을 수정, 보완하는 것이다.
- 홍범14조를 반포
- 의정부는 내각으로 8아문은 아문이 부로 바뀌면서 7부(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농상공부로 통합)로 개편함
- 재판소를 선치하고 사법권을 행정권으로부터 분리함 : 사법부 독립
- 상공업의 활성화를 위하여 육의전을 폐지함
- 군사제도는 훈련대와 시위대를 조직함
- 한성사범학교 및 부속 소학교가 설립되고 외국어 학교 관제가 반포됨
[제3차 김홍집 내각]
청일전쟁에서 승리와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랴오둥반도를 점령하였으나 삼국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으로 랴오등반도를 청에 반환하였다. 이 와중에 2차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지나친 독주로 인하여 박영효는 정변을 꾀했다는 혐의로 실각하여 재차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와 같이 국내외 정세가 바뀌자 조선 왕실은 일본의 내정간섭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과 러시아에 우호적이던 온건개화파를 중심으로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3)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 1895년 10월 8일~1896년 2월 11일) : 제4차 김홍집내각
조선정부의 친러 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친러 정책을 주도한 명성 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감행하였다. 친러내각이 붕괴되고 친일적 성격이 강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추진된 개혁을 을미개혁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
- 군제를 변경하여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
- 단발령 시행
- 태양력을 채택하고 종두법을 시행함
-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우편 사무가 재개됨
-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소학교가 설립됨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시행하자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도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하였다(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미국과 가깝게 지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세웠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나무위키등..
*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 김홍집(1842~1896):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 군국기무처 : 조선말기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던 최고 정책결정 기관. 6월 25일부터 같은 해 12월 17일까지 존속
* 을미사변 :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조선왕후(명성황후) 민씨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일본인 낭인등에게 살해된 사건
* 아관파천 : 을미사변으로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과 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간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
* 홍범14조 : 고종이 종묘에서 선포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정책백서이자 헌법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제1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한 뒤 조선 정부에 개혁을 강요하였다.
(1) 제1차 갑오개혁(1894년 7월 27일~1894년 12월 17일) - 제1차 김홍집 내각
개혁 추진을 위한 정책의결 기구인 군국기무처 설치하였으며 갑신정변의 14개조 정강과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현 12개조를 반영하여 자주적으로 추진하였다
- 중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원을 연호로 사용
- 왕실 사무를 전담하는 궁내부를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의 사무를 분리함 : 궁내부와 의정부로 나뉨
- 6조를 8아문(내무아문, 외무아문, 탁지아문, 법무아문, 학무아문, 공무아문, 군무아문, 농상아문)으로 개편함.
- 내무아문 예하에 경무청을 설치하여 근대적 경찰제도 시행 및 탁지아문으로 재정을 일원화 함
- 과거제 폐지
- 은 본위 화폐제도를 시행
- 도량형을 통일하고 조세의 금납화를 단행함
- 신분제(공,사노비제)를 폐지함
-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함
(2) 제2차 갑오개혁(1894년 12월 17일~1895년 7월 7일) : 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개혁에 수구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흥선대원군의 거센반발에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군국기무처를 폐지하였다. 대신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가 있었던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전격 임명하여 총 213건의 개혁안이 제정, 실시되었는데, 상당수는 앞서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개혁안을 수정, 보완하는 것이다.
- 홍범14조를 반포
- 의정부는 내각으로 8아문은 아문이 부로 바뀌면서 7부(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농상공부로 통합)로 개편함
- 재판소를 선치하고 사법권을 행정권으로부터 분리함 : 사법부 독립
- 상공업의 활성화를 위하여 육의전을 폐지함
- 군사제도는 훈련대와 시위대를 조직함
- 한성사범학교 및 부속 소학교가 설립되고 외국어 학교 관제가 반포됨
[제3차 김홍집 내각]
청일전쟁에서 승리와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랴오둥반도를 점령하였으나 삼국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으로 랴오등반도를 청에 반환하였다. 이 와중에 2차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지나친 독주로 인하여 박영효는 정변을 꾀했다는 혐의로 실각하여 재차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와 같이 국내외 정세가 바뀌자 조선 왕실은 일본의 내정간섭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과 러시아에 우호적이던 온건개화파를 중심으로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3)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 1895년 10월 8일~1896년 2월 11일) : 제4차 김홍집내각
조선정부의 친러 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친러 정책을 주도한 명성 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감행하였다. 친러내각이 붕괴되고 친일적 성격이 강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추진된 개혁을 을미개혁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
- 군제를 변경하여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
- 단발령 시행
- 태양력을 채택하고 종두법을 시행함
-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우편 사무가 재개됨
-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소학교가 설립됨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시행하자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도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하였다(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미국과 가깝게 지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세웠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나무위키등..
*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 김홍집(1842~1896):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 군국기무처 : 조선말기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던 최고 정책결정 기관. 6월 25일부터 같은 해 12월 17일까지 존속
* 을미사변 :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조선왕후(명성황후) 민씨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일본인 낭인등에게 살해된 사건
* 아관파천 : 을미사변으로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과 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간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
* 홍범14조 : 고종이 종묘에서 선포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정책백서이자 헌법
조선은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자 자력으로 막지 못하여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일본도 조선에 병력을 파병하였다.
청나라군은 충남 아산만으로 상륙하여 주둔하였고 일본군은 인천으로 상륙하여 한양에 주둔하였다.
일본은 아산만의 청나라 군대를 봉쇄하고자 한양에서 충남 아산방향으로 내려왔다.
7월 28일 아산에서 약 15km 떨어진 [2]성환지역에서 청나라군과 일본군간 전투가 일어났다. 결과는 청나라군이 패배하였다.
이 전투가 성환전투이며 아산전투라고도 불린다.
아산에 주둔한 3,500명의 청나라군은 [1]풍도 해전에서 패배로 지원군이 차단되어 성환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승리한 일본군은 청나라군 주둔지까지 밀고 내려가 아산에서 승리를 자축했다.
청나라군은 평양으로 후퇴해 일본군과의 일전을 준비했고 8월 1일에 공식적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벌어진 평양 전투에서도 청나라군은 패배하여 한반도내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1] 풍도 해전 : 1894년 7월 25일 조선 충청도 아산만 입구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면서 일어나 해전
[2] 성환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청나라군은 충남 아산만으로 상륙하여 주둔하였고 일본군은 인천으로 상륙하여 한양에 주둔하였다.
일본은 아산만의 청나라 군대를 봉쇄하고자 한양에서 충남 아산방향으로 내려왔다.
7월 28일 아산에서 약 15km 떨어진 [2]성환지역에서 청나라군과 일본군간 전투가 일어났다. 결과는 청나라군이 패배하였다.
이 전투가 성환전투이며 아산전투라고도 불린다.
아산에 주둔한 3,500명의 청나라군은 [1]풍도 해전에서 패배로 지원군이 차단되어 성환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승리한 일본군은 청나라군 주둔지까지 밀고 내려가 아산에서 승리를 자축했다.
청나라군은 평양으로 후퇴해 일본군과의 일전을 준비했고 8월 1일에 공식적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벌어진 평양 전투에서도 청나라군은 패배하여 한반도내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1] 풍도 해전 : 1894년 7월 25일 조선 충청도 아산만 입구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면서 일어나 해전
[2] 성환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이며 동학농민군이 벌인 전투 중 최대 규모였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동학농민전쟁의 전세를 결정할 수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결과는 동학농민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조선·일본 연합군에 패함으로써 1894년 3월 20일 전남 고창 [1] 무장기포 이후 이어진 동학농민전쟁이 사실상 종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전봉준이하 동학농민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공주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논산에서 [3]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공주감영을 향해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조선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은 뛰어난 화력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동학농민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만을 남긴 채 패퇴하였다.
[1] 무장기포 : 무장은 전북 고창의 옛지명. 무장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 전봉준(1855년~1895년) : 농민 운동가이자 천도교(동학)의 지도자. 녹두장군
[3] 손병희(1861년~1922년) : 천도교(동학)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결과는 동학농민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조선·일본 연합군에 패함으로써 1894년 3월 20일 전남 고창 [1] 무장기포 이후 이어진 동학농민전쟁이 사실상 종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전봉준이하 동학농민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공주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논산에서 [3]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공주감영을 향해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조선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은 뛰어난 화력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동학농민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만을 남긴 채 패퇴하였다.
[1] 무장기포 : 무장은 전북 고창의 옛지명. 무장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 전봉준(1855년~1895년) : 농민 운동가이자 천도교(동학)의 지도자. 녹두장군
[3] 손병희(1861년~1922년) : 천도교(동학)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여순 대학살 사건은 청일전쟁중에 일본군이 요동반도의 [1]여순 일대를 점령한 이후 발생한 대규모 학살 사건이다.
1984년 일본과 청나라는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황해해전, 평야전투등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압록강을 넘어 10월에 청나라 국경내에 진입하였고 11월에 청나라의 군사적 요충지인 요동반도의 여순으로 진격하였다.
11월 18일 일본군은 여순을 공격했으나 청나라 병사들의 처절한 저항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여순을 포위하고 많은 병력으로 진입하면서 결국 11월 21일에 여순을 점령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패잔병 탐색과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학살이 일어났으며 민간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여순 길바닥은 청나라 사람들의 시체가 널려있어 방해가 될 정도였으며 집집마다 대여섯 명의 시체가 없는 집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희생당한 청나라의 군인과 민간인은 약 2만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여순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만충묘(万忠墓)와 만충묘 기념관이 있어 당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여순 대학살 사건은 추후 일본이 벌이는 군국주의 대학살의 시발점이 되었다.
[1] 여순(旅順) : 중국의 요동(랴오동) 반도의 남쪽끝에 위치. 현재는 랴오닝성 다롄(대련)시의 행정구역
1984년 일본과 청나라는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황해해전, 평야전투등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압록강을 넘어 10월에 청나라 국경내에 진입하였고 11월에 청나라의 군사적 요충지인 요동반도의 여순으로 진격하였다.
11월 18일 일본군은 여순을 공격했으나 청나라 병사들의 처절한 저항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여순을 포위하고 많은 병력으로 진입하면서 결국 11월 21일에 여순을 점령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패잔병 탐색과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학살이 일어났으며 민간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여순 길바닥은 청나라 사람들의 시체가 널려있어 방해가 될 정도였으며 집집마다 대여섯 명의 시체가 없는 집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희생당한 청나라의 군인과 민간인은 약 2만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여순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만충묘(万忠墓)와 만충묘 기념관이 있어 당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여순 대학살 사건은 추후 일본이 벌이는 군국주의 대학살의 시발점이 되었다.
[1] 여순(旅順) : 중국의 요동(랴오동) 반도의 남쪽끝에 위치. 현재는 랴오닝성 다롄(대련)시의 행정구역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청일전쟁을 벌였다.
청일전쟁 개전부터 일방적으로 연패하자 [8]공친왕이 미국에 화친 중재를 요청하여 미국이 응했으나 일본이 거절한다. 중재가 이루어지지 않자 1985년 3월 19일 [2]이홍장이 직접 [1]시모노세키로 건너가 3월 20일 굴욕적인 협상을 시작한다.
협상은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2]이홍장은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몇 차례 협상이 진행되던중 3월 24일 이홍장이 회견장에서 숙소로 돌아가던 도중에 고야마 도요타로라는 일본인이 쏜 총탄이 왼쪽 뺨에 맞으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일본은 정전을 부탁하려고 온 이홍장에게 오히려 사과를 표해야 했고, 이에 영향을 받아 [9]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은 1895년 4월 17일 전문 11개 조항의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의 주요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청나라는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일본과 대등한 국가임을 인정한다. 이는 청나라의 조선간섭을 배제함을 의미한다.
2. 청나라는 [7]랴오둥 반도, [6]타이완 섬, [3]펑후 제도 등 부속 여러 섬의 주권 및 그 지방에 있는 성루, 병기제조소 등을 일본에 양도한다.
3. 청나라는 일본에 배상금 2억 3천냥을 지불한다. 당시 일본 화폐로 환산하면 3억 6천만 엔으로 일본 정부 4년치 세입이다.
4. 청나라는 사스(沙市), 충칭(重慶),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를 개방하고 일본인의 거주, 영업, 무역의 자유를 승인한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배제되었고 일본은 조선에서 만주까지 지배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패배한 청나라는 조선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열강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는 일본의 [5]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와 청나라의 [4]양무운동 이후의 근대화를 비교해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의 엄청난 이득이 알려지자 일본의 세력 확대를 염려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는 청나라에 반환하였다.
[1] 시모노세키 : 일본의 야마구치현에 있는 항구도시로 도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으로 조선통신사도 이곳을 통해 일본을 왕복했다
[2] 이홍장(리훙장,李鴻章,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정치가로 중국 부국강병을 위하여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3] 펑후 제도 : 중화민국 타이완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총 연장은 약 300km에 이르며 크고 작은 90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4] 양무(洋務)운동 : 양무는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교류 등을 일컫는 말. 청나라는 국제사회에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하는 운동
[5] 메이지 유신 : 1868년 일본이 정치·경제·문화등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과정
[6] 타이완 : 현 중화민국.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동안 일본 식민지배로 있었다
[7] 랴오둥반도(遼東半島) : 요동반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에 할양했으나, 삼국간섭으로 반환받았다. 이후 러시아가 지배했다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다시 지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국공내전을 거친 중화인민공화국의 랴오닝성에 남아 현재에 이른다
[8] 공친왕(1833년~1898년) : 청나라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9] 이토 히로부미(1841년~1909년) : 일본의 1,5,7,10대 내각총리대신.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인물들 중의 한 명
청일전쟁 개전부터 일방적으로 연패하자 [8]공친왕이 미국에 화친 중재를 요청하여 미국이 응했으나 일본이 거절한다. 중재가 이루어지지 않자 1985년 3월 19일 [2]이홍장이 직접 [1]시모노세키로 건너가 3월 20일 굴욕적인 협상을 시작한다.
협상은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2]이홍장은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몇 차례 협상이 진행되던중 3월 24일 이홍장이 회견장에서 숙소로 돌아가던 도중에 고야마 도요타로라는 일본인이 쏜 총탄이 왼쪽 뺨에 맞으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일본은 정전을 부탁하려고 온 이홍장에게 오히려 사과를 표해야 했고, 이에 영향을 받아 [9]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은 1895년 4월 17일 전문 11개 조항의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의 주요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청나라는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일본과 대등한 국가임을 인정한다. 이는 청나라의 조선간섭을 배제함을 의미한다.
2. 청나라는 [7]랴오둥 반도, [6]타이완 섬, [3]펑후 제도 등 부속 여러 섬의 주권 및 그 지방에 있는 성루, 병기제조소 등을 일본에 양도한다.
3. 청나라는 일본에 배상금 2억 3천냥을 지불한다. 당시 일본 화폐로 환산하면 3억 6천만 엔으로 일본 정부 4년치 세입이다.
4. 청나라는 사스(沙市), 충칭(重慶),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를 개방하고 일본인의 거주, 영업, 무역의 자유를 승인한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배제되었고 일본은 조선에서 만주까지 지배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패배한 청나라는 조선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열강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는 일본의 [5]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와 청나라의 [4]양무운동 이후의 근대화를 비교해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의 엄청난 이득이 알려지자 일본의 세력 확대를 염려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는 청나라에 반환하였다.
[1] 시모노세키 : 일본의 야마구치현에 있는 항구도시로 도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으로 조선통신사도 이곳을 통해 일본을 왕복했다
[2] 이홍장(리훙장,李鴻章,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정치가로 중국 부국강병을 위하여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3] 펑후 제도 : 중화민국 타이완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총 연장은 약 300km에 이르며 크고 작은 90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4] 양무(洋務)운동 : 양무는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교류 등을 일컫는 말. 청나라는 국제사회에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하는 운동
[5] 메이지 유신 : 1868년 일본이 정치·경제·문화등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과정
[6] 타이완 : 현 중화민국.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동안 일본 식민지배로 있었다
[7] 랴오둥반도(遼東半島) : 요동반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에 할양했으나, 삼국간섭으로 반환받았다. 이후 러시아가 지배했다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다시 지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국공내전을 거친 중화인민공화국의 랴오닝성에 남아 현재에 이른다
[8] 공친왕(1833년~1898년) : 청나라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9] 이토 히로부미(1841년~1909년) : 일본의 1,5,7,10대 내각총리대신.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인물들 중의 한 명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조선왕후(명성황후) 민씨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일본 자객에 의해 경복궁의 건청궁 옥호루에서 시해 당했다. 명성황후 암살사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16세 때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사후에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16세 때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사후에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을미개혁은 제1·2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김홍집 내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아 제3차 갑오개혁이라고도 한다.
조선정부의 친러 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친러 정책을 주도한 명성 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감행하였다. 친러내각이 붕괴되고 친일적 성격이 강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추진된 개혁을 을미개혁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
- 군제를 변경하여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
- 단발령 시행
- 태양력을 채택하고 종두법을 시행함
-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우편 사무가 재개됨
-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소학교가 설립됨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시행하자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하였다(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미국과 가깝게 지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세웠다.
이로 인해 김홍집내각은 전복되고 일본의 입지가 추락되었고 강제에 의한 개혁이 중단되었으며, 구내각의 김홍집·정병하·어윤중 등 정부의 몇몇 개화파인사들은 서울과 지방에서 각기 성난 군중에 의해 피살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미개혁)]
조선정부의 친러 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친러 정책을 주도한 명성 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감행하였다. 친러내각이 붕괴되고 친일적 성격이 강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추진된 개혁을 을미개혁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
- 군제를 변경하여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
- 단발령 시행
- 태양력을 채택하고 종두법을 시행함
-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우편 사무가 재개됨
-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소학교가 설립됨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시행하자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하였다(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미국과 가깝게 지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세웠다.
이로 인해 김홍집내각은 전복되고 일본의 입지가 추락되었고 강제에 의한 개혁이 중단되었으며, 구내각의 김홍집·정병하·어윤중 등 정부의 몇몇 개화파인사들은 서울과 지방에서 각기 성난 군중에 의해 피살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미개혁)]
고종은 1895년 [1]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종은 이후 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약 1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했다.
1896년 6월 고종의 명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 자격으로 파견된 [2]민영환은 러시아 외무장관 로바노프를 만나 러시아 군대파견, 군사교관단 파견, 차관제공, 재정고문초빙, 전신선 가설 등의 요청을 하였다.
[2]민영환의 절박함과 진정성으로 1896년 10월 러시아는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을 파견한다. 교관단들은 조선군 1600여 명을 선발해 군사훈련을 시키게 된다.
안전신변이 확보된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덕수궁(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빼았겼던 군주권을 회복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1] 을미사변 : 1895년 일본에 의하여 조선왕후인 명성왕후가 살해된 사건
[2] 민영환(1861년~1905년) :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크게 개탄하며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국민들에게 남기고 11월 30일 자결하였다.
* 아관 : 러시아제국을 한문으로 '아라사'라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였다. 따라서 아라사 공관을 줄여서 아관이라고 불렀으며 러시아 공관을 의미한다
* 파천 :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가는 것
*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 1841년~1910년) :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주(駐)조선 러시아 공사로 활동하면서 고종과 친분을 쌓았으며 아관파천을 주도하였다
고종은 이후 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약 1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했다.
1896년 6월 고종의 명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 자격으로 파견된 [2]민영환은 러시아 외무장관 로바노프를 만나 러시아 군대파견, 군사교관단 파견, 차관제공, 재정고문초빙, 전신선 가설 등의 요청을 하였다.
[2]민영환의 절박함과 진정성으로 1896년 10월 러시아는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을 파견한다. 교관단들은 조선군 1600여 명을 선발해 군사훈련을 시키게 된다.
안전신변이 확보된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덕수궁(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빼았겼던 군주권을 회복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1] 을미사변 : 1895년 일본에 의하여 조선왕후인 명성왕후가 살해된 사건
[2] 민영환(1861년~1905년) :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크게 개탄하며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국민들에게 남기고 11월 30일 자결하였다.
* 아관 : 러시아제국을 한문으로 '아라사'라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였다. 따라서 아라사 공관을 줄여서 아관이라고 불렀으며 러시아 공관을 의미한다
* 파천 :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가는 것
*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 1841년~1910년) :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주(駐)조선 러시아 공사로 활동하면서 고종과 친분을 쌓았으며 아관파천을 주도하였다
광무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직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시행한 대한제국의 근대화 개혁이다.
광무개혁은 '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 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래 부분적으로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여 나라의 발전을 이룩하려 하였다.
대한제국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자주성을 뒷받침하기 이해 국방력 강화와 재정 개혁,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다. 먼저 황제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고, 서울의 중앙군과 지방의 지방군을 대폭 증강하며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다.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함인 양무호를 구입하였다. 양무호는 매우 빈약했으며 이마저도 러일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겨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1896년 1월 11일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폐지되고 대한제국이 건국 후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9년에 [1]양지아문을 설치하고 1899년부터 1903년까지 일부 지역에서 토지조사사업과 [2]지계발급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토지를 법률의 보호 아래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는 토지거래 질서가 확립 되었으며, 국가 재정을 개선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갑오개혁 때 23부로 개편한 행정을 아관파천 이후 13도로 재개편하였다,
적극적으로 추진된 분야는 상공업 진흥책이다. 정부 스스로 제조공장을 설립했으며, 민간의 제조회사 설립을 지원하여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근대적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했으며, 공업전습소 등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황실에서는 방직공장, 유리공장, 제지공장의 설립을 시도했고, 일반 민간인의 공장 설립은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지만 황실이 직영하는 업종 이외의 것은 쉽게 허가하였다.
정부는 근대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근대적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의학교를 설립하여 국민들의 위생과 보건에 노력했으며 중학교를 설립하여 중등교육의 근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한성도시개조상업을 통해 도로와 하수도를 정비하고 교통, 통신, 전기, 전차 등의 근대 시설을 도입하여 산업발전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시기인 1899년에 전차개통과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그 밖에 도량형 제도와 호적제 실시, 순회 재판소 설치, 종합병원인 제중원(濟衆院), 구휼기관인 혜민원(惠民院)등이 설립되었다.
광무개혁은 이처럼 전제군주제의 확립을 통해 근대 주권국가를 지향했고, 짧은 기간에 국방, 산업, 교육, 기술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러일전쟁과 함께 대한제국 정부의 개혁 사업은 중단되었다.
광무개혁은 황제권 강화라는 보수적인 색채와 지계발급, 상공업 진흥, 기술학교 설립, 교통.통신의 인프라 개선등 개혁적이고 새로운 특징을 볼 수 있다. 또한 갑신벙변, 갑오개혁, 을미개혁 같은 개혁들에 비해 자주적으로 추진했던 개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보수적인 인물들이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점을 들어 광무개혁의 개혁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 송찬섭외 지음,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p250-25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광무개혁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양지아문(量地衙門) : 1898년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서
[2] 지계 : 토지 소유권 증명 문서
광무개혁은 '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 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래 부분적으로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여 나라의 발전을 이룩하려 하였다.
대한제국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자주성을 뒷받침하기 이해 국방력 강화와 재정 개혁,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다. 먼저 황제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고, 서울의 중앙군과 지방의 지방군을 대폭 증강하며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다.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함인 양무호를 구입하였다. 양무호는 매우 빈약했으며 이마저도 러일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겨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1896년 1월 11일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폐지되고 대한제국이 건국 후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9년에 [1]양지아문을 설치하고 1899년부터 1903년까지 일부 지역에서 토지조사사업과 [2]지계발급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토지를 법률의 보호 아래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는 토지거래 질서가 확립 되었으며, 국가 재정을 개선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갑오개혁 때 23부로 개편한 행정을 아관파천 이후 13도로 재개편하였다,
적극적으로 추진된 분야는 상공업 진흥책이다. 정부 스스로 제조공장을 설립했으며, 민간의 제조회사 설립을 지원하여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근대적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했으며, 공업전습소 등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황실에서는 방직공장, 유리공장, 제지공장의 설립을 시도했고, 일반 민간인의 공장 설립은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지만 황실이 직영하는 업종 이외의 것은 쉽게 허가하였다.
정부는 근대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근대적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의학교를 설립하여 국민들의 위생과 보건에 노력했으며 중학교를 설립하여 중등교육의 근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한성도시개조상업을 통해 도로와 하수도를 정비하고 교통, 통신, 전기, 전차 등의 근대 시설을 도입하여 산업발전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시기인 1899년에 전차개통과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그 밖에 도량형 제도와 호적제 실시, 순회 재판소 설치, 종합병원인 제중원(濟衆院), 구휼기관인 혜민원(惠民院)등이 설립되었다.
광무개혁은 이처럼 전제군주제의 확립을 통해 근대 주권국가를 지향했고, 짧은 기간에 국방, 산업, 교육, 기술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러일전쟁과 함께 대한제국 정부의 개혁 사업은 중단되었다.
광무개혁은 황제권 강화라는 보수적인 색채와 지계발급, 상공업 진흥, 기술학교 설립, 교통.통신의 인프라 개선등 개혁적이고 새로운 특징을 볼 수 있다. 또한 갑신벙변, 갑오개혁, 을미개혁 같은 개혁들에 비해 자주적으로 추진했던 개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보수적인 인물들이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점을 들어 광무개혁의 개혁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 송찬섭외 지음,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p250-25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광무개혁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양지아문(量地衙門) : 1898년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서
[2] 지계 : 토지 소유권 증명 문서
아관파천이후 1897년 2월에 덕수궁(경운궁)으로 환궁한 조선의 제26대 국왕 고종은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光武)'로 고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현재의 조선호텔 자리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인 환구단을 건설하였다. 환구단에서 1897년 10월 12일(음력 9월 17일)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내외에 선포하였다. 11월에 그때까지 미뤄졌던 명성왕후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렀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자주독립국가임을 내외에 거듭 재천명한 것이며, 자주독립의 강화를 국내와 세계에 알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강대국들은 대한제국 선포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1899년 근대 헌법의 성격의 전문 9조로 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 반포하여 대내외적으로 전제군주국가의 체제를 확고하게 법률적으로 규정하였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대한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제국이다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정치이다
제3조 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누린다
제5조 대한국 대황제는 육해군을 통솔한다
제6조 대한국 대황제는 법률을 제정하여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고, 대사, 특사, 감형, 복권등을 명한다
제9조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 체결 국가에 사신을 파견하고 선전, 강화 및 제반조규를 체결한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일본과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으며,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으로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자주독립국가임을 내외에 거듭 재천명한 것이며, 자주독립의 강화를 국내와 세계에 알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강대국들은 대한제국 선포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1899년 근대 헌법의 성격의 전문 9조로 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 반포하여 대내외적으로 전제군주국가의 체제를 확고하게 법률적으로 규정하였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대한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제국이다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정치이다
제3조 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누린다
제5조 대한국 대황제는 육해군을 통솔한다
제6조 대한국 대황제는 법률을 제정하여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고, 대사, 특사, 감형, 복권등을 명한다
제9조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 체결 국가에 사신을 파견하고 선전, 강화 및 제반조규를 체결한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일본과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으며,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으로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스페인은 16세기 쿠바를 정복한 이래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배에 가장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 쿠바섬이었다.
[3]먼로 독트린으로 영향을 받은 쿠바에서도 독립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스페인은 쿠바 1차 독립전쟁인 10년 전쟁(1868~1878)을 종결하고 휴전상태였다.
1895년 2월 24일에 스페인의 지배에 반발하는 봉기가 각지에서 발발하면서 쿠바의 2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1898년 1월 쿠바 [2]아바나에서 자국민들의 소요가 발생하자, 미국은 [2]아바나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의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이유로 미국 해군이 주둔하게 된다.
1898년 2월15일 쿠바 아바나만에서 미 해군 함정 메인함이 원인 불명의 폭발과 함께 침몰하여 260명의 승무원들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새로운 제국 미국의 등장을 알린 미국-스페인 전쟁(미-서 전쟁)의 시발이었다.
사건 당시에 미국은 이 사건을 스페인이 일으킨 것으로 몰아서 전쟁의 구실로 삼았다. 미국의 언론들은 애국주의를 부추기면서 스페인간의 대립을 부채질하였다. 4월 11일에 [1]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은 의회에 개입 승인을 요청하였다. 미 의회는 4월 19일 쿠바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의결하여 사실상 전쟁을 선언했다.
황혼의 제국 스페인은 전쟁을 벌일 처지도 아니었고 의지도 없었다. 미국은 쿠바를 점령하고 카리브해에서 승리하여 카리브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아시아의 전진기지로 필리핀을 노리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켜 준다는 명분으로 스페인군을 필리핀에서 몰아내면서 필리핀을 지배하하였다.
전쟁은 필리핀과 쿠바에서 미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에서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의 지배권이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 일본도 이 전쟁의 혜택을 얻었다.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과 서로 필리핀과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상호인정한 것이다.
[1]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1843년~1901년) : 미국의 제25대 대통령(임기 1897년 3월 4일~1901년 9월 14일). 1901년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2] 아바나(Havana) : 쿠바의 수도
[3] 먼로독트린 : 1823년 12월 3일, 제5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에 의해 주창된 외교방침으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간에 상호 불간섭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외교적 고립정책. 미국은 이 선언을 통하여 유럽 열강은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려 하지 말 것, 신생 독립국에 대해 유럽이 간섭하지 말 것, 미국은 유럽이 보유하고 있는 기존의 식민지를 포함해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유럽 국가가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을 식민지화 하려고 한다거나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면 이를 미국에 대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대응하겠다는 내용과 미국 역시 유럽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개입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3]먼로 독트린으로 영향을 받은 쿠바에서도 독립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스페인은 쿠바 1차 독립전쟁인 10년 전쟁(1868~1878)을 종결하고 휴전상태였다.
1895년 2월 24일에 스페인의 지배에 반발하는 봉기가 각지에서 발발하면서 쿠바의 2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1898년 1월 쿠바 [2]아바나에서 자국민들의 소요가 발생하자, 미국은 [2]아바나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의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이유로 미국 해군이 주둔하게 된다.
1898년 2월15일 쿠바 아바나만에서 미 해군 함정 메인함이 원인 불명의 폭발과 함께 침몰하여 260명의 승무원들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새로운 제국 미국의 등장을 알린 미국-스페인 전쟁(미-서 전쟁)의 시발이었다.
사건 당시에 미국은 이 사건을 스페인이 일으킨 것으로 몰아서 전쟁의 구실로 삼았다. 미국의 언론들은 애국주의를 부추기면서 스페인간의 대립을 부채질하였다. 4월 11일에 [1]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은 의회에 개입 승인을 요청하였다. 미 의회는 4월 19일 쿠바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의결하여 사실상 전쟁을 선언했다.
황혼의 제국 스페인은 전쟁을 벌일 처지도 아니었고 의지도 없었다. 미국은 쿠바를 점령하고 카리브해에서 승리하여 카리브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아시아의 전진기지로 필리핀을 노리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켜 준다는 명분으로 스페인군을 필리핀에서 몰아내면서 필리핀을 지배하하였다.
전쟁은 필리핀과 쿠바에서 미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에서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의 지배권이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 일본도 이 전쟁의 혜택을 얻었다.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과 서로 필리핀과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상호인정한 것이다.
[1]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1843년~1901년) : 미국의 제25대 대통령(임기 1897년 3월 4일~1901년 9월 14일). 1901년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2] 아바나(Havana) : 쿠바의 수도
[3] 먼로독트린 : 1823년 12월 3일, 제5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에 의해 주창된 외교방침으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간에 상호 불간섭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외교적 고립정책. 미국은 이 선언을 통하여 유럽 열강은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려 하지 말 것, 신생 독립국에 대해 유럽이 간섭하지 말 것, 미국은 유럽이 보유하고 있는 기존의 식민지를 포함해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유럽 국가가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을 식민지화 하려고 한다거나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면 이를 미국에 대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대응하겠다는 내용과 미국 역시 유럽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개입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필리핀 마닐라 만에서 미국과 스페인 간에 벌어진 마닐라 해전은 미국-스페인 전쟁의 첫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미국 아시아 함대는 [1]조지 듀이 제독의 지휘 아래 스페인 태평양 함대를 압도적으로 격파하였다.
당시 스페인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통치하고 있었으나 이미 군사적·경제적으로 쇠퇴한 상태였으며 함대의 구성과 전투력 면에서도 미국과 큰 격차가 있었다. 이에 반해 미국은 영국령 홍콩에 정박해 있던 근대적 전함을 갖춘 아시아 함대를 마닐라 만으로 진입시켜 기습적으로 스페인 함대를 공격하였다.
전투는 새벽 무렵부터 시작되었으며 미군은 단 한 척의 군함도 상실하지 않고 스페인 함대를 전멸시키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스페인 측은 대부분의 함선이 침몰하거나 항복하였으며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 해전의 결과로 미국은 필리핀 제도에 대한 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필리핀 점령과 식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반면 필리핀 역사에서 스페인 식민지 시기를 종식한 사건이었다.
나아가 마닐라 해전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태평양 지역에 영향력을 확장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였고 스페인의 아시아 식민지 체제는 이로써 사실상 붕괴되었다.
[1] 조지 듀이(George Dewey, 1837년 12월 26일 ~ 1917년 1월 16일) : 제24대 아시아 함대 사령관(재위, 1898년 1월 3일~1899년 5월 20일 ).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 중 마닐라 해전의 승리로 인해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고 태평양 지역으로 제국주의적 확장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이 승리로 조지 듀이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당시 스페인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통치하고 있었으나 이미 군사적·경제적으로 쇠퇴한 상태였으며 함대의 구성과 전투력 면에서도 미국과 큰 격차가 있었다. 이에 반해 미국은 영국령 홍콩에 정박해 있던 근대적 전함을 갖춘 아시아 함대를 마닐라 만으로 진입시켜 기습적으로 스페인 함대를 공격하였다.
전투는 새벽 무렵부터 시작되었으며 미군은 단 한 척의 군함도 상실하지 않고 스페인 함대를 전멸시키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스페인 측은 대부분의 함선이 침몰하거나 항복하였으며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 해전의 결과로 미국은 필리핀 제도에 대한 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필리핀 점령과 식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반면 필리핀 역사에서 스페인 식민지 시기를 종식한 사건이었다.
나아가 마닐라 해전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태평양 지역에 영향력을 확장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였고 스페인의 아시아 식민지 체제는 이로써 사실상 붕괴되었다.
[1] 조지 듀이(George Dewey, 1837년 12월 26일 ~ 1917년 1월 16일) : 제24대 아시아 함대 사령관(재위, 1898년 1월 3일~1899년 5월 20일 ).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 중 마닐라 해전의 승리로 인해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고 태평양 지역으로 제국주의적 확장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이 승리로 조지 듀이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청나라 말기에 중국의 근대화를 꾀하기 위해 추진된 정치적‧사회적 개혁 운동으로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고도 불린다.
이 운동은 당시 청나라가 아편전쟁 패배, 열강의 침략, 내란 등으로 국력이 크게 쇠퇴한 상황에서 자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제기되었으며 [1]캉유웨이, [2]량치차오 등의 개혁 지식인들이 주도하였다.
황제인 [3]광서제의 후원을 받아 시작된 변법자강운동은 정치‧행정 개혁, 교육 제도 개편, 경제 발전, 군제 개혁 등 광범위한 분야를 포함하였다. 주요 개혁 조치로는 과거제 폐지와 신식 학교 설립, 서양식 군사 훈련 도입, 정부 기구의 간소화, 실업과 공업 진흥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서구 열강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여 중국을 근대화하고자 한 시도였다.
그러나 이 개혁은 근본적으로 청나라 조정의 전통 질서와 유교적 가치관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이는 [4]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격렬한 반발과 정치적 저항을 초래하였다.
개혁은 불과 100여일 만에 중단되었으며 [4]서태후는 광서제를 유폐하였으며 개혁을 주도한 여섯 명을 처형하여 개혁 추진은 실패하였다. 처형된 여섯 인물을 [5]"무술육군자"라 부른다.
개혁 세력이 정치‧군사적 실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지방 관료나 군부, 사대부층 등으로부터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당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6]위안스카이가 서태후 측에 가담함으로써 개혁파는 무력화되었다.
그리고 민심과 행정 조직, 제도적 기반이 부재한 상황에서 단기간 내에 과도하고 급진적인 개혁이 추진되어 내부의 반발과 혼란을 가중시켰다.
변법자강운동의 좌절은 청나라의 근대화를 한층 더 지체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후 이후 신정개혁과 신해혁명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화 운동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1] 캉유웨이(康有爲, 강유의, 1858년 3월 19일 ~ 1927년 3월 31일) : 청나라 말기의 정치사상가이자 개혁가로, 변법자강운동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유교 경전을 재해석하여 개혁 사상의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며 서양의 제도와 과학을 도입해 중국을 근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광서제를 설득해 무술변법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한 후 해외로 망명하여 이후에도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2] 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 1873년 2월 23일~1929년 1월 29일) : 청나라말기와 중화민국 초기를 대표하는 사상가, 언론인, 정치가로 캉유웨이의 제자이며 변법자강운동의 주요 인물이다. 그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 개혁 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국민의식의 계몽에 힘썼으며 후에 입헌군주제를 넘어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에도 관심을 가지며 중국 근대사상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일본 망명 중에도 활발한 저술 활동을 이어가며 지식인층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광서제(光緖帝, 1871년 8월 14일 ~ 1908년 11월 14일) : 청나라의 제11대 황제
[4] 서태후(1835년 11월 29일 ~ 1908년 11월 15일) : 청나라 말기의 권력자로, 제9대 황재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생모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이자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친할머니이다. 수렴청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여 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약 50여 년간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개인적인 사치, 보수적인 태도, 개혁 탄압, 그리고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는 판단으로 인해 청나라 멸망을 가속화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5] 무술육군자(戊戌六君子) : 탄쓰퉁(譚嗣同), 린쉬(林旭), 양션시우(楊深秀), 류광디(劉光第), 양루(楊銳), 리두(李端棻)
[6]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년 9월 16일 ~ 1916년 6월 6일) : 중국 청나라말기에서 중화민국 초기에 걸쳐 활약한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혼란스러운 중국 근대사의 전환점에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개인적인 야심과 독재적인 통치, 그리고 제정 복고 시도로 인해 중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한 인물로 비판받고 있다
이 운동은 당시 청나라가 아편전쟁 패배, 열강의 침략, 내란 등으로 국력이 크게 쇠퇴한 상황에서 자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제기되었으며 [1]캉유웨이, [2]량치차오 등의 개혁 지식인들이 주도하였다.
황제인 [3]광서제의 후원을 받아 시작된 변법자강운동은 정치‧행정 개혁, 교육 제도 개편, 경제 발전, 군제 개혁 등 광범위한 분야를 포함하였다. 주요 개혁 조치로는 과거제 폐지와 신식 학교 설립, 서양식 군사 훈련 도입, 정부 기구의 간소화, 실업과 공업 진흥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서구 열강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여 중국을 근대화하고자 한 시도였다.
그러나 이 개혁은 근본적으로 청나라 조정의 전통 질서와 유교적 가치관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이는 [4]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격렬한 반발과 정치적 저항을 초래하였다.
개혁은 불과 100여일 만에 중단되었으며 [4]서태후는 광서제를 유폐하였으며 개혁을 주도한 여섯 명을 처형하여 개혁 추진은 실패하였다. 처형된 여섯 인물을 [5]"무술육군자"라 부른다.
개혁 세력이 정치‧군사적 실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지방 관료나 군부, 사대부층 등으로부터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당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6]위안스카이가 서태후 측에 가담함으로써 개혁파는 무력화되었다.
그리고 민심과 행정 조직, 제도적 기반이 부재한 상황에서 단기간 내에 과도하고 급진적인 개혁이 추진되어 내부의 반발과 혼란을 가중시켰다.
변법자강운동의 좌절은 청나라의 근대화를 한층 더 지체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후 이후 신정개혁과 신해혁명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화 운동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1] 캉유웨이(康有爲, 강유의, 1858년 3월 19일 ~ 1927년 3월 31일) : 청나라 말기의 정치사상가이자 개혁가로, 변법자강운동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유교 경전을 재해석하여 개혁 사상의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며 서양의 제도와 과학을 도입해 중국을 근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광서제를 설득해 무술변법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한 후 해외로 망명하여 이후에도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2] 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 1873년 2월 23일~1929년 1월 29일) : 청나라말기와 중화민국 초기를 대표하는 사상가, 언론인, 정치가로 캉유웨이의 제자이며 변법자강운동의 주요 인물이다. 그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 개혁 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국민의식의 계몽에 힘썼으며 후에 입헌군주제를 넘어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에도 관심을 가지며 중국 근대사상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일본 망명 중에도 활발한 저술 활동을 이어가며 지식인층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광서제(光緖帝, 1871년 8월 14일 ~ 1908년 11월 14일) : 청나라의 제11대 황제
[4] 서태후(1835년 11월 29일 ~ 1908년 11월 15일) : 청나라 말기의 권력자로, 제9대 황재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생모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이자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친할머니이다. 수렴청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여 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약 50여 년간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개인적인 사치, 보수적인 태도, 개혁 탄압, 그리고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는 판단으로 인해 청나라 멸망을 가속화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5] 무술육군자(戊戌六君子) : 탄쓰퉁(譚嗣同), 린쉬(林旭), 양션시우(楊深秀), 류광디(劉光第), 양루(楊銳), 리두(李端棻)
[6]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년 9월 16일 ~ 1916년 6월 6일) : 중국 청나라말기에서 중화민국 초기에 걸쳐 활약한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혼란스러운 중국 근대사의 전환점에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개인적인 야심과 독재적인 통치, 그리고 제정 복고 시도로 인해 중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한 인물로 비판받고 있다
19세기말 서구열강은 산업화에 필요한 금, 은, 고무등의 자원을 위해 아프리카 내륙으로 진출하여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1]종단정책과 프랑스의 [2]횡단정책이 아프리가 수단의 남부 [3]파쇼다(Fashoda)에서 충돌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내부적으로 정치적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외부적으로 독일과 크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빚는 것은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프랑스가 물러섬으로써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긴장관계였던 영국과 프랑스는 1904년에 영불협정으로 가까워졌다.
파쇼다 사건은 동맹간 대립구조(영국-프랑스-러시아 vs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로 확대되어 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었다.
[1] 종단정책 :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까지 아프리카의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정책
[2] 횡단정책 : 서아프리카의 알제리와 마다가스카르 섬을 연결하는 정책
[3] 파쇼다(Fashoda) : 현재 남수단의 코도크(Kodok)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1]종단정책과 프랑스의 [2]횡단정책이 아프리가 수단의 남부 [3]파쇼다(Fashoda)에서 충돌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내부적으로 정치적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외부적으로 독일과 크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빚는 것은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프랑스가 물러섬으로써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긴장관계였던 영국과 프랑스는 1904년에 영불협정으로 가까워졌다.
파쇼다 사건은 동맹간 대립구조(영국-프랑스-러시아 vs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로 확대되어 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었다.
[1] 종단정책 :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까지 아프리카의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정책
[2] 횡단정책 : 서아프리카의 알제리와 마다가스카르 섬을 연결하는 정책
[3] 파쇼다(Fashoda) : 현재 남수단의 코도크(Kodok)
필리핀은 1565년부터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아왔다. 미 해군이 마닐라를 접수할 당시에 필리핀에는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1896년 8월에 시작된 혁명은 미군이 스페인군을 몰아낸 1898년 8월까지 전개되었다.
필리핀의 독립운동가인 [1]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7년 필리핀을 지배해 온 스페인에 맞서 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홍콩으로 망명하였으나 미국-스페인 전쟁을 기회로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8년에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5월 19일 스페인과 무장 투쟁 재개를 선언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스페인군에 대항전을 전개하였다. 5월 24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고, 6월 12일에는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했다. 7월 15일에는 [2]아폴리나리오 마비니를 수상으로 한 내각이 성립되었다. 필리핀군은 미군의 마닐라 입성을 지원하며 스페인군울 몰아냈다.
[1]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이 필리핀을 독립시켜 줄 것이라 믿었지만 마닐라에 입성한 미국은 필리핀 식민지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898년 8월 13일 미군은 마닐라에 입성하였고 다음날 인 8월 14일에 마닐라에 필리핀 제도 미국군정부를 설립하였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1898년 12월 10일에 스페인과 파리에서 평화 조약에서 필리핀의 지배권을 양도받았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필리핀인들은 미국의 배반에 분노하였으며, 미국의 행위를 침략이라고 규탄했다. 1899년 1월 1일에 아기날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월 21일 필리핀 제1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1899년 2월 4일, [3]산후안 델 몬테 다리에서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 들어선 필리핀 병사와 첫 충돌이 발생하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필리핀군은 초기에는 전면전을 펼쳤으나 군사력과 무기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군은 1899년 10월 산속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으로 항전을 이어나갔다. 필리핀군은 미국군을 상대로 산악과 정글 지형을 활용해 저항했으며, 미군은 이에 대응하여 필리핀 민간인들을 집단 거주지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의 전략을 펼쳤다.
미국은 1900년 12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무자비한 학살에 기근과 질병까지 겹쳐 20만명이 넘는 필리핀인이 사망했다.
1901년 3월 23일 [4]프레더릭 펀스튼 장군이 이끄는 미군의 작전으로 [1]아기날도는 미군에게 생포되면서 필리핀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약화되었다.
4월 19일 대부분의 필리핀인들은 항복했고, 1902년 7월 2일 잔여 병력까지 진압된 이후 전쟁 종결되면서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이후 필리핀은 미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모로족이 끝까지 미국의 지배에 반발하여 [5]모로전쟁이 이어졌다. 필리핀 내 독립운동은 계속 확산되었으며, 결국 1946년 필리핀은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필리핀-미국 전쟁은 단순한 식민 전쟁이 아니라, 자주독립을 향한 필리핀인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필리핀은 강대국의 지배 속에서도 독립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는 훗날 필리핀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1869년~1964년) :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재임 1899년 1월 23일~1901년 3월 23일). 필리핀의 국부중 한 사람이자 필리핀 건국의 영웅. 필리핀 화폐 5페소 도완되었다
[2] 아폴리나리오 마비니(Apolinario Mabini, 1864년~1903년) :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필리핀의 현대 헌법의 초안자이자 작성자. 필리핀 초대수장. 필리핀의 국부중 한 사람. 필리핀 화폐 1페소 지폐,10페소 도안되었다
[3] 산후안 델 몬테(San Juan del Monte) :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북동쪽 지역의 도시
[4] 프레더릭 펀스턴(Frederick Funston, 1865년~1917년) : 미국의 군인으로 미국-스페인 전쟁과 미국-필리핀 전쟁에서 활약을 하였다. 미국-필리핀 전쟁의 작전으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5] 모로전쟁(1902년 5월 3일~1913년 6월 15일) :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와 술루 제도에서 미국과 현지 무슬림 모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필리핀의 독립운동가인 [1]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7년 필리핀을 지배해 온 스페인에 맞서 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홍콩으로 망명하였으나 미국-스페인 전쟁을 기회로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8년에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5월 19일 스페인과 무장 투쟁 재개를 선언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스페인군에 대항전을 전개하였다. 5월 24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고, 6월 12일에는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했다. 7월 15일에는 [2]아폴리나리오 마비니를 수상으로 한 내각이 성립되었다. 필리핀군은 미군의 마닐라 입성을 지원하며 스페인군울 몰아냈다.
[1]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이 필리핀을 독립시켜 줄 것이라 믿었지만 마닐라에 입성한 미국은 필리핀 식민지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898년 8월 13일 미군은 마닐라에 입성하였고 다음날 인 8월 14일에 마닐라에 필리핀 제도 미국군정부를 설립하였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1898년 12월 10일에 스페인과 파리에서 평화 조약에서 필리핀의 지배권을 양도받았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필리핀인들은 미국의 배반에 분노하였으며, 미국의 행위를 침략이라고 규탄했다. 1899년 1월 1일에 아기날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월 21일 필리핀 제1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1899년 2월 4일, [3]산후안 델 몬테 다리에서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 들어선 필리핀 병사와 첫 충돌이 발생하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필리핀군은 초기에는 전면전을 펼쳤으나 군사력과 무기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군은 1899년 10월 산속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으로 항전을 이어나갔다. 필리핀군은 미국군을 상대로 산악과 정글 지형을 활용해 저항했으며, 미군은 이에 대응하여 필리핀 민간인들을 집단 거주지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의 전략을 펼쳤다.
미국은 1900년 12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무자비한 학살에 기근과 질병까지 겹쳐 20만명이 넘는 필리핀인이 사망했다.
1901년 3월 23일 [4]프레더릭 펀스튼 장군이 이끄는 미군의 작전으로 [1]아기날도는 미군에게 생포되면서 필리핀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약화되었다.
4월 19일 대부분의 필리핀인들은 항복했고, 1902년 7월 2일 잔여 병력까지 진압된 이후 전쟁 종결되면서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이후 필리핀은 미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모로족이 끝까지 미국의 지배에 반발하여 [5]모로전쟁이 이어졌다. 필리핀 내 독립운동은 계속 확산되었으며, 결국 1946년 필리핀은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필리핀-미국 전쟁은 단순한 식민 전쟁이 아니라, 자주독립을 향한 필리핀인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필리핀은 강대국의 지배 속에서도 독립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는 훗날 필리핀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1869년~1964년) :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재임 1899년 1월 23일~1901년 3월 23일). 필리핀의 국부중 한 사람이자 필리핀 건국의 영웅. 필리핀 화폐 5페소 도완되었다
[2] 아폴리나리오 마비니(Apolinario Mabini, 1864년~1903년) :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필리핀의 현대 헌법의 초안자이자 작성자. 필리핀 초대수장. 필리핀의 국부중 한 사람. 필리핀 화폐 1페소 지폐,10페소 도안되었다
[3] 산후안 델 몬테(San Juan del Monte) :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북동쪽 지역의 도시
[4] 프레더릭 펀스턴(Frederick Funston, 1865년~1917년) : 미국의 군인으로 미국-스페인 전쟁과 미국-필리핀 전쟁에서 활약을 하였다. 미국-필리핀 전쟁의 작전으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5] 모로전쟁(1902년 5월 3일~1913년 6월 15일) :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와 술루 제도에서 미국과 현지 무슬림 모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대한국·대청국 통상 조약(大韓國·大淸國通商條約)으로 불리며 광무 3년(1899년)에 한국과 청국 사이에 조인된 전문 15조의 통상협정이다. 이 조약의 필사본은 1998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어있다.
청나라 전권 대신 서수붕과 한국 전권 대신 박제순은 1899년 2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 간 8차례 회담을 가졌으며 대한제국과 청나라 사이에 한청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약과 비교해 볼 때 동등할 정도로 대등하고 근대적인 조약이며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1) 한청통상조약은 청일전쟁 후, 무조약 관계에 있던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관계를 새로 정립시킨 조약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과 청나라는 수교 국가가 되었다.
(2) 한청통상조약은 대등조약으로서 종전의 조선-청나라 사이의 종속 관계를 부인하고 청나라와 동등한 대한제국의 지위를 규정한 조약이다.
(3) 한청통상조약은 대한제국이 오랫동안 지속되던 중국 중심의 계단식 국제 질서, 사대 조공 질서에서 벗어나 수평적인 근대적 국제 질서로 진입하고, 한편으로 근대적 국제 관계를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 국제 관계를 맺던 이중적 국제 관계에서 탈피해 근대적 국제 관계로 이행을 규정한 조약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 전권대신 : 외교 관계를 수립할 때 국가의 대표 자격을 위임받은 외교사절
청나라 전권 대신 서수붕과 한국 전권 대신 박제순은 1899년 2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 간 8차례 회담을 가졌으며 대한제국과 청나라 사이에 한청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약과 비교해 볼 때 동등할 정도로 대등하고 근대적인 조약이며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1) 한청통상조약은 청일전쟁 후, 무조약 관계에 있던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관계를 새로 정립시킨 조약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과 청나라는 수교 국가가 되었다.
(2) 한청통상조약은 대등조약으로서 종전의 조선-청나라 사이의 종속 관계를 부인하고 청나라와 동등한 대한제국의 지위를 규정한 조약이다.
(3) 한청통상조약은 대한제국이 오랫동안 지속되던 중국 중심의 계단식 국제 질서, 사대 조공 질서에서 벗어나 수평적인 근대적 국제 질서로 진입하고, 한편으로 근대적 국제 관계를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 국제 관계를 맺던 이중적 국제 관계에서 탈피해 근대적 국제 관계로 이행을 규정한 조약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 전권대신 : 외교 관계를 수립할 때 국가의 대표 자격을 위임받은 외교사절
제1·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증국번, [2]이홍장등은 강력한 중국을 위하여 양무운동을 전개했으나 내부혼란으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고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다시 몰락의 길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에서 서구의 경제적 침탈과 중국내 자유로운 포교활동으로 교회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중국 민중들의 전통적인 삶과 문화에 크게 위협받자 반기독교운동과 반외세·반제국주의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원래 [3]의화단은 산동 지방의 무술을 수련하던 권법조직으로 '권법을 익히고 몸을 수련하여 의를 도모한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무술과 주문을 통해 몸에 총알이 통하지 않는다는 신비주의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단결했고 주로 농민층과 하층민들이 중심이 되었다.
의화단은 [4]부청멸양을 내세우며 서구 세력뿐만 아니라 기독교 선교사 및 기독교로 개종한 중국인도 외세의 앞잡이로 간주하고 이들에 대한 공격과 살해를 포함한 격렬한 저항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철도, 전신, 교회 등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시설에 대한 파괴 활동이 집중되었다. 의화단은 외세의 물질문명이 중국의 전통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하여 이를 배격하고자 하였다.
의화단은 1900년 베이징으로 진입하여 서구 외교 공관들을 포위하였으며 일부 서양인들을 살해하는 등 무력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감행하였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외세를 견제할 수단으로 의화단을 공식적으로 지원하였다.
서구 열강들은 자국민이 의화단에 의해 학살당하고 이권이 침탈당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8개국 [5]연합군을 조직해 베이징으로 진입하면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선진화된 전술과 신식 무기를 상대한 청군과 의화단은 연합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결국 1901년,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함으로써 의화단은 진압되었으며, 운동은 종결되었다.
이에 대한 결과로 청나라는 열강과 굴욕적인 베이징 의정서(신축조약)를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외국군의 주둔을 허용했으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청 정부는 내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6]변법자강운동과 [7]신정이라는 일련의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내부 대립으로 효과를 내지못하고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1]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2]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실질적인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3] 의화단(義和團) : 중국 청나라 말기에 반외세·반기독교·반제국주의 성격을 지닌 무장단체로 무장단체이며 농민과 도시 하층민을 주축으로 형성되었다. 당시 외세의 침략과 기독교 세력의 팽창,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 혼란과 경제적 고통에 분노한 민중의 감정을 대변하였다
[4] 부청멸양(扶清滅洋) : 청을 돕고 서양을 멸하자
[5] 연합군 : 영국, 미국, 호주, 인도(영국군 소속),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헝가리, 이탈리아, 일본
[6] 변법장강운동(變法自彊運動, 1898년 6월 11일~1898년 9월 21일) : 상공업 진흥과 신식학교 개설을 포함한 서구식 제도 개혁운동. 변법은 '낡은법을 변화시킴'을 의미. 내부 갈등으로 실패함
[7] 신정(新政, 1901년~1911년) : 서태후 주도하의 행정, 교육, 군사, 재정등의 서구식 개혁과 입헌군주제 실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멸망
이러한 혼란한 상황에서 서구의 경제적 침탈과 중국내 자유로운 포교활동으로 교회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중국 민중들의 전통적인 삶과 문화에 크게 위협받자 반기독교운동과 반외세·반제국주의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원래 [3]의화단은 산동 지방의 무술을 수련하던 권법조직으로 '권법을 익히고 몸을 수련하여 의를 도모한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무술과 주문을 통해 몸에 총알이 통하지 않는다는 신비주의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단결했고 주로 농민층과 하층민들이 중심이 되었다.
의화단은 [4]부청멸양을 내세우며 서구 세력뿐만 아니라 기독교 선교사 및 기독교로 개종한 중국인도 외세의 앞잡이로 간주하고 이들에 대한 공격과 살해를 포함한 격렬한 저항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철도, 전신, 교회 등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시설에 대한 파괴 활동이 집중되었다. 의화단은 외세의 물질문명이 중국의 전통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하여 이를 배격하고자 하였다.
의화단은 1900년 베이징으로 진입하여 서구 외교 공관들을 포위하였으며 일부 서양인들을 살해하는 등 무력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감행하였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외세를 견제할 수단으로 의화단을 공식적으로 지원하였다.
서구 열강들은 자국민이 의화단에 의해 학살당하고 이권이 침탈당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8개국 [5]연합군을 조직해 베이징으로 진입하면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선진화된 전술과 신식 무기를 상대한 청군과 의화단은 연합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결국 1901년,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함으로써 의화단은 진압되었으며, 운동은 종결되었다.
이에 대한 결과로 청나라는 열강과 굴욕적인 베이징 의정서(신축조약)를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외국군의 주둔을 허용했으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청 정부는 내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6]변법자강운동과 [7]신정이라는 일련의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내부 대립으로 효과를 내지못하고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1]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2]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실질적인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3] 의화단(義和團) : 중국 청나라 말기에 반외세·반기독교·반제국주의 성격을 지닌 무장단체로 무장단체이며 농민과 도시 하층민을 주축으로 형성되었다. 당시 외세의 침략과 기독교 세력의 팽창,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 혼란과 경제적 고통에 분노한 민중의 감정을 대변하였다
[4] 부청멸양(扶清滅洋) : 청을 돕고 서양을 멸하자
[5] 연합군 : 영국, 미국, 호주, 인도(영국군 소속),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헝가리, 이탈리아, 일본
[6] 변법장강운동(變法自彊運動, 1898년 6월 11일~1898년 9월 21일) : 상공업 진흥과 신식학교 개설을 포함한 서구식 제도 개혁운동. 변법은 '낡은법을 변화시킴'을 의미. 내부 갈등으로 실패함
[7] 신정(新政, 1901년~1911년) : 서태후 주도하의 행정, 교육, 군사, 재정등의 서구식 개혁과 입헌군주제 실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멸망
1902년 1월 30일 영국 런던에 있는 [1]랜즈다운 후작 저택에서 [2]헨리 페티피츠모리스 영국 외무장관과 [3]하야시 다다스 영국 일본공사가 조인하면서 제1차 영일 동맹이 체결되었다.
영일동맹은 동양의 작은 나라 일본이 외교적 지위를 강화시켜준 커다란 성과였으며, 이는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제사회의 중추국가로 부상했다.
영국은 동남아시아 지역에 많은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대단히 우려하였다. 영국은 청일정쟁과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온 자국이익 보호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고 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나 또 다른 세력인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으로 자국내 대외 정책 분열까지 초래했다. 러시아 주도하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내주어야 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면 조선의 지배력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독일은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을 조장하여 러시아세력을 극동지역에 묶어두어 영국이 노불동맹 세력과 가까워지는 것을 봉쇄하는 것이 최상임을 인식하고 영일동맹을 적극적으로 중재하였다.
이러한 각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영국과 일본은 동맹을 맺었으며 협약문은 전문 6개조로 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일 양국은 조선(朝鮮)·청(淸) 양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영국은 청에, 일본은 한국에 각각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으므로, 제3국으로 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2. 영·일 양국 중 한 나라가 전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3국과 개전할 때는 동맹국은 중립을 지킨다.
3. 위의 경우에서 제3국 혹은 여러 나라들이 일국에 대해 교전할 때는 동맹국은 참전하여 공동 작전을 펴고 강화도 서로의 합의에 의해서 한다.
4. 본 협약의 유효 기간은 5년으로 한다.
영일 동맹으로 영국은 러일전쟁 기간 동안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러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만주 진출의 길목에 위치한 조선에서 안정적인 보급로 확보를 위해서 한일의정서를 강요했고, 결국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과 만주로부터 러시아 세력을 제거하였으며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위키백과,나무위키
[1] 랜즈다운 후작(Marquess of Lansdowne) : 잉글랜드의 귀족. 1784년이후 현재 9대인 찰스 페티피즈모리스가 소유하고 있다
[2] 헨리 찰스 키스 페티피츠모리스(Henry Charles Keith Petty-Fitzmaurice, 1845년~1927년) : 제5대 랜즈다운 후작. 영국의 정치인. 캐나다의 총독, 인도 부왕 겸 총독, 영국의 외무장관 등을 지냈다.
[3] 하야시 다다스(1850년~1913년) : 일본 에도 막부의 막신이었으며 메이지 시대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런던에서 1차 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영일동맹은 동양의 작은 나라 일본이 외교적 지위를 강화시켜준 커다란 성과였으며, 이는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제사회의 중추국가로 부상했다.
영국은 동남아시아 지역에 많은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대단히 우려하였다. 영국은 청일정쟁과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온 자국이익 보호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고 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나 또 다른 세력인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으로 자국내 대외 정책 분열까지 초래했다. 러시아 주도하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내주어야 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면 조선의 지배력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독일은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을 조장하여 러시아세력을 극동지역에 묶어두어 영국이 노불동맹 세력과 가까워지는 것을 봉쇄하는 것이 최상임을 인식하고 영일동맹을 적극적으로 중재하였다.
이러한 각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영국과 일본은 동맹을 맺었으며 협약문은 전문 6개조로 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일 양국은 조선(朝鮮)·청(淸) 양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영국은 청에, 일본은 한국에 각각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으므로, 제3국으로 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2. 영·일 양국 중 한 나라가 전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3국과 개전할 때는 동맹국은 중립을 지킨다.
3. 위의 경우에서 제3국 혹은 여러 나라들이 일국에 대해 교전할 때는 동맹국은 참전하여 공동 작전을 펴고 강화도 서로의 합의에 의해서 한다.
4. 본 협약의 유효 기간은 5년으로 한다.
영일 동맹으로 영국은 러일전쟁 기간 동안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러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만주 진출의 길목에 위치한 조선에서 안정적인 보급로 확보를 위해서 한일의정서를 강요했고, 결국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과 만주로부터 러시아 세력을 제거하였으며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위키백과,나무위키
[1] 랜즈다운 후작(Marquess of Lansdowne) : 잉글랜드의 귀족. 1784년이후 현재 9대인 찰스 페티피즈모리스가 소유하고 있다
[2] 헨리 찰스 키스 페티피츠모리스(Henry Charles Keith Petty-Fitzmaurice, 1845년~1927년) : 제5대 랜즈다운 후작. 영국의 정치인. 캐나다의 총독, 인도 부왕 겸 총독, 영국의 외무장관 등을 지냈다.
[3] 하야시 다다스(1850년~1913년) : 일본 에도 막부의 막신이었으며 메이지 시대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런던에서 1차 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모로 전쟁은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와 술루 제도에서 미국과 현지 무슬림 [1]모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2]필리핀-미국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이 필리핀 전역을 장악하려 하면서 발생한 저항운동의 일환이었다. [1]모로족은 오랜 기간 스페인의 지배에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통치 시도에도 강한 반발을 보이며 무장 저항을 지속했다.
1898년,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나 필리핀 전역에서 미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에 따라 [2]필리핀-미국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북부 루손 지역과 비사야스를 점령한 후에도 남부 지역의 모로족은 독립을 유지하며 미국의 지배를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모로족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모로족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며 미군에 저항했다. 미국은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모로족은 외세의 지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점점 더 강경한 군사 작전을 펼쳤고, 1906년에는 유명한 [3]바굼바얀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의 거점을 공격하여 600명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를 필리핀 평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정당화했다.
이후에도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었으나 1913년에 벌어진 [4]버드 바그삭 전투가 사실상 모로족의 마지막 대규모 저항이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 전사 500명 이상을 전멸시키며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미국은 필리핀 전역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지만 모로족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모로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필리핀 남부를 강제 통치하며 모로족의 전통적인 정치·사회 체계를 해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기독교화와 서구식 행정 제도를 도입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오히려 모로족의 반감을 더욱 키웠다. 모로족의 독립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필리핀이 1946년 독립한 이후에도 남부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분쟁이 이어졌다.
결국 모로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필리핀 남부의 자치권과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모로족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인 미국 사이의 충돌이었다. 이 전쟁의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여전히 모로족 분리주의 운동과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모로 전쟁은 필리핀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자,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1] 모로족(Moro People) :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술루 군도, 팔라완 등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 민족이다. 필리핀 전체 인구의 약 5~10%를 차지하며 말레이계 혈통을 가진 이슬람 공동체
[2] 필리핀-미국 전쟁(1899년 2월 4일~1902년 7월 4일) : 필리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미국의 새로운 식민 지배에 저항하면서 발생된 전쟁
[3] 바굼바얀 전투(Battle of Bud Dajo) : 1906년 3월 5일부터 3월 7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다호(Bud Dajo) 화산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 이 전투는 미국 식민 통치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었다.
[4] 버드 바그삭 전투(Battle of Bud Bagsak) : 1913년 6월 11일부터 6월 15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바그삭(Bud Bagsak) 산 정상에서 발생한 전투로, 미국군과 모로족 간의 마지막 대규모 충돌이었다. 모로족은 거의 전멸하였다고 한다
1898년,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나 필리핀 전역에서 미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에 따라 [2]필리핀-미국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북부 루손 지역과 비사야스를 점령한 후에도 남부 지역의 모로족은 독립을 유지하며 미국의 지배를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모로족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모로족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며 미군에 저항했다. 미국은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모로족은 외세의 지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점점 더 강경한 군사 작전을 펼쳤고, 1906년에는 유명한 [3]바굼바얀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의 거점을 공격하여 600명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를 필리핀 평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정당화했다.
이후에도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었으나 1913년에 벌어진 [4]버드 바그삭 전투가 사실상 모로족의 마지막 대규모 저항이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 전사 500명 이상을 전멸시키며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미국은 필리핀 전역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지만 모로족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모로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필리핀 남부를 강제 통치하며 모로족의 전통적인 정치·사회 체계를 해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기독교화와 서구식 행정 제도를 도입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오히려 모로족의 반감을 더욱 키웠다. 모로족의 독립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필리핀이 1946년 독립한 이후에도 남부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분쟁이 이어졌다.
결국 모로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필리핀 남부의 자치권과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모로족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인 미국 사이의 충돌이었다. 이 전쟁의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여전히 모로족 분리주의 운동과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모로 전쟁은 필리핀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자,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1] 모로족(Moro People) :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술루 군도, 팔라완 등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 민족이다. 필리핀 전체 인구의 약 5~10%를 차지하며 말레이계 혈통을 가진 이슬람 공동체
[2] 필리핀-미국 전쟁(1899년 2월 4일~1902년 7월 4일) : 필리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미국의 새로운 식민 지배에 저항하면서 발생된 전쟁
[3] 바굼바얀 전투(Battle of Bud Dajo) : 1906년 3월 5일부터 3월 7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다호(Bud Dajo) 화산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 이 전투는 미국 식민 통치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었다.
[4] 버드 바그삭 전투(Battle of Bud Bagsak) : 1913년 6월 11일부터 6월 15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바그삭(Bud Bagsak) 산 정상에서 발생한 전투로, 미국군과 모로족 간의 마지막 대규모 충돌이었다. 모로족은 거의 전멸하였다고 한다
20세기 초, 독일 제국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나미비아 지역에 해당하는 남서아프리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토착 부족인 헤레로족과 나마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독일의 식민 통치 하에서 강제 노동, 토지 몰수, 경제적 착취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독일 정착민들은 토착민들의 농경지를 빼앗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그들을 법적으로 보호하지 않았으며 아프리카인들을 하등한 존재로 여겼다. 1903년까지 독일인 정착민의 수는 5,000명을 넘어섰으며 지속적으로 원주민들의 권리를 박탈했다. 이러한 억압적인 정책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1904년 1월 헤레로족이 독일 식민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헤레로족의 지도자 [1]사무엘 마하레로는 독립을 위한 항쟁을 하여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나마족도 지도자 [2]헨드릭 비트보이의 지휘 아래 반란에 합류했다. 그러나 독일은 이러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고 학살을 주도한 로타르 폰 트로타장군이 남서아프리카에 부임하면서 상황은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었다.
1904년 8월 독일군은 [4]워터베르크 전투에서 헤레로족을 패배시키고 생존한 헤레로족을 [5]오마헤케 사막으로 추방하였다. 독일군은 사막의 식수원을 차단하여 헤레로족 수천 명이 탈수와 굶주림으로 사망했으며 사막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사살했다.
나마족 또한 독일군의 표적이 되었으며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극심한 학대와 처형을 당했다. 독일은 [6]샤크섬에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며 포로들에게 가혹한 강제 노동을 시켰다. 수용소에서는 영양실조와 질병이 만연했으며 일부 포로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생체 실험까지 진행했다.
이 학살로 인해 헤레로족 인구 80,000명 중 80%에 해당하는 약 65,000명이 사망했으며 나마족 인구 20,000명 중 절반인 약 10,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독일 식민지 내에서 극심한 차별과 강제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은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이었으며 이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유사한 방식의 인종말살 정책의 전조로 평가하고 있다. 독일은 이 사건을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100여 년이 지난 2021년에 이르러서야 독일 정부가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집단학살"로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피해자 후손들에게 직접적인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1] 사무엘 마하레로(Samuel Maharero, 1856년 ~ 1923년 3월 14일) : 나미비아 헤레로족의 지도자로, 1904년 독일 식민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이끌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패배한 후 보츠와나로 망명하였으며 그의 저항은 독일군의 대규모 학살로 이어지며,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Genocide)로 기록되는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의 계기가 되었다. 나미비아의 국민 영웅
[2] 헨드릭 비트보이(Hendrik Witbooi, 1830~1905) : 나미비아 나마족의 지도자로 독일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1904년 나마족 반란을 이끌었다. 그는 독일군과의 전투 중 사망했으며 오늘날 나미비아의 독립운동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3] 로타르 폰 트로타(Lothar von Trotha, 1848년 7월 3일~1920년 3월 31일) : 독일 제국의 군인.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저지른 주범으로 악명이 높았다
[4] 워터베르크 전투(Battle of Waterberg, 1904년 8월 11일) : 독일 제국군과 헤레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패배한 헤레로족은 오마헤케 사막으로 추방당했으며 독일군의 식수원 봉쇄로 인해 수천 명이 굶주림과 탈수로 사망하면서 헤레로족 학살로 이어졌다.
[5] 오마헤케 사막(Omaheke Desert) : 나미비아 동부에 위치한 사막으로 1904년 독일군이 헤레로족을 추방한 지역
[6] 샤크섬(Shark Island) : 나미비아 연안에 위치한 섬으로, 1905~1907년 독일이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수용한 강제 수용소가 운영된 곳
독일 정착민들은 토착민들의 농경지를 빼앗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그들을 법적으로 보호하지 않았으며 아프리카인들을 하등한 존재로 여겼다. 1903년까지 독일인 정착민의 수는 5,000명을 넘어섰으며 지속적으로 원주민들의 권리를 박탈했다. 이러한 억압적인 정책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1904년 1월 헤레로족이 독일 식민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헤레로족의 지도자 [1]사무엘 마하레로는 독립을 위한 항쟁을 하여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나마족도 지도자 [2]헨드릭 비트보이의 지휘 아래 반란에 합류했다. 그러나 독일은 이러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고 학살을 주도한 로타르 폰 트로타장군이 남서아프리카에 부임하면서 상황은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었다.
1904년 8월 독일군은 [4]워터베르크 전투에서 헤레로족을 패배시키고 생존한 헤레로족을 [5]오마헤케 사막으로 추방하였다. 독일군은 사막의 식수원을 차단하여 헤레로족 수천 명이 탈수와 굶주림으로 사망했으며 사막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사살했다.
나마족 또한 독일군의 표적이 되었으며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극심한 학대와 처형을 당했다. 독일은 [6]샤크섬에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며 포로들에게 가혹한 강제 노동을 시켰다. 수용소에서는 영양실조와 질병이 만연했으며 일부 포로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생체 실험까지 진행했다.
이 학살로 인해 헤레로족 인구 80,000명 중 80%에 해당하는 약 65,000명이 사망했으며 나마족 인구 20,000명 중 절반인 약 10,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독일 식민지 내에서 극심한 차별과 강제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은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이었으며 이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유사한 방식의 인종말살 정책의 전조로 평가하고 있다. 독일은 이 사건을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100여 년이 지난 2021년에 이르러서야 독일 정부가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집단학살"로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피해자 후손들에게 직접적인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1] 사무엘 마하레로(Samuel Maharero, 1856년 ~ 1923년 3월 14일) : 나미비아 헤레로족의 지도자로, 1904년 독일 식민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이끌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패배한 후 보츠와나로 망명하였으며 그의 저항은 독일군의 대규모 학살로 이어지며,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Genocide)로 기록되는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의 계기가 되었다. 나미비아의 국민 영웅
[2] 헨드릭 비트보이(Hendrik Witbooi, 1830~1905) : 나미비아 나마족의 지도자로 독일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1904년 나마족 반란을 이끌었다. 그는 독일군과의 전투 중 사망했으며 오늘날 나미비아의 독립운동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3] 로타르 폰 트로타(Lothar von Trotha, 1848년 7월 3일~1920년 3월 31일) : 독일 제국의 군인.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저지른 주범으로 악명이 높았다
[4] 워터베르크 전투(Battle of Waterberg, 1904년 8월 11일) : 독일 제국군과 헤레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패배한 헤레로족은 오마헤케 사막으로 추방당했으며 독일군의 식수원 봉쇄로 인해 수천 명이 굶주림과 탈수로 사망하면서 헤레로족 학살로 이어졌다.
[5] 오마헤케 사막(Omaheke Desert) : 나미비아 동부에 위치한 사막으로 1904년 독일군이 헤레로족을 추방한 지역
[6] 샤크섬(Shark Island) : 나미비아 연안에 위치한 섬으로, 1905~1907년 독일이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수용한 강제 수용소가 운영된 곳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청나라로 부터 요동반도와 대만을 할양 받고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측출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야심에 대하여 러시아가 주동이 된 삼국간섭(러시아,프랑스 및 득일)으로 일본은 청나라에 [2]랴오둥반도를 반환하였다.
이에 대한 대가로 1896년 러시아는 러청 비밀협정을 맺고 일본이 중국, 한반도의 극동 러시아령을 침략할 경우 상호 원조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만주 복부를 관통하여 볼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3]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득일이 [4]자오저우만의 칭다오를,영국이 [5]구룡반도와 [6]웨이하이웨이를,프랑스가 광저우만을 조차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1897년 12월 12일 청으로부터 [2]뤼순과 대련을 점령하고 뤼순을 군항으로 개발하였다. 뒤늦게 미국도 1899년에 문호개방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분할에 가담하였다[1].
이렇게 청나라에 대한 열강의 이권확보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만주와 조선의 이권을 둘러싸고 협상을 벌였으나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다.
1904년 2월 6일 양국은 국교를 단절하고 2월 8일 일본의 증원부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인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함정과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에 대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하였으며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전쟁기간중 일본은 1902년 2월에 체결된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미국의 지원과 1905년 5월 쓰시마해전에서 러시아의 [8]발틱함대를 격파하여 승리하였다.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재정지출이 너무 커서 결국 미국의 중재하에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러일전쟁을 종결되었다.
미국 대통령 [7]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만주에서 철수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이익을 인정하였으며,[2]랴오둥반도와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게 양도하였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러시아는 남하정책이 좌절되었으며 패전의 후유증은 정치적 불안을 야기하여 러시아 혁명을 유발하는 간접적인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국제적인 지위확립과 더불어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조선침략을 본격화하고 대륙침략의 계기롤 마련하였다.
[1] 쓰시마 해전 승패에 대한 분석, 김태준, 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 2004.04.03
[2] 랴오둥반도(遼東半島, 요동 반도) : 현재 중국의 랴오닝성 남부의 반도. 뤼순(여순), 다롄(대련)이 위치하고 있다
[3] 동청철도(東淸鐵道) : 중국 하얼빈을 중심으로 하여 서북으로 러시아의 치타()와 남동으로 블라디보스크로 연결된 철도 노선
[4] 자오저우만(膠州灣, 교주만) :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칭다오시에 위치한 만
[5] 구룡반도(九龍半島) : 홍콩 특별행정구에 속하는 중국 남부에 위치하는 반도
[6] 웨이하이웨이(威海衛) : 중국 산둥성 동부에 있는 항구도시로 산둥반도의 동쪽에 있다
[7]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년~1919년) :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임기는 1901년 9월 14일~1909년 3월 4일
[8] 발틱 함대(Baltic Fleet) : 러시아 해군의 4개 함대들 중 하나로 1703년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러시아 해군 함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대가로 1896년 러시아는 러청 비밀협정을 맺고 일본이 중국, 한반도의 극동 러시아령을 침략할 경우 상호 원조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만주 복부를 관통하여 볼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3]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득일이 [4]자오저우만의 칭다오를,영국이 [5]구룡반도와 [6]웨이하이웨이를,프랑스가 광저우만을 조차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1897년 12월 12일 청으로부터 [2]뤼순과 대련을 점령하고 뤼순을 군항으로 개발하였다. 뒤늦게 미국도 1899년에 문호개방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분할에 가담하였다[1].
이렇게 청나라에 대한 열강의 이권확보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만주와 조선의 이권을 둘러싸고 협상을 벌였으나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다.
1904년 2월 6일 양국은 국교를 단절하고 2월 8일 일본의 증원부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인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함정과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에 대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하였으며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전쟁기간중 일본은 1902년 2월에 체결된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미국의 지원과 1905년 5월 쓰시마해전에서 러시아의 [8]발틱함대를 격파하여 승리하였다.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재정지출이 너무 커서 결국 미국의 중재하에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러일전쟁을 종결되었다.
미국 대통령 [7]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만주에서 철수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이익을 인정하였으며,[2]랴오둥반도와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게 양도하였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러시아는 남하정책이 좌절되었으며 패전의 후유증은 정치적 불안을 야기하여 러시아 혁명을 유발하는 간접적인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국제적인 지위확립과 더불어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조선침략을 본격화하고 대륙침략의 계기롤 마련하였다.
[1] 쓰시마 해전 승패에 대한 분석, 김태준, 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 2004.04.03
[2] 랴오둥반도(遼東半島, 요동 반도) : 현재 중국의 랴오닝성 남부의 반도. 뤼순(여순), 다롄(대련)이 위치하고 있다
[3] 동청철도(東淸鐵道) : 중국 하얼빈을 중심으로 하여 서북으로 러시아의 치타()와 남동으로 블라디보스크로 연결된 철도 노선
[4] 자오저우만(膠州灣, 교주만) :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칭다오시에 위치한 만
[5] 구룡반도(九龍半島) : 홍콩 특별행정구에 속하는 중국 남부에 위치하는 반도
[6] 웨이하이웨이(威海衛) : 중국 산둥성 동부에 있는 항구도시로 산둥반도의 동쪽에 있다
[7]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년~1919년) :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임기는 1901년 9월 14일~1909년 3월 4일
[8] 발틱 함대(Baltic Fleet) : 러시아 해군의 4개 함대들 중 하나로 1703년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러시아 해군 함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운이 급박함을 알게 된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하며 양국간의 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와 갈등이 고조되자 1904년 2월 6일 국교를 단절하고, 2월 8일 여순항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기습공격하여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다음 날 2월 9일 인천 제물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여 2척을 침몰시키고 제물포항에 병력을 상륙하여 그날로 서울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 날인 2월 10일에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자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Pavlov)는 2월 12일 러시아군의 보호를 받으며 피신하였다.
일본군은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일본 공사 [6]하야시 곤스케는 전쟁의 불가피성과 협력할 것을 대한제국에 강요하면서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압했다. 반일·친러파였던 [2]탁지부 대신 겸 [3]내장원경 [4]이용익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고, 그 밖에 일본에 반대하던 보부상의 중심 인물 길영수 육군 참장 이학균, 육군 참령 현상건등을 감시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강압으로 대외 중립 유지가 어려움을 인식한 대한제국은 외부대신서리 [5]이지용과 일본 공사 [6]하야시 곤스케는 양국 간 협약을 체결하였다
[전문 6개조]
제1조 한·일 양제국은 항구불역(恒久不易)할 친교를 보지(保持)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를 확신하고 시정(施政)의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들을 것.
제2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황실을 확실한 친의(親誼)로써 안전·강녕(康寧)하게 할 것.
제3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정부는 속히 임기 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하며,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을 것.
제5조 대한제국정부와 대일본제국정부는 상호의 승인을 경유하지 않고 훗날 본 협정의 취지에 위반할 협약을 제3국간에 정립(訂立)할 수 없을 것.
제6조 본 협약에 관련된 미비한 세조(細條)는 대한제국외부대신과 대일본제국대표자 사이에 임기 협정할 것.
이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대한제국을 중립이 아닌 지정학적인 우위를 점하는 전략과 한반도를 점령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의정서 1조에 근거하여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은 서서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일의정서)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여순(뤼순)항 : 중국 랴오둥 반도에 위치한 항구. 현재는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의 구 중 하나이며 명칭은 뤼순구
[2] 탁지부 : 대한제국의 재무를 담당하던 부서. 현재의 기획재정부
[3] 내장원경(內藏院卿) : 황실 재정의 총책임자인 내장사의 장
[4] 이용익(1854년~1907년) :대한제국의 정치인·관료·외교관이며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교의 설립자. 러일전쟁당시 일본으로 압송되어 온갖 회유정책에도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5] 이지용(1870년~1928년) : 대한제국의 왕족이자 관료. 을사오적의 일원(체결당시 내부대신)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당시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엔을 받고 한일의정서에 서명했다
[6] 하야시 곤스케(1860년~1939년) : 일본의 외교관이며 남작. 러일전쟁 중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이어 8월 제1차 한일 협약, 1905년 을사늑약까지 모두 그의 주도 하에 체결되었다
일본은 러시아와 갈등이 고조되자 1904년 2월 6일 국교를 단절하고, 2월 8일 여순항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기습공격하여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다음 날 2월 9일 인천 제물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여 2척을 침몰시키고 제물포항에 병력을 상륙하여 그날로 서울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 날인 2월 10일에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자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Pavlov)는 2월 12일 러시아군의 보호를 받으며 피신하였다.
일본군은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일본 공사 [6]하야시 곤스케는 전쟁의 불가피성과 협력할 것을 대한제국에 강요하면서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압했다. 반일·친러파였던 [2]탁지부 대신 겸 [3]내장원경 [4]이용익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고, 그 밖에 일본에 반대하던 보부상의 중심 인물 길영수 육군 참장 이학균, 육군 참령 현상건등을 감시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강압으로 대외 중립 유지가 어려움을 인식한 대한제국은 외부대신서리 [5]이지용과 일본 공사 [6]하야시 곤스케는 양국 간 협약을 체결하였다
[전문 6개조]
제1조 한·일 양제국은 항구불역(恒久不易)할 친교를 보지(保持)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를 확신하고 시정(施政)의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들을 것.
제2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황실을 확실한 친의(親誼)로써 안전·강녕(康寧)하게 할 것.
제3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정부는 속히 임기 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하며,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을 것.
제5조 대한제국정부와 대일본제국정부는 상호의 승인을 경유하지 않고 훗날 본 협정의 취지에 위반할 협약을 제3국간에 정립(訂立)할 수 없을 것.
제6조 본 협약에 관련된 미비한 세조(細條)는 대한제국외부대신과 대일본제국대표자 사이에 임기 협정할 것.
이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대한제국을 중립이 아닌 지정학적인 우위를 점하는 전략과 한반도를 점령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의정서 1조에 근거하여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은 서서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일의정서)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여순(뤼순)항 : 중국 랴오둥 반도에 위치한 항구. 현재는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의 구 중 하나이며 명칭은 뤼순구
[2] 탁지부 : 대한제국의 재무를 담당하던 부서. 현재의 기획재정부
[3] 내장원경(內藏院卿) : 황실 재정의 총책임자인 내장사의 장
[4] 이용익(1854년~1907년) :대한제국의 정치인·관료·외교관이며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교의 설립자. 러일전쟁당시 일본으로 압송되어 온갖 회유정책에도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5] 이지용(1870년~1928년) : 대한제국의 왕족이자 관료. 을사오적의 일원(체결당시 내부대신)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당시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엔을 받고 한일의정서에 서명했다
[6] 하야시 곤스케(1860년~1939년) : 일본의 외교관이며 남작. 러일전쟁 중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이어 8월 제1차 한일 협약, 1905년 을사늑약까지 모두 그의 주도 하에 체결되었다
덕수궁 대화재는 1904년 4월 14일에 발생한 대형 화재로, 대한제국 시기 덕수궁의 주요 건물들이 소실된 사건이다.
화재의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1]함녕전 아궁이에 밤 10시경에 발화된 불이 [2]중화전·[3]즉조당·[4]석어당의 중심곽 건물뿐만 아니라 [5]관명전과 신주를 모셨던 [7]경효전, 어진·예진을 봉안한 [6]흠문각 등 중요 전각들이 순식간에 소실되면서 사서, 기밀서류, 의례서, 외국서적등 각종 중요한 문서와 귀중품등도 소실되었다.
화재 이후 경운궁을 다시 짓는 동안 고종은 자신의 거처를 수옥헌으로 옮겼다.
1906년에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오늘날 덕수궁은 일부 복원된 상태로 남아 있으며, 대한제국의 역사를 간직한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1] 함녕전(咸寧殿) : 고종이 머물렀던 침전으로 1904년 화재로 다시 지은 건물이며 고종이 1919년 1월 22일 승하하신 곳이다
[2] 중화전(中和殿) :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했으나, 너무 좁아 1920년 새로 지은 건물. 그러나 2년만에 화재로 소실된후 1906년에 중건하였으나 이전과 달리 단층이었다.
[3] 즉조당(卽阼堂) :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즉위한 곳
[4] 석어당(昔御堂) :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로 삼았던 건물
[5] 관명전(觀明殿) : 1902년 6월 28일에 덕경당(德慶堂)을 헐고 확장하여 건립하여 관명전이라 하였다. 내진연(조선시대 왕실의 기념이이나 경사에 벌이는 잔치)의 장소로 사용
[6] 흠문각(欽文閣) : 어진·예진을 봉안한 건물
[7] 경효전(景孝殿) : 명성왕후의 신주를 봉안한 건물
[8] 수옥헌(漱玉軒) : 황실도서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 1906년 중명전(重明殿)으로 변경되었다
화재의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1]함녕전 아궁이에 밤 10시경에 발화된 불이 [2]중화전·[3]즉조당·[4]석어당의 중심곽 건물뿐만 아니라 [5]관명전과 신주를 모셨던 [7]경효전, 어진·예진을 봉안한 [6]흠문각 등 중요 전각들이 순식간에 소실되면서 사서, 기밀서류, 의례서, 외국서적등 각종 중요한 문서와 귀중품등도 소실되었다.
화재 이후 경운궁을 다시 짓는 동안 고종은 자신의 거처를 수옥헌으로 옮겼다.
1906년에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오늘날 덕수궁은 일부 복원된 상태로 남아 있으며, 대한제국의 역사를 간직한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1] 함녕전(咸寧殿) : 고종이 머물렀던 침전으로 1904년 화재로 다시 지은 건물이며 고종이 1919년 1월 22일 승하하신 곳이다
[2] 중화전(中和殿) :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했으나, 너무 좁아 1920년 새로 지은 건물. 그러나 2년만에 화재로 소실된후 1906년에 중건하였으나 이전과 달리 단층이었다.
[3] 즉조당(卽阼堂) :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즉위한 곳
[4] 석어당(昔御堂) :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로 삼았던 건물
[5] 관명전(觀明殿) : 1902년 6월 28일에 덕경당(德慶堂)을 헐고 확장하여 건립하여 관명전이라 하였다. 내진연(조선시대 왕실의 기념이이나 경사에 벌이는 잔치)의 장소로 사용
[6] 흠문각(欽文閣) : 어진·예진을 봉안한 건물
[7] 경효전(景孝殿) : 명성왕후의 신주를 봉안한 건물
[8] 수옥헌(漱玉軒) : 황실도서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 1906년 중명전(重明殿)으로 변경되었다
원래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이나 제1차 한일협약으로 더 알려져 있다.
러일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04년 8월 22일 외무대신 서리 윤치호와 일본 전권 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조인된 협정서다. 이 협약으로 고문통치가 시작되어 일본의 내정 간섭이 확대되었다.
[전문(全文) 3개항]
1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財政顧問)으로 삼아 대한 정부에 용빙(傭聘)하여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2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한 외국인 1명을 외교 고문으로 삼아 외부(外部)에 용빙하여 외교에 관한 중요한 사무는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3 대한 정부는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거나 기타 중요한 외교 안건 즉 외국인에 대한 특권 양여와 계약 등의 문제 처리에 대해서는 미리 대일본 정부와 상의해야 한다.
이 협약에 따라 일제는 재정고문에 대장성 주세국장이었던 메카타 다네타로를, 외교고문에는 주미 일본 공사관에서 근무했던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Durham White Stevens)을 임명했다.
메카타 다네타로는 재정 고문으로 대한제국의 재정과 경제적 예속작업에 착수하였다. 1905년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기간산업이 모두 일본에 넘어가고 조선 상인들이 몰락했으며 나아가 대한제국의 경제권과 종국에는 주권이 일본 제국에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1차 한일 협약은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들이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등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심각하게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내정 전반에 걸쳐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나무위키]
* 윤치호(1865년~1945년) :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정치가, 시민 운동가, 번역가, 기독교 운동가, 계몽 운동가,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 하야시 곤스케(1860년~1939년) : 일본의 외교관이며 남작. 러일전쟁 중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이어 8월 제1차 한일 협약, 1905년 을사늑약까지 모두 그의 주도 하에 체결되었다
* 메가타 다네타로(1853년~1926년) : 일본의 정치가.
*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1851년~1908년) : 미국의 외교관. 일본 외무성과 통감부에서 일했다. 1908년 3월 23일 장인환과 전명운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러일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04년 8월 22일 외무대신 서리 윤치호와 일본 전권 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조인된 협정서다. 이 협약으로 고문통치가 시작되어 일본의 내정 간섭이 확대되었다.
[전문(全文) 3개항]
1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財政顧問)으로 삼아 대한 정부에 용빙(傭聘)하여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2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한 외국인 1명을 외교 고문으로 삼아 외부(外部)에 용빙하여 외교에 관한 중요한 사무는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3 대한 정부는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거나 기타 중요한 외교 안건 즉 외국인에 대한 특권 양여와 계약 등의 문제 처리에 대해서는 미리 대일본 정부와 상의해야 한다.
이 협약에 따라 일제는 재정고문에 대장성 주세국장이었던 메카타 다네타로를, 외교고문에는 주미 일본 공사관에서 근무했던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Durham White Stevens)을 임명했다.
메카타 다네타로는 재정 고문으로 대한제국의 재정과 경제적 예속작업에 착수하였다. 1905년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기간산업이 모두 일본에 넘어가고 조선 상인들이 몰락했으며 나아가 대한제국의 경제권과 종국에는 주권이 일본 제국에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1차 한일 협약은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들이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등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심각하게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내정 전반에 걸쳐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나무위키]
* 윤치호(1865년~1945년) :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정치가, 시민 운동가, 번역가, 기독교 운동가, 계몽 운동가,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 하야시 곤스케(1860년~1939년) : 일본의 외교관이며 남작. 러일전쟁 중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이어 8월 제1차 한일 협약, 1905년 을사늑약까지 모두 그의 주도 하에 체결되었다
* 메가타 다네타로(1853년~1926년) : 일본의 정치가.
*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1851년~1908년) : 미국의 외교관. 일본 외무성과 통감부에서 일했다. 1908년 3월 23일 장인환과 전명운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러시아 제국은 [5]크림전쟁에서 처참한 패전 이후 뒤처진 현실을 파악하고 내정개혁의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면서 1861년에 농노제 폐지등 일련의 개혁을 실시했다. 농노제는 유상으로 폐지되어 농민들은 지주귀족에게 보상금을 반환해야 했으며 부르조아에게 농토를 구매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자영농집단은 형성되지 않았다. 또한 농업의 낙후성은 러시아 농업구조의 변혁을 더욱 어렵게 했다.
결국 다수의 농민들은 농토가 부족해지자 농업을 포기하고 도시로 몰려가서 저임금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도시 노동자 집단이 급속히 증대하고 좌파세력이 증진하는 가운데에도 [1]차르정부가 고수한 봉건적이고 억압적인 태도는 사회갈등만 심화시켰다.
차르정부는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통하여 애국심을 고무시키면서 사회갈등을 해소하고 체제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무리한 전쟁의 강행과 연속적인 패배속에 민중의 불만은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폭발했다.
이 사건은 러시아가 [6]러일전쟁에서 참패한 1905년 1월, [2]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났다.
오랜 시간 중노동과 열악한 임금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은 극심한 가난과 배고픔에 지친 나머지 [3]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직접 청원하기 위해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위대는 황제의 초상화를 든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황제가 거주하고 있는 겨울궁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 시위대의 최선두에서 이끌었던 것은 [4]게오르기 가폰 신부였다. [4]가폰 신부는 국가 비밀경찰의 공작원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노동자들의 분노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 듯하자 황제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들고 행진하도록 만들었다.
농민 출신이 대다수였던 병사들도 엄청난 병력 손실과 통지의 황폐, 가족들이 겪는 생활난에 공감하여 시위 대중에게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평화로운 시위에 황제 수비대는 시위 대열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어 대포도 여러발 발사하여 1천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거룩한 주일이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무자비한 학살은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시위, 그리고 농민봉기로 이어졌다.
[3]니콜라이 2세(Nikolai II)황제는 대중의 도전 앞에 자유주의적 입헌개혁을 요지로 하는 10월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약속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 과정에서 노동자,농민들은 자체 대표기관을 형성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1905년 10월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필두로 각 지역에 조직되기 시작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끌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러시아의 무리한 참전은 경제구조를 피폐시켰고 민중의 생활난도 가중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7]로마노프 왕조의 차르정부는 그대로 붕괴되고 말았다.
[출처]
- 세계의 역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박구병외 8, 2021, P253~255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차르(Tsar) : 동방 정교회를 믿는 남슬라브족 및 동슬라브족 문화권의 군주 칭호. 차르 군주의 대표적인 나라는 러시아
[2]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urg) : 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이는 제2의 도시. 발트해의 핀란드 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네바 강 하구에 있는 러시아 최대의 항구도시.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린다. 러시아 황제가 거주했던 겨울궁전으로 유명하다
[3] 니콜라이 2세(Nicholas II of Russia, 1868년~1918년) : 러시아 제국의 제14대이자 마지막 황제(재위, 1894년 11월 1일~1917년 3월 15일). 러시아 혁명(1917년 2월 혁명)후 본인을 포함한 일가족 전체가 총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4] 게오르기 가폰(Georgy Gapon, 1870년~1906년) : 러시아 정교회 사제, 혁명가. 1906년 사회혁명당원에게 암살당했다
[5] 크림전쟁(Crimean War) : 1853년 10월부터 1856년 2월까지 크림 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 프랑스 제2제국, 대영제국과 사르데냐 왕국이 결성한 동맹군에 패배한 전쟁
[6] 러일전쟁 : 1904년 2월 8일에서 1905년 9월 5일까지 러시아 제국과 일본이 대한제국, 만주와 인근 해역에서 벌인 전쟁
[7] 로마노프 왕조(House of Romanov) : 1613년부터 1917년까지 305년간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왕조. 쌍두독수리가 상징이다
결국 다수의 농민들은 농토가 부족해지자 농업을 포기하고 도시로 몰려가서 저임금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도시 노동자 집단이 급속히 증대하고 좌파세력이 증진하는 가운데에도 [1]차르정부가 고수한 봉건적이고 억압적인 태도는 사회갈등만 심화시켰다.
차르정부는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통하여 애국심을 고무시키면서 사회갈등을 해소하고 체제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무리한 전쟁의 강행과 연속적인 패배속에 민중의 불만은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폭발했다.
이 사건은 러시아가 [6]러일전쟁에서 참패한 1905년 1월, [2]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났다.
오랜 시간 중노동과 열악한 임금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은 극심한 가난과 배고픔에 지친 나머지 [3]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직접 청원하기 위해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위대는 황제의 초상화를 든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황제가 거주하고 있는 겨울궁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 시위대의 최선두에서 이끌었던 것은 [4]게오르기 가폰 신부였다. [4]가폰 신부는 국가 비밀경찰의 공작원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노동자들의 분노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 듯하자 황제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들고 행진하도록 만들었다.
농민 출신이 대다수였던 병사들도 엄청난 병력 손실과 통지의 황폐, 가족들이 겪는 생활난에 공감하여 시위 대중에게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평화로운 시위에 황제 수비대는 시위 대열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어 대포도 여러발 발사하여 1천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거룩한 주일이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무자비한 학살은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시위, 그리고 농민봉기로 이어졌다.
[3]니콜라이 2세(Nikolai II)황제는 대중의 도전 앞에 자유주의적 입헌개혁을 요지로 하는 10월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약속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 과정에서 노동자,농민들은 자체 대표기관을 형성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1905년 10월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필두로 각 지역에 조직되기 시작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끌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러시아의 무리한 참전은 경제구조를 피폐시켰고 민중의 생활난도 가중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7]로마노프 왕조의 차르정부는 그대로 붕괴되고 말았다.
[출처]
- 세계의 역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박구병외 8, 2021, P253~255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차르(Tsar) : 동방 정교회를 믿는 남슬라브족 및 동슬라브족 문화권의 군주 칭호. 차르 군주의 대표적인 나라는 러시아
[2]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urg) : 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이는 제2의 도시. 발트해의 핀란드 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네바 강 하구에 있는 러시아 최대의 항구도시.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린다. 러시아 황제가 거주했던 겨울궁전으로 유명하다
[3] 니콜라이 2세(Nicholas II of Russia, 1868년~1918년) : 러시아 제국의 제14대이자 마지막 황제(재위, 1894년 11월 1일~1917년 3월 15일). 러시아 혁명(1917년 2월 혁명)후 본인을 포함한 일가족 전체가 총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4] 게오르기 가폰(Georgy Gapon, 1870년~1906년) : 러시아 정교회 사제, 혁명가. 1906년 사회혁명당원에게 암살당했다
[5] 크림전쟁(Crimean War) : 1853년 10월부터 1856년 2월까지 크림 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 프랑스 제2제국, 대영제국과 사르데냐 왕국이 결성한 동맹군에 패배한 전쟁
[6] 러일전쟁 : 1904년 2월 8일에서 1905년 9월 5일까지 러시아 제국과 일본이 대한제국, 만주와 인근 해역에서 벌인 전쟁
[7] 로마노프 왕조(House of Romanov) : 1613년부터 1917년까지 305년간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왕조. 쌍두독수리가 상징이다
제1차 모로코 사건은 유럽 열강 간의 제국주의 경쟁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독일 제국이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확장을 견제하고자 시도하면서 발생한 국제 외교 분쟁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지역 문제를 넘어 당시 유럽의 열강 간 세력 균형과 외교적 대립 구도를 전면에 드러낸 사례였다.
당시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과 1904년에 체결한 [1]영불 협상을 통해, 영국이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우위를 인정하는 대신 프랑스가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수용함으로써 상호 이해를 도모하였다.
이에 대해 독일은 유럽에서 프랑스가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견제하고자 하였으며 프랑스의 일방적인 모로코 지배 시도를 국제 문제로 부각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05년 3월 31일 독일 황제 [2]빌헬름 2세는 모로코의 [3]탕헤르를 전격 방문하여 공개적으로 모로코의 독립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는 프랑스의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자 국제 사회에 모로코 문제를 다자 외교의 틀로 끌어내려는 시도로 간주되었다.
독일의 이 같은 행동은 프랑스를 강하게 자극하였으며 유럽 외교계 전반에 걸쳐 긴장을 고조시켰다. 프랑스는 이에 대응하여 자국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였고 영국은 물론 러시아, 이탈리아 등 주요 열강들과의 협력 강화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1906년 1월부터 4월까지 스페인의 [4]알헤시라스에서 열린 국제 회의로 이어졌으며 총 13개국이 참여하여 모로코의 지위와 열강 간 권익 문제를 논의하였다.
알헤시라스 회의 결과 모로코의 독립과 주권은 명목상 유지되었으나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 내 경찰과 재정 개혁을 주도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는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결정이었으며 독일은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1차 모로코 사건은 독일이 유럽 내 세력 균형에 도전하며 국제 문제를 고조시킨 사례로 기록되며 이후 유럽 열강들 간의 긴장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복잡한 동맹 관계 형성과 외교적 대립 구조의 중요한 전조로 간주된다.
[1] 영불 협상(Entente Cordiale) : 1904년 4월 8일, 영국과 프랑스가 맺은 협정으로 양국 간 오랜 식민지 분쟁을 해결하고 유럽에서의 우호적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을 통해 양국은 이집트(영국 영향권)와 모로코(프랑스 영향권)에 대한 상호 이해를 확인하고 식민지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해소하였다. 영불협상은 이후 삼국협상(Triple Entente)의 초석이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 열강 간의 세력 균형 변화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2]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년~1941년) : 독일 황제, 프로이센 왕국 국왕(재위 1888년~1918년). 독일의 마지막 군주. 근대 역사에서 '카이저(Kaiser) 황제'라고 지칭함(카이저 수염의 유래).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강제 퇴위
[3] 탕헤르(Tangier) : 모로코 북부 지브롤터 해협 인근의 도시. 북아프리카와 유럽을 이어주는 국제적인 도시
[4] 알헤시라스(Algeciras) : 스페인 남부에 있는 항구도시
당시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과 1904년에 체결한 [1]영불 협상을 통해, 영국이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우위를 인정하는 대신 프랑스가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수용함으로써 상호 이해를 도모하였다.
이에 대해 독일은 유럽에서 프랑스가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견제하고자 하였으며 프랑스의 일방적인 모로코 지배 시도를 국제 문제로 부각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05년 3월 31일 독일 황제 [2]빌헬름 2세는 모로코의 [3]탕헤르를 전격 방문하여 공개적으로 모로코의 독립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는 프랑스의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자 국제 사회에 모로코 문제를 다자 외교의 틀로 끌어내려는 시도로 간주되었다.
독일의 이 같은 행동은 프랑스를 강하게 자극하였으며 유럽 외교계 전반에 걸쳐 긴장을 고조시켰다. 프랑스는 이에 대응하여 자국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였고 영국은 물론 러시아, 이탈리아 등 주요 열강들과의 협력 강화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1906년 1월부터 4월까지 스페인의 [4]알헤시라스에서 열린 국제 회의로 이어졌으며 총 13개국이 참여하여 모로코의 지위와 열강 간 권익 문제를 논의하였다.
알헤시라스 회의 결과 모로코의 독립과 주권은 명목상 유지되었으나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 내 경찰과 재정 개혁을 주도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는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결정이었으며 독일은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1차 모로코 사건은 독일이 유럽 내 세력 균형에 도전하며 국제 문제를 고조시킨 사례로 기록되며 이후 유럽 열강들 간의 긴장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복잡한 동맹 관계 형성과 외교적 대립 구조의 중요한 전조로 간주된다.
[1] 영불 협상(Entente Cordiale) : 1904년 4월 8일, 영국과 프랑스가 맺은 협정으로 양국 간 오랜 식민지 분쟁을 해결하고 유럽에서의 우호적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을 통해 양국은 이집트(영국 영향권)와 모로코(프랑스 영향권)에 대한 상호 이해를 확인하고 식민지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해소하였다. 영불협상은 이후 삼국협상(Triple Entente)의 초석이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 열강 간의 세력 균형 변화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2]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년~1941년) : 독일 황제, 프로이센 왕국 국왕(재위 1888년~1918년). 독일의 마지막 군주. 근대 역사에서 '카이저(Kaiser) 황제'라고 지칭함(카이저 수염의 유래).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강제 퇴위
[3] 탕헤르(Tangier) : 모로코 북부 지브롤터 해협 인근의 도시. 북아프리카와 유럽을 이어주는 국제적인 도시
[4] 알헤시라스(Algeciras) : 스페인 남부에 있는 항구도시
쓰시마 해전은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섬 부근 바다에서 러시아의 [1]발틱함대와 일본의 [2]연합함대사이에 벌어진 해전이다.
당시 러시하 해군의 규모는 일본함대 규모의 3배에 해당할 정도록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발틱해의 발틱함대, 태평양의 태평양함대, 흑해의 흑해함대, 북극해의 북방함대로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발틱함대는 태평양 함대로부터 원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청나라에서 조차한 라오둥 반도의 뤼순항이 건재하고 [1]발틱함대를 극동으로 이동시켜 태평양에서 우세한 전력으로 일본 연합함대를 격파하여 태평양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진출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1904년 10월 14일 발틱함대는 발트해의 [4]리에파야항에서 출항하여 아프리카의 남쪽끝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통과하여 중국 연안으로 거슬러 올라가 일본으로 향하는 8개월 동안 18,000마일의 항해틀 시작하였다.
[1]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항해하기 위해 선택할 항로는 쓰시마 해협과 [5]스가루 해협의 두 항로였다. 사령관인 [3]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두 항로 중 최단 항로인 쓰시마 해협을 선택하였다.
일본 [2]연합함대의 사령관인 [6]도고 헤이하치로는 발틱함대가 쓰시마해협을 선택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날 대한민국 경남 창원시 진해만에 전 함대를 집결시키고 훈련을 실시하면서 결전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5월 27일 새벽 일본의 순양함 한척이 쓰시마 해협 접근로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발견하였다. 일본 전함대의 출동명령으로 일본 연합함대와 러시아 발틱함대는 서로 대척하였다. 일본 연합함대의 기함인 [7]미카사의 전투개시신호를 알리며 양 함대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양측의 함포가 격렬하게 불을 뿜으면서 치열한 교전이 지속되었지만 일본 함대는 계속적인 우세를 유지하였다.
지휘부의 집중 공격으로 발틱함대의 기함이 침몰했으며 사령관 [3]로제스트벤스키는 중상을 입었으며, 러시아 진형은 분산되었다.
5월 27일 쓰시마 동쪽 해상에서 시작된 쓰시마 해전은 28일 울릉도 근해에서 발틱함대가 항복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 해전은 러시아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발틱함대가 궤멸됨으로써 사실상 러일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해전이었다.
발틱함대의 38척의 군함과 기타함정들 중 34척은 침몰,자침,포획 또는 억류당하였다. 장교 및 사병을 포함하여 4,83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고 6천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일본 연합함대측에은 3척의 어뢰정이 침몰하였고 3척의 주력 함정이 경미한 손상을 받았으며 11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일본이 승리했고, 러시아 발틱함대는 전멸했다. 일본의 승리는 세계를 놀라게 했고, 이 결과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조선의 지배를 본격화하고 국제적인 지위확립과 더불어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대륙침략의 계기롤 마련하였다.
[1]발틱 함대(Baltic Fleet) : 러시아 해군의 4개 함대들 중 하나로 1703년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러시아 해군 함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북극해의 북방함대, 흑해의 흑해함대, 태평양(동해)의 태평양함대, 카스피해의 카스피해 전단 등 4개의 함대와 1개의 전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연합함대(聯合艦隊) : 함대의 연합을 뜻하는 일반명사지만 이 시기의 일본해군의 연합함대가 유명하여 고유명사가 되었다
[3]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1848년~1909년) : 러시아 제국의 해군 제독이며, 최종 계급은 중장.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에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4]리에파야 : 라트비아 서쪽의 발트해에 위치한 항구도시. 발트연안 지역이 독일의 영향으로 1920년까지는 독일어 명칭인 "리바우"가 널리 쓰였다. 러시아어 명칭인 "리예파야"라 표기되기도 한다
[5]쓰가루 해협 : 일본 홋카이도와 혼슈 사이에 있는 해협. 동해와 태평양을 잇는다
[6]도고 헤이하치로(1848년~1934년) : 일본의 해군제독.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해군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
[7]미카사(三笠) : 일본이 1898년 영국에 주문한 전함으로 1904년부터 러일전쟁에서 연합함대의 기함으로 활약했다. 현재는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의 미카사 공원에 기념함으로 보존되어 있다. 15,000톤, 18노트
당시 러시하 해군의 규모는 일본함대 규모의 3배에 해당할 정도록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발틱해의 발틱함대, 태평양의 태평양함대, 흑해의 흑해함대, 북극해의 북방함대로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발틱함대는 태평양 함대로부터 원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청나라에서 조차한 라오둥 반도의 뤼순항이 건재하고 [1]발틱함대를 극동으로 이동시켜 태평양에서 우세한 전력으로 일본 연합함대를 격파하여 태평양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진출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1904년 10월 14일 발틱함대는 발트해의 [4]리에파야항에서 출항하여 아프리카의 남쪽끝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통과하여 중국 연안으로 거슬러 올라가 일본으로 향하는 8개월 동안 18,000마일의 항해틀 시작하였다.
[1]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항해하기 위해 선택할 항로는 쓰시마 해협과 [5]스가루 해협의 두 항로였다. 사령관인 [3]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두 항로 중 최단 항로인 쓰시마 해협을 선택하였다.
일본 [2]연합함대의 사령관인 [6]도고 헤이하치로는 발틱함대가 쓰시마해협을 선택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날 대한민국 경남 창원시 진해만에 전 함대를 집결시키고 훈련을 실시하면서 결전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5월 27일 새벽 일본의 순양함 한척이 쓰시마 해협 접근로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발견하였다. 일본 전함대의 출동명령으로 일본 연합함대와 러시아 발틱함대는 서로 대척하였다. 일본 연합함대의 기함인 [7]미카사의 전투개시신호를 알리며 양 함대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양측의 함포가 격렬하게 불을 뿜으면서 치열한 교전이 지속되었지만 일본 함대는 계속적인 우세를 유지하였다.
지휘부의 집중 공격으로 발틱함대의 기함이 침몰했으며 사령관 [3]로제스트벤스키는 중상을 입었으며, 러시아 진형은 분산되었다.
5월 27일 쓰시마 동쪽 해상에서 시작된 쓰시마 해전은 28일 울릉도 근해에서 발틱함대가 항복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 해전은 러시아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발틱함대가 궤멸됨으로써 사실상 러일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해전이었다.
발틱함대의 38척의 군함과 기타함정들 중 34척은 침몰,자침,포획 또는 억류당하였다. 장교 및 사병을 포함하여 4,83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고 6천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일본 연합함대측에은 3척의 어뢰정이 침몰하였고 3척의 주력 함정이 경미한 손상을 받았으며 11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일본이 승리했고, 러시아 발틱함대는 전멸했다. 일본의 승리는 세계를 놀라게 했고, 이 결과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조선의 지배를 본격화하고 국제적인 지위확립과 더불어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대륙침략의 계기롤 마련하였다.
[1]발틱 함대(Baltic Fleet) : 러시아 해군의 4개 함대들 중 하나로 1703년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러시아 해군 함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북극해의 북방함대, 흑해의 흑해함대, 태평양(동해)의 태평양함대, 카스피해의 카스피해 전단 등 4개의 함대와 1개의 전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연합함대(聯合艦隊) : 함대의 연합을 뜻하는 일반명사지만 이 시기의 일본해군의 연합함대가 유명하여 고유명사가 되었다
[3]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1848년~1909년) : 러시아 제국의 해군 제독이며, 최종 계급은 중장.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에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4]리에파야 : 라트비아 서쪽의 발트해에 위치한 항구도시. 발트연안 지역이 독일의 영향으로 1920년까지는 독일어 명칭인 "리바우"가 널리 쓰였다. 러시아어 명칭인 "리예파야"라 표기되기도 한다
[5]쓰가루 해협 : 일본 홋카이도와 혼슈 사이에 있는 해협. 동해와 태평양을 잇는다
[6]도고 헤이하치로(1848년~1934년) : 일본의 해군제독.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해군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
[7]미카사(三笠) : 일본이 1898년 영국에 주문한 전함으로 1904년부터 러일전쟁에서 연합함대의 기함으로 활약했다. 현재는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의 미카사 공원에 기념함으로 보존되어 있다. 15,000톤, 18노트
포템킨 사건은 러시아 제국 흑해 함대의 [1]전드레드노트급 전함 포템킨에서 발생한 수병들의 반란으로, 1905년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상징적 사건이다. 이 사건은 러시아 제국 내 억압적인 체제와 군 내부의 열악한 환경, 부패한 지휘 체계에 대한 수병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일어났다.
1905년은 러시아 역사에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국내 불안이 증폭되었고, 정치적·경제적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와 농민 계층은 점점 더 큰 불만을 품었고, 군대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해군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급여나 처우를 받지 못했고, 지휘관들의 가혹한 통제와 폭력적인 처벌이 만연했다.
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부실한 식사였다. 전함 포템킨의 수병들에게 제공된 식사 재료인 고기가 썩어 구더기가 발견되었고, 수병들은 썩은 고기로 만든 식사를 거부하며 항의했다. 그러나 지휘부는 이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항의한 수병들을 모아 처형하려는 행동을 하였다. 이러한 지휘부의 강압적인 태도는 수병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결국 무장 반란으로 이어졌다.
반란이 시작되자 수병들은 지휘관과 주요 장교들을 처형하고 전함을 완전히 장악했다. 반란군은 흑해의 항구도시 [3]오데사로 이동하여 시민들과 연합을 시도했다. 당시 [3]오데사에서도 노동자와 혁명 세력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포템킨의 도착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오데사의 민중들은 반란을 지지하며 항구에 몰려들었고, 이 과정에서 혁명의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나 [5]세바스토폴의 흑해함대는 반란군을 강력하게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전함 5척을 파견하여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면서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항구는 혼란에 빠졌다. 포템킨의 수병들은 외부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다른 항구로 이동하며 외교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러시아 해군의 전면적인 추격과 압박을 받았다.
결국 포템킨의 수병들은 지속적인 압박 속에서 지친 끝에 7월 8일 루마니아의 [4]콘스탄차 항구에 도착하여 항복을 선택했다. 루마니아 정부는 수병들의 망명을 허용하고 전함을 러시아에 반환하였다. 일부 수병은 망명이 허용되었지만, 다수의 수병은 러시아로 송환되어 교수형, 유배형, 징역형등을 선고받았다.
포템킨 전함은 7월 10일 루마니아 [4]콘스탄차를 출발하여 7월 14일 [5] 세바스토폴로 귀항했다. 이후 포템킨은 여러차례 이름이 바뀌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력으로 복귀했으나, 노후화와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유지의 어려움으로 인해 1923년부터 해체되어 1925년에 최종퇴역했다.
포템킨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러시아 혁명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은 제국의 억압적인 체제와 군 내부의 부패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러시아 민중의 혁명 열망을 더욱 자극했다. 12년 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발판을 마련한 사건으로도 회자된다.
이 사건은 이후 1925년 소련 영화감독 [6]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에 의해 전함 포템킨이라는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이 영화는 영화사에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계단에서의 학살 장면은 시각적 충격과 혁명의 상징성을 극적으로 표현하며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 전드레드노트급 전함(Pre-dreadnought battleship) : 20세기 초 등장 이전의 구식 전열함으로, 장거리 화력과 속도가 제한된 다양한 구경의 함포를 탑재한 전함 유형
[2] 흑해함대(Black Sea Fleet) : 러시아 제국 및 이후 소련과 러시아 해군의 주요 해상 전력으로, 흑해와 지중해 지역의 군사적·전략적 요충을 담당하는 함대
[3] 오데사(Odesa) : 우크라이나 남부에 위치한 흑해 최대 항구로, 역사적으로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주요 군사·무역 거점이자 1905년 포템킨 반란의 중심지였다
[4] 콘스탄차(Constanța) : 루마니아의 흑해 연안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로,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전략적·상업적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포템킨 반란 당시 선원들이 피신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5] 세바스토폴(Sevastopol) : 크림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흑해의 주요 항구로 전략적 위치와 도시 항구의 항해 가능성으로 인해 역사 전반에 걸쳐 중요한 항구 및 해군 기지였다
[6]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Sergei Eisenstein, 1898년 1월 23일 ~ 1948년 2월 11일) : 소련의 영화감독, 영화 이론가
1905년은 러시아 역사에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국내 불안이 증폭되었고, 정치적·경제적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와 농민 계층은 점점 더 큰 불만을 품었고, 군대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해군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급여나 처우를 받지 못했고, 지휘관들의 가혹한 통제와 폭력적인 처벌이 만연했다.
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부실한 식사였다. 전함 포템킨의 수병들에게 제공된 식사 재료인 고기가 썩어 구더기가 발견되었고, 수병들은 썩은 고기로 만든 식사를 거부하며 항의했다. 그러나 지휘부는 이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항의한 수병들을 모아 처형하려는 행동을 하였다. 이러한 지휘부의 강압적인 태도는 수병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결국 무장 반란으로 이어졌다.
반란이 시작되자 수병들은 지휘관과 주요 장교들을 처형하고 전함을 완전히 장악했다. 반란군은 흑해의 항구도시 [3]오데사로 이동하여 시민들과 연합을 시도했다. 당시 [3]오데사에서도 노동자와 혁명 세력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포템킨의 도착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오데사의 민중들은 반란을 지지하며 항구에 몰려들었고, 이 과정에서 혁명의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나 [5]세바스토폴의 흑해함대는 반란군을 강력하게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전함 5척을 파견하여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면서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항구는 혼란에 빠졌다. 포템킨의 수병들은 외부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다른 항구로 이동하며 외교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러시아 해군의 전면적인 추격과 압박을 받았다.
결국 포템킨의 수병들은 지속적인 압박 속에서 지친 끝에 7월 8일 루마니아의 [4]콘스탄차 항구에 도착하여 항복을 선택했다. 루마니아 정부는 수병들의 망명을 허용하고 전함을 러시아에 반환하였다. 일부 수병은 망명이 허용되었지만, 다수의 수병은 러시아로 송환되어 교수형, 유배형, 징역형등을 선고받았다.
포템킨 전함은 7월 10일 루마니아 [4]콘스탄차를 출발하여 7월 14일 [5] 세바스토폴로 귀항했다. 이후 포템킨은 여러차례 이름이 바뀌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력으로 복귀했으나, 노후화와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유지의 어려움으로 인해 1923년부터 해체되어 1925년에 최종퇴역했다.
포템킨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러시아 혁명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은 제국의 억압적인 체제와 군 내부의 부패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러시아 민중의 혁명 열망을 더욱 자극했다. 12년 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발판을 마련한 사건으로도 회자된다.
이 사건은 이후 1925년 소련 영화감독 [6]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에 의해 전함 포템킨이라는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이 영화는 영화사에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계단에서의 학살 장면은 시각적 충격과 혁명의 상징성을 극적으로 표현하며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 전드레드노트급 전함(Pre-dreadnought battleship) : 20세기 초 등장 이전의 구식 전열함으로, 장거리 화력과 속도가 제한된 다양한 구경의 함포를 탑재한 전함 유형
[2] 흑해함대(Black Sea Fleet) : 러시아 제국 및 이후 소련과 러시아 해군의 주요 해상 전력으로, 흑해와 지중해 지역의 군사적·전략적 요충을 담당하는 함대
[3] 오데사(Odesa) : 우크라이나 남부에 위치한 흑해 최대 항구로, 역사적으로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주요 군사·무역 거점이자 1905년 포템킨 반란의 중심지였다
[4] 콘스탄차(Constanța) : 루마니아의 흑해 연안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로,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전략적·상업적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포템킨 반란 당시 선원들이 피신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5] 세바스토폴(Sevastopol) : 크림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흑해의 주요 항구로 전략적 위치와 도시 항구의 항해 가능성으로 인해 역사 전반에 걸쳐 중요한 항구 및 해군 기지였다
[6]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Sergei Eisenstein, 1898년 1월 23일 ~ 1948년 2월 11일) : 소련의 영화감독, 영화 이론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배권과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1905년 7월 29일 당시 미국 육군 장관 [1]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2]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회담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화기록이다.
1924년 '가쓰라-태프트 전보문서'의 존재가 알려진 후 미국과 일본사이에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논쟁이 벌어졌으나, 결론적으로 이는 국가 간의 공식 협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쓰라-태프트 회담의 의미를 생각해볼 때, 당시의 회담이 공식적인 협약이었는지 아닌지를 논하는 것은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된다. 태프트가 이 사안을 보고했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내놓은 긍정적인 답변에서 당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 입장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태프트와의 회담을 통해 한반도 지배권에 대한 미국의 긍정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미 미국과 일본은 루스벨트의 제안으로 1905년 1월 미일중재조약(美日仲裁條約)을 체결하였다. 중재조약(Arbitration Treaty)이란, 만약 중재조약을 체결한 국가 사이에 법적 성격을 띤 분쟁이 발생하면 이를 헤이그의 국제법정(Hague Arbitral Court)에서 해결하기로 약속한 일종의 국가 간의 계약이었다.
미국은 일본과 중재조약을 체결하면서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는 국제재판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한국의 식민지화에 대한 미국과 일본 간의 공식 합의는 가쓰라-태프트 회담이 있기 7개월 전에 이미 있었던 셈이다.
가쓰라-태프트 회담의 의미는 다만 미일중재조약의 연장선에서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일본에 재확인시켜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우리역사넷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년~1930년일) : 미국의 27번째 대통령(재임 1909~1913). 필리핀 초대 총독(재임 1901년~1904년)
[2] 가쓰라 다로(1848년~1913년) : 11대(1901년 6월 2일 ~ 1906년 1월 7일), 13대(1908년 7월 14일 ~ 1911년 8월 30일), 15대(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내각총리대신
1924년 '가쓰라-태프트 전보문서'의 존재가 알려진 후 미국과 일본사이에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논쟁이 벌어졌으나, 결론적으로 이는 국가 간의 공식 협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쓰라-태프트 회담의 의미를 생각해볼 때, 당시의 회담이 공식적인 협약이었는지 아닌지를 논하는 것은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된다. 태프트가 이 사안을 보고했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내놓은 긍정적인 답변에서 당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 입장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태프트와의 회담을 통해 한반도 지배권에 대한 미국의 긍정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미 미국과 일본은 루스벨트의 제안으로 1905년 1월 미일중재조약(美日仲裁條約)을 체결하였다. 중재조약(Arbitration Treaty)이란, 만약 중재조약을 체결한 국가 사이에 법적 성격을 띤 분쟁이 발생하면 이를 헤이그의 국제법정(Hague Arbitral Court)에서 해결하기로 약속한 일종의 국가 간의 계약이었다.
미국은 일본과 중재조약을 체결하면서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는 국제재판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한국의 식민지화에 대한 미국과 일본 간의 공식 합의는 가쓰라-태프트 회담이 있기 7개월 전에 이미 있었던 셈이다.
가쓰라-태프트 회담의 의미는 다만 미일중재조약의 연장선에서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일본에 재확인시켜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우리역사넷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년~1930년일) : 미국의 27번째 대통령(재임 1909~1913). 필리핀 초대 총독(재임 1901년~1904년)
[2] 가쓰라 다로(1848년~1913년) : 11대(1901년 6월 2일 ~ 1906년 1월 7일), 13대(1908년 7월 14일 ~ 1911년 8월 30일), 15대(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내각총리대신
1905년 9월 5일 미국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러일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체결한 강화 조약이다
1904년 2월에 시작된 러일 전쟁이 1년여 간 지속되자 양국 모두 경제적,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중재로 1905년 8월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러일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강화 회담이 시작되었다.
전쟁 배상금과 사할린 양여 문제, 만주와 중국 청나라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권한에 관한 문제 등으로 난항을 겪었으나 미국의 중재로 1905년 9월 5일 조약이 체결되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이 조약의 주선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러일전쟁 종식).
조약은 15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 대해 정치와 군사 및 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조선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 조치를 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2. 러시아는 중국의 동의를 조건으로 러시아의 관동주(뤼순, 다롄)조차지와 창춘(장춘)-뤼순(여순)간 철도를 일본에 양도한다.(제3조~8조)
3. 러시아는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 및 그 부속도서를 일본에 할양한다.
4. 러시아는 동해, 오호츠크해 및 베링해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제11조와 제12조)
이 조약으로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묵인했고 러시아는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 해 11월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는 굴욕을 당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역사넷, 위키백과, 나무위키]
*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년~1919년) : 미국 26대 대통령. 임기 : 1901년~1909년
* 포츠머스(Portsmouth) : 미국 뉴우햄프셔(New Hampshire)주에 있는 군항 도시
* 관동주 조차지 : 중국 랴오둥 반도 남쪽의 조차지(뤼순, 다롄)로 1898년부터 1945년까지 존속했다
1904년 2월에 시작된 러일 전쟁이 1년여 간 지속되자 양국 모두 경제적,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중재로 1905년 8월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러일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강화 회담이 시작되었다.
전쟁 배상금과 사할린 양여 문제, 만주와 중국 청나라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권한에 관한 문제 등으로 난항을 겪었으나 미국의 중재로 1905년 9월 5일 조약이 체결되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이 조약의 주선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러일전쟁 종식).
조약은 15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 대해 정치와 군사 및 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조선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 조치를 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2. 러시아는 중국의 동의를 조건으로 러시아의 관동주(뤼순, 다롄)조차지와 창춘(장춘)-뤼순(여순)간 철도를 일본에 양도한다.(제3조~8조)
3. 러시아는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 및 그 부속도서를 일본에 할양한다.
4. 러시아는 동해, 오호츠크해 및 베링해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제11조와 제12조)
이 조약으로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묵인했고 러시아는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 해 11월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는 굴욕을 당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역사넷, 위키백과, 나무위키]
*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년~1919년) : 미국 26대 대통령. 임기 : 1901년~1909년
* 포츠머스(Portsmouth) : 미국 뉴우햄프셔(New Hampshire)주에 있는 군항 도시
* 관동주 조차지 : 중국 랴오둥 반도 남쪽의 조차지(뤼순, 다롄)로 1898년부터 1945년까지 존속했다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1905년 8월 12일 영국과 일본은 1차 협약을 개정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보호권을 보장받았으며 만주에서 철수한 러시아가 인도로 진출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동맹의 적용 범위를 종래의 “극동”에서 “동아시아 및 인도”로 확대하였다.
또한, 동맹국이 한쪽의 다른 1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도 동맹국이 참전하기로 하였다.
1905년 9월 [1]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일본의 조선 지배가 공식 승인받았으며 같은 해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1] 포츠머스(Portsmouth) 조약 : 1905년 9월 5일 미국 뉴햄프셔 주에 있는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러·일 간에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맺은 강화 조약
[2] 을사늑약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일본은 조선의 보호권을 보장받았으며 만주에서 철수한 러시아가 인도로 진출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동맹의 적용 범위를 종래의 “극동”에서 “동아시아 및 인도”로 확대하였다.
또한, 동맹국이 한쪽의 다른 1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도 동맹국이 참전하기로 하였다.
1905년 9월 [1]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일본의 조선 지배가 공식 승인받았으며 같은 해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1] 포츠머스(Portsmouth) 조약 : 1905년 9월 5일 미국 뉴햄프셔 주에 있는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러·일 간에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맺은 강화 조약
[2] 을사늑약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원명은 한일협상조약이며 제2차한일협약(第二次韓日協約), 을사늑약(乙巳條約)이라고도 불린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 해 8월 22일에는 제1차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내정 간섭이 확대되었다.
일본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태프트·가쓰라밀약을 체결하여 사전 묵인을 받았으며,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양해를 받았다. 이어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9월 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에서 대한제국 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고종 위문 특파대사 자격으로 파견하여 조약체결에 나선다. 일본은 조약체결을 위하여 대한제국 대신들을 협박과 회유했으나 찬성하는 이 한명없이 체결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7일 대신들에게 찬반을 묻는 회의를 열었다.
이 날 회의에 참석한 대신은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었다.
이 가운데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이 계속되자 처음으로 이완용이 찬의를 표하자 이지용과 이근택이 동조하였다.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은 나중에 찬의를 표하였다. 다른 대신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에 못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 의사를 밝혔다.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5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로서, 이를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내용]
제1조 일본국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監理),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정부는 금후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기로 상약한다.
제3조 일본국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게 하며,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서울)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폐하를 친히 내알(內謁)할 권리를 가진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이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으로 넘어갔으며 통감부가 설치되어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사조약), 위키백과, 나무위키]
* 태프트·가쓰라밀약(Taft–Katsura agreement, 1905년 7월 29) :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상호 인정하였다
* 제2차 영·일동맹(1905년 8월 12일) : 영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재배권을 인정하였다
* 포츠머스 조약( Treaty of Portsmouth, 1905년 9월 5일) :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조약으로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하였다
* 이토 히로부미(1841년~1909년) :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인물 중의 하나이며 일본 제국의 제1, 5, 7, 10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대한제국 통감
* 을사오적
- 이완용(1858년~1926년) : 학부대신 : 후작
- 이근택(1865년~1919년) : 군부대신 : 자작
- 이지용(1870년~1928년) : 내부대신 : 백작
- 박제순(1858년~1916년) : 외부대신 : 자작
- 권중현(1854년~1934년) : 농상공부대신 : 자작
* 민영기(1858년~1927년) : 을사삼흉. 친일반민족행위자. 을사조약 당시 마지막까지 반대 했으나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로 취임하며 친일로 돌아섰다. 남작
* 이하영(1858년~1929년) : 을사삼흉. 친일반민족행위자. 을사조약 당시 표면상으로 반대 했으나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자작
* 이재극(1964년~1927년) : 을사삼흉. 친일반민족행위자. 당시 궁내부대신. 남작. 고종을 협박하는 일을 맡았고 왕실의 종친 중 대표적인 친일파
* 한규설(1848년(~1930년) : 참정대신에서 해임. 1910년 경술국치이후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이후 칩거 생활을 하다가 1920년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립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 해 8월 22일에는 제1차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내정 간섭이 확대되었다.
일본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태프트·가쓰라밀약을 체결하여 사전 묵인을 받았으며,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양해를 받았다. 이어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9월 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에서 대한제국 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고종 위문 특파대사 자격으로 파견하여 조약체결에 나선다. 일본은 조약체결을 위하여 대한제국 대신들을 협박과 회유했으나 찬성하는 이 한명없이 체결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7일 대신들에게 찬반을 묻는 회의를 열었다.
이 날 회의에 참석한 대신은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었다.
이 가운데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이 계속되자 처음으로 이완용이 찬의를 표하자 이지용과 이근택이 동조하였다.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은 나중에 찬의를 표하였다. 다른 대신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에 못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 의사를 밝혔다.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5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로서, 이를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내용]
제1조 일본국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監理),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정부는 금후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기로 상약한다.
제3조 일본국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게 하며,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서울)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폐하를 친히 내알(內謁)할 권리를 가진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이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으로 넘어갔으며 통감부가 설치되어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사조약), 위키백과, 나무위키]
* 태프트·가쓰라밀약(Taft–Katsura agreement, 1905년 7월 29) :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상호 인정하였다
* 제2차 영·일동맹(1905년 8월 12일) : 영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재배권을 인정하였다
* 포츠머스 조약( Treaty of Portsmouth, 1905년 9월 5일) :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조약으로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하였다
* 이토 히로부미(1841년~1909년) :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인물 중의 하나이며 일본 제국의 제1, 5, 7, 10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대한제국 통감
* 을사오적
- 이완용(1858년~1926년) : 학부대신 : 후작
- 이근택(1865년~1919년) : 군부대신 : 자작
- 이지용(1870년~1928년) : 내부대신 : 백작
- 박제순(1858년~1916년) : 외부대신 : 자작
- 권중현(1854년~1934년) : 농상공부대신 : 자작
* 민영기(1858년~1927년) : 을사삼흉. 친일반민족행위자. 을사조약 당시 마지막까지 반대 했으나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로 취임하며 친일로 돌아섰다. 남작
* 이하영(1858년~1929년) : 을사삼흉. 친일반민족행위자. 을사조약 당시 표면상으로 반대 했으나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자작
* 이재극(1964년~1927년) : 을사삼흉. 친일반민족행위자. 당시 궁내부대신. 남작. 고종을 협박하는 일을 맡았고 왕실의 종친 중 대표적인 친일파
* 한규설(1848년(~1930년) : 참정대신에서 해임. 1910년 경술국치이후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이후 칩거 생활을 하다가 1920년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립하였다
헤이그 특사사건은 대한제국 [3]고종이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1]만국평화회의에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해 일본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불평등 조약임을 알리고 대한제국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이었다.
[3]고종은 [5]이준, [6]이상설, [7]이위종과 7개 언어를 구사하는 미국인 [8]호머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하였다.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일행은 만국평화 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활동을 벌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거부당하고 말았다.
특사일행은 각국의 비공식 경로를 통하여 서방열강국들에게 한국의 입장과 협조를 호소하였으나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국제사회의 냉담한 반응으로 원하던 성과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이에 통탄한 이준열사는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7월 14일 헤이그 호텔에서 사망했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조국의 주권을 항변하기 위해 이역만리 떨어진 외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도중 사망했으니 열사의 순국이라 불리는데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파견을 구실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1907년 7월 20일에 [4]순종을 즉위시키고 4일 후인 7월 24일 [2]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을, 29일에는 집회,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연이어 공포하였다. 31일에는 군대해산령을 내려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면서 대한제국은 무력화되었다.
[1] 만국평화회의 :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899년, 1907년에 2차례 열린 국제 평화 회담
[2]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 일본이 1907년 대한 제국의 고종을 강제 폐위시키고 7월 24일 체결한 조약. 7개 조문으로 되어있어 '정미 7조약'이라고도 부른다
[3]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국왕(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4] 순종(1874~1926) :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1907년~1910년). 조선의 마지막 군주
[5] 이준(1859년~1907년) : 조선과 대한제국의 초대검사, 법률가, 외교관. 전 평리원 검사
[6] 이상설(1870년~1917년) : 대한제국의 문신. 전 의정부 참찬
[7] 이위종(1884년 ~ ?) : 대한제국의 외교관. 전 러시아 대한제국 공사
[8]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1863년~1949년) : 미국의 선교사. 독립운동가
[3]고종은 [5]이준, [6]이상설, [7]이위종과 7개 언어를 구사하는 미국인 [8]호머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하였다.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일행은 만국평화 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활동을 벌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거부당하고 말았다.
특사일행은 각국의 비공식 경로를 통하여 서방열강국들에게 한국의 입장과 협조를 호소하였으나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국제사회의 냉담한 반응으로 원하던 성과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이에 통탄한 이준열사는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7월 14일 헤이그 호텔에서 사망했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조국의 주권을 항변하기 위해 이역만리 떨어진 외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도중 사망했으니 열사의 순국이라 불리는데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파견을 구실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1907년 7월 20일에 [4]순종을 즉위시키고 4일 후인 7월 24일 [2]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을, 29일에는 집회,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연이어 공포하였다. 31일에는 군대해산령을 내려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면서 대한제국은 무력화되었다.
[1] 만국평화회의 :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899년, 1907년에 2차례 열린 국제 평화 회담
[2]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 일본이 1907년 대한 제국의 고종을 강제 폐위시키고 7월 24일 체결한 조약. 7개 조문으로 되어있어 '정미 7조약'이라고도 부른다
[3]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국왕(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4] 순종(1874~1926) :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1907년~1910년). 조선의 마지막 군주
[5] 이준(1859년~1907년) : 조선과 대한제국의 초대검사, 법률가, 외교관. 전 평리원 검사
[6] 이상설(1870년~1917년) : 대한제국의 문신. 전 의정부 참찬
[7] 이위종(1884년 ~ ?) : 대한제국의 외교관. 전 러시아 대한제국 공사
[8]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1863년~1949년) : 미국의 선교사. 독립운동가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대한제국의 [1]고종황제를 강제 폐위시키고 1907년 7월 20일에 순종을 즉위시켰다. 4일 후인 7월 24일 한일 신협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조약이 체결된 해가 정미년이었기 때문에 정미7조약이라고 부르며 제1차 한일협약,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등과 구분하기 위해 제3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이완용 내각은 즉시 각의를 열고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 순종의 재가를 얻은 뒤 이완용이 전권위원이 되어 7월 24일 밤 이토 히로부미의 사택에서 7개 조항의 신협약을 체결 및 조인하였다.
조인에 찬성한 내각 7인을 [2]정미칠적이라 한다.
군대 해산을 비롯하여 대한제국의 행정 및 법적 분야에서 자율적 권한을 박탈한 강제 협약으로 7개 조문으로 되어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은 한국 군대의 해산이었다. 이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한국 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이를 구분할 것.
제4조 한국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것.
제5조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고용할 것.
제6조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하지 말 것.
제7조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항을 폐지할 것.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2] 정미칠적
- 이완용(1858년~1926년) : 내각총리대신, 후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 송병준(1857년~1925년) : 농상공부대신, 백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이병무(1864년~1926년) : 군부대신, 자작
- 고영희(1849년~1916년) : 탁지부대신,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조중응(1860년~1919년) : 법부대신,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이재곤(1859년~1943년) : 학부대신,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임선준(1860년~1919년) : 내부대신,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조약이 체결된 해가 정미년이었기 때문에 정미7조약이라고 부르며 제1차 한일협약,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등과 구분하기 위해 제3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이완용 내각은 즉시 각의를 열고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 순종의 재가를 얻은 뒤 이완용이 전권위원이 되어 7월 24일 밤 이토 히로부미의 사택에서 7개 조항의 신협약을 체결 및 조인하였다.
조인에 찬성한 내각 7인을 [2]정미칠적이라 한다.
군대 해산을 비롯하여 대한제국의 행정 및 법적 분야에서 자율적 권한을 박탈한 강제 협약으로 7개 조문으로 되어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은 한국 군대의 해산이었다. 이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한국 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이를 구분할 것.
제4조 한국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것.
제5조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고용할 것.
제6조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하지 말 것.
제7조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항을 폐지할 것.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2] 정미칠적
- 이완용(1858년~1926년) : 내각총리대신, 후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 송병준(1857년~1925년) : 농상공부대신, 백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이병무(1864년~1926년) : 군부대신, 자작
- 고영희(1849년~1916년) : 탁지부대신,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조중응(1860년~1919년) : 법부대신,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이재곤(1859년~1943년) : 학부대신,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임선준(1860년~1919년) : 내부대신,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