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李麟佐 亂)
대한민국
사건기간 : 1728년 3월 15일 , 조회수 : 99, 등록일 : 2021-01-11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고 왕세제인 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사화 이후 실각당하였던 노론이 집권하자 소론은 재집권을 위하여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坦)을 추대하고자 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몇일 안되어 조선 관군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 난은 이인자가 모두 주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인좌가 가장 크게 항쟁하였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 영조(1694년~1776년) : 조선 제21대 왕. 재위 1724년~1776년
* 신임사화(辛壬士禍): 조선 1721년(경종1년)부터 1722년까지 연잉군(추후 조선 21대 왕 ) 왕세제 책봉문제로 소론이 노론을 역모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사화
* 밀풍군 이탄 : 소현세자의 증손
이 난은 이인자가 모두 주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인좌가 가장 크게 항쟁하였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 영조(1694년~1776년) : 조선 제21대 왕. 재위 1724년~1776년
* 신임사화(辛壬士禍): 조선 1721년(경종1년)부터 1722년까지 연잉군(추후 조선 21대 왕 ) 왕세제 책봉문제로 소론이 노론을 역모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사화
* 밀풍군 이탄 : 소현세자의 증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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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英祖, 1694년~1776년)는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년~1776년)이며 숙종(조선 제19대 왕)의 넷째 아들이며 숙빈 최씨의 소생이다. 군호는 연잉군(延仍君)이며 조선왕실 최초로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로서 왕위에 오른 왕이다.
[촬영일 :2020-11-30]
조선 제21대 왕 영조 어진 : 51세 때의 초상화. 정면을 향하지 않고 특이하게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이다. 이는 초상화가 영조의 모친인 숙빈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육상궁에 봉안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출처 : 국립중앙박문관)
미국-인디언 전쟁은 17세기 초 유럽 식민자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이래 19세기 말까지 이어진 일련의 무력 충돌과 갈등을 통칭하는 역사적 명칭이다. 이 전쟁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던 원주민(인디언) 부족들과 유럽계 정착민들 그리고 후에 미국 연방정부 간의 영토 분쟁, 문화 충돌, 자원 경쟁, 조약 위반 등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초기 식민지 시기에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 부족들이 식민 전쟁에 참여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대표적인 초기 충돌로는 킹 필립 전쟁(King Philip’s War, 1675~1678), 포하탄 전쟁(Powhatan Wars), 그리고 프랑스-인디언 전쟁(1754~1763)이 있다. 이 시기 인디언들은 대체로 식민지 세력의 군사적 동맹이자 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영토 보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1776년에 독립한 신생 미국 정부는 서부 확장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면서 원주민과의 충돌이 더욱 잦아졌다. 미국-인디언 전쟁의 핵심은 "서부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들의 땅을 몰수하고 강제로 이주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전쟁으로는 북서부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년~1795), 테쿰세 전쟁(Tecumseh's War), 제1차~제3차 세미놀 전쟁(Seminole Wars), 블랙 호크 전쟁(Black Hawk War), 수족 전쟁(Sioux Wars), 치페와 전쟁(Chippewa War), 아파치 전쟁(Apache Wars), 그리고 제로니모 항쟁(Geronimo's resistance) 등이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 미국 정부는 원주민 부족들을 "보호구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이를 거부한 부족들과의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1876년 리틀 빅혼 전투(Battle of the Little Bighorn)에서는 라코타 수우족과 샤이엔족이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군을 전멸시키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미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식량 차단, 협상 파기 등으로 대부분의 부족이 항복하거나 멸족하였다.
1890년, 사우스다코타주 운디드니(Wounded Knee)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은 미국-인디언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에서 미군은 대규모 무장 해제 중이던 라코타 수우족을 공격하여 남녀노소 수백 명을 살해하였다. 운디드니 학살사건 이후 사실상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소규모의 전투가 가끔 벌어졌다.
이 전쟁의 결과 수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빼앗겼으며 미국 전역의 원주민 사회는 급격한 해체와 문화적 침탈을 경험하게 되었다. 미국-인디언 전쟁은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 식민주의·제국주의·인종주의에 기초한 국가 건설과 정복의 역사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미국 사회 내에서 원주민 문제와 정체성 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초기 식민지 시기에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 부족들이 식민 전쟁에 참여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대표적인 초기 충돌로는 킹 필립 전쟁(King Philip’s War, 1675~1678), 포하탄 전쟁(Powhatan Wars), 그리고 프랑스-인디언 전쟁(1754~1763)이 있다. 이 시기 인디언들은 대체로 식민지 세력의 군사적 동맹이자 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영토 보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1776년에 독립한 신생 미국 정부는 서부 확장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면서 원주민과의 충돌이 더욱 잦아졌다. 미국-인디언 전쟁의 핵심은 "서부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들의 땅을 몰수하고 강제로 이주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전쟁으로는 북서부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년~1795), 테쿰세 전쟁(Tecumseh's War), 제1차~제3차 세미놀 전쟁(Seminole Wars), 블랙 호크 전쟁(Black Hawk War), 수족 전쟁(Sioux Wars), 치페와 전쟁(Chippewa War), 아파치 전쟁(Apache Wars), 그리고 제로니모 항쟁(Geronimo's resistance) 등이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 미국 정부는 원주민 부족들을 "보호구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이를 거부한 부족들과의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1876년 리틀 빅혼 전투(Battle of the Little Bighorn)에서는 라코타 수우족과 샤이엔족이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군을 전멸시키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미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식량 차단, 협상 파기 등으로 대부분의 부족이 항복하거나 멸족하였다.
1890년, 사우스다코타주 운디드니(Wounded Knee)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은 미국-인디언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에서 미군은 대규모 무장 해제 중이던 라코타 수우족을 공격하여 남녀노소 수백 명을 살해하였다. 운디드니 학살사건 이후 사실상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소규모의 전투가 가끔 벌어졌다.
이 전쟁의 결과 수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빼앗겼으며 미국 전역의 원주민 사회는 급격한 해체와 문화적 침탈을 경험하게 되었다. 미국-인디언 전쟁은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 식민주의·제국주의·인종주의에 기초한 국가 건설과 정복의 역사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미국 사회 내에서 원주민 문제와 정체성 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코바이트 반란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영국과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서 여러 차례 발생한 정치·군사적 봉기이다. 이 반란은 [15]명예혁명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2]스튜어트 왕조의 복위를 목표로 한 [1]자코바이트의 운동으로 1689년부터 1746년까지 여러 차례 전개되었다.
자코바이트 운동의 기원은 1688년의 [15]명예혁명에 있다. 이 사건으로 [3]제임스 2세는 왕위에서 쫓겨나고, 그의 딸 [5]메리 2세와 사위인 [6]윌리엄 3세가 공동 통치자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3]제임스 2세를 지지하던 세력, 특히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가톨릭 및 일부 잉글랜드 보수 귀족들은 명예혁명으로 이루어진 왕위 교체를 정통 왕위 계승 원칙에 어긋난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2]스튜어트 왕조가 계속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첫 번째 주요 봉기는 1689년에 시작되었다. 제임스 2세는 아일랜드를 거점으로 왕위 회복을 위한 군사 원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690년 [4]보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그의 복위 시도는 좌절되었다. 이후 자코바이트 운동은 한동안 잠잠해졌지만 스튜어트 왕가의 후계자인 [7]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등장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다.
1715년에 일어난 두 번째 대규모 반란은 영국 왕위에 [8]하노버 왕조가 들어선 직후 발생하였다. 새로운 국왕 [9]조지 1세에 대한 반감과 하노버 왕가 출신의 새로운 국왕 조지 1세가 즉위하면서 일부에서는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이러한 분위기가 반란의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반란이 확산되었지만 영국군의 조직력과 군사력에 밀려 결국 실패로 끝났다.
가장 유명하고 비극적인적인 반란은 1745년에 시작된 세 번째 봉기였다. 이 반란은 제임스 2세의 손자인 [11]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주도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10}하이랜드 지역에서 지지를 확보하며 군대를 조직하였고 초기에는 프레스턴팬스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군사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다. 자코바이트 군은 잉글랜드 북부까지 진격하며 런던 진격 가능성을 높였으나 병력과 보급의 한계, 프랑스 지원의 불확실성 등을 고려하여 인해 결국 후퇴하였다.
결정적인 전투는 1746년 4월 16일 벌어진 [12]컬로든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정부군은 자코바이트 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였다. 이 전투는 영국 본토에서 벌어진 마지막 대규모 회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코바이트 운동의 군사적 종말을 의미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전투 이후 [14]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가 지휘한 정부군은 자코바이트 잔존 세력에 대한 강경한 진압을 실시하였다. 부상자 처형과 민간인 탄압, 재산 몰수 등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조치는 당시에도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그는 일부에서는 '도살자 컴벌랜드'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일은 이후 오랫동안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잉글랜드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정부는 하이랜드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1746년 제정된 무장해제법과 1747년 세습관할권폐지법 등을 시행하였다. 또한 전통적인 [13]클랜 제도를 약화시키고 하이랜드 복장과 무기 소지를 제한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자코바이트 운동의 실패는 하노버 왕조의 지배를 안정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영국에서는 입헌군주제와 의회 중심의 정치체제가 더욱 공고해졌다. 동시에 스코틀랜드 [10]하이랜드 사회는 전통적인 [13]클랜 중심 질서가 해체되고 중앙정부의 통치가 강화되는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참고문헌]
- 스코틀랜드 국가기록원(National Records of Scotland)
- 스코틀랜드 문화유산청(Historic Environment Scotland)
- 컬로든 전투 기념관(Culloden Battlefield Visitor Centre)
-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 배영수, 『서양사강의』, 한울아카데미
- 차하순, 『새로 쓴 서양사총론』, 탐구당
[1] 자코바바이트(Jacobite) : 명예 혁명으로 쫓겨난 제임스 2세는 이후 왕위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 루이 14세의 도움을 받아 아일랜드를 침략하였으나 패하여 1701년 프랑스에서 사망하였다. 이후에도 제임스 2세의 후손들은 왕위를 주장하였으며 이를 따르는 사람들을 자코바이트라고 부른다.
[2] 스튜어트 왕조(House of Stuart, 1371년~1714년): 1603년 잉글랜드 튜더 왕가의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후사가 없어 스튜어트 왕가의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헨리 7세의 후예라는 이유로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영국전체를 지배하였다.
[3] 제임스 2세(James Ⅱ, 1633년 10월 24일 ~ 1701년 9월 16일) : 스튜어트 왕가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제임스 2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7세로서 재위(1685년 2월 6일 ~ 1688년 12월 11일). 1688년 명예혁명으로 폐위되었다
[4] 보인전투(Boyne, 1690년 7월 1일) : 아일랜드 보인강에서 벌어진 전투. 윌리엄 3세가 제임스 2세를 격파한 전투. 이 승리로 영국의 개신교 통치가 확립되었으며 아일랜드 내 가톨릭 세력의 약화와 향후 수 세기 동안의 개신교 지배 체제를 굳힌 역사적 사건.
[5] 메리 2세(Mary II, 1662년 4월 30일 ~ 1694년 12월 28일) : 제임스 2세의 딸로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왕국의 여왕(재위: 1688년 2월 13일 - 1694년 12월 28일). 메리 2세는 개신교 신자. 명예 혁명으로 남편인 위리엄 3세와 잉글랜드의 공동 통치자
[6] 윌리엄 3세 또는 빌럼 3세 판 오라녜(William III, 1650년 11월 4일 ~ 1702년 3월 8일) : 오라녜 공 겸 나사우 백작, 브레다 남작(재위 1689년 2월 12일 ~ 1702년 3월 8일),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왕국의 국왕(재위 1689년 2월 13일 ~ 1702년 3월 8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는 윌리엄 2세(William II). 명예 혁명으로 아내인 메리 2세와 잉글랜드의 공동 통치자
[7]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James Francis Edward Stuart, 1688년 6월 10일 ~ 1766년 1월 1일) : 제임스 2세의 아들
[8] 하노버 왕조(House of Hanover, 1635년~) : 영국, 독일의 왕조
[9] 조지 1세(George I, 1660년 5월 28일 ~ 1727년 6월 11일) : 영국 하노버 왕가의 초대 국왕(재위 : 1714년 8월 1일부터 1727년 6월 11). 하노버 선제후(재위 : 1698년 1월 23일 ~ 1727년 6월 11일). 조지 1세는 독일 태생의 독일인으로 영국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조지 1세의 시대부터 영국은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 국가로 들어선다.
[10] 하일랜드(Highlands) : 스코틀랜드의 북쪽에 위치한 고산지대로 영국의 최북단에 위치하는 지역. 하일랜드의 행정 중심은 인버네스이다.
[11]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Charles Edward Stuart, 1720년 12월 31일 ~ 1788년 1월 31일) : 제임스 2세의 손자. 젊은 왕위 요구자
[12] 컬로든 전투(Battle of Culloden) : 1746년 4월 16일에 자코바이트 반란에서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 근처의 인버네스(Inverness)에서 가까운 컬로든 습지(Moor)에서 자코바이트 군과 영국 왕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
[13] 클랜(Clan) 체제 :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역의 혈연과 지연을 기반으로 형성된 전통 공동체 조직이다. 각 클랜은 추장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사회와 군사 체계를 유지하였다.
[14]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William Augustus, Duke of Cumberland, 1721년 4월 26일 ~ 1765년 10월 31일) : 영국의 왕족이다. 최종 계급은 영국 육군 준장. '도살공' 컴벌랜드('Butcher' Cumberland)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15]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 1688년 영국에서 제임스 2세가 축출되고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공동 국왕으로 즉위한 사건이다. 영국 입헌군주제의 확립에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자코바이트 운동의 기원은 1688년의 [15]명예혁명에 있다. 이 사건으로 [3]제임스 2세는 왕위에서 쫓겨나고, 그의 딸 [5]메리 2세와 사위인 [6]윌리엄 3세가 공동 통치자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3]제임스 2세를 지지하던 세력, 특히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가톨릭 및 일부 잉글랜드 보수 귀족들은 명예혁명으로 이루어진 왕위 교체를 정통 왕위 계승 원칙에 어긋난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2]스튜어트 왕조가 계속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첫 번째 주요 봉기는 1689년에 시작되었다. 제임스 2세는 아일랜드를 거점으로 왕위 회복을 위한 군사 원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690년 [4]보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그의 복위 시도는 좌절되었다. 이후 자코바이트 운동은 한동안 잠잠해졌지만 스튜어트 왕가의 후계자인 [7]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등장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다.
1715년에 일어난 두 번째 대규모 반란은 영국 왕위에 [8]하노버 왕조가 들어선 직후 발생하였다. 새로운 국왕 [9]조지 1세에 대한 반감과 하노버 왕가 출신의 새로운 국왕 조지 1세가 즉위하면서 일부에서는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이러한 분위기가 반란의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반란이 확산되었지만 영국군의 조직력과 군사력에 밀려 결국 실패로 끝났다.
가장 유명하고 비극적인적인 반란은 1745년에 시작된 세 번째 봉기였다. 이 반란은 제임스 2세의 손자인 [11]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주도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10}하이랜드 지역에서 지지를 확보하며 군대를 조직하였고 초기에는 프레스턴팬스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군사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다. 자코바이트 군은 잉글랜드 북부까지 진격하며 런던 진격 가능성을 높였으나 병력과 보급의 한계, 프랑스 지원의 불확실성 등을 고려하여 인해 결국 후퇴하였다.
결정적인 전투는 1746년 4월 16일 벌어진 [12]컬로든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정부군은 자코바이트 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였다. 이 전투는 영국 본토에서 벌어진 마지막 대규모 회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코바이트 운동의 군사적 종말을 의미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전투 이후 [14]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가 지휘한 정부군은 자코바이트 잔존 세력에 대한 강경한 진압을 실시하였다. 부상자 처형과 민간인 탄압, 재산 몰수 등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조치는 당시에도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그는 일부에서는 '도살자 컴벌랜드'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일은 이후 오랫동안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잉글랜드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정부는 하이랜드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1746년 제정된 무장해제법과 1747년 세습관할권폐지법 등을 시행하였다. 또한 전통적인 [13]클랜 제도를 약화시키고 하이랜드 복장과 무기 소지를 제한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자코바이트 운동의 실패는 하노버 왕조의 지배를 안정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영국에서는 입헌군주제와 의회 중심의 정치체제가 더욱 공고해졌다. 동시에 스코틀랜드 [10]하이랜드 사회는 전통적인 [13]클랜 중심 질서가 해체되고 중앙정부의 통치가 강화되는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참고문헌]
- 스코틀랜드 국가기록원(National Records of Scotland)
- 스코틀랜드 문화유산청(Historic Environment Scotland)
- 컬로든 전투 기념관(Culloden Battlefield Visitor Centre)
-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 배영수, 『서양사강의』, 한울아카데미
- 차하순, 『새로 쓴 서양사총론』, 탐구당
[1] 자코바바이트(Jacobite) : 명예 혁명으로 쫓겨난 제임스 2세는 이후 왕위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 루이 14세의 도움을 받아 아일랜드를 침략하였으나 패하여 1701년 프랑스에서 사망하였다. 이후에도 제임스 2세의 후손들은 왕위를 주장하였으며 이를 따르는 사람들을 자코바이트라고 부른다.
[2] 스튜어트 왕조(House of Stuart, 1371년~1714년): 1603년 잉글랜드 튜더 왕가의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후사가 없어 스튜어트 왕가의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헨리 7세의 후예라는 이유로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영국전체를 지배하였다.
[3] 제임스 2세(James Ⅱ, 1633년 10월 24일 ~ 1701년 9월 16일) : 스튜어트 왕가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제임스 2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7세로서 재위(1685년 2월 6일 ~ 1688년 12월 11일). 1688년 명예혁명으로 폐위되었다
[4] 보인전투(Boyne, 1690년 7월 1일) : 아일랜드 보인강에서 벌어진 전투. 윌리엄 3세가 제임스 2세를 격파한 전투. 이 승리로 영국의 개신교 통치가 확립되었으며 아일랜드 내 가톨릭 세력의 약화와 향후 수 세기 동안의 개신교 지배 체제를 굳힌 역사적 사건.
[5] 메리 2세(Mary II, 1662년 4월 30일 ~ 1694년 12월 28일) : 제임스 2세의 딸로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왕국의 여왕(재위: 1688년 2월 13일 - 1694년 12월 28일). 메리 2세는 개신교 신자. 명예 혁명으로 남편인 위리엄 3세와 잉글랜드의 공동 통치자
[6] 윌리엄 3세 또는 빌럼 3세 판 오라녜(William III, 1650년 11월 4일 ~ 1702년 3월 8일) : 오라녜 공 겸 나사우 백작, 브레다 남작(재위 1689년 2월 12일 ~ 1702년 3월 8일),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왕국의 국왕(재위 1689년 2월 13일 ~ 1702년 3월 8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는 윌리엄 2세(William II). 명예 혁명으로 아내인 메리 2세와 잉글랜드의 공동 통치자
[7]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James Francis Edward Stuart, 1688년 6월 10일 ~ 1766년 1월 1일) : 제임스 2세의 아들
[8] 하노버 왕조(House of Hanover, 1635년~) : 영국, 독일의 왕조
[9] 조지 1세(George I, 1660년 5월 28일 ~ 1727년 6월 11일) : 영국 하노버 왕가의 초대 국왕(재위 : 1714년 8월 1일부터 1727년 6월 11). 하노버 선제후(재위 : 1698년 1월 23일 ~ 1727년 6월 11일). 조지 1세는 독일 태생의 독일인으로 영국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조지 1세의 시대부터 영국은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 국가로 들어선다.
[10] 하일랜드(Highlands) : 스코틀랜드의 북쪽에 위치한 고산지대로 영국의 최북단에 위치하는 지역. 하일랜드의 행정 중심은 인버네스이다.
[11]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Charles Edward Stuart, 1720년 12월 31일 ~ 1788년 1월 31일) : 제임스 2세의 손자. 젊은 왕위 요구자
[12] 컬로든 전투(Battle of Culloden) : 1746년 4월 16일에 자코바이트 반란에서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 근처의 인버네스(Inverness)에서 가까운 컬로든 습지(Moor)에서 자코바이트 군과 영국 왕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
[13] 클랜(Clan) 체제 :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역의 혈연과 지연을 기반으로 형성된 전통 공동체 조직이다. 각 클랜은 추장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사회와 군사 체계를 유지하였다.
[14]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William Augustus, Duke of Cumberland, 1721년 4월 26일 ~ 1765년 10월 31일) : 영국의 왕족이다. 최종 계급은 영국 육군 준장. '도살공' 컴벌랜드('Butcher' Cumberland)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15]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 1688년 영국에서 제임스 2세가 축출되고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공동 국왕으로 즉위한 사건이다. 영국 입헌군주제의 확립에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