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중국사건기간 : 1937년 8월 13일~1937년 11월 26일, 조회수 : 809, 등록일 : 2020-11-22
상하이 전투 또는 제2차 상하이 사변으로 부른다.
1937년 8월 9일 일본군이 정찰 명목으로 중화민국의 관할 구역인 홍차오 공항에 진입을 시도하다 중국군에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8월 13일 중국 관할구역인 바오산 도로로 진입한 일본군을 중화민국군이 총격을 가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 초반은 중국군이 우세해 보였다. 5만여 중국군이 일본군을 포위하는 형국으로 진행되었다.
3개월이 넘는 육지, 공중 및 해상에서의 광범위한 전투 끝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상하이에서 중국의 끈질긴 저항은 중국 정부가 중요한 산업을 내륙으로 이전하는 데 필요한 많은 시간을 제공하는 동시에 일본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동시에 동조하는 서구 열강을 중국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 3개월 간의 치열한 전투 동안 중국군과 일본군은 일본군이 상륙작전을 벌인 상하이 시내와 변두리 마을, 양쯔강과 항저우만 해변에서 교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만여명이 전사했지만, 중국군은 이 전투에서 25~30만 명이나 희생되었다. 이후 난징(南京)의 함락으로 이어지고 중일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사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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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1차 국공내전은 1927년 4월 12일 [1]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 내전의 발단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1924년에 군벌 타도를 목표로 제1차 국공합작을 결성했으나, 이념적 갈등과 권력 다툼으로 인해 협력이 붕괴된 데 있다. 특히 국민당은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위협으로 간주하며 제거하려 했고,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를 기반으로 독립적 세력을 키우려 하면서 충돌이 심화되었다. 상하이 쿠데타로 국민당은 공산당원들을 대규모로 숙청하며 본격적인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내전 초기, 국민당은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쳐 공산당 세력을 도시와 주요 지역에서 축소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에 공산당은 도시에서의 저항을 포기하고 농촌으로 후퇴해 [4]홍군을 조직하고 게릴라 전술을 통해 저항했다.
국민당은 공산당 근거지를 파괴하기 위한 다섯 차례의 공세를 벌였으며, 특히 1933~1934년의 제5차 토벌 작전은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로 인해 공산당은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약 9,000km에 달하는 [3]대장정을 감행하며 국민당의 포위망을 벗어나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초래했지만, 공산당 내부에서 [2]마오쩌둥의 지도력이 부각되었고 당의 조직이 재정비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제2차 국공합작을 체결하며 내전은 종결되었다.
제1차 국공내전은 공산당에게는 농촌 기반을 강화하고[4] 홍군의 전술과 조직력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시기였으며, 이는 이후 제2차 국공내전에서의 승리로 이어지는 토대가 되었다. 국민당은 일시적으로 공산당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전쟁으로 인한 장기적인 내부 분열과 공산당의 생존 전략은 국민당의 궁극적인 패배를 예고하는 요인이 되었다.
[1]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2]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 중국 공산당의 제1대 중앙위원회 주석(임기, 1945년 6월 19일~1976년 9월 9일). 일본 패망 이후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와 2차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을 장악했다 [3] 대장정(大長征) : 1934년 10월, 국민혁명군의 제5차 초공작전을 견디지 못한 중국공산당이 기존의 근거지였던 중국 동남부의 장시성을 떠나 약 1년에 걸쳐 중국 서북부 산시성으로 근거지를 이동한 사건. 10만에 육박했던 출발 인원 중 산시성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인원은 6,000명에 불과했다 [4] 홍군 :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 또는 단순히 홍군(紅軍)은 1927-1946 사이의 중국공산당의 무장조직다. 1927년 8월 1일 중국공농혁명군(中國工農革命軍)을 시작으로, 1928년 5월 25일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으로 개칭하였다. 제2차 국공합작(1937.9)무렵, 편제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1937.8)과 신사군(1939.10)으로 개편되었다. 일본패망 이후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공항(Depression)은 높은 실업률, 임금삭감, 물가하락, 기업 활동의 위축을 동반하는 대규모 경제 공황을 뜻하며 일반적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공황을 말한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전세계 경제 침체 현상으로 금융 시장의 대혼란과 대규모 실직 사태가 일어나 당시 서구 자본주의 사회 체계를 뒤흔들어 버렸고 미국은 1929년 10월 24일(검은 목요일)월스트리트의 주가가 급작스럽게 폭락하면서 경기침체의 시작을 알렸다.
대공황의 영향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뉴 딜(New Deal)은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경제 구조와 관행을 개혁해, 대공황으로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이 1933년~1936년에 추진하기 시작한 경제 정책이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경제 불황이 미국 전역으로 퍼지고, 당시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필사적인 방지 대책에도 물가는 폭락하여 GNP를 1932년 당시 1929년의 56%로 떨어뜨리고 1,300만명의 실업자를 양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상황과 대통령 선거 시기가 도래되고, 이때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루스벨트는 대선의 최대 이슈인 대공황 극복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라 불리는 각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일종의 정책 자문단을 만드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기회와 부의 불균형, 경제적 불황으로부터 국민들을 구제하겠다는, 즉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신정책)'을 약속한다.
당선된 루스벨트는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브레인 트러스트의 자문을 중심으로 구상된 정책들을 내놓게 되는데 이것이 뉴딜 정책의 시작이다.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은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랍인들이 영국 식민 통치와 유대인 이민에 반대하며 일으킨 대규모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이는 20세기 중반 중동 지역에서 발생한 가장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아랍 민중 봉기 중 하나였으며, 현대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의 기원으로 간주된다. “팔레스타인 아랍 봉기”로도 불린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에 따라 통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1917년 [1]벨포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국가 설립을 지지한다고 밝히며 [2]시오니즘 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유럽 등지에서 유대인 이민이 급격히 증가하였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토지와 주권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 토지 상실, 정치적 배제 등이 겹쳐져 팔레스타인 아랍 사회 내에서 점차 강경한 민족주의 정서가 확산되었다.
반란은 1936년 4월 [3]자파에서 유대인 차량 공격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랍 지도자들은 총파업을 선언하며 영국 당국과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을 선포하였다. 총파업은 무려 6개월간 지속되며 아랍 사회 전체가 상점 문을 닫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며 저항에 동참했다. 이 시기의 저항은 비교적 비폭력적인 정치적 운동의 형태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아랍 무장 단체들은 유대인 정착촌과 철도, 송전선 등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반란은 무장 봉기로 확산되었다. 반란은 이후 1937년부터 1939년까지 본격적인 무장투쟁으로 전환되어 아랍 민병대와 영국군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이어졌다. 반란 세력은 팔레스타인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쳤으며 영국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고 유대인 방위조직인 [4]하가나와 협력하였다.
영국은 반란 초기에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점차 무력 진압에 집중하였다. 1937년 [5]필 위원회는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자는 제안을 내놓았으나 아랍 측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계속되는 반란군의 저항에 대항하면서 영국은 대규모 병력을 추가 투입시켰고, 결국 1938년에 아랍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대규모 저항은 실패하였고 수많은 아랍인이 체포·유배·처형되거나 지도부가 해체되었다.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 아랍 사회는 조직력과 지도력을 크게 상실하며 향후 유대인 이민과 시온주의 세력의 부상에 실질적인 대응력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은 아랍 민족주의 세력의 큰 타격과 함께 정치적 주도권의 상실로 이어졌다. 또한 아랍과 유대인 양측 모두의 불만을 불러일으키며 장기적인 갈등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1] 벨포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포어(Arthur Balfour)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내 민족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힌 공식 문서 [2] 시오니즘 운동 : 유대 민족이 고대 이스라엘 땅(특히 예루살렘과 시온 산)을 중심으로 민족 국가를 재건하자는 정치적 민족주의 운동 [3] 자파(Jaffa) : 이스라엘에 위치한 지중해 해안가의 오래된 도시 [4] 하가나(Haganah) : 1920년부터 1948년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조직한 반군 및 자위 조직으로, 유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함께 이스라엘 방위군으로 통합되며 공식적인 국가군으로 재편되었다. [5] 필 위원회(Peel Commission) : 1936년 10월 11일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유대 갈등을 조사하기 위해 설립한 공식 조사 위원회이며 정식 명칭은 팔레스타인 왕립 조사위원회이며, 위원장 윌리엄 로버트 필(W. R. Peel)경의 이름을 따서 불린다
1931년 총선에서 공화파는 대승을 거두었고 이에 알폰소 13세가 퇴위하여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스페인은 제2공화국 체제가 된다. 이후 1936년 2월 총선 결과 공화파내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두면서 토지 개혁등 개혁정책을 시행하자 자본가.카톨릭 교회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마침내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 주둔하고 있던 프란시스꼬 프랑꼬 장군이 스페인 제2공화국의 공화파에 쿠데타를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다.
공화파는 쿠데타군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이질적인 집단의 혼합체로서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전투력을 보유하지 않았다.
스페인 공화국 정부는 1939년 3월 28일을 기점으로 마드리드, 발렌시아가 점령당하고 바르셀로나까지 쿠데타군의 무저항 입성되자 4월1일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내전으로 인해 스페인은 전 지역이 황폐화되었다. 이후 스페인의 총통이 된 프란시스꼬 프랑꼬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일인독재정치를 계속하였으며 조직적인 숙청행위가 행해졌다.
1975년에 부르봉 왕조가 복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프란시스꼬 프랑꼬(Francisco Franco, 1892년~1975년) : 스페인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스페인 총통(국가원수)을 역임했으며 독재자이다.
* 부르봉(Bourbon)왕가 : 1589년부터 프랑스 등 유럽 일부 국가를 통치했고 일부는 현재도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왕조. 스페인에서는 1701년부터 통치하고 있었으며 스페인의 공화정으로 인하여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망명하였다(알폰스 13세). 1975년 알폰스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 1세로 스페인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루거우차오 사건은 1937년 7월 7일에 베이징 서남쪽 방향 [1]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벌어진 중일간의 교전사건으로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7.7사변으로 통칭한다.
괴뢰 만주국을 수립하고 화북 지역을 장악한 사실상의 점령군인 일본군이 베이징 서남쪽 교외의 돌다리인 [1]루거우차오(노구교)를 사이에 두고 중국 [3]국민혁명군과 긴장 속에 대치하던 때였다. 로거우차오의 동쪽은 명나라 말기의 성곽도시인 완핑성이 위치하고 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서쪽인 [2]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예고 없이 야간 실탄훈련을 실시했다.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훈련을 끝내고 부대로 복귀한 일본군은 병사 한 명이 행발불명된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여 상급부대에 그 사실을 보고한 뒤 중국군측에 직접 수색 및 진상 조사를 벌이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중국군은 루거우차오는 중국영토이며 일본군이 성내에 들어와 조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7월 8일 오전 2시에 일본은 완핑성내 조사를 실시하게 해 달라고 재차 요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군사력을 동원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중국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완핑성 인근을 수색하였고, 일본군 중대 전원도 실종된 병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실종된 병사는 20분뒤에 무사히 복귀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문제의 병사가 귀대했음을 밝히고 행방불명의 상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으므로 쌍방 합동으로 조사하는 제의를 하면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협상이 진쟁되던 중에 7월 8일 새벽 4시 50분경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완핑성 내부의 주요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 이에 중국군도 격렬한 저항에 나섰지만 결국 루거우차우는 빼았겼다. 일본군의 도발과 교전이 사흘간 계속 이어졌다. 7월 11일 전투가 중지된 상태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교섭에서 일본군은 세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베이징 내의 모든 반일단체를 일소하고 반일활동을 중지하며 국민당은 모든 사건의 책임을 지며 중국군 고위 장교들은 반드시 사과하라는 일본군의 조건으로 사태는 마무리되는 듯 했다.
중국은 일본이 군사적 침략이 계속되는 한 부국강병이 근본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다. 중국의 [4]장제스는 내전을 종식하고 국민당군에 공산당의 홍군까지 편입하여 일본군과 전면전 준비에 착수했다. 일본은 루거우차오 사건이 '중국의 계획적인 무력공격'이라고 규정하고 군대를 증파했다.
협상은 결렬되고 일본군은 7월 28일에 베이징과 텐진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8년간의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1] 루거우차오(盧溝橋) : 한자음 노구교. 중국 베이징시의 서남쪽을 흐르는 영정강(永定河)위에 놓인 돌로 만들어진 아치 모양의 다리. 전체길이 약 270m이고 11개의 아치로 구성되어있다. 금나라때인 1192년에 완성하였는데 난간에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을 한 사자 조각상 501개가 설치되어 있다.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에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석조 다리'라고 서술한 것에 기인하여 서양에서는 '마르코폴로다리'라고도 불린다
[2] 펑타이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의 6개구중 하나. 로거우차오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명나라 말기의 성곽도시인 완핑성(宛平城)이 위치하고 있다
[3] 국민혁명군 : 북벌에 의해 중국을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한 군대로서 1925년에 중국 국민당에 의해 창설되었다.
[4] 장제스(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중일 전쟁은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중국)과 일본의 전쟁이다
중일 전쟁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인 [1]난징을 점령한 일본이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화민국군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중국인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약 30만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몇몇 중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학살했으며, 어린이는 물론 늙은 노인까지 잔인하게 강간한 뒤 잔인하게 살해했다."라고 전해진다.
[1]난징 대학살의 책임자인 다니 히사오와 100인 목베기, 300인 목베기 경연대회를 자행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노다 쓰요시, 다나카 군키치는 [2]극동군사군사재판은 A급 전범만 다루기 때문에 B, C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현지 재판을 받기로 하여 1947년 9월 2일에 [1]난징의 중국 국민당 정권으로 신병이 인도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48년 1월 28일에 난징의 [3]우화대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난징 대학살 기념관을 1985년 설립하여 매년 12월 13일에 추모식을 가지며, 일본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난징대학살은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1] 난징(Nanjing) : 중화민국(대만, 지도자 쑨원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의 명목상 수도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쑤성의 성도
[2] 극동국제군사재판(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IMTFE) : 포츠담 선언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일본군의 A급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국제적으로 행한 심판한 재판
[3] 우화대(雨花台, 위화타이) : 난징시에 있고 중국 국민당 통치 시절엔 공산혁명가 수십만이 이곳에서 처형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