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건기간 : 2003년 2월 18일, 조회수 : 291, 등록일 : 2020-10-10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우울증 증세를 보인 김대한(당시 56세)은 뇌졸증까지 겹치면서 이를 비관하여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 정차하고 있던 1079열차에서 방화를 저질러 일어난 대형 화재 참사 사건이다.
2003년 1월 18일 오전 9시 5분경 대구 지하철 1089호 열차는 중앙로역에 도착하기 위하여 서행하고 있었다.
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여 도착한 순간 이 열차에 탑승하고 있었던 김대한은 플라스틱 석유통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자신의 바지에 불이 붙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옷을 태우던 불을 끄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바닥에 던져진 석유통에 의하여 순식간에 열차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 불에서 나온 검은 연기, 유독성 가스가 승강장과 지하 1~2층 대합실에 급속히 확산됐고 승객들이 주출입구쪽의 계단을 통해 대피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중앙로역 맞은편 승강장으로 1080열차가 진입 중이었다. 1080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여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렸으며 승강장에 있던 연기가 열차 안으로 들어오자 기관사가 즉시 출입문을 닫았다. 그리고 1079호 열차의 불이 1080호 열차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때마침 화재로 전원이 끊어지며 전동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기관사는 기관실 바로 옆 1호 칸의 출입문 몇 개만 연 뒤 현장을 이탈했다.
일부 차량은 문이 열리지 않아 승객들은 열차안에 갇혀있었다. 결국 1080호 열차 내부는 연기로 가득차게 되었으며 대피하지 못한 승객들은 유독가스로 인한 연기로 질식되면서 사망했다.
신고를 받고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하였으나 화염과 유독가스로 현장접근이 힘들어 구조가 지연되었다.
오후 1시 38분경에 화재가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구조된 승객들은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079열차의 승객 거의 대부분은 정차중으로 문이 열려 있었고 기관사가 승객들에게 대피를 지시하여 대피하여 비교적 큰 피해가 나지 않은 반면, 반대방향으로 운행 중이던 1080열차는 화재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역에 진입하여 정차함에 따라 화재가 확산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1079열차에는 방화범을 포함한 250여 명이, 1080열차에는 180여 명의 승객이 탑승했었다.
이사고로 192명 사망(1079호열차:50명, 1080열차:142명), 부상자 151명이 발생하는 대형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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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 28일 이스라엘 [2]아리엘 샤론 총리는 동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교 성지인 [3]알 아크사 모스크를 군과 경찰등의 호위병을 대동하여 방문했다. 이에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에 이스라엘측은 즉각적인 사격으로 대응하여 팔레스타인인 13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더욱이 2000년 9월 30일 아버지와 외출하였던 12살 어린이인 무함마드 라미 알 두라 소년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희생된 사건이 발생했다. 시위 군중과 이스라엘군 사이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TV를 통하여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이 사건으로 팔레스타인과 전 세계는 이스라엘에 분노하였다.
이로 인하여 [8]오슬로 평화협정이 파기됐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봉기한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를 막기위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다시 점령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이 일어났다. 팔레스타인 경찰까지 민중봉기에 참여하여 준전쟁 상태로 발전하면서 요르단 강 [7]서안지구, [9]가자지구의 주민과 팔레스타인 난민, 이스라엘에 사는 아랍인까지 합세하여 대규모로 파급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전선, [5]하마스, 이슬람 [6]지하드 등의 무장단체들도 전부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자살폭탄테러와 요인암살을 하면서 민족봉기를 자극했다.
팔레스타인 대통령 선거는 2005년 1월 9일에 치러졌고, [4]마흐무드 압바스(Abu Mazen)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5년 2월 8일 [2]아리엘 샤론과 [4]마흐무드 압바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휴전을 선언했다. 서로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기로 하였으며 이스라엘측은 정치범을 제외한 팔레스타인 포로를 석방하며 [7]서안지구에서 철수하는데 동의했다. 팔레스타인측도 봉기와 게릴라전을 멈추기로 합의했다. [5]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이슬람 [6]지하드도 권고를 받아들이면서 2차 인티파다는 끝난다.
2차 인티파다로 팔레스타인은 3,334명이 사망하고 5만 3천명이 부상당했다. 이스라엘 역시 피해가 만만치 않아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1,074명이 사망했다.
[1]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년~2004년)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임기 1994년 7월 5일~ 2004년 11월 11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제3대 정부수반(임기 1969년 2월 4일~2004년 10월 29일) [2]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1928년~2014년) : 이스라엘 제15대 총리(임기 2001년 3월 7일~2006년 4월 14일) [3] 알 아크사 모스크(Al-Aqsa Mosque) : 예루살렘의 성전산 남쪽에 위치한 은색 둥근 지붕의 이슬람교 사원. 이슬람교 3대 성지의 하나 [4]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 1935년~) : 2003년에는 팔레스타인 수상에 임명되었지만 사직. 2004년 아라파트 사망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반. 2005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7년 동안 장기집권하고 있다 [5]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6] 지하드(jihad) : '성전'이라는 뜻으로, 이슬람교의 신앙을 전파하거나 방어하기 위하여 벌이는 이교도와의 투쟁을 이르는 말 [7]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8]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13일에 이스라엘과 분쟁을 계속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분쟁을 종식키로 한 평화협정 [9]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이 9.11 테러의 주범인 [2]알 카에다와 [1]오사마 빈 라덴을 지원하는 [3]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1세기 최초의 전쟁이자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이다
미국의 목표는 [2]알카에다를 해체하고 [3]탈레반 정권을 축출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전쟁초반 미국의 대대적인 공세에 탈레반군은 순식간에 격멸당했다. 2001년 12월 14일에 미국은 승리 선언하였고 탈레반 정권은 무너졌다. 탈레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고 일부 잔존세력이 남부 산악지대로 은신해 들어가서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이후 미국이 [5]이라크 전쟁에 전념하느라 아프카니스탄에 관심이 줄어든 틈을 타 탈레반은 전력을 재건하여 파키스탄 접경지대등을 기반으로 세력을 빠르게 키우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결국 알 카에다와 탈레반 잔병들이 파키스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개전 당시의 병사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장교단도 물갈이가 됐으며 전쟁 초기에 출생하지도 않았던 세대가 미군 입대 가능 연령이 되면서 "한 세대의 전쟁(war of a generation)"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21년 5월부터 미군이 아프카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흐름이 탈레반으로 넘어갔다.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도시들은 탈레반의 수중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8월 12일, 아프가니스탄의 제2, 3의 도시 헤라트와 칸다하르가 탈레반에게 넘어갔다.
국 2021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탈레반에게 항복했다. 탈레반은 카불에 무혈입성하면서 재집권했다.
이 전쟁으로 총사망자 23만명, 난민 500만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1]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 1957년~2011년) :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났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적 성향의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였으며 2001년 미국의 9.11 테러의 배후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11년 5월 2일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미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2] 알카에다(Al-Qaeda) :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이슬람 수니파의 국제 무장 세력이자 테러리즘 집단이며 반미국, 반유대를 표방한다.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으며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3] 탈레반(Taliban) : 아프가니스탄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무장단체이자 테러조직이며 1990년대 중반 활동을 시작하여 1997년에 아프카니스탄을 집권하여 통치하였으나 2001년 미국의 공격으로 축출되었다. 2021년 8월 미군의 철수로 정권을 다시 집권하였다
[4] 카불(Kabul) : 아프카니스탄의 수도
[5] 이라크 전쟁(제2차 걸프 전쟁) :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침략으로 시작되어 2011년 12월 15일 종전되었다
미국은 알 카에다의 9.11 테러 이후 엄청난 혼란에 빠져있었던 상황에서 이라크가 유엔이 금지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명분하에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수행하는 와중에 이라크를 침공하여 두 개의 전선으로 확대되면서 전투는 이기지만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90년의 걸프 전쟁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났다고 해서 '제 2차 걸프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침략 2주만인 4월 9일에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는 함락되었고 후세인 정부는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은 수도인 바그다드 함락 이후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가 그해 12월에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되어 2006년 11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2006년 12월에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바그다드가 함락되면서 전쟁 종전 선언을 했지만 뒷수습하기엔 병력이 한없이 모자랐고 현지의 현황을 무시한 전후 처리로 인해 저항세력이 생겼다. 게다가 전쟁의 혼란으로 국경이 사실상 사라진 틈을 타고 각종 무장세력이 이라크를 기점으로 반미저항뿐 아니라 수니파와 시아파가 충돌하는 사태까지 번지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이들 무장세력과도 싸워야만 했고, 이로인하여 매년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양 전선을 유지하기에 힘에 부친 미국은 2009년 7월부터 미국 병력이 이라크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철수를 준비하여 2010년 8월 20일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2011년 12월 15일 미국에서 공식으로 종전을 선언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18일 미국 병력은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미국이 철수하자 이라크는 계속되는 갈등과 테러를 끝내지 못하며 내전으로 2017까지 휩싸이게 된다.
* 알카에다(Al-Qaeda) :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이슬람 수니파의 국제 무장 세력이자 테러리즘 집단이며 반미국, 반유대를 표방한다.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으며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년~2006년) : 이라크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이라크의 정치인. 제5대 대통령(재임,1979년~2003년)
조지아는 1992년 [1]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 대통령이 사임한 후 [2]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의회 의장이 되었다.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1995년에 조지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세바르드나제 정권은 만연한 부패와 족벌주의로 조지아의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조지아의 경제는 주위 타국에 비해 매우 궁핍하였고, 러시아 지원을 받는 사실상의 분리독립상태인 [3] 압하지야, [4] 남오세티야도 조지아 정부의 영향이 미치지 못했다. 또한 [5] 아자리야 자치공화국도 조지아에서 분리를 외치는 상황이었다.
2003년 11월 2일에 치러진 의회선거의 부정조작으로 야당들은 세바르드나제의 퇴진과 재선거를 요구했으며 국민들에게는 비폭력과 불복종을 외쳤다. 11월 중순에 대규모 시위가 [6] 트빌리시 중심가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조지아 주요도시로 확산되었다.
세바르다나제 정권도 지지자를 모아 친정부 시위를 하였으나 야당 및 국민들의 항의시위는 11월 22일에 정점에 달했다. 이날 [7] 미헤일 사카슈빌리의 야당 지지자들은 손에 장미를 들고 의회 건물을 점거하였다. 세바르드나제는 의회개회연설을 하기 위해 의회에 진입을 하려 했으나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장미혁명'이라 불린다.
다음날인 11월 23일 [2] 세바르드나제는 대통령 사임을 발표하였고, 수많은 시위자들은 환호하였다. 그리고 최고재판소는 이전 의회선거를 무효로 선언했다.
2004년 1월 4일 대통령 선거에서 [7] 사카슈빌리가 압승하여 30대의 젊은 나이로 조지아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004년 3월 28일에 의회 재선거가 실시되어 사카슈빌리를 지지하는 국민동맹-민주당이 대승했다.
장미혁명은 2004년 11월의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과 2005년 키르키니스탄의 튤립혁명에 영향을 미쳤다.
조지아는 장미혁명 이후에도 정치불안이 이어졌고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얍하지아에 주둔하는 등,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도 험악해졌다. 사카슈빌리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베이징 올림픽 개막 하루전인 2008년 8월 7일에 자치주의 독립을 원하는 남오세티야를 침공하였다(남오세티야 전쟁).
결과는 러시아군의 참전을 예상 못했던 조지아의 참패였으며 [4] 남오세티야와 [3] 압하지야는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다.
[1]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Zviad Gamsakhurdia, 1939년~1993년) : 조지아의 제1대 대통령(임기 : 1991년~1992년)
[2]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1928년~2014년) : 조지아의 제2대 대통령(임기:1995년~2003년). 1985년까지 1990년까지 소련의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1995년부터 2003년 장미 혁명으로 물러날 때까지 조지아의 대통령을 지냈다
[3] 압하지야(Abkhazia) : 흑해의 남쪽 연안과 캅카스의 남서쪽에 위치한 미승인 국가로 압하지야인이 주로 거주한다. 수도는 수후미(Sukhumi)이며 조지아의 영토내에 있는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4] 남오세티야(South Ossetia) 또는 츠힌발리(Tskhinvali) : 조지아에 위치한 사실상의 독립상태로 통치되는 지역이자 미승인 국가로 수도는 츠힌발리이다. 정식 국호는 남오세티야 공화국-알라니야국(Republic of South Ossetia–The State of Alania)
[5] 아자리아(Azaria) : 조지아 남서부의 지역에 위치하며 소수민족들의 자치 공화국이다. 수도는 바투미(Batumi)
[6] 트빌리시(Tbilisi) : 조지아의 수도
[7]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1967~현존) : 조지아의 제3대 대통령(임기 : 2004년~2013년, 2008년 재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정치가(우크라이나 국적 부여받자 이중 국적을 제한하는 조지아법에 의해 조지아국적 박탈당함)